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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안에서 영광스러운 졸업을 축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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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웨슬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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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2-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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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파키스탄 자원봉사대 귀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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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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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2-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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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졸업식 - 김미선, 김감사, 우현희 자매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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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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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2-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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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군선교사 서진우 형제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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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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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2-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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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내기 O.T '대학생활 한걸음 앞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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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금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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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2-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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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담회]독일 홍갈렙 선교사님과의 간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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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금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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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2-02 |
갈수록 서구화되어가는 캠퍼스 지성인들의 내면을 이해할 수 있는 은혜로운 시간이었습니다. 홍갈렙 선교사님의 인생 소감과 강의 내용을 올립니다. 독일에서 본 서구지성의 지구중심설적 경향 요절 막 8: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안녕하십니까? 저는 독일 하이델베르그(Heidelberg)에서 온 홍갈렙 선교사입니다. 하이델베르그(Heidelberg)는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 있는 독일 중남부의 도시입니다. 이곳에 와서 이토록 젊고 아름다운 여러분을 뵙게 되어서 매우 기쁩니다. 저는 오늘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말씀에 의지하여 선교생활을 통해 배운 바를 간증코자 합니다. 1. 독일 학생들의 성경선생으로 저는 1949년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제가 성장하던 50년대 한국 사회는 6.25 동란을 겪은 후였습니다. 전쟁은 큰 상처를 남겼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전쟁으로 가족과 재산을 잃는 슬픔을 겪었습니다. 또한 끼니를 제대로 잇지 못하는 가난을 겪었습니다. 이러한 환경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의 의지와 성실한 노력보다는 그러한 불행한 환경이 그들의 삶을 결정짓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실제로 인간조건을 쉽게 개선할 수 없어 사람들의 생각은 지극히 운명적이었습니다. 이런 시대였지만 저는 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비교적 행복하게 자랐습니다. 그러나 초등학교 4학년 때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집은 가난해졌습니다. 60년대로 들어서며 오랜 자유당 독재가 4.19 학생혁명을 통해 무너지고 그리고 그 혁명의 열기가 채 가시기도 전에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났습니다. 저는 두 새어머니들을 겪으며 갈등과 불화 가운데 반항적인 십대시절을 보냈습니다. 중학교 졸업을 앞두고는 납입금을 못내 제적당했습니다. 그 후 저는 인쇄소, 공장, 신문팔이, 간판 그림제작 등의 직업을 전전해야 했었습니다. 1969년 대학을 가고자 했으나 불합격하여 재수하던 중 군 소집 영장을 받았습니다. 영장을 앞에 놓고 제 장래를 생각해보았습니다. 장래를 위해 아무 것도 준비해 놓은 것이 없어 보였습니다. 군대에 갔다오게 되면 사회의 낙오자가 될 것 같은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만 군대를 기피했습니다. 그런데 기피자가 되고 보니 더 큰 두려움이 생겨 늘 지나 다니던 집 앞의 경찰서를 지나치는 것조차 불안하였습니다. 어둡게 보이던 저의 장래가 갑자기 아주 깜깜하게 보였습니다. 그 때 마침 초등학교 교사 지원생들에게 졸업 후 장기근무를 조건으로 병역면제 특혜를 주는 제도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 특혜를 받고자 교대에 입학했습니다. 비록 입학을 하여 대학생활을 시작했으나 교사직에 뜻이 없었기에 제 생활은 방황과 방탕으로 소진되었습니다. 1972년 초 졸업을 앞두고 “과연 장차 무엇이 되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존경 받을만한 인격, 사회적 지위 그리고 행복한 가정생활 등 소시민적인 행복을 원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것들이 삶의 진정한 목표가 될 수 없음이 자명해 보였습니다. 때문에 그러한 것들을 인생의 목표로 삼는 것은 옳지 않게 생각되었고 따라서 그것을 위해 살고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 더 가치 있는 그 무엇이 눈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인생은 본질적으로 무의미해 보였습니다. 도서관에 가서 문학작품이나 인생론을 펼쳐보았지만 결국 유명한 위인들의 사상도 개연성 있는 인간적 생각에 불과해 보였습니다. 저는 이렇게 제 삶의 절대적인 의미를 찾을 수 없어 우울한 나날을 보냈습니다. 어두운 방에서 한숨을 토하며 고민하면서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현재 쾰른(Köln)에 있는 동생 홍다윗 선교사가 제게 말했습니다. "형, 거기 가보니까 다 형처럼 젊은 사람들인데 그 사람들은 그런 인생 문제들을 이미 극복하고 살아"하였습니다. 그래서 즉시 "거기"로 가보니 "거기"는 바로 UBF 종로 센타였습니다. 젊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는데 처음 대해보는 밝고 신령한 분위기였습니다. 