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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생크 탈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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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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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5-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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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우병 소고기와 영국정부.. 그후 1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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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문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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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5-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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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육대회 신청 여기서도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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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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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5-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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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여름수양회를 준비하며 제안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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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믿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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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5-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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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극기훈련하였던 지리산 칠선계혹에 관한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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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아브라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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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5-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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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Numbers)와 숫자(Numb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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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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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5-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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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근두근 and 조마조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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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금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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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5-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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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디구장이 우리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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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금철 |
55 |
2008-05-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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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붉은벚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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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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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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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계절에 임성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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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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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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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피는 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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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fait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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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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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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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믿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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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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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타 앞동산 벛꽃을 감상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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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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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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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하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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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금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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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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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BF 개척사(김모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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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금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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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07 |
UBF의 초기 개척의 산증인이신 김모세 목자님이 며칠 전 소천하셨습니다. 70이 넘으셨음에도 스탭 미팅 후에 저희 젊은 목자님들과 어울려 족구하실 때, 때론 넘어지기도 하시고 강스파이크를 온 몸으로 막아내시던 열정적인 모습을 기억합니다. 쓰러지시기 전 날 차로 목자님을 모셔드린 것이 제가 본 목자님의 마지막 모습입니다. 언제나 말이 별로 없으셨지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따뜻함과 인자함으로 섬겨주시던 모습이 선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한 길을 달려오신 그 인생을 생각할 때 참으로 감동이 되면서도 마음이 너무나 아픕니다. 귀한 종의 믿음의 증언을 기억하고자 최근 독일 학생 수양회에 가셔서 발표하셨던 UBF 개척사 강의안을 올립니다. 동역자님들과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 UBF 개척사 강의 초기 UBF 조상들의 복음 신앙과 선교 정신 디모데후서 2:3,4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군사로 다니는 자는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15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 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사도행전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 안녕하십니까? 저는 한국에서 온 김모세 목자입니다. 피터 장 선교사님으로부터 개척기 역사에 대해서 전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준비를 했으나 시간이 충분하지 못해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이 점 이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 시간 우리는 개척기 UBF 조상들의 복음 신앙과 선교 정신 그리고 그들의 삶과 비전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배우고 각성하여 우리 중에 이루어 오신 하나님의 축복된 역사를 감당하고 잘 계승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시대적 사명을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 시대적 배경 하나님께서는 방황하는 한국 캠퍼스 지성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이사무엘 선교사님과 배사라 선교사님을 세우셔서 캠퍼스 복음역사를 시작하였습니다. 1961년 9월 1일 광주시 대인동 176-1번지에서 전남대와 조선대를 중심으로 UBF 학생복음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제 UBF 운동이 일어나게 된 시대적 배경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36년 동안 식민 통치를 받아오다 1945년 연합군의 승리로 일본이 패망함에 따라 해방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해방은 되었지만 한국인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국토는 양분되었습니다. 북쪽은 소련의 영향을 받은 공산 정권이 들어서고 남한은 민주정부가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북한은 남한을 공산화하기 위해 일찍부터 전쟁을 준비하여 소련으로부터 지원받은 탱크들을 앞세우고 1950년 6월25일 남한을 총공격해왔습니다. 남한은 반격 한 번 제대로 못해보고 영토의 거의 전부를 점령당했습니다. 그러나 미국 등 16개국 군대로 구성된 UN군이 남한 군을 지워하여 공산군을 몰아내고 영토를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3년 후 비무장지대를 주심으로 휴전 협정이 체결됨으로 전쟁이 끝났습니다. 그러나 150마일 휴전선 양쪽에는 세계 어느 곳 보다도 긴장감이 높은 가운데 양방 군대가 대치상태에 있으며 총성없는 전쟁이 계속되고 동족상잔의 비극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독일은 동서독이 나뉘어 있었지만 전쟁이 있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3년 동안 계속된 전쟁으로 국토는 폐허가 되고 250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으며 1천만 명 이상의 이산가족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일부 공산군은 남한에 남아 게릴라화하여 오랫동안 남한 주민들을 괴롭혔습니다. 산간지대는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이었습니다. 어렸을 때 저는 제 마을에서 여러 번 공산게릴라와 경찰들 사이에 전투가 벌어져 탄환이 벽을 뚫고 들어오고 박격포탄이 마당에서 터지며 마을 거리에는 여기 저기 시체들이 널려 있는 모습을 보는 일이 많았습니다. 북한은 현재도 남한에 비해 경제사정이 열악하고, 많은 사람이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남한으로부터 많은 원조를 받으면서도 아직도 핵무기를 만들고, 생화학 무기들을 갖추고, 남한을 공산화할 기회만을 노리고 있습니다. 전쟁 후 남한은 위정자들이 부정선거로 정권을 잡고 장기집권을 하며 독제정치를 하여 1958년 4월19일 학생들의 의거에 의해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는 데모 만능 시대가 되어 거리는 데모하는 군중들로 메워지고 들어선 정부는 무능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1961년 군부 구데타로 더 혹독한 독제정치가 실시되어 악순환이 계속되었습니다. 이런 가운데서 대학생들은 갈 바를 모르고 방황하게 되었고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 있는 대학생들에 대한 상한 목자의 심정 때문에 UBF역사가 태동하게 된 것입니다. 이 때에 지금은 고인이 되신 이사무엘 선교사님과 당시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였던 배사라 선교사님이 동역하여 대학생 복음 운동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2. 불타는 목자의 심정 복음운동이 시작되어 학생들이 하나 둘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이사무엘 선교사님과 배사라 선교사님 마음 가운데는 절망하는 대학생들에 대한 목자의 심정이 불타올랐습니다. 이사무엘 선교사님은 절망하고 의기소침해 있는 지성인들에게 “어떤 희망을 줄 것인가? 어떻게 하면 미래의 주인공이 될 대학생들의 영혼에 생기를 불어넣을 수 있으며, 미래의 창조적 개척자들이 되도록 도울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을 위해 기도하며 성경말씀으로 도왔습니다. 그 후로 이사무엘 선교사님은 항상 오토바이를 타고 뒤에 전남대와 조선대를 심방하시며 친형제처럼 사랑하고 섬겼습니다. 오토바이 뒤에는 항상 자신보다 큰 형제나 자매가 함께 타고 있었습니다. 저도 이사무엘 선교사님의 오토바이를 가끔 타는 일이 있었는데 한 번은 제가 시골집에 가 있었는데 광주에서 20Km나 되는 그 곳까지 오토바이로 심방을 오셨습니다. 그리고 저를 뒤에 태우고 광주로 오는데 나무꾼과 부딛쳐서 제가 3m 아래 논바닥으로 떨어진 일이 있었습니다. 대학생들은 이사무엘 선교사님의 섬기는 모습을 보면서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 사무엘 선교사님은 고학을 하면서 전북대 철학과와 서울 장로회 신학교를 졸업한 후 박사과정을 하고자 하는 소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학생들을 위해서 그 꿈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대학생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섬세한 사랑으로 도왔습니다. 이런 그의 사랑과 가르침으로 많은 하나님의 종들이 탄생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UBF 역사를 말하면서 배사라 선교사님의 헌신과 사랑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는 아름다운 미시시피 강변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의 부모님은 큰 농장을 소유한 부자였고 유명한 분들이었습니다. 