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성경읽기선교회 관악5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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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5 no image 시편23편 충청도 버전 등 [2]
[레벨:8]최요한
27 2010-12-23
항상 기뻐하라는 주님의 명령이요 말씀입니다. 시편23편의 경상도, 전라도 버젼은 익히 아실 것입니다. 아래 다른 버젼을 copy해 보았습니다. 몇번 읽어보아도 참 재미있는 유머같습니다. Be Joyful always! In Christ, John Choi -------------------- <시편23편 충청도 버전> 여호와는 염생이 같은 지를 키우시고 멕이시는 분이시니 지가 부족한 것이 없네유. 그분이 지를 무지무지 파란 풀밭에 어푸러지게하시며 니나노하기 딱좋은 둠벙 가생이로 인도하여주셔유. 지 영혼을 살려주시구유, 그분의 함짜를 위하여 의의 질루 인도하시는 것이지유 지가 죽어 나자빠질도 모를 깡깜하고 칙칙한 골짜구니로 댕겨두 해꼬지를 무서않는 것은 주님께서 지와 같이 하시기 때문이지유. 하마 주님의 지팽이와 막대기가 지를 지켜주시네유. 주님께서 지 웬수의 면전에서 상다리가 부러질정도로 잔치를 여시구 지름으로 지 머리에 발라주시니 지가 몸둘바를 모르겠네유. 시방두 지 잔이 넘치네유 지 평생동안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참말루 지를 따라댕길모냥이니 지가 여호와의 집에 아예 푹 눌러 살것시유. <시편23편 경상도 버전> 2 여호와가 내 목자아이가! 내사 마 답답할 끼 없데이 시-퍼런 풀구딩에 내디비지고 저 쓴한 또랑까로 낼로 이끈신데이 내 정신챙기시사 올케 살라카심은 다 저그 체면 때문이라카네 내 죽을 뻔한 골짜구 디기 껌껌한데서도 간띠가 부어 댕길 수 있음은 그 빽이 참말로 여간 아이라! 주의 몽디-와 짝대기가 낼로 지키시고 내 라이벌 죽일 놈 문-디자슥 앞에서 낼로 팔팔 키워 주시네 내 인생이 아무리 복잡타 캐싸도 저 양반이 맨날 지키줄끼니까 내사 우짜든지 그 옆에 딱 붙어갖고 죽어도 안떠날란다. <시편23편 전라도 버전>2 여호와는 나으 목장께로 나는 오져부요 시퍼런 잔디 깔끄막에 둔누시고 오진 뜸벙가상으로 데꼬가셔 분께라이 나으 거시기를 거시기하시고 똑바로 살라고 해브는 것은요잉 자그 거시기 땀시 그라요 내가라이 디질뻑한 골짝 한 귀퉁머리에서도 허벌나게 껌껌한데서도 간땡이가 부어가꼬 댕기는 것은요잉 그 심이 겁나게 오져부려 근다요 주으 지팽이와 막가지가 나를 확 지켜불고 나으 모질이 원수 앞에서 나를 겁나게 키워주신당께요 나으 인생이 아무리 겁나게 거시기해도 그 냥반이 만날 만날 지켜주실거랑께요 나는 거시기햐도 그 냥반 옆에 오지게 붙어가꼬 디져도 안갈라요, 참말이요. 태클 한번 들어와보쇼 확 그 냥반 한테 찔러 불팅께... 아멘이죠이이잉????
854 no image [공지] 2010년 성탄축하의 밤
[레벨:20]손바나바
40 2010-12-20
853 no image 이여호수아 목자님 은퇴소감 파일 [2]
[레벨:20]인금철
108 2010-12-17
이번에 대전 쎈타의 이여호수아 목자님이 45년간의 목자 생활을 마치고 은퇴식을 하셨습니다. 초기 UBF의 살아 있는 역사라 생각되어, 목자님의 소감을 받아서 올려 봅니다. 우리에게 역사의식과 spirit을 배울 수 있는 좋은 글이라고 생각됩니다. ---------------------------------------------------------------------------------------------------------------------------------------------------------- 2010년 12월 12일 나의 은퇴 소감 내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 요절 : 고린도 전서 15:10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 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사도바울은 자신이 구원받고 주님의 사도가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이 큰 은혜를 헛되이 하지 않고자 주와 복음을 위해서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그것도 그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저도 시골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알지 못하고 영적 무지와 죄 가운데 방황하던 자였습니다. 이런 제가 구원함을 받고 목자가 된 것은 일방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감당하지 못하고 주님께 허물과 죄밖에 드린 것이 없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 죄인을 용서하시고 은혜를 베푸셔서 이날까지 하나님 역사에 쓰신 은혜를 감사합니다. 이제 저는 지난 45년의 UBF 스텦 목자 직에서 은퇴하는 이 자리에 섰습니다. 이 시간 주님께서 저의 지난 목자생활에 함께하셔서 쓰시고 배푸신 은혜를 돌아보고 다만 주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 부르심 저는 1939년 8월15일 제주에서 3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서 여섯 살 때에 전남 해남으로 이사하여 한 가난한 농부요, 유교 사상에 투절하신 부친의 영향을 받고 자라났습니다. 저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해남 중학교에 합격은 했지만 부모가 보내주지 않아서 시골에서 1년을 머슴들을 따라 산으로 나무하러 다니고 농사일을 돌봐야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결코 중학교 진학에 대한 꿈은 잃지 않았습니다. 이듬해 저는 광주로 올라와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61학번으로 전남공대 전기공학과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대학생이 입대하면 1년6개월을 복무하는 학보란 제도가 있었는데 저는 1학년을 마치고 입대하여 '63년9월에 제대 하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군 생활 동안 인생의 분명한 가치관과 목적과 방향이 없이 허무 가운데 몹시 방황하였습니다. 저의 선임자는 고민하는 나에게 자신의 간증을 통해서 불교를 믿으라고 권했습니다. 마음은 있었지만 현실적으로 절에 가서 도를 닦을 수는 없었습니다. 제가 제대 후 시골에 머물고 있던 어느 날 한 후배로부터 전도를 받고 그로부터 기독교 교본이라는 작은 책자를 받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책을 읽고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 하시고 무소부재하신 분이시고 우리가 기도하면 들어주시고 마음에 평안을 주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오후가 되면 습관적으로 뒷산에 올라가 검도 운동을 하고 생각에 잠기곤 했는데 만약에 하나님이 계신다면 이곳에도 계실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밑져 봤자 본전 식으로 한번 믿어보자고 결단했습니다. 그래서 주위에 보는 사람도 없으므로 혼자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계시면 제게 믿음을 주셔서 마음에 평강을 주시고, 남은 대학생활을 승리하여 장래에 출세하게 해주시라"고 유치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렇게 날마다 하루도 빶지 않고 기도 한지 두 달이 지나서 가을이 지나고 광주에 올라온 다음 날 '63년 11월30일 시립 도서관에 갔다가 거기서 전창선(전요한 목자) 도서관 친구를 만나게 되었고 피싱을 당했습니다. 저는 즉시 그를 따라 5분 거리의 센타로 가서 그의 소개로 이창우 선생(이사무엘 선교사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전요한 목자님의 소개를 받으신 이사무엘 선교사님은 저를 한참 보시더니 호주머니에서 성탄 티켙 한 장을 꺼내 제게 주시면서 "딱 한 장 남았는데 사흘 후에 있을 성탄 예배에 오라"고 초청해 주셨습니다. 저는 당장 그 다음 날 새벽부터 배사라 선교사님이 인도하시는 영어 성경공부에 참석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들어도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음 날 제가 기도할 차례가 왔을 때 더듬거리며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저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입이 있어도 말 못하는 자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계셔서, 이러한 저를 깨닫게 해주시고 믿게 해주시면 나 같은 자들에게 하나님을 전하겠습니다."고 기도했습니다. 