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성경읽기선교회 관악5부

번호 제목 닉네임 조회 등록일
695 no image [공지] UBF 50주년 기념 노랫말 공모
[레벨:20]인금철
33 2010-08-31
694 no image 가을수양회 프로그램 의견 [2]
[레벨:20]인금철
57 2010-10-04
693 no image 호킹의 이론, 어떻게 볼 것인가? [2]
[레벨:20]인금철
67 2010-11-17
어떠한 관점으로 이 시대 사상을 볼 것인가 생각하게 해 주는 글이라서 추천을 받아 올려 봅니다. -------------------------------------------------------------------------------------- 장애를 지닌 무신론 과학자 스티븐 호킹 ‘우주는 신이 창조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창조 되었다’고 주장했다 하여 매스컴과 교계의 파문을 일으킨 스티븐 호킹(1942- )과 레오나르도 믈로디노프(미 캘리포니아 공과대 물리학)의 공저 ‘위대한 설계(The Grand Design)’가 최근 우리말로도 번역이 되어 나왔다. 스티븐 호킹(Stephen William Hawking)은 영국의 이론물리학자이다. 즉 관측과 실험을 요구하는 학자가 아니다. 단지 이론과 수학으로 우주를 바라본다. 호킹이 노벨상 수상자가 되지 못하고 늘 논란이 많은 것도 이런 이론물리학자의 특성이 반영된 점이 있다. 호킹은 1959년 영국 명문 옥스퍼드 대학에 입학하여 재학 중, “물리학 문제는 어떤 것이든 계산하기도 전에 풀어버렸다”고 호킹의 지도교수가 회고하는 것으로 보아 일찍부터 뛰어난 두뇌를 가진 수재였음이 분명하다. 그의 아버지도 과학자였다. 아버지가 영국 국립의학연구소에서 열대병을 연구하는 생물학자였으니 과학적 재능은 일찍 타고난 듯하다. 이 모든 배경이 그의 육체적 장애와 더불어 호킹의 명성을 크게 높이는 상승 작용을 하였을 것이다. 호킹은 사실 이미 과거에도 그가 믿는 신이란 정통적 신개념이 아님을 늘 말하고 있었다. 즉 호킹이 불신자라는 것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제 와서 이렇게 온통 언론이 다시 호들갑을 떠는 것일까? 출판사의 교묘한 홍보 전략 다름이 아니다. 10년 만에 그의 새 책이 출간되었다. 출판사의 목표란 신(神)이 존재 유무가 중요한 게 아니다. 오직 책이 계획만큼 많이 팔려야 한다. 출판사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엇이든 이슈가 될 만한 것은 끄집어내어 언론의 관심을 끌어야 한다. 출판사의 생존이 달린 문제이다. 관측과 실험이 불가능하고 딱딱하고 어려운 이론물리학자의 주장은 독자들에게 관심도 덜하고 조금 신선감이 떨어진다. 우주물리학적 교양도서라는 것은 심지어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수많은 대학자들의 책도 팔리지를 않는다. 호킹은 1987년 출판된 자신의 책 서문에서 스스로 누군가 자기에게 “당신이 책에서 방정식 하나 사용할 때마다 책 매상이 절반씩 줄어들 거라”고 충고했다는 에피소드는 과학 도서를 팔기 위한 치열한 고심의 흔적을 보여준다. 이런 고민을 뚫고 무엇이든 독자들에게 충격을 주고 호기심을 불어넣어야 한다. 호킹이 장애를 가진 의지의 과학자라는 것도 세상에 너무 잘 알려진 사실이다. 좀 더 세상을 향한 강력한 레토릭이 필요하다. 21세기는 종교와 과학의 시대이다. 탁월한 장애인 과학자가 신이 없다고 외치는 것은 영원히 리바이벌해서 써먹을 만한 주제이다. 이미 그것은 호킹과 같은 옥스퍼드 출신이고 한 살 차이인 리처드 도킨스(1941- )가 여러 번 활용하여 그 파급력을 확인한 바 있다. 필자가 볼 때 이번 일은 조금 유치하게 보인다. 호킹은 출판사 판매량 제고를 위한 슬픈 언론의 도구가 되어 버렸다. 신이 없다는 것을 증거하려고 겨우 자신의 작은 머리와 이론물리학을 가지고 무신론의 틈새를 메꾸려는 노학자의 애쓰는 모습이란 얼마나 안쓰럽고 처량한가? 하지만 출판사는 지금 쾌재(快哉)를 부르고 있을 것이다. 예상대로 이 책은 10월 7일 미국에서 출간되자마자 단번에 아마존의 베스트셀러 1위 자리에 올랐기 때문이다. 