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성경읽기선교회 관악5부

관악5부에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번호 제목 닉네임 조회 등록일
461 no image [사진] 임성택 목자님 사법연수원 졸업 파일 [8]
[레벨:20]서정수
239 2012-01-18
460 no image [영상] 11주년 기념영상+ 인터뷰 파일
[레벨:20]서진우
126 2012-01-17
459 no image [사진] 신년 수양회 파일
[레벨:20]서정수
128 2012-01-11
458 no image [사진] 송년 감사의 밤
[레벨:20]서진우
147 2012-01-06
457 no image [영상] 송년의 밤 '감사합니다'
[레벨:15]정종현
97 2012-01-06
456 no image [사진] 하우스처치: 강호영, 민혜란 파일 [5]
[레벨:20]서정수
245 2012-01-05
455 no image [사진] 장원 성탄시 수잔나 선교사님 시 파일 [1]
[레벨:15]정종현
71 2011-12-27
454 Andrew, Joseph and Anna [1]
[레벨:20]인금철
73 2011-12-27
453 no image [사진] 성탄 축하의 밤
[레벨:20]서진우
117 2011-12-26
452 no image [사진] 세례 성찬식 사진 파일
[레벨:20]서진우
79 2011-12-26
451 no image 원익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4]
[레벨:20]고도전
157 2011-12-21
450 no image [소감] 나의 아빠 이요한 선교사님의 믿음과 비전 파일 [1]
[레벨:20]서정수
79 2011-12-19
주일 예배에서 이요셉 목자님이 발표한 "나의 아빠 이요한 선교사님의 믿음과 비전" 입니다. 은혜 주셔서 감사합니다. ===================================== 이요한 선교사님의 믿음과 비전 요절 요한복음 11:25, 2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요한 선교사님은 1951년 2월 27일에 전남 광주시 외곽에서 평범하지만 매우 성실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6.25 격변기를 보냈으며 50년대 후반기와 6-70년대는 가난의 상징인 보릿고개와 벌거숭이 민둥산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탈출을 감행했던 새마을 운동을 지켜보며 살았습니다. 이요한 선교사님은 부모님으로 부터 좋은 머리를 물려받았다고 언제나 말씀하셨습니다. 저도 머리가 좋은 것을 보니, 맞는 것 같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공부는 잘하셔서 한 번도 전교 일등을 놓친 적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실패가 없이 전남 공대 기계공학과까지 졸업하고, 때를 잘 맞나 직장을 골라 다니다가 서울에 정착하며 당시 이사무엘 목자님이 개척하시는 UBF 초기 종로 5부와 인연을 맺었습니다. 이요한 선교사님께서는 1977년 7월 처음으로 말씀공부를 하셨습니다. 이요한 선교사님께서는 로마서 말씀공부가 꿀맛 같았다고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로마서 1:16절 말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이 말씀은 당시 시골 작은 교회의 청년 집사로서 믿음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교회의 많은 일에 지쳐 신앙생활에 회의를 느끼고 있던 이요한 선교사님에게 복음이 무엇이며 왜 믿음으로 살아야 하는가를 깨닫게 하므로 이요한 선교사님을 거듭나게 한 생수가 되었습니다. 또한 항상 섬기기만 하던 이요한 선교사님은 UBF에 와서 1:1목자의 섬세한 사랑과 섬김을 받으니 참으로 행복했습니다. 이때 이요한 선교사님은 비로소 한 영혼을 말씀과 사랑으로 섬기는 것이 얼마나 귀한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요한 선교사님은 그동안 시골 작은 교회에서 섬기는 종으로 훈련하신 주님께서 이제는 캠퍼스 지성인의 목자로 부르셨음을 영접하였습니다. 성경을 신문지로 싸가지고 다니던 것을 회개하고 어디서나 담대히 성경책을 들고 다니며 복음을 전 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이요한 선교사님은 대우 중공업에서 근무하고 계셨는데, 이때 기숙사에서 많은 직장동료들을 말씀으로 섬겼습니다. 