그때 홍다윗 선교사의 성경선생이던 분이 저에게 친절하게 말을 걸며 성경공부를 해보라고 권면했는데 그 분을 보니 얼굴이 천사처럼 빛났습니다. 그분은 양안나 사모님이십니다. 성경공부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주일 예배에도 참석하여 이사무엘(Saumel Lee) 선교사님의 메시지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 해 여름 수양회를 앞두고 이사무엘(Samuel Lee) 선교사님의 메시지를 듣던 중 누가복음 2장 말씀이 제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예수님이 저 자신의 구주라는 것을 갑자기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의심이 사라져 모든 것들을 믿을 수 있었습니다. 세상이 달라 보였습니다. 제 심령에는 처음 경험하는 평안과 확신이 강물처럼 흘렀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아무 것도 부러운 것이 없었습니다. 성경공부를 계속하며 구속사 안에서 일어난 예언과 예언의 성취를 대하며 저는 마치 우주의 모든 비밀이라도 깨달은 것 같은 기쁨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저는 사실상 막 거듭났을 뿐 영적인 세계에 대해서는 눈먼 강아지 같았습니다. 이러한 저를 종로의 최사무엘 목자님께서 아버지처럼 그리고 당시 종로 3부의 책임목자이시던 지금의 연희 센터 김사라 사모님께서 어머니처럼 감당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매주 이사무엘(Samuel Lee) 선교사님의 능력 있는 메시지를 들으며 영적인 세계에 조금씩 눈을 떠가게 되었습니다. 그 후 저는 평신도 목자의 삶을 시작했습니다. 직장생활하며 양을 섬기는 것은 결코 쉽지않았습니다. 시간에 쫓기고 피곤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실로 하나님을 섬기는 최상의 삶이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수시로 찾아오던 시험들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두가지 큰 문제가 남아있었습니다. 그것은 믿음의 가정을 이루는 것과 세계 선교에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부모님이 이사람 저 사람을 물색하며 선 보라고 재촉했으나 믿음의 가정을 이루고자 했기 때문에 그러한 것을 거절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센터에서 상대자를 소개 받고 믿음으로 결혼하려고 하니 결단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집에 가서 기도해보겠습니다"하고 아예 센터를 안 나갔습니다. 이런 식으로 여러 번 믿음의 결혼을 거부했습니다. 이를 통해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의 섭리에 맡기지 않는 불신, 하나님 역사에 대한 무관심, 이기심 등이 더 이상 부인할 수 없게 드러났습니다. 또한 복음서를 공부하며 세계선교를 섬겨야 한다는 깨달음과 양심의 소리가 있었으나 저 자신만은 도저히 선교사로 갈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78년 초 로마서 성경학교가 있었는데, 강사로 까지 세움 받고 말씀을 섬겼습니다. 마지막 날 김사라 사모님께서 광고하시던 중에 "금년 내에 선교사로 보냄 받을 것을 믿는 사람은 일어서 보십시오"하셨습니다. 앉아있던 사람들은 받은바 은혜로 선교 비전이 충만하여졌던 터라 거의 모두가 일어섰습니다. 양들까지 일어섰습니다. "앞으로 나오세요"했습니다. 그러자 거의 다 나가고 그야말로 불과 몇 사람만이 은혜롭지 않은 표정을 하고 계속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그리고 제가 그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제 인생에 있어서 상당히 곤혹스러운 순간들 중에 하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저의 두 가지 문제를 일격에 도와주셨습니다. 78년 봄 연세대 개척 동역을 위해 종로 3부의 동역자들과 함께 연희센터로 파송되었습니다. 개척 분위기 속에서 새롭게 시작한 마가복음 공부를 통해 제 삶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믿음을 새롭게 덧입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언제 어느 누구와도 가정을 이루겠다“고 결단했습니다. 또한 성경공부를 하며 "내가 또 너로 이방의 빛을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이사야 49:6b) 말씀을 영접하고 자신의 삶을 세계선교에 드리고자 결단했습니다. 얼마 뒤인 5월 첫 주 어느 날, 전요한 목자님께서 독일에서 온 한 자매 선교사를 만나보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러고 제게 "독일에 가서 장차 하이델베르그(Heidelberg)를 개척해 보라"고 고무하셨습니다. 부지런히 종로 센터에 가보니 한 선교사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첫 눈에 ’와우! 보름달처럼 아름답구나!’ 하고 감탄하였습니다. 그리고 꼭 논리적인 것은 아니지만 ’저렇게 아름다우니까 분명히 믿음도 아주 훌륭할 것이다’라고 좋을 대로 생각했습니다. 둘이 같이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 때까지 저는 한 번도 프로포즈(propose)를 해본 일이 없어서 어떻게 제 의사를 전달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딴 이야기를 많이 하다가 창경궁에 가서 잔디밭에 앉은 후 "같이 기도합시다" 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먼저 "하나님, 제가 바로 이 사라(Sarah) 선교사와 믿음의 가정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믿습니다"하고 듣는 사람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기도했습니다. 그런 다음 사라(Sarah) 선교사가 기도하는 것을 긴장된 마음으로 귀 기울여 들어보았습니다. 표현은 좀 달랐지만 자신도 저하고 결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믿는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결혼했습니다. 그 후 저는 연희 센터에서 인턴 목자 훈련을 받고 79년 초 독일 선교사로 나갔습니다. 저는 선교지 쾰른(Köln)에 와서 열심히 섬겼습니다. 그러다가 차츰 제 이상에 맞지 않는 선교현실로 인해 마음이 차츰 하나님 역사에서 멀어져 갔습니다. 저는 영적으로 점점 곤고해졌으나 어느 누구의 도움도 받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는 하나님의 훈련이 필요하였습니다. 한번은 피를 토하게 되었는데 „이상하다, 이게 웬일일까?“하면서도 의사를 찾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계속 피를 토했습니다. 나중에 등에 떠밀려 전문의를 찾아가보니 문제가 심각했습니다. 그는 제가 이미 결핵 말기라 잘 해야 4개월 정도 더 살 수 있다고 진단하였습니다. 약을 먹고 주사를 맞곤 하였으나 계속 각혈을 했습니다. 죽음의 선고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너무도 끔찍한 일이었지만 엄연한 현실이 되었습니다. 곧 죽게 된다고 했을 때 그리고 그러한 운명을 회피할 수 없다고 생각했을 때 제 내면은 절망과 아픔 그리고 어두움이 가득찼습니다. 80년 독일의 여름 수양회 섬기러 오셨던 이사무엘(Samuel Lee)선교사님께서 심방오셨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읽으라"고 권면해 주셨습니다. 처음에는 ’성경이야 매일 보는 건데 새삼스럽게 그런 말씀하시나’ 하고 생각했으나 ’최소한 이것만이라도 순종해야겠다’ 는 생각이 들어 창세기부터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을 읽는 가운데 창세기 12장 2절과 신명기 6장 5절을 비롯하여 여러 말씀이 제 심령에 임했습니다. 말씀에 힘입어 저는 그 죽음의 그늘 가운데 될 대로 되라고 체념하던 상태를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선교사로 와서 아무 일도 못하고 병으로 죽게 된 저를 불쌍히 여기사 캠퍼스 목자로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하고 간구했습니다. 4개월이 지났습니다. 저는 죽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선교 동역자들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개척자로서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1982월 8월 드디어 기도해 오던 개척지 하이델베르그(Heidelberg)에 도착해 사라(Sarah) 선교사와 첫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때 이미 두 아기가 태어나 자라고 있었고, 사라(Sarah) 선교사는 간호사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제 마음 가운데 개척에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저는 두 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 준 후 캠퍼스로 나가 학생들을 초청하였습니다. 그리고 주일이 되면 말씀과 음식을 준비해놓고 학생들을 기다렸습니다. 양 없이 사라(Sarah)선교사와 둘이서만 예배드릴 때가 대부분이었으나 시간이 가면 제자양성은 해결될 문제로 보았습니다. 학생들을 심방하고 그들에게 성경공부를 하자고 초청하면서 대화가 이루어졌습니다. 