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성경읽기선교회 관악5부

번호 제목 닉네임 조회 등록일
1195 파스칼의 확률론 [1]
[레벨:20]정아브라함
55 2019-10-19
날씨 이야기]파스칼의 내기 차상민 케이웨더 공기지능센터장 날씨가 쌀쌀해지면서 갈대 풍경이 가을 정취를 한껏 돋운다. 파스칼은 인간을 ‘생각하는 갈대’라 했다. 인간은 비록 미천한 존재이지만 사유를 통해 우주를 품을 수 있는 엄청난 존재도 된다는 말이다. 우주적 차원에서 보면 먼지보다 작은 존재인 인간이 기후변화로 지구가 멸망할 것을 걱정하고 있는 것을 보니 파스칼의 말이 과히 틀린 것 같지는 않다. 산업화 이후 인간이 배출한 이산화탄소가 온실효과를 만들어서 지구가 점점 뜨거워지고 있다는 것이 지구온난화론자의 주장이다. 이산화탄소 배출을 줄여 지구온난화를 막지 못하면 인류는 멸망할 것이란 경고가 유엔과 그 산하 전문 기관(IPCC)에서 나오고 있다. 하지만 온난화 재앙을 경고하는 사람들을 ‘불안 조성자(Alarmist)’라고 비난하면서 이들의 주장에 과학적 근거가 부족하다고 지적하는 ‘회의론자(Skeptic)’들도 있다. 이들은 온실효과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인간이 지구온난화의 원인이라고 단정하기에는 더 많은 과학적 연구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지구온난화에는 온실효과 이외에도 지구 공전 궤도, 해류, 화산 폭발 등이 훨씬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온실효과에 대한 기여도는 수증기가 95%, 이산화탄소가 4%, 나머지 온실가스가 1%여서 이산화탄소의 역할 자체가 작다. 게다가 이산화탄소 발생량의 97%는 자연에서 나오는 것이고 인간이 배출한 이산화탄소는 3%에 지나지 않아 결국 인간의 지구온난화 기여도는 0.12%로 미미하다는 것이다. 지난달에는 전 세계 500명의 과학자가 유엔 사무총장에게 현재의 기후변화 종말론이 과학적 근거가 부족하다는 항의 서한을 보내기도 했다. 지구온난화의 옹호론자이든 회의론자이든 어느 한편의 주장을 무시하기에는 각각의 과학적 근거가 만만치 않다. 하지만 양측이 일치하는 합의점은 ‘어느 과학자도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지구온난화로 재앙이 올 수도 있고 안 올 수도 있다면 과연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여기에는 소위 ‘파스칼의 내기’가 답을 얻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수학자이자 신학자인 파스칼은 신을 믿을지 말지를 결정하는 합리적 방법을 확률로 설명했다. 요약하자면, 신이 존재하지 않으면 신을 믿건 안 믿건 손해 볼 게 없지만 신이 존재한다면 신을 믿지 않을 경우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된다. 이를 지구온난화에 대입해 보자면, 지구온난화를 믿고 대비할 경우 설령 재앙이 발생하지 않더라도 이익이 된다. 환경오염을 방지하고 자연에너지 기술을 발전시켜 성장동력을 확보하며 화석연료의 사용을 획기적으로 줄임으로써 미세먼지 문제를 해결하는 혜택까지 누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지구온난화를 믿지 않고 화석연료를 무절제하게 사용한다면 기후 재앙이 발생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오염된 환경 속에서 고통을 받을 것이며, 혹시 온난화 재앙이 발생하게 된다면 인간은 멸망에 이르게 된다. 결국 ‘생각하는 갈대’가 취할 수 있는 합리적인 선택은 여전히 지구온난화에 대비하는 것이다.
1194 한국의 미래에 대한 견해 [1]
[레벨:20]정아브라함
52 2019-10-09
다음은 짐 로저스라는 세계적인 투자전문가가 한국의 미래를 예측한 기사입니다. 세계적인 투자가인 짐 로저스가 ‘한국 때리기’에 열중하는 일본 아베 신조 정권을 어리석다고 비판했다. 그는 그러면서 앞으로 10~20년은 한국과 북한의 시대가 될 것으로 내다보면서도 일본의 미래는 비관적이라고 전망했다. 짐 로저스 페이스북 캡처 로저스는 7일 니칸겐다이와의 인터뷰에서 일본은 인구감소를 겪으면서도 외국인을 배척하고 이민에 소극적이라고 지적하고 “앞으로 일본 주식을 다시 살 예정은 없다”고 단언했다. 그는 “일본 전체가 외국인을 환영하는 분위기를 만들지 않으면 아무도 일본을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면서 “외국인은 인구 감소로 곤경에 처한 일본에 도움이 될 존재이며 이민은 부동산과 교육, 음식 등 업계에 새로운 비즈니스 기회를 창출하고 저출산 대책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아베 정권에 대한 비판도 서슴지 않았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지난 4일 일본 국회의사당 건물에 들어서고 있다. UPI 연합 로저스는 “아베 정권의 한국 때리기는 어리석다”면서 “이웃 나라와는 본래 협력해 함께 일해야 하는데 싸움을 하다니 이해할 수 없다”고 몰아붙였다. 니칸겐다이 기자가 ‘7, 8월 2개월 연속 무역 적자, 8월 대 한국 수출 전년 동기 대비 9.4% 감소, 방일 한국인 48% 감소 등 일본 경제에 부정적인 영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묻자 로저스는 “(한국 때리기는)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정치인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국에 대한 적개심을 부추기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어 “과거 일본과 싱가포르, 중국이 호쾌한 성장을 지속했지만 앞으로 10~20년은 한국과 북한이 성장할 것”이라면서 “머지않은 미래에 남북통일이 실현되면 세계 각지의 관광객이 (한반도로) 몰려올 것이며 이는 다시 해외 투자 및 국내 투자로 이어져 한국을 괴롭히는 저출산 문제가 완화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북한과의 관계 개선을 충고하기도 했다. 로저스는 “북한은 문제투성이지만 중국과 국경이 닿아 있어 비즈니스 환경은 나쁘지 않다”면서 “빨리 투자해 공장을 건설하고 호텔을 세워야 한다. 한국 기업들은 스터디 그룹을 시작하고 준비하는데 일본은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고 지적했다. ‘아시아 시대’의 도래를 내다본 그는 투자자로서 자녀에게 중국어를 시켜야 한다고 조언했다. 실제로 그는 2007년 늦둥이 두 딸이 중국어를 보다 쉽게 습득할 수 있도록 싱가포르로 이주했다. 로저스는 “자식들이 중국어를 할 수 있게 하라”면서 “그 다음은 스페인어, 한국어, 러시아어다. 일본어는 쇠퇴하는 언어이므로 목록에 없다”고도 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지난 4일 일본 국회의사당 건물에 들어서고 있다. UPI 연합 2018년 가을 인구 감소를 이유로 주식 등 일본과 관련한 모든 자산을 팔아치운 그는 아베노믹스가 지속하는 한 일본에 대한 투자는 없다고 단언했다. 그러면서 소비세 10% 인상을 거론했다. 로저스는 “증세는 경기를 얼어붙게 한다. 아베 정권이 하는 건 넌센스”라면서 “내년 도쿄올림픽 개최를 기대하고 있겠지만 역사적으로 올림픽이 국가 재정에 플러스가 된 사례는 없다. 올림픽으로 일본의 재정 적자는 더 부풀어 오를 것이다. 10살 일본인이 40살이 될 무렵에는 일본의 국가 채무는 눈 뜨고 볼 수 없는 지경이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짐 로저스 페이스북 캡처 1942년 미국 앨라배마 주에서 태어난 로저스는 미국 예일대와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공부한 뒤 월가에 뛰어들었다. 조지 소로스와 퀀텀펀드를 설립해 10년 만에 4200%라는 경이적인 수익률을 내면서 워런 버핏, 조지 소로스와 함께 세계 3대 투자자로 이름을 알렸다. 37살 때 은퇴한 그는 2010년 잡지 ‘내셔널 리뷰’와 인터뷰를 하면서 ‘한국으로 이주하라’고 조언해 눈길을 끌었다. 통일 한국이야말로 미래에 주목받는 곳이 될 것이니 한국에 있어야 부자가 될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한 것이다. 김상기 기자 kitting@kmib.co.kr 더 보기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13797821&code=61131211&sid1=int
1193 철학교수에게서 배운다.
[레벨:20]정아브라함
77 2019-09-19
우리나라 현실문제를 진단하는 글이지만 우리 영적 정체성에도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특히 2030세대의 무기력을 문제삼는 부분은 우리 문제를 돌아보게 합니다. 우리 센터도 2030세대가 주류가 되어야 합니다. 고 이사무엘 선교사님이 우리 모임을 만드신 것은 그분이 30대 중반일 때였고 20대의 서울대 형제자맨들이 그분을 따라 캠퍼스역사를 감당하였습니다. 우리 2030형제자매님들이여! [정치] 파워인터뷰 게재 일자 : 2019년 09월 18일(水)“文정부, 국가보다 민족 관념에 의존… 매우 위험한 국정운영” ▲ 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명예교수가 지난 10일 서울 강남구 개인 연구실 창가에 서서 책을 읽고 있다. 최 교수는 “내가 부정했던 것을 나부터 안 하는 것에서 변화가 시작된다”며 리더의 도덕적 진실성을 강조했다. 김호웅 기자<iframe width="550" height="60" src="http://ad.adinc.kr/cgi-bin/PelicanC.dll?impr?pageid=08S7&out=iframe" frameborder="0" marginwidth="0" marginheight="0" scrolling="no" vspace="0" hspace="0" allowtransparency="true"></iframe> ■ 최진석 서강대 명예교수 민족은 상상, 국가는 현실체제 개념 혼동땐 국가정체성 ‘흔들’ 국민 재산·생명 수호 국가역할 정책은 부국강병에 맞춰져야 이념이 현실지배땐 근본주의화 진영 갇혀 미래보다 과거 집착 4차혁명 대전환 올라타는 게 적폐청산·친일청산보다 시급 86세대 탐욕스러운 기득권화 2030 반영한 세대교체 시급 [인터뷰 = 유병권 정치부장] 약산 김원봉 서훈 논란과 조국 법무부 장관 임명 강행 이후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논쟁이 다시 뜨거워지고 있다. 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명예교수는 “‘나라가 좀 못살면 어때, 부유하지 않더라도 도덕적으로 살면 되지’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국가 운영에 있어 아주 위험한 사고”라며 “이런 사고로는 국민의 재산과 생명을 지킨다는 국가의 역할을 다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정치든 삶이든 현실을 자세히 관찰한 후, 그 현실에 맞는 길을 찾아가야 합니다. 이념으로 현실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이념을 생산하면서 가야 합니다. 결국, 실용적인 노선이죠. 그런데 현 정부는 이념에 갇혀 있는 것 같습니다. 이념에 갇히면 도덕주의나 근본주의적 특성을 보이고 미래보다는 과거에 집착하죠. ‘나라가 좀 못살면 어때, 부유하지 않더라도 도덕적으로 살면 되지’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국가 운영에 있어서 아주 위험한 사고입니다. 이런 사고로는 국가를 부강하게 만들 수 없고, 부강하지 않으면 국민의 재산과 생명을 지킨다는 국가의 역할을 다 할 수 없습니다.” ‘이게 나라냐’라고 박근혜 정부를 비판하면서 등장한 문재인 정부가 ‘이건 나라냐’라는 비판을 들으며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논쟁이 일고 있다. 박근혜 정부를 촛불 시위로 몰아내고 탄생한 문재인 정부가 ‘공정’과 ‘정의’를 앞세웠지만, 현 정부의 지난 2년 4개월은 당위론적 가치론만으로 국가가 운영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줬다. 소득주도 성장은 양극화 문제 해결에 실패했고, 성장에 부작용을 초래했다. 평화만을 강조한 남북관계는 되레 안보 불안감을 부추겼으며, 조국 법무부 장관 임명 사태는 현 정부가 제1 가치로 제시한 공정과 정의에 대해 의구심을 낳게 했다. 2009년 철거민 5명과 경찰 1명이 사망한 ‘용산 참사’ 이후,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발간하며 논쟁을 일으켰다. 유 이사장이 당시 제시한 화두는 정의와 복지였다. 10년이 지난 지금 문 정부에서는 ‘법치’와 현실론을 내세운 ‘국가란 무엇인가’란 논쟁이 불붙고 있다. 이런 논객 중 국가 본연의 기능과 역할을 강조하는 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명예교수를 지난 10일 만났다. ‘모든 철학은 그 시대의 아들’이란 헤겔의 말로 운을 뗀 최 교수는 “국가와 민족 관념을 혼동하고 있어 국정에 많은 문제점이 발생하고 있다”며 “국가 운영에서 국가보다 민족 관념에 의존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라고 말했다. 최 교수는 “대한민국 대통령이 민족 지도자로서 역할에 더 심취한다면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최 교수는 “박근혜 전 대통령 때 일어난 일들이 문재인 대통령 때 그대로 다시 일어나고 있다”며 “기득권을 누리는 특권층이 이 사람에서 저 사람으로 바뀌었을 뿐”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더 나은 나라를 만들려면 리더가 도덕적 진실성, 모범을 보여줘야 한다”며 “내가 부정했던 것들을 나부터 안 하는 것에서 변화가 시작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국가나 개인이나 자기가 가진 시선의 높이 이상을 살 수 없다”면서 “그래서 시선의 높이를 계속 높이려는 노력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최 교수는 “우리나라에서 지금 당장 가장 크고, 중요하고, 시급한 문제는 적폐청산이나 친일청산보다도 4차 산업혁명이라는 거대한 문명 전환의 흐름에 올라타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의 문제”라며 “창의성과 독립성으로 무장해 선진적인 높이로 도약하는 도전에 나서야 할 때”라고 말했다. 그는 “그렇게 하지 못할 경우 강대국의 노리갯감이 됐던 조선 말 역사가 재현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다시 꺼낸 이유가 있습니까. “김원봉의 서훈(敍勳) 문제가 자극이 됐습니다. 김원봉은 독립운동가로서 훌륭한 사람일 수 있죠. 하지만, 대한민국이 가지고 있는 국가로서의 배타적 정체성이라는 기본 중의 기본을 지키지 않으면 심각한 문제가 시작됩니다. 저는 우리나라가 국가의 높이에서 운영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국가를 진영의 논리로 다루고 있습니다. 여기서 국가보다는 민족 개념에 더 기대는 정치 세력이 형성됐죠. 우리는 프랑스나 독일이나 미국처럼 피 흘리며 투쟁해서 자력으로 근대적 국가를 세운 게 아니라 외부의 힘으로 해방됐고 외부의 영향하에 국가가 세워졌습니다. 조선이라는 왕조 국가가 근대 국가로 이행하는 것을 경험하지 못하고 식민지가 됐습니다. 식민지 시기에는 민족이라는 개념에 기댈 수밖에 없었고요.” ―국가가 국가 운영 체제로 관리되지 않고, 민족 개념과 혼동돼 운영되고 있다는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김원봉 서훈이라든지, 헌법에서 자유란 개념을 빼려는 시도들이 국가와 민족 관념을 혼동해서 나타나는 일들입니다. 서훈이란 것은 대한민국 정부에서 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에 해를 끼친 사람은 서훈 대상이 아닙니다. 그러나 민족을 중심에 놓고 생각하면 김원봉을 서훈해도 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헌법과 법률에 근거해 국민의 안전과 이익을 보장하는 배타적 존재 집단인 국가의 존립 기반과 정체성이 흔들리는 겁니다. 국가는 법률로 관리되는데 민족은 법률로 관리되는 대상이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민족은 상상의 공동체입니다. 상상의 공동체를 중심에 놓고 현실체인 국가를 보기 시작하면 국가 정체성이 흔들리고, 국가 운용 방향에 큰 혼란을 초래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위험이죠. “국가가 민족을 관리하지, 민족이 국가를 관리하는 일은 없죠. 국가는 민족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만, 민족은 민족 자체의 문제뿐만 아니라 국가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통일을 위해서 민족 관념을 강하게 부각시키고 있지만, 통일이란 현실적으로 국내법과 국제법에 의해서만 완성됩니다. 남북이 통일을 한다는 것은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이, 즉 국가 간 통일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에게는 민족이라는 동질감이 통일 추동력으로 크게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이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하지만, 통일을 완수하는 법적 주체는 국가입니다.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기반으로 해야 통일 논의도 훨씬 더 효율적으로 진행될 수 있습니다.” ―현 정부에서는 ‘아무나 흔들 수 없는 나라’, 지금보다 강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 새로운 정책을 펴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느 정부든 강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지, 약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고 하지 않습니다. 결과가 중요합니다. 소득주도 성장이나 복지 정책이 실제적으로 더 강한 나라를 만드는 방향으로 역할을 했을까요? 소득주도 성장 정책을 시행해서 성장이 이뤄지면 옳은 정책이고, 성장에 방해가 됐으면 옳은 정책이 아닙니다. 만약 소득주도 성장 정책으로 성장이 꺾였는데도 이 정책을 계속하려 한다면 문제가 있는 것이죠. 복지 확대도 사회 건강성을 회복해서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되는 정도를 맞춰서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최 교수의 국가론은 ‘부국강병’론으로 이어졌다. 국가는 자본주의 발전국가와 시민의 자유를 보장하는 민주국가, 그리고 실업과 빈곤, 재해 등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는 복지국가 등 여러 형태가 있지만, 최 교수는 “국가의 최우선 책무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국가는 구성원들이 임의대로 폭력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그것을 모두 거둬 총체적으로 관리합니다. 예를 들어, 국군의 날 행사는 국가가 폭력을 얼마나 잘 관리하고 있는지, 얼마나 잘 훈련했는지를 보여주는 행사입니다. 대내적으로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잘 지킬 수 있다는 믿음을 주려는 것이고, 대외적으론 우리가 이렇게 강하니 함부로 건들지 말라는 것을 과시하는 겁니다. 국가란 원래 이런 것입니다. 그런데 국군의 날 행사인 군사 퍼레이드를 없애고, 가수를 불러 위로 공연을 한 것은 국가가 무엇인지 모르는 행위와 같습니다. 국가와 민족 사이에서 혼란을 겪기 때문에 발생한 일일 것입니다.” ―교수님은 시선의 높이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시선의 높이란 무엇입니까. “어떤 인간도 자기가 가진 시선의 높이 이상을 살 수는 없습니다. 국가도 국가가 가진 시선의 높이 이상으로는 운용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시선의 높이를 계속 높이려는 노력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중진국 중에서는 최상위에 위치합니다. 그런데 여기까지가 다일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생각이 갈수록 더 듭니다. 더 높은 시선으로 무장하지 않으면 ‘딱 여기까지다’라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선진국으로 가려면 창의성이 있어야 합니다. 창의성이란 아직 보이지 않은 곳, 아직 해석되지 않은 곳으로 넘어가려는 무모한 도전입니다. 우리가 아직 갖추지 못한 것입니다. 누가 만들어 놓은 것만 따라가고 이미 만들어 놓은 것만 반복하고 있습니다. 익숙한 문법과 태도에 갇힌 것이죠.” ―어떤 불안한 징후들이 나타나고 있는 거죠. “모든 면에서 본질적 가치보다는 기능에 갇혀 있습니다. 공정이나 도전이나 언행일치나 곰곰이 생각하는 능력 등과 같은 본질적 가치들은 눈에 잘 보이는 것이 아니지만, 기능은 매우 직접적이죠. 눈에 보이고 직접적인 것에 더 쉽게 반응하는 습관들이 그런 징후들입니다. 정치를 버리고 정치 공작에 더 열심인 것이나 능력을 따져서 사람을 쓰지 않고, 내 편인지 아닌지를 따져서 사람을 쓰는 일도 그렇죠. 나라 전체가 예술이 밀려나고 예능이 대세인 것도 우리의 한계를 보여주는 예입니다. 선도력은 눈에 보이지 않은 곳을 향한 도전의 결과이고, 따라 하기는 눈에 보이고 만져지는 직접적인 것에 반응하는 습관을 갖게 하죠.” ―시선의 높이를 높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박 전 대통령 때 일어난 일이 문 대통령 때도 그대로 다시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 기득권이 저 기득권으로 바뀌었을 뿐입니다. 가치나 태도가 바뀐 것이 아니라 사람만 바뀐 것이죠. 별 차이 없이 똑같은 수준의 사람들이 옷만 바꿔 입고는 전혀 다른 사람 행세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다르지만, 시선의 높이가 같기 때문입니다. 혁명은 삶의 방식이나 세상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는 겁니다. 이 낙하산이 저 낙하산으로 바뀐 것은 혁명이 아닙니다. 낙하산 인사 자체를 하지 않아야 혁명입니다. 기능에 빠진 삶의 습관이 본질적 가치를 추구하는 삶으로 바뀌어야 시선이 높아집니다. 또 시선이 높아져야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 계속 물어야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이런 근본적인 질문이 기능에 갇힌 삶을 해방시킬 수 있습니다.” ▲ 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명예교수가 지난 10일 서울 강남구 개인 연구실에서 “내가 정한 뜻대로 내가 기필코 가야 한다는 생각은 제도를 넘나들고자 하는 유혹에 빠질 수 있다”고 말하며 공자의 ‘4무(毋)론’을 설명하고 있다. 김호웅 기자 “새 어젠다는 ‘선진화’ … 사유의 종속 벗고 국가의 시선 높여야” ―무엇부터 시작해야 하나요. “내가 부정했던 것들을 내가 안 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공자는 부강한 나라를 만들 수 있는 인격이 가져야 할 황금률을 제시합니다. “자기가 원하지 않은 것은 남에게 시키지 말라.” 가장 기본적인 태도입니다. 자립형 사립고를 폐지해야 할 학교로 비판했으면 자기 자식은 자사고에 안 보내야 하고, 외국어고를 폐지해야 한다고 했으면 외고에 안 보내야 합니다. 다주택을 비판하면서 장관이 다주택자이면 안 됩니다. 표절을 방지해야 할 장관이라면 스스로는 표절을 안 해야 합니다. 본질을 포기하고 기능에 빠지면 이런 웃지 못할 일들이 권부(權府)에서까지 태연하게 일어납니다. 계속 이러면 선진국으로 가지 못하고 혼란만 계속되는 함정에 빠질 수 있습니다.” ―창의성과 독립성 문제를 철학 종속성 관점에서 해석하신 적이 있지요. “조선 시대에는 중국 철학을 우리 생각 삼아 썼고, 나중에는 일본, 미국 등의 생각을 따라서 살다 보니 우리는 사유의 종속성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아직 우리는 지식 생산국이라기보다는 지식 수입국입니다. 종속성에 빠지면, 믿고 따르는 바로 그 생각 방식을 기준으로 삼게 되죠. 습관적으로 기준에 맞느냐 맞지 않느냐를 따지다가 기준에 맞으면 참이나 선, 맞지 않으면 거짓이나 악이라는 진위 관념과 선악 관념에 매몰됩니다. 당연히 도덕 지향적인 특성을 갖게 되죠. 진위·선악 관념에 빠져서 논리를 따르지 않고 감성을 따르는 원초성을 극복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지적이라기보다는 감각이나 본능에 의존하게 되죠. 지적으로 가장 높은 시선인 과학과 철학이 우리나라에서 아직 시작되지 못한 이유입니다. 종속성을 극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종속성을 극복해야 비로소 독립적인 삶이 가능합니다.” 중국 대륙을 최초로 통일한 진(秦)나라는 원래 힘이 크지 않은 작은 나라였다. 국력을 키우기 위해 변법(變法), 즉 혁신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나라에서 어떤 정책을 내놔도 백성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때 상앙이라는 재상이 성의 남문에 말뚝을 하나 박아 놓고 이를 북문에 옮기는 사람에게 거금을 주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이를 믿지 않았던 주민들은 말뚝을 옮길 생각을 하지 않았지만, 어느 정신 나간 사람이 장난삼아 말뚝을 뽑아 북문에 옮겼다. 상앙은 이 사람에게 약속대로 거금을 주었고, 신뢰를 회복한 진나라는 혁신에 성공해 마침내 중국 대륙을 통일하게 됐다. ―‘무신불립(無信不立)’이란 말이 있듯이 국가 운영에서 신뢰가 우선이라고 봅니다. “국가 운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뢰입니다. 국가의 말을 국민이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신뢰가 있으려면 대통령이 거짓말을 해선 안 됩니다. 지금 국정이 이렇게 꼬이게 된 최초의 사건은 문 대통령이 스스로 만든 인사 5원칙을 지키지 않은 것입니다. 부동산 투기, 위장 전입, 논문 표절 등의 의혹이 드러난 후보자는 장관에 임명하지 않겠다고 해 놓고 지키지 않았습니다. 여기에서부터 신뢰가 무너진 겁니다. 신뢰는 모든 국민과 공유해야 하는데, 같은 진영끼리만 공유하고 있습니다. 신뢰라는 본질적 가치를 포기하고 내 사람을 써야 한다는 기능을 선택한 결과입니다.” ―국가 경쟁력 저하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지금은 문명이 급변하는 시점입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올라타 어떻게 중진국 함정을 벗어나 선도적 위치로 뛰어오를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할 때입니다. 이 나라가 진짜 해야 할 일이 무엇이냐.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이냐를 생각해야 합니다. 시야가 국내에 갇히면 안 됩니다. 국제 경쟁 구도 속에서 정책을 펴야 합니다. 근로시간 단축 등도 국가 간 경쟁을 고려했어야 합니다. 정치권은 기능적인 권력 싸움만 하고 있지 않습니까. 권력을 차지해야 제대로 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큰 착각입니다. 국가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을 놓치고 싸움만 하고 있으니 국가 경쟁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거죠. 조선의 말기를 보고도 똑같은 행태를 반복하고 있으니, 우리는 아직 역사에서 배운 바가 없습니다.” ―‘2030’과 ‘5060’세대 간 갈등도 심각합니다. “나라가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세대교체가 가장 중요한 이슈가 돼야 합니다. 우리나라에선 어떤 논쟁에도 20대가 거의 등장하지 않습니다. 국회의원 연령만 봐도 40대가 아니라 50대와 60·70대가 주축입니다. 세계가 급변하는 상황에서 정치권력 영역에 2030 젊은 세대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는 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우선 정치권 세대교체가 필요합니다. 정치권을 비롯한 사회 각 분야에서 여성 할당제가 시행되듯이 젊은 세대 할당제를 도입해야 합니다. 2030에게 활동의 장을 마련해 주고, 자신들의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낼 수 있도록 해 줘야 합니다. 2030세대는 대한민국을 책임질 미래 세대입니다. 그런데 요즘 어디를 가도 젊은 세대를 만나기 어렵습니다. 기성세대의 탐욕이 극에 이르렀습니다.” ―86세대가 기득권이 강고해 세대교체가 더디다는 지적도 많습니다. “어느 진영에 속하는가와 관계없이 86세대는 이미 탐욕스러운 기득권층이 됐습니다. 사회가 선순환된다고 하면 시대마다 거기에 맞는 어젠다를 설정하고 그걸 잘 해결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나라는 건국(정부 수립) - 산업화 - 민주화라는 어젠다를 시대에 맞게 설정하고 해결하며 직선적 발전을 했는데, 지금은 민주화 다음의 어젠다 설정을 못하고 있습니다. 시대가 많이 바뀌었어도 86세대는 아직 민주화 시대의 습관적인 태도로 급변하는 현재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사회가 진보하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그간 대한민국의 발전은 건국(정부 수립) 세력이 산업화 세력에 의해 도태되고, 산업화 세력은 민주화 세력에 의해 도태되는 과정이었습니다. 민주화 세력을 도태시킬 새로운 세력의 출현 여부가 우리나라의 발전과 진보를 결정할 것입니다.” ―민주화 다음의 어젠다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선진화라고 생각합니다. 선진화는 선도력을 가진 사회의 모습입니다. 선도력은 창의성을 기반으로 하는데, 창의성은 독립적 주체들이 발휘할 수 있습니다. 독립적 주체들은 ‘우리’라고 하는 우리에서 이탈해 자신만의 고유한 독립적 자발성에 의존합니다. 독립적 주체들이 자유로운 삶을 구가하면서 스스로 책임지는 그런 토양에서만 창의성이 나옵니다. ‘우리’ ‘진영’ ‘과거’에 갇히지 않고 자신만의 고유함에 집착하는 주체들이 우리 역사의 무대에 등장해야 합니다.” ―지식인의 역할을 강조하며 비판도 많이 했습니다. “시선을 한 단계 더 높여 거기에 맞는 어젠다를 설정하고, 그것을 완수할 새로운 세대로 주도 세력이 교체되지 않으면 우리나라는 조선 말기와 같이 엄청난 국력 약화를 겪고 강대국들의 노리갯감이 될 것입니다. 저는 이미 그 비극적인 길로 들어선 것이 아닌가 하고 우려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생존해 온 민족인데 어떻게 번영시킨 나라인데 여기까지만 살다 가도 괜찮겠습니까? 지금 심각한 문제는 고급 지식인들마저 반성적 사고력을 잃고 진영의 대변자로 전락했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진영의 대변자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진영을 넘어서서 새로운 길이 어디인지 적극적으로 탐색하는 지식인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지식인들이 철학적이고 과학적인 높이의 새로운 시선을 가지려고 노력하지는 않고, 정치라고 하는, 그것도 기능적인 레벨의 정치라고 하는 블랙홀 안으로 스스로 들어가 용해돼 버립니다.” <iframe id="f61e29f5-639d-48b3-a19f-fd0be03cd970" src="http://compass.adop.cc/RD/f61e29f5-639d-48b3-a19f-fd0be03cd970?type=iframe&loc=&size_width=300&size_height=250" frameborder="0" marginwidth="0" marginheight="0" scrolling="no" style="width: 300px; height: 250px;" paddingheight="0" paddingwidth="0"></iframe>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사회를 작동시키는 톱니바퀴가 2개 있습니다. 교육과 정치입니다. 우리나라는 교육이 독립적인 사고력을 갖춘 인재를 길러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정치가 독립적인 사고력을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니라 생각을 하지 않는 정치로 변질된 것이죠. 교육과 정치가 악순환 고리로 고착됐습니다. 대오각성이 일어나지 않으면 이 구도에서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악순환 고리가 끊어지지 않으면 비효율이 쌓이게 되고, 국력 약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본질을 포기하고 기능에 빠진 태도로는 고칠 수 없습니다.” 유병권 정치부장 ybk@munhwa.com