호킹은 ⌜시간의 역사⌟를 쓸 때에는 자신이 믿지도 않는 신(神)의 마음을 조심스럽게 탐구하는 듯한 레토릭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었다. 이번에는 반대로 신에 대한 반감과 강한 부정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모은 것이다. 리처드 도킨스는 대단히 전투적인 무신론자이다. 그의 논지는 한 마디 한 마디가 단순하지가 않다. 오랜 시간 치열하고 집요하게 무신론을 주창하여 왔다. 그에 비하면 사실 호킹은 훨씬 소박한(?) 무신론자이다. 주변에서 흔히 보는 무신론 과학자 가운데 한 사람일 뿐이다. 다만 조금 알려진 과학자요 장애를 가진 특성으로 인해 사람들의 관심을 좀 더 끄는 과학자일 뿐이다. 해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이론물리학 자체가 늘 잠정적이므로 무신론과학자로서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다. 더구나 난해해도 그 주장을 증거하거나 반증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호킹도 사람이다. 스티븐 호킹의 주장- 그도 황당한 실수를 하는 사람일 뿐이다 호킹은 1985년 “우주가 수축하게 되면 시간의 화살도 반전(反轉)한다”는 아주 과감한 주장을 폈다. 물론 호킹의 실수였다. 일본을 여러 번 방문한 호킹이 첫 방문 때 교토(京都)에서 열린 ‘양자 중력과 우주론’에 관한 국제회의에서 “우주가 수축할 때에 열역학적 시간의 화살은 반전한다”고 자신만만하게 했던 주장이었다. 시간이 정말 거꾸로 갈 수 있을까? 노인이 아이로 되돌아갈 수 있을까? 되돌아가서 과거의 부끄러운 것들이나 아쉬운 것들을 교정하거나 수선하고 올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떨어진 대학, 불합격한 입사 시험, 빗나간 탈선을 바꿔놓을 수 있다면 얼마나 통쾌할까? 교통사고로 다 망가져버린 자동차가 다시 조립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물론 그리 될 수 없다. 이것은 나중 호킹 스스로 인정한 ‘큰 실수’였다. 호킹의 주장은 엔트로피의 법칙을 아는 상식의 공학도나 물리학도라면 어안이 벙벙해지는 괴이한 억지 주장이었던 것이다. 호킹도 당연히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엉뚱한 실수를 할 줄 아는 한 명의 과학자일 뿐이다. 사람들과 언론은 일개 과학자의 주장에 너무 호들갑을 떠는 경향이 있다. 과학자도 일종의 미디어 스타가 된지 오래이다. 우리는 황우석 박사 논문 조작 사건에서 이미 그 폐단을 확인하여 왔지 않은가! 이번에 나온 책은 무슨 대단한 논문이 아니다. 우주를 설명하는 단순한 교양 과학도서이다. 노벨상 수상자도 아닌 검증되지 않고 단순히 미디어에 노출된 과학자가 주장한 책을 누가 사볼까? 이번 호킹 박사의 책도 이미 그의 10년 전 저서에서 생각했던 것들을 조금 진전시킨 리바이벌일 뿐이다. 호킹은 철학은 죽었다고 하면서 자신은 다분히 과학과 철학을 넘나드는 주장을 편다. 저자 자신들은 “과학사의 전환점”에 점근했다고 자화자찬을 한다. 이제 물리이론의 목표와 조건에 대해 생각을 바꾸라고 독자들을 재촉한다. 그러나 정통 물리학과 철학과 수학을 전공한 이 책의 번역자조차 “전통과학자들이 보기에 호킹의 시도는 충분히 이단적”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책 판매를 위한 교묘한 전략에 너무 요란하게 반응하였다. 이렇게 사람들은 순진하다. 출판업자에게 말려든 것이다. 이 책에서 호킹은 양자이론을 가지고 우주는 하나의 역사를 가진 것이 아니라 모든 가능한 역사들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며 “다중우주(multiverse)"를 예측하고 있다. 우리가 보는 우주는 다수의 우주들 중의 하나에 불과하며 “무”(無, nothing)에서 자연발생한 것이라 주장한다. 또한 플라톤과 뉴턴과 아인시타인을 넘어 자연의 4가지 힘과 숱한 물리적 상수들의 값을 종합적으로 설명하는 단일한 이론의 모델로 자신의 M이론(M-theory)을 내세운다. 