저는 64년 2학년으로 복학 한 후 아직 하나님이 확실히 살아계신다는 확신도 없는 상태에서 공대 그룹 성경공부를 인도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라 수업시간에 속으로 만약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면 저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저에게 믿음을 주시고 말씀공부 인도를 도와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말씀공부에 은혜를 주셔서 성령 충만한 가운데 그룹공부를 인도하게 되었고 참석한 자들이 말씀에 은혜를 받고 변화되는 것을 보면서 점차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하고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2학년 때 켐퍼스를 개척하여 4학년 때는 2,30명대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 때 양 중에 뉴욕에 김바울 선교사, 남산에 이다니엘 목자, 찰스최 선교사, 뉴욕 콜롬비아 대를 개척하는 신사무엘 선교사, 광주1부 신아브라함 목자 등이 남은 자들이 되었습니다. 제가 4학년이던 '66년 6월5일 갑자기 서울에서 이사무엘 목자님과 베사라 선교사님이 내려오시더니 주말 수양회를 소집하셨습니다. 무등산 제일 기도원에서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사6:8)란 주제로 가진 주말 수양회 목적은 이사무엘 목자님 후임 목자를 세워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 저는 4학년 졸업반으로서 열심히 취직 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스텦 목자가 되기에는 자질이 부족한 자신을 잘 알았기에 스텦 지원에 응하지 않아도 내 양심에 아무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베사라 선교사님 메시지에 갑자기 "하나님은 우리의 목숨을 바칠 자를 원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두 번이나 사고로 죽을 번 한 적이 있었는데 구원받은 것과 이제는 영생을 선물로 받은 빚진 자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말씀이 끝나자 동역자들은 모두 나를 붙들고 기도원 뒷산으로 가서 저더러 목자가 되라고 권했습니다. 의대 졸업반인 정규해(정요셉선교사) 형제도 "남균아! 너랑 나랑 목자가 되자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목자가 되기로 결심을 하고 그날 밤에 정규해 형제와 함께 이사무엘 목자님을 찾아갔습니다. 우리 둘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저희 두 사람이 목자가 되겠습니다."하고 고했습니다. 이 때 목자님은 한참을 바라보시더니 "규해 너는 의사가 되고, 남균이는 스텦이 되라"고 방향을 주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저는 1966년6월5일 Staff 목자로 부르심을 입었고 졸업 후 계속해서 광주 역사를 섬기게 되었습니다. 저는 나같이 부족한 자를 목자로 세워주셨다는 부르심에 대한 은혜와 책임감과 열심히 있었습니다. 저는 새벽 4시부터 일어나 냉수마찰을 하고 기도하고 열심히 켐퍼스를 뛰어다니며 양들을 돕고 섬겼습니다. 그러다가 영적으로 빳떼리가 떨어지면 서울에 가서 재충전 받고 와서 또 다시 열심히 섬겼습니다. 그러나 스텦 목자는 열심만 하면 되는 학생 목자와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아직 믿음이 어린데다가, 말씀의 종이요 영적 지도자의 자질을 갖추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많은 영적인 훈련을 받아야했습니다. 2. 초기 훈련 받던 목자 시절 (67-76년6월) 저는 졸업 후 광주와 전주, 그리고 다시 광주로, 또 다시 서울을 거처 제주개척 역사를 섬기는 등 10년 동안은 그야말로 나그네 목자 생활로 연단의 기간이었습니다. 졸업 후 목자생활 첫해 67년도는 개척 조 상들의 헌신으로 큰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68년도에는 선교부와의 마찰과 대인동 센타 아래층 대인교회와의 마찰로 큰 사단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당시 UBF는 남 장로회 선교부 소속 학생 운동 단체로, 이사무엘 목자님이 서울로 가시자 전도사 한분을 책임자로 파송하는 정치적인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또 한 문제는 아래층 교회와의 건물 소유권 물질 문제였습니다. 하나님은 3개월 동안의 선교부와 교회와의 많은 진통 끝에 우리의 기도를 받으시고 UBF가 선교부의 울타리를 벗어나 자립적인 학생 복음운동 단체로 정착하게 하셨습니다. 센타 건물 문제는 우리가 많이 양보를 하고 금남로에 센타를 얻어 옮기므로 해결되었습니다. 이로써 UBF는 독립적인 학생 복음운동 단체로서 정체성을 가지고 새 출발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문제가 해결 된 후 '68,10월- 70,10월까지 2년 동안 전주 역사를 섬기게 되었습니다. 전주 역사는 제가 갔을 때 주일예배 80명에서 제가 떠날 때는 135명이 참석한 가운데 수양회를 가질 정도로 크게 성장하였습니다. 이 기간 동안 특히 전주 간호학교에 20명대의 큰 성령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이 때 자란 자매님들 중에 이정순 (홍보나 목자 사모)사모를 비롯해서 L.A Humbl yoo, 쾨른 육사라, 시카고 Rebeka Chung, Deborah Kim 선교사들을 비롯해서 6명의 자매 선교사와 뉴욕에 Uni Lee, Washington에 Moses Chang 형제 선교사들이 나왔습니다. 저는 '70년 10월에 다시 광주 목자로 이동 했고 '71년 2월에는 이연옥 사모와 믿음의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결혼한다고 서울에 왔다갔다하면서 역사를 제때에 돌보지 못한 사이 35명대였던 교대 양들 가운데 많이 힘들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다가 72년도 봄 스텦 수양회 때 힘든 역사를 섬기느라 누가복음 숙제를 제대로 해가지 못 한 것으로 훈련에 걸렸습니다. 저는 하루아침에 목자 직이 잘려서 Support 한 푼 받지 못한 채 6개월을 보내야했습니다. 저는 이슬비가 내리는 어느 날 오후 절망 중에 기도원을 향해 무등산 중턱을 오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도중에 눈을 들어보니 산 중턱에 선명한 무지개가 서있는 것이었습니다. 무지개를 보는 순간 노아 홍수 때 언약의 무지개가 생각나서, 저는 "아! 사람들은 나를 버렸지만 하나님은 버리시지 않으셨구나!" 생각하고 소망 중에 위로와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저는 6개월 후에 다시 복직이 되었고 1973년 3월4일 다시 제주 개척에 파송이 되었습니다. 저는 제주에서 시니어 사건이 나서 76.7월에 광주로 가기까지 3년 4개월 동안 동역 자 한 사람 없이 맨 땅을 개척하는 가운데 나의 성실과 의지를 깨시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믿음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가운데서도 안나에 이어 년년 생으로 옥균이와 에스라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런데 가장으로서 가장 힘든 훈련은 생활비 부족으로 인한 궁핍한 생활 훈련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를 통해서 저는 오히려 장차 상 주실 하나님을 바라보고 자유 함을 갖게 되었습니다. 제주 역사는 제주 교대에 송연옥 자매 한 사람을 변화 시켜 주셨습니다. 그녀는 키가 작아서 남들이 다하는 연애한 번 못 해본 운명적인 슬픔으로 인해 말이 없고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고 학교에서도 말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자매가 창세기 말씀 '심히 기뻐하신 하나님'을 영접하고 180도 변했습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전도를 하였습니다. 그녀의 작은 아버지는 주지 스님으로 골수 불교 집안이어서 부모의 핍박을 받아 두 달 동안이나 두 번씩 집을 나와서 숨어서 살아야했습니다. 그런 중에도 믿음의 중심을 지켰습니다. 그녀의 변화를 통해서 교대의 많은 양들을 보내주셔서 13명대 역사를 이루어 주셨습니다. 송연옥 자매는 제가 제주를 떠나 온 후에는 학생 총무로서 제주 센타 남은 자의 역사를 감당하다가 후에 김누가 목자와 결혼하여 김루디아 사모가 되었고, 제가 못 다한 제주대 제자양성의 큰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저는 '76년 4월 전국 스텦목자 모임이 끝나고 서울에 홀로 남아서 머리깎고 스타킹을 신고 다니는 힘든 훈련을 받게 되었습니다. 저는 고민 중에 성경을 읽던 중에 주님께서는 제게 베드로전서 5:5,6절 말씀을 주셨습니다.