1192 [이상엽의 공학이야기]올해 ‘떠오르는 기술’ 10가지 [1]
[레벨:20]인은혜
35 2019-07-27
세계경제포럼은 2012년부터 매년 수년 내에 우리 사회와 실생활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측되는 기술을 10가지 선정해 발표해 왔다. 올해는 지난 1~3일 중국 다롄에서 개최된 하계 다보스포럼에 맞추어 2019년도 ‘10대 떠오르는 기술’을 발표하였는데 세계경제포럼의 발표 자료에 근거하여 간략히 소개하고자 한다. 첫 번째로는 순환경제를 위한 바이오플라스틱이 선정되었다. 내 연구실에서도 오랜 기간 연구하여 상당한 기술을 축적한 미생물이 직접 생산하는 생분해성 고분자가 포함되었다. 또한, 지구상에 가장 풍부한 리그노셀룰로직스 분해물을 원료로 미생물 발효에 의해 단량체들을 생산하여 플라스틱을 합성하는 바이오 기반 플라스틱 기술들도 포함되었다. 전 세계적으로 플라스틱 문제가 급부상하였고, 그에 따라 예전부터 개발되던 기술들이 본격적으로 더 발전하면서 선정되게 되었다. 상대적으로 높은 생산 가격은 아직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두 번째로는 사회적 로봇이 선정되었다. 인공지능으로 나날이 똑똑해지는 로봇은 카메라와 다양한 센서들을 이용하여 사람들의 사회적 지능과 감성지능을 빠르게 배우고 있으며 상대방을 보고, 말하는 것을 듣고 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느낌을 가지고 있는지를 유추하는 알고리즘을 장착하기 시작하였다. 소프트뱅크 로보틱스사가 만든 로봇 페퍼는 초보적이기는 하지만 얼굴과 기본적인 인간의 감정을 인지하며 현재 전 세계적으로 1만5000대가 공항고객서비스, 쇼핑도우미, 호텔 체크인 등을 도와주고 있다. 블루 프로그 로보틱스사의 버디는 보다 더 많은 감정표현을 하며 비서업무와 집의 자동화와 보안업무까지 해내는 로봇으로 발전하였다. 소비자용 로봇은 2025년에는 20조원 규모의 시장을 형성할 것으로 예측되며, 고령화 사회를 맞아 사회적 로봇은 더 빠르게 발전해 나갈 것으로 예측되었다. 세 번째로는 나노구조와 나노구멍 등으로 덮은 마이크론 수준의 얇은 표면을 만들어 유리로 만든 렌즈를 대체할 수 있는 메탈렌즈가 선정되었다. 아직은 대량생산과 유리만큼 좋은 성능으로 빛을 투과하게 하는 문제들이 해결되어야 하지만, 이러한 문제가 극복되면 휴대폰의 카메라뿐 아니라 전문가용 카메라, 실험실 광학현미경 등을 아주 작게, 그리고 값싸게 만들게 되는 날이 올 것으로 예상된다. 네 번째로는 무질서한 단백질들을 신약 타깃으로 하는 기술이 뽑혔다. c-Myc, p53, K-RAS, NUPR1 등과 같이 암에 연관된 무질서한 단백질들은 구조가 계속 변화되어 신약 타깃으로 삼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최근 눈부신 생물물리학의 발전과 계산능력의 향상으로 이러한 무질서한 단백질들도 신약 타깃으로 재조명되고 있다. 앞으로 암과 치매 등의 효과적인 치료제 개발에 활용될 것으로 예상된다. 다섯 번째로는 환경오염을 줄이는 똑똑한 비료가 선정되었다. 농작물 재배 시 수율을 올리기 위하여 질소와 인비료를 듬뿍(?) 뿌린다. 하지만 대부분은 식물의 영양성분으로 흡수되지 못하고 궁극적으로 대기나 하천으로 손실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비료성분들을 작은 캡슐에 담아 토양의 온도, 산도, 습도 등에 따라 천천히 내 놓도록 하는 서방형 그리고 조절형 비료기술이 개발되었다. 앞으로 인공지능과 센서 기술들이 결합되면서 원하는 때와 장소에 이렇게 맞춤형으로 비료가 제공되는 시대가 올 것이다. 여섯 번째로는 가상 모임 협업기술이 선정되었다. 멀리 떨어진 여러 사람들이 한곳에 모이지 않고도 함께 일하는 것과 같은 시스템을 구축하는 기술이 가상현실과 증강현실을 결합하고 5G 기술을 등에 업고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이제 스카이프 미팅과 같이 멀리 떨어져 정보만 교환하던 것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실질적으로 협업을 할 수 있는 날도 기대해 본다. 일곱 번째로는 첨단 식품 추적과 포장기술이 선정되었다. 세계보건기구에 따르면 매년 6억명이 식중독에 걸리고 그중 42만명이 사망한다. 앞으로는 작은 센서를 식품 포장이나 접촉면에 넣어 음식이 상했는지, 개봉한 지 얼마나 지났는지, 주변 온도의 변화에 따라 상하는 정도를 예측하여 섭취가 가능한지 여부까지도 알려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블록체인 기술과 연계하여 생산부터 소비까지의 전 과정을 투명하게 관리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여덟 번째는 안전한 핵반응기 기술이 선정되었다. 현실적으로 기후변화에 대응하면서 충분한 에너지를 얻는 것에 원자력만큼 좋은 것이 없다. 대부분은 안전하지만 만약 사고가 나면 큰 영향을 주는 것은 걱정거리다. 현재 핵반응기는 핵연료로서 우라늄 다이옥사이드가 들어 있는 지르코늄 합금막대를 사용하는데 냉각수 시스템에 문제가 생겨 지르코늄이 과열되면 물과 반응하여 수소를 만들고 이것이 폭발할 수도 있다. 실제 2011년의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그러했다. 따라서, 전기 공급이 끊겨도 냉각에는 차질이 없도록 하는 기술과, 아예 물 대신 액체 소디움이나 용융염 등으로 물을 대체하여 수소 생산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하는 기술 등이 개발되고 있다. 아홉 번째로는 DNA 데이터 저장기술이 선정되었는데, 이 기술에 관해서는 내가 세계경제포럼 10대 기술 발표 시 해설을 해주었다. 현재 빅데이터 시대에 사는 만큼 흥미로운 주제이므로 다음번에 상세히 다뤄보고자 한다. 열 번째는 재생에너지의 대용량 저장기술이 선정되었다. 태양광, 풍력 등 신재생에너지가 점점 늘어남에 따라 에너지 저장기술도 빠르게 발전해 왔는데, 여분의 에너지를 물의 위치에너지로 바꾸었다가 사용하는 것이 현재까지 가장 널리 쓰였으나, 리튬이온 배터리를 이용한 저장도 급속히 늘고 있고, 흐름전지 기술을 이용한 에너지 저장도 활발히 연구 중이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올해 ‘10대 떠오르는 기술’에는 에너지, 헬스케어, 식량, 신소재 등 다양한 기술들이 뽑혔다. 앞으로 이 기술들이 미래에 어떻게 전개되어 나갈지 지켜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다. 우리나라도 이들을 포함한 중요한 미래기술들을 선점하기 위한 노력에 박차를 가해야겠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907242058005&code=990100#csidx243fcc6e49b35a9aa090e370241a638
1191 눈물이 나지 않는 이유
[레벨:20]김이삭(영길)
53 2019-07-18
이번 수양회는 눈물의 수양회였습니다. 앞에서 말씀/소감 전하는 분도 듣는 분도 눈물을 많이 흘렸습니다. 그런데 모두 눈물을 흘리는 것은 아닙니다. 눈물이 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는 최근에 눈물이 왜 나고, 눈물이 왜 안나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이런 기사를 찾아보았는데 좀 흥미로워서 올려봅니다. ================================================================ 눈물이 나지 않는 이유 출처: 원더풀마인드 일자: 2017-08-25 이것은 생각보다 흔히 있는 일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서 눈물을 통해 슬픔을 표현하지 않는 사람들은 많이 존재한다. 울거나 훌쩍이는 것은 애도의 하나이며 불행과 트라우마를 이겨내기 위해 필요한 과정이다. 이것은 긴장감과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정신적 위안이다. 흔히들 말하기를 눈물이 없는 사람들은 감정 조절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는 하나의 추측일 뿐, 결정적인 이론은 아니다. 눈물이 없는 것은 문제가 아니라 과정일 뿐이다. 보통 사람들보다 애도의 표현이 늦을지라도, 언젠가 하게 된다. 마침내 슬픔을 표출할 때 기분이 나아지게 된다. 눈물의 심리학적 역할 가끔 신체적 문제가 원인일 수 있다. 눈물 흘리는 것은 감정을 표현하는 것의 일부이자 스트레스와 긴장감을 풀어주는 과정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자가면역 질환으로 인해 이것이 어려울 수 있다. 이들이 슬픔을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자가면역 질환으로 인해 정신질환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눈물샘이 건조해져 눈물 흘리기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쇼그렌 증후군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 질병이 원인이 아니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다가 한 번쯤은 눈물이 나오지 않는 현상을 겪었을 것이다. 여기에는 여러가지 원인이 존재한다. 과정의 일부인 눈물 사람들은 똑같지 않으며, 그렇기에 같은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 사람이 처하는 상황은 모두 독특하며 반응 역시 다양하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쉽게 울지만, 이별로 인해서는 눈물이 나오지 않을 수 있다. 왜 그럴까? 우리가 각 문제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가족의 죽음 앞에서는 그들을 다시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한다. 이로 인해 고통을 느끼고 눈물이 난다. 하지만 버려지거나 배반 당한 상황 앞에서는 다른 방식으로 반응할 수 있다. 우선 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할 수 있는가하면, 그 사람이 다시 돌아오거나 후회할 것이라는 예상을 하기도 한다. 후에는 슬픔 대신 분노를 느낄 수도 있다. 눈물이 나타나지 않은 것은 눈물이 필요하지 않은 단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계속 가다 보면 절망감과 슬픔이 그들의 불쾌한 모습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이 때 눈물이 나오기 시작하고, 이를 통해 감정을 털어놓게 된다. 여기서 도출할 수 있는 결론은, 눈물에는 주기가 있다는 사실이다. 만약 불안감, 불확실함을 느끼고 상황을 뚜렷하게 이해하지 못한다면 눈물이 나지 않을 수 있다. 이는 그 사람의 성격에 따라 또 달라진다. 보다 더 예민한 사람들은 감정을 완화하기 위해 눈물을 잘 쏟는다. 자제력이 뛰어나거나 이성적으로 사고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눈물을 덜 흘린다. 눈물의 사회적 함의 눈물은 과연 약점일까, 개인적인 유약함일까? 눈물을 보인다고 해서 더 약하고 나약한 것은 아니다. 어떤 상황에서는 눈물이 호흡만큼이나 필요하고, 애도에 있어 없어서는 안될 과정이다. 기분이 나아지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교육, 개인적 사회적 상황들을 통해 고통 앞에서 눈물이 아닌 침묵을 지키는 것이 낫다고 세뇌당하기도 한다. 이는 장기적으로 봤을 때 건강에 문제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잘못됐다. 치유되지 않은 상처들은 우리의 마음을 다치게 한다. 이럴 필요가 전혀 없다. 눈물을 흘리는 것은 우리의 성격의 일부다. 상처를 금방 극복하는 능력을 지닌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그게 어려운 것이다. 눈물이란 우리의 내면에 어떤 감정이 존재하는지를 인지하고 염두에 둘 수 있는 자기 성찰이 필수인 과정이다. 어쩌면 가장 필요할 때 막상 눈물이 나오지 않고, 이로 인해 불편함을 느낄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어떻게 눈물이 나오지 않을 수 있지? 걱정하지 말아라. 때가 되면 눈물을 흘리게 돼있다. 가장 예기치 못한 순간에, 몸의 긴장을 풀었을 때, 더 이성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할 때, 상황을 받아들일 때 말이다. 이 때 눈물을 통해 본심을 알 수 있을 것이다. ============================================================== 아래는 어느 게시판에 어떤 사람이 자신의 문제를 글로 올려서 상담요청한 글입니다. 제 목 : 감정을 잘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왜 그런걸까요 조회수 : 5,646 작성일 : 2017-08-07 03:49:51 뭐든 저 편한대로 작게 줄여서, 혹은 변형해서 생각해버리는 저같은 사람은 왜그런건가요. 멘탈이 강하다는 소리를 들어요. 굳세다는 소리도 듣고요. 실제로 지금은 큰 문제나 사람들과의 충돌 없이 평탄하게 사는 편인데 친정아버지 일찍 돌아가셨고 학창시절 왕따도 당했었고 (중간에 친가 파워로 갑자기 좋은 학교 전학갔는데 원학교가 가난하고 찐따같다는 이유) 아이 유산도 두 번 했어요 (초기 중기) 그런데 뭐든 제 맘대로 줄여 생각해버려요. 친정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 나는 영원히 살면서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볼 수 없으면 너무 슬프지만 어차피 나도 60년쯤 있다 죽을건데 어쩔수없지 뭐. 사람이 다 죽는건데. 그럼 아버지가 먼저 돌아가시지 내가 아버지보다 먼저 죽는게 자연스러운건 아니쟎아. 해외 이민 가셨다고 생각하고 살자. 연락이 아주 뜸하시네 잘 지내고 계시겠지 뭐. 왕따당했을 때 - 괜찮아 니들이 아무리 나 싫어해도 내가 니들 싫어하는 것 만큼 하겠어? 나도 니들 싫어. 유산했을 때 - 임신 전에도 잘 지내고 잘 살았는데 그 전상태로 돌아갔다고 해서 하늘이 무너질것까지야. 태어났으면 좋았겠지만 어쩔수없지. 나는 나름대로 주의하고 잘 지냈는데 이렇게 된걸. 아쉽지만 다음엔 잘 되겠지. 평소 표정이 별로 풍부하거나 감정표현이 많지 않은 편이고 대인관계는 어린시절 가난을 이유로 한 왕따 이외에는 학부모회나 직장생활이나 등등 조용하고 믿음직한 편이라는 소리 들으며 잘 지내고 있는 편입니다. 그런데 간간히 인터넷 하다 들리는 멘탈갑- 이란 표현이 좋게도 좋지 않게도 쓰이긴 하는데 제가 이상한 사람으로 여겨질까봐 입에 오르내리지는 않지만 안좋은 일 당할때 눈물이나 슬픔표현이 제게 떠오르기 전에 저런 멘탈갑스런 방어구가 먼저 탁 채워져서 저는 그냥 무표정으로 엄숙한 얼굴을 할 뿐 눈물이나 다른 슬픔의 오열 등등이 잘 떠오르진 않고 (눈물이 잘 흐르지 않아요) 그때 해야할 일들을 빨리 챙겨하는 편입니다. 그래서 사실 오열을 해야 하는 상황(부모상이나 시부모님 상 등등) 에 곤란하기에 고개숙여 우는 표정을 억지로 짓기도 합니다. 유산- 병원치료나 다른 몸조리나 회사 휴가 첫째 케어 등등. 상 당함- 가성비 좋은 장례식장 예약이나 절차진행 등등. 왕따 - 어차피 시간은 가고 학교에 앉아있음 졸업장은 나오고 시간때우며 공부나 하자. 식으로 슬픈 상황에서 생산적인 일을 주로 하는 사람이 되는 편이죠. 특별히 가정교육이 빈약하거나 훌륭하진 않고 평범한 가정이었는데 이렇네요. 가끔은 펑펑 소리내어 울거나 사무치게 가슴아픈 마음이 어떤건가 싶기도 하고 그래요. 제가 로봇은 아니고 짜증나거나 웃기거나 즐거운 마음은 당연히 듭니다만 남들은 슬프다 할만한 일들을 겪어도 딱히 슬프지 않고 덤덤하니 제가 약간 이상한건가 싶기도 하고 왜이런건가 싶기도 하고 그래요. 이런 사람은 그대로 살면 나중에 어떻게.될지..? 계속 이렇게 살아도 되나요?
1190 어느 도어맨의 고백 파일 [3]
[레벨:20]정아브라함
65 2019-07-07
신문을 읽고 참 좋은기사라고 생각했습니다. 한번 읽어보세요 우리목자들의 삶의 자세가 아닐까 하여 올렸습니다. ================================== 매일 1000번은 인사… 내 특기는 '갑질 손님' 마크입니다 까만 고급 세단을 보면 빛의 속도로 반응한다. 번호 확인은 필수. 두 팔 쭉 뻗어 문을 연다. 특기는 '진상 손님' 마크. 온갖 욕설, 갑질 쏟아내며 문전 쇄도해도 거뜬히 막는다. 악질 손님도 그의 수퍼 세이브 앞에선 맥을 못 춘다. 서울 여의도의 특급 호텔 콘래드 서울 객실팀 권문현(66) 지배인은 호텔업계 '전설의 수문장(守門將)'이다. 그는 호텔로 들어오는 차를 맞이하고 로비 문을 여는 도어맨(doorman)이다. 이 일만 43년째. 1977년 조선호텔(현 웨스틴조선)에서 도어맨으로 시작해 36년 일하고 2013년 정년퇴직했다. 쉴 새도 없이 그해 콘래드 서울 정직원으로 스카우트됐다. 한 호텔에서 정년을 채운 직원도 드문데, 정년 지나 정직원으로 스카우트된 도어맨은 전무후무. 예순여섯 '서비스 장인(匠人)'을 그의 일터에서 만났다. 진상 마크 전문 화재 시험 영상 확인하기 한 올 흐트러짐 없이 깔끔하게 빗어넘긴 머리, 칼 주름 잡힌 유니폼 차림으로 그가 나타났다. 나이보다 한참 젊어 보였다. "아유, 저는 내세울 것 하나 없습니다. 하찮은 일 하는 평범한 사람입니다. 재주 없어 이것만 오래했을 뿐입니다." 권씨는 손사래 쳤지만, 그 말 속에 그를 인터뷰하려 한 이유가 들어 있었다. 평범함이 차곡차곡 쌓여 비범함이 됐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묵묵히 한길을 파 대체 불가능한 지위를 얻었다. ―꼿꼿하십니다. 몇 시간이나 서 있습니까. "오전 6시 30분부터 오후 3시 30분까지, 오후 3시부터 자정까지 2주씩 번갈아 근무합니다. 매일 9시간쯤 서 있습니다. 하루 천 번 정도 인사하고 문 엽니다." ―종일 서 있으려면 젊은 사람도 힘들겠습니다. "단련이 돼 힘든 거 모릅니다. 이 나이에 일한다는 것 자체가 기쁨이지요. 나이 먹어 젊은 사람들이 있어야 할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미안할 따름입니다." ―정년을 채우고 스카우트됐다고요. "2013년 (조선호텔에서) 정년퇴직했는데 회사에서 명함 하나 파주면서 작은 외주 업체로 가서 같은 일을 계속 해달라 했어요. 오래 일해 회사에서 배려해 준 거기도 하고, 그간 쌓은 노하우를 전수해달라는 의미도 있었어요." 퇴사할 때 직함은 과장이었다. 동기 서른 명이 있었는데 10년 정도 지나 모두 나가고 혼자 정년을 채웠다. 외주 업체에서 반년쯤 일했을 때 문 연 지 얼마 안 된 콘래드 서울에서 러브콜을 보냈다. "컨시어지(concierge·접객 담당) 세팅이 안 돼 어수선하니 와 달라"고 했다. 인생 2막이 열렸다. ―왜 불렀을까요. "뭣보다 '폭탄 처리 전문반'이라(웃음)." ―폭탄 처리 전문요? "호텔 입장에선 진상 고객 응대가 제일 골치 아프죠. 저야 그런 분들 대응하는 데 이력이 났습니다. 좀 전에도 한 분이 말썽을 부렸는데 이전 호텔에서 봤던 사람입니다. 다른 직원들은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는데 희한하게 제 말은 듣습니다." ―진상 마크 기술 좀 들려주시죠. "갑질하는 심리는 '내가 누군지 좀 알아달라'는 겁니다. 자기 얘기에 귀 기울여 달라는데 그까짓 것 한번 들어주지 뭐 하고 일단 듣습니다. 웃는 낯으로 '선생님 명함 하나 주시겠어요?' 하면 조금 누그러집니다. 무슨 사업 하시느냐는 둥 다른 이야기를 섞어 주의를 환기시킵니다. 그러다 보면 손님이 자기 이야기를 하나씩 풀어놓습니다. '척'하는 시늉의 기술이 중요합니다. 지는 것 같지만 결국 이기는 방법입니다." ―욕도 많이 들었겠습니다. "제일 많이 들은 말이 '야, 인마'입니다. 아들뻘 되는 손님이 반말할 때도 있고요. 이 새끼, 저 새끼, 더한 욕설도 종종 듣는 걸요 뭐. 거기 비하면 애교 수준이지요." ―일이 지겹지 않습니까. "전혀요. 오히려 젊었을 때 지겨웠습니다. 지겨움은 철없을 때 생기는 겁니다. 나이 드니 지겨움도 감사합니다." ―직업병은 없습니까? "싸움 말리기, 사과하기. 밖에서 시비 붙은 사람들 보면 자동으로 말리게 돼요. 동서가 수원에서 치킨집을 하는데 손님하고 시비가 붙었어요. 나도 모르게 가서 무조건 죄송하다고 빌고 있더라고요(웃음)." 하얀 봉투 건넨 DJ 경남 합천 빈농(貧農)의 3남4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가난이 치석처럼 붙어 있는 삶이었다. 농사짓고 공사판 막노동도 했다. 지긋지긋한 가난과 이별하고 싶어 1976년 차비만 달랑 들고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화려한 호텔과 대척점에 있는 어린 시절 같습니다. 호텔은 어떻게 들어갔습니까. "상경해 건설회사 공사장에서 일했습니다. 매일 파김치가 됐어요. 몇 달 지나 친구가 호텔에서 사람을 구한다고 얘기해줘 무턱대고 갔어요. 그 전엔 호텔 근처에도 가본 적 없었어요. 호텔의 'ㅎ'도 모르는 시골뜨기가 호텔에서 일하게 됐지요. 1977년 '벨보이'로 시작했습니다." ―아무나 호텔 다니던 시절이 아닙니다. 어땠습니까. "고관대작들이 참 많이 다녔습니다. 그들 삶을 보니 제 삶과는 너무 동떨어져 있더군요. 보릿고개도 있고,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시절인데 룸 서비스 해서 양식 먹더군요. 별세상이었습니다." ―유명 인사도 많이 봤겠습니다. "박정희 대통령 이후 대통령은 다 봤습니다. 전두환·노태우 대통령은 군 출신이라 딱딱했습니다. 김영삼·김대중 대통령이 참 따뜻했어요. 늘 손잡으면서 근무하기 어렵지 않으냐 인사 건네셨죠. 김대중 대통령이 한번은 명절 때 흰 봉투를 쥐여줬어요. 동료들이 얼마 들었는지 어서 열어 보라고 난리가 났어요. 그런데 금일봉이 아니었어요. '수고 많습니다'라는 말과 사인이 적힌 손 편지였어요. 그 담백한 말이 수백만원보다 값지게 다가왔습니다. 얼마 전 이희호 여사 돌아가셨다는 뉴스를 보는데 옛 생각이 나 울적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 차 번호도 아직 기억합니다. 체어맨 4○○○. 이명박·박근혜 대통령도 자주 왔고요." ―또 다른 기억 나는 인사가 있다면요. "6월 항쟁 때 이민우 신민당 전 총재가 데모하다가 최루탄을 피해 조선호텔 쪽으로 피신했습니다. 눈물, 콧물 범벅이 돼 호텔 로비 밖에 있었는데 경찰들 때문에 문을 봉쇄해 열어 줄 수가 없었습니다. 어찌나 죄송하던지요. 차지철 경호실장은 18층 프레지덴셜 스위트를 안방처럼 썼어요. 그분 오실 때면 비상이 걸렸습니다. 엘리베이터 잡고 기다리는데 진땀이 삐질삐질 났더랬습니다." ―재벌 오너도 많이 봤습니까. "정주영 현대 회장은 말년에 휠체어 타고도 오셨어요. 소변도 보기 어려울 때였는데 일식 먹고 싶다고 오셨어요. 한두 달 있다 돌아가셨지요. 가만히 있어도 카리스마가 넘쳤습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경호원들 없이 혼자 출몰하는데 다른 호텔하고 근무 환경은 어떻게 다르냐, 월급은 얼마나 받느냐 격의 없이 물었습니다. 진짜 재벌은 겸손한데 어중간한 부자들이 안하무인 행동합니다." 도어맨 권문현씨는 '서비스의 질은 디테일에서 갈린다'고 했다. 더운 날에는 손님이 택시 영수증 받을 때까지 문 열지 않기, 손님이 탄 택시 번호 적기…. 작은 차이가 손님에겐 크게 다가간다. 도어맨 권문현씨는 "서비스의 질은 디테일에서 갈린다"고 했다. 더운 날에는 손님이 택시 영수증 받을 때까지 문 열지 않기, 손님이 탄 택시 번호 적기…. 작은 차이가 손님에겐 크게 다가간다.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신(神)은 디테일에 있다 ―40년 넘게 해보니 서비스 질의 차이는 어디에서 온다고 봅니까. "큰 것보다는 작은 것, 디테일에서 갈립니다. ―예를 들어서요? "차 번호 외우기요. 작은 정보 같은데 받는 사람 입장에선 크게 다가와요. 차 번호 외워놓고 성격 있는 사람들 차가 들어올 땐 미리 대처합니다. 예전엔 300~400대 정도 외웠어요. 차 번호 맞히는 시험까지 쳤습니다. 요즘은 200개 정도 외우고 있습니다." ―세심하게 챙기려면 꼼꼼해야겠습니다. "매일 출근 전 조간신문 3개를 정독합니다. 동정란은 한 자도 빼지 않고 봅니다. 장차관, 대기업 임원 인사는 꼭 챙기고 변화가 있으면 메모합니다. 직장 바꿨을 때 제일 먼저 인명 정보를 만들어서 컴퓨터에 저장하는 일을 했습니다. 요즘 친구들은 그런 걸 신경 안 쓰는데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구체적으로 도어맨으로서 세심하게 챙겨야 할 부분이 있다면요? "더울 때나 추울 땐 택시 영수증 받는 몇 분 동안 차 문 열고 있어도 인상 쓰는 손님이 많습니다. 선탠해서 잘 안 보여도 손님이 영수증 받을 때까지 기다렸다 열라고 합니다. 손님이 택시 타면 차 번호를 꼭 적으라고 합니다. 가방, 휴대폰 분실했을 때를 대비해서요. 작은 친절이 때로 크게 돌아옵니다. 당장은 밑진 것 같지만 인생엔 손해란 없습니다. 100개의 친절을 베풀면 적어도 한두 개는 돌아옵니다." 눈칫밥으로 단련된 마음 ―그 사이 호텔 직원에 대한 인식도 많이 달라졌지요? "벨보이라면서 낮춰 보다가 갑자기 '호텔리어'다 '컨시어지'다 뭐다 해서 인기 직종이 됐지 않습니까. 유학파 도어맨도 있습니다. 저희야 눈치로 배웠지만 요즘은 대학에서 전문적으로 배운 친구도 많고요. 그런데 힘들다면서 1년 못 채우는 직원이 태반입니다. 머리로 배운 거지요. 손님에게 봉사해야겠다는 생각이 가슴에서 우러나와야 합니다. 억지 친절은 상대가 대번에 알아차립니다." ―감정노동이라고들 합니다. "예전엔 그런 말조차 없었지요. 우리 같은 직업에 감정이 어디 있으며, 그게 노동이라고 생각도 안 했지요. 사회가 점점 나아지고 있다는 얘기겠지요." ―화를 푸는 비법이 있다면요? "즉석 해소. 듣는 즉시 흘려 버리기. 분을 삭이는 게 버릇이 된 건지 감정이 납작해졌습니다. 불뚝불뚝 가슴이 솟구치지가 않아요. 하도 감정을 눌러대서 복원되지 않는 건지(웃음). 아무리 기분 나쁜 일 있어도 집으론 안 가져갑니다." 포커페이스 전문이지만 딱 알아보는 사람이 있다. 40년 같이 산 아내다. ―억울하지 않습니까. "억지소리라도 도와줘야 하는 게 서비스맨의 숙명입니다. 억울하면 이 일 못하지요. 내 월급엔 욕먹는 값까지 들어 있다 생각합니다. 스트레스는 등산 가서 탈탈 털어내고 막걸리 한잔하며 훌훌 날리지요." 달관(達觀)인지, 감정의 끓는점을 마비시킨 건지 헷갈렸다. 늙어서 미안합니다 ―동년배보다 많이 젊어 보입니다. "비슷한 나이 사람들하고 근무할 땐 편했는데 요즘 더 신경이 쓰입니다. 젊은 사람들한테 피해 주는 건 아닌가 두렵습니다. 딸이 마사지숍을 하는데 노는 날 가서 피부 관리도 받습니다." ―젊은이들에게 피해 될까 봐 두렵다고요? 젊은이들은 어르신들더러 '틀딱' '꼰대'니 하면서 혐오하고 어르신들은 젊은이들더러 '버릇없다' '이기적이다' 합니다. 세대 갈등이 심한데요. "전체는 아니고 배려 없는 노인, 배려 없는 젊은이의 문제입니다. 서로 양보하고 이해하면 되는데. 제가 노인 쪽에 가까워 그런지 요즘 배려 없는 젊은 사람들이 종종 보여요. 저희 호텔 청소하는 분들한테 막무가내 대하는 젊은이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지위 높은 어른들한텐 깍듯합니다. 모순이죠. 어른들도 나이를 무기로 내세워 무조건 대접받겠다 해선 안 됩니다." ―'손님은 왕이다'는 말에 동의합니까. "과거엔 손님이 무조건 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손님은 손님이다'고 생각합니다. 서비스를 제대로 안 하겠다는 게 아닙니다. 손님으로서 누릴 수 있는 권리는 최대한 제공하지만 왕이기 때문에 다 해준다 이건 아닙니다. 왕으로 불리려면 왕이 왕 같아야 하고요." 내 인생의 '수퍼갑' ―현재 스코어, 자신의 삶을 평가하신다면요. "한창때는 사무실 앉아 멋있게 일하는 친구들이 부러웠습니다. 지금은 그 친구들이 아직 일하는 저를 부러워합니다. 친구들은 허리 디스크로 고생하는데 평생 서 있는 저는 허리 아픈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식사 시간, 화장실 가는 시간 빼고는 서 있으니 살찔 틈도 없습니다. 인생은 결국 제로섬인 것 같습니다." ―후회는 없습니까. "젊었을 때는 뭔가 할 것 같고 뭐라도 될 것 같았습니다. 더 나은 자리로 올라가지 못한 것 때문에 자괴감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작지만 나만의 자리를 버텨내며 끈질기게 지키는 것 역시 중요한 일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남의 문을 열다 보니 그 사람의 성격, 안목이 고스란히 보이더군요. 제 인생의 문을 열고 들여다본 모습이 어떨지 상상하곤 합니다. 가식 없이 진실한 삶, 남에게 피해 안 주는 삶이면 성공이겠다 싶어요." ―'43년 눈칫밥 인생'이 남긴 교훈이 있다면요. "아들(38)이 대학 때 호주 여행 다녀와서 호텔에서 일하겠다고 하더군요. 일언지하에 안 된다고 했습니다. 눈칫밥을 대물림하기는 싫었습니다. 지금은 IT 회사에 근무하는데 얼마 전 그러더군요. 아버지 삶을 닮고 싶다고요. 먹먹했습니다. 그 누구의 칭찬보다 값진 말이었습니다." 만년 '을(乙)'의 인생이라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그는 자기 인생의 '수퍼갑'이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7/05/2019070502682.html
1189 UBF 유럽 선교 개척과 비전(홍갈렙선교사) 파일
[레벨:20]인금철
40 2019-06-12