편지에 주소를 “37 Benoit Mississippi USA” 라고만 쓰면 전해졌습니다. 그 농장은 비행기로 씨앗을 뿌리고 농약을 살포했고 흑인 47 가구가 그 집에서 일하며 살았다고 했습니다. 그는 부잣집 외동딸로서 얼마든지 영화를 누리며 공주처럼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6.25 전쟁이 끝난 2년 후 폐허가 된 한국에 선교사로 오셨습니다. 그때 아직 25세를 넘지 않은 아주 꽃다운 미녀였습니다. 그는 한국대학생들을 위한 한 알의 썩는 밀알이 되셨습니다. 대부분의 미국 선교사들은 광주시 양림동 녹음동산 위에 하얀 집을 짓고 한국사람들을 고용하여 부리며 미국식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그는 단칸 셋방에서 연탄을 때고 김치와 된장국을 먹으면서 학생들과 함께 살며 섬겼습니다. 이 때문에 다른 미국 선교사님들로부터 왕따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배사라 선교사님은 콧대 높고 교만한 미국 사람이지만 자존심을 버리고 이사무엘 선교사님의 영적인 동역자요 비서로서 일했습니다. 그 분도 인간이기 때문에 스위트 홈의 꿈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불쌍한 한국 학생들의 영적 어머니요 목자가 되기 위해 결혼의 꿈도 버리셨습니다. 저희들은 처음에 그렇게 훌륭한 인간조건을 가진 분이 왜 결혼을 하지 않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은 결혼을 하지 않고 사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이해가 되지만 그 때 한국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한 번은 소기도회에서 결혼을 권고하는 결의를 한 일도 있었는데 그래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러한 그의 한국 대학생들에 대한 아름다운 사랑과 주님께 대한 헌신은 학생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특히 많은 자매님들이 자신의 꿈과 이상을 부인하고 헌신적인 목자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는 한국말로 그룹공부를 많이 섬기셨고 요한복음 영어 성경공부로 새벽과 오후에 섬기셨습니다. 영어 성경공부를 통해서 양들이 많이 퓌슁되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조상들의 목자의 심정을 믿음의 유산으로 계승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목자의 심정은 하나님의 마음이요, 우리 주님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다시 이 목자 심정을 회복하고 계승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3. 영적 지도자 양성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많은 문제들이 있었는데 이사무엘 선교사님은 이 모든 문제 가운데서 가장 큰 문제는 참다운 영적인 지도자가 없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참다운 영적인 지도자가 일어날 때에야 이 나라와 이 시대에 소망이 있다고 보셨습니다. 그는 참다운 지도자의 모델을 예수님에게서 찾았고, 사도 바울에게서 찾았습니다. 사도 바울의 신앙과 열정, 사명감과 개척 정신은 초대 교회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UBF조상들은 이러한 바울을 지도자 상으로 하여 배우고자 했으므로 자연히 우리 모임은 초대교회를 본받게 되었습니다. UBF가 지향하는 이러한 지도자 상은 UBF 선서문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군이다.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이 된다. 하나.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군이다. 하나님의 영광과 조국을 위해 자진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한다. 여기서 일꾼이 된다」는 후에 「기독교 인생관을 확립한다」로 또「하나님의 영광과 조국」은「성서 한국과 세계 선교」로 바뀌었고「우리」는「나」로 바뀌었습니다. 이 선서는 디모데후서 2:3절과 15절 말씀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UBF가 지향하는 지도자 상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같이 UBF가 지향하는 목적은 첫째, 대학 지성인들이 성경공부를 통해 기독교적인 인생관을 확립하고 더 나아가 하나님 앞에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 즉 지도자를 양성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영광과 조국을 위해 자진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할 수 있는 사명 인을 양성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목적으로 성경을 공부했기 때문에 성경 공부도 자연히 이론적이고 지식적인 공부가 아니라 말씀을 영접하고 순종하는 실천 신앙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이사무엘 선교사님은 학생들로 하여금 비범한 지도자들이 되도록 도우셨습니다. 1966년 1월 5일 기도회 때 전한 메시지에 보면 “크리스천의 역할은 시대를 위해 녹고 타는 데 있다. 우리가 무엇을 얻기 위해서 크리스천이 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주기 위해서 국가를 위해서 주님이 주신 지상 명령을 따르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UBF는 방황하는 시대 속에서 그들의 목적을 설정해 주고 나아가야 할 방향을 바로잡아 주어야 한다.” 특히 당시 대학생들은 미국을 무조건 동경하고 물질주의, 이기주의에 물들어 가고 있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국가적 부강을 추구하고 애국심을 강조하는 민족주의적인 경향이 없지 않았습니다. 제가 처음 나왔을 때 저도 이런 애국적 성향이 짙은 이사무엘 선교사님의 사상 강좌에 많은 매력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UBF는 결코 편협한 민족주의 운동이나 경제적인 운동으로 흐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조국』은 얼마가지 않아 『성서한국과 세계선교』로 바뀌었습니다. 우리나라가 축복받는 길은 『성서한국』 즉 하나님을 경외하고 성경을 사랑하는 백성이 되는 것임을 강조했습니다. UBF 운동의 첫째 목표는 이 나라 백성이 성경을 사랑하는 백성이 되게 하는 데 있었습니다. 사상 운동이 아닌 순수한 복음 운동으로 방향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그치지 않고 『조국』은 『세계선교』로 바뀌므로 Nationalism 에서 벗어나 『세계선교』라는 Universalism 으로 그 성격과 방향이 바뀌게 되었고 오늘날 UBF의 목표인 『성서 한국 세계 선교』라는 본궤도에 진입하게 되었습니다. 이와 더불어 성경 공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에 기초한 영적 각성운동으로 그 성격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 사무엘 선교사님은 학생들에게 지도자로서 자아 인식을 시키고 영적인 지도자로서 자부심과 비전을 갖도록 도왔습니다. 이사무엘 선교사님은 그들이 내적인 깊이와 사상성을 가진 지도자들이 되기 위해 신앙의 용기를 갖도록 격려했습니다. 그래서 적당주의, 열등의식, 권위주의, 이기주의, 한국의 고질병인 시기심 등 병적인 내면 문제를 치료하기 위해 각 사람의 심령에 도전하였습니다. UBF리더들이 좁은 생각과 자아에서 벗어나 국제무대에 나아가 쓰임 받는 사람들이 되도록 하기 위해 성경 공부와 독서에 힘쓰도록 했습니다. 당시 소 위원 자격에는 학교 성적이 평균 B학점 이상이라야 했습니다. 더 나아가 모두 장학생이 되도록 독려했습니다. 특히 영어 공부는 필수였습니다. 당시 한국 사회는 가난하고 정치적 민주화는 요원하여 젊은이들이 비전이 없었습니다. 이런 시대적 상황 가운데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겨우 취직해서 자기 하나 잘 먹고 잘 사는 소시민이 되는 것이 꿈이었고 국가나 민족을 생각한다는 것은 요원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세계를 생각한다는 것은 더욱 요원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사무엘 선교사님은 UBF리더들이 넓게 생각하며, 또 조그마한 가능성만 보이면 믿음으로 도전하여 새 역사를 창조하는 지도자들로 키우고자 했습니다. 이를 위해 학생들이 시대에 대한 문제의식과 역사의식을 갖도록 하였고, 시대에 대한 목자의 심정과 사명감을 가진 지도자들로 성장하도록 도왔습니다. 이런 훈련은 시대에 대한 문제의식과 역사의식을 갖도록 하였고 시대적인 사명감을 가진 지도자들로 자라게 하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이사무엘 선교사님은 한 사람의 내면무제를 간파하시고 적절한 훈련을 줌으로 영적 지도자로 자라게 도우셨습니다. UBF운동은 디모데 후서 2:15절을 요절로 잡고 하나님께서 쓰시는 영적인 지도자를 양성하여 한국과 세계역사 흐름을 바꾸고자하는 복음운동이었습니다. 그 결과 지금보다 훨씬 더 먹고살기 힘들었는데도 진리를 향한 열정과 진심이 뜨거웠습니다. 시대에 대한 문제의식과 목자의 심정이 강렬했습니다. UBF 역사에 대한 주인의식을 가지고 열정적으로 헌신했습니다. 이는 마치 예수님께서 갈릴리 촌부들을 제자로 부르시고 영적인 지도자들로 키워 1세기 양들을 먹이고 세계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게 한 것과 같았습니다. 오늘날 UBF가 제자양성을 통해 본국 캠퍼스를 개척하고 세계선교를 이루게 된 원동력이 바로 초기 역사의 영적 지도자 양성에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4. 