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저는 이 말씀을 붙들고 겸손히 목자님 방향에 순종하여 훈련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때 시니어 사건이 발생하였고 저는 훈련을 받다말고 제주에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그 후 2개월이 되었을 때 이사무엘 목자님으로부터 광주 목자로 가라는 방향을 받게 되었습니다. 3. 광주 목자로 쓰임을 받았습니다. (1976,7월- 2001년5월9일 까지, 24년) 제가 제주에서 광주에 가면서 먼저 서울에 들려 이사무엘 목자님께 인사를 하였습니다. 목자님은 저를 위해 기도해주시고 친히 저를 택시에 태워 서울 기차역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옥균 목자를 광주 목자로 세우셨구만!" 하셨습니다. 저는 광주의 어려운 역사를 감당할만한 아무런 영적인 힘이나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부족한 나를 광주 목자로 세우셨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제가 광주에 갔을 때 '76년의 시니어 사건의 여파로 광주 역사는 많은 양들이 흩어지고 주일 예배가 30명 정도 나왔습니다. 그러나 박종복(박엘리야 워싱톤), 이용근(이다니엘 쉬펜스버그) 충성스러운 두 목자들과 1년 동안 동역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광주 역사를 빠르게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던 중 '80년 5월초에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연약한 한 자매 목자가 사탄 마귀에게 사로 잡혔습니다. 발작이 심하여 학교도 휴학을 하고 사경을 해매이게 되었습니다. 제가 몇 목자들과 이 딸의 구원을 위해 금식하며 부르짖어 기도할 때 주님께서 기도한지 6일 만에 귀신을 완전히 쫓아내 주셨습니다. 그 후 5월에 있었던 무등산 주말 수양회 때는 큰 성령의 역사가 있어서 모두가 회개하고 울부짖는 기도소리가 온 무등산 계곡에 메아리쳤습니다. 그 해 144명이 참석한 여름 수양회 때는 큰 회개와 성령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 후에 양들이 많아져서 좁은 금남로 센타에서 산수동 넓은 센타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첫째, 건축역사 '83년도에는 시온성 세계선교 센타 건축 역사를 이루어 주셨습니다. 역사가 커가면서 금남로 센타가 비좁은데다가 해마다 오르는 센타 전세금을 위해 헌금해야했습니다. 이로 인해 79년부터 "광주 개척 20주년 기념 센타"를 건축역사를 이루고자 방향을 잡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3년이 지나도록 점점 건축 역사는 부진해갔습니다. 목자들은 결국 믿음이 없음을 깨닫고 학개서 말씀으로 이기적이 된 모습들을 회개하고 믿음으로 건축역사를 이루고자 결단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키사 총 공사비 1억8천만원의 넘치는 헌금 역사를 이루어 주셨습니다. 건축 기간 동안 뒷 집의 방해로 1개월이나 공사가 중단되기도 하였고, 시공 회사가 부도가 나는 등 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어려움 중에 기도하게 하시고 물질과 함께 기도로 건축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2년 동안 밤낮으로 드리는 기도를 받으시고 지하 1층 지상 2층에 200평의 아름다운 센타 완공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86년부터 많은 양들이 몰려와서 말씀 공부 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 센타를 건축하면서 저희 동역자들은 우리 평생에 한번 힘을 다해 하나님의 집을 건축 하자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10년 만에 더 크고 아름다운 조대 백악 센타 건축역사를 이루어 주셨습니다. 90년대가 되면서 조대 주일예배가 성장하여 200명대를 이루면서 미인정 3개 층 센타가 비좁게 되었습니다. 서로 기도실에 들어가려고 줄을 서서 기다리는 현상까지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이에 조대 센타 건축역사를 이루기로 결단하게 되었습니다. 공사도중 뒷집의 방해로 3개월 동안 공사가 중단되기도 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금식하며 눈물로 기도 할 때 사단의 궤계를 물리쳐 주시고 해결해 주셔서 200평 대지에 지하 1층 지상 3층으로 총 350평의 아름다운 조대 백악 센타 건축을 완공하게 되었습니다. 감사한 것은 총 건축비 9억6000만원을 전대와 조대 동역자와 형제자매들이 합심하여 자원하고 기쁜 마음으로 감당하여 아름다운 건축 역사를 단번에 이룬 것입니다. 이러한 합심의 역사는 하나님 앞에 아름답고 귀한 역사의 선례로서 광주 역사의 아름다운 전통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이룬 중흥동 전대 센타와 조대 백악센타 건축역사는 광주 역사 성장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둘째, 선교사 파송역사 : 광주는 80년대까지도 60명의 선교사 파송역사를 이루어 주셨지만 90년대 하나님께서는 더 활발한 선교사 파송역사를 이루어 주셨습니다. 지구촌 한 가족이라는 세계화 바람을 타고 많은 90여명의 선교사들이 파송되었습니다. 이 중에는 선교지에서 돌아온 사람도 있고 지금까지 선교지에서 충성하는 선교사님들도 계십니다. 셋째, 1990년대 부흥의 역사 1980년대 광주 켐퍼스 복음 역사는 조대 켐퍼스 가운데서 강렬한 이데올로기 사상 속에서 꽃피운 역사였다면, 1990년대 광주 켐퍼스 복음 역사는 전대 켐퍼스 가운데 만개하는 부흥기를 맞이하였습니다. 1980년대의 전대 캠퍼스 제자양성은 한 양에게 복음을 전하여 건져 올리는 낚시질 역사였다면 1900년대 역사는 그물을 내려 신입생들을 끌어 올리는 그물질 역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입생 윈터스쿨 역사였습니다. 1991년 겨울부터 목자들은 신입생 피싱 역사를 위하여 40일 작성 기도모임을 이루었습니다. 눈보라를 맞으면 새벽부터 오후까지 원서접수 기간 동안 전남대학교 체육관 원서접수장에서 네비게이토와 서로 경쟁하며 피싱 역사를 하였습니다. 대학입시시험 이후 할 일 없이 노는 예비신입생들을 위해서 컴퓨터, 영어, 기타반 등을 만들어 윈터스쿨을 개설하였습니다. 목자들은 밤늦게까지 편지와 전화로 신입생들을 초청하였습니다. 200명이상의 신입생들이 윈터스쿨을 신청하여 컴퓨터와 영어 등을 배우기 위해서 센터로 몰려왔습니다. 센터가 마치 학원처럼 신입생들로 북적거렸습니다. 이들은 MT 수양회를 통해서 말씀 관계성으로 이어졌고 계속해서 Part별 제자 양성 역사로 이어졌습니다. 한 개 Part는 3-4개 요회가 연합하여 이룬 큰 모임이었습니다. 이런 파트가 전대 가운데 5개가 있었고 각 파트에는 5명 (박마가, 이다윗, 김갈렙, 최베드로, 이디모데)의 파트장 인턴 목자들이 굳게 서 있었습니다. 이중 새부대 파트는 90명대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파트모임에는 항상 양들로 가득하였고, 파트모임 때면 10여명 이상의 양들이 소감을 써서 발표하는 바람에 목자들은 밤늦게까지 양들의 소감을 들어야 했습니다. 이와 같은 제자양성 역사로 매년 가을학기 추수 감사예배 때는 30-40명 이상의 양들을 목동 목자로 세우는 놀라운 제자양성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로 인해서 1999년에는 전대주일 예배역사가 분가해 나간 4부를 제외한 1,6부만 해도 290명대로 흥왕한 제자양성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1990년대 후반기 전대와 조대 전체 역사는 주일예배가 700명대에 이루었고, 전체 여름 수양회는 800명대, 광주 지구 연합 성탄예배는 1천명이 참석하는 역사를 이루어 주셨습니다. 이와 같은 성장과 부흥의 흥왕한 복음역사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의 역사였습니다. 이런 역사의 이면에는 전대와 조대 시니어 목자님들과 사모님들 그리고 2,30여명의 충성스러운 F/T 목자들의 기도와 헌신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2001년 5월 9일 전대 1,6부 역사는 김느헤미야 목자에게, 조대 2부 역사를 박요한 목자에게 위임하였고 3부는 계속하여 박다윗 목자가 7부는 송누가 목자가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광주에서 물러난 저는 다시 대전 개척 역사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5. 대전 개척역사를 섬겼습니다. (2002년 3월17-2010년 12월12일) 2001년은 CMI가 UBF로부터 갈라져 나간 시련의 시기였습니다. 고 이 사무엘 선교사님께서는 2002년 1월 1일에 제가 전화를 했을 때 선교사님은 저에게 대전 개척과 함께 대전 10개 Chapter 개척의 방향을 주시고 일주일 후에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저는 이 방향에 따라 2002년 3월 17일 대전개척 첫 예배를 드리고 제 2의 목자생활을 출발하게 되었습니다. Home Center 위치는 학생들이 몰려다니고 24시간 영업하는 궁동 유흥가 2층 옥상 주택이었습니다. 