수양회에서 발표하신 원고 이전에 쓰신 것으로, 좀 더 자세한 내용들이 있어 추가로 올립니다. 2019 전국 학사수양회 특강 홍갈렙 (하이델베르그, 독일) UBF 유럽 선교 개척과 비전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요 1:4) 안녕하십니까? 저는 Heidelberg에서 온 홍갈렙선교사입니다. 먼저 생명의 빛 되신 예수님의 은혜를 감사합니다. 이 생명의 은혜가 이번 전국학사 수양회에 그리고 유럽여름수양회에 넘치길 기도드립니다. 먼저 제 인생소감을 발표하겠습니다. 1. 인생소감 저는 1949년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고졸 후 국회속기사 시험을 준비하였습니다. 시험을 앞두고 군대소집영장이 나왔습니다. 시험을 먼저 치르고자 하다가 그만 군대를 기피하였습니다. 마침 당시 교육대학교에 입학하는 남학생들에게 병역을 면제해주는 법이 시행되었습니다. 저는 급한 김에 인천교육대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그러나 교사가 될 생각이 없어서 취미생활을 하며 학창시절을 보냈습니다. 졸업후 제 앞날을 생각해보았습니다. 장래를 생각하기 시작했을 때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 것인가? 내 삶의 의미가 과연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맞닥트려졌습니다. 그 질문에 대답을 얻고자하는 열망이 당시 제 삶의 가장 절박한 관건이 되었습니다. 역사상의 이름있는 철학자, 사상가, 종교인들이 사람이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 어느 누구의 가르침도 절대적인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인생은 마치 참된 목적없이 부유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본질적으로 무의미하게 보였습니다. 홀로 방안에 앉아 어둡도록 한숨을 토하며 시간을 보내기가 일수였습니다. 그때 제 동생인 지금의 David Hong선교사가 UBF종로센터에 나가고 있었습니다. 그의 소개로 1972년 3월 종로UBF에서 성경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 때까지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제게 창세기 공부를 통해 처음으로 진지하게 “과연 창조주 하나님이 존재하는가?” 하는 근본적인 문제가 제기되었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계신가?” 하는 의심과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면 내 삶의 진정한 해답을 가지고 있다”는 기대를 오가며 창세기를 마쳤습니다. 1972년 여름 누가복음 공부가 시작되었습니다. 누가복음이 당시 숭실대에서 열린 여름수양회의 주제였습니다. 제게 2장의 한 구절이 임했습니다.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당시 예수님의 생애의 그 역사성을 믿음의 기초로 찾고있던 중이었습니다. 갑자기 전기가 온몸에 감전되어 흐르듯이 확신이 전달되어 왔습니다. 순간 의심의 구름이 걷히고 저의 공허했던 내면에 알 수 없는 기쁨이 임했습니다. 갑자기 세상이 달라져 보였습니다. 종로학사회에서 성숙한 동역자들의 신앙을 배우며 그리고 주일마다 Dr. Lee의 메시지를 들으며 행복한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1978년 종로3부 전체가 연세대 개척팀이 되어 김다윗목자님이 개척을 시작한 연희센터로 파송되었습니다. 복음신앙과 연대개척의 열정에 계속 도전받는 삶이었습니다. 믿음의 가정을 이룰 때가 왔습니다. 저는 세계선교를 예수님의 지상명령으로 영접하고 기도해왔습니다. 그래서 미국이나 서독선교사와 가정을 이루어 선교사로 가지않겠냐고 소개를 받았습니다. 저는 세계선교를 위해 기도해 왔으나 세계선교에 자신 스스로를 실제적으로 드리고자 결단할 수 없었습니다. 두려움과 의심으로 소개받은 사람들을 거절하였습니다. 또 소개받았습니다. 또 영접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다”는 말은 듣기 싫었습니다. 그래서 “집에 가서 기도해보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센터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 해의 마가복음 공부는 제 심령에 새롭고 와닿았습니다. 이를 통해 제 삶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영접하였습니다. 그리고 누구를 소개받던 사람을 보지 않고 제 삶의 주권자이신 하나님께 맡기고 “yes”하기로 마음을 정했습니다. 1978년 5월 어느날 출근하여 수업을 앞두고 있는데 전화가 왔습니다. 다짜고짜로 “홍갈렙 목자님, 믿음의 결혼을 할거에요?”고 물어왔습니다. “yes” 했습니다. 그리고 수업에 들어가려는데 “그러면 지금 바로 종로센터 전박사님한테 가보세요” 하는 것이었습니다. 교장 선생님에게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겼습니다” 하고 종로센터로 갔습니다. Sarah선교사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첫 인상이 아름다웠습니다. 그래서 그녀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지만 “저렇게 인상이 좋으니 믿음도 분명히 훌륭할거야!” 하고 편리할대로 생각하고 과연 “yes”하기를 잘했다고 여겼습니다. 데이트를 하고자 당시 동물원인 창경원으로 갔습니다. 동물들은 하나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다만 어떻게 Sarah선교사에게 “나와 결혼해 주세요” 라고 말을 해야 되는지 하는 생각에 골몰해 했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잠깐 앉자고 했습니다. 같이 앉은 다음 느닷없이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Sarah선교사와 가정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줄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하고 아멘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Sarah선교사가 어떻게 기도하나, 마치 온몸이 전부 귀가 된듯이 주의를 기울여 들었습니다. Sarah선교사도 기도를 시작은 했는데 본론을 말하는 대신 독일과 한국을 오가며 세계선교가 어떻고 어떻고 성경공부가 어떻고 어떻고 등 여러가지 기도제목으로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결론이 어떻게 날지 궁금했습니다. 도무지 “언제 본문을 말하나” 초초해하며 기다렸습니다. 그러더니 드디어 마지막에 자기도 저와 가정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믿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멘”했습니다. 그리고 결혼했습니다. 전박사님은 제가 비록 독일선교를 위한 가정을 이루었지만 세계선교 vision이 없는 것을 딱하게 여기셨습니다. 제게 Heidelberg를 개척하라고 방향을 주셨습니다. 연희센터에서 인턴목자로 훈련받으며 김다윗목자님의 도움과 섬김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1979년 2월 독일로 파송되었습니다. 1980년 선교사로 온지 일년 뒤 제 삶이 위기에 처했습니다. 결핵에 걸렸습니다. 그러나 정작 제게 더 큰 시험이 되었던 것은 이상과 현실의 불일치로 야기된 자신의 신앙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였습니다. 저는 제가 가지고 있는 신앙이 과연 제 것인가 아니면 남들을 따라 그럴 것이라고 그냥 믿어 온것인가 물었습니다. 한번 회의하기 시작하자 모든 것이 의심스러워 졌습니다. “과연 하나님이 계신가? 아니면 계실 것이라고 그냥 믿어온 것인가?” 의심하였습니다. 결핵이 이런 상태에서 심각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어느날 무엇인가 목젖을 타고 오르는 자극이 와서 기침을 했습니다. 비릿한 냄새와 함께 토해낸 것은 피였습니다. 변기가 온통 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것이 매일 반복되고, 매번 한컵 정도 피를 쏟아내었습니다. 그리고 나면 온몸이 파김치처럼 되었습니다. 저는 어차피 꼭 살고싶은 의욕이 없었기에 피를 토하면서도 병원을 가지 않았습니다. 괜찮다고 고집을 피웠습니다. 억지로 떠밀려 의사한테 갔습니다. 약을 한웅큼씩 먹고 또 주사를 맞았지만 피를 토하는 것은 계속되었습니다. Sarah선교사가 의사에게 문의하였습니다. 그는 “당신 남편에게 약을 투여하고 있는데 폐에 새로운 구멍이 계속 생기고 있다. 그는 앞으로 6개월을 넘기지 못할 것 같다”고 통고했습니다. 그해 여름 Dr Lee가 집으로 심방 오셨습니다. 방으로 들어 온 그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그는 제가 심한 결핵에 걸린 것을 아시는데도 슬퍼하거나 또는 동정하는 표정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무엇이 즐거웠던지 미소를 만면에 띄우고 저를 놀리듯이 “내가 너를 보러 온 줄 아냐? 네 아기를 보러 왔어” 하셨습니다. 긴장했던 저는 그만 웃음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는 당시 갓태어난 Henoch을 안아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저를 보고는 “성경을 읽으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읽어가던 중 창세기 12장 1~3절이 제 심령에 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창12: 2) 하신 말씀에 이르자 그 말씀이 제 황폐한 심령에 임했습니다. ‘나는 얼마나 자신을 의미 없고 보잘것없는 존재로 보는가,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얼마나 굉장하고 위대한 존재로 보시는가?’ 깨달음의 전율이 제 영혼을 사로잡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병으로 죽지 않고 캠퍼스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죽게 해 주십시오!’ 마침 그때 Stuttgart대학에서 입학허가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1981년 Stuttgart에서 거하며 창세기와 로마서를 공부할 때 어느 사이에 어떻게 치료되었는지 모르게 결핵이 완치되었습니다. 장래 사역의 방향을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선교가정을 이룰 당시 전박사님이 주신 방향을 다시 영접했습니다. 1982년 Heidelberg를 일생의 선교지로 영접하고 이사하였습니다. Heidelberg는 Neckar강이 있는 호반의 도시로 알려져 있습니다. 경관이 빼어나고 오랜 역사의 사연을 안고 있는 고성이 있는 낭만의 메카입니다. Heidelberg은 68학생 운동의 본거지가 되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과격한 단체들이 결성되었고 심지어 이들은 Heidelberg에 있는 제 5 미군사령부를 폭탄차량으로 공격하였습니다. 미군 여러 명의 사상자가 생겼습니다. Heidelberg는 가장 전통적인 대학이었던 만큼 68학생운동의 피해를 많이 입었습니다. 학생들이 교수를 쫓아내고 자기들의 이념에 동조하는 사람들을 교수가 되게 하였습니다. 68학생운동의 영향아래 교육제도가 개편되었습니다. 이 때 “국민학교”가 “초등학교”로 개칭되었습니다. 인문과학의 성지였던 Heidelberg대학은 옛 명성을 회복하기까지 오랜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원래 68학생운동의 기본요구는 국가로부터 그리고 교회로부터 간섭없는 개인의 자유입니다. 개인주의는 전후 교육정책과 68학생운동으로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독일은 2차 세계대전을 경험하며 각 개인이 국가를 맹목적으로 따를때 자신의 민족과 전세계에 얼마나 큰 범죄를 저질렀는가 깨달았습니다. 그후 독일은 교육의 방향전환이 있었습니다. 국민각자는 더이상 국가의 이념에 맹목적으로 따르는 대신 각 개인이 스스로의 비판적 안목을 키우게 했습니다. 곧 국가는 자기 구성원의 인생관, 가치관을 간섭치 않고 각 개인이 성숙하도록 교육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집단안에서 안정감을 찾는 일본인과는 달리 독일에서는 각 개인이 강해졌습니다. 특히 68학생운동이후 도덕과 모든 가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배재했기에 사람들에게는 결국 그 최고의 가치와 의미가 자아실현에 집중되었습니다. 그렇게 교육받고 성장한 그들은 개인 개인의 의견이 분명하고 또 이를 분명하게 표현합니다. 고등학교만 졸업해도 그 생각이 자립적이고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개성과 인격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독일학생들은 당시 저와 15살 정도 차이가 있었지만 그들은 제가 그들보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저를 존중하거나 특별한 배려를 하지 않았습니다. Heidelberg에서 저의 개척자의 신앙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두 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학교심방을 갔습니다. 학생들을 성경공부에 초대했습니다. 초대된 학생들중 간혹 한둘이 왔습니다. 그리고 갔습니다. 때로는 오기로 한 학생이 오지 않아 예배때까지 마음졸이며 그들을 기다린 적도 자주 있었습니다. 한번은 예배준비를 마치고 양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초인종이 울렸습니다. 약속한 그 학생이 과연 왔습니다. 여자친구까지 동반했습니다. 그리고 포도주도 가져왔습니다. 제가 그를 예배에 초청했고 그리고 예배 후에는 식사도 같이 하자고 했던 터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배를 먼저 본다는 것을 아예 잊었는지 예배를 시작하려는데 얼굴색이 변했습니다. 그리고 예배를 앞두고 화를 내며 가버렸습니다. 포도주도 도로 가지고 가버렸습니다. 한번은 물리를 전공한다는 새내기가 왔습니다. 체구가 아담했고 용모도 순진해 보였습니다. 창세기 1장을 같이 읽었습니다. 제가 미처 설명하기도 전에 그의 강의가 시작되었습니다. Big bang이후 극미한 순간후에 우주가 형성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양자역학의 기초아래 Planck 상수, Riemann 상수 등 많은 낮선 개념들을 쏟아내었습니다. 안경너머로 눈을 반짝이며 끊임없이 말을 이어갔습니다. 그가 어떻게 그토록 많은것을 쏟아내는지 제가 한마디 할 기회도 없이 꼬박 그의 강의를 들어야했습니다. 그의 강의가 끝났습니다. 그날 그렇게 시간이 다 끝났습니다. 그리고 그는 더 이상 강의하러 오지 않았습니다. 초청을 계속 하였습니다. 학생들이 와서 말씀공부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래 계속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저는 지금은 시작단계니까 하고 스스로를 위로하였습니다. 본국에서 꾸준히 편지가 왔습니다. 그 편지에서 저희 가정을 위한 기도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녹음된 메시지를 매주매주 받았습니다. 때때로 학생들이 오기도 했지만 주로 Sarah선교사와 둘이서 예배를 보았습니다. 당시 병원에서 근무하며 가사를 돌보는 Sarah선교사에게 이 소망없어 보이는 상황은 짐이 되었을 것입니다. Sarah선교사가 그것을 계속 감당해 주었고 저는 또 스스로를 위로하며 열매없는 선교생활을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학교에서 만나는 외국인 유학생들은 동병상련의 입장인지 말을 걸면 마음을 열고 대화를 했습니다. 그들에 비해 독일학생들은 비록 대화에 응하더라도 그들처럼 쉽지 않았습니다. 대하는 순간 그들의 무게가 느껴졌습니다. 조리있게 의견을 말하는 그들, 한마디로 훈련된 그들은 대개가 저에 비해 키도 크고 똑똑하고 의젓해 보였습니다. 저의 생각과 사상들은 그것이 막상 독일어로 표현되면 언어의 제약을 받아 유치하게 들렸고 또 그나마 어법이 틀려서 교정받기도 했습니다. 독일어로 말을 걸면 어떤 학생은 영어로 대답했습니다. „너의 독어가 어눌하니 네가 영어를 제대로 할 줄 알면 그렇게라도 해주겠다“는 식이었습니다. 그들과 대화하며 그들의 정돈된 생각, 그들의 생각을 뒷받침하고 있는 지식 등 그들이 불과 20살 남짓한데도 성숙해 보였습니다. 저 자신의 15년전 20대의 철없었던 시절과 비교하면 더욱 그러해 보였습니다. 물론 제게도 믿고 의지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비록 높은 실력과 자질을 소유했다할지라도 그들에게는 없는 것, 곧 성경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과의 성경공부에 매달렸으나 그것이 그들의 무관심에 부딪쳐 번번히 좌초되는것 이었습니다. 성경진리에 대한 무관심보다 저를 더 어렵게 만드는 문제도 있었습니다. 대화에 응하는 그들중 신학을 공부하는 학생들도 여럿 있었습니다. 그들과 이야기하는 가운데 오직 의지하고 있는 가장 기본적 사실 곧 성경이 진리라는 것조차 공유할 수 없는 것이 들어나곤 했습니다. Heidelberg대학의 신학은 역사고등비평, 양식비평을 통해 성경본문을 해체시키고 나아가서는 성경을 하나님의 계시가 아닌 인간문화의 산물로 정의했습니다. 그들에게 성경은 더이상 하나님의 권위있는 계시가 아니었습니다. 양들 초청을 계속 하였습니다. 이 사람 저 사람에게 계속 거절당했습니다. 제 심령이 날로 위축되었습니다. 학생들의 얼굴을 보며 그들의 표정을 살피며 눈치를 보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그 한사람 한사람이 어떻게 그리 야무지고 그리고 자기생각이 그토록 강한지 그리고 그들이 형성한 하나님없는 그 세계관이 어떻게 그토록 견고한지 제게는 그야말로 극복할 수없는 장애물이었습니다. 그들이 믿음이 없는데도 각자가 가지고 있는 인생관, 세계관에 나름대로 기초가 있고 그들의 삶 또한 견고하게 보이니 „나는 선교사다. 그러니 내가 너를 도와주겠다“ 하고 그들의 삶으로 뛰어들 여지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저는 가난하고 후진국인 아시아의 한 나라에서 독일의 부와 선진문화를 향유하기 위해온 사람에 불과한 것처럼 비춰지는 듯 했습니다. 저의 존재는 좋게 말해 그들의 관용의 대상이었지 그들에게 성경 선생으로 인정받고 그래서 그들이 제게 성경의 진리를 배운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힘들었습니다. 더구나 개인의 프라이버시가 엄격한 그들이 제게 성경을 공부하고 그 방향대로 순종하여 살라는 제 권면을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Heidelberg개척에 대한 vision이 사라져 갔습니다. Israel 정탐꾼의 혐오스럽던 자조적인 말이 메아리쳤습니다.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저는 당시 4살난 첫째아이, 그리고 3살인 둘째아이를 보며 저의 장래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장래가 막막해 보였습니다. 제 신앙생활은 밑빠진 독에 물붓는 것 같았습니다. 수고를 했을지라도 손에 잡히는 것, 눈에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피해의식, 손해의식에 시달렸습니다. 제 마음에 사실상 결론을 내려져있었습니다. “독일학생 선교는 불가능하다.” 그런데 만약 새 인생을 시작한다면 다른 그 어떤 것이 제 인생에 의미와 보람이 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인생을 당연히 보람있고 의미있게 보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명예도, 학문도, 돈도 다 좋았지만 복음을 전하고 그래서 구원을 받게된 그들을 예수님의 제자로 키우는 그 이상의 더 가치있는 것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안된다고 결론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선교사의 길을 계속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숨쉬며 절망하고 포기한 상태에서 학생을 초청하며 힘도 소망도 기대도 없이 제 선교생활은 이어졌습니다. 우리는 종교개혁의 유산 곧 Sola Fide 오직 믿음, Sola Gratia 오직 은혜, Sola Scriptura 오직 말씀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특히 Sola Scriptura 곧 오직 성경만이 하나님의 계시라는 종교개혁 근본정신에 따라 성경을 가르치는 것을 사역의 기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유럽의 풍토에서 이러한 1:1 성경공부를 통해 한 개인, 개인을 인격적으로 돕는 사역은 가장 합당하게 여겨집니다. 대중을 상대로한 전도보다 한 개인, 개인을 초청하여 그들과 성경공부하는 저희들의 사역이 예수님의 지혜임을 믿습니다. 그렇지만 제 선교사역은 실패였습니다. 이 실패를 통해 저는 이 Sola Scriptura의 의미를 다시 깨달아야 했습니다. Sola Scriptura는 말씀이 흔히 모든 공의회의 결정과 교황에 권위에 우선한다는 최종권위를 확정짓는다고 이해되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본래적으로 Martin Luther에게 Sola Scriptura 성경이 곧 하나님의 계시된 진리라고 하는 것은 도그마 이상의 관건이었습니다. 말씀으로 Martin Luther 스스로가 변했고 그의 지각과 이성과 양심등 그의 온 내면이 말씀에 사로잡혀 살았기에 그것은 교리의 문제가 아닌 실제적 삶의 문제였습니다. 사실 그는 기독교를 개혁하기 그 이전에 자신의 삶을 개혁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Sola Scriptura의 문제는 제가 무엇을 표방하고 얼마나 성경을 가르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저 자신이 실제로 어떻게 말씀으로 변화받고 사느냐의 문제였습니다. 저는 “성경이 진리다. 성경말씀을 공부해야 한다” 등을 외쳐댔지만 스스로는 말씀에 사로잡혀 살지 못했습니다. 저 스스로가 말씀에 의해 변화되고 매일의 삶에서 말씀의 은혜와 능력을 실질적으로 드러냈어야 했었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Sola Scriptura의 의미였고, Heidelberg의 개척의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영성의 준비없이 시작한 저는 그곳에서 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으며 Sola Scriptura의 의미를 체험적으로 배워야 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위에서 온 도움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런 중에 마가복음 공부가 끝났습니다. 36강이 되는 분량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철하려니까 가장 가운데 위치한 8장의 메시지가 빠져 있었습니다. 그 8장 메시지는 얼마전 학생을 심방했을 때 그와 대화를 나눈후 그에게 읽어보라고 주었었습니다. 그리고 얼마후 돌려 달라고 하였을 때 그는 거북스러운 표정으로 웃었습니다. 저는 그가 제 메시지를 물론 읽지도 않았고 버렸기에 그가 기억조차 못하는 것을 직감했습니다. 그 당시는 컴퓨터없이 메시지를 쓰는 시대였습니다. 생각해보면 그가 읽기도 거북스러운 손글씨 게다가 훌륭한 독일어도 아닌 것을 그렇게 취급하는 것이 이해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주에는 8장 말씀을 다시 공부하여 보충하기로 했습니다. 그 주말에 제 삶에 있어서 가장 커다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Sola Scriptura의 의미를 더이상 도그마가 아닌 실제적 삶으로 체험케 되는 사건이었습니다. 베드로의 “주는 그리스도이니이다”하는 고백 후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저는 이 말씀 앞에서 “나는 매일 학생을 심방하고 그리고 세계선교를 섬기고 있다. 이렇게 나의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가”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하셨을 때 이 말씀이 제 숨을 멎게 했습니다. 이 말씀은 제 자신의 최종적인 동기 곧 최고의 가치로서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는 저의 생존의지를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것을 따르고 있는 제 삶이 바로 생명을 잃어버리는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나아가 그러한 제게 계속 저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살 것인가 아니면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해 살 것인가, 그리고 그 두가지 삶의 필연적인 결과로 구원과 상실 바로 그 선택 앞에 저를 세운 것이었습니다. 이날 이렇게 이 말씀은 제 심령에 덮쳐와 저의 가장 깊은 삶의 동기를 드러냄으로써 저로 하여금 제 삶의 본질을 직관케 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제가 복음역사를 위해 얼마나 많이 제 시간, 제 물질, 제 수고를 희생하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제가 무엇을 위하여 그 모든 것을 했는가 하는 근본적인 동기의 문제요, 제가 신앙인으로서 도모지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가 하는 삶의 목적의 문제요, 또한 제 인생 그 모두가 그리스도와 복음을 향해 있는가 하는 원칙의 문제였습니다. 저는 과연 자신이 지금까지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가 되돌아보았습니다. 스스로 그리스도 주와 복음을 위해 헌신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른 바 그 “헌신”을 통해 저 자신을 구원코자 했지 결코 저 자신을 잃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양을 얻고, 제자를 얻고, 선교생활의 열매, 보람을 얻고 그를 통해 결국 제 자신의 생명을 얻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선교사역을 통해 저는 이렇게 자아의 성취와 완성 그리고 그를 통해 결국 자신의 천하를 얻고자 했던 것이었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배척하고 자아 실현과 자아완성을 인생의 목표로 삼고 살고 있는 그러한 삶을 비난하였지만 바로 제가 그러한 삶을 살고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제 자신이 제 삶의 목적이었습니다. 말하자면 결국 제 모든 선교활동은 심지어 하나님도 궁극적으로 제 자신의 행복을 위한 수단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이 날 밤 '자기"는 제게 있어서 이렇게 스스로의 정체성을 자아실현을 통해 완성코자 하는 이기적인 생존의지로 드러났습니다. 이 “자기”의 강력한 죄성 그리고 이를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무력함으로 인한 절망이 저의 심령을 채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계속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예수님께서 제 목숨이 바로 제가 얻고자 했던 천하보다 더 귀한 자명한 진리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제 생명을 내놓으라고 하실 때 예수님께서는 실로 제게 참 생명, 곧 영생을 주시기 원하셨습니다. 저는 이날 절망 가운데서 제게 이렇게 영생을 약속하시며 영생의 길을 가도록 권면하시는 예수님의 뜻을 새로이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날 밤이 깊어져 사라 선교사와 아이들은 이미 잠들어 있었습니다. 그 밤 저 또한 한숨과 절망, 새 방향과 소망을 전전하며 그 자리에서 그대로 잠이 들었습니다. 새 아침이 도래했습니다. 눈을 뜬 바로 그 순간 무엇인가 달라졌다는 것을 직감했습니다. 먼저 제 마음을 짓누르던 간밤의 한숨과 절망이 흔적없이 사라진 것을 느꼈습니다. 자유함이랄까 그리고 평안 또는 기쁨등으로도 정확히 표현할수 없는 그 무엇이 제 심령에 넘쳤습니다. 제 자신은 마치 깃털같이 성령의 대기권을 떠다니고 있는것 같았습니다. 저는 여느 때처럼 아이들을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양들을 초청하러 가고자 집을 나섰습니다. 저는 스스로에게 물을 수 있었습니다. “자 오늘은 가서 시간을 잃어버리고 물질을 잃어버리자! 또 무엇을 잃어버릴까?" 그리고 여느 때처럼 학생들을 초청하였습니다. 제 심령엔 더 이상 피해의식이 없었습니다. 실패할 것에 대한 두려움도 없었습니다. 절망하고 갔던 어제의 바로 그 길을 저는 확신을 가지고 가게 된 것이었습니다. 과거 자신의 인생이 실패했다는 생각으로 주위의 모든것이 짜증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제가 자유함을 얻었을 때 제 심령에는 주위 사람들에 대한 따뜻한 관심과 사랑이 흘렀습니다. 저는 먼저 가정을 돌아보았습니다. 그 당시 Sarah선교사는 직장에서 근무하면서 아이들을 키우고 가사를 돌보며 예배와 합심기도, 심방 등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Sarah선교사는 저로 인한 모든 수고를 감당하고 실패같아 보이는 하나님역사를 섬겨왔던 것이었습니다. 제 마음에 ' Sarah선교사를 향한 감사와 사랑이 솟아났습니다. 그래서 "Sarah, 내가 만일 죽어 다시 태어난다면 그리고 또 결혼하게 된다면 나는 꼭 당신과 결혼하고 싶어"라고 말했습니다. 말수가 적은 Sarah선교사는 아무 소리 없이 듣고만 있었습니다. 그러더니 “나도 그렇게 하겠어요" 하고 고백하였습니다. 독일학생들이 다르게 제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그들이 때로는 제품 안에서 마치 새근거리며 숨쉬는 작은 새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그들의 개인주의, 그들의 인생관이 속속들이 이해되었고 때에 따라 대견스럽다고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그들의 지식과 논리 심지어 마음의 세세한 생각들도 마치 손에 잡히는 듯 했기에 이제는 복음이 그들의 삶에 어떤 도전과 답을 주는가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되어졌습니다. 1986년 직업교육을 받을 당시 Mannheim으로 가고 있는 차안에서 한 젊은이가 건너편에 앉아있었습니다. 그가 신앙서적을 들고 있었습니다. 그에게 “당신은 예수님을 믿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잠시 생각하는듯 머뭇거리더니 제 가슴을 뛰게 하는 대답을 했습니다. “찾고 있어!” 그를 성경공부에 초청하였습니다. 그의 이름은 Reiner였습니다. 그와의 마가복음 공부는 특별한 경험이었습니다. 그는 말씀을 스폰지가 물을 빨아들이듯이 듣고 그리고 받아들였습니다. 제가 설명하는 모든 것을 받아 적었습니다. 심지어 저의 기침소리까지 받아 적는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와의 성경공부는 평균 4시간씩 진행되었습니다. 그와의 성경공부가 있는 날은 장기전에 대비해야 했습니다. 2시간쯤 공부하다가 잠깐 쉬고 맨손체조를 하고 다시 후반전에 돌입하곤 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의 도전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Koeln에도 올라가 말씀교제를 하였습니다. 