철저한 성경중심 UBF의 처음 명칭은 [대학생 성경 연구회]였습니다. UBF는 처음부터 성경을 읽고 연구하는 열정이 뜨거웠습니다. 이사무엘 선교사님은 이렇게 강조하셨습니다. “리더가 되려면 먼저 성경을 읽고 연구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너무나도 부족하므로 하나님의 교훈과 책망을 받아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함을 받기 위해 성경을 읽어야 하겠습니다.” 이사무엘 선교사님은 성경을 읽는데도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일년에 성경책 한 권씩이 어찌나 많이 성경을 읽었던지 성경책이 부풀어서 두 권만큼이나 크게 되었습니다. 1976년 시카고로 가시면서 다른 책들은 모두 한국에 남기고 가셨는데 10권이 넘는 부프른 성경책들은 가보라고 가지고 가셨습니다. 우리 모임이 시작된 것도 성경으로 절망 중에 있는 대학생들을 소생시키고자 하는 뜻에서 였습니다. 처음에는 질서 없이 무조건 모여서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것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우리 모임이 생명력이 충만한 것은 바로 이 깊이 있고 또 실생활에 적용하는 실제적인 성경공부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이 발전하여 나중에 [성경 기초 공부 문제집]이 나오게 되었고 또 자신이 받은 은혜를 서로 나누는 소감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당시 전남대와 조선대를 중심한 캠퍼스 개척과 성장은 이 Group Bible Study를 통해 이루어졌고, 66년도에는 팀수가 100개가 넘게 되었으니 역사가 얼마나 활발했는가 알 수 있습니다. 그 당시 센타에서의 말씀공부는 다양하였습니다. 요즈음은 양들이 요회나 주일 집회 때만 공식적으로 참석하고 주중에 한번 1:1공부를 하면 되지만 그 때는 날마다 센타에서 성경공부와 기도모임이 있었습니다. 이 때는 성숙한 리더들 중에서 말씀공부를 인도하였고 어떤 때는 요즈음 성경학교 식으로 이사무엘 선교사님의 요한 복음 강의라든지 서신서 등 특별강의가 있었습니다. 이상에서 살펴본 대로 우리는 참으로 다양한 방법으로 열심히 성경을 공부했습니다. 교회에서도 UBF하면 말씀이 있는 곳으로 인정하고 성경공부를 위해 사람들을 보낸 일도 있었습니다. 사실 저희 초기 목자들은 정식 신학교육도 받지 않고 Staff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다양한 말씀공부와 훈련으로 우리 모임은 말씀이 깊고 풍성하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런 훈련을 통해 목자들은 말씀의 종들이 되었습니다. 후에는 일용할 양식과 강의안들도 쏟아져 나오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학생시절부터 말씀을 연구하고 말씀대로 살고자 투쟁하는 가운데 절망과 의존심에 찌들었던 학생들이 변하여 목자가 되고 선교사가 되고 영적인 지도자들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세계선교로 방향을 잡게 된 것도 이 성경 공부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복음서 공부를 마칠 때마다 마지막장에는 항상 너희는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예수님의 세계 선교 명령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공부하고 순종하고자 했으므로 이 명령에도 순종하지 않을 수 없었고, 결국 세계 선교가 우리 모임의 목표가 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로 말씀의 은혜를 알게 하시고 또 순종하도록 도우사 이제 세계에 대하여 제사장 백성으로 귀하게 쓰시는 이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5. 간절한 기도 역사상 모든 학생복음운동은 소수의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그 시대를 위해 기도하는 모임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영국의 IVF도 건초더미에 모여 몇 사람이 기도함으로 시작되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소수의 영적 지도자를 양성할 목적으로 만든 소기도회에서 하는 중요한 일은 거의 대부분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소회는 1961년 여섯 명의 소위원들로 시작되었습니다. 이들은 점점 늘어나서 많을 때는 30 명이 넘어가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각 단과 대학별로 기도 모임을 만들고 모임 때마다 기도 제목을 나누고 함께 기도하였습니다. 소회를 비롯해서 모든 모임이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끝났습니다. 당시에는 12시부터 새벽 4시까지 통행금지가 있었는데 소회 모임을 갖고 기도하다 보면 12시를 넘길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면 통행금지가 해제되는 새벽 4시가 되기까지 빙 둘러앉아서 합심기도를 했습니다. 그 때는 둘씩 기도하는 일도 없었습니다. 몇 명이 되었든지 빙 둘러 앉아 모두 하는 것이었습니다. 수가 많아짐에 따라 기도 시간이 길어져서 어떤 때는 기도를 마치면 2 시간이 넘어가는 때도 있었습니다. 이때 기도하다가 코를 골며 자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기 차례가 되면 어김없이 깨어서 언제 코를 골았느냐는 듯이 부르짖으며 기도했습니다. 어떤 때는 캠퍼스에 퓌싱을 나가고 양들을 심방하고자 하는 데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기도하지 말고 나갑시다.” 라고 말하면 배사라 선교사님은 “바쁠 수록 더 기도해야 합니다.” 하고 붙잡는 것이었습니다. 기도하다가 심방을 못한 때도 많았고 퓌슁을 못한 때도 많았지만 그래도 역사는 왕성하게 일어났습니다. 역사는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 때는 이레 저레 기도를 많이 해서 눈을 감고 사는 때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1971년 여름수양회 때 이사무엘 선교사님은 10년 후인 1981년에는 나이아가라에서 200명이 모여 국제 수양회를 갖자고 기도제목을 제시하셨습니다. 이 때는 겨우 미국에 3 명의 선교사가 파송된 때였습니다. 너무 기도제목이 황당한 것 같았습니다. 될 것 같지 않아서 반신반의한 믿음으로 10년 동안 줄기차게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기도도 응답해주셨습니다. 제가 1981년 나이아가라 수양회에 참석한 일이 있었는데 220 명이 참석하여 수양회를 했습니다. 그 때 처음으로 독일에서 있었던 수양회도 참석했습니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대학생들이었기에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기도 밖에 없었습니다. 그야 말고 맨주먹으로 일해야 했으므로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할 뿐이었습니다. 사실 기도처럼 힘든 노동도 없습니다. 신앙생활 가운데서 가장 고된 것이 기도입니다. 우리는 양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물론 개척 지구를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당시 우리의 선교목표였던 동남아와 그리고 세계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김한옥 선교사를 제주에 파송하고 난 후에는 매일 부르짖으며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서울을 개척할 때에는 기도지원과 동시에 많은 편지로 지원했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기도했을 때 개척하기 시작한 지 불과 5년만에 제주, 전주, 대전, 대구 등 지방 4개 지구를 개척하게 되었습니다. 저희들의 세계선교 기도는 동남아를 위해서 기도하는 데서 시작하였습니다. 동남아 선교는 이뤄지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대신 독일, 미국에 선교의 문을 열어주셨습니다. 6. 한 사람을 세우는 역사 UBF역사는 처음부터 무리 중심의 역사가 아니라 한 사람을 인격적으로 돕고 세우는 역사였습니다. 소회 때에도 한사람이 결석하면 소회를 중단하고 그를 심방하여 데려와서 소회를 시작하였습니다. 또 소회는 만장일치제였습니다. 예를 들어 신임 소위원을 추천할 때에도 한사람만 반대해도 부결되었습니다. 또 캠퍼스를 위해서 기도하면서도 우리는 늘 한 사람의 조상을 세워 주시도록 기도했습니다. 당시 가장 큰 기도 제목도 한 사람의 주인을 허락해 주시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전남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전창선(전요한 목자)형제를 조선대학교에서 김관옥(본인)형제를 세워 주셨습니다. 전창선 형제는 UBF가 시작된 이래로 한 번도 결석한 일이 없었습니다. 뿐 아니라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양들을 깨워 보통 4, 5 명씩 데리고 나왔습니다. 전요한 목자님은 함께 의과대학을 다니던 정규해 형제(현재 시카고 선교사)를 한 집에서 데리고 살면서 도왔습니다. 이러한 그의 사랑으로 인해 당시 전남 의대 정원이 80명이었는데 60명의 학생이 센타에 나와 말씀공부 했습니다. 그는 또 항상 섬기는 자세로 살았습니다. 그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신발정리, 의자 정리 등 마치 수위처럼 일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 한 사람을 세우기 위해서 25년 동안이나 그를 키우셨습니다. 