호킹은 M이론을 통상적 의미의 이론이 아니라 다양한 이론들의 집합 전체를 말하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사실 이것은 다분히 과학철학적 시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킹은 이론물리학자 답지 않게 과학철학자들과 철학자들에 대해 반감이 많은 과학자로 알려져 있다. 이번 자신의 책에서도 호킹은 ‘철학은 이제 죽었다’고 말한다. 철학이 현대과학의 발전, 특히 물리학의 발전을 따라잡지 못했다고 격앙되어 말한다. 과학철학자들은 호킹의 이런 글을 읽으면 과연 무어라 말할까? 그냥 빙그레 웃을 것이다. 대화하기 싫은 것이다. 호킹은 참철학의 의미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이다. 그것은 역설적으로 호킹이 그만큼 과학철학자들의 비판에 노출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과학철학자들의 비판에 노출되었다는 것은 호킹의 사색과 독서폭이 그리 넓지 않다는 것을 반증한다. 이론물리학은 사실 그 원조가 철학이다. 이오니아의 밀레투스에서 시작된 서양 철학의 출발은 자연학(physica)이었다. 학문은 정교하다. 과학철학은 수천 년 동안 정교하게 정립된 학문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함부로 철학이 죽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과학철학을 애써 외면하면서 이론물리를 전개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는 뜻이다. 설령 철학이 죽는 다고 신이 죽지 않는다. 실은 철학도 펄펄 살아있고 하나님도 우주라는 유한(有限)의 바깥에서 웃고 계실 것이다. 유한(有限)이 어떻게 무한(無限)을 담을 수 있단 말인가? 유한한 호킹은 무한하신 하나님이 창조하신 시간 한줌, 바람 한줌, 공기 한줌도 자신의 머리 속에 담을 수 없는 것이다. 호킹의 우주론은 여전히 아직 낯선 학문에 불과하다. 뉴턴과 아인시타인조차 정밀한 과학적 평가를 받은 것처럼 호킹에게도 많은 학자들의 신랄한 비판이 기다리고 있다. 실은 호킹의 주장은 이론물리학자들에게도 아직은 익숙하지 않은 잘 정리되지 않는 수긍하기 어려운 주장에 불과하다. 그래서 과학철학자들은 호킹을 유명론자(唯名論者)라든가, 개념 도구주의자, 실증주의자, 실재론자 등으로 각각 다르게 부르고 있다. 유명론과 실재론과 실증론은 서로 상이하거나 상반된 입장임에도 호킹이 이렇게 다양한 입장을 가진 사람으로 불려진다는 것은 그의 학문적 입장이 얼마나 다분히 철학적이고 또한 정돈되지 않았는 가를 나타낼 뿐이다. 1962년 의사로부터 여명이 2,3년밖에 남지 않았다는 진단을 받고도 초인적인 활약을 해온 의지의 과학자 호킹이었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이 탁월한 과학자 호킹이 이제 얼마 남겨두지 않은 말년의 기간 동안 자신이 최고라는 생각을 조용히 내려놓고 이번 책 출간을 계기로 조금 깊은 사색과 독서의 시간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호킹 못지않은 신실한 과학자들은 허다하다 28세에 실명한 천재 수학자 오일러는 눈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서도 500여 편이 넘는 논문과 책을 썼다. 최근 스위스 역사학자들의 확인에 따르면 그가 남긴 연구 자료의 총량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 넘어 대형 트럭 한 대 분량을 훨씬 넘는 양이었다. 그는 호킹 같은 학자는 비교도 되지 않는 대학자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칼뱅파 목사였던 아버지의 바람대로 정규적으로 교회서 설교를 하는 경건한 삶을 살았다. 이런 경건한 과학자들은 무신론 과학자보다 훨씬 많았다(본 창조신학연구소 홈피 참조). 