창세기 12장 3절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는 Heidelberg에 믿음의 조상으로 세움받았습니다. 그러는 사이 그와의 공동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저희는 당시 방 3개가 있는 집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부부 침실, 아이들 방 그리고 예배드리는 방이었습니다. 그는 독립된 방을 얻기까지 아이들과 같이 거하였습니다. 공동생활을 하며 그를 점차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결단을 주저하고 시간을 잘 지키지 않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기세계에 집착하는 경향이 심했습니다. 저는 그가 스스로 성경읽기와 기도에 집중하는 그것이 훌륭한 영적 자질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믿음의 대상이신 예수님께 집중하기보다는 자신의 개인적 확신에 이르고자 했습니다. 이렇게 그의 영성은 예수님을 닮아가기보다는 그 스스로가 보다 거룩해지고 결국 자기완성을 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을 바라보기보다 습관적으로 자기의 영적 상태를 점검하였습니다. 그는 방향을 전환하여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께 집중해야 했습니다. 이것은 긴 싸움이 되었고 많이 진전되었습니다. 그가 사회자로 예배를 섬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당시 셋째가 태어나 갓난아이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았습니다. 예배후에는 다행히 부엌이 어느 정도 넓어 예배에 참석한 사람들과 부엌에 모여 커피를 마시며 교제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응접실처럼 사용하던 부엌은 길거리에서 주워온 헌 탁자, 의자 등으로 꾸며져 독일사람들의 삶의 수준과 너무 달랐습니다. 그러나 Reiner는 이 모든 것을 다 영접하고 한국음식도 잘 먹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 하나님 역사에 대한 주인의식 그리고 어떠한 양이던지 인내로 감당하는 점이 있습니다. 그는 책임감과 보통 사람이 흉내낼 수 없는 탁월한 인내를 가지고 현재 Heidelberg의 책임 목자요 독일의 지부장이 되어 직장, 가정 그리고 독일의 전체역사와 유럽을 섬기고 있습니다. Reiner를 섬기는 가운데 제 직장의 문도 열렸습니다. Heidelberg대학 약학과연구실에서 화학기술조교로 근무하는 것이었습니다. 한국에서 88올림픽이 개최되던 해였습니다. 제가 했던 일은 새로운 약품개발을 위한 특정 유기물을 합성하는 것이었습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독일사람들의 됨됨이와 독일사회를 보다 더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겪은 독일사람들은 철저한 질서의식이 있고 자기 분야에 충실한 것으로 그것은 그들의 특징이었습니다. 저는 연구실의 축적된 방대한 연구자료를 보며 그들이 기초적인 단계부터 전문적인 분야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연구하여 집대성해 놓은 것을 보고 감탄하였습니다. 개인 개인도 전문지식과 함께 풍부한 상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러모로 독일사람들이 실력있는 세계 일등시민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었습니다. 가끔 그들은 너무 원칙에 충실하여 무자비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습니다. 저는 이러한 사회경험을 통해서 성경공부를 하고 목자로 세움받고 동역하는 우리 모임의 독일목자들은 특별히 하나님께서 택하여 세우신 천사들인 것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Reiner가 공동생활하던 그 시기에 두 여학생이 성경공부하러 왔습니다. 그것은 자매사역이 어려운 독일에서 특별한 일이었습니다. 당시는 68학생운동을 통해 촉발 된 여파가 지속되던 Feminism의 때 였습니다. 여성들이 자유도 추구했습니다. 여성들이 강해졌습니다. 그 때까지 남자들은 운전을 하여 목적지에 닿으면 여성을 위해 자동차 문을 열어 주었습니다. 그것은 오랜 전통이었습니다. 그러나 68학생운동이후 이 풍습은 사라졌습니다. 스스로 강해진 여성들에게 그런 전통은 의미가 없는 하나의 형식에 불과했습니다. 여성들은 임금의 격차를 철폐하고자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나아가 그들은 남성들이 그 때까지 향유하던 신체적, 사회적 우월성에 도전하였습니다. 심지어 어떤 여성들은 남자들처럼 차려입고 궐련을 물고 술집에서 장기를 두는 시위적인 생활을 했습니다. Feminism운동은 자연히 Sex Revolution으로 확산되어 나갔습니다. 성에 관해 그때까지 독일남성들은 스스로에게는 관용적이고 여성에게는 순결을 요구하는 이중적인 태도가 있었습니다. 여성들은 이제 성에 대해 같은 권리를 요구했습니다. 또한 여성들의 일자리가 많아지면서 여성들은 남성들에게 더이상 경제적으로 매이지 않았습니다. 낙태의 자유를 부르짖는 여성이 외쳤습니다. “나의 배는 내게 속한다.” 15세 이하 소녀들의 낙태율이 70%가 증가하였습니다. 동성애를 옹호하는 기사들도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거리에서 대대적으로 동성애자들의 Performance가 행해졌습니다. 여기저기서 Coming out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Berlin시장이 전당대회의 연설에서 Coming out하였습니다. 외무부 장관 Guido가 Coming out하였고 외국을 순방하며 자기 파트너를 동반하였습니다. 성직자들의 성적 탈선이 자주 보도되기 시작했습니다. Razinger 교황이 변명하였습니다. “그것은 68학생운동 때문이다.” 핑계라고 비난받았으나 한편 일리있는 이야기였습니다. 비록 가정이 유지되어도 이전과는 달랐습니다. 여성이 자기들의 보다 많은 권리를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남편을 부엌으로 내몰고 부엌일을 돕도록 요구했습니다. 남편들은 옛날 숲속을 포효하며 산돼지를 잡던 모습과는 다르게 소심해졌습니다. 통계에 의하면 실제로 독일 여성들은 해마다 신장이 커지고 옷과 신발 등의 사이즈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여성들이 점점 남성화되고 있고 그리고 남성들은 점점 여성화되고 있다고 유력한 주간지가 보도했습니다. 남자들은 여성들을 두려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태국, 필리핀 등 아시아에서 신부감을 데려왔습니다. 이러한 분위기 가운데 독일 여학생들을 제자로 세우고 그리고 독일사람들의 가정을 이루는 것이 중요한 기도제목이었습니다. Heidelberg 센터에 나오기 시작한 두 여학생은 이름도 Birgit으로 같았고 전공도 같은 법학이었습니다. Birgit Pierce는 Sarah선교사와 성경공부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녀는 키가 크고 뭇 남성들의 눈에 띄는 용모를 하고 있었습니다. 목소리도 컸습니다. 법을 전공하고 목소리도 크니 논쟁이 벌어지면 몇 마디로 상대방을 쉽게 제압했습니다. 그녀가 요한복음을 공부하였습니다. Sarah선교사는 당시 태어난 넷째 아기에게 젖을 먹이면서 또 무릎으로 아기를 구슬리면서 그에게 말씀의 뜻을 설명하였습니다. 영적인 소원이 별로 없던 그녀는 Sarah선교사가 그녀에게 마음을 쏟는 사랑에 이끌려 계속 성경공부를 하러 왔습니다. 4장을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Sarah선교사는 예수님이 어떻게 사마리아여인을 도와주셨으며 그리고 그녀가 어떻게 변화되었는가 말했습니다. 그 여인이 물동이를 내려두고 자기 동네사람들에게 달려간 구절을 같이 읽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그 사마리아 여인이 이렇게 선교사가 되었다”고 설명하였습니다. 갑자기 Birgit의 표정이 달라졌습니다. 그리고 Sarah 선교사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공격적으로 물었습니다. “당신이 나를 선교사로 만들기 위해서 이 성경공부를 하고 있는 것이냐?” Sarah선교사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너도 선교사가 될 수도 있지. 네가 그렇게 된다면 얼마나 좋겠니!”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녀가 그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잘 있어!” 하고 가버렸습니다. 그녀를 다시 심방갔습니다. 그리고 “성경공부는 하지 않더라도 예배는 나와라” 하고 권면했습니다. 그녀가 다시 예배에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여러 주 예배에 참석한 후 다시 성경공부를 하지 않겠냐고 물었습니다. 그녀는 이를 기꺼이 영접하고 다시 성경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알고보니 예상치않은 곳으로부터 그녀를 위한 도움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계속 우리와 관계를 맺고 성경공부를 할 것인지 고민하며 그의 어머니에게 전화를 했다고 했습니다. 어머니는 “그 모임에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치면 그곳을 계속 가고 아니면 가지 말라”고 방향을 주었습니다. 신앙적인 그의 어머니가 그녀에게 결정적인 도움을 준 것이었습니다. 아닌지 나름대로 고민하였습니다. 어차피 Birgit의 눈에는 동양인 선교사, 교회에서 전혀 하지않는 1:1 성경공부, 게다가 가구라고는 색이 바래고 허름하다 못해 여기저기 헤어지고 벗겨진 긴의자, 낡은 탁자와 거기에 어울리는 낣은 의자들, 교회도 아닌 가정의 조그만한 방에서 드리는 예배 등 이 모든 것은 결코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때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어머니는 “그 모임에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치면 그곳을 계속 나가서 공부하고 아니면 가지 말라”고 방향을 주었습니다. 그의 어머니가 그녀에게 결정적인 도움을 준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계속 왔습니다. 사랑과 신뢰의 관계가 깊어졌습니다. 그녀는 저희와의 교제를 즐거워하여 주일날 예배가 끝나도 커피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또 저녁때까지 머물기도 했습니다. 넉넉치 않아 때로는 감자밖에 없었을 때도 그것을 요리하면 그녀는 기뻐하며 같이 먹었습니다. 그리고 어린 셋째, 또 더 어린 넷째 아이들을 데리고 놀며 기쁜 시간을 보내곤 하였습니다. 또한 같이 심방을 가서 치대에 다니는 한 여학생을 말씀으로 가르치는 목자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원래 Birgit는 연극을 공부하고 싶어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아버지는 “너 그것으로 밥 벌어먹을 수 있어?” 하였기에 그녀는 법학을 전공으로 택했습니다. 그녀는 학과공부에 큰 흥미가 없었습니다. 그녀는 자주 연극을 보러 다니며 끝나면 친구들과 어울렸습니다. 그리고 배우의 연기가 어떻고, 줄거리가 어떻고 등 연극비평을 하고 기숙사에 늦게 돌아오기가 일쑤였습니다.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다 보니 오전 강의를 빼먹는 것이 항다반사였습니다. 졸업할 때가 가까워 왔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졸업시험을 치를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녀에게 도전하였습니다. “너 내일 새벽 기도모임에 나와!” 그녀는 거칠게 반발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날 그녀는 새벽기도에 나왔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녀는 그 후에도 매일매일 나왔습니다. 가끔 늦기도 했지만 몇 년동안 단 한번도 거르는 일이 없이 새벽기도에 나왔습니다. 그녀의 생활패턴이 바뀌어졌습니다. 처음에는 오전에 졸곤 했지만 습관이 되자 오전시간이 남게 되었습니다. 밀린 공부를 감당하기 시작했습니다. 센터에 와서 동역자들의 기도지원을 받으며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드디어 졸업시험을 앞두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거의 불가능하게 보였던 시험을 단번에 합격하였습니다. 그녀는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하는 말씀을 자신의 일생요절로 영접했습니다. 오늘까지 늘 이 말씀으로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Chicago의 Dan Pierce목자와 선교가정을 이루고 선교사가 되어 미국으로 파송되었습니다. 저희는 그녀의 어머니는 물론 그녀의 가족과 신앙적 유대감을 갖고 서로 방문하며 교제를 했습니다. 한번은 그 어머니를 연합수양회때 초청하였습니다. 그 수양회에는 마침 다른 지구에서도 몇몇 어머니들이 오셨습니다. 자연스럽게 어머니들의 Fellowship이 열렸습니다. 한 어머니가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우리 아들이 성경공부를 하고 변했어요.” 그 옆의 어머니가 그것을 듣고 더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글쎄, 우리 딸이 2주전에 목자로 세움받았다니까요.” 그 자리에 있었던 Birgit 어머니가 그것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 두 어머니가 아무 소리 하지않고 가만히 듣고만 있던 Birgit 어머니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오셨나요? 당신 자녀도 이 수양회에 참석했습니까?” Birgit 어머니가 대답했습니다. “우리 딸은 얼마 전에 미국에 선교사로 파송되었습니다.” 다른 두 어머니가 입을 다물었습니다. Birgit의 어머니는 그후에도 저희와 서로 성도의 교제를 이어갔습니다. 그러던 중 2010년 부고장이 왔습니다. 여느 부고장과 달랐습니다. 그 안에 “Steger 여사가 소천하였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오라는 고인의 부탁이 있었습니다. 상복이 아닌 밝은 옷을 입고 오십시오. 오셔서 하늘나라 입성을 축하해 주십시오”고 쓰여져 있었습니다. 저희가 갔을 때 과연 분위기가 여느 장례식과 달랐습니다. Birgit의 어머니는 소천직전까지 고통하고 진통제가 투여되는 중 남편과 또한 둘째딸을 불러 믿음을 지키도록 권면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기절하고 깨어나면 또 불러 기도해주고 축복해 주었다고 하였습니다. 위로하러 갔던 저희들은 큰 위로를 받고 믿음을 배우고 돌아왔습니다. 다른 Birgit은 Heidelberg에 남아 믿음의 어미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선천적으로 몸이 정상적이지 않았습니다. 성격은 외동딸로서 게다가 과잉보호를 받고 자라왔기 때문에 이기적이고 고집스러웠습니다. 또한 그녀는 자신의 몸의 상태에도 불구하고 결혼에 대한 꿈이 있었습니다. 몇년동안 이기심과 이룰 수없는 결혼의 꿈으로 갈등하며 내적 고난을 겪었습니다. 그녀는 차츰차츰 변하여 제 메시지를 타이핑해주는 등 마치 비서인 양 저를 섬겨주었습니다. 여전히 결혼의 소망을 끊지못하던 중 여름수양회에서 “잉태하지 못하며 출산하지 못한 너는 노래할지어다. 산고를 겪지 못한 너는 외쳐 노래할지어다. 이는 홀로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네 장막터를 넓히며 네 처소의 휘장을 아끼지 말고 널리 펴되 너의 줄을 길게 하며 너의 말뚝을 견고히 할지어다“ (사 54:1.2)는 말씀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Heidelberg의 영적인 어미가 되는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이며 또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축복이라고 확신하였습니다. 그녀는 법대를 졸업한 후 Heidelberg대학교 교직원으로 취직하였습니다. 그리고 영적인 어미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그녀의 장막의 터를 넓혔습니다. 그녀는 대학교에서 성경공부 모임을 이루고 양들을 섬겼습니다. 퇴근하면 수시로 요리를 하여 동역자들과 양들을 자기집으로 초청하였습니다. 그리고 자기집을 개방하여 당시 학생이던 Regina목자와 장막을 이루었습니다. 다른 한편 그녀의 부모는 자기 딸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애지중지 키워온 자기들의 무남독녀가 돈한푼도 받는 일없이 어떤 외국인의 비서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 수치스럽고 그것에 대해 분노하였습니다. 자기 딸을 방문하던 중 의도치않게 저와 마주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불편한 표정으로 저를 외면하였습니다. 그녀가 신앙생활에서 돌이키지 않자 그녀의 부모는 그녀에게 “유산을 받고 싶으면 그 모임에서 나오라. 아니면 우리와 관계를 끊자!”고 하였습니다. 그녀는 부모를 사랑하였지만 예수님을 더 사랑하였습니다. 그녀는 주님과 형제자매들에게 더욱 헌신하였습니다. 장막의 터를 넓혀 여러 다른 지부 수양회에도 참석하여 섬기기도 하였습니다. 2014년 그녀는 주일예배후 여느 때처럼 즐거운 교제를 나누고 집으로 갔습니다. 그 다음날 학교에서 그녀가 아무 연락도 없이 출근하지않았다고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그녀의 집을 열었습니다. 그녀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상체는 침대위에 얹은, 마치 기도하는 자세로 숨져 있었습니다. 평소 그녀는 심장에 어려움이 있었는데 의사들은 그녀가 기대수명을 초월한 것에 대해 놀라곤 하던 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녀에게 넉넉한 삶을 주시고 때가 되자 그녀를 고통없이 하늘나라로 데려가신 줄 믿습니다. 바로 그 이틀 뒤 장례식이 열렸습니다. 독일각지에서 또 프랑스를 비롯한 외국에서도 선교동역자들이 와서 그녀의 소천을 애도하였습니다. 장례식후 센터에 모여 Birgit의 사진들을 보며 그녀의 삶을 추모하였습니다. 그리고 평소 Birgit과 친분을 나누었던 분들의 간증도 들었습니다. 그녀의 부모가 그날 그 모든 순서에 같이 참석하였습니다. 처음 그들은 슬픔과 분노에 싸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 날 장례식장에 가득 찬 그리고 멀리 외국에서까지 온 추모객들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사진을 통해 자기들의 딸이 여러 곳의 수양회에 참석하고 여러 국적의 성도들과 사랑의 관계를 맺고 또한 그들과 교제를 나누며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의 그녀와 공유했던 영적 교제에 대한 간증 등도 들었습니다. 그렇게 그녀가 남긴 그 삶의 자취가 그날 그녀가 부모가 예상치 못한 인상깊은 모습으로 펼쳐진 것이었습니다. 그 부모는 자기 딸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미쳤는가 또한 스스로도 얼마나 보람있고 행복한 삶을 살았는가 보고 감동하였습니다. Birgit의 어머니는 전형적인 독일의 부인이지만 과거에는 68학생운동의 영향을 받고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Birgit을 출산한 후에도 전통적인 가정부인으로 머무는 대신 자기 나름대로의 삶을 추구하고자 여행다니는등 68학생운동 정신을 표방했었습니다. 모임이 끝난후 그 어머니가 Sarah선교사에게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Sarah선교사의 목을 껴안고 말했습니다. “내 이름은 Karin이야. 그렇게 내 이름을 불러줘. 우리 서로 말을 트자. 우리 서로 친구가 되자!” 또한 그 아버지도 제게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손을 내밀며 친교의 장을 열었습니다. 이후로 그녀의 부모는 정규적으로 매달 예배에 참석하며 저희 모두와 사랑의 교제를 나누고 있습니다. Brigitte목자는 생물학을 시작하던 새내기때 성경공부에 초대받았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미국인 치과의사이고 독일인 어머니는 선생님으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부모가 이혼했던 터였고 어머니는 엄격하였습니다. Brigitte는 독일인으로써 사회 자본주의와 복지의 혜택을 누리고 성장했지만 68학생운동의 후예였습니다. 그녀는 자유도 물론 좋지만 그보다도 평등한 사회를 꿈꾸었습니다. 당시 그녀에게 자본주의는 부익부빈익빈의 불평등을 야기시키는 자본계급을 위한 시스템이었습니다. 그녀는 생물을 전공하고 있었지만 사회주의 계통의 책을 읽고 또 그런 정치모임을 기웃거렸습니다. 그녀에게는 자본주의의 불공정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Karl Marx가 유일한 대안으로 생각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무신론적인 인생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침 그 당시 루마니아의 차우체스코 정권이 몰락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소련연방이 무너지기 2년 전이었습니다. 루마니아의 몰락은 외부의 침략이나 어떤 간섭없이 그 내부의 모순으로 비롯된 붕괴였습니다. 차우체스코 정권이 무너지면서 상상도 못할 참상이 드러났습니다. 나라 전체는 감옥과 같았고 특별한 보호가 필요해 격리된 어린이들은 지옥에 던져져 있었습니다. 그것은 겉으로는 유토피아를 선전하는 공산주의의 숨겨진 일상이었습니다. Brigitte는 이를 통해 공산주의의 일당 독재가 태생적으로 안고있는 잔혹한 폭력을 보았습니다. 그녀는 그녀의 세계가 무너지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녀에게 분명해진 것은 공산주의는 더 이상의 대안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마음을 비우고 성경공부를 계속했습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수양회에 참석하였습니다. 그녀는 바로 그 수양회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사람이 선전하고 세우는 유토피아의 허구와 그리스도의 희생과 용서위에 세우는 하나님의 나라가 극명하게 대비되었습니다. 순간 그녀의 공허했던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녀는 그 말씀으로 거듭났습니다. 그녀는 성장하여 충성스러운 성경선생이 되었습니다. 공부도 충성스럽게 감당하여 생물학 박사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오늘날까지 여러 양을 꾸준히 섬기고 있습니다. 그녀는 Reiner목자와 가정을 이루어 현재 세 아이들을 낳아 키우며 센터사역을 주인의식을 가지고 섬기고 있습니다. 이 자매 조상들 이후로 Regina, Nicole, Angelika, Simona, Simone 그리고 Tanja 자매등이 동역하고 있습니다. Reiner목자가 조상으로 세워져가던 때 기숙사를 심방하여 의대생을 만났습니다. 그의 이름은 Markus였습니다. 성경공부에 초청하였습니다. 그가 성경공부를 시작하였습니다. 그 또한 하나님이 아브라함 한사람을 개인적으로, 인격적으로 도와주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매우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는 교회에서 자랐으나 한 인간을 그렇게 인격적으로 도와주시는 하나님을 알게된 것은 새로운 깨달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신도 그러한 하나님의 인격적인 방법대로 1:1을 통해 도움을 받고 있다는 것이 또한 감명받았습니다. 그 스스로도 그의 친구를 초청하여 1:1로 도왔습니다. 그가 센터에 머물면서 그의 취미가 눈에 띄었습니다. 그것은 망가진 자전거를 고치는 것입니다. 취미치고는 좀 특별하지만 처음에는 그것이 건전하고 유용하게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학과공부에 어려움이 있어 센터에 와서 공부를 하던 중에도 자전거를 보면 도저히 참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 기어이 자전거를 고쳐야만 했습니다. 그 건전한 취미는 말하자면 전공공부에 방해거리였습니다. “너는 자전거만 보면 왜 그렇게 자제를 못하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나는 내 조그마한 수고를 통해 망가진 자전거가 온전케 되면 성취감을 느껴”라고 대답했습니다. 실질적으로 그의 장래의 꿈은 자전거포를 열어 망가진 자전거를 실컷 고치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그의 취미생활을 통해 성취감과 기쁨을 자주 누리다 보니 그의 학과공부가 계속 밀렸습니다. 그래서 동역자들은 그를 위해 망가진 자전거가 그의 눈에 띄지않도록 특별히 수고를 해야 했습니다. 제가 한번은 Markus가 자전거포를 열려한다는 이 심각한 문제를 전박사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전박사님은 이를 듣자마자 어떻게 세상에 그런 일이 있냐고 웃기 시작하여 한동안 그칠 줄 몰랐습니다. 그의 학과공부가 밀리고 결국 첫 국가시험에 낙제하였습니다. 공동생활을 하고자 그를 제 가정에 초청하였습니다. 그 때는 센터 독립했지만 제 가정은 여전히 방 세칸 짜리 집이어서 부부침실, 딸 둘이 방 하나를 차지하고 그리고 두 아들들이 나머지 한 방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제 아들 둘과 같이 한방에서 공동생활을 하였습니다. Reiner는 한번도 불평하지 않고 이것저것 잘 먹었는데 Markus는 한국음식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가족이 다 모이는 저녁식사 때 Sarah선교사는 빵을 내놓거나 아니면 그가 좋아하는 감자를 요리했습니다. 저는 같이 먹지만 먹고나면 식사를 한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기 전 부엌에 나와 라면을 끓여 먹으면 비로서 뿌듯한 마음이 들어 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운이 좋은 어느날은 저녁식사때 한국음식이 나왔습니다.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런데 Markus는 그것을 조금만 그것도 억지로 먹는 듯했습니다. 그리고 잠자기 전 그는 부엌으로 나와 빵에다 버터를 발라 소시지를 얹어먹고 그런 후에야 그도 비로서 뿌듯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지나놓고 보면 그러한 Markus가 여러해 동안 김치냄새나고 된장냄새나는 저의 가정에서 공동생활을 한 것이 참으로 기적같고 감사합니다. 그런데 사실 그의 어려움은 한국음식뿐만은 아니었습니다. Markus가 당시 초등학생이던 제 작은 딸아이와 가끔 티격태격 싸웠습니다. Markus가 그 아이를 체벌한다고 엉덩이를 때렸습니다. 제 아이가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모래를 퍼다가 그 신발에 가득 채워 성공적인 복수를 했습니다. Markus는 본래 성격이 능글거리기를 잘 하고 책망받는 것에 대해 괘념치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주일예배는 왜 꼭 나와야 되냐?” 하는 등 당연한 것을 가끔 뒤집어 저와 Sarah 선교사의 속도 뒤집어놓고는 하였습니다. Sarah선교사가 한 번은 참고 참다가 폭발하여 “그만 나가서 내 눈에 다시는 보이지 마!” 하였습니다. 그러면 그는 능글맞게 웃으며 씩씩거리는 Sarah 선교사를 달랬습니다. 그는 성경공부중에도 가끔 뒤집어 몇 시간이고 토론을 해야 했던 적도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저희들을 가장 많이 뒤집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저희들의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지금도 그는 가끔 우리의 속을 뒤집어놓고 능글능글 웃기를 잘합니다. 그가 드디어 국가시험을 모두 패스하고 의사가 되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Markus를 위해 여기저기서 며느리감들을 주선하였습니다. 그리고 “얘야! 이번주 집으로 내려와 선을 보거라!”고 연락해왔습니다. 제가 물었습니다. “너 선보러 갈거냐?” 그가 천연덕스럽게 대답했습니다. “그럼! 갈거야.” 그가 능글맞게 웃는 모습을 보며 제가 차츰 뒤집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 너 그 여자가 맘에 들면 그 여자와 결혼할거냐?” “아니! 꼭 그렇지 않아!” 제가 다그쳤습니다. “그러면 왜 선보러 가냐?” 그는 대답을 할듯말듯 제 눈을 쳐다보고 능글능글 웃었습니다. 저는 더 이상 뒤집어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했습니다. 제가 다시 물었습니다. “너 도대체 믿음의 결혼할거냐” “그럼!” 그가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능글맞게 웃으며 한마디 덧붙였습니다. “좋은 사람 있으면.” 저는 그가 한국사람과 같이 사는 것이나 한국문화를 드러내놓고 좋아하지 않는것을 알고있었지만 그 당시 독일자매들 중 합당한 신부감을 찾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가 한국의 신앙적인 여성과 결혼했으면 하는 바람가운데 기도하던 중이었습니다. 연말에 동역자들의 송년회가 열렸습니다. 어떤 가정은 나와서 찬송가를 불렀습니다. 아이들도 앞에 나와서 짧은 연극을 하였습니다. Markus가 무엇인가 발표할 듯이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능글맞게 웃으면서 앞으로 나왔습니다. 그가 노래를 불렀습니다. “달, 달, 무슨 달, 쟁반같이 둥근 달.” 제가 뒤집어질 뻔했습니다. 물론 이번에는 다른 방향으로. 그가 언제 한국 동요를 알았는지, 도무지 언제 연습했는지 놀랐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신기해하고 웃고 넘어갈 그 이상의 사건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말로하는 대신 그것을 통해 능글맞게도 “나는 한국 자매를 영접하기로 마음을 정했어” 하는 싸인을 보내는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연희센터의 아름답고 신앙이 분명한 자매목자를 소개받았습니다. 가정을 이루기 위해 Sarah선교사가 한국에까지 그를 동행했습니다. Sarah선교사가 소식을 전해왔습니다. “Markus목자가 공항에서 꽃을 들고 있는 Maria목자를 보더니 글쎄 입을 다물지를 못해!” Markus가 한국문화를 꺼려한다는 것이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결혼예식, 한국음식, 폐백 등 모든 것을 기쁨으로 영접하고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지금 그의 가정은 네 자녀를 낳아 키우고 있습니다. 