이렇게 속성으로 목자가 되고 이듬해 1978년 2월 로마서 성경학교 때에는 강사로 세움을 받으셨습니다. 이어서 4월 5일에는 당시 최고로 인기가 많았던 김옥화 목자님과 가정교회를 이루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중매를 해주셨던 이사무엘 선교사님께서는 그 때를 회상하시며 너무 좋아 입이 귀에 걸린 이요한 선교사님의 모습을 훤하다는 것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후 이요한 선교사님은 한양대 개척 역사에 동역자로 쓰임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서 1986년도에는 특히 한양센터 건축역사에 쓰임을 받으시고, 직접 공사 현장을 감독하며 섬기기도 하셨습니다. 훗날 이 경험을 살려 파라과이에 센타 전용 수양관을 직접 모두 지으시기도 하셨습니다. 1988년 파라과이 선교사로 나가기까지 약10년 동안 한양 캠퍼스의 지성인들을 섬기는 성경선생이요 기도의 동역자로 살도록 축복하여 주셨습니다. 이요한 선교사님이 파라과이 선교사로 나아가게 된 동기는 한양대 개척 원년인 1978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성령의 역사는 누구나 세계선교에 쓰임 받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요한 선교사님도 이 성령의 역사를 따라 아직 개척되지 않은 대륙 호주에 점을 찍어 놓고 지부장으로 나아고자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용접공으로, 철골 제도사로, 기계기사로 바꿔가며 도전하여 매번 최종 시험까지 합격하였지만 형식적으로는 취업 이민의 문호를 열어 놓고 실제로는 길을 막는 이민 정책의 희생자가 되었습니다. (여담입니다만 그래서 이요한 선교사님은 자격증만 12가지가 있으십니다) 그러는 가운데 청주의 최 바울 목자님께서 유학생 선교사로 먼저 호주에 발을 딛게 되었습니다. 이에 실망한 이요한 선교사님은 방향을 바꿔 확실하게 나갈 수 있는 미국 메릴랜드의 미싱 수리공으로 수속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파라과이에 사는 이마리아 선교사님의 언니로부터 방문 초청장을 받았습니다. 이요한 선교사님과 이마리아 선교사님은 이를 꼬투리로 여권이나 만들어 놓으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양들부터 시작하여 한양센터의 모든 식구들이 이요한 마리아 선교자님의 가정이 파라과이 선교사로 나아가도록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뜻하지 않은 기도에 두 분은 처음엔 당황하였지만 곧 이를 주님이 주신 방향으로 받아들이고 다니고 있던 영어회화 학원을 스페인어 학원으로 바꾸었습니다. 이요한 선교사님께서 나중에 말씀해 주셨는데, 호주와 미국 메릴랜드 선교 비전은 영어권 선진국에 나아가고자한 이요한 선교사님의 야망을 대신하는 꿈이었습니다. 이를 정확히 아신 성령께서는 매번 길을 막으시고 파라과이에 사시는 이마리아 선교사님의 언니의 손짓을 통해 이요한 선교사님의 선교지를 파라과이로 돌리셨습니다. 이후 이요한 선교사님은 불타는 선교비전 가운데 당시 좋은 직장이었던 한국은행을 퇴직하고 40을 바라보는 나이에 유치원을 다니던 저와 초등학교에 다니는 형과 누나와 함께 올림픽을 약 한달 앞둔 1988년 8월 18일 파라과이 아순시온을 향한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파라과이는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볼리비아를 경계로 남미 중앙에 자리 잡은 내륙 국가로 아열대 기후에 속해 덥기는 하지만 비가 적당히 오고 수자원이 풍부하여 역사적으로 배고픔을 모르는 축복된 나라입니다. 국토는 한반도 2배 넓이에 인구는 겨우 500만이 거주하므로 주거공간이 넓고 어디를 가나 푸른 숲과 맑은 물, 그리고 철따라 열리는 풍성한 실과며 후덕한 민심이 있으며 물가는 저렴합니다. 좁으며 경쟁적인 대한민국 사회에 길들어진 이요한 선교사님이 이러한 파라과이를 언제나 너무 사랑하셨습니다. 이요한 선교사님은 이삭이 그랄에 거할 때 그곳 목자들과 싸우지 않고 양보하다 다시는 다투는 일이 없는 넓은 들을 만나 그곳에 우물을 파고 그 이름을 르호봇이라 하여 이르되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고 한 고백을 기억하며 넓고 광활하고 젖과 꿀이 흐르는 기름진 땅을 선교지로 주신 주님께 감사하셨습니다. 