전요한 선교사는 언젠가 이렇게 말한 일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이 모임을 떠나고 이사무엘 선교사님과 배사라 선교사님이 이 모임을 떠나더라도 나는 최후까지 남은 자가 될 것입니다.” 그는 이사무엘 선교사님이 1976년 세계선교를 위해 미국으로 가셨을 때 내과의사직을 버리고 한국 대표 직분을 맡게 되었습니다. 30년 까까히 한국역사를 섬기고 지금은 배사라 선교사님에 이어 시카고에서 세계 대표직분을 감당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3년 동안 많은 무리보다도 12제자들을 집중적으로 키우셨습니다. 오늘날도 새롭게 개척되는 지구에서는 항상 아브라함 한 사람을 세워주시도록 기도합니다. 또는 마리아 한 사람을 세워주시도록 기도합니다. 이 때 아브라함이 되지 못한 사람은 섭섭한 생각을 갖기 쉽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조상을 세우는 일은 아주 중요합니다. 무리는 어려운 일이 닥치면 바람에 날리는 겨와 같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광주에서 UBF가 개척되어 수백 명이 센타에 나왔고 성탄 예배 때는 800 명이 참석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까지 남아 있는 사람은 7명 이내입니다. 이 점에서 1대1 역사는 아주 중요합니다. 한 사람의 지도자를 키우는 것이 바로 그 시대를 살리는 길이요, 세계를 살리는 길입니다. 1대1사상은 우리가 늘 간직하고 실천해야 할 중요한 사상입니다. 저는 광주에서 20 Km 쯤 떨어진 아주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부모님들이 신자들이셨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교회는 나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또한 집안 형편이 가난해서 정상적으로 진학하지 못하고 대학은 4년이나 지각하여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정상적으로 진학하지 못해 마음이 몹시 슬펐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거기에는 하나님이 뜻이 계셨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가 정상적으로 진학했다면 저는 1961년 봄에 대학을 졸업하고 떠났을 것이므로 UBF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저를 UBF역사에 쓰시고자 4년 늦게 대학에 갈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1학년 때부터 개척역사에 쓰임 받게 된 것입니다. 제가 진학해서 2학기가 시작될 때 UBF역사가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UBF를 통해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고 인생의 의미를 찾게 되었고 제가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할 것인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에는 산으로 둘러싸 인 가난한 농촌에서 살았기 때문에 우물안 개구리와 같이 큰 꿈을 가질 수 업섰습니다. 새마을 지도자가 되고자가 되어 잘 사는 농촌을 만들고자 하는 소박한 꿈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덴마크의 달가스나 그룬드비히 같은 사람을 연구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대학에 와서 UBF를 통해서 학생 복음 운동과 세계선교를 위해서 살기로 바뀌어졌습니다. 우물 안 개구리가 세계선교 비전의 사람이 되었으니 얼만 큰 축복입니까? 저는 조선대 개척을 위해서 열심히 뛰었습니다. 학생시절에는 열심히 뛰다가 몸살이 나서 눕는 때도 많았습니다. 제가 4학년이 되었을 때는 조선대에 17개의 성경공부그룹이 생기게 되었고 1주일이면 리더모임 등을 포함해서 22개의 모임을 참석하고 있었습니다. 학생 때 군대에 갔다면 16개월만 복무하면 되었지만 개처역사를 섬기기 위해 대학을 졸업하고 입대하여 30개월을 복무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는 바로 스탭 목자가 되었고 군대에 복무하는 기간을 제외하고는 지난 48년 동안 UBF를 떠나본 일이 없었습니다. 그 동안 서울에 있는 중앙대 개척역사에 쓰임받고 지금은 한국 UBF 본부에서 사무총장 일을 섬기고 있습니다. 쓸모없는 인생을 살다가 갈 자를 하나님의 귀한 역사에 쓰임받게 하신 것을 인하여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7. 주인 정신 초기 UBF는 주인 정신을 심고자 애썼습니다. 처음 센타에 나오면 자기를 소개할 때 오른 손을 들고 내가 주인이다!하고 선서를 먼저 하였습니다. 그리고 여러 면에서 주인의식을 심었습니다. 모임에 나오는 사람들을 분석해보면 주인의식을 가지고 참석하는 사람과 손님의 자세로 참석하는 사람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주인의식을 가진 사람은 항상 모임이 시작되기 전에 와서 청소도 하고 의자도 놓고 환경을 이룹니다. 또 앞자리에 앉습니다. 그러나 손님의 자세로 참석하는 사람은 항상 모임이 시작된 후에 와서 뒷자리에 앉았다가 모임이 끝나기가 바쁘게 사라집니다. 그런 사람은 모임 가운데서 어떤 역사가 일어나고 있는지 잘 알 수 없습니다. 주인의식이 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잘 알 수 있고, 진정한 기쁨도, 아픔도 맛볼 수 있습니다. 믿음도 성장합니다. 하나님은 주인의식이 있는 사람들을 쓰셔서 그의 역사를 이끌어 가십니다. 우리가 한 모임에 대해서 주인의식을 가질 때 그 모임의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UBF는 세계에 대해 주인의식을 가졌고 상한 목자의 심정을 가졌기 때문에 오늘날 90개국에 1,600 명이상의 선교사를 파송하게 된 것입니다. 이 사무엘 선교사님은 자주 사도 바울의 주인의식을 배우도록 가르쳤습니다. 사도 바울은 비록 약소국의 청년이지만 강대국 로마에 대한 주인의식과 책임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사무엘 선교사님은 우리가 비록 현재는 힘이 없고 우리 사회가 여러모로 힘든 환경에 있지만 이 시대 강대국 로마를 향한 지도자로서의 자부심과 영적인 권위와 자격을 갖추는 데 힘써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소회모임은 주인의식을 심는 좋은 훈련장이었습니다. 당시 모든 결정은 소회에서 이루어졌는데 소회에서는 열띤 토의를 해서 결정하고 결정된 사항은 모두가 주인의식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동참하였습니다. 우리는 캠퍼스에 대한 주인의식을 가지고 기도했고 캠퍼스 복음화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또한 나라에 대한 주인의식을 심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힘없는 민족이었으므로 우리 민족에 대한 자부심을 갖기가 어려웠고 더구나 내가 이 민족의 주인이며 이 민족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을 갖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이 사무엘 선교사님은 우리 민족에 대한 주인의식을 심기 위해 끊임없이 성경을 통해서 한국 민족의 영적인 문제를 지적하고, 우리 속에 있는 한국 민족의 문제를 극복하도록 훈련했습니다. 또한 동남아에 대한 주인의식을 심었습니다. 우리는 처음에는 세계선교는 감히 생각할 수도 없어서 동남아 선교를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우리는 동남아의 주인이다.라는 구호를 외치며 주인의식을 가지고 기도했습니다. 이 믿음이 점차 커져서 이제는 세계에 대해 주인의식을 가지고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세계에 대해 주인의식을 가지고 기도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세계를 우리 손에 맡기셨고 UBF를 통한 세계선교 역사를 이루어가고 계십니다. 이 시대는 날이 갈수록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이 되어갑니다. 우리가 더욱 이 시대에 대해서 주인의식을 가지고 Campus개척과 세계선교를 위해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기도를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8. 주는 정신 예수님은 날 저문 빈들에서 많은 무리들을 부담스러워 하고 있는 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아무리 어려운 형편에 처해 있을지라도 그들이 양떼들에 대한 주인의식을 갖고 먹을 것을 주는 자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주는 삶’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두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행20:25) 당시 우리나라는 받는 것에 익숙해 있었습니다.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들로부터 많은 원조를 받으면서 우리는 얻어먹을 수밖에 없는 백성이라는 생각이 박히게 되었습니다. 이런 시대에서 우리 민족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 UBF는 『주는 정신, 주는 생활』을 하고자 몸부림을 쳤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도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주님의 말씀을 영접하고 주는 생활을 실천하여 자비량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을 포함한, 한국교회는 받는 정신이 충만해 있었습니다. 복음도 받고, 선교사도 받고, 구호물자도 받고, 사랑도 받고, 위로도 받고, 받고자하는 거지 근성에 찌들려 있었습니다. 이사무엘 선교사님은 “우리도 문둥이 같이 오그라진 손을 펴서 주는 자가 됩시다.” 