여러 학생들이 ’과연 하나님이 존재하는가?’ 되물으며 그들의 논리를 폈습니다. 대부분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여지를 남겨두지 않은 무신론적인 견해였습니다. 캠퍼스 심방을 계속했습니다. 초청 받은 학생들이 성경공부 하러 왔습니다. 하지만 창세기 공부는 1강에서 장애에 부딪쳤습니다. 대개의 학생들이 빅뱅(big bang)에서부터 시간과 공간이 시작되었고, 생명은 물질에서 시작되었고, 그리고 사람은 원시적인 생명체에서 진화되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새로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들이 ’빅뱅(big bang)과 진화는 과학적인 사실이다’라 믿고있는 그 확고함,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하고 있는 풍부한 과학적인 지식으로 인해 놀랐습니다. 그들은 태초의 빅뱅(big bang) 이후 ’우주상’, ’임계질량’, ’지수함수적인 가속팽창’, ’리맨(Rieman)공간’등을 언급했습니다. 그리고 그 후 우주의 생성과 물질의 합성, 생명의 탄생, 진화 등을 설명했습니다. 저는 비록 그들의 근본적인 전제가 잘못되어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들이 제시하는 하나하나의 과학적인 자료와 체계는 반박할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저는 자연과학의 소양이 거의 없어 그들의 논리에 대응하기는커녕 그것을 이해 하는 것 조차 벅찼습니다. 그 벽 앞에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맞선 저의 믿음은 유치하게 느껴졌습니다. 저의 선교생활은 계속되었습니다. 메시지를 독일어로 준비하다 보니 간혹 밤을 세워야 하곤 했었습니다. 그러나 제 메시지를 듣는 사람은 주로 사라선교사 혼자였습니다. 그나마 사라 선교사가 피곤하여 가끔 졸면 제 메시지를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렇게 1년이 지나고 2년이 되어갔습니다. 그 때까지 본국에선 저를 위해 줄기차게 기도해주며 강의안과 편지도 꾸준히 보내왔습니다. 그래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몇몇 양들이 1:1을 하고 있었지만 똑똑하고 강한 그들이 제자가 된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힘들었습니다. 매번 수양회 때마다 한 명의 양도 없이 참석해야 했습니다. 또 초대하며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받는 계속되는 거절로 인해 제 심령은 날로 위축되었습니다. 가정을 부양해야 했는데 저의 장래도 막막해 보였습니다. 이렇게 1985년 여름이 되었을 때 저는 제 삶이 한계에 부딪혀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2. ’자기’를 중심한 지구중심설에서 코페르니쿠스(Copernicus)적 전환 저는 이렇게 자신의 성실과 능력으로는 더 이상 극복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의 도우심이 왔습니다. 마가복음을 공부하던 중 예수님의 말씀이 제 심령에 임했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막 8:34). 저는 이 말씀 앞에서 처음엔 ’너무 당연하지. 내가 지금 이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이 고생을 하는 거 아냐!’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계속되는 구원과 멸망에 대한 말씀을 들으며 자기 부인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35). ’생명을 구원코자 하면 잃고, 잃으면 얻는다니... 이는 얼마나 놀라운 생의 파라독스인가! 그러나 어떻게 이 말씀의 권위를 거역할 수 있으며 그 진실성을 의심할 수 있단 말인가?’ 때문에 예수님의 이 말씀은 동시적으로 인간의 모든 사상과 경험을 초월한, 인간의 실존적 상황과 시간과 역사의 저편, 에서 오는 것으로 확신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저의 현재의 삶과 장차의 삶, 영생을 규정짓는, 그래서 스스로 도저히 거역할 수 없는 생의 원칙임에 틀림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 어느 누구도 타고난 본능으로는 이렇게 살지 않았고, 살 수도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때문에 아무도 이렇게 가르칠 수 없었습니다. 오직 인간의 삶의 처음과 끝을 한눈에 보시며 또한 그 본질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께서만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날 마치 제 옆에 서서 제게 그 큰 손을 내미시며, "얘, 갈렙(Kaleb)아, 나와 복음을 위해 네 생명을 내 놔야지"하고 말씀하시는 듯 했습니다. ’내 생명을 요구하다니...’ 어느 누구도 제 생명을 요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 생명의 주인이 되시기 때문에 제 생명을 그렇게 요구하시는 것이 또한 명백했습니다. 저는 과연 자신이 지금까지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가 되돌아보았습니다. 저는 스스로 주와 복음을 위해 헌신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무엇인가를 얻고자만 했지 결코 나 자신을 잃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아침에 눈만 뜨면 “오늘 어떻게 양을 얻고 그래서 한 무리를 이룰까?“ 생각하였습니다. 선교사역을 통해 저는 결국 자신의 만족과 자신의 천하를 얻고자 했던 것이었습니다. 저는 계산하며 헌신했고, 헌신하고는 손해의식에 시달렸습니다. 그리고는 결국 힘쓰고 애써 자신을 보존코자 함으로 멸망의 길로 가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자기“는 제게 있어서 맹목적인 생존의지요 또한 스스로의 정체성을 자아실현을 통해 완성코자 하는, 이기적인 자아였습니다. 이 자아의 죄성으로 인한 절망이 저의 심령을 채웠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다는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계속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막 8:36). 예수님께서 제 목숨이 바로 제가 얻고자 했던 제 천하보다 더 귀한 것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제 생명을 내놓으라고 하실 때 예수님께서는 실로 제게 참 생명, 곧 영생을 주시기 원하셨습니다. 저는 밤늦도록 한숨을 쉬며 신음하였습니다. 저는 이날 밤 절망 가운데서 제게 영생을 약속하시며 영생의 길을 가도록 권면하시는 예수님의 뜻을 새로이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날 밤 예수님께서는 제 삶의 방향을 180도 전환시켜 주셨습니다. 다음날 아침 눈을 떴을 때는 제 심령에 말할 수 없는 평안과 기쁨이 넘쳤습니다. 그날 아침도 여느 때처럼 아이들을 유치원에 데려다 주고 캠퍼스로 나갔습니다. 제 심령엔 더 이상 여느 때와 같은 두려움과 피해의식이 없었습니다. 저는 제게 물을 수 있었습니다. “자 오늘은 가서 시간을 잃어버리고 자기를 잃어버리자! 또 무엇을 잃어버릴까?“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씀을 듣게 된 이 사건은 그때까지 옳다고 믿고 철저하게 견지해온 스스로의 생각에 대해 되새겨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여러면에서 중요했지만 특히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바른 관계성을 갖기 위해 불가결했습니다. 그때까지 저는 스스로 생각에 대해 깊은 신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제 생각은 제 판단의 근거였습니다. 저는 성경의 말씀을 듣고 바로 영접하기 보다 습관적으로 그 반대되는 입장을 취하여 불신의 사상에 귀를 기울이고 스스로가 중간자의 입장에서 판단하고 검증이 되면 그것을 진리로 인정하곤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저는 하나님과 사탄의 심판장이 된 셈이었습니다. 이렇게 제 생각은 이러한 사고의 위계질서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여 모든 것을 판단하고 규정 지웠습니다. 태양계에 비유한다면 태양의 주위를 돌아야 할 것은 바로 지구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의식 구조에서는 제 스스로의 생각이 온 우주의 중심에 자리잡고 태양과 모든 행성이 저의 지구 주위를 돌게 했던 것이었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제가 인정하던 인정하지 않던지 간에 제 판단과 관계없이 살아계시며, 하나님의 말씀은 제가 인정하던 인정하지 않던 진리로써 이미 결정되어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절대적이고 객관적 세계에 속한 것입니다. 이에 비해 제 생각은 상대적이며 주관적인 것에 불과했습니다. 또한 그러한 주관적인 생각에 기초한 제 이해와 판단은 가장 좋게 봐주어도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저의 이해일 뿐 그 자체가 물론 진리는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르라“고 하실 때 제 판단의 방향은 분명해졌습니다. 이는 제 자신의 상식, 경험, 사고, 인생관 등을 기초한 판단보다 예수님의 말씀을 기초로 하라는 뜻이었습니다. 