하지만 영적인 환경은 육의 환경과 달리 황무지와 같습니다. 1992년까지 카톨릭이 국교였기 때문에 카톨릭 문화가 이들의 생활과 의식 속에 깊이 뿌리내려 있지만 실제 생활에서는 육신의 소욕을 따라 살므로 미혼모와 거리의 아이들 문제가 큰 사회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대학을 나온 지성인들도 비전 없이 그때그때 현실에 만족하며 주말이면 축구장, 배구장, 디스코 장으로 몰려다니며 삶을 즐기므로 만족도가 매우 높은 것으로 조사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즈음은 민주화 과정에서 도시 빈민층이 형성되고 사회가 점점 불안해지는 가운데 문제의식을 갖는 지성인들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이요한 선교사님께서는 이를 주님께서 안정된 가운데 문제의식이 없는 그들의 삶을 흔들어 복음이 필요한 환경을 만들어 주고 계신 것으로 생각하셨습니다. 이요한 선교사님은 도착 후 믿음으로 국립대 캠퍼스를 매일 심방하며 기도의 단을 쌓고 대학 주변에서부터 벤데라는 할부장사를 시작하였습니다. 벤데는 스페인어로 팔다, 장사하다라는 뜻인데, 신용카드가 없는 사람들에게 할부로 냉장고 티비 등과 같은 제품을 파는 일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봇다리 장사입니다. 파라과이 집들은 초인종이 없는 집들이라서 손뼉을 쳐서 사람을 불러내야 했습니다. 이요한 선교사님께서는 처음에는 너무 자의식이 들어서 힘드셨습니다. 손바닥이 아프도록 하루 종일 박수를 치고 목이 쉬도록 권해야 겨우 몇 장의 카드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요한 선교사님께서는 이런 초기 선교사생활의 어려움이 전혀 힘들다고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3년 내에 12제자를 세우고 돌아와 동역자들 앞에서 선교보고를 하는 비전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쉽게도 그 꿈은 24년이 지나 소천하시기까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기도 제목으로 남아 있습니다. 사실 시간이 지날수록 제자양성은 힘들어 보이고 결국 선교라는 게 믿음 중심 지키며 마른땅을 파는 것 같은 자기와의 싸움인 것을 이요한 선교사님께서는 깨달았습니다. 이요한 선교사님께서는 24년이란 세월 동안 많은 형제자매들에게 복음의 씨앗을 뿌렸습니다. 이요한 선교사님은 말씀의 작은 씨들은 조금도 헛되지 않을 줄로 확신하셨습니다. 1991년부터 1995년까지 파라과이 카톨릭 대학을 개척하였습니다. 그 중에는 처음으로 제자로 성장하여 3년이나 센터에서 살면서 제자 훈련을 받았던 Candido와 Venancio가 있습니다. 이요한 선교사님은 이들을 아들처럼 사랑하며 돌보아 주셨습니다. 말씀으로 섬김은 물론이며, 육의 양식도 제공해 주었습니다. 저에게는 용돈 주기가 힘들어 일주일에 체육이 있던 수요일에만 500원 용돈 주시면서도, Candido와 Venancio 형제들을 위해서는 언제나 맛있는 식사를 준비하셨습니다. 이들을 섬기느라 저희 형의 초등학교 졸업식에 오지 못하셨으며, 비오던 추운날 저희는 졸업식이 끝나고 몇 시간이나 아빠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Candido와 Venancio 형제들 이후로도 많은 양들을 섬기셨습니다. 1996년부터는 아순시온 국립대학교를 개척하셨습니다. 이를 위해 대학교 옆으로 이사를 했고, 덕분에 저는 학교를 가기위해 매일 아침 5:30에 집에서 나와야 했습니다. 이곳에서 섬기신 많은 양들 가운데 한 때 리더로 성장하여 역사에 동참하며 미국 국제 수양회까지 참석했던 Sara Patricia, Enrique, 저의 일대일 목자님이었던 Daniel, 그리고 Tadeo 등이 있습니다. 이들은 비록 떠나긴 했지만 이들 안에 하나님의 말씀의 역사가 시작된 것을 믿습니다. 또한 이요한 선교사님은 많은 선교사님들도 말씀으로 섬기셨습니다. 파라과이에 선교사로 파송되신 목자님들과 현지에서 만난 한국 외교관과 대학생 지성인들을 말씀으로 섬겨 열매를 맺으셨습니다. 그 중에는 말씀으로 변화되어 에티오피아 선교사가 된 외교관으로 파라과이에 오셨던 김 요셉 선교사 가정, 아르헨티나 선교사로 계신 단 쿠퍼, 하나 쿠퍼, 김마가, 김룻 선교사님들, 온두라스 개척을 하신 강다윗, 강엘리사벳 선교사님들, 이요한 선교사님의 총상과 암투병을 지켜보며 믿음을 회복하신 파라과이의 허안드레, 허안나 선교사님들, 파라과이 현지 로시오 목자님과 믿음의 가정을 이루신 황후안 선교사님, 얼마 전에 저희와 함께 생활했던 고예찬 형제님의 아버님이신 고바울 목사님 등이 그중 몇 명의 예입니다. 그리하여 수많은 선교사님들을 말씀으로 섬기시고, 세계의 많은 곳의 개척 역사에 동참하셨습니다. 