또한, 그는 환자들의 신뢰를 받는 의사일뿐 아니라 센터에서 가구, 기구 등의 수리, 센터 관리하는 문제가 생길 때마다 전문가적인 식견과 실력으로 기쁘게 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망가진 자전거도 계속 고치고 있습니다. Martin목자는 Heidelberg에서 약 200km 정도 떨어진 시골에서 태어나 성장했습니다. 그곳은 Markus목자의 고향 근처이기도 합니다. 그는 부모의 사랑으로 자랐지만 부모의 간섭없이 독립적인 삶을 살기 원했습니다. 그 또한 68학생운동의 후손으로 자아실현이 그의 삶의 최고의 가치였습니다. 고등학교 졸업시험을 마치고 대학에 진학하게 되었을 때 그에게 기회가 왔습니다. 지도를 펴놓았습니다. 그에게 당시 중요했던 것은 부모의 간섭이 미치지 않는 안전거리를 확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집으로부터 적어도 200 km 정도는 떨어져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대학교를 찾아보니 바로 그 200km 경계에 Heidelberg대학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Heidelberg대학에 지원하였습니다. 등록코자 Heidelberg에 왔습니다. 인구 15만의 Heidelberg는 시골에서 온 그에게 군중속의 고독을 느낄만한 대도시였습니다. 등록하는 첫날 한 젊은이가 그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대도시에서 바로 그에게 말을 걸어준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그 젊은이가 자기와 같은 지방의 사투리로 말을 걸어왔기에 마치 고향사람을 만난듯 반가웠습니다. 그는 능글능글한 Markus목자였습니다. Martin은 즉시 마음을 열고 성경공부 초대를 영접했습니다. 그는 성격이 조용하고 성실했습니다. 그는 그렇게 조용하고 성실하게 성경공부하고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지극히 충성스러운 동역자가 되어 센터의 모든 궂은 일을 도맡아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는 경성센터 출신의 아름답고 신앙적인 Petra선교사와 가정을 이루어 두 아이를 낳고 동역하고 있습니다. 그들 중 더러는 센터건물이 따로 없었던 가정교회 때부터 예배를 같이 드렸었습니다. 당시 제 가정에는 그들 뿐아니라 다른 양들이 드나들고 또 밤 늦게도 찾아왔습니다. 식탁의 음식은 별로 풍요롭지 않았으나 그들과 아이들과 양들로 풍성했습니다. 그들은 모임이 끝나도 계속 머물고 싶어했습니다. 그들도 양들도 모임에 흐르는 사랑을 느끼고 아이들과 함께 모두가 한 가족이 되었습니다. 어울려 같이 기쁨과 웃음을 나누었습니다. 지금도 그들은 센터건물없이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던 그 때를 가끔 회상하며 나누었던 교제를 기쁨으로 추억합니다. 이들 모두가 오늘날까지 남는 자요 조상이 되어 하나님의 역사를 지키는 것을 감사합니다. Heidelberg UBF는 연희센터를 비롯해 본국 여러 지구의 기도지원과 선교사지원을 받았습니다. 그 첫 선교사는 Helen Kim선교사였고 그 이후 Peter, Grace Park, Wesley, Susanna Song, Johannes Kim, James, Esther Kim, Marek, Rebedda Lee, Thomas, Charis Jung, Josef, Rivka Yoon, Josua, Gloria Myung 등 여러 선교가정이 파송받아 와서 그릇을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그들 중 일부는 개척자로 보냄 받았습니다. 이 시간 헌신하신 선교동역자들을 생각하고 감사드립니다. 믿음의 조상들이 섰지만 제자양성이 순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한 의대 새내기가 성경공부를 시작하고 영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모임의 꽃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어느날 그의 부모가 나타나 그와 그의 모든 짐을 싣고 갔습니다. 또 사랑과 신뢰의 관계를 맺고 자라던 여러 양들이 갑자기 아무 연락없이 관계를 끊었습니다. 저는 나중 그것이 인터넷에 떠도는 UBF에 대한 비방이 그 원인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건이 생길때마다 아픔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문제에도 하나님께서 Toni와 Regina를 남겨 주시고 그들을 세우시고 사용하시는 것을 감사합니다. Toni는 아르메니아 정교의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그의 부모는 아르메니아 정교만이 유일하고 참된 기독교라고 확신하기 때문에 Toni가 우리 모임에 와서 성경공부하는 것에 대해 매우 못마땅해했습니다. 그의 부모와 가족들의 줄기찬 핍박이 있었습니다. 그의 두 형은 경찰인데 그는 제게 “UBF의 뒷조사를 하겠다. 그래서 밝혀질 모든 사실을 공표하여 UBF를 매장시키겠다”고 협박하였습니다. 모든 협박이 안 통하자 부모는 Toni가 집에 돌아오기만하면 가족들의 성경공부를 인도하게 하겠다고 하고 그의 신앙을 존중하겠다고 회유하였습니다. Toni가 집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아라메니아 정교와 Toni의 복음신앙의 차이가 갈수록 분명해지자 “당장 나가라”고 추방하였습니다. 그 당시 그는 교육대를 졸업하고 학교에서 실습을 할 때였습니다. 그는 핍박을 이겨내고 신앙의 본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결혼문제로 신앙이 더욱 성장하여 가정을 이루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는 현재 주일예배의 말씀의 종으로 쓰임받고 있습니다. Regina는 Berlin에서 Heidelberg으로 공부하러 왔습니다. 그녀가 Heidelberg에 첫날 길바닥에서 남들이 버린 UBF전도지를 줏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보고 센타에 스스로 찾아왔습니다. 성경공부를 하고 처음에는 소감을 잘 쓰다가 소감쓰는 것이 자기의 영적 성장에 도움이 안 된다고 소감을 쓰지 않겠다고 고집부렸습니다. 한번 그녀에게 개인적으로 받은 말씀이 있냐고 있으면 어떤 말씀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녀는 “왕같은 제사장”하고 자신있게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 말씀은 당시의 요절로 센터의 벽에 붙여 있었습니다. 제가 물었습니다. “어떻게 그 말씀을 받았냐?” 그녀는 “센터를 드나들 때마다 그 말씀이 늘 거기 걸려 있잖아! 그래서 들어오다가 보고 나가다가 보고 이렇게 자주 보게 되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영접하게 됐지!”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덧붙이기를 “내 이름이 Regina잖아? 그런데 그 뜻이 여왕이라는 뜻이야. 어때? 왕 같은 제사장! 나한테 딱 맞잖아!” Birgit Pierce에 이어 Regina도 그의 기이한 빛을 증거하기 위해 선교사로 파송되었습니다. 그녀는 중국연변대학교의 독일어 교수로 일하고 있습니다. 1980년대 90년대 Koeln, Bonn, Heidelberg 등의 지부에 주인들과 현지목자들이 세워졌습니다. Abraham Lee선교사가 유럽지부장으로 유럽과 독일역사를 섬겼습니다. 2001년 광풍이 불었습니다. 개혁하자고 하는 분들이 모임을 비판하고 자신들의 출신 센터의 동역자들을 모아 당을 이루었습니다. 하나였던 모임이 갑자가 갈라졌습니다. 상호간의 비난이 쌓이고 불신이 깊어갔습니다. 심지어 그 분들은 불신과 비난의 편지를 독일목자들에게까지 보내는 등 사태가 악화되었습니다. 오랫동안 사랑과 기도, 섬김으로 세워진 현지인 목자들이 하나 둘 넘어지기도 하였습니다. Heidelberg에서 그 것에 휩쓸려 선교사 세 가정, 독일목자 두 가정과 그리고 자라고 있던 여러 독일양들이 떠났습니다. 다른 한편 남아있던 사람들도 많은 상처를 받았습니다. 독일을 비롯한 유럽선교에 위기가 왔습니다. 그 때 Dr. Lee가 유럽선교를 책임을 맡아 섬겨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제 개인적인 신앙생활에 심히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제가 이를 영접했을 때 Dr. Lee, 배사라 그리고 Dr. John Jun 등 귀한 종들을 배우고 그들과 가까이 동역할 수 있는 은혜를 누렸습니다. 한번은 Dr. Lee에게 기도제목을 달라고 전화했습니다. Dr. Lee가 잠시 침묵하더니 곧 입을 열어 저를 책망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때는 제게 깍듯한 존댓말로 정중히 대해주셨고 또 어떤 때는 익살맞은 농담을 하고 같이 웃곤 했는데 그 날은 반말로 무자비한 책망을 퍼붓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겸손히 순종하고 배우고자 하는 저를 그가 왜 그토록 책망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책망이 오래 계속되었습니다. 드디어 책망이 끝났습니다. 전화기를 내려놓았을 때 저의 영안이 뜨인 것 같은 느낌이 왔습니다. 그는 제가 지나치게 의존심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겉으로는 겸손히 배우는 양해도 실제로는 스스로 책임을 지지않는 자세였습니다. 결국 그는 제게 물고기를 잡아 주는 대신 스스로 물고기를 잡도록, 자립적인 믿음으로 사역하도록 도와주신 것이었습니다. 배사라 선교사님을 배우고 같이 동역할 수 있던 기회를 감사합니다. 여유있게 웃으시며 또한 제가 보내드리는 보고서를 늘 기뻐 꼼곰히 읽어주시고 기도해주셨습니다. 한번은 배사라선교사님께 친히 유럽지부장 수양회에 오셔서 강의를 해달라고 부탁드렸습니다. 배사라선교사님이 “내가 그것을 마땅히 순종하겠다”고 겸손한 표현으로 승락하셨습니다. 그녀가 얼마 후 문제지와 강의안을 보내왔습니다. 그리고 제게 “네가 그것을 교정해 내게 다시 보내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모두의 성경 선생이신 그녀가 제게 방향을 받고 교정받아 강의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분이 한사람, 한사람을 독립된 인격은 물론이고 자기도 필요에 따라 방향을 받고 배워야 할 성경선생이라는 그러한 신뢰를 가지고 대하신 것을 새삼 알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도움으로 저는 유럽지부장들을 보다 존중하고 그들과 동역하는 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또한 배사라선교사님을 더욱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전박사님의 도움을 감사합니다. 그런데 그분에 대해서는 그 분이 현재 왕성하게 활동하시는 중이니 그분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후일로 미루겠습니다. 5년 전 저는 Washington, Chicago의 UIC, El Camino 등 미국의 부흥하는 지구 등을 돌아보며 제가 물러나 2선에서 사역할 때가 왔다고 느꼈습니다. Reiner목자가 후계자가 되었습니다. 이제 주님께서 저의 제 2기 신앙생활을 축복하시기를 기도합니다. 2. 유럽선교 유럽은 비교적 적은 땅에 7억 남짓한 인구가 50여개국을 이루고 있습니다. 유럽연합에서 독일은 영토의 크기와 인구수로 유럽의 큰 나라 중 하나이면서 동시에 정치적, 경제적으로 커다란 영향력을 미치고 있습니다. 독일은 시인과 사상가의 나라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 Bach, Haendel, Beethoven 등을 비롯한 세계적인 음악가를 배출하였습니다. 원래 독일은 당시 세계를 호령하던 로마의 문명과 접하기 전까지 역사의 무대에 야만족으로 등장했습니다. 이들은 농사보다는 주로 숲에서 산돼지를 사냥하여 먹고 살았습니다. 이들과 국경을 같이하고 있던 로마사람들에게 무식하고 용맹스런 이들은 골치거리였습니다. 전쟁을 하면 도모지 두려움을 몰랐습니다. 이들에게 어떻게 두려움을 가르칠 수 있나 고민하던 로마인들은 특별히 사자를 데려왔습니다. 그리고 사자를 그들 앞에 풀어 놓았습니다. 그러나 무식한 German인들은 지구상에 사자라는 동물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몰랐습니다. 사자가 달려들려하자 그들은 “야, 저 큰 개 좀 봐라! 저 개를 때려 잡자!” 하고 사자를 때려 잡았습니다. 이것은 Gombrich의 세계사에서 인용된 내용입니다. 이렇게 당시의 독일은 음악, 문학, 철학 등 수준높은 문화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로마사람은 „German민족의 그 강함의 비밀이 도대체 무엇인가?“ 궁금해 하였습니다. 역사가 Tacitus는 German종족들을 주의깊게 연구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강한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그에 의하면 German민족은 철저히 일부일처제였습니다. 또한 상급자에게 복종했습니다. 성적으로 방종하고 난잡한 로마사람들과는 달리 German민족에게는 충성과 신의가 내면화되어 있었고 그것이 그들을 그토록 강하게 했던 것이었습니다. 독일과 유럽의 개척은 Dr. Lee의 세계선교에 대한 열망과 기도로 시작되었습니다. 1967년 Dr. Lee는 그 해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개최된 국제복음주의학생회(IFES: International Fellowship of Evangelical Students) 모임에 참석했습니다. 그는 세계선교를 위해 지극히 작지만 의미있는 실제적 일을 실했습니다. 회의가 끝난 후 목자님은 당시 독일에 있던 한 자매를 심방하고 그와 독일개척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1969년 7월, 대전 UBF의 서인경, 이화자, 설동란 세 분이 간호사로 독일에 가게 되었습니다. 서독 선교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던 Dr. Lee는 이들을 단지 선진국에 돈 벌러 가는 일꾼이 아닌 미래의 선교사로 보셨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출국을 연기시키고 짧은 기간이나마 훈련을 시키셔서 그들을 선교사로 파송 하셨습니다. 간호사 중심의 자비량 선교사역의 시작 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서독은 UBF 선교 역사상 최초의 선교지가 되었습니다. 동시에 독일 360개 캠퍼스 선교와 유럽 45개국 선교역사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72년 8월 3년 계약을 마치고 1차로 돌아온 서인경 선교사의 선교보고도 기독교회관에서 성황리에 개최되었습니다. 독일선교를 지원하는 기도가 계속 불타 올랐습니다. 일용할 양식 표지에는 그들의 사진이 실리기도 했습니다. 1970년에 들어서면서 UBF에서 훈련받은 간호사 선교사들이 파송되어 왔었습니다. 독일에 온 선교사들은 바로 주위에서 이방땅의 문화충격에 처해있는 자신들의 동료 곧 한국간호사들의 영적 결핍상태와 대치되었습니다. 독일이 그때만 해도 기독교국가라고 하였지만 그들에게 영적인 도움을 줄 수 없었습니다. 그러한 분위기에서 많은 한국 간호사들은 삶의 무의미에 고통당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들로 하여금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 라고 질문케 하였습니다. 그들은 가난한 마음으로 인생의 해답을 찾고 있었습니다. 선교사들은 그들을 성경공부를 통해 도왔습니다. 시간을 내고 심방을 가고 자주 모이고 수양회를 이루었습니다. Dr. Lee가 1974년 스위스의 Rausanne대회 후 독일을 방문하고 그 이후로도 꾸준히 와서 선교동역자들을 도왔습니다. 본국에서 그들을 위한 열정적인 기도지원이 있었습니다. 한국간호사들간에 커다란 영적부흥이 일어났습니다. 1974년 9월 16-22일, 스위스 알프스 산 중턱에 위치한 Sewis에서 여름수양회가 열렸습니다. 모두 156명이 참석했습니다. 그리고 서독과 스위스에 흩어져 있던 선교사님들과 그들이 돕던 양들이 모여 UBF 역사상 첫 국제 수양회가 되었습니다. 이 수양회에서 Dr. Lee가 전한 메시지 ‘사람들의 빛’ 은 분기점이 되었습니다. 여기엔 말씀에 근거한 탁월한 메세지, 서독 간호사들에 대한 그의 간절한 심정과 그들 처지와 내면에 대한 깊은 이해 등이 녹아있습니다. 그 메시지 일부를 인용합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말씀은 한마디로 모든 생명의 근원이 하나님 이시라는 사실을 가르쳐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선물로 주셨기 때문에 세상에 태어나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청지기입니다. 생명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잘 살아보고자 하는 의욕이 있습니다. 복된 삶을 살기 위해 물질을 구하고, 안락함을 구하고, 명예를 구합니다. 살아보려고 하는 나머지 내가 가진 생명에 대해서 책임을 지려고 합니다. 그래서 원치 않게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마음속에 모실 수 있을 때만 진정한 행복과 삶의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며 예수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빛을 받아 인생의 빛을 발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또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을 마음 가운데 모시지 않는 사람들도 깊이 회개하고, 요한복음을 통해서 삶의 길을 찾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어떤 일을 한다 해도 무덤으로 가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덤으로 가는 존재들은 아닙니다. 구원을 완성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Dr. Lee는 이 말씀에 근거하여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을 선물로 받고 이 세상에 태어난 귀한 존재들이라는 것을 가르쳤습니다. 이 메시지를 통해 그 동안 운명적으로 생각하고, 어두움 속에 있던 사람들이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빛을 발견 하였습니다. 그들은 내던져지듯 아무렇게나 살면서, 삶을 낭비해온 것을 눈물로 회개했습니다. 이들은 그러한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소감을 썼고, 생명의 빛이신 예수님을 위해 살 것을 결단했습니다. Sewis 수양회에 참석한 많은 이들이 처음으로 예수님을 만나고 감격하고 또한 그 후 위대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들 중 특히 Petra 선교사의 초청으로 Sewis수양회에 참석한 Volker Keller 형제의 변화는 기념비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서옥수 선교사의 초청으로 Sewis 수양회에 참석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태어날 때부터 허약한 건강 때문에 운명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중학교를 마치고 그가 원하는 진학을 하지 못하고 직업학교에 다녀야 했습니다. 그는 수양회 때 예수님을 자신의 생명의 주인으로 영접하고, 처음으로 자신의 운명주의적인 생각을 극복하는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그 후 창세기 말씀 공부를 하며 자신의 인생에 두신 하나님의 소망을 영접했습니다. 그는 직장에 사표를 내고 중부 독일의 Solingen으로 이사해서 하나님의 역사에 적극적으로 동참했습니다. 선교사들은 그의 변화와 성장을 보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독일 사람에게도 역사하는 것을 보았고, 독일 복음 역사에 대한 비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 후 Dr. Lee는 그를 본국으로 초청하여 서옥수 선교사와 가정을 이루도록 도와주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독일 UBF의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셨습니다. Dr. Lee는 그를 끝까지 사랑하셔서 그를 자주 Chicago에 초청하시고 수양회에 말씀의 강사로 세우시고 도와주셨습니다. 그의 도움으로 Vollker Keller 목자는 존경 받는 독일의 믿음의 조상으로 쓰임 받고 있습니다. 한 자매는 1970년 만 20세도 안 되는 어린 나이에 남독으로 파견되어 왔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을 몰랐습니다. 그녀는 다만 돈을 벌어 가난한 가족을 돕기 원했습니다. 그래서 월급을 타서 가족에게 송금하고 그리고 또 일하고 또 송금하였습니다. 그것은 애초 자신이 원했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원하던 일을 할 수 있다면 만족할 것 같던 그녀는 자신의 영혼에 채울 수 없는 빈자리가 있음을 느꼈습니다. 무의미와 허무감이 그녀의 심령을 채웠습니다. 스스로 인생의 답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근무가 끝나 기숙사에 돌아오면 눈물을 흘리곤 하였습니다. 마침 같은 병원에 한국에서 파송되어 온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그 선교사가 그녀를 성경공부에 초청하였습니다. 그녀는 성경공부를 통해 창세기의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Sewis 수양회에서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그녀는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자신의 삶을 성찰하였습니다. 어린 나이에 가난한 가정을 위해 돈 벌러 낯선 외국에 나온 것은 지극히 운명적이었습니다. 마치 자신의 삶이 어린 나이에 애굽으로 팔려온 요셉같이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요셉은 가족과 만민의 구원을 위해 자신이 미리보냄받은 것을 깨닫고 믿었습니다. 그녀 또한 운명적인 생각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가족의 구원을 위해 독일에 온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녀는 가족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불신자인 그의 어머니가 하나님을 영접하고 이윽고 온 가정이 그리스도를 영접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의 빛이 그녀의 삶과 그녀의 가족에게 생명으로 임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요한복음 3장 16절을 통해 죄인들에게 그리스도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습니다. 허무와 무의미로 가득했던 그녀의 가슴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깨달음과 벅찬 기쁨으로 넘치게 채워졌습니다. 그녀는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그 사랑에 감동되어 만나는 사람마다 “예수님을 믿으세요?” 물으며 전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또한 영적인 눈으로 독일사람들은 바라보았습니다. 처음에는 그들이 신앙이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어차피 부족함이 없는 선진국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인격적인 믿음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수양회 때 몇몇의 독일사람이 참석한 것을 보았습니다. 말씀을 듣고자 하는 그들은 한국말을 이해할수 없어 목자없이 버려진 양같았습니다. 그녀는 그들을 위해 말씀을 독일어로 통역해 주었습니다. 독일사람을 향한 목자의 심정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복음이 필요한 독일을 위해 기도하며 독일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인생의 방향을 잡았습니다. 그녀는 고용계약이 끝난 후 귀국하는 대신 독일의 간호학교에 들어가 독일에서의 장래를 준비했습니다. 당시 Dr. Lee는 Köln대학 병원에서 근무하며 외롭게 투쟁하던 그녀를 심방하고 도와 주셨습니다. 그때 Köln 시가지를 지나다가 한 완구점에서 하늘을 쳐다보고 웃고 있는 개 한 마리를 발견했습니다. Dr. Lee는 그 개를 그녀에게 선물하며 그 개의 이름을 '환상’(Vision)이라 지어주었습니다. 사도행전 2:17, “너희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라는 구절에서 따온 이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녀에게도 Sarah라는 이름을 주었습니다. 그녀는 간호학교 졸업 후 한국으로 나와 연희센터의 어느 괜찮은 형제와 선교가정을 이루었습니다. 그녀는 Köln로 본부가 옮겨지기까지 그곳에서 사역하였습니다. 그리고 82년부터 Heidelberg를 개척하였습니다. 1978년부터 드디어 형제선교사가 파송되기 시작하였습니다. 당시 독일은 68학생운동의 여파로 계속적으로 전통이 파괴되어 갔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몰락해가던 기독교의 영향이 약화되고 사회는 지속적으로 세속화되었습니다. 그 영향으로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 눈에 띄게 증가하였습니다. 파송된 형제선교사들은 주로 독일에 남아서 독일선교를 위해서 헌신하던 자매선교사들과 가정을 이룬 분들이었습니다. 그 첫 형제선교사로 Abraham Lee, 그 다음해 1979년에 Kaleb Hong, 고 Isaak Yook, Daniel Park, Peter Chang, Markus Kum 그리고 계속 이어서 Johannes Lee, Noah Yu, David Hong, Moses Hur, Peter Lee, Abraham Mose Ju, Stephanus Park 등 선교사들이 이어서 파송되어 왔습니다. 형제 선교사들이 오면서 독일대학생 선교를 위한 기도제목이 분명해졌습니다. 1979년 2월에 그의 가정은 중부 독일에서 가장 큰 도시인 Köln으로 이사했습니다. 그리고 몇몇 간호사 선교사들이 Köln대학 병원에 새로운 직장을 얻어 합류하였습니다. 노동계약이 끝난 여러 선교사들이 본국으로 돌아가 훈련받고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들에 다시 선교사로 파송 되었습니다. 독일에 남은 간호사선교사들은 다음 단계의 역사를 위한 그루터기가 되었습니다. 또한 같은 해 Volker Keller 목자 가정이 남부 독일에서 이사 왔습니다. 1974년 로잔 국제대회 참석 후 Dr. Lee는 두 달 반에 걸쳐 스위스와 독일에 흩어져 있던 20여개 지구의 선교사들과 이들이 돕는 양들을 심방하여 말씀공부를 하며 그들을 도와주셨습니다. 그는 Andeas Krahwinkel 목자가 말씀을 전하는 은사가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미국 나이아가라 국제여름수양회와 CIS 여름수양회의 말씀강사로 세우고 그를 도왔습니다. 당시 Köln에서 인턴 목자 훈련을 받고 있던 Walter Nett 목자는 Dr. Lee의 도움으로 Washington의 Winelle 목자와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Bonn UBF에서는 Joachim Dietzel, Peter Schweitzer, Stefan Elsholz, Jochen Schweitzer, Xenofon Grigoriadis, Berthold Koesters, Heidelberg UBF는 Reiner & Brigitte Schauwienold, Birgit Pierce, Birgit Stoller, Markus Abel, Martin Ziegler, Toni Demir, Köln UBF는 Andreas Oberreuter, Eberhard Gross, Rainer Wieland, Olaf Theis, Michael Pohl, Knut Rohrmoser등이 독일 목자도 세움을 받았습니다. 한편 영국에서는 Ian Kaier, Paul Ridge가 세움받고 이어서 James Wood, Darren Hildrow, Louise 목자 등도 복음 사역의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Bruno Aussant현지목자가 조상으로 세움받고 많은 고난을 거치고 이제 불어권 전역사를 책임지고 섬기는 큰 종이 되었습니다. . 3. 유럽 선교의 현재 그리고 미래 이러한 유럽사회에 하나님께서 오늘까지 복음 역사를 이루신 것을 감사합니다. 현재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선교지인 독일에서는 Reiner Schauwienold, 영국에서는 Dr. Ian Kaier, Paul Riedge 그리고 프랑스에서는 Bruno Aussant 등 현지목자가 지부장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2년 전부터 불가리아의 지부장인 Dr. James Kang 선교사가 유럽지부장, Reiner목자가 독일지부장이 되어 두분이 동역하여 유럽역사를 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300명 가까운 한국 선교사님들과 60여명의 현지 목자들과 성숙한 2세선교사들 등 이 세 그룹이 하나가 되어 유럽 선교를 감당코자 기도하고 있습니다. 유럽 각국의 지부장들은 작은 섬처럼 유럽 각지에 흩어져 있습니다. 오직 한 가정만 사역하는 나라도 일곱 나라입니다. 이분들은 홀로 이방땅에 와서 현지문화를 익히며 그들 가운데 외로운 등불처럼 존재해 온 아브라함 세대입니다. 그들이 20년, 30년 홀로 있으면서 믿음을 지킨 사실은 감동적입니다. 혹자는 많은 수고에도 대다수가 제자양성의 열매가 없다는 생각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아브라함처럼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삭을 키워주셨습니다. 지난 유럽여름수양회때는 그들의 2세들이 열정적으로 수양회를 섬겼습니다. 금년 또한 젊은 동역자들이 주인공이 되어 수양회를 섬길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습니다. 유럽의 2세들의 미래를 위해 기도합니다. 그들은 현지의 언어와 문화를 익혔고 주류 사회에 진입하고 있습니다. 이들을 통해 우리 모두에게 미래는 열려 있습니다. 이 유럽땅에 금년의 유럽여름수양회에 복음의 생명이 넘치길 기도합니다. 유럽여름수양회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요. 유럽여름수양회에 참석해 주십시요. 바울에게 임했던그 밤에 환상이 저희에게 임하길 기도합니다.