주위 환경은 늘 소란하고 혼잡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예비하신 동역 자와 양들을 보내주셨습니다. 첫 예배 때는 동교 센타 윤폴, 조앤 목자 가정과 카이스트 정종현 형제를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전문창, 김은형(동교센타) 목자들과 한양센타 손요셉, 폴린 목자가정을, 10월에는 공주에서 백다윗- 메리, 신사무엘- 루디아 두 목자 가정을 보내주셨습니다. 이들은 모두가 대전 역사의 조상이요 기둥 같은 개척 동역 자들이 되었습니다. 윤폴 목자는 조앤 사모와 함께 군에서 돕던 대덕대 조두민 형제를 심방하여 Group 성경 공부를 하였는데 박상렬, 최길윤, 전경수 형제들을 보내주셨습니다. 이들은 신실하게 주일예배에도 참석하는 가운데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음이 성장했습니다. 저는 매주 카이스트 캠퍼스에서 정종현 형제와 1대1 말씀공부를 하였는데 그는 같은 과 이순철 형제를 인도하였습니다. 순철형제는 주일예배에 참석하여 요한복음 6:27절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는 말씀을 영접하고 카이스트 역사에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개척한지 9개월 만에 22명대 주일예배역사를 이루어 주셨습니다. 주위 환경은 소란했지만 주님께서 함께하시므로 기쁨과 은혜가 충만한 아름다운 말구유 역사를 이루어 주셨습니다. 그해 년 말이 되면서 예배 보는 Home Center 방이 비좁게 되었습니다. 이를 아신 전요한 목자님은 센타를 옮기도록 방향을 주셨습니다. 전세금은 자체 헌금과 시카고와 광주와 종로 등 본국 20개 센타에서 기도와 함 께 헌금에 동참하여 넘치게 채워 주셔서 지금의 센타를 얻게 되었습니다. 첫째, 충남대와 켐퍼스 역사 충남대 역사는 양들이 어느 정도 자라다가 떠나기를 반복하였습니다. 이런 중에서도 사모들은 주중에 목자들은 토요일 오후에 모여 피싱을 하였습니다. 신사무엘, 루디아 목자 부부는 퇴근 후 공주에서 유성까지 주 3회 이상 센타에 와서 Fishing 과 1:1 역사를 섬기고 저녁 10시가 되서야 돌아갔습니다. 올 때는 피곤해서 왔다가 갈 때는 스피릿이 충만하여 돌아갔습니다. 리디아 사모님은 김승겸, 최민정, 고주희, 윤정석, 박진호, 장윤호 등 여러 형제자매들을 섬겼습니다. 뿐만 아니라 김웨슬레, 정모세, 손요셉 목자님들과 백메리 사모님들이 양들을 섬기고 있습니다. 이들의 섬김으로 인해 현재 안성원, 강인호, 노해선, 차영준, 진준원, 로드리고 형제들과 설도, 손보라, 손사라 자매 양들이 자라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전안드레- 한나, 정순종- 사라 목자 가정을 이루어 주셔서 하나님 역사에 신실하게 쓰임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남은 자 아홉가정과 최갈렙 스텦 목자 가정을 굳게 세워주셔서 자립 역사의 기초를 이루어 주신 은혜를 감사드립니다. 둘째, 계승역사 제가 대전 후계 목자를 위해서 기도한대로 하나님께서 성동 센타에서 훈련을 받고 성장한 신실한 최갈렙, 최리브가 목자 가정을 2008년부터 보내주시고 동역하게 하셨습니다. 최갈렙 목자님은 충성스럽고 신실하고 메시지를 잘 전합니다. 이제 다만 제자 양성 역사를 위해 믿음으로 성령 충만함을 덧입고 1:1 제자양성 역사에 박차를 가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제가 은퇴 후에도 기도의 줄을 놓지 않고 대전 센타 1:1 제자양성 역사를 위해 중보기도의 사명을 다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동안 광주 센타와 성동센타 동역자들이 대전 역사를 위해 기도지원과 함께 물질 지원을 해주신 은혜를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죄인을 일방적인 은혜로 구원하시고 스텦 목자로 부르셔서 지난 약 45년간 광주와 전주, 제주, 대전 개척 역사에 쓰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 찬양드립니다. 영적으로 인간적으로 목자로서 부족한 저를 목자로 세워 훈련하여주신 고 이사무엘 선교사님, 저를 위해 기도하여 주신 Mother Barry 선교사님, 전요한 목자님, Grace Lee 선교사님 그리고 지난 24년 동안 저의 허물과 약점을 감당해주시고 기쁨의 때나 시련의 때에도 고락을 함께 하며 아름다운 동역의 역사를 이루어 주신 사랑하는 광주 학사 목자님들과 사모님들 그리고 대전의 목자님, 사모님들의 사랑과 동역의 역사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또한 이렇게 바쁘고 피곤한 주일에 멀리 서울과 광주에서 울산, 진주, 청주, 천안에서 우성 까지 오셔서 저의 은퇴식에 참석하셔서 축하해 주시고, 기도하여주신 사랑과 은혜를 감사드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립니다. 저의 남은 인생도 계속해서 대전과 광주 세계 선교를 위해서 중보기도를 꾸준히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852 no image 헨델의 메시야(각 파트-소프라노/엘토/테너/베이스) [1]
[레벨:20]박문수
60 2010-12-10
851 no image [성탄 합창] 할렐루야 참고영상
[레벨:20]서진우
46 2010-12-09
850 no image 봉천동 단상 [2]
[레벨:16]한베드로
113 2010-12-07
849 no image 폴 홍 선교사님 특강 "신성장 동력과 대학생활 " 파일 [2]
[레벨:20]서진우
90 2010-12-04
848 no image 학생연합예배에 다녀온 소감 [3]
[레벨:15]정종현
87 2010-11-28
진우 목자님과 혜란 목자님과 저와 승대가 이번 학생연합예배에 다녀왔는데, 은혜받은 점을 나누고자 합니다. 전국에서 학생이 모였습니다. 저희는 11시 정시에 도착했지만 이미 가득 차 있어서 맨 뒤 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사람이 더 와서 맨 앞에 의자를 더 놓으니 저희는 맨 앞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선교사님의 강의를 듣던 중에 아브라함에 대한 점이 은혜로웠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악하면서 성공하거나 선하면서 무능하게 살기 쉽습니다. 그러나 제3의 길은 아브라함처럼 선하면서 유능하게 사는 것이고, 이것은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질문을 받는 시간에 우리는 계획을 세워야 하고, 세우지 말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10년이 지난 뒤에 어떻게 하고 있을 것인지 생각해보아야 하지만,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므로 우리가 세운 계획을 다 무너뜨리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인도하시기도 합니다. 그리고 또 은혜있었던 부분이, 한 선교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분은 시니어 목자님들이 잘 못 한다고 폴 홍 선교사님께 한 시간 동안 불평을 하였습니다. 폴 선교사님은 더 불평할 게 있냐고 물어보시니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폴 선교사님은 10년 뒤에도 이렇게 불평만 할 거냐고, 10년 뒤에 시니어 목자님이 되면 어떻게 하겠냐고 물으셨습니다. 불평하신 목자님이 생각해 보시니 자기도 그렇게 하실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불평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좀더 성숙한 목자님이 되셨다고 하셨습니다. 남을 판단하기 전에 자신이라면 어떻게 할 지, 그리고 하나님께서 어떤 것을 선히 여기실 지 생각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오전에 폴 홍 선교사님의 강의가 끝나고 점심시간이 시작되었을 때에 선교사님께서 승대와 진우 목자님과 저를 안아주셔서 놀랐습니다. 점심 먹고 쉬는 중에는 악수를 하시고 짧게 말을 걸어 오셨습니다. 오후에는 이스펄전 목자님의 불을 내린 엘리야에 대한 말씀 메시지가 있었습니다. 그는 선지자를 죽이는 중에서도 아합 왕 앞에서 당당하게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가 그럴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훈련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받은 훈련은 까마귀가 날아오는 음식을 받아 먹으면서 숨어 지내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현실적인 문제를 통해서 훈련하십니다. 그는 이를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참된 하나님이시고 동물을 포함해서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또한 엘리야는 사르밧 과부 집에 머물렀는데, 사르밧은 시돈 땅이라서 자신을 죽이려는 바알 선지자들의 중심지였습니다. 엘리야의 믿음을 더 깊이 알 수 있기를 기도드립니다.