다시 비유적으로 말한다면 태양과 행성을 제 주위로 돌게 하는 대신 제가 그 태양을 중심으로 하여 돌아야 하듯이 제 자신의 생각을 상대적인 것으로 취급해야 했습니다. 이처럼 이 사건은 제게 있어 하나의 코페르니쿠스(Copernicus)적 전환이 되었습니다. 이 후로 저는 남의 입장, 특히 성서적 입장에서 보는 것을 배워 그때까지 늘 신뢰하고 모든 것들의 기초로 하던 절대적이던 자신의 생각을 상대적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 다시 부연하여 이야기한다면 “하나님은 항상 옳다“, “내 생각은 틀릴 수 있다“고 전제하므로서 하나님 말씀과 다른 사람의 말귀를 다소 알아듣게 됐다는 뜻입니다. 안에서 출발하여 밖을 향하던 사고의 방향이 밖에서 안으로 향하도록 바뀌게 된 이 새질서는 저에게 고집스런 제 생각으로부터 자유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저는 먼저 가정을 돌아보았습니다. 저는 그때까지 제 중심적으로 동역자를 생각해왔습니다.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했을 때 “나는 자격 있는 가정 교회의 머리“다라고 자처해왔습니다. 그 당시 사라선교사는 직장에서 근무하면서 아이들을 키우고 가사를 돌보며 예배와 합심 기도, 심방 등을 꾸준히 섬겼습니다. 그런데 저는 도데체 무엇을 했습니까? 제가 제 관점을 떠나 사라 선교사 편에서 제 자신을 바라볼 때 저는 그의 동역자로서 낙제감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사라선교사는 저로 인한 모든 수고를 감당하고 하나님 역사를 섬겨왔던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관점을 바꾸어 생각했을 때 ’아, 정말 사라 선교사를 마음을 다해 사랑하자!’하는 심정이 솟아났습니다. 그래서 동역자에게 "사라, 내가 만일 다시 태어난다면 그리고 또 결혼하게 된다면 나는 꼭 당신과 결혼할거야"라고 말했습니다. 제 동역자는 당시 아무 소리없이 듣고만 있다가 얼마 후 자신도 그렇게 하겠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이후 하나님께서 제게 화학기술조교가 되기 위한 직업교육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이것은 한창 지적으로 활발한 학생들과 경쟁하며 자연과학을 공부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자연과학에 대한 소양이 없는 제게 큰 도전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른바 “과학“으로 무장한 독일학생들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된 것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때까지 저는 일방적으로 창세기를 가르쳐 왔습니다. 그러나 비록 빅뱅(big bang)과 진화론이 한낱 공허한 이론에 불과하지만 그 배경에 있는 정신사적 진행과정 그리고 그러한 과학적인 내용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된 것입니다. 제 곁에 물리, 화학 등의 교과서와 서양 과학사, 서양 정신사 등의 서적들이 한 권 두 권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3. 독일의 과학기술적 사회 A. 서구 현대지성의 출발과 기초: 사람은 역사 이래로 “모든 존재와 운동이 유추될 수 있는 절대자로서 또 제일 원인(causa prima)으로서 신은 존재하는가?“, 또한 “이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으며 인식할 수 있는가?“ 물었습니다. 그것은 서구 지성사의 가장 커다란 질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롬1:20)라고 기록된 것처럼 자연계시가 있기에 창조된 만물로부터 창조주의 존재를 유추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일찍이 플라톤(Platon BC 427-347)은 보이는 현상세계로부터 ’이데아(Idea)’라는 참 실제를 유추하였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어느 물체와는 달리 시각, 청각, 촉각 등 오감에 의해 인식할 수는 없으나 진실로 존재하는 실제였습니다. 바로 그 실제로부터 사람을 포함한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파생되었고 따라서 이러한 모든 사물들은 그 이데아(Idea)의 그림자에 불과했습니다. 플라톤(Platon)은 이렇게 자연을 초월하며 존재하시면서 보이지 않는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를 철학적으로 상정한 셈이 되었습니다. 인간의 존재의미는 물론 모든 학문은 이 형이상학(metapysics) 에서부터 기인되고 따라서 형이상학은 모든 학문의 밑받침이 되는 위치를 차지했습니다. 그 후의 2500 여년 서구 사상은 이 형이상학을 축으로 진행되었기에 흔히 “서양철학은 플라톤의 이데아에 대한 주석이다“라고 말합니다. 물론 이러한 형이상학자체는 하나님의 인격이나 구원의 사역에 대한 진리를 알려줄 수는 없었으나 최소한 유신론의 기초를 제공하였습니다. 기독교가 전파된 후 유럽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존재와 그 말씀이 당연히 그러한 형이상학의 지위를 대체하였습니다. 즉 살아계신 하나님과 그 말씀이 “존재의 근원은 무엇인가?“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하는 질문의 답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국가, 교회 그리고 사람들의 일상의 삶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누구나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중심한 질서를 통해 자신의 위치와 존재의미를 찾고 자연 물질에 대한 관계도 분명히 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였고, 인간은 비록 죄인이었으나 지상에서 하나님의 사명을 받은 하나님의 대리자였으며 모든 만물은 인간이 관리할 그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계몽시대 이후로 인간은 하나님과 그의 계시를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근대의 사상가들에게는 이미 주어져 있던 것, 즉 하나님의 말씀이나 형이상학적 전제는 더 이상 지식의 기반이 되지 않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들은 최종적인 진리와 모든 지식의 기초가 될 수 있는 새로운 기반을 찾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결과는 당연하게도 하나님과 자연에 대한 인간의 인식을 바꾸고 그리고 결국 하나님을 떠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르네 데카르트(Rene Descartes 1596-1650)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데카르트(Descartes)는 이미 주어진 것, 곧 하나님과 그의 말씀은 더 이상 자명한 진리가 아니라고, 그리고 하나님마저도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고 의심해 보았습니다. 또한 눈, 코, 귀 등의 감각기관들이 전해주는 인식도 마귀의 속임수일 수 있다며 모든 것을 의심해 보았습니다. 그럴 때 그 모든 것을 의심하고 있는 주체인 자기는 더 이상 의심할 나위 없이 존재하는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과정을 거쳐 그의 이른바 “나는 생각(의심)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는 명제가 성립되었습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순수인식이었고 그는 이 기초 위에 인간의 모든 지식을 세우고자 했습니다. 이것은 그때까지 자명한 것으로 전제되었던 하나님의 존재와 그 밖의 형이상학적 전제를 떠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하나님도 이제는 당연히 계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가 “사유하는 스스로“로부터 곧, 이성으로부터 유추, 연역되어야 했습니다. 그때까지 이성은 주어진 계시를 사유하는 도구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성은 도구적 역할을 넘어 자율적이며 심지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데카르트(Descartes)와 더불어 근대 철학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프란시스 베이컨(F. Bacon 1561-1626)의 경험론적 입장도 그 출발과 방법은 달랐지만 기존 형이상학적인 전제를 부인하고 이성을 기초로 한 점에서는 동일하였습니다. 이성은 이렇게 모든 것을 규정함으로서 ’근대’라는 새시대를 열었습니다. ’사유하는 이성’의 주체는 바로 인간이기에 바로 인간이 모든 것을 스스로의 이성으로 판단할 수 있는 위치를 차지한 것입니다. 그 동안 당연한 것으로 전제되었던 것들이 이제는 새롭게 질문이 되었습니다. 말해 이른바 계몽된 인간은 사회와 관습, 전통이나 국가와 교회의 권위에 맞서 자신의 이성적 판단을 신뢰하고 그것에 따라 행동했습니다. 이렇게 인간은 ’사유하는 이성’의 주체로서 계몽시대 이후 수백 년에 걸쳐 진행되는 지성사를 지배하기 시작했습니다. 한번은 미국을 방문했을 때 시카고(Chicago)의 수재로서 철학을 전공한 2세 선교사님께 물었습니다. “20세기까지의 철학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그는 잠시 생각한 후 대답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이다.