1188 2019 전국학사목자수양회 메세지(주제,특강), Tesimony 파일 [1]
[레벨:15]나요한
50 2019-06-07
1187 미세먼지가 ‘마음의 병’ 가져온다
[레벨:20]김이삭(영길)
34 2019-05-07
첨부한 기사를 보면 미세먼지로 인해 건강염려증이 많아지고 있는 현실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손석한의 세상관심법 미세먼지가 ‘마음의 병’ 가져온다 입력2019-01-28 11:00:01 [shutterstock] 최근 미세먼지 때문에 온 국민이 불편을 겪고 심지어 고통까지 받고 있다. 뿌연 하늘이 우리 마음을 흐리게 만들고, 외출 후 목의 답답함이나 기침 등은 우리 몸을 병들게 한다. 미세먼지가 호흡기와 심혈관 계통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에 더해 뇌졸중과 치매, 우울증까지 유발한다는 연구 결과가 알려지자 국민의 염려가 더 커졌다. 미세먼지가 심한 날은 사람들이 외출을 꺼린다. 상점과 식당 영업이 잘 되지 않는다. 미세먼지가 심해질수록 경제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고 볼 수 있다. 미세먼지를 유발하는 중국에 대한 혐오 감정도 고조되고 있다. 급기야 1월 22일 문재인 대통령은 “미세먼지 해결은 국민 건강권을 지키기 위한 국정과제”라며 “미세먼지 문제를 혹한이나 폭염처럼 재난에 준하는 상황으로 인식하고 대처해야 한다”고 말했다. 필자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로서 미세먼지가 우리의 정신건강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을 고찰해보고자 한다. “너를 대한민국에서 태어나게 하다니, 미안해” 미세먼지 농도가 ‘나쁨’ 수준을 보이면 어린이부터 어른까지 마스크를 쓰고 외출하는 것이 이제는 일상이 됐다. [뉴시스] 첫째, 미세먼지는 우리에게 건강염려증과 공포증을 유발한다. 건강은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부분이다. 건강이 곧 행복이라는 등식에 대부분 동의한다. 특히 한 차례 심하게 아파본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건강할 때가 행복했다”고 말한다. 우리는 몸 어딘가가 아프거나 이상 신호가 느껴지면 병원을 찾는다. 진찰 결과 의사가 “다행히 큰 이상 소견은 없다. 증상을 완화하는 약을 처방하겠다”고 하면 환자는 대부분 안도한다. 그러나 일부 환자는 “그럴 리가 없다. 추가 검사를 해달라”는 반응을 보인다. 건강에 대한 염려가 지나친 나머지 심각한 병에 걸린 것처럼 불안해하며 병원을 찾아 이 검사, 저 검사를 받는 ‘건강염려증’ 환자다. 건강에 대한 염려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래야 질병 발생 초기에 적극적으로 치료를 받고 평소에도 건강 관리에 노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건강에 대한 염려가 너무 크면 마음이 늘 불안하고 몸의 작은 변화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 전날 과식으로 소화불량 증세가 나타나면 마치 위암에 걸린 것처럼 느낀다. 미세먼지에 노출되면 폐암에 걸릴까 봐 걱정한다. 미세먼지에 대한 공포 때문에 외출을 거의 하지 않고, 어쩔 수 없이 집 밖을 나갔다 오면 소독 수준으로 온몸을 씻고 입안을 헹군다. 가족에게 이러한 행동을 강요하기도 한다. 하루 종일 집 안 청소에 몰두하는 ‘청결강박증(결벽증)’ 증세도 동반되곤 한다. 미세먼지는 이처럼 우리의 불안 수준을 끌어올려 건강염려증, 공포증, 강박장애 등을 야기하거나 악화시킬 가능성이 매우 높다. 둘째, 미세먼지는 우리에게 죄책감을 심어준다. 특히 엄마들에게 그렇다. 아이와 공원 산책을 하거나 가벼운 운동 겸 놀이를 즐기려던 엄마들은 집 안에 머물거나 실내 놀이시설을 이용한다. 어릴 적 미세먼지 없는 공기를 당연한 것으로 여겼던 엄마들은 이제는 깨끗한 공기가 당연하지 않다는 사실에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이성적으로는 ‘내 잘못이 아니야’란 생각이 들지만, 곧 ‘하지만 우리 아이에게 정말 미안해. 집 밖에서 마음껏 뛰어놀게 해줄 수 없으니’라는 감정적 죄책감이 든다. 죄책감이 커지면 ‘너를 대한민국에서 태어나게 한 엄마, 아빠가 미안해’라는 생각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 순간 애국심은 싹 사라지고 국가와 정부에 대한 원망이 커진다. 그래야 죄책감이 조금이라도 수그러들기 때문이다. 상대적 박탈감과 혐오 감정 부추겨셋째, 미세먼지는 상대적 박탈감을 안겨준다. 미세먼지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 부자는 값비싼 마스크를 구매할 수 있고 일정을 조절해 미세먼지를 피하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매일 야외에서 작업해야 먹고살 수 있는 사람은 미세먼지에 더 많이 노출된다. 건강한 이는 미세먼지에 노출돼도 당장 눈에 보이는 피해를 입지 않지만 병약자, 노약자, 어린이, 임신부 등에게는 피해가 즉각적이거나 더러 치명적일 수 있다. 앞으로 우리는 미세먼지에 의해 추가적으로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미세먼지는 피해의식과 적대감을 고취한다. 미세먼지가 발생하는 원인은 여러 가지이지만, 중국도 그중 하나다. 중국을 우리에게 피해를 주는 국가로 인식할 수밖에 없다. 이는 엄밀히 말하면 피해의식이 아니라 ‘피해인식’이다. 그런데 문제는 중국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가 미세먼지 하나로 생긴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고구려 역사를 자신의 것으로 왜곡하고자 했던 나라, 세계 곳곳 여행지에서 시끄럽게 떠들고 위생적이지 않은 사람이 많은 나라,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보복으로 우리 관광업계를 고사시킨 치사한 나라…. 여러 부정적 이미지가 겹치면서 중국에 대한 혐오 감정이 커진다. 여기에 더해 한국이 중국에게 당당하게 항의하지 못하고, 국력에서 밀리며, 한국의 미세먼지는 한국 내 오염물질 배출 때문이라고 하니 얄미운 것에 얹어 굴욕감도 생겨난다. 노후화된 경유차, 석탄화력발전소, 노후 가정용 보일러 등도 혐오와 원망의 대상이 될 개연성이 있다. 이웃 간에도 ‘당신 때문에 내가 피해를 본다’는 피해의식이 생겨나 혐오의 감정과 배척의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래저래 미세먼지는 국민의 정신건강에 악영향을 미친다. 당부하고 싶다. 미세먼지를 정치적으로 활용해선 안 된다. 여야, 좌우, 빈부, 남녀, 노소 등을 초월해 범국가적으로 해결해야 국민의 정신건강을 지킬 수 있다. 주간동아 2019.01.25 1174호 (p90~91) 손석한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의학박사 psysohn@chol.com
1186 기억술
[레벨:20]정아브라함
46 2019-04-16
[인생수업]기억력 천재가 되려면?…기억은 '외우기' 아닌 '떠올리기'이아름 콘텐츠기획자 areumlee@kyunghyang.com --> 입력 : 2019.03.29 12:00:01 수정 : 2019.04.04 16:53:27 정계원 기억력스포츠협회 대표가 지난 19일 경향신문사에서 열린 인생수업에서 ‘누구나 하는,천재들의 기억법’을 주제로 강의하고 있다. 정 대표는 기억이 ‘외우기’가 아닌 ‘떠올리기’라 말한다. 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 <iframe width="390" height="55" frameborder="0" src="http://adv.khan.co.kr/RealMedia/ads/adstream_sx.ads/www.khan.co.kr/newspage@x93" scrolling="no" title="포토링크"></iframe> --> 휴대전화를 바꿨다. 연락처 수십개가 싹 지워졌다. 동생에게 급하게 전화해야 하는데 ‘010’ 다음이 생각나지 않았다. 가족과 친구 전화번호 몇개쯤은 줄줄 외웠는데 이젠 연락처가 없으면 누구와도 통화할 수 없는 사람이 돼버렸다. 기억력을 관장한다는 뇌 속 해마는 날이 갈수록 쪼그라드는 것만 같다. 직장 동료가 별거 아니라는 듯 웃었다. “아파트 현관 비밀번호 잊어서 두 시간 동안 집에 못 들어가 본 적 있어?” 지난 19일 서울 정동 경향신문사에서 열린 ‘인생수업’에서 정계원 기억력스포츠협회 대표는 “나이와 배경에 상관없이 누구나 기억력을 향상시킬 수 있다. 타고난 기억력이 전부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수업 제목도 ‘누구나 하는, 천재들의 기억법’이다. 실제로 기억력을 겨루는 기억력스포츠대회에서는 40·50대는 물론 60·70대 노인들도 종종 찾아볼 수 있다고 했다. 그에 따르면, 기억은 ‘외우기’가 아닌, 누구나 할 수 있는 ‘떠올리기’이기 때문이다. 평범한 대학생이었던 정 대표도 ‘떠올리는 기억법’을 연습해 2015년 세계기억력대회에서 한국인 최초로 ‘국제기억력마스터’가 됐다. 한 시간 동안 1000자리 이상의 숫자를 기억하는 수준이다. “단순 반복을 통해 힘들게 외우는 방법으로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반면에 외우지 않더라도 기억이 나는 경우도 있죠. 다들 오늘 아침식사 메뉴는 기억나시죠? 사람들이 어떻게 기억하는지를 파악해서 방법론으로 만든 것이 ‘기억법’입니다. 힘들이지 않고 떠올릴 수 있는 것이 가장 좋은 기억이죠.” 정 대표는 사람들이 ‘연결된 정보’와 ‘시각화된 정보’를 쉽게 기억한다고 했다.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 빨가면 사과, 사과는 맛있어”라는 노래 가사는 원숭이 엉덩이, 사과 등의 특징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기 때문에 떠올리기가 쉽다. 책 한 권보다 영화 한 편이 더 쉽게 기억나는 것도 우리 뇌가 그림과 영상에 더 빨리 반응하기 때문이다. ■말도 안되는 상상을 해보세요 사물을 연결하고 시각화해 떠올리는 대표적인 기억법이 ‘기억의 궁전’이다. 자신에게 익숙한 장소와 기억해야 할 대상을 결합시켜 장기간 기억하는 방식이다. “가장 최근 식사 자리를 생각해보세요. 누가 내 앞에 있었고 옆에 있었는지 떠올릴 수 있을 겁니다. 대상을 바로 기억해내긴 어렵지만, 장소부터 접근하면 쉽게 떠올릴 수 있죠. 언제 어디서나 떠올릴 수 있는 나만의 장소가 있다면 그 장소가 (기억을 저장하는)‘기억의 궁전’이 될 수 있습니다. 주로 자신의 집을 궁전으로 하는 경우가 많고, 컴퓨터 게임 속 장소를 궁전으로 만드는 경우도 있어요.” 퇴근해 집에 들어서는 순간을 생각해보자. 현관문부터 시계방향으로 신발장, 화장실, 침실, 주방, 베란다를 떠올렸다. 1분간 떠올리기를 계속 반복했다. 이게 처음 지어진 내 기억의 궁전이다. 정 대표가 ‘호랑이’ ‘줄자’ ‘마이크’ ‘볼펜’ ‘베개’를 기억해야 할 단어로 제시했다. “이제 5개의 단어들을 내 기억의 궁전 속 공간에 차례대로 넣어보세요. 영상을 보듯 장면을 떠올려야 합니다. 감각이 다양해질수록 기억도 쉬워집니다. 기억의 궁전 속 책상에 ‘대통령’이란 단어를 결합시킬 때 간혹 ‘책상에서 열심히 공부해 대통령이 되겠다’ 식의 글짓기를 하는 분들이 있는데 그렇게 결합한 기억들은 잘 남지 않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우리집 책상에 앉아 책을 읽는 모습 같은 것을 상상해보세요. 꿈을 꾼다고 생각하세요. 말도 안되는 상상을 할수록 머릿속에 잘 남고 떠올리기도 쉽습니다.” 내가 만든 기억의 궁전. 현관 입구의 신발장부터 시작해 화장실, 침실, 주방, 베란다에 ‘호랑이’ ‘줄자’ ‘마이크’ ‘볼펜’ ‘베개’를 넣어보았다. 신발장에서 “어흥!” 하던 호랑이는 쉽게 기억했지만. 베란다에서 베개를 말리는 기억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너무 평이한 기억이었기 때문이다. 정신을 집중하고 내가 만든 기억의 궁전에 들어섰다. ①신발장에서 호랑이가 “어흥, 놀랐지?”하며 튀어나오는 장면을 상상했다. 호랑이를 잘 다독인 후 화장실에 들어섰다. ②화장실 두루마리 휴지가 있어야 할 자리에 줄자가 돌돌 말려있는 상상을 했다. ‘있어야 할 화장지는 어디 갔고 웬 줄자가 있지? 난감한데?’ ③이번엔 침실에 들어섰다. 침실에선 밤 늦게까지 마이크로 노래를 부르는 상상을, ④그 옆 주방에선 수저통에 숟가락, 젓가락이 아닌, 볼펜이 잔뜩 꽂혀있는 모습을 상상했다. ⑤이후 베란다로 나가 젖은 베개를 말리는 상상을 했다. (위 그림 참고) 자, 이제 단어를 꺼내올 차례다. 내 기억의 궁전을 불러냈다. 신발장부터 베란다까지 돌아다녔다. 그곳에서 호랑이, 줄자, 마이크, 볼펜을 꺼냈다. 베란다에서 베개를 말리는 모습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정 대표는 “기억이 너무 평이한 경우 잘 떠오르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기억의 궁전법을 숙달하면, 어떻게 상상해야 기억이 잘 나고 어떨 때는 안 나는지를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며 “‘상상한 내용이 평이하다’는 생각이 들 땐 좀 더 신경 써 상상하게 된다. 그렇게 처리한 정보는 시간이 꽤 지나도 (기억의 궁전에서) 꺼내올 수 있다”고 말했다. 기억의 궁전은 ‘리모델링’이 가능하다. 연습 삼아 만들어본 내 기억의 궁전은 계속 사용하기에는 너무 작은 공간이다. 정보를 넣어둘 장소가 5개밖에 없다. 기억해야 할 정보가 많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정 대표는 13평(43㎡)짜리 궁전을 30평, 40평으로 확장하지 않고도, 정보를 넣어둘 장소를 5개에서 50개, 500개로 늘려나갈 수 있다고 했다. “화장실도 세면대, 변기, 샤워기 등 계속 쪼갤 수 있고 각각을 정보를 넣어두는 공간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다만 ‘한 뼘’ 이상의 간격을 두고 공간을 만들어야 혼선이 생기지 않습니다. 정보를 저장할 장소를 200개 정도 갖게 되면 공부에도 활용할 수 있고, 일상에서도 도움받을 수 있습니다. 200개는 결코 많은 게 아닙니다. 집에서 50개, 학교에서 50개, 직장에서 50개를 만들 수도 있어요.” ■IT시대에 기억법이 필요한 까닭 끊임없이 자신에게 적합한 궁전을 완성해가야 한다. 기억의 궁전 속 ‘화장실 거울’과 ‘침실 거울’에 넣어둔 정보가 헷갈린다면, 정보를 넣어두는 그 장소의 특징에 더 주목해야 한다. 화장실 거울은 물기가 항상 묻어있으니 아예 기억의 궁전을 만들 때 단순한 ‘화장실 거울’이 아닌, ‘물기 묻은 화장실 거울’을 놓아두는 식이다. 기억할 때 이 ‘물기’를 이용할 수도 있다. 기억의 궁전 속 ‘화장실 거울’에 ‘호랑이’라는 정보를 넣어야 한다면, ‘호랑이가 비에 젖어 울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보자. 기억해야 할 정보를 ‘선풍기’ ‘에어컨’ ‘TV’ 등 기능이 있는 장소에 넣어두는 것도 방법이다. 호랑이가 시원한 에어컨 앞에서 땀을 말리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그래도 헷갈린다면 기억의 궁전에서 그 장소를 없애버리는 것이 낫다. 20개의 장소로 만들어 본 ‘기억이 궁전’, 15번 ‘싱크대’와 16번 ‘세탁기’의 동선이 꼬여 단어가 밀렸다. 18번 ‘회오리’는 책장에서 회오리가 나오는 장면을 실감나게 상상하지 못해 기억조차 하지 못했다. 정 대표는 기억의 궁전에서 정보를 저장하는 장소를 늘려보라고 했다. 이번에는 5개가 아닌, 20개의 장소를 만들게 했다. 경비실, 엘리베이터, 현관문, 신발장…집에 들어가는 순서대로 20개의 장소를 만들었다. 그가 20개의 단어를 제시했다. 각 단어를 내 기억의 장소에 결합시켰다. 이후 진행된 테스트에서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나는 모두 16개 단어를 순서대로 떠올렸다. 20개 단어를 순서대로 모두 기억해낸 참가자는 5명이었다. “오늘 기억한 단어들은 모두 중기 기억입니다. 3일에 한 번, 5일에 한 번 반복하면 장기 기억이 됩니다. 장기 기억이 되면 장소의 도움 없이도 기억할 수 있습니다. 그 자리에 새로운 것을 넣을 수도 있어요. 기억의 궁전 기억법은 순서대로 기억해야 하는 정보·절차·숫자들을 처리할 때 좋습니다.” 컴퓨터, 휴대전화 같은 기기들이 많은 정보를 저장하는 시대에 기억법을 배우는 일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는 “많이 외웠다는 데 초점을 두기보다는 어떻게 외울까를 고민했으면 좋겠다”며 “그 과정에서 새로운 생각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저는 이렇게 대답해요. 기억은 ‘정보 저장’ 그 자체보다 ‘어떻게 정보를 처리했느냐’에 더 의미가 있다고요. 오늘 여러 단어를 기억해 봤지만 모두 다른 장면으로 기억하셨을 겁니다. 컴퓨터라면 아마 똑같은 방식으로 기억했겠지만 사람은 기억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평소에 그냥 지나쳤던 것들을 어떻게 하면 나만의 의미로 바꿔볼 수 있을까 고민하고, 다른 정보와 결합해보세요. 새로운 것들이 보일 겁니다. 그런 활동이야말로 사실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생각이잖아요.” ■4월 수업은 ‘죽을 때까지 함께 하는 생존운동’ 인생수업 4월 주제는 ‘죽을 때까지 함께 하는 생존운동’ 입니다. 바쁜 일상에 치이다보니 제대로 운동 한번 할 시간조차 없지 않나요? 체력은 달리고, 근력은 전혀 남아있지 않고, 조금만 움직여도 금세 피곤해지지 않나요? 당신은 생존을 위한 운동이 필요합니다. 임미정 트레이너와 함께 직장이나 가정에서 쉽게 연습할 수 있는 ‘생존운동’을 배워보세요. 몸을 좀 움직여야하니 신축성 ‘1’도 없는 정장은 말고, 되도록 신축성 있는 옷, 운동화(혹은 단화) 등 편한 복장으로 오세요.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903291200011&code=210100#csidx8459495c19b367e829739d2a2d9ac92
1185 간암 명의가 겪은 통증과 치료
[레벨:20]정아브라함
38 2019-04-14
간암 명의 괴롭힌 ‘목 디스크’… 30분 스트레칭으로 건강 찾아김상훈 기자입력 2019-04-13 03:00수정 2019-04-13 10:21 뉴스듣기프린트글씨작게글씨크게 트랜드뉴스 보기 1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스토리 더보기 [베스트 닥터의 베스트 건강법] <1> 윤승규 서울성모병원 암병원장윤승규 서울성모병원 암병원장은 매일 30분 스트레칭과 요가를 통해 목 디스크에서 탈출했고 현재까지 건강을 지키고 있다. 봉 체조를 끝낸 후 그는 “작은 스트레칭이라도 매일 거르지 않고 실천해야 제대로 효과를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 환자들은 최고의 진료를 받기 위해 각 분야에서 권위가 있는 의사, 이른바 ‘베스트 닥터’를 찾는다. 유명 대학병원의 베스트 닥터들에게 환자가 몰리는 현상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환자가 넘쳐나기 때문에 베스트 닥터들은 쉴 틈이 없다. 건강에 적신호가 켜지는 일도 있다. 실제로 일부 베스트 닥터들은 남모르게 병을 앓기도 한다. 하지만 환자들의 모범이 되는 베스트 닥터들도 많다. 그들은 나름의 ‘비법’으로 자신의 건강을 관리한다. 나와 내 가족을 치료하는 베스트 닥터. 그들의 건강법을 연재한다.》 윤승규 서울성모병원 암병원장(58·소화기내과 교수)은 간암 분야의 베스트 닥터다. 올해로 30년째 의료 현장에서 환자를 진료하고 있다. 서울성모병원 내과 과장과 간담췌센터 센터장을 맡은 데 이어 암병원장까지 요직을 두루 맡았다. 간 분야의 최고 학회라는 대한간학회의 회장이기도 하다. 세계보건기구(WHO) 서태평양 지역 간염협력센터 소장이면서 한국연구재단 연구평가위원 명함도 갖고 있다. 명성이 화려한 윤 교수도 나이가 들면서 생기는 병은 피하지 못했다. 지금으로부터 12년 전. 윤 교수는 목 디스크로 꽤나 고생해야 했다. 숟가락을 잡지 못할 정도로 팔이 저렸다. 밤에는 통증 때문에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동료와 선배 의사들에게 증세를 호소했더니 수술해야 할 것 같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수술은 내키지 않았다. 당시 나이 40대 후반. 환자가 한창 많을 때였다. 수술하면 진료실을 오래 비워야 했다. 그 많은 환자에게 못할 짓이라 생각됐다. 수술 대신 다른 방법을 찾기로 했다. 우선 통증을 억제하는 약을 먹고 주사를 맞았다. 하지만 그때뿐이었다. 그랬던 윤 교수가 지금은 말짱하다. 목 디스크 증세도 사라졌고, 50대 후반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체력도 뛰어나다. 비법이 뭘까. ○ 아침, 점심, 잠들기 전에 스트레칭 주요기사간암 명의 괴롭힌 ‘목 디스크’…30분씩 ‘이것’했더니 ‘대화 시한’ 둔 김정은…北 원하는 ‘새 계산법’은? 목 디스크로 고생하던 시절, 선배 정형외과 교수가 “수술이 싫으면 일단 스트레칭을 열심히 하는 건 어때?”라고 제안했다. 스트레칭만으로도 통증을 줄일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처음엔 믿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어 밑져야 본전이겠거니 하고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목을 미는 스트레칭과 누르는 스트레칭, 두 종류를 반복했다. 우선 목을 미는 스트레칭은 이런 식이다. 첫째, 두 손으로 목의 아랫부분을 받친 뒤 위쪽으로 밀어 올린다. 둘째, 목 뒷부분에 손바닥을 대고 앞쪽으로 민다. 셋째, 오른손바닥을 오른쪽 뺨에 댄 뒤 왼쪽으로 민다. 넷째, 왼손바닥을 왼쪽 뺨에 댄 뒤 오른쪽으로 민다. 각 동작을 모두 15초씩 3회 반복한다. 그 다음에는 목을 누르는 스트레칭을 했다. 첫째 동작은 미는 스트레칭과 거의 비슷하고 둘째부터 약간 달라진다. 둘째, 뒷머리에 깍지를 끼고 지그시 머리를 누른다. 셋째, 왼손으로 오른쪽 머리 윗부분을 잡고 당기듯 누른다. 넷째, 오른손으로 왼쪽 머리 윗부분을 잡고 당기듯 누른다. 이 동작 또한 모두 15초씩 3회 반복한다. 이 스트레칭에 걸리는 시간은 10분이 채 안 된다. 윤 교수는 아침에 일어나서 한 번, 점심 먹고 한 번, 자기 전에 한 번 이 스트레칭을 했다. 하루에 30분을 스트레칭에 투자한 것. 단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이 ‘30분 스트레칭’의 효과는 놀라웠다. 3개월 만에 팔 저림 현상과 통증이 사라졌다. 늘 인상을 찡그리던 얼굴도 환히 펴졌다. 동료들이 “무슨 좋은 일 있냐”고 할 정도로. ○ 요가에 빠지다 건강 관리의 기본 원칙은 ‘유지’다. 몸이 좋아졌다고 해서 스트레칭을 멈추면 다시 나빠질 수밖에 없다. 윤 교수도 그 사실을 너무 잘 알았다. 윤 교수는 정반대로 운동량을 더 늘렸다. 등산 전문가의 조언을 들으며 산에 오르기 시작했다. 일부러 낮은 산을 골라 천천히 올랐다. 처음에는 산 정상의 3분의 1까지만 오른 뒤 내려왔다. 점점 높이를 올려 2개월여 만에 정상에 올랐다. 당시 등산에 4시간이 소요됐다. 그 다음에는 속도를 높였다. 6개월 동안 운동 강도를 높인 끝에 나중에는 1시간 반 만에 정상에 이르렀다. 물론 이 기간에도 매일 3회 이상의 스트레칭은 빼먹지 않았다. 주말 행사가 많아지면서 등산할 여유가 없어졌다. 윤 교수는 그 대신 2013년부터 헬스클럽에 다녔다. 어느 날 저녁시간대에 헬스클럽에 갔다가 따로 마련된 방 안에서 요가 수업이 진행되는 것을 우연히 봤다. 유리창 너머로 안쪽을 들여다보니 13명이 요가 동작을 취하고 있었다. 남자는 2명. 선뜻 내키지 않았지만 요가 동작이 평소 하던 스트레칭과 비슷해 보였다. 왠지 끌리는 느낌. ‘민망할 게 뭐 있어. 나도 해 보자.’ 방에 들어가 요가 선생이 가르쳐 준 동작을 따라 해봤다. 웬걸. 1시간 정도 했는데 땀이 뻘뻘 나는 게 아닌가. 평소 하던 스트레칭보다 훨씬 강도가 강했다. 주변을 돌아보니 50, 60대 여성이 고난도 동작을 무난하게 따라 하고 있었다. 윤 교수는 이날 요가의 매력에 빠졌다. 그로부터 3년 동안 헬스클럽에 다니면서 요가를 꾸준히 배웠다. 그러다가 2017년 암병원장을 맡으면서 헬스클럽에 다닐 시간도 사라졌다. 윤 교수는 연구실에 매트를 깔아두고 ‘나 홀로 요가’를 시작했다. ○ 스트레칭-요가 전도사가 되다 요즘도 윤 교수는 하루에 2회 이상 요가를 한다. 점심 식사를 하고 난 후 연구실에서 30분 정도 요가를 한다. 윤 교수는 굳이 요가란 표현을 쓰지 않았다. 30분 스트레칭의 확장판이라는 것. 실제로 윤 교수는 고난도 요가 동작보다는 스트레칭보다 다소 강도가 높은 수준의 동작들을 위주로 운동한다. 몇 달 전에는 아내에게도 스트레칭을 권했다. 요즘은 부부가 잠자리에 들기 1시간 전쯤에 스트레칭 인터넷 강좌를 틀어놓고 함께 운동한다. 1시간이 넘는 강좌도 수두룩하지만 주로 20∼30분 사이의 것을 고른다. 30분 정도 하고 나면 몸이 노곤해지고 편해진다. 운동을 하고 잠자리에 들면 아침에 일어난 후에도 몸이 뻐근하거나 다리가 뻣뻣한 증세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한다. 진료실에서도 환자에게 “여유가 된다면 스트레칭을 하라”고 말한다. 실제로 몇몇 환자는 윤 교수가 일러준 대로 스트레칭을 한 후 몸이 좋아졌다고 한다. 윤 교수는 “어떤 환자들은 ‘교수님이 간을 고치는 사람인데 몸의 통증과 척추디스크까지 치료하는 의사가 됐다’며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동료 의사들의 평가는 무척 다양하다. 그게 효과가 있겠느냐고 말하는 의사도 있고, 몸이 조금 아팠던 동료들은 진지하게 듣는다. 그 평가와 상관없이 윤 교수는 자신의 운동법에 대해 확신한다. “시간을 별로 들이지 않고, 도구가 없어도 되고, 사무실이든 공원이든 아무 곳에서나 할 수 있고. 이런 운동이 어디 있겠어요? 의원을 개업한 한 후배 의사는 실제로 요가에 관심을 가져 인도에까지 다녀왔다고 들었습니다. 의학적인 치료에 요가를 접목하려 하는 것이지요.” 다만 윤 교수는 꾸준함을 강조했다. 하루에 30분만 투자하면 몸은 분명 좋아지는데, 그 30분을 지속적으로 투자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윤 교수는 4050세대 이후에게 이 스트레칭을 추천했다. 나이가 젊은 사람이야 관계없지만 나이가 들면서 근육이 굳고 줄어들기 때문에 꾸준한 스트레칭으로 근육을 이완시켜야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 허리-목-다리 쭉쭉… 근육 이완시켜 활력 유지 ▼ 꾸준히 반복해야 효과… 안방이든 공원이든 매트 깔고 따라 해보세요 윤승규 교수를 만난 시간은 오후 2시경이었다. 윤 교수는 마침 스트레칭을 할 시간이라며 연구실로 기자를 안내했다. 연구실에는 매트가 깔려 있었다. 윤 교수는 누구나 따라 할 수 있으면서도 효과가 좋은 6개 동작을 추천했다. [1] 허리 스트레칭 우선 천장을 보고 바닥에 눕는다. 엉덩이와 허리 사이에 둥그런 기둥인 ‘폼 롤러’를 댄다. 윤 교수는 폼 롤러는 인터넷에서 1만∼2만 원이면 살 수 있다고 말했다. 한쪽 무릎을 잡고 다른 발은 쭉 뻗는다. 이어 잡은 무릎을 몸쪽으로 당기며 숨을 ‘후’ 하고 내쉰다. 이때 양쪽 발목은 모두 꺾지 말고 쭉 뻗도록 한다. 15초 동안 그 자세를 유지한다. 3회 반복 후 양다리를 바꿔 같은 자세로 스트레칭 한다. 오래 앉아 있는 직장인들에게 좋다. [2] 명상 편안한 자세로 앉는다. 눈을 감고 명상을 시작한다. 특별한 요령은 없다. 코로 숨을 들이쉬고 입으로 내쉰다. 이때 단전 부위에 힘을 준다. 15∼30초 동안 진행하며 더 긴 시간을 들여도 무방하다. [3] 목 스트레칭 목을 밀고 누르는 스트레칭이다. 목을 아래에서 위로, 뒤에서 앞으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밀고 누르는 동작을 반복한다. 총 4개의 동작이 있으며 각각 15초씩 3회를 반복한다. [4] 고양이 자세 땅바닥을 보고 고양이 자세를 한다. 이때 등은 편다. 먼저 배 안쪽을 집어넣으면서 등을 구부린다. 15초 동안 이 자세를 유지한 후 다시 등을 펴고 처음 자세로 돌아간다. 이때 등에 힘을 준다. 15초를 기다린 후 같은 동작을 추가로 2회 더 반복한다. [5] 다리 스트레칭 바닥을 향해 엎드린다. 이때 한쪽 다리를 접고, 그 위로 몸을 포갠다. 반대쪽 다리는 길게 쭉 뻗는다. 그 다음에는 몸을 누르며 스트레칭을 한다. 이때 반대쪽 다리가 접히지 않도록 주의한다. 15초 동안 3회 반복한 후 좌우를 바꿔 다시 한다. [6] 봉 체조 ‘스쾃’이라고 부르는 자세로, 허벅지가 무릎과 수평이 될 때까지 앉는다. 봉이 없으면 팔을 앞으로 쭉 뻗은 상태에서 하면 된다. 무릎을 구부리되 직각을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 무릎을 구부린 상태에서 15초를 버티다 일어선다. 3회 반복.   김상훈 기자 corekim@donga.com