하고 구호를 외치며 주는 운동을 벌였습니다. 다과를 먹을 때도 옆 사람에게 과자를 주며 “주는 자가 됩시다.” “주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하며 구호를 외쳤습니다. 사무엘 선교사님은 학생들에게 어찌하든지 주는 삶을 살며 주는 정신을 심고자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물질 자립을 위해, 선교헌금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특히 거지근성과 의존심을 철저히 뽑고자 주는 생활을 훈련했고, 이를 위해 선교사업에 힘썼습니다. 주는 생활을 위해서는 세계선교를 위해 헌금하는 것을 가르쳐야 했습니다. 처음에는 가난한 학생들이 헌금을 하지 않는 것은 당연시되었습니다. 그래서 입을 열어 헌금하자는 말이 나오지 않았지만 우리가 세계를 먹이는 주인들이 되기 위해서는 주는 정신을 가르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주도에 선교사를 파송하면서 헌금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한 사람 두 사람 동참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어떤 사람은 차를 타지 않고 걸어서 학교를 다니고 차비를 아껴서 헌금을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헌금을 위해서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피를 팔아서 헌금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진심을 드리고 헌신적으로 주는 생활을 실천하고자 노력했을 때 나중에는 제주도를 개척할 뿐 아니라 전주 대구 대전 등을 개척해나갈 수 있었습니다. 대전을 개척할 때의 일이었습니다. 이사무엘 선교사님은 어느 날 광주센터의 문짝을 모두 뜯어 용달차에 실어 대전으로 보냈습니다. 이를 본 한 형제는 형제들과 아무런 의논도 없이 문짝을 뜯어 보낸다며 화를 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는 생활의 좋은 귀감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각 지구에서 자립역사를 이루며 힘차게 세계 선교를 감당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주는 정신과 믿음이 그 기초가 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구제사업을 통해서도 주는 정신을 실천했습니다. 성탄 때마다 양로원과 고아원을 찾아 구제하였고, 또 당시에는 걸인들이 많았는데 음식을 만들어 이들을 초청하여 잔치를 벌이기도 하였습니다. 이 구제사업은 점차 커져서 나중에는 방글라데시, 에티오피아, 멕시코, 소말리아, 북한 등을 위해 헌금하고 모금도 하였습니다. 원조 받던 미국에 선교사를 파송하고 센터를 얻기 위해 헌금하여 보냈습니다. 형제들은 미국을 돕는 것에 기쁨으로 동참했습니다. 그것은 우리 민족이 이제까지 미국의 원조를 의지하던 데서 주는 역사, 아낌없이 헌신하는 역사, 그리고 우리나라를 넘어 세계를 위해 주는 역사로 바뀌는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오병이어, 시간과 진심과 물질의 오병이어, 선교사 파송의 오병이어를 받으시고 넘치게 축복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하여 90개국에 선교사를 파송하심으로 세계에 대하여 제사장 나라로 쓰시고 계십니다. 또 외국의 원조를 받기만 하던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도 부강해져서 다른 나라를 원조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9. 군인정신 UBF 정신에서 군인 정신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이 군인정신은 UBF의 내면에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소위원 선서문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군이다.” 하는 내용이 두 번이나 반복됩니다. 즉 UBF man은 하나님의 영광과 성서한국과 세계 선교를 위해 싸우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군이라는 것입니다. 이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싸움이 아니라 사단과의 싸움이요, 죄와 싸우는 영적인 싸움입니다. 이 싸움의 궁극적인 목표는 이 땅에 복음 전파를 통한 하나님 나라 건설에 있다고 할 것입니다. 이 사무엘 선교사님은 끊임없이 군인 정신을 강조하였습니다. “군인이 된 자는 자기 일에 메이지 않고 여러 가지를 절제해야 하듯이 우리들은 영적인 군사로 모집한 예수 그리스도를 총사령관으로 모시고 충성해야 합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능력을 덧입고 양들의 강퍅한 심령에 예수님의 사랑을 심어야 합니다. 또한 이민족이 참된 자유를 소유하는 민족이 되기 위해 군사로서의 임무를 다해야 합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모임은 초창기부터 주님의 십자군으로서 분명한 자부심이 있었고 그리스도의 좋은 십자군이 되고자 부단한 훈련을 받았습니다. 제가 군대에 가서 많은 훈련을 받았는데 UBF 훈련은 군대 훈련보다 좀 더 센 것 같았습니다. UBF에는 ‘훈련’, ‘투쟁’, ‘정복’이라는 전투적인 용어들이 많습니다. ‘양식 훈련’, ‘메시지 훈련’, ‘소감훈련’, ‘장막 훈련’, ‘말씀 투쟁’, ‘기도 투쟁’, ‘소감 투쟁’, ‘1대1 전투’라는 등 많은 영적인 훈련을 받았습니다. 또한 개척 역사를 감당할 때는 캠퍼스 정복, 동남아 정복을 기도 제목으로 내세우며 끊임없이 기도의 싸움을 싸웠습니다. 이 사무엘 선교사님은 자신을 장차 장군들이 될 사관생도를 훈련하는 육군 상사로 자처하시고 목자들을 끊임없이 훈련하셨습니다. 이 같은 초기의 강한 영적 훈련을 통해 지금의 UBF Staff들과 선교사들이 탄생되었습니다. 이사무엘 선교사님은 시카고에 가서는 야전군 사령관처럼 군복을 입고 군화를 신고 베레모를 쓰고 찦차를 타고 세계선교를 섬기기도 하셨습니다. 이 군인 정신을 잘 계승하여, 훈련을 사랑하고 파이팅 스피릿이 충만해야 하겠습니다. 이사무엘 선교사님은 훌륭한 훈련관이기도 하셨습니다. 그는 시카고에 있으면서도 한국에 있는 저의 문제를 제가 아는 것보다 더 잘 알고 훈련제목을 주시기도 했습니다. 저는 한국의 목자들 가운데 훈련을 많이 받기로 유명한데 때로는 제가 무슨 이유로 훈련을 받는 지도 모르고 훈련을 받고 있는 때도 있었습니다. 훈련이 없이 있는 그대로는 하나님께서 쓰실만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베드로도 많은 훈련을 통해서 예수님의 수제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저는 굴러다니는 바윗돌 과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광주 개척시절에는 『바위』라는 별명으로 불려지기도 했습니다. 제가 『모세』라는 이름을 얻기까지는 많은 훈련의 결과로 얻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한국에 있는 목자들 가운데는 모세라는 이름을 가진 자들이 많습니다. 훈련도 없이 함부로 모세라는 이름을 쓰고 있어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10. 공동체 정신과 소회 공동체 정신도 UBF의 특징 중의 하나입니다. 공동체 정신으로 인해 우리는 아름다운 동역을 이룰 수 있었으며 마음과 힘을 합하여 개척 역사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이 사무엘 선교사님은 하나되지 못하는 우리 민족의 고질병을 깊이 인식하고 하나되기 위해서 많은 힘을 기울였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동역과 합심으로 이루어지는 역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제자들에게 다른 어떤 말씀보다도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제자들이 이 말씀에 순종하여 합심하여 전혀 기도에 힘썼을 때 사도행의 놀라운 역사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이 사무엘 선교사님은 1966년 2월 5일 성경공부 시간에 공동체 정신에 대해서 이같이 말했습니다. “우리 한국사람들은 공동체 의식이 희박한 민족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마음을 합할 때 무거운 십자가도 가벼워 질 수 있습니다. 같이 울고, 같이 기도하고, 같이 일하는 곳에 참된 기쁨이 있습니다. 그러나 공동체가 파괴될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수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공동체를 파괴하는 것은 무서운 죄악입니다.” 우리는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 많은 애를 썼고 디트리히 본회퍼가 쓴 『신도의 공동 생활(Life Together)』은 소위원들의 필독서가 되었습니다. 같이 음식을 먹고 함께 운동도 했습니다. 주말이면 양림동 녹음 동산에서 야구, 배구 등 운동과 놀이를 하면서 함께 교재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요즈음은 족구로 체력을 단련하고 교제를 나눕니다. 시골에 갔다가 오는 사람들은 엿 등의 먹을 것을 가지고 와서 소회 때 함께 나눠 먹기도 했습니다. 특히 소위원들은 흉금을 털어놓고 깊이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슬리핑 펠로쉽도 많이 나누었습니다. 처음 소기도회는 전남대학에서 전창선, 김한옥, 김춘순, 정수일, 이철우, 그리고 조선대학에서는 김관옥(본인) 6 명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소기도회의 중요한 임무는 UBF의 당면 문제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고 또한 중요한 문제들을 의논하고 결정하는 일이었습니다. 