847 no image 10학번 어린양을 응원해 주세요^^ (임형철형제님,화생공10) [2]
[레벨:12]최우석
81 2010-11-25
846 no image 성탄을 맞이 하며 [1]
[레벨:20]정아브라함
79 2010-11-23
845 no image [동영상] 창조과학 세미나 자료 [1]
[레벨:20]서정수
52 2010-11-23
인금철 목자님이 알려주신 뉴저지 센터의 창조과학 세미나 자료를 올려드립니다. 김명현 박사님의 동영상 강의입니다. 아래와 같이 총 13강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창조과학세미나 1부 왜 창조인가? / 김명현박사 창조과학세미나 2부 대홍수와 노아의방주/김명현박사 창조과학세미나 3부 그랜드캐년의 비밀 / 김명현박사 창조과학세미나 4부 과학, 기적, 영혼 / 김명현박사 창조과학세미나 5부 인류의 기원 / 김명현박사 창조과학세미나 6부 한자와 창세기 / 김명현박사 창조과학세미나 7부 공룡과 인간 / 김명현박사 창조과학세미나 8부 화석들의 증언 / 김명현박사 창조과학세미나 9부 지구의 나이 / 김명현박사 창조과학세미나 10부 창조와 부활의 원리-열역학법칙 / 김명현박사 창조과학세미나 11부 창세기 1장 1절의 비밀 / 김명현박사 창조과학세미나 12부 과학과 예언 / 김명현박사 창조과학세미나 13부 동방박사와 메시아의 별 / 김명현박사 =============================================================================== 창조과학세미나 1부 왜 창조인가? / 김명현박사 창조과학세미나 2부 대홍수와 노아의방주/김명현박사 창조과학세미나 3부 그랜드캐년의 비밀 / 김명현박사 창조과학세미나 4부 과학, 기적, 영혼 / 김명현박사 창조과학세미나 5부 인류의 기원 / 김명현박사 창조과학세미나 6부 한자와 창세기 / 김명현박사 창조과학세미나 7부 공룡과 인간 / 김명현박사 창조과학세미나 8부 화석들의 증언 / 김명현박사 창조과학세미나 9부 지구의 나이 / 김명현박사 창조과학세미나 10부 창조와 부활의 원리-열역학법칙 / 김명현박사 창조과학세미나 11부 창세기 1장 1절의 비밀 / 김명현박사 창조과학세미나 12부 과학과 예언 / 김명현박사 창조과학세미나 13부 동방박사와 메시아의 별 / 김명현박사
844 no image [펌] 학생사회 이대로 무너지나
[레벨:20]서진우
32 2010-11-17
대학신문에서 학생회 선거 관련 기사를 읽고 올려봅니다. 저희 과에서 마지막으로 명맥을 지켜오던 동아리도 올해는 신입부원이 없어 정기 공연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학생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요. 어떻게 불러모아야 할까요. --- 학생사회 이대로 무너지나 활동 활발하던 사회대, 공대, 사범대 학생회 선거 잇단 무산… 학생사회 붕괴 조짐? 현재까지 총 3개 단과대 선거가 무산됨에 따라 일각에서 학생사회 붕괴에 대한 우려를 제기하고 있다. 지난달 28일 사회대 학생회장 선거가 등록한 후보자가 없어 무산됐고 지난 4일(목) 공대와 5일 사범대도 같은 이유로 선거가 무산됐다. 사회대 학생회 선거 무산은 학생회 공식 기록이 남아 있는 1991년 이후 사상 초유의 사태다. 공대, 사범대도 오랜 학생회 역사 속에서 각 단과대 복지사업뿐 아니라 △한·미FTA 반대 △쇠고기협상 반대 △노무현 대통령 탄핵 반대 등을 주장하는 등 사회를 향한 목소리를 활발히 내오던 단과대 학생회들이였기 때문에 이들의 선거 무산으로 학생사회는 큰 충격에 빠진 상태다. 여러 단과대의 학생회 선거가 무산되며 향후 학생사회 운영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학생사회에 대한 학생들의 무관심과 잇따른 부정 사태 등의 악재로 3번에 걸친 총학생회(총학) 선거가 2번이나 무산되고 있는 상황에서 연석회의를 구성하며 학생사회 부활의 초석으로 여겨지던 단과대 학생회마저 위기에 봉착했기 때문이다. 27대 사회대 학생회장이었던 정구현씨(정치학과·06)는 “과·반 학생사회로부터 직접 의견을 수렴하고 상대적으로 학생들과의 소통이 활발하던 단과대 학생회마저 무너진 것은 안타깝다”며 “이는 전체 학생사회의 위기가 단과대 차원으로 표출된 결과로 보인다”고 말했다. 단과대 차원에서 추진하는 기본적 사업 자체에 차질이 생길 수 있다는 문제도 제기됐다. 선거가 무산된 단과대에서 과·반학생회장연석회가 업무대행을 준비하고 있지만 학생회가 존재하지 않아 신입생 환영 사업을 포함한 학기초 사업 등을 이끌 공식 주체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교육학과 학생회장 정상호씨(교육학과·09)는 “본격적으로 새터 준비를 시작하면 실질적인 책임자가 없어 큰 혼란이 올 수 있다”고 우려를 표했다. 단과대학생회장연석회의 공동의장 준규씨(법학부·08)는 “학생회에 대한 학생들의 무관심은 기존 학생회가 학생들이 갖고 있는 실질적 고민을 자각하지 못했기에 발생했다”며 “학생회가 조직적으로 나서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학생들이 학생회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선거 무산 문제는 해결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출처 : http://www.snunews.com
843 no image 호킹의 이론, 어떻게 볼 것인가? [2]
[레벨:20]인금철
67 2010-11-17
어떠한 관점으로 이 시대 사상을 볼 것인가 생각하게 해 주는 글이라서 추천을 받아 올려 봅니다. -------------------------------------------------------------------------------------- 장애를 지닌 무신론 과학자 스티븐 호킹 ‘우주는 신이 창조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창조 되었다’고 주장했다 하여 매스컴과 교계의 파문을 일으킨 스티븐 호킹(1942- )과 레오나르도 믈로디노프(미 캘리포니아 공과대 물리학)의 공저 ‘위대한 설계(The Grand Design)’가 최근 우리말로도 번역이 되어 나왔다. 스티븐 호킹(Stephen William Hawking)은 영국의 이론물리학자이다. 즉 관측과 실험을 요구하는 학자가 아니다. 단지 이론과 수학으로 우주를 바라본다. 호킹이 노벨상 수상자가 되지 못하고 늘 논란이 많은 것도 이런 이론물리학자의 특성이 반영된 점이 있다. 호킹은 1959년 영국 명문 옥스퍼드 대학에 입학하여 재학 중, “물리학 문제는 어떤 것이든 계산하기도 전에 풀어버렸다”고 호킹의 지도교수가 회고하는 것으로 보아 일찍부터 뛰어난 두뇌를 가진 수재였음이 분명하다. 그의 아버지도 과학자였다. 아버지가 영국 국립의학연구소에서 열대병을 연구하는 생물학자였으니 과학적 재능은 일찍 타고난 듯하다. 이 모든 배경이 그의 육체적 장애와 더불어 호킹의 명성을 크게 높이는 상승 작용을 하였을 것이다. 호킹은 사실 이미 과거에도 그가 믿는 신이란 정통적 신개념이 아님을 늘 말하고 있었다. 즉 호킹이 불신자라는 것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제 와서 이렇게 온통 언론이 다시 호들갑을 떠는 것일까? 출판사의 교묘한 홍보 전략 다름이 아니다. 10년 만에 그의 새 책이 출간되었다. 출판사의 목표란 신(神)이 존재 유무가 중요한 게 아니다. 오직 책이 계획만큼 많이 팔려야 한다. 출판사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엇이든 이슈가 될 만한 것은 끄집어내어 언론의 관심을 끌어야 한다. 출판사의 생존이 달린 문제이다. 