1184 no image 공황장애에 관한 기사
[레벨:20]정아브라함
44 2019-03-13
[이해나 기자의 정신건강 테라피] 공황장애일까? 단순 불안·공포증일까? 이해나 헬스조선 기자 입력 2019.02.20 08:58 정형돈, 이경규, 김구라 등 여러 연예인이 공황장애를 공개적으로 고백하면서 '공황장애'라는 병명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다. 이로 인해 극도의 공포감, 불안감이 엄습하면 '나도 공황장애가 아닌가' 걱정하는 사람이 늘었다. 하지만 공황장애는 단순한 불안, 공포와 완전히 다르다. 어떻게 다를까? 전문가들은 공황장애와 단순 공포감, 불안감은 '공황발작'을 겪는지 여부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더불어 공황발작은 자신이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발생해야 한다. 특정 상황에서만 발생하면 특정 '공포증'에 더 가깝다. 그렇다면 공황발작이란 어떤 증상을 말할까? 공황발작을 경험한 30대 직장인 A씨는 "온몸의 교감신경이 최고조로 항진되는 느낌을 받았고, 미쳐버릴 것 같은 기분"이었다며 "버스에 앉아 있는 도중이었는데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어 목적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벨을 누르고 가까스로 내렸다"고 말했다. 미국 정신건강의학회에서 발표한 진단통계매뉴얼(DSM-5)에서 발표한 공황발작 진단 기준을 참고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이에 따르면 다음 13가지 증상 중 4가지 이상이 갑자기 발생해 수분 내에 최고조에 도달하면 공황발작이다. 나타날 수 있는 증상은 ▲심계항진 ▲​땀흘림 ▲​떨리거나 후들거림 ▲숨찬 느낌 ▲​질식감 ▲​흉통, 흉부 불쾌감 ▲​오심, 복부 불쾌감 ▲​현기증 ▲​오한이나 열감 ▲​이상감각(감각이 둔해지거나 따끔거림) ▲​비현실감 ▲​통제를 잃거나 미칠 것 같은 공포 ▲​죽을 것 같은 공포이다. 공황발작은 보통 10분 이내에 최고조에 달하고 20~30분 지속되다가 저절로 사라진다.​ 전북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양종철 교수는 "공황장애 환자들이 가장 흔히 표현하는 이상 증상은 '심장이 과도하게 빨리 뛰는 것'과 '호흡이 가빠져 질식할 것 기분'"이라며 "대부분 '곧 죽을 것 같다'고 호소한다"고 설명했다. 즉, 공황장애는 단순히 극심한 공포를 느끼는 것에서 더 나아가 ▲​​내가 나를 통제하지 못할 것 같은(미칠 것 같은) 기분이 들거나 ▲​​호흡이 가빠 숨을 못 쉴 것 같고 ▲​​심장이 과도하게 뛰는 증상이 동반될 때 의심할 수 있는 병이다. 공황장애의 직접적인 원인은 뇌에 있는 '편도'가 과도하게 활성화되는 것이다. 양종철 교수는 "일반적인 사람은 불안을 느끼는 감정이 종이에 불붙듯 진행된다면, 공황장애가 있는 사람은 편도가 과활성화되면서 기름통에 불붙듯 진행된다"고 설명했다. 한편 공황발작이 생겼을 때 그 자리에서 필요한 효과적인 대처법은 3가지다. 첫째는 공황발작이 나를 죽음으로 몰고 가지 않는, 일시적인 현상이라는 것을 인지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복식 호흡 하는 것이다. 숨 쉴 때 배를 움직이면서 배 안을 단단히 부풀린다고 생각하면 된다. 더불어 아주 천천히 숨 쉬어야 한다. 셋 째는 병원에서 처방한 항불안제를 가지고 다니면서 증상이 나타날 때 바로 복용하는 것이다. 양 교수는 "이 세가지는 효과가 확실히 입증된 방법"이라고 말했다. 공황장애 치료는 약물 치료와 인지·행동치료가 50대 50 정도로 중요하다. 단, 초기에는 인지·행동 치료만으로 나을 수 있다. 약물 치료는 항우울제와 같은 세로토닌 강화제를 쓴다. 세로토닌 강화제는 편도가 과도하게 활성화되는 것을 막는데, ​1년은 먹어야 재발이 잘 되지 않는다. ​편도가 정상으로 돌아가는 과정 중에 생기는 공황발작은 소화기로 불을 끄듯 항불안제·신경안정제 등으로 완화한다. 공황발작은 평소 조급함을 많이 느끼고, 긴장감이 심한 사람,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며 사는 사람에게 잘 생긴다. 자율신경계가 활성화되어 있는 시간이 길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황장애를 예방하려면 평소 스트레스를 적게 받고 여유와 느긋함을 가지는 생활 방식을 유지해야 한다. 출처 : http://health.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2/20/2019022000595.html
1183 no image [펌글]빛이란 무엇인가? [1]
[레벨:20]김이삭(영길)
46 2019-03-04
빛은 우리와 우주를 연결해 줍니다. 빛을 통해 우리는 멀리 있는 별의 태초의 모습을 되돌아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빛이 뭘까요? 간단히, 빛은 가장 작은 단위의 에너지입니다. 부피가 없는 기본 입자인 광자의 형태로 이동하죠. 더 작게 쪼갤 수 없고, 나타나거나 사라질 뿐이죠 또한 빛은 파동-입자의 이중성을 띕니다. 입자이면서 동시에 파동이라는 말이죠. 말도 안 된다구요? 우리가 흔히 빛이라 부르는 것은 가시광선입니다. 전자기파의 극히 일부분일 뿐이죠. 전자기파 형태로 나오는 에너지입니다. 전자기파는 수많은 파장과 주파수를 가집니다. 감마선은 가장 큰 에너지를 가졌기에 가장 파장이 짧습니다. 감마선의 파장은 보통 0.00000001 미터보다 짧습니다. 수소원자보다 훨씬 작은 길이죠. 수소원자와 1센트 동전의 차이는 1센트 동전과 달의 차이와 비슷하죠. 가시광선은 전자기파의 중간쯤에 있습니다. 약 400~700 나노미터 정도의 길이를 갖죠. 빅테리아와 비슷합니다. 전자기파의 반대쪽 끝에 있는 라디오파는 최대 100km 파장을 갖습니다. 우리가 알기에 가장 긴 파장은 만에서 십만 km에 달하기도 합니다. 지구보다 훨씬 길죠. 물리적으로 전자기파는 모두 같습니다. 모두 입자-파동성을 띄고 빛의 속도로 날아다니죠. 단지 주파수만 다릅니다. 근데 가시광선이 특별한 이유가 뭘까요? 사실... 그런 거 없습니다. 그냥 눈이 만들어 질 때 가시광선을 보도록 진화한 것 뿐이죠. 단, 완전히 우연은 아닙니다. 전자기파 중에서 가시광선만이 물속에서도 잘 전달됩니다. 그래서 수백만 년 전, 눈이 진화할 때 가시광선에 적응한 거죠. 아주 현명한 선택이었죠. 빛이 물체에 반응할 때 빛의 방향까지 변하기 때문에 우리 주위에 뭐가 있는지 순식간에 알아낼 수 있었죠. 생존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자 그럼 빛은 어디서 올까요? 전자기파의 수많은 파장은 원자나 분자가 높은 에너지 상태에서 낮은 상태로 떨어질 때 냅니다. 에너지를 버릴 때 전자기파로 내보내는 거죠. 원자 수준에서, 원자 속 전자가 들떠있다 제자리로 돌아갈 때, 가시광선이 나오면서 남아도는 에너지를 버립니다. 반대로 전자에 흡수된 빛은 전자를 들뜨게 만듭니다 실제로 움직이는 전자는 진동하는 자기장을 만듭니다. 자기장은 다시 수직의 전기장을 만들어 내죠. 이 두 장이 공간을 가로지르면서 에너지를 전달합니다. 출발점의 정보를 나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 우주에선 빛이 가장 빠를까요? 다르게 생각해 보죠 우주에선 가장 빠른 속도가 얼마일까요? 정답은 C, 진공에서 초당 299,792,458 미터, 한 시간에 10억 킬로미터입니다. 전자기파는 그냥 이 속도만 냅니다. 질량이 없는 입자는 무조건 빛의 속도로만 달립니다. 어중간한 속도는 없습니다. 촛불에서 나온 빛은 느리게 출발하지 않습니다. 나오자마자 빛의 속도죠. 그럼 빛의 속도가 왜 한정돼 있을까요? 글쎄요? 우리 우주가 그리 생겨먹었습니다. 아직 똑 부러지는 해답을 찾지 못했죠. 빛은 전자기파의 일부분입니다. 기본입자들은 파동성도 띄고 있죠. 전기장과 자기장의 조화로 우주 최고 속도로 날아다닙니다. 그래서 결론이 뭐죠? 빛의 속도로 날아다닌다거나 쌍둥이의 시간이 다르게 간다거나, 양자역학 어쩌구 저쩌구 그건, 나중에 알려드리죠. 지금은 그냥 빛을 볼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합시다. 덕분에 우주를 들여다 볼 수 있으니까요. 우리가 뭔가를 들여다 볼 때, 우리가 존재한다는 걸 느끼게 해주니까요.
1182 no image 철봉과 나의 체험 [6]
[레벨:20]정아브라함
89 2019-03-03
1181 좋은 운동 철봉
[레벨:20]정아브라함
45 2019-03-03
5만 원 철봉 vs 500만 원 트레드밀 집에 뭘 설치할 것인가피트웰컨설팅 대표·체육학 박사입력 2019-03-02 18:35수정 2019-03-02 18:44 뉴스듣기프린트글씨작게글씨크게 트랜드뉴스 보기 0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스토리 더보기 [이동기의 백세시대 피트니스]철봉의 건강경제학[shutterstock] 가장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비) 있는 운동기구로 철봉을 소개한 첫 기사가 나간 뒤 많은 분이 철봉의 효용성을 재발견했다며 뜨거운 반응을 보내주셨습니다. 사실 40대 이상의 ‘체력장 세대’는 턱걸이와 철봉 매달리기에 대해 저마다 다양한 추억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1995년부터 체력장 대신 학생체력검사가 실시되면서 철봉은 체력측정 종목에서 제외됐습니다. 이와 함께 안전사고 등등의 이유로 철봉은 애물단지 취급을 받다 각급 학교에서 점차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그 배경에 스포츠산업의 경제논리가 작동했음을 아는 사람은 의외로 적습니다. 학교 또는 동네 어디서나 철봉을 통해 획득할 수 있는 상당한 운동 효과를 비싼 돈 주고 피트니스나 다른 여러 운동 강사의 도움을 받아가며 한다는 사실을 잘 모르는 겁니다. 우리가 운동을 해야 하는 핵심적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전문가들 사이에 합의된 것은 2가지입니다. 혈액순환을 원활히 하고 신체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함입니다. 여기에 체력 강화와 경기력 향상 같은 부수적 목적이 추가되는 경우도 있지만 혈액순환과 신체균형 2가지 목적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운동은 크게 3가지로 분류됩니다. 유산소운동과 저항운동, 유연성운동입니다. 달리기, 사이클, 수영 같은 유산소운동이 혈액순환을 촉진한다면 웨이트트레이닝 같은 저항운동은 신체균형을 복원하는 운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스트레칭 같은 유연성운동은 혈액순환 촉진과 신체균형 복원을 동시에 가져다주기 때문에 매끼니 밥 먹듯이 하루도 빠짐없이 실시하는 게 중요합니다. 철봉 매달리기는 유산소운동과 저항운동, 유연성운동이 동시에 가능한 대표적인 복합운동입니다. 통증치료를 위한 철봉운동 한 손 매달리기와 두 손 매달리기. 근력이 약한 여성이나 장년층은 철봉에 밴드를 걸어 매달리기와 턱걸이를 하면 더 오래 철봉운동을 할수 있어 효과적이다(왼쪽 부터). [사진 제공 · 이동기] 다른 한편으로는 운동을 통해 어떤 효과를 거둘 것인지에 따라 다시 3가지 구분이 가능합니다. 트레이닝, 컨디셔닝, 통증치료입니다. 트레이닝이 근력, 근지구력, 심폐지구력, 유연성 강화에 초점을 맞춘다면 컨디셔닝은 매일 에너지가 넘치면서 가뿐한 몸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통증치료는 별도의 설명이 필요 없을 겁니다. 똑같은 운동 동작이라도 어떤 효과를 목표로 하느냐에 따라 프로그램 구성이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먼저 다양한 통증에 시달리는 독자를 위해 증세에 따른 맞춤형 철봉 매달리기 방법부터 알려드리겠습니다. 손목, 팔꿈치, 어깨 가운데 어느 한쪽이 더 심하게 아픈 경우에는 첫째, 철봉과 평행하게 서서(두 발 다 12시 방향으로) 둘째, 통증이 심한 쪽 손으로 언더그립(손바닥이 하늘을 향하도록 철봉을 잡는 방법) 또는 오버그립(손등이 하늘을 향하도록 철봉을 잡는 방법) 중 하나로 철봉을 잡습니다. 이때 손바닥이 아니라 손가락 첫 번째 마디와 두 번째 마디로 바를 잡는 것이 중요합니다. 셋째, 무릎을 서서히 구부리면서 관절을 중력 방향으로 늘이며 10초 이상 매달립니다. 이어 통증이 덜한 쪽 손으로 같은 동작을 반복해 실시합니다. 이렇게 1세트를 마치면 손바닥 스트레칭을 합니다. 그러고 나선 두 발을 각각 11시와 1시 방향으로 두고 양손을 번갈아 매달리며 2~3세트를 반복 실시합니다. 이때 언더그립은 몸통을 안쪽으로, 오버그립은 몸통을 바깥쪽으로 회전시키는 게 효과적입니다. 손목터널증후군, 테니스 엘보, 굽은 어깨, 거북목, 어깨 통증에 시달리는 분에게 이 방법을 권합니다. 테니스 엘보의 경우 한 손은 오버그립, 다른 한 손은 언더그립으로 잡는 얼터메이트 그립도 효과적입니다. 하지만 한 손으로 매달리는 연습을 꾸준히 해 철봉에 매달렸을 때 팔꿈치 관절에 통증이 없다면 얼터메이트 그립으로 넘어가기를 추천합니다. 두 번째로 허리디스크가 있는 분은 두 손으로 매달리는 방법과 한 손으로 매달리는 방법을 병행하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악력이 부족한 여성이나 장년층의 경우 손목 스트랩 보조장비를 이용하면 좀 더 오래 철봉에 매달릴 수 있어 운동 효과가 커집니다. 철봉에 매달리면 우리 몸의 근골격계 질환에 따른 통증은 대부분 제거할 수 있습니다. 어른은 관절 부위, 특히 척추의 해부학적 위치가 좋아져 근골격계 질환의 예방 및 재활에 큰 도움이 됩니다. 청소년의 경우 체형이 예뻐지고 성장이 촉진되며 건강 관련 체력도 향상됩니다. 컨디셔닝과 트레이닝을 위한 철봉운동 여기까지는 컨디셔닝과 트레이닝을 위한 워밍업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다음으로 컨디셔닝을 위해선 양손으로 철봉을 잡고 앞뒤로 흔들기를 실시합니다. 그리고 철봉에 매달린 상태에서 한쪽 다리씩 들어올리기를 실시합니다. 흔들기와 다리 들어올리기를 3회 정도 반복하면 됩니다. 이것만으로도 혈액순환과 피로 해소가 촉진돼 컨디션도 좋아집니다. 몇 초를 매달려야 효과적이냐고 묻는 분이 많은데, 1분이면 충분합니다. 마지막 단계인 트레이닝의 핵심은 턱걸이입니다. 처음엔 턱걸이를 위한 버티기부터 시작합니다. 5초가량 버티다 내려와서 손바닥 스트레칭을 한 다음 조금씩 시간을 늘려 3세트 반복합니다. 이렇게 버티기를 하면 당기는 힘이 증가하면서 몸도 중력 방향으로 늘어나 신체균형이 좋아지고 상체 근육 또한 저항운동을 하기 위한 최적의 상태가 됩니다. 그런 다음 턱걸이를 실시합니다. 이때 호흡이 중요한데, 철봉을 당겨 턱이 철봉 위에 올라갈 때 입으로 내뱉고 턱이 내려올 때 가급적 천천히 내려오면서 코로 들이마시는 호흡을 규칙적으로 해야 합니다. 현기증이 난다면 즉시 중단하도록 합니다. 턱걸이를 하더라도 처음부터 무리하지 말고 꾸준히 조금씩 늘려가는 것이 좋습니다. 철봉운동은 역사가 깊습니다. 그리스·로마 시대부터 검투사들이 필수적으로 하던 체력 단련 운동이었습니다. 그만큼 현대인도 웬만한 피트니스 운동 효과를 철봉운동을 통해 도모할 수 있습니다. 집 근처에 철봉이 없다면 문틀에 고정하는 가정용을 구매해 설치하기를 권합니다. 하나만 설치해도 가족 구성원 모두 이용할 수 있습니다. 요즘엔 문틀이나 벽면의 손상 없이 설치 가능한 제품들이 판매되고 있습니다. 철봉 굵기는 지름이 25~28mm인 것이 적절합니다. 가장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은 안전사항입니다. 철봉이 중량을 얼마만큼 버티는지, 설치 시 안전사고를 고려한 장비인지를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합니다. 가정용 철봉과 트레드밀을 비교해보면 그 경제성이 더욱 뚜렷이 드러납니다. 먼저 가격은 트레밀이 100배 이상 비싼 반면 철봉은 운동 접근성, 용이성이 훨씬 높은 데다 부상 발생률은 더 낮습니다. 시간당 소비칼로리도 유산소운동인 트레드밀보다 복합운동인 철봉운동이 1.5배 이상 높습니다. 독자 모두 건강을 위해 5만 원짜리 철봉을 구매할지, 500만 원짜리 트레드밀을 살지 현명한 판단을 내리리라 믿습니다. 피트웰컨설팅 대표·체육학 박사 rugger@snu.ac.kr
1180 no image Dr. Samuel C. Lee 영적유산 파일 [1]
[레벨:15]나요한
57 2019-03-01
100년을 맞이하는 3.1절에 우리 모임을 창립하신 이사무엘 선교사님의 Spirit 복음정신을 되새기며 배우고자 기도합니다. ========================================================================================== Dr. Samuel C. Lee 영적유산 (하나님 말씀에 대한 각별한 사랑) by Dr. Paul Koh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시편1:2,3) 이사무엘 선교사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쁨을 삼았고 그 말씀을 절대적으로 순종하였습니다. 말씀에 대한 각별한 사랑은 그의 영향력 있는 삶과 열매가 풍성한 사역의 비밀이었습니다. 1. 일용할 양식 1.1 이사무엘 선교사님은 학생들이 인격적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투쟁하고 삶에 실천하도록 도울 필요성을 깨달으셨습니다. 1.2 이사무엘 선교사님은 일용할양식을 쓴 후 반복하여 수정하였습니다.  우리는 양식을 씀으로 하나님 말씀에 따라 기도하고 생각하고 생활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양식쓰기를 통하여 자립적이고 인격적인 신앙기초를 놓았습니다.  학생들은 매주 양식을 나누기 위하여 요회모임에 참석하였습니다. 2. 성경공부는 지혜와 훈련의 근원 2.1 성경공부는 하나님 역사를 이루는 데 지혜와 영감의 근원입니다. 2.2 또한 우리들의 모든 인생 문제에 해답을 줍니다. 2.3 성경은 이사무엘 박사님에게 사람을 훈련하고 돕는 데 필요한 모든 원리를 제공하였습니다. 2.4 그는 학교공부, 취업, 결혼, 다이어트, 헤어스타일과 심지어 불임 문제와 같은 다양한 문제들에 대하여 사람들을 돕는 데 하나님의 말씀에 의존하셨습니다. 2.5 이사무엘 박사님은 각 사람이 독특한 자기 인생 문제를 극복하면 모든 문제를 극복하게 된다고 믿으며 각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영접함으로써 자기의 운명적인 인생문제를 극복하도록 도왔습니다. 2.6 이사무엘 박사님은 또한 학생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열심히 공부하여 Straight A를 얻도록 도전하셨습니다. 3. 안드레의 오병이어의 믿음 3.1 박사님은 4복음서 공부를 마칠 때마다 예수님이 세계 선교명령을 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 박사님은 당시에 예수님의 세계 선교명령이 불가능해 보였지만 순종하기로 결단하셨습니다.  박사님은 안드레의 믿음에 매료되셨습니다. 박사님은 자신에게 있는 5병 2어를 발견하고 그것을 하나님께 바친다면 하나님께서 그를 축복해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 박사님은 우리에게 ‘성서한국’, ‘세계선교’(‘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라는 분명한 기도제목을 주셨습니다. 주일 예배를 끝내면서 학생들은 변함없이 “성서한국, 세계선교 장막터를 넓혀라!”를 기도제목으로 외쳤습니다.  하나님은 세계선교에 우리가 드린 5병 2어를 축복하셨습니다. UBF가 90개국에 1,500명 이상 선교사를 파송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한국을 미국 다음이요 영국보다 많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최대의 선교사 파송 국가로 축복하셨습니다. 3.2 한 사람의 각별한 성경 연구가 한 나라의 역사의 물줄기를 돌리도록 도우셨습니다. 4. 말구유 정신 4.1 이사무엘 박사님에게 가장 감명을 준 것은 말구유에 태어난 아기 예수님이었습니다. 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우주의 창조주이셨지만 하늘의 영광과 권력을 버리시고 이 세상에 말구유에 한 아기로 내려 오셨습니다. 4.2 이 사무엘 박사님은 예수님의 이 겸손한 말구유 정신을 유지하기 위하여 부단히 투쟁하셨습니다.  사무실 의자는 오래 사용하여, 부러진 팔걸이는 여러 번 묶고 아교로 붙이고 테이프로 감긴 채 흔들거렸습니다. 그는 20년 이상 똑같은 의자를 사용하셨습니다.  미국의 안일한 문화에 대항하여 싸우고 열심히 일하기 위하여 박사님은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자주 군복 입기를 좋아하셨습니다.  박사님은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실 때 열심히 일하고 땀 흘리도록 하였다고 주장하였습니다.  미국은 뜨거운 용광로입니다. 물질적인 풍요 가운데 살아 선교사들조차도 녹아지고 선교사의 자리를 떠났습니다.  이사무엘 박사님은 러시아 선교 동역자들이 수년 동안 바이블 하우스가 없을 때 그들을 동정하지 않았습니다.  박사님은 고난 당하는 많은 최전선의 선교사들에게 말구유 정신을 지키고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도록 용기를 북돋으셨습니다. 4.3 이사무엘 박사님이 말구유 정신을 유지하고자 투쟁하셨을 때 UBF는 번창했습니다. 5. 하나님의 한 말씀 받기 5.1 이사무엘 선교사님은 많이 기도하고, 성경 본문을 많이 읽어 그것을 다 암기할 수 있기까지 하셨습니다. 5.2 박사님은 메시지를 전하실 때 이성으로 전하지 않고 심령으로 전하셨습니다. 그는 성경 메신저가 하는 일이 지식 전달이 아니라 듣는 이의 심령에 하나님의 한 말씀을 심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6.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6.1 최고의 영적 지도자로서 박사님은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시며 어떠한 문제와 도전에도 피하지 않고 맞대면하셨습니다. 6.2 박사님은 문제와 싸우는 대신에 성경으로 돌아가셨습니다.  그는 성경을 더 많이 읽고 메시지를 더 많이 쓰고 밤낮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였습니다.  곧 그는 역경이 자나가고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 선이 됨을 알았습니다.  박사님의 대부분의 주옥같은 성경강의(창세기, 출애굽기, 로마서, 사도행전과 4복음서 등 – 필독 사항)가 나온 것은 바로 이 때였습니다. 6.3 박사님은 수년에 걸친 깊은 성경공부를 통해서 성경의 주요 흐름이 택한 백성 이스라엘을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로 세우려는 하나님의 원대한 소망으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 하나님은 세계 만민이 시온으로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는 비전을 가지셨습니다.  박사님은 하나님이 미국에게도 똑같은 소망을 가지셨음을 깨달으셨습니다. 6.4 박사님은 한 사람 한 사람을 미래의 영적인 지도자로 서기까지 예수님의 제자로 일으키기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바치셨습니다.  그는 마치 한 명의 제자가 전 세계라도 되는 듯 한 번에 한 명의 제자를 일으키는 과정에서 모든 것을 희생하셨습니다.  이렇게 하여 하나님은 수많은 제자들을 영적인 지도자로 세우셨습니다.  박사님은 짐래릭 목자를 도우려고 10년 동안 음악을 공부하셨습니다. 박사님은 지휘의 비밀은 지휘봉의 끝에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짐 래릭 목자를 처음에는 피아노 연습을 통해서 음악적인 센스를 배우게 하고 다음에는 지휘봉의 끝을 어떻게 움직일 것인가를 배우도록 도왔습니다.  그리하여 미국이 왕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가 되는 데 견고한 기초를 놓았습니다. 7. 성경으로 돌아가라 7.1 시편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는 자가 복 받고 열매 맺고 번성할 것을 약속했습니다. 7.2 박사님은 정말로 복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생애와 사역을 되돌아보고 저는 그의 모든 영적 유산을 “성경으로 돌아가라”는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7.3 박사님은 2세들에게 에베소서 6:1절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말씀을 주시리라 확신합니다.  그는 딸 리틀 사라와 손자 3명에게 수년 동안, 심지어 그가 30대 중반이었을 때도 이 말씀을 요절로 주셨습니다.  자녀들은 많은 것을 배워야 합니다. 그러나 가장 먼저 배워야 할 것은 부모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 그러면 부모님께 순종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부모님의 신앙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 자기 부모들과 아름다운 관계를 맺은 사람들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많이 있습니다.  믿음의 조상 이삭은 주 안에서 부모님께 순종했습니다.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매우 순종하여 아버지의 영적 유산을 배우고 그것을 삶에서 실천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이웃 도시와 그의 자녀들에게 축복이 되었습니다. 7.4 아들 Dr. Samuel A. Lee는 화학 박사 과정에 있을 때 요절로 막8:34절을 받았습니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 아버지는 그에게 화학에 관한 학문을 정복할 뿐 아니라 성경의 구조를 완전히 체득하라고 용기를 북돋아 주었습니다.  그는 요절을 그 후로 한 번도 바꾸지 않았습니다.  그는 요절대로 자기를 부인하고 캠퍼스선교의 십자가를 지고자 기도하였습니다.