“ 데카르트(Descartes)는 독실한 카톨릭신자로 알려져 있지만 그를 비롯해 계몽시대를 연 이른바 ’백과사전파’들을 볼 때 그들의 주장하는 이성의 철학은 순수한 학문적 운동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에는 아버지를 떠나고자 하는 탕자의 의지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것은 하나의 반항적인 지성이었습니다. 고대부터 모든 시대에 걸쳐 인간은 적어도 신적인 존재를 인정했었습니다. 특히 서양은 중세에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피조물로서 자신의 위치를 지켰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모든 사고의 출발과 기초였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더 이상 계시에 의해 주어진 것, 하나님께서 살아계신 것을 전제하지 않음으로써 그리고 스스로 사유하고 결정하는 주체자가 됨으로써 스스로 하나님이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사유하는 이성의 주체자로서 인간은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된(창 3:5) 아담과 같이 된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께서 살아계신다는 전제뿐만 아니라, 자기자신이 피조물로서 모든 면에 있어서 그리고 지성에 있어서도 유한한 존재라는 사실 그리고 구속이 필요한 죄인이라는 전제도 떠난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의해 대답되었던 “무엇이 옳으냐, 무엇이 악하고 선하냐“하는 문제를 인간이 마치 하나님이 된 입장에서 결정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도외시하고 형이상학적 기초도 도외시한 경향은 서양의 정신사에서 간헐적으로 있어왔으나 근대에 이르러 처음으로 체계적으로 전개었습니다. B. 과학기술의 발달과 대체된 형이상학: 인간이 사유하는 이성의 주체가 되어 출발된 근대에서 하나님은 차차 그 자리를 잃어 갔습니다. 칸트(Kant 1724-1804)는 인간의 모든 지식을 세 분야로 나누었습니다. 미적의식으로 표현하고 공유할 수 있는 ’예술분야’, 인간의 이성으로 파악할 수 있는 ’과학’ 그리고 이러한 이성으로 사유조차 할 수 없는 ’물자체의 세계’등 이었습니다. 칸트(Kant)에 있어서 “하나님은 존재하는가?“, “그는 누구인가?“하는 질문과 이해는 인간의 미적의식이나 이성으로 파악될 수 없는 이른바 물자체의 세계에 속한, 즉 형이상학의 분야였습니다. 칸트(Kant)의 이 철학으로 하나님은 비록 그 존재를 보장 받았으나 일상에서 유리되어 모호한 형이상학의 세계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 후의 서구의 지성사에는 철학의 눈부신 발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사람들의 사상과 생활을 결정적으로 변화시킨 것은 자연과학과 기술의 발달이었습니다. 그 동안 자연과학은 철학의 한 분야에 불과했었고 신학이 주도하는 중세에는 그 의미가 미미했습니다. 그러나 천재적인 여러 과학자들이 등장하여 과학의 학문적 방법, 즉 관찰, 추정, 실험, 확인 등을 세련시켜 나갔습니다. 과학은 이러한 자신의 방법을 통해 검증될 수 있는 명료하고 객관성 있는 지식을 성공적으로 추구해 나갔습니다. 천체, 물리적인 힘, 물질과 인체의 구조 등 각 분야에서 인간의 새지식의 지평을 넓혔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새지식의 성격은 순수지식을 추구하는 근대의 정신에 부합되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과학적“이라는 말은 언제나 검증될 수 있는 그래서 객관적이고 의심할 수 없는 진리라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과학은 그러한 보편성, 객관성으로 인해 권위를 갖게 되었습니다. 과학은 이제 그들의 원리에 어긋난 것이면 국가나 교회의 권위에 굴복하지 않고 대항하였습니다. 과학은 인간의 자연에 대한 이해를 바꾸어 나갔습니다. 그 동안 우주는 인간에게 있어 하나의 신비한 세계였으나 이제 우주는 운동, 질량, 속도, 힘 등 간단한 개념과 수식으로 표현할 수 있는 따라서 더 이상 신비한 것이 아닌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하나의 기계에 불과하였습니다. 과학의 이러한 사상적 영향은 물질과 자연 분야에만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과학은 자기영역을 확장하여 인간의 하나님에 대해 이해를 바꾸게 했습니다. 그 과학적 결론에 의하면 이 우주는 창조주의 개입이 없어도 운행되고 있으며 법칙에 따라 기계적으로 운동하므로 창조주 하나님은 우주의 어느 변방에 할일 없이 자리잡고 계셔야 했습니다. 더 나아가 과학은 권력적인 위치를 차지하기 시작했습니다. 예를 들어 과학에서 추출된 원리들이 기술과 결합되어 증기기관을 비롯한 많은 문명의 이기가 발명되었고 이것은 사람들의 생활에 풍요와 편리함을 가지고 왔습니다. 이렇게 과학기술은 인간의 생활을 특히 산업혁명 이후 숨가쁜 속도로 바꾸어 갔습니다.과학은 끝없는 진보에 대한 믿음을 전파하고 유토피아(Utopia)의 꿈을 심었습니다. ’유토피아(Utopia)’는 하나님 없는 지상의 낙원이었고 이것은 역사의 진행과정에서 실현될 것으로 보였습니다. 인간은 20세기 초까지 이 꿈을 버리지않고 줄기차게 추구해 나갔습니다. 이러한 과학의 힘이 존재하기에 하나님은 불필요한 존재였습니다. 어느 시대건 인간은 “이 우주의 근원은 무엇인가? 물질과 운동의 최초 원인은 무엇인가?“하는 질문을 했었고 그 답을 찾고자 했습니다. 플라톤(Platon)의 이데아(Idea)로 대표되는 형이상학은 그 대답이 되었습니다. 기독교가 전파된 후에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존재와 그 진리의 말씀이 분명한 대답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근대철학과 과학의 발달은 하나님을 부인하는 그리고 종래의 형이상학을 파괴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혹은 형이상학적인 진공상태를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과학은 태초와 제일원인에 대한 질문에 자신의 방법으로 답을 함으로써 스스로 창조주 하나님 혹은 종래의 형이상학이 차지했던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이 새로운 과학의 형이상학에 의하면 태초에 빅뱅(big bang)이 있어 빅뱅(big bang)으로부터 시간, 공간과 물질이 생겼습니다. 따라서 그에 의하면 수소에서 헬륨을 비롯한 다른 원소로, 그것으로부터 복잡한 분자 그리고는 아미노산에서 단백질이 형성되고 그로부터 또한 생명이 탄생했습니다. 그리고 윈시생명으로부터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명체가 진화되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렇게 과학은 창조주 하나님의 자리에 빅뱅(big bang)과 진화론을 자리잡게 한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근대의 과학은 자연에 대한 지식에서 거둔 성공을 기초로 과학적으로 검증할 수 없는 세계까지 스스로의 체계를 형이상학의 분야에까지 세워 나간 것입니다. 이러한 주장은 하나의 추론에 불과하며 나아가서 열역학 제1법칙과 그리고 제 과학법칙 중에서도 가장 잘 증명이 된다는 열역학 제2법칙에 어긋나고 생명으로부터만 생명이 나온다는 원리에 정면으로 모순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가정을 마치 검증된 과학적 진리처럼 받아드렸습니다. 또 이 새로운 형이상학은 인생의 의미에 대한 질문이라든지 줄기세포연구가 옳은 것이냐 아니냐 등에 대한 윤리적 질문에 그 대답을 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빅뱅(big bang)과 진화론은 현대 독일사회의 형이상학으로 굳게 자리잡았습니다. 이것은 매우 주목할 만한 현상이며 인간은 왜 그러한 무리한 생각을 형이상학적인 체계로 까지 받아드리게 되었는가 묻게 됩니다. 왜냐하면 빅뱅(big bang)과 진화론 곧 과학적인 추론을 마치 그것들이 증명된 사실처럼 받아드리는 것은 과학적이라기보다 마치 하나의 종교적인 고백 같은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빅뱅(big bang)과 진화론이 하나의 추론에 불과할지라도 그것은 불가피했습니다. 왜냐하면 창조주 하나님을 거부한 인간에게 있어서 하나의 형이상학은 필요했고 그들에게 있어서 빅뱅(big bang)과 진화론은 대안 없는 유일한 사고체계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이곳의 지성인은 이 빅뱅(big bang)과 진화론이 과학적인 사실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신앙화 되었기 때문에 사실로 여기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사무엘(Samuel Lee) 선교사님의 창세기 강의안을 읽으면서 이러한 어이없고 스스로에 대해서도 모순된 경향을 표현하는 절묘한 개념을 대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과학이 관측 조차도 할 수 없는 분야 “태초“까지 무리하게 그 영역을 확장하고 창조주 자리에 빅뱅(big bang)과 진화론을 앉혀 놓은 것은 한마디로 “물질적인 형이상학“ (materialistic metaphisics)이었습니다. 이 새로운 물질적 형이상학, 특히 진화론은 니체(Nietzsche), 칸트(Kant), 칼 마르크스(Karl Marx 1808-1883), 프로이드(S. Freud 1856-1939) 등 영향력이 컸던 여러 사상가들에게 그 사상적 기초를 제공하고 독일 히틀러(Hitler)의 등장에도 그 영향을 끼쳤습니다. 더 나아가 과학은 과거의 철학사에 있어서 종래의 형이상학이 했던 것처럼 자신의 역할을 개인의 인생관 형성에 영향을 미치기 까지 확대시켜나갔습니다. 