관측과 실험이 불가능하고 딱딱하고 어려운 이론물리학자의 주장은 독자들에게 관심도 덜하고 조금 신선감이 떨어진다. 우주물리학적 교양도서라는 것은 심지어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수많은 대학자들의 책도 팔리지를 않는다. 호킹은 1987년 출판된 자신의 책 서문에서 스스로 누군가 자기에게 “당신이 책에서 방정식 하나 사용할 때마다 책 매상이 절반씩 줄어들 거라”고 충고했다는 에피소드는 과학 도서를 팔기 위한 치열한 고심의 흔적을 보여준다. 이런 고민을 뚫고 무엇이든 독자들에게 충격을 주고 호기심을 불어넣어야 한다. 호킹이 장애를 가진 의지의 과학자라는 것도 세상에 너무 잘 알려진 사실이다. 좀 더 세상을 향한 강력한 레토릭이 필요하다. 21세기는 종교와 과학의 시대이다. 탁월한 장애인 과학자가 신이 없다고 외치는 것은 영원히 리바이벌해서 써먹을 만한 주제이다. 이미 그것은 호킹과 같은 옥스퍼드 출신이고 한 살 차이인 리처드 도킨스(1941- )가 여러 번 활용하여 그 파급력을 확인한 바 있다. 필자가 볼 때 이번 일은 조금 유치하게 보인다. 호킹은 출판사 판매량 제고를 위한 슬픈 언론의 도구가 되어 버렸다. 신이 없다는 것을 증거하려고 겨우 자신의 작은 머리와 이론물리학을 가지고 무신론의 틈새를 메꾸려는 노학자의 애쓰는 모습이란 얼마나 안쓰럽고 처량한가? 하지만 출판사는 지금 쾌재(快哉)를 부르고 있을 것이다. 예상대로 이 책은 10월 7일 미국에서 출간되자마자 단번에 아마존의 베스트셀러 1위 자리에 올랐기 때문이다. 호킹은 ⌜시간의 역사⌟를 쓸 때에는 자신이 믿지도 않는 신(神)의 마음을 조심스럽게 탐구하는 듯한 레토릭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었다. 이번에는 반대로 신에 대한 반감과 강한 부정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모은 것이다. 리처드 도킨스는 대단히 전투적인 무신론자이다. 그의 논지는 한 마디 한 마디가 단순하지가 않다. 오랜 시간 치열하고 집요하게 무신론을 주창하여 왔다. 그에 비하면 사실 호킹은 훨씬 소박한(?) 무신론자이다. 주변에서 흔히 보는 무신론 과학자 가운데 한 사람일 뿐이다. 다만 조금 알려진 과학자요 장애를 가진 특성으로 인해 사람들의 관심을 좀 더 끄는 과학자일 뿐이다. 해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이론물리학 자체가 늘 잠정적이므로 무신론과학자로서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다. 더구나 난해해도 그 주장을 증거하거나 반증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호킹도 사람이다. 스티븐 호킹의 주장- 그도 황당한 실수를 하는 사람일 뿐이다 호킹은 1985년 “우주가 수축하게 되면 시간의 화살도 반전(反轉)한다”는 아주 과감한 주장을 폈다. 물론 호킹의 실수였다. 일본을 여러 번 방문한 호킹이 첫 방문 때 교토(京都)에서 열린 ‘양자 중력과 우주론’에 관한 국제회의에서 “우주가 수축할 때에 열역학적 시간의 화살은 반전한다”고 자신만만하게 했던 주장이었다. 시간이 정말 거꾸로 갈 수 있을까? 노인이 아이로 되돌아갈 수 있을까? 되돌아가서 과거의 부끄러운 것들이나 아쉬운 것들을 교정하거나 수선하고 올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떨어진 대학, 불합격한 입사 시험, 빗나간 탈선을 바꿔놓을 수 있다면 얼마나 통쾌할까? 교통사고로 다 망가져버린 자동차가 다시 조립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물론 그리 될 수 없다. 이것은 나중 호킹 스스로 인정한 ‘큰 실수’였다. 호킹의 주장은 엔트로피의 법칙을 아는 상식의 공학도나 물리학도라면 어안이 벙벙해지는 괴이한 억지 주장이었던 것이다. 호킹도 당연히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엉뚱한 실수를 할 줄 아는 한 명의 과학자일 뿐이다. 사람들과 언론은 일개 과학자의 주장에 너무 호들갑을 떠는 경향이 있다. 과학자도 일종의 미디어 스타가 된지 오래이다. 우리는 황우석 박사 논문 조작 사건에서 이미 그 폐단을 확인하여 왔지 않은가! 이번에 나온 책은 무슨 대단한 논문이 아니다. 우주를 설명하는 단순한 교양 과학도서이다. 노벨상 수상자도 아닌 검증되지 않고 단순히 미디어에 노출된 과학자가 주장한 책을 누가 사볼까? 이번 호킹 박사의 책도 이미 그의 10년 전 저서에서 생각했던 것들을 조금 진전시킨 리바이벌일 뿐이다. 호킹은 철학은 죽었다고 하면서 자신은 다분히 과학과 철학을 넘나드는 주장을 편다. 저자 자신들은 “과학사의 전환점”에 점근했다고 자화자찬을 한다. 이제 물리이론의 목표와 조건에 대해 생각을 바꾸라고 독자들을 재촉한다. 그러나 정통 물리학과 철학과 수학을 전공한 이 책의 번역자조차 “전통과학자들이 보기에 호킹의 시도는 충분히 이단적”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책 판매를 위한 교묘한 전략에 너무 요란하게 반응하였다. 이렇게 사람들은 순진하다. 출판업자에게 말려든 것이다. 이 책에서 호킹은 양자이론을 가지고 우주는 하나의 역사를 가진 것이 아니라 모든 가능한 역사들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며 “다중우주(multiverse)"를 예측하고 있다. 우리가 보는 우주는 다수의 우주들 중의 하나에 불과하며 “무”(無, nothing)에서 자연발생한 것이라 주장한다. 또한 플라톤과 뉴턴과 아인시타인을 넘어 자연의 4가지 힘과 숱한 물리적 상수들의 값을 종합적으로 설명하는 단일한 이론의 모델로 자신의 M이론(M-theory)을 내세운다. 호킹은 M이론을 통상적 의미의 이론이 아니라 다양한 이론들의 집합 전체를 말하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사실 이것은 다분히 과학철학적 시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킹은 이론물리학자 답지 않게 과학철학자들과 철학자들에 대해 반감이 많은 과학자로 알려져 있다. 이번 자신의 책에서도 호킹은 ‘철학은 이제 죽었다’고 말한다. 철학이 현대과학의 발전, 특히 물리학의 발전을 따라잡지 못했다고 격앙되어 말한다. 과학철학자들은 호킹의 이런 글을 읽으면 과연 무어라 말할까? 그냥 빙그레 웃을 것이다. 대화하기 싫은 것이다. 호킹은 참철학의 의미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이다. 그것은 역설적으로 호킹이 그만큼 과학철학자들의 비판에 노출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과학철학자들의 비판에 노출되었다는 것은 호킹의 사색과 독서폭이 그리 넓지 않다는 것을 반증한다. 이론물리학은 사실 그 원조가 철학이다. 이오니아의 밀레투스에서 시작된 서양 철학의 출발은 자연학(physica)이었다. 학문은 정교하다. 과학철학은 수천 년 동안 정교하게 정립된 학문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함부로 철학이 죽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과학철학을 애써 외면하면서 이론물리를 전개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는 뜻이다. 설령 철학이 죽는 다고 신이 죽지 않는다. 실은 철학도 펄펄 살아있고 하나님도 우주라는 유한(有限)의 바깥에서 웃고 계실 것이다. 유한(有限)이 어떻게 무한(無限)을 담을 수 있단 말인가? 유한한 호킹은 무한하신 하나님이 창조하신 시간 한줌, 바람 한줌, 공기 한줌도 자신의 머리 속에 담을 수 없는 것이다. 