1179 no image [펌글] ‘지혜가 외로움을 치료할 수 있다.’(wisdom would treat loneliness) 관련 연구 [2]
[레벨:20]서진우
44 2019-02-20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엡5:15-16)​ ​ 이번주 에베소서 메시지에 언급된 ‘지혜가 외로움을 치료할 수 있다.’(wisdom would treat loneliness)의 근거가 되는 연구에 대한 글입니다. 말씀에서 말하는 지혜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 공유합니다. 개인적으론, 큰 외로움은 참된 지혜를 얻고 깊은 연결(deep connection)로 나아가는 기회가 될 수 있지 않은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연구결과 요약(27-101세, 340명 대상) 1. 인생에 3번 큰 외로움이 찾아온다 1) 20대 후반: 처음 홀로살기를 경험 2) 50대 중반: 자녀들이 떠남 3) 80대 후반: 지인들이 세상을 떠남 2. 외로움(loneliness)과 홀로있음(being alone)은 다르다 - 사람들 가운데 있어도 깊은 연결(deep connection)을 느끼지 못하면 외롭다. 3. 지혜있는 사람은 외로움을 덜 느낀다(=잘 다룬다) - 지혜는 공감, 동정, 감정통제, 자기성찰과 같은 행동양식을 가리킨다 - 외로움은 정신건강 악화, 인지장애, 영양실조, 고혈압, 불면으로 이어질 수 있다. - 외로운 사람이 세상과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도록 도와줄 사람이 필요하다 ----------전문----- https://www.bustle.com/p/loneliness-peaks-at-these-3-ages-heres-what-you-can-do-about-it-15567662 Loneliness Peaks At These 3 Ages — Here’s What You Can Do About It By Natalia Lusinsk At some point, everyone feels lonely. Whether you’re home alone on a Saturday night — again — just got out of a relationship, or recently lost a loved one and the emptiness you feel seems worse than ever, loneliness is common and it’s OK to feel lonely. Although a new study out of the University of California San Diego School of Medicine found that severe loneliness occurs over an adult’s lifespan, they found it happened most among three age periods: late 20s, mid-50s, and late 80s. No sex differences were found regarding loneliness prevalence, severity, or age relationships. Researchers found that three-fourths of study participants reported moderate to high levels of loneliness, which was more than previous estimates — 17 to 57 percent — among the U.S. general population. “This is noteworthy because the participants in this study were not considered to be at high risk for moderate to severe loneliness,” Dilip Jeste, MD, distinguished professor of Psychiatry and Neurosciences and director of the UC San Diego Center for Healthy Aging, who led the study, said. In other words, he said they didn’t have major physical disorders or suffer from significant mental illnesses, such as depression or schizophrenia, wherein loneliness may be more prevalent Why Loneliness Is Most Prevalent Among Those Three Age Groups You may be wondering why three age groups in particular — late 20s, mid-50s, and late 80s — are most affected by loneliness. Katie Ziskind, licensed marriage and family therapist and the owner of Wisdom Within Counseling, has some theories. “It is normal to feel loneliness in your late 20s because you may be doing things such as living alone for the first time,” she tells Bustle. You may no longer have college roommates, or perhaps you and your significant other lived together and broke up, so now you’re more lonely. “It’s also natural to feel lonely in your mid-50s because perhaps you’re an Empty Nester,” she says. For instance, people’s children go away to college, then go off on their own. And, as for people in their late 80s, Ziskind says their spouses, lifelong lovers, and friends and siblings have likely died. “It’s very important to have an elderly person receive caregiving, even from someone paid,” she says. “The elderly don’t get hugs or touch as much; having friends stop by to see them can be very healing for loneliness.” How The Study Was DoneThree-hundred-and-forty San Diego County residents from 27 to 101 years old participated in the study, and they’d been in one of three prior studies of aging and mental health. However, people who were living in nursing homes or who required substantial living assistance were not included, nor were people with serious physical or psychological ailments, including diagnosed dementia. Various tools were used to conduct the study, including the renowned 20-point UCLA Loneliness Scale, Version 3; a four-item, self-reported measure of social isolation (developed by the U.S. Department of Health and Human Services), as well as the San Diego Wisdom Scale, which was created by Dr. Jeste and his colleagues. What Loneliness Is — And Isn’tZiskind says that it’s important to understand loneliness. “Loneliness is a deep-seated sadness or loss,” she says. “Often, people think loneliness means that they are deficient in some quality or skill; however, loneliness can actually be a motivator for positive transformation.” She says it’s OK to feel lonely since being alone allows you to decompress, such as by napping. “But loneliness can become depression, lethargy, and melancholy when untreated without friendship or socialization,” Ziskind says. She suggests trying something new, like go to a yoga class. “Transform your loneliness into socialization,” she says. The Difference Between Loneliness And Being Alone Similarly, Dr. Joshua Klapow, Ph.D., clinical psychologist and host of The Kurre and Klapow Show, tells Bustle that there is a difference between loneliness and being alone. “At our core, we are social beings, so we are, on average, used to and need to be interacting with others,” he says. “However, to the extent that we feel we don’t have deep connections, we can be amongst people and still feel very alone.” Klapow says you can also be physically alone and not “feel” lonely. “Alone is a state of being and lonely is an emotion,” he says. “Therefore, it is very important that we distinguish the two and get our quota of both being with other people (i.e., social interactions) and doing things where we don’t feel alone.” The Likeliness Of LonelinessFirst author Ellen Lee, MD, a research fellow in geriatric mental health in the UC San Diego School of Medicine Department of Psychiatry said that people who were found to be wiser were less lonely. “That may be due to the fact that behaviors which define wisdom, such as empathy, compassion, emotional regulation, self-reflection, effectively counter or prevent serious loneliness,” she said. But moderate to severe loneliness appears to be highly prevalent throughout adult life. “And loneliness seems to be associated with everything bad,” Dr. Lee said. “It’s linked to poor mental health, substance abuse, cognitive impairment, and worse physical health, including malnutrition, hypertension and disrupted sleep.” Although the authors said this study is the first to assess loneliness the way they did so — for instance, using multiple measures and among a broad age range — they said more research needs to be done on the topic. Dr. Jeste said people should think about loneliness differently. “A person can be alone and not feel lonely, while a person can be in a crowd and feel alone,” he said. “We need to find solutions and interventions that help connect people that help them to become wiser. A wiser society would be a happier, more connected, and less lonely society.” Dr. Klapow agrees. “We can be by ourselves in the middle of a forest and feel very much connected to the world, to the larger Universe, and to ourselves — and, therefore, not feel lonely,” he says. “We can also be with strangers and feel either alone or connected.” He says being alone increases the chances of feeling lonely, but it is the feeling of loneliness that can be harmful. “[B]e aware and make the distinction; then, focus on limiting the time you feel lonely versus limiting the time you are alone,” Dr. Klapow says. How To Feel Less Lonely Dr. Klapow says that having at least one meaningful or fulfilling social interaction per day can help prevent feelings of deep loneliness. He says you can do this many ways — join a book club, mentor a youth, go to a discussion, help out at a shelter, take a class, or try a sport, among other ideas. He also says to remember that feeling lonely does not mean you need to find a romantic relationship if you are single. “The reality is, very often, romantic relationships provide love and romance, but they also provide good, quality social interactions,” he says. “So when you are feeling lonely because of not being in a relationship, make sure that you are getting regular social interactions.” He says you can do this by interacting with people who make you feel loved, engaged, interested, happy, and so forth. “Some of this will come from friends, but some of this could come from co-workers or spending time volunteering at a place like a shelter," Dr. Klapow says. This can provide you with the quality human interaction that you crave. “Don’t just look for ‘fun’ interactions — look for meaningful ones, just like a relationship; not as a substitute, but as a way to nurture your need for social interaction,” he says. By doing this, you will find you feel less lonely because you are less lonely. What To Do If You Keep Feeling Lonely Sometimes, you may still feel lonely no matter how much you try not to. “If you continue to feel lonely even when you are engaged in activities with others — and if feelings of loneliness morph into feelings of hopelessness — it’s time to talk to a mental health professional,” Dr. Klapow says. All in all, no matter what age you are, there are ways to feel less lonely. But if nothing seems to work, it’s best to see a professional.
1178 no image [가요해설] 말(씀)달리자(크라잉넛 부름) [1]
[레벨:20]서진우
33 2019-02-0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엡3:18) 이번주 소감을 쓰면서 말씀과 노래 가사가 통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잠시 기분전환 하시라는 의미로 가사의 주관적인 해석을 적어보았습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세상 지식을 압도한다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는 사람은 세상 사람들이 '바보 놈'들의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벗어나지 못하는 세상적인 지식들에 대해 과감히 "닥쳐"라고 외칠 수 있다. 크라잉넛이 부른 말달라지는 노래는 그들을 붙잡고 있던 세상 지식(예컨대 '살다보면 그런거지'라는 식의 합리화) 과 그것에 대한 단호한 거부('닥쳐'라고 말함으로써)가 나타난다. 후렴구 '말(씀)달리자'는 것은 세상 지식에서 벗어나 말씀 속에 담겨있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뿌리박고자 하는 결단의 표현이라고 영적으로 해석해 볼 수 있다. (말씀 속에 담긴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자 힘을 다해 달리자는 의미) 말달리자가 4번 또는 8번과 같이 4의 배수로 반복되는 것은 에베소서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사랑의 4차원적인 속성(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다음은 곡의 전체 가사이다. 살다보면 그런거지 우후 말은 되지 모두들의 잘못인가 나는 모두 알고 있지 닥쳐 노래하면 잊혀지나 사랑하면 사랑받나 돈 많으면 성공하나 차있으면 빨리가지 닥쳐 닥쳐 닥쳐 닥쳐 닥치고 내 말들어 우리는 달려야해 바보놈이 될 순 없어 말달리자 말달리자 말달리자 말달리자 말달리자 이러다가 늙는거지 그땔위해 일해야해 모든것은 막혀있어 우리에겐 힘이 없지 닥쳐 사랑은 어려운거야 복잡하고 예쁜거지 잊으려면 잊혀질까 상처받기 쉬운거야 닥쳐 닥쳐 닥쳐 닥쳐 닥치고 내 말들어 우리는 달려야해 거짓에 싸워야되 말달리자 말달리자 말달리자 말달리자 말달리자 말달리자 말달리자 원곡링크 https://youtu.be/9jTOtvExJuA
1177 no image 바닥에 앉지말라 [1]
[레벨:20]정아브라함
63 2018-12-31
1176 no image 우울증에 관한 기사(2) [1]
[레벨:20]정아브라함
68 2018-11-10
우울증에 관하여 2017.12.22.에 이 란에 올린 적이 있습니다. 다음은 조선일보에 보도된 내용입니다. 전에 내용과 비슷합니다. 도움이 될 것입니다. 정신과전문의 정혜신. 30여 년간 정신과 의사로 활동하며 1만2천여 명의 속마음을 듣고 나누었다./사진=김지호 기자 강자든 약자든, 유명인이든 무명인이든, 노인이든 청소년이든, 저마다 관계의 고통으로 소리없는 비명을 지르고 있다. 공감과 주목을 받지 못한 채 관계를 단절하고 ‘존재를 꺼버린' 정신적 사망자는 날로 늘고 있다. 하루가 멀다고 ‘엽기적 갑질’은 사회면 뉴스를 도배하고, 흉악범죄를 저지른 사람은 정신과에서 발부받은 ‘우울증 진단서’를 면죄부로 들이민다. 바야흐로 모두가 ‘피해 의식'에 사로잡힌 듯한 집단 히스테리의 날들이다. ‘거리의 치유자' 정혜신을 만났다. 정신과의사로서가 아닌 이 사회의 응급의학과 전사로서다. 그는 오랫동안 심리적 트라우마 현장에서 일하면서 자격증을 가진 전문의로서 한계를 느꼈다고 했다. 진료실에서 환자를 상담하고 약물을 처방하는 일괄적인 방식으로 이 사회의 ‘곪은 상처'를 치유할 수 없었다고. 정혜신은 ‘자신의 고통을 진지하게 대해주길 바라는 개별 욕구'에 집중하면 많은 부분이 해결된다는 걸 알았다. 존재가 희미해져 가는 사람의 마음을 만져 정체성을 회생시키는 이 기법을 그는 ‘심리적 심폐소생술'이라고 이름 지었다.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불안해하거나 침묵하는 상대의 눈을 쳐다보며 "지금, 네 마음이 어떠니?"라는 질문을 던져주는 것. 단 이 마음의 처치 과정에서 반드시 지켜야 할 룰이 있다. ‘충고 조언 평가 판단'을 금할 것. "네가 그렇게 힘들었는데, 내가 몰랐구나" 망치 같은 각성의 한마디면 충분하다. 그녀의 남편이자 심리기획자인 이명수는 정혜신과 1년에서 이틀을 뺀 363일 24시간 함께 하면서 이 ‘심폐소생술'의 현장을 지켜본 목격자다. 이명수는 고통의 당사자들이 얼굴빛이 바뀌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이 공감의 ‘신기술’의 증언자가 됐다. 부부가 나란히 ‘지은이'와 ‘영감자'에 이름을 올린 책 ‘당신이 옳다'가 지금 서점가에서 치유의 열풍을 일으키고 있다. 가까이서 만나 본 정혜신은 공감에 최적화된 사람이었다. 연민과 집중으로 빛나는 눈동자는 ‘이 우주에서 지금 당신만큼 중요한 사람은 없다'라는 메시지를 발사했다. 그는 우리가 그토록 원했던 사회적 성공 또한 대체로 세련된 자기 억압의 결과며, 성공한 부모를 둔 자식들은 공통으로 ‘자기 소멸'의 위기를 겪는다고 했다. 알고 보면 ‘금수저'들 또한 정체성의 ‘투명 수저'로 고통받고 있다는 것. -눈동자가 매우 특이하십니다. 과연 ‘다정한 전사'의 눈입니다. "하하하. 그런가요? 얼마 전엔 길에서 만난 한 30대 여성이 저를 알아보고 "선생님, 저 좀 안아주세요" 그래요. 꼭 한번 안아주고 헤어졌어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그런 사람이 저를 많이 찾아와요." -테레사 수녀도 아니고 힘든 사람을 어떻게 다 안아줍니까? "다는 못 하죠. 형편껏 안아줘요(웃음)." 예상과는 달리 정혜신은 상처 입은 자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힘들지 않다고 했다. 상상할 수 없이 다양한 이유로 삶이 뻘밭에 빠진 자들의 이야기를 듣는 데 왜 힘들지 않다는 걸까? "고통에 빠진 사람과 함께 고여있으면 같이 빠져 허우적대죠. 그런데 서로 반응을 하잖아요. 내 눈빛, 반응이 가닿으면 상대가 꿈틀거리며 살아나는 게 느껴져요. 처참하게 쓰러져있다가 조금씩 숨이 돌고 점점 땅을 짚고 일어나는데... 그걸 보는 제가 어떻게 힘이 안 날 수 있겠어요?" 자기 존재를 민폐로 인식하는 청년들이 의외로 많다. 한 사람이 제대로 살기 위해 반드시 있어야할 스펙이 감정이다. 정혜신은 감정이 존재의 핵심이라고 말한다./사진=김지호 기자 -상대의 힘든 이야기를 듣는 게 보통사람에겐 감정노동입니다만. "젊고 미숙할 땐 저도 그랬어요. 수련 기간 동안엔 그 사람의 상처에 제 설움이 자극돼서 눈물이 터졌어요. 그럴 땐 누구를 위한 눈물인지도 모르죠. 이젠 안 그래요. 속마음을 들여다보면서 오히려 기운을 받아요." -저를 포함해 ‘자기 소멸’을 겪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습니다. ‘희미해진 나'라는 표현에 공감이 되더군요. "우리 사회가 전체적으로 그런 공기에 덮여있어요. 실패한 사람, 성공한 사람 다 마찬가지예요. 가만 보면 사회적 성공은 ‘자기 억압'의 결과예요. 성공한 사람은 다른 말로 나를 지우고 조직에 부응하는 촉을 발달시킨, 일종의 뛰어난 생존자지요." -사회적 성공이 치러야 하는 혹독한 대가가 ‘자기 소멸'이다? "그런 셈입니다. 제가 15년 동안 병원이 아닌 ‘상담 공간’에서 대기업 CEO, 정치인, 법조인 등 수많은 사회 지도층들의 속마음을 들었어요. 기업의 의뢰를 받아서요. 고도의 정신노동을 하는 분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일관된 패턴이 있습니다. 처음엔 리더십 등에 대해 고민을 이야기하다 점점 자기 모습, 부족함에 직면하죠. 그다음엔 부부갈등이고 결국 ‘자식과의 갈등'이라는 공통분모에 이르러요. 성공한 아버지를 둔 자식들은 공통으로 ‘자기 소멸'의 위기를 겪어요." 원시적이고 직접적인 치유의 육성으로 가득한 책 ‘당신이 옳다'. 여기서 ‘옳다'는 존재 자체에 대한 수용을 의미한다. 정혜신은 성공한 부모를 둔 자식들의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했다. "돈 없고 빽없는 사람들은 그것 때문에 분노와 좌절을 느끼지만, 혜택받은 자들은 또 그 내부에 자기 고통이 있는 거죠. 부모가 가진 게 많아서 자기가 희미해져 버리는… 외형적으론 행복해 보여도 한 존재로는 정체성의 위기를 겪는 거예요." -아이러니합니다. ‘금수저'를 만드느라 애썼는데 정작 자식은 ‘투명수저'로 느끼다니... "장성한 아이가 부모와 맞서거나 망가지는 경우가 허다해요. 성취한들 뭐합니까? 사회적 성공은 외형일 뿐, 존재 그 자체는 아니에요. 그런데 그 외형으로 상대를 흔들고, 상대는 그것에 압도당하니 서로가 안전하지도 편안하지도 않은 거죠. 결국 가진 자나 못 가진 자나 다 피해자예요. 존재 그 자체에 집중하지 못해서죠." -당신의 자녀들은 어떻습니까? 케임브리지대학에 들어간 아이, 고졸에 전자제품판매원을 하는 아이, 대졸에 무직인 아이… 세 자녀의 삶이 다양해서 놀랐습니다. "큰아이는 대학에 안 가겠다고 했어요. 그 애는 살면서 책을 읽는 걸 못 봤어요. 영화나 만화책은 좋아했지요. 지금 전자제품 판매 일을 하는데, 사는 데 지장이 없고 사회적 상식과 균형 감각도 좋아요. 캠브리지대학에 합격한 막내는 지적인 욕구가 많고 공부를 좋아하죠. 그런데 그 막내는 어릴 때 자폐아가 아닌가 할 정도로 사회성도 느리고 말도 느리고 친구도 없었어요. 영국의 섬머힐이 건강한 공동체라 거기에 보냈는데, 4~5년을 수업도 안 들어가고 그네 타고 나무 타고 놀더라고요. 오죽하면 열두 살에 한국에 와서도 패밀리 레스토랑 메뉴에 있는 ‘애플 주스'도 못 읽었어요. 기질적으로 부족한 아이라 거기 선생님이나 저희나 기대치를 낮추고 그냥 상처받지 않도록 보호하며 기다렸어요. 그런데 그 아이가 늦게 트이더라고요. 중3 때 처음 친구를 사귀고, 고1 때부터 세상에 호기심이 생겼어요." 그 어리바리하던 아이가 서서히 자기 일상을 건사하더니, 혼자서 집을 구하고 대학을 알아보고 진로를 찾더라고. 대학을 졸업한 둘째 딸은 비정기적인 문화예술 프로젝트를 하며 구직 중이라고 했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을 때 충고, 조언, 평가, 판단만 하지 않아도 공감은 이미 시작된 것이다./사진=김지호 기자 -놀랍긴 하지만, 일반적인 사례는 아닌 듯해요. ‘자율성'을 우선한 대안학교 졸업생들이 사회에 나와 혼돈을 겪는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아니요. 충분히 그 존재를 인정받고 사랑받은 아이는 현실을 받아들입니다. 기성 사회가 힘들고 부당하다고 느껴도 피난처가 있는 아이는 진짜 현실을 피하지 않아요. 어떤 모습이든 ‘네가 옳다'라고 충분히 인정받고 자라면, 세상을 견딜 에너지가 충분한 거예요. 저희는 막내를 진짜 오래 기다렸어요." -오래 기다린 보상을 받은 건가요? "어쩌면 기다렸다기보다는 그 아이 자체로 자기 모습을 찾은 거예요. 저는 지금 이런 모습이 되지 않았더라도 상관없어요. 덕분에 저희 부부는 아이들 때문에 에너지 소모를 겪지 않았어요. 스무 살 넘으면 특수한 관계의 남남이죠. 대학 다닐 때도 학비 외에는 자기들이 아르바이트해서 생활했어요. 덕분에 고졸 판매원 아이가 제일 부자예요(웃음)." -자녀에게 가장 많이 해준 말은 뭐죠? "말해 주지 않았어요(웃음). 묻고 들어줬죠. 요즘 네 마음이 어떠니? 어떻게 지내니? 불편한 건 없니?" 정혜신은 대화 중에 ‘에너지가 남는다'는 말을 여러 번 반복했다.‘에너지가 남는다'는 말은 ‘지갑에 돈이 마르지 않는다'는 말처럼 비현실적으로 들렸다. 에너지가 남는 이유는 불필요한 소모를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렇게 나누고도 에너지가 남는다면 체력이, 정신력이 남다른 건가요? "(웃으며)다들 자기 기가 빨리는 소모처가 있어요. CEO들은 자식과 전쟁을 치르며 투쟁하듯 살죠. 어떤 사람은 부동산과 주식 투자에 열을 올리고요. 저는 그럴 일이 없었어요. 주식 투자로 돈 날리지 않아서 돈 굳었다고, 남편과 좋아라 하죠(웃음). 어떻게 살아야 할 지 깊이 생각하고 정리해야 에너지 낭비가 없어요. 그 비결이 ‘존재' 그 자체에 주목하는 거예요." -존재가 뭡니까? "내 마음, 내 느낌, 끊임없이 변하는 나의 감정입니다." -재미철학자 전헌 선생도 ‘자기감정을 아는 것이 철학의 전부다'라고 했습니다. 서양 철학자 스피노자는 48가지 감정을, 동양철학자 퇴계는 ‘희노애락애오욕’ 7가지 감정을 핵심으로 인류를 설명했지요. 하지만 철학이 아닌 정신의학을 전공한 당신이 ‘네 존재가 곧 감정이다.’고 하는 말은 또 다르게 다가옵니다. "근원적 코드는 존재에 대한 주목입니다. 존재는 감정이고 ‘감정이 옳다’는 건 생각이나 행동이 옳다는 말과는 또 달라요. 풀이하면 ‘네가 그럴 땐 그럴 이유가 있었겠지' 즉 ‘네 감정에는 이유가 있다"입니다. 어린 시절에 학대받은 사람은 부모에 대한 분노도 있지만, 연민도 있어요. 적개심과 무력감이 동시에 오지요. 상호모순적이에요. 날씨처럼 예보도 힘들고 이랬다저랬다 하는 게 마음입니다. 그렇게 변화무쌍한한 게 사람 마음이고, 그 모든 게 그 사람의 삶입니다. 그 존재를, 감정을 온전히 받아들일 때 관계의 평화가 오지요. 그저 ‘그때는 그랬는데 지금은 이렇구나' 추궁하지 않고 받아들여야 존재가 살아납니다." 환자가 아닌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는 정혜신./사진=김지호 기자 -병명을 진단하고 약을 처방하는 의료전문인인 당신이 그런 결론에 도달하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요. "2003년쯤부터 진료실을 벗어나서 사람을 만나기 시작했어요. 환자가 아닌 상처받은 사람들을 만난 건 저에게 도전이자 축복이었습니다." -어떤 계기로 의사가 진료실을 나왔습니까? "IMF 때 대규모 실업에 관한 보고서를 쓴 게 계기가 됐어요. 당시에 저는 실직자가 아니라 직장에 살아남은 생존자들에 초점을 맞췄어요. 전쟁터에서도 곁의 동료가 죽고 살아남은 자들은 심각한 죄의식과 불안에 시달려요. 남은 자들은 생존에 더 치열해집니다. 새벽부터 공부하고 운동하면서 자기 안전에 절대적인 에너지를 쏟는 거죠. 마구 달린 다음엔 냉소가 찾아와요. 그 보고서를 발표한 후에 기업의 의뢰를 받았어요. 남은 사람들의 심리를 살펴봐달라는 거죠. 그때부터 진료실의 환자가 아닌 보통 사람을 만나기 시작했습니다." 일종의 마음 관리 회사의 운영자였던 셈. 그가 만난 사람들은 그러나 낮과 밤이 극과 극으로 달랐다. 낮에 만난 사람이 재벌 회장, 대통령 후보자, 판사 등의 사회적 강자였다면 밤에 만난 사람은 해고노동자나 국가 폭력 피해자 등의 약자였다. -낮과 밤의 격차가 그렇게 크면 스스로도 꽤 혼란스러웠을 것 같습니다. "아니요. 저에겐 모두가 각각 하나의 존재로 다가왔어요. 높은 사람도 결국 자식과의 갈등으로 허우적거렸고, 얘기하다 보면 존재의 본질은 다르지 않더군요." -최근엔 정신과 상담 경험을 글로 쓴‘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라는 책이 인기더군요. 전문가들의 책보다 일반인의 가벼운 에세이가 더 환호받는 이유가 뭘까요? "환자들은 대기실에 앉아서 듣는 정보를 가장 신뢰합니다(웃음). 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말 한마디에 큰 영향을 받지요. 설사 같이 허우적거리게 되더라도 분명한 위로의 힘이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의사와 환자는 반치유적인 구도예요. 저는 전문가가 치유하는 게 아니라 치유하면 전문가라는 생각을 합니다." -정신과 전문의들이 듣기엔 불편한 발언일 수 있습니다. "요즘의 정신의학계는 문제가 많습니다. 정신 산업과 연계돼 문턱이 낮아졌고 과잉 진단도 잦아요. 분노조절장애도 그래요. 자주 거론되니 아예 병명을 붙여줬죠. 우울증도 미국표준진단체계인 DSM-5에 따라 체크리스트 몇 개에 해당하면 쉽게 진단을 내려요. 잠 못 자고 입맛이 없고 좀 불안하다고 하면 우울증이라는 거죠." 진단 해악이 미국에서도 큰 문제가 되고 있다고 그가 목소리를 높였다. -현실에선 우울증 병력의 범죄자들이 사회문제가 되고 있어요. "진단이 휴지통이 돼버린 거죠. 몇 해 전 독일 항공사 부기장 루비츠가 비행기를 추락시키는 바람에 150명이 죽었어요. 그 원인을 우울증으로 내렸죠. 이해할 수 없어요. 어떻게 150명을 죽인 사람이나 끔찍한 흉악범이나 소심한 불면증 환자나 다 우울증입니까? 말이 안 돼요. 마음의 감기도 마음의 암도 다 우울증이라면 그건 정말 게으르고 변별력이 없는 진단이지요." -그럼 우울증 진단은 어떻게 내려져야 합니까? "저는 우울증이라는 진단이 없어지길 바래요. 우울은 삶의 보편적 바탕색이에요. 모든 인간은 그 위에 개별적인 존재고 감정은 날씨처럼 움직이죠. 존재의 개별성에 주목하지 않으니 소외가 생기는데, 의사들은 핵심을 외면하고 세라토닉 약만 처방해줘요. 그래서 의사에게 화가 난 사람들이 자기가 책을 쓰고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어요. 저 자신이 포함된 한국 정신의학의 현주소예요." -프로이트가 오면 지금 이 상황을 뭐라고 할까요? "글쎄요. 난감해하겠지요. 뭐라 할지는 모르겠으나 저는 그의 좌절을 들어줄 참입니다. 듣기 시작하면 많은 문제가 해결돼요." -하지만 또 그 듣기가 가장 어려운 법이지요. "듣다가 못 참고 충고, 조언, 평가, 판단의 욕구가 발동해서 그렇습니다. ‘충조평판'만 안 해도 성공입니다. 끊지 않고 들어주기만 하면, 상대가 다 알아서 다 정리를 해요. 말하는 사람은 이미 답을 알고 있거든요." 그는 우울증 진단을 받은 범죄자들의 잔혹 행위도 ‘자기 소멸'의 이치로 설명했다. 존재가 소멸된다는 느낌이 들 때 가장 빠르게 자기 존재를 확인하는 방법이 바로 폭력이다. 상대의 극단적 두려움 속에서 존재감이 폭발적으로 증폭되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튼튼한 관계에는 존중과 경계가 함께 한다고 했는데, 경계란 무엇인가요? "국경처럼 너와 나 사이의 선이죠. 너와 나는 다르고 개별적인 존재라는 인정입니다. 자기 욕구를 충분히 수용하면서도 상대를 훼손하지 않는다는 약속. 경계가 지켜져야 존중할 수 있어요. 저와 남편도 듣고 말하는 데는 한 몸처럼 반응하지만, 경계에는 서로 예민해요." -당신을 보면 인생에서 배우자가 주는 영향력이 지대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서로의 영감자와 후원자가 되어주는 부부관계의 비결이 뭔가요? "(웃으며)저는 남편이 미운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섭섭한 적도 없어요. 얘기하면 이해하고 해결이 되지요. 서로가 어떤 마음을 갖고 사는지 아니까. 우리는 서로를 엄마, 아빠라는 역할로 규정하지 않아요. 너와 나, 존재로 보지요. 호기심을 갖고서요. 순간순간 힘들어도 대화를 하면 충전이 돼요. 늘 에너지가 남습니다." -하지만 그런 다정하고 구체적인 화법은 평범한 남자들에겐 익숙지 않습니다. "제 조언을 듣고 아내가 남편한테 "요즘 당신 마음이 어때요?" 물었더니 "무슨 소리냐"며 딴청을 피우더래요(웃음). 당장 호응이 없어도 그런 질문은 존재에 가닿아 파장을 일으켜요. 반드시 우연한 순간에라도 화답을 받을 거예요." -정신과 의사가 꿈이었습니까? "엄마가 오래 앓다 돌아가셨어요. 어릴 때부터 왕진 가방 들고 다니는 의사를 보면서 유치한 마음에 사람 살리는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정작 의대에 진학하고 보니 모든 게 나랑 맞지 않더군요. 정신과를 발견했을 땐 암흑 속에 빛을 본 기분이었죠." -부모와의 관계는 건강했나요? "엄마는 암에 걸려 일찍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그 때문에 우울하셨어요. 자상할 여력이 없던 그분에게 저는 연민이 많아요. (지금 남편인)명수 씨를 만나기 전까지 저도 간신히 버티고 살았어요(웃음). 열일곱이 되어서야 말귀 알아듣고 친구 사귄 우리 집 막내처럼, 저도 오래 걸리는 사람인가 봅니다(웃음)." -내 마음을 궁금해하는 단 한 사람만 있어도 그 사람은 치유된다고 했는데, 주변에 그런 사람이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당장 주변에 없더라도 그런 존재를 떠올리고 인식하는 것만으로 치유가 일어나요. 자각하는 게 중요하죠. 만약 없다면, 내가 나에게 그런 존재가 되어주세요. 보통은 내가 가장 먼저 자신에게 가혹한 타자가 되기 쉬워요. 스스로 "왜 슬프지?" "그랬구나" 묻고 들어주세요. 또 하나의 방법은 내가 타자에게 그런 사람이 되어주는 겁니다. 내가 타인의 마음을 궁금해하면 빠르게 보상이 옵니다." ‘나만 있고 너는 없다’는 듯 살아가는 사람은 상대방의 ‘나'를 무너뜨리는 파괴적인 사람들이다. 심리적으로 모든 사람은 ‘갑 대 갑’이라고 정의하는 정혜신./사진=김지호 기자 -마지막으로 묻지요. ‘옳다'는 자기 적절감, 수용 받음에 대한 증거지요. ‘괜찮다'와는 어떻게 다릅니까? "옳다라는 말은 체중을 실은 말이에요. 온몸으로 존재를 덥석 안는 거죠. 부모가 못나도 죄를 지어도 아이는 평가하지 않잖아요. "엄마 아빠 좋아!"하면서 끌어안지요. 그래서 열등감으로 시선을 피하는 사람도 아이 눈은 쳐다봐요. 안전하다고 느끼는 거죠. "괜찮다"가 엄마의 시선이라면 "옳다"는 아이의 시선이에요. 부모는 아이를 버려도 아이는 부모를 못 버리지요. ‘당신이 옳다'라는 믿음은 그만큼 강한 겁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11/06/201811060061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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