제학문이 새롭게 짜여지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과학은 특히 생물분야는 그러한 진화론적인 체계에 철저히 맞추어져 있습니다. 이것은 사화학 심지어 철학과 신학에 이르기 까지 지성적 풍토를 변화 시켰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특히 독일어권에서 밀도 있게 심화되었습니다. 과거의 사회에서 하나님이 존재하시며 그가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당연시 하고 믿었듯이, 이제 현재의 사회는 빅뱅(big bang)으로부터 이 우주가 형성되었고 인간이 진화된 것이 과학적 사실이라고 당연히 믿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신학도 이른바 자유주의 신학자들을 거치면서 주어져 있는 것, 즉 계시가 갖던 최고의 권위를 사유하는 이성이 대신 자치하였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을 하나님의 계시가 아닌 인간의 문화의 산물로써 보고 과학적인 사고방식, 변증법 철학, 실존적 입장 등으로 해석하기 시작했습니다. 급진적인 일련의 학자들도 이른바 “신 죽음의 신학(사신신학)“을 내세우며 하나님의 죽음을 선언하는 극단까지 왔습니다. 과학기술의 형이상학의 체계 안에는 하나님을 위한 자리가 더 이상 없었습니다. C. 과학기술시대와 인간실존: 20세기에 이르러 이제 인간은 낙관주의와 유토피아의 꿈에서 깨어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인류는 두 번에 걸친 세계전쟁을 비롯하여 많은 위기를 겪었습니다. 또한 과학 기술의 발달은 사람들로 하여금 다른 한편으로 핵의 위협, 생태계 위기등에 직면케 했습니다. 스스로 사유하는 존재로서 출발한 서구의 지성은 인간중심주의를 발달 시켰으나 인간은 스스로가 생각했던 것처럼 도덕적이고 합리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거듭하여 깨닫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유대인의 학살을 비롯하여 인간이 저지른 범죄는 인간 내의 죄성을 변명할 수 없이 보여주었습니다. 동시에 인간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한 위기도 심화되었습니다. 원래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과 만물의 사이에 위치하는 존재였습니다. 이는 다른 모든 피조물과 엄연히 구별되는 존귀한 정체성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의 정체성은 하나님의 관계 안에서만 성립되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 하나님이 되었을 때 정체성의 위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인간은 코페르니쿠스(Copernicus) 이후 자신이 끝없이 광활한 물질적 우주의 한 점 위에 존재하는 자에 불과한 것으로 자각해야 했습니다. 이제 인간은 영광스러운 영적인 존재 대신 우주의 한 점 위에 있는 물리적인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 후에도 인간은 “나는 인격의 소유자이다“라는 정체성을 내세워 스스로를 동물과 구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챨스 다아윈(C. Darwin 1809-1882)이후 인간은 단세포 동물에서 진화된 그리고 진화의 여정에 있는, 본질적으로 동물과 구별되지 않는 존재로 자신을 격하시켜야 했습니다. 따라서 인간과 동물 사이의 경계선은 없어졌습니다. 그래도 인간은 “나는 자아를 의식하는 이성이 있는, 정체성이 있는 동물이다“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프로이드(Freud) 이후 인간은 잠재의식에 의해 조정되는 존재에 불과했습니다. 이렇게 전락된 인간의 위치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한 유명한 MIT 교수(Bruche Mazlish)는 그의 책(The Fourth Discontinuty)에서 사이보그(cyborg), 인공두뇌 등을 언급하며 이제는 인간과 기계와의 경계도 허물어지고 있다고 지적하고 했습니다. 과연 이러한 사조가 ’매트릭스(Matrix)’, ’A.I’, ’I Robot’, ’Terminater’ 등 근래의 영화에 반영되고 있습니다. 이제 인간은 동물은 물론이요 심지어 기계와도 구별되지 않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시대와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위기로 인해 지난 세기 후반에 이르러 “오늘의 시대“가 가지고 있는 그러한 문제들의 원인을 규명해보려는 학문적 운동이 활발했습니다. ’후기산업시대’, ’제3의 물결’등의 개념들은 근대 이후에서 시작된 시대에 종언을 고하고 새로 시작된 시대의 성격을 규명해 보고자 하는 시도의 표현들입니다. 갈브레이드(J. K. Galbraith 1908- )는 오늘날을 “불확실성의 시대“ (The Age of Uncertainy)라고 명명하였습니다. 그것은 과거에는 케인즈(Keynes J. M. 1883-1946)나 칼 마르크스(Karl Marx)의 이론으로 경제현상이 파악되고 또 예측 가능했었는데 이제는 과거의 개념으로 파악할 수 없는 불확실한 시대라고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은 그러한 개념들 중 가장 널리 회자되고 있습니다. 포스트머더니즘(Postmodernism)을 비롯하여 위에서 언급한 모든 개념 간에는 관점과 내용의 차이는 있으나 계몽시대 이후의 현대가 끝나고 새시대가 전개되고 있다는데 그 공통점이 있습니다. 해체주의, 탈구조주의 등은 이제까지의 이성을 왕으로 한 체계를 반성하는 운동이었습니다. 사실 인간은 데카르트(Descartes) 이후 수백 년에 걸쳐 하나님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의지로 모든 지식을 인간의 이성 위에 쌓아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모든 것을 다 이해할 수 있다고 자신하던 계몽주의의 이상에 대한 반성은 불가피해졌습니다. 인간지성의 성격과 그 한계는 데카르트(Descartes)가 웅변했던 것과는 다르다는 것은 이제 분명해 졌습니다. 하버마스(J. Habermas 1929- )를 비롯한 사상가들은 이구동성으로 “순수인식은 불가능하다“고 설파했습니다. 이것은 인문과학적 지식 뿐만 아니라 자연과학의 지식에도 해당됩니다. 과학은 이제껏 그 객관성과 명료성 때문에 다른 모든 분야의 지식의 모범적 예였습니다. 그러나 토마스 쿤(Thomas S. Kuhn 1922- )은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과학사에 있었던 많은 사건들을 언급해가며 과학적 진리가 자연의 사실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전제된 패러다임(paradigm)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야기 하자면 야당사람이 여당에 가면 판단의 근거가 되는 패러다임(paradigm)이 달라지기 때문에 갑자기 ’야당이 옳지않고 여당이 옳다’고 그 의견을 바꾸는 것입니다. 이제 물질적 형이상학, 과학지식의 한계, 인간의 상실된 정체성 등의 문제점들이 분명해졌습니다. 또한 시대정신에 대한 반성과 새시대를 규정해 보고자 하는 많은 담론이 있었던 것을 알고 있습니다. 과연 이 시대를 어떠한 시대로 규정할 수 있습니까? 또 그 근거는 무엇입니까? 독일 사회와 관련하여 오늘의 시대를 ’과학기술시대’로 규정합니다. 이러한 규정은 많은 사상가들이 근대로부터 시작된 시대를 종언했기에 반대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시대를 과학기술시대라고 규정하는데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과학기술이 형이상학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날의 형이상학으로써 현대인의 사고방식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과학기술은 독일 현대인의 인생관의 기조입니다. 과학은 형이상학적인 전제로서 빅뱅(big bang)과 진화론 외에는 기독교의 창조나 신화적인 설명은 이른바 ’과학’의 이름으로 절대 용납하지 않습니다. TV에서 방영되는 모든 과학 프로그램은 이를 대전제로 하며 마치 세뇌하듯이 반복되어 나옵니다. 현대 독일의 고등학교인 김나지움(Gymnasium)에서 학생들이 감수성으로 한창 예민한 시절에 철저히 진화론 위에 건축된 수업을 받고 하나님의 창조를 고대인의 신화 이상으로 밖에 생각할 수 없는 지경이 됩니다. 그리고 종교시간에는 “신죽음의 신학“까지 접합니다. 그들은 대학에 들어오기 전 이미 이렇게 태초의 문제에 대해 수준 높은 편견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해 미국에서 논의되고 있는 ’지적설계론’에 대한 방송이 있었습니다. 지적설계론은 생명과 종의 기원에 관하여 그것이 우연이 아니라 이미 설계되어 존재하게 되었다는 추론입니다. 그러나 독일의 지적풍토에 의하면 진화는 과학적이요 그것은 ’비과학적’인 것이었습니다. 비과학적이란 것은 수준이하의 논의요 따라서 말할 가치가 없다는 뜻입니다. 지난 세기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와 위기에 처해있는 인간실존을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이 활발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몸’ 이나 ’욕망’ 에서 스스로의 새로운 정체성을 찾고자 하기도 하였습니다. 많은 시도 중 비록 반세기가 지났으나 하이덱거(M.Heidegger 1889-1978)의 시대와 인간실존에 대한 진단은 귀 기울일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하이덱거(Heidegger)는 20세기의 사고의 지평을 새롭게 열었다고 평가받습니다. 