호킹의 우주론은 여전히 아직 낯선 학문에 불과하다. 뉴턴과 아인시타인조차 정밀한 과학적 평가를 받은 것처럼 호킹에게도 많은 학자들의 신랄한 비판이 기다리고 있다. 실은 호킹의 주장은 이론물리학자들에게도 아직은 익숙하지 않은 잘 정리되지 않는 수긍하기 어려운 주장에 불과하다. 그래서 과학철학자들은 호킹을 유명론자(唯名論者)라든가, 개념 도구주의자, 실증주의자, 실재론자 등으로 각각 다르게 부르고 있다. 유명론과 실재론과 실증론은 서로 상이하거나 상반된 입장임에도 호킹이 이렇게 다양한 입장을 가진 사람으로 불려진다는 것은 그의 학문적 입장이 얼마나 다분히 철학적이고 또한 정돈되지 않았는 가를 나타낼 뿐이다. 1962년 의사로부터 여명이 2,3년밖에 남지 않았다는 진단을 받고도 초인적인 활약을 해온 의지의 과학자 호킹이었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이 탁월한 과학자 호킹이 이제 얼마 남겨두지 않은 말년의 기간 동안 자신이 최고라는 생각을 조용히 내려놓고 이번 책 출간을 계기로 조금 깊은 사색과 독서의 시간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호킹 못지않은 신실한 과학자들은 허다하다 28세에 실명한 천재 수학자 오일러는 눈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서도 500여 편이 넘는 논문과 책을 썼다. 최근 스위스 역사학자들의 확인에 따르면 그가 남긴 연구 자료의 총량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 넘어 대형 트럭 한 대 분량을 훨씬 넘는 양이었다. 그는 호킹 같은 학자는 비교도 되지 않는 대학자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칼뱅파 목사였던 아버지의 바람대로 정규적으로 교회서 설교를 하는 경건한 삶을 살았다. 이런 경건한 과학자들은 무신론 과학자보다 훨씬 많았다(본 창조신학연구소 홈피 참조). 영국 왕립연구소장을 지낸 수전 그린필드 옥스퍼드 링컨대학 교수는 최근 BBC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과학이 (일부 학자들의) 오만에 의해 종종 시달린다”며 영국의 과학자요 신실한 교회 장로였던 마이클 패러데이(1791~1867)를 인용,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사람만큼 무서운 것은 없다”고 지적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위대한 사람의 위대한(?) 착각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역사상 큰 불상사를 가져올 수 있다. 시간 연구의 원조, 성 어거스틴 아인시타인과 호킹이 시간을 연구하기 이미 오래 전, 이들 두 과학자보다 더 깊은 연구와 사색과 기도로 ‘시간’의 신비를 연구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성 어거스틴이다. 호킹은 시간 연구의 권위자요 평생 시간을 붙들고 산 과학자다. 호킹도 자신의 책(A Brief History of Time)에서 어거스틴의 시간 연구를 얼핏 다루고 있다. 이제 이 호킹이 인생의 말년에 시간 연구의 대선배 어거스틴이 찾아낸 ‘시간 밖에 존재하며 시간에 구속되지 않으시는 분’(벧후 3:8)을 꼭 만났으면 한다. 조덕영 박사<창조신학연구소www.kictnet.net 소장>
842 no image House church 특강 파일
[레벨:20]인금철
108 2010-11-09
841 no image 김형석교수에 관한 기사
[레벨:20]정아브라함
68 2010-11-03
김형석교수님은 연세대철학과 교수였습니다. "영원과 사랑의 대화"라는 수필집을 써서 유명해진 분입니다. 위 제목은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영원하신 예수님과 사랑을 갈구하는 한 여인의 대화에서 따온 것입니다. 다음의 기사에 위 책에 관한 뒷이야기가 실려 있어 참고로 보시기 바랍니다. 아직도 만년필로 글을 쓰신다는 것도 배울만합니다. 다음은 기사내용입니다. 김형석(90·철학) 연세대 명예교수는 가난하고 힘들던 시절 사색적이고 서정적인 에세이로 지친 영혼을 위로해준 우리시대의 대표적 멘토다. 1960, 1970년대 그가 펴낸 수많은 에세이집은 방황하던 젊은이들에게 ‘삶의 등대’와 같은 역할을 했다. 1980년대 후반 우리 사회의 민주화와 더불어 읽을거리가 많아지면서 그의 글이 갖던 절대적 영향력은 차츰 약화됐고 그 또한 대학강단에서 정년퇴임하며 세인의 시야에서 사라졌지만, 그는 여전히 시대정신을 일깨우는 원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는 지난 18일 서울 중구 태평로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고당 조만식 선생 추모 60주기 및 전기 출판기념회에서 ‘고당에게는 꿈이 있었다’는 추모 강연을 했고, 11월9일엔 김수환 추기경 선종 1주년 추모 모임 강연자로도 나설 예정이다. 지난 27일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에 위치한 그의 자택을 방문했을 때 그는 가을 햇볕처럼 따스한 미소로 맞아주었다. 그의 책을 읽으며 청소년기를 보낸 이들은 어느덧 중년이 됐지만 그는 구순이라는 연세가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정정하고 단아한 노철학자의 이미지를 지니고 있었다. ―연세대 철학과에서 정년퇴직하신 게 벌써 25년 전인데, 정말 건강하시네요. “어렸을 때부터 건강이 좋지 않아 항상 조심하면서 사는 습관이 붙었지요. 지금도 무리는 안합니다. 나이가 들면 누구나 건강을 위한 건강에 매달리는 것 같은데 나는 좀 생각이 달라요. 건강이 목적이 아니라 일하기 위해 앓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늘 무리하지 않고 지냈죠. 무슨 일이든 쫓기지 않으며 하려고 노력합니다. 원고나 강연을 청탁받으면 마감날짜 4∼5일 전에 끝냅니다. 많은 일을 하면서도 긴장을 덜 하고 살아온 게 건강 비결인 것 같습니다.” 스트레스를 받지 않기 위해 무리하지 않고, 맡은 일도 미리미리 한다는 그는 매일 아침 50분씩 산책을 하고 오후엔 수영을 한다. 그것도 지나치지 않게 한다. “더하고 싶을 때 딱 그만둔다”는 게 그의 말인데, 평생 조심하면서 준비하고 절제하며 살아온 습관이 그의 오늘을 만든 듯싶다. 김 교수는 “얼마전 원고청탁이 들어왔는데 사람이 얼마나 사는 게 좋으냐는 게 주제였다”면서 “객관적으로 얼마나 사는 게 좋으냐를 생각하며 쓰다가 얻은 결론은 일할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때까지 사는 게 좋겠다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아직도 200자 원고지에 만년필로 원고를 쓴다. 한땀한땀 바느질하듯이 정성을 다해 생각을 모으고 글로 옮긴다. ‘컴퓨터로 쓰면 손의 피로도가 덜할 텐데 여전히 손으로 쓰시냐’는 질문에 “이렇게 만년필을 들고 원고지 앞에 앉으면 생각이 한곳으로 모아지기 시작한다”고 말했다. 마치 성직자가 기도하듯이 구도하는 자세로 글을 쓰는 것이다. 그는 최근 서울아산병원에서 펴내는 잡지 ‘아산문화’에 두고온 북녘을 죽기 전에 다시 한번 가보고 싶다는 내용의 칼럼을 썼다. 마침 이번 주말부터는 금강산지역에서 남북이산가족 상봉행사가 예정돼 있는 상황이어서 그의 글은 실향민들의 가슴을 울렸다. ―북녘의 고향에 가보고 싶다고 하셨는데 고향의 가족에 대한 기억은 어떠신지요. “나는 평안북도 운산군에서 태어났고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 송산리에서 성장했어요. 