영국 왕립연구소장을 지낸 수전 그린필드 옥스퍼드 링컨대학 교수는 최근 BBC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과학이 (일부 학자들의) 오만에 의해 종종 시달린다”며 영국의 과학자요 신실한 교회 장로였던 마이클 패러데이(1791~1867)를 인용,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사람만큼 무서운 것은 없다”고 지적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위대한 사람의 위대한(?) 착각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역사상 큰 불상사를 가져올 수 있다. 시간 연구의 원조, 성 어거스틴 아인시타인과 호킹이 시간을 연구하기 이미 오래 전, 이들 두 과학자보다 더 깊은 연구와 사색과 기도로 ‘시간’의 신비를 연구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성 어거스틴이다. 호킹은 시간 연구의 권위자요 평생 시간을 붙들고 산 과학자다. 호킹도 자신의 책(A Brief History of Time)에서 어거스틴의 시간 연구를 얼핏 다루고 있다. 이제 이 호킹이 인생의 말년에 시간 연구의 대선배 어거스틴이 찾아낸 ‘시간 밖에 존재하며 시간에 구속되지 않으시는 분’(벧후 3:8)을 꼭 만났으면 한다. 조덕영 박사<창조신학연구소www.kictnet.net 소장>
692 no image 기도의 사람, 링컨 [2]
[레벨:20]인금철
71 2010-09-30
Chicago의 Grace Lee 선교사님이 이메일로 보내 주신 글인데, 은혜가 되어 올려 봅니다. --------------------------------------------------------------------------------------------------------- 기도의 사람-아브라함 링컨 10세 어머니의 죽음 20세 사랑하는 누나의 죽음 23세 사업 실패 24세 주의원 의원 낙선 25세 사업 실패 27세 약혼자 죽음 30세 의회 의장직 낙선 32세 대통령 선거 위원 낙선 36세 하원 의원 공천 탈락 42세 사랑하는 다섯 살 난 아들 죽음 47세 상원의원 낙선 48세 부통령 낙선 50세 상원의원 낙선 53 세 열 두살 아들의 죽음 인생의 모든 시간들이 불행이 따라다닌 사람 그 의 이름은 아브라함 링컨이다. 링컨의 전기 작가는 그에대해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 하나님께서는 링컨에게 위대한 사람이 될 만한 조건은 한가지도 주시지 않으셨다. 다만 가난과 훌륭한 신앙의 어머니만을 주셨을 뿐이다." 링컨은 말했습니다. "사단은 내가 실패할 때 마다 '이제 너는 끝장이다'라고 속삭였어요. 그러나 하나님은 내가 실패할 때 마다 '이번 실패를 거울 삼아 더 큰일에 도전하라'고 하셨습니다. '포기하고 좌절하기를 바라는 사단의 속삭임보다 뒤를 보지 말고 전진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였지요. 그리고 너머진 자리에서 실패의 원인을 분석하는 지혜를 하나님께 구했습니다." 아브라함 링컨 그는 거듭되는 실의와 불행을 통하여 겸손과 인내와 강한 믿음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링컨은 성경의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어려서 부터 어머니의 기도소리에 친근해 있었던 링컨은 대통령이 되어서도 기도하는 일을 매우 소중하게 생각했습니다. 아침이면 기도로 영혼의 호흡을 시작했으며 저녁이면 커튼을 닫듯이 기도로 하루의 일과를 마감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이야 말로 다른 어떤 일 보다 우선되는 일이며 많은 것을 이룰 수 있는 도구라고 믿었고 그의 믿음대로 기도의 많은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그 중 노예 해방을 위한 남북 전쟁 때의 이야기입니다. 막강한 지휘관들이 모두 남부 연합을 이끌었습니다. 유능한 지휘관의 부족으로 북군은 남군에게 계속적으로 패하고 있었습니다. 그로 인하여 민심은 분열되었으며 일부의 주에서는 탈퇴의 기미가 보였고 극단 주의 자들의 견해 속에서 링컨은 현명하게 균형을 유지해야만 했습니다. 거듭되는 패전의 소식 속에서 링컨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도우심과 지혜를 간구 했습니다. 