믿음의 열매로 현재 파라과이에서 목자 생활을 하고 있는 이들로는 Rocio, Oscar, Sergio목자들이 있습니다. 비록 믿음이 연약하지만 꾸준히 성정하기를 기도합니다. 그 외에도 주일에 예배를 드리는 Hilda, Ferando, Miriam 형제자매들이 있습니다. Rocio목자는 아순시온 국립대 약대를 졸업하고 2006년 황 후안 선교사와 선교가정을 이루었고, Oscar목자는 동 대학 축산 대 1년 때부터 꾸준히 이요한 선교사님과 1:1 말씀공부를 해오신 분이십니다. 느리지만 꾸준히 성장하여 재학 시에는 학생회장까지 하고 현재는 석사과정을 마치고 학교에서 강의하시는 교수 목자이십니다. 한때는 역사를 떠났지만, 이요한 선교사님께서 총을 맞고 쓰러지자, 눈물을 흘리며 회개의 기도를 하며 믿음을 회복하셨습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이요한 선교사님의 총상이 많은 분들의 어려움 가운데서 믿음을 회복하게 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던 것을 알게 됩니다. Sergio목자는 Rocio 목자님의 동생으로 아순시온 국립대학 문리대를 수석 졸업하고 학교 내 원자력 연구소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선교 20주년이 되던 2007년은 이요한 선교사님에게 특별한 해였습니다. 연초에는 풍토병인 댕계열로 입원을 하셨습니다. 뎅계열은 종류에 따라 치사율이 50%가 넘는 위험한 열병입니다. 같은 해 3월 8일, 온 세계 동역자들을 놀라게 했던 총상을 입으셨습니다. 총상을 입으신 날은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은 하루였습니다. 새벽기도를 마친 후 이요한 선교사님은 외진 곳에 있는 농장을 향해 출발하셨습니다. 이요한 선교사님의 목장은 일꾼들을 인격적으로 대우해 주는 농장으로 주변에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목장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일을 얻고자 차자오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날은 평소에도 가끔씩 찾아오는 동내 아저씨가 왔습니다. 평소와 다른 것은 총을 들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이요한 선교사님에게 총구를 들이밀며 돈을 달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선교사 생활을 하시는 이요한 선교사님에게 무슨 돈이 있겠습니까? 그 사람은 총을 쏘았고, 이요한 선교사님은 총을 맞은 후, 이분을 제압하여 총을 빼앗았습니다. 그리고는 피를 흘리며 운전하여 인근의 슈퍼에 벽을 들이받으시며 의식을 잃으셨습니다. 과다출혈로 쇼크가 오셨기 때문입니다. 이후 병원으로 이송되셨으나, 동네 병원에는 수술할 수 있는 의사가 없었습니다. 결국 총상을 당한지 8시간이나 수술을 받지 못하시고, 수도로 이송되셔서 수술을 받으실 수 있었습니다. 당시 죽어도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죽지 않은 것이 신기했습니다. 이는 아직 하나님께서 부를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때에 과다출혈로 온 몸의 혈액을 모두 잃으셨습니다. 이로 인해 다량 수혈을 하였는데, 그로인해 악성빈혈, 담낭염, 면역 결핍으로 인한 세균감염으로 투병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몸에 견디지 못하고 혈액암이 발생을 하였습니다. 이요한 선교사님은 이후 약 2년 반 동안 입원과 요양을 반복하며 자신을 돌아보는 인생의 안식년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때 이요한 선교사님은 한국과 세계에 흩어져 있는 여러 동역자님들로 부터 집중적으로 기도 지원을 받았으며 그 중 많은 분들이 헌금까지 송금해 주시는 UBF 초유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덕분에 이요한 선교사님은 치유함을 얻고 개인적으로 주님을 깊이 만나는 계기가 되었으며 다시 건강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본국에 머물며 그동안 흩어져 있어 연약해진 저를 포함한 세 자녀들의 믿음을 도울 수 있었으며 그 중 둘이 가정교회를 이루게 되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이요한 선교사님은 선교생활을 하며 자녀들의 영육 간에 잘 돌보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있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선교사님의 마음의 고통을 아시고, 총상을 당할 때에 생명을 연장해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총상을 당하고도 4년이라는 세월을 더하여 주시고, 믿음이 연약한 이요한 Jr. 