북한에 누님과 누이동생, 사촌이 있는데 저쪽에서 내가 반공주의자라는 것을 알고 있어 만나는 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 한번도 이산가족 상봉신청을 하지 않았어요.” 그의 표정엔 고향에 대한 그리움뿐만 아니라 1947년 월남한 이후 행방을 모르고 살아온 가족에 대한 애틋함이 묻어났지만 이내 학자적 냉정함을 찾으며 얘기를 시작했다. 김 교수는 8·15 해방을 북한에서 맞고 2년여 북한체제를 경험한 뒤 1947년 월남했다. 이후 중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한 뒤 1954년 연세대에서 철학과 교수생활을 시작했다. 그가 철학자 겸 수필가로 이름을 날린 것은 1961년 ‘영원과 사랑의 대화’를 펴내면서부터다. 1960, 1970년대 문학평론가인 이어령 당시 이화여대 교수와 함께 베스트셀러 작가로 유명했는데 빼어난 수필을 쓸 수 있었던 비결에 대해 물으니 이렇게 얘기했다. “연세대에 오기 전에 중학교에 있었는데 내 꿈은 대한민국에서 제일 모범적인 사립학교를 한번 해보고 싶다는 거였어요. 그게 20대 후반의 내 목표였고 일찍이 중학교 교감도 됐지만 자의반 타의반 연세대로 오게 됐어요. 7∼8년 동안 정열을 갖고 가르쳤던 아이들을 만나보면 애들을 버리고 떠난 부모 같은 심정도 들고 해서 그 애들과 대학초년생들에게 뭔가 주고 싶어 ‘고독이라는 병’ ‘ 영원과 사랑의 대화’를 쓴 것입니다. 특히 ‘영원과 사랑의 대화’는 1961년 여름 미국으로 교환교수로 가기 전 서문을 써주고 갔는데 이듬해 귀국해서 보니 제가 그 책 덕분에 많이 유명해졌더군요.” 1960년대 초 발간된 그의 철학 에세이를 읽은 독자들은 이제 50, 60대 장년층이 됐다. 10년 전 그가 울산으로 강연을 갔을 때 초로의 신사가 다가와서 “선생님께서 우리의 20대 젊은 시절을 키워주셨어요”라며 감격스러운 표정을 짓고 울먹인 일도 있다. “제 책의 독자들은 60대가 제일 많습니다. 지금도 강연을 하면 내게 인사하러 오는 사람들이 대부분 이분들이죠.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그때 받은 영향이 큰 것 같아요. 나나 안병욱 선생이나 그런 것까지는 생각하지 못하고 글을 썼지만 그 시대(1960∼1970년대)엔 우리의 글이 필요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의 글은 인간 존엄성과 가치관, 영원한 것에 대한 추구 등 실존적인 문제에 대한 것이 대부분이지만 그는 박정희 정권 때 안전기획부에 끌려가 조사도 받았고, 전두환 정권 때엔 강연이 취소된 적도 있다. “박정희 정권 때 학생들이 강연을 해달라고 해서 김찬국 연세대 신학과 교수와 함께 나섰는데 나는 ‘자유의 조건’을 강연 제목으로 제시했어요. 그런데 기관원들이 와서 ‘자유’를 주제로 한 얘기는 곤란하다며 방해해 강연 자체가 취소된 적이 있어요. 나는 그때 사회적 현실에서 역사를 바꾸는 자유는 투쟁만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죠. 이성적 사고를 할 줄 아는 사람만이 자유를 말할 수 있고 누릴 수 있다는 게 핵심내용이었는데 기관원들의 공작으로 불발됐어요.” 그는 박정희 시대 젊은이들에게 영향을 준 대중의 철학자로 유명하다. 그가 1985년 9월 연세대에서 정년퇴직할 때 고별강연을 했는데 그날은 마침 대규모 시위가 예정된 날이었다. 학교측은 시위 때문에 강연을 미룰 것을 검토했으나 김 교수는 강연을 강행했다. 그런데 데모를 하던 학생들이 시위 도중 하나둘씩 강의실로 들어왔고 강연장은 이내 최루탄 범벅이 된 채 입장한 학생들로 가득 찼다. 그런 상황에서 김 교수는 고별강연을 했다. 그는 당시 상황을 회고하며 “내가 연세대에서 잘못 살지 않았구나 싶어 고맙게 생각됐다”고 말했다. 그는 늘 가치지향적이고 추상적인 언어로 자유의 중요성을 얘기했을 뿐 1970, 1980년대 참여지식인들처럼 투쟁적인 언어로 정권을 직접적으로 비판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날 인터뷰에선 우리 역사 속에서 박정희-전두환 정권의 위상에 대해 분명한 어조로 얘기했다. “나는 일제강점기 때 유년기를 보내고 20대에 해방을 맞으며 6·25와 4·19, 5·16을 거치며 살아왔지만 대한민국에서 제일 슬펐던 때는 역시 박정희 정권의 10월 유신 때부터 전두환 정권이 6·29선언을 하기 전까지입니다. 다시는 우리 역사에서 그 같은 암흑기가 반복돼서는 안됩니다. 그때 저는 조용히 살았지만, 하룻밤도 편안하게 잠들지 못했습니다. 특히 전두환 정권 때에는 지성인까지 침묵을 지키면 안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많이 하면서 늘 불안한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역사의 암흑기였던 전두환 시대가 끝날 즈음 그는 대학강단을 떠났고 이후 20여년이 흘렀다. 그는 요즘 고민이 뭐냐는 질문에 대해 “민족의 앞날에 대해 많이 걱정한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1950년대에는 여러 가지 어렵다고 해도 인생이 뭐냐, 가치관이 뭐냐를 추구하며 살았고, 박정희 시대 후반기부터는 사회문제에 관심을 많이 쏟았습니다. 그런데 민주화한 이후 요즘 우리 사회는 많은 부분에서 자리가 잡혀가지만 좌우 대립은 여전한 듯합니다. 지금은 자유와 평등보다 높은 것, 진보와 보수보다 높은 것이 필요합니다. 고당 조만식 선생 추모 강연 때도 얘기했지만 선진국에선 보수와 진보의 갈등이 이미 다 끝났습니다. 보수가 열린 사회로 가면 지지하고, 진보가 닫힌 사회로 가면 반대해야 합니다. 소련은 좁은 사회를 추구하다 망했고, 북한도 마찬가지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우리에겐 열린 사회가 필요합니다.” 평생 자유로운 지성으로 살고 싶었다는 그는 “젊은 세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열린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며, 그래야 우리 민족의 길이 열릴 수 있다”며 강의와 같은 긴 대화를 마쳤다. 인터뷰 = 이미숙 정치부 차장
840 후리수양관 찾아오는 길 파일
[레벨:20]서진우
36 2010-11-02
839 no image 11-12월호 일용할 양식 책자 일부 제목 변경 안내입니다.
[레벨:20]하여진
22 2010-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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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0]서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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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0]인금철
75 2010-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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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0]서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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