소기도회의 결정은 만장일치제였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만 참석하지 않아도 회의는 열릴 수 없고 또한 어떤 의안에 대해서 한 사람만 반대해도 의결될 수 없었습니다. 언젠가 한 번은 고향에 간 한 사람이 눈이 많이 와서 교통이 두절되어 시작시간에 오지 못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개회를 하지 못하고 기도를 하고 있는데 50 Cm 이상의 눈길을 20 Km 이상을 걸어서 도착해 회의를 시작한 일이 있었습니다. 회의가 열리면 열띤 토론이 계속되었고 규칙이 아주 엄격했습니다. 나중에는 소기도회도 30 명 이상으로 늘어나게 되었는데 소기도회원이 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또 소기도 회원의 긍지도 아주 대단했습니다. 여러 차례 부결되는 아픔을 겪어야 될 수 있었습니다. 소기도회에는 회장과 부회장이 있었는데 회장은 회의를 사회할 뿐만 아니라 매일 쎈타에 나와서 양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기도해주고 때로는 심방을 하고 주인의식을 갖고 섬겨야 하기 때문에 아주 고닲은 일이어서 한 달 이상을 섬기기가 어려워 임기가 1 월이었습니다. 11. 개척정신 UBF는 처음부터 개척정신에 불탔습니다. 광주에서 캠퍼스 복음 역사가 시작된지 삼년 만에 전남대학교와 조선대학교 각 단과 대학과 교육대학이 모두 개척되었습니다. 1963년부터는 동남아를 개척하기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1964년 봄에는 전남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한 김한옥 자매를 동남아의 첯 관문인 제주도에 선교사로 파송하였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이는 역사적이며 큰 의미를 가진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많은 교계 지도자들을 초청해서 성대하게 파송예배를 드리고 배로도 갈 수 있는 가까운 곳이지마나 모든 형제 자매들이 공항에 나가 환송을 하며 비행기로 파송했습니다. 또 몇 달 후에는 전남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한 정수일 형제를 대구 개척을 위해 파송했습니다. 그런대 우리가 한국의 다른 도시들을 개척하고자 할 때 예상치 못했던 장애가 발생했습니다. 배사라 선교사님이 광주에서 학생복음운동을 시작하자 다른 도시들에서도 다른 선교사들이 학생복음운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흉내만 낼 뿐 적극적으로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다른 도시 대학들을 개척하려하자 영역침입이라고 하여 한국교회 목사들을 동원하여 가로막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개척역사가 한국 전국으로 확대되는 데에는 상당히 진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장애도 파죽지세로 뻗어가는 개척역사를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드디어 1966년에는 이사무엘 선교사님을 한국의 수도인 서울에 파송하여 서울을 개척을 시작하게 되었고, 역사의 중심이 광주에서 서울로 옮겨지고 전국개척의 교두보를 구축하게 되었습니다. 서울에 와서 한국의 일류대학인 서울대 개척에 도전하고자 서울대 가까이에 센터를 마련했습니다. 그곳에는 이미 여러 다른 학생운동 단체들이 서울대를 개척하고 좋은 건물들을 마련하고 해외 유학을 다녀온 쟁쟁한 일꾼들을 배치하여 개척을 시도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상당히 높은 지위에 있던 이사무엘 선교사님의 친구 한 분이 “서울대 개척은 불가능 하니 그만두는 것이 좋을 것이라”며 말렸습니다. 우리보다 훨씬 좋은 조건을 가진 사람들이 해 보려 했지만 모두 파리만 날리고 있다고 했습니다. 직장을 구해주겠다고도 했습니다. 그런대 하나님을 믿고 기도로 도전했을 때 서울대 개척은 아주 활발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센타는 양떼들로 메워졌고 많은 목자들이 배출되었고, 선교사들이 배출되어 세계선교에 귀하게 쓰임받게 되었습니다. 서울대 개척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던 분은 후에 우리 모임에 강사로 초청되었는데 서울대에 일어난 역사를 보고 한마디로 UBF 역사는 기적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불타는 자립정신과 개척정신을 귀하게 쓰시는 분이십니다.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하심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그 때 믿음이 부족해서 세계선교는 엄두가 나지 않아 동남아 선교를 위해서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동남아 선교는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이를 꼬투리로 독일에 문을 여시고 간호원 선교사를 파송하게 되었고, 미국에 간호사 의사 선교사들을 파송하게 됨으로 세계선교 역사를 이루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조상들의 불타는 개척 정신을 크게 축복하셨습니다. 12. UBF역사의 교회사적 의미 첫째로 하나님은 UBF를 통해서 한국을 제사장 나라로 쓰고 계십니다. 1961년 가난한 한국, 그 가운데서도 한국의 갈릴리 전라도 광주에서 시작한 이 역사가 지난 40년 동안 90개국에 1,700여명의 선교사를 파송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역사는 어느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신 역사입니다. 동시에 이 역사는 한국 기독교 역사의 한 획을 긋는 실로 기적적인 역사였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UBF를 들어 쓰셔서 한국을 제사장 나라로 쓰고 계심을 입증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임한 하나님의 놀라운 특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날까지 줄기차게 세계선교를 감당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나라도 크게 축복하셨습니다. 50년 전 만해도 한국은 세계에서 선교 제 1 대상국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미국 다음으로 선교사를 많이 파송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한국교회가 옛날에는 UBF를 별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요즈음은 많은 것을 배우자하고 특히 자비량 선교에 대해서 많은 정보를 제공해주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난 40년 동안 UBF 역사만 축복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도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크게 축복하셔서 국제 사회에서 국가 위상이 크게 증진되어 선진국 대열에 진입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주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에 순종하여 주는 역사를 이루고, 세계 선교를 통해 주님을 기쁘시게 할 때 하나님은 이 나라를 넘치게 축복하셨습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 UBF 조상들의 믿음과 선교정신을 얼마나 귀하게 쓰셨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결론: 이상에서 우리는 UBF 개척기 조상들의 복음 신앙과 선교 정신을 살펴보았습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신앙생활에 그리고 세계선교역사를 감당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기도합니다. 기도: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부족한 저를 이곳에 보내시고 촉기 개척기 믿음의 조상들의 개척역사를 증거케 하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부족한 것이 너무 많은 것을 깨닫습니다. 제가 이곳 형제 자매들의 문제를 잘 모르기 때문에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 알 수없습니다. 