그는 현란한 철학적 언어를 구사하는 대신 견실한 언어로 사유하는 독일적인 사고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는 연구하며 강단에 서며 충분히 철학을 연구할 수 있는 여유가 있었습니다. 그는 여러 외적 내적인 위기에 처해 있는 인간들에 대해 사유했습니다. 시대에 대한 그의 통찰은 예리하고 또 그의 실존에 관한 분석은 인간의 지성을 현혹시키는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이제껏 서구의 정신사에서 형성된 철학을 고찰하며 그는 종래의 기본적인 개념들을 주의 깊게 검토했습니다. 특히 존재에 대한 사유 곧 형이상학을 검토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역시 계시의 근거를 떠난 현대의 정신적 한계는 넘어설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지금 여기’에 던져져 실존하는 인간에 주목하였습니다. 그의 철학에는 소비하며 스포츠에 열광하며 끊임없이 새롭고 자극적인 것을 찾아 다니는 현대인의 모습이 잘 분석되어 있습니다. 그가 볼 때 지금 여기에 던져져 실존하는 인간은 그의 존재의미를 모르고 그저 소비하며 피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존재였습니다. 이러한 인간은 “자연“을 스스로의 삶을 위해 이용하는 하나의 에너지 덩어리로 보고 자연을 착취하고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인간 자신마저도 사회의 거대한 체계 속에서 그렇게 에너지로 이용당하는 존재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소외와 불안에 시달리며 통일성과 깊이가 결여된 삶의 피상성 그리고 죽음에 당면한 실존으로서 고통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의 철학을 통해 특히 말년에 이르러 구원이 필요한 인간 그리고 그 구원은 세상과 인간 자체에 없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기독교가 전파되어 서구사회의 영적, 정신적 근간이 된 이후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배교는 어느 시대에나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신의 타락한 모습을 발견하고 새로운 인생을 살고자 할 때 회개하고 돌아갈 곳이 있었습니다. 사회와 문화전반에 걸쳐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기독교 사회의 컨센서스(consensus)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비유적으로 말한다면 그때까지 인간의 배교는 마치 탕자가 아버지 곁에 있으면서 말썽을 피우는 셈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인간이 돌이키고자 할 때 그러한 영적인 컨센서스(consensus)가 상실되었습니다. 마치 회개를 하고자 해도 종전과는 달리 쉽게 돌이키기에는 너무 먼 거리까지 나간 탕자처럼 되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탕자처럼 오늘날의 인간은 자신이 의지하던 것, 이성에 대한 신뢰, 유토피아(Utopia)에 대한 꿈, 낙관주의 등을 다 탕진했습니다. 인간은 탕자가 쥐엄열매를 맛보듯이 ’과학기술’의 사회가 주는 쥐엄열매, 죽음의 불안과 본질적인 허무 등에 직면케 되었습니다. 이것은 데카르트(Descartes) 이후 서양지성이 도달한 벽입니다. 이제는 정말 돌이켜야 할 분기점에 도달한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서구의 지성의 태동과 그 기초 그리고 그 진전을 “어떻게 성격 지을까“ 고심하던 끝에 이를 “서구지성의 지구중심적 경향“이라고 규정하였습니다. 제가 “자기를 부인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전 서구지성과 과학기술이 쌓아놓은 체계, 그리고 그 성과는 절대적이고 엄청나 보였습니다. 따라서 그 기초 위에 서 있는 독일의 학생들을 돕는 것이 넘을 수 없는 벽과 같았습니다. 그러한 벽 앞에서 “나는 도대체 얼마나 많이 알아야 하는가“하는 지식의 양이 문제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제 개인적인 코페르니쿠스(Copernicus)적 전환 후는 “어느 위치에서 사고하는가“하는 사고의 방향이 바로 열쇠임이 명백해졌습니다. 자신의 판단을 신뢰했었던 제게 있어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서구지성의 경우도 그러했습니다. 저는 지성인들이 어디에 서있는가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생각을 신뢰한 나머지 스스로를 사유의 중심에 위치시키고 하나님을 포함한 모든 것을 스스로의 이성으로 판단하고 검증할 수 있다는 가정 위에 현대의 지성을 세운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지성의 지구중심적 경향 때문에 빅뱅(big bang)과 진화론의 물질적 형이상학을 영접할 수 밖에 없었던 사실도 이해할 수 있었고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 하나님이 되었을 때 시작된 정체성의 위기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서구의 이 인간중심적이고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반항적인 지성은 350 여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는 비교적 오랜 기간이라 할 수 있지만 서양 지성사 2500년의 긴 전통에서 바라보면 일시적인 현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인간이 이러한 막다른 처지에서 과학기술이 베푸는 쥐엄열매의 고난에서 돌이킬 때 그것은 마치 먼 곳에서 드디어 돌아오는 탕자의 경우처럼 온전한 회개와 새시작이 될 것입니다. 이는 사유의 주체로서 스스로를 하나님 처럼 여기고 하나님이 없다는 것을 전제한 후 모든 생각을 스스로의 이성 위에 건축해 온 지성의 지구중적인 경향에서 돌이켜 살아계신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에게 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4.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저는 하나님이 없다는 가정 하에 세운 현대인들의 물질적인 형이상학의 본질과 그 결과를 이해한 후 기독교 신앙의 우월함을 더욱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권능과 신성이 그의 만드신 자연의 만물에 계시되어있는 사실과 또한 성경의 구속사의 장구한 역사과정에 나타나는 예언과 성취를 통해 살아계시고 사역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계시도 한층 명백해졌습니다. 그러나 저의 영혼은 존재론과 인식론의 근본적인 질문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찾고 있었습니다. 날짜를 기억할 수 없는 어느 봄날 학교에 있을 때였습니다.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히브리서 11:6말씀을 대하게 되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이날 “그가 계신 것“ 즉, 하나님께서 존재한다는 당연히 여겨왔던 그 의미가 당연한 것으로 생각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거룩하시다는 등의 2형식 문장은 자주 대하고 이해하기 쉬웠습니다. 그러나 이날 대하게 된 말씀은 제가 하나님께 나아갈 때 ’하나님이 계시다’ 는 사실을 반드시 믿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 “그가 계시다“는 그 의미에 집중해야 했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이 계시다’는 말씀으로부터 존재의 신비와 그 측정할 수 없는 깊이가 느껴졌습니다. 이 말씀의 배경을 살펴 보고자 저는 하나님과 모세가 대화하는 것을 읽어보았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자신을 소개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출 3:14a). 하나님께서 자신의 존재에 대해 “스스로 있는 자“라고 선언하였습니다. “스스로 있는 자“라는 의미를 묵상할 때 저의 가슴은 뛰었습니다. 이제껏 어느 책이나 사상에서 접하지 못한 마치 처음 대하는 듯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세는 제게 있어서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일반적인 사상, 감정을 유추하여 이해할 수 있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인간적인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하나님께서 한 인간과 한 대치점에 서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인격적 요소에 관한한 사랑이나 자비와 같은 것은 유추될 수 있으나 “스스로 있는 자“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존재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존재하는 것들에는 그 원인이 있으나 자신은 그 존재의 자체라고 하신 것입니다. 또한 모든 존재에는 시간과 공간에 종속되어 있으나 하나님께서는 자신 스스로는 그와 달리 모든 것을 초월하여 존재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있는 자“ 그렇게 시공간에서 초월된 하나님은 인간 사유와 모든 지성의 한계도 초월하여 계심이 분명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그 존재의 근원, 성격이 규정되어지지 않는 신비였습니다. 