형제님과 이한나 자매님, 그리고 저를 신실하게 섬기도록 도와주셨습니다. 2008년에는 저의 동역자인 시원 사모님이 종로에서 말씀 공부를 시작하도록 도우셨습니다. 2010에는 저희 형과 형수님이 말씀공부를 통해 믿음의 가정을 이룰 수 있도록 도우셨습니다. 미국의 어려운 생활로 성격까지 조금 이상해진 누나를 꾸준히 도와 지금은 말씀을 공부를 매우 신실하게 하고 있으며, 많이 회복이 되었습니다. 2010년 건강이 많이 회복되신 이요한 선교사님은 파라과이를 심방하고, 또한 파라과이 일들을 정리하고자 파라과이에 방문을 하셨습니다. 2년 반 만에 파라과이에 돌아온 느낌은 고향에 돌아온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고생하던 선교사님들이 이요한 선교사님을 너무 반가워하였고, 동네 이웃들도 남녀노소 모두 반가워하였습니다. 리더들도 그동안 중심을 안 지켜 겸연쩍어 하면서도 반가워하고 말씀으로 다시 회복되며 예배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특히Oscar목자님께서 그동안 센타에 나오지 않았는데, 이를 다시 회개하고 주일예배를 지키게 되었습니다. 더불어 이때에 Oscar목자님은 새롭게 부르심을 영접하고 볼리비아 국제 수양회에 참가하여 말씀강사로 새움을 받으시기도 하셨습니다. 이러한 역사를 보시며, 이요한 선교사님은 다시금 파라과이에 선교사로 나가시기를 결심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위해서 자신을 회복하신 것이라 확신하셨습니다. 이요한 선교사님은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보고 이를 위해서 살기로 새롭게 결심하셨습니다. 사도행전 16:9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 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말씀에 기초해서 다시금 파라과이로 선교사로 나가셨습니다. 이요한 선교사님께서는 새롭게 파라과이로 선교사로 나갈 것을 생각하며 약속의 땅에 대한 기대로 가득 차셨습니다. 그래서 2010년 저와 저희 형의 결혼식도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이 1주 간격으로 후딱 해치우시고 2010년 6월 17일, 저희 자식들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홀연히 파라과이에 선교사명을 감당하시기 위해 떠나셨습니다. 다시 파라과이 역사를 섬기시고 국제 수양회를 섬기시며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셨지만, 2010년 12월 22일 병이 재발하여 다시 한국으로 귀국하셨습니다. 그리고는 2011년 한 해 동안 머물며 치료받는 동안 하나님께서 가족 관계를 회복시켜주시고 아이들을 축복해 주셨다며 하나님의 은혜를 인해 늘 기뻐하며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자랑하였습니다. 회복이 점차적으로 되 가던 중, 다지기 항암주사를 맞은 것이 문제가 되었는지, 갑작스럽게 몸의 모든 백혈구가 죽는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면역기능이 상실하고 말초 신경염으로 극심한 고통을 느끼셨습니다. 알 수 없는 변종 암세포도 생겼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 중에서도 사람들이 병문안을 오면 한번 찡그리지 않고 웃는 얼굴로 사람들을 맞아 주셨습니다. 자신을 걱정하지 않고 언제나 다른 분들을 걱정하셨습니다. 그렇게 지내시다 2011년 12월 1일에는 결국 폐렴이 걸리셨고, 2틀 후인 12월 3일에 소천 하셨습니다. 생명의 주관자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종의 고통을 감해 주시고자 단 2일만 고통케 하시고 후에 올 2중 3중의 암으로 인한 험한 고통을 당하지 않도록 하늘나라로 이요한 선교사님을 옮겨가셨습니다. 이요한 선교사님은 중환자실로 옮겨진 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한복음 11장 25 26절 말씀을 붙들고 자신의 임종을 준비하며 세 자녀들을 복의 통로들이 되라고 축복하고 남기고 가셨습니다. 