불필요한 것들은 다 제해주시고 필요한 것들만 간직하게 도우시고 이 강의가 이들의 믿음에 큰 도움이 되게 하시고 이들이 전 독일 캠퍼스와 유럽 캠퍼스와 세계캠퍼스 개척역사를 이뤄주시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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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 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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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아브라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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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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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마누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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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금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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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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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음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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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금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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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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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이월드 클럽에 OB(Oxygen Brothers)게시판이 생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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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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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16 |
새내기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싸이월드 클럽을 만든지 한 달이 넘었습니다. 목자님들의 관심과 참여로 카페가 풍성해지고 새내기들이 오고가며 정보를 얻고 교제를 나누게 되어 감사합니다. 지난번 학생회 모임에서 평신도 목자님들의 다양한 경험을 새내기들과 나누면 좋겠다고 의견이 모아져 카페에 'OB들의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게시판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목자님들께서 현재 계신 곳에서 하고 계시는 업무가 무엇이며 그와 같은 업무에 종사하기 위해 필요한 소양은 무엇인지, 대학생활 동안엔 무엇을 준비하면 좋을지(어떤 과목을 공부하는 것이 필수적인지) 등을 간략히 올려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밖에 먼저 대학을 다녀본 선배로서 후배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들려주셔도 좋겠어요. (다만 성경 공부의 유익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삼가주시길^^;) 현재는 성택목자님께서(군에서 어떻게 아셨는지) '법조인의 길'에 대해서 올려주셨는데요, 좋은 내용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꼭 형식에 구애받으실 필요는 없고 자유롭게 올려주세요. 급하게 생각하실 필요 없이 시간이 되실 때 천천히 올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산소같은 목자님(Oxygen Brothers)들의 글을 기다리겠습니다^^; --------------성택 목자님 글을 참고로 올려봅니다--------------------- 안녕하세요. 제 소개를 할께요. 저는 96학번으로 법학을 전공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2006년 제48회 사법시험에 합격한 뒤 2007년 사법연수원 제38기로 입소하였습니다. 1년간의 연수생활을 거의 마치고 국방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현재 강원도 화천의 보병부대에서 군복무중인 선배입니다. 저는 대학입학 후 나름대로 뜻한 바 있어 사법시험에 도전하여 몇번의 실패, 극복, 도전, 합격의 과정을 거쳤습니다. 그리고 예비법조인의 양성소라할 수 있는 사법연수원의 연수과정을 거치며 법조인의 세계를 일부나마 체험하였기 때문에 법조인으로서 꿈을 가진 후배들에게 미력하나마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 법조인이란 무엇인가. 법학은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를 다루는 학문이자 기술입니다. 법은 사람과 사람사이에 생겨나는 법률문제를 해결하는 도구입니다. 그러면 법률문제는 무엇일까요? 법학은 의학과 비슷한 측면이 있습니다. 의학은 사람의 몸에 일어나는 병을 치료하기 위한 것입니다. 사람의 몸에 병이 생긴다면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의 조합이라 할 수 있는 사회에도 병이 생길 수 있습니다. 바로 사회에서 생기는 병이 법률문제입니다. 이 사회의 병(법률문제)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 법학입니다. 법조인은 사회의 의사라 할 수 있습니다. 의사가 인체에 대해 해부학적, 병리학적 지식을 가지고 병을 치료하듯 법조인은 사회,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 사람, 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법률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의사가 오진을 하게 되면 사람의 생명이 위태로워 지듯, 법조인의 오판은 사회를 위험하게 할 수 있습니다. 법원의 판결이 어떠한 영향을 끼치는가. 이에 대해서는 다음기회에 예를 들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무튼 법조인은 건강한 국가, 사회를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이므로 이러한 중요한 일을 할 수 있는 자질을 갖추어야 합니다. 2. 법조인이 되기 위해 무엇을 할것인가. 물론 법률지식을 공부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정말 공부열심히 해야 합니다. 앞으로 법조인이 되기 위해 사법시험을 준비하든 로스쿨을 준비하든 법적사고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법률지식을 흡수하는 데 혼신의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러나 우선 사람에 대해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신에 대한 가치관 자아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나는 왜 사는가, 내 인생의 목적은 무엇인가. 인간은 무엇을 추구하며 사는가. 인간문제의 근원은 무엇인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그 결론을 갖추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제 막 대학에 들어오고 법조인의 꿈을 꾸는 새내기여러분들은 이에 대해 생각해보시길 권합니다. 저같은 경우 이에 대한 결론이 났을 때 본격적으로 법학을 재미있고 의욕적으로 공부하던 기억이 납니다. 대학 3학년때 앞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다 선배와의 성경공부를 통해 이에 대해 체계를 잡았었습니다. 새내기 여러분 새내기여러분이 입학하면 기대와 달리 눈으로 보고 손으로 느낄 수 있는 감각적인 것을 추구하는 선배들로 인해 실망하게 됩니다. 저의 경우 그러했습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진지하게 고민해보고 해결해야할 인생관, 가치관, 세계관의 문제에 관심기울이시길 권해드립니다. 3. 맺으며 저는 현재 현역사병으로 군복무하고 있습니다. 원래 연수원을 수료하게 되면 법무관으로 편하게 군생활하게 됩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사정으로 연수원을 다마치지 못하고 이등병으로 군복무하고 있습니다. 이런 저를 연수원동기들은 다들 안됐다는 듯 생각합니다. 그런데 전주지방법원 부장판사를 하시다가 현재 사법연수원의 교수로 계시는 선배법조인이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병사로서의 군생활을 통해 극한의 상황에서 사람들이 어떠한 생각과 행동을 하게 되는가를 보게 될 것이다. 이것은 법조인으로 살고자 하는 너에게 큰 자산이 될 것이다. '라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저는 이 말씀에 전적으로 동감하게 됩니다. 저는 현재 '사람에 대한' 산교육을 받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예는 법조인이 되기 위해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잘 보여주고 있다 할 것입니다. 법조인을 꿈꾸는 새내기 여러분 법조인이 되기 위해 '사람', '자신'에 대해 고민하시고 생각하시길 권해드립니다. 앞으로 군생활 틈틈히 법조인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것들에 대해 OB들의 이야기란을 통해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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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문명의 기원(Q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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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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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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