비록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의 존재는 비밀스러웠으나 사유의 방향에 관한 것은 분명한 해결을 보았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었었을 때 모세는 자신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의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하고 하나님께 “당신은 어떻게 존재하느냐“고 물었던 격이었습니다. 이러한 모세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하나의 사유의 대상에 불과했습니다. 즉, 하나님은 모세 자신의 판단에 의해 그 존재가 인정이 될 수도 혹은 안 될 수도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영원자 되신 하나님 옆에 서서 하나님의 관점으로 모세를 바라볼 때 그는 와서 시간 안에 잠시 머물다가 가는 하루살이 같은 자에 불과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그것은 마치 아침에 알에서 깨어나 저녁에 죽는 그러한 하루살이가 “내가 존재하는 것은 기정사실인데 과연 오늘이 지나고 난 후 내일은 존재하는가“하는 식의 질문이었습니다. 저 역시 저로 출발하여 자신이 존재하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데 “하나님이 계시는 것은 과연 어떻게 이해할 수 있었나“ 물었던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데카르트(Descartes)식의 존재에 대한 물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존재가 그 성격에 있어서 모세와 얼마나 달리하는가 하는 것을 가르킵니다. 모세가 존재하기 전에 또 그가 하나님의 존재를 사유하기 전에 이미 존재하는 분이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이 말씀은 지구중심적인 입장에서 존재론을 제기했던 제 자신의 그리고 서구 지성의 사유방식에 마침표를 찍게 해 주었습니다. 저는 그 후 자연과학을 공부하며 독일학생들을 이해할 기회가 되었던 화학기술교육 과정을 잘 끝낼 수 있었습니다. 사실 신앙체험상 앞선 것은 하나님의 존재의 인식이 아니라 경험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 삶의 전과정을 동행하시며 특히 죽을 병에서 구원하사 그 사랑과 능력을 체험케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곧 하이델베르그(Heidelberg) 대학의 약화학 실험실의 좋은 직장도 얻게 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저희 가정을 축복하셔서 두 아이가 더 태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이델베르그(Heidelberg)의 제자양성 역사도 축복해주셨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독일 지성인은 도저히 함락되지 않을 성 같이 보였으나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이 그들의 인생을 변화시켰습니다. 하이델베르그(Heidelberg) 지구가 20명, 30명 그리고 40명대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하이델베르그(Heidelberg) 동역자들 모두가 부족한 저를 한결같은 사랑과 존경으로 대하며 오늘까지 독일 지성인을 섬기는 사역에 동역과 합심의 그릇을 이루고 있습니다. 저 또한 이들과 제자양성 역사를 전적으로 섬기기 위해 97년부터는 직장을 그만 두고 풀타임(full time)으로 사역하고 있습니다. 한마디: 자기를 부인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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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유제임스 선교사님 재파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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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정AB Jr. 사라 선교사님 재파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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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1-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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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평양대부흥운동 - 목요 목자모임 상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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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1-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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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 선교사님 귀국(정아브라함 Jr., 사라, 유제임스 선교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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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1-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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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신년 새벽기도 떡국 파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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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송년 감사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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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성탄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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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2-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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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성탄이브-찬송시와 선물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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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2-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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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최다윗 돌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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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성탄연합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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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성탄연합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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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첫눈과 성탄1강 12월 4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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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추수감사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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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보고] 신시내티 서요한 메리 선교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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