딸에게는 성경공부 잘하고 믿음의 가정교회를 이루도록 축복하였습니다. 이마리아 선교사님에게는 너무 많은 십자가를 남기고 가서 미안하다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마리아 선교사님께서는 나는 늘 씩씩하니 내 염려 말고 하나님나라에 들어가서 혼자만 호강하지 말고 내가 들어갈 좋은 집도 좀 알아보고 미리미리 준비 좀 하라고 부탁했습니다. 이요한 선교사님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곧 임종하였습니다. 돌이켜 보면 지난 4년은 하나님께서 이요한 선교사님에게 주신 축복의 삶이었습니다. 그가 이 땅에서 해야 할 모든 일을 다 마치도록 생명을 연장시켜주시고 이제 더 이상 고통도 눈물도 슬픔도 없는 영광스런 하나님나라에 입성하게 축복하셨습니다. 그리고 세상에 올 때도 하나님의 때를 따라 온 것처럼 갈 때도 하나님의 때를 따라 간 것을 봅니다. 이요한 선교사님은 제가 부모님의 곁을 떠나 처음으로 한국으로 올 때에 히브리서 12:1-2절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말씀을 주셨습니다. 실제로 이요한 선교사님은 죄인의 인생의 믿음의 증인이 되셨습니다. 언제나 인내로 자신에게 주어진 믿음의 경주를 묵묵히 감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먼저 하나님 보봐 우편에 계신 예수님에게로 가셨습니다. 죄인이 회개하고 말씀과 같이 데를 이어 이요한 선교사님의 믿음의 유산을 이어갈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디모데후서 4:7-8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 니라.” 고린도후서 5: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니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고린도전서 15: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449 no image [사진] 조은민, 서진서 자매님 나이팅게일 선서식 파일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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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 2011-12-12
448 no image [사진] 추수감사예배 파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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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 2011-11-26
447 no image [사진] 하우스처치: 임성택-하여진 파일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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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3 2011-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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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4 2011-11-16
445 no image [알림] UBF 가을음악회 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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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2011-11-06
444 no image [알림] 가을수양회 프로그램 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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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2011-11-05
443 no image [사진/동영상] 가을 바이블 아카데미 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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