오직 북군에게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는 기도 밖에 없었습니다. 링컨 대통령은 쉬지 않고 기도했으며 그의 간절한 기도는 자신과 전 국민의 금식 기도로 이어졌습니다. 전쟁의 승패가 사람의 지혜나 군사의 수나 무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움의 손길에 달려 있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드디어 북군의 승리의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대통령 각하, 이제 아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 북군의 편이십니다." 그말을 들은 링컨이 대답했습니다. "오직 나의 염려는, 내가 하나님 편에 서 있는가 하는 것일세.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서 있기만 하면, 언제나 하나님은 우리 편이 되어 주신다네. 하나님께서는 성경의 다윗을 통해서 내게 그 사실을 깨우쳐 주셨네." 이처럼 링컨은 아무리 어려운 상황일지라도 하나님 편이 되길 소원했고 하나님의 기쁨이 되길 바랬습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삶을 책임져 주실 것이라고 굳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링컨은 날마다 겸손히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며 자신을 하나님께 굴복시켰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링컨의 마음을 아셨고 그의 마음을 받아 주셨으며 그의 편이 되어 주셨습니다. 링컨의 생애는 수많은 슬픔과 실패의 연속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링컨의 생애를 통하여 하나님을 의지하며 순종하는 한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볼 때 어쩌면 링컨, 그는 고통과 슬픔의 세월로 생애의 많은 시간을 허무하게 보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처음과 끝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링컨은 하나님의 큰일을 맡길 수 있는 귀하고 큰 그릇이었습니다. 그가 하나님께 끝까지 순종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밤늦은 야경에도 백악관에서는 하나님께 향한, 겸손하고 간절한 기도의 흐느낌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런 링컨의 모습을 모았던 그의 부하들은 대통령에게 더욱 충성하며 사랑을 다짐했습니다. 백악관을 기도실로 만든 아브라함 링컨 그의 삶은 하나님 앞에서 아름답고 빛나는 보석이었기에 우리의 영혼을 감동시킵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욥기 23:10)
691 no image [공지] 주일예배 및 새벽기도 환경 준비 순서 [1]
[레벨:20]인금철
75 2010-10-18
690 no image Paul Wong from Brunei
[레벨:20]인금철
44 2010-12-28
689 no image [유익한 정보](펌)
[레벨:20]인금철
49 2011-01-12
688 no image 드려요~~~ [2]
[레벨:20]인금철
63 2011-03-22
687 no image 어린이날 봉사활동 갑니다~~
[레벨:20]인금철
44 2011-04-30
686 no image Summer school 의견 올려 주세요~~ [8]
[레벨:20]인금철
74 2011-05-27
685 no image 용서 [2]
[레벨:20]인금철
73 2011-06-23
이 시는 시카고의 왕요셉(국진) 선교사님이 지었습니다. 저는 학생 때 잠시 선교사님을 뵌 적이 있습니다. 그는 과거 교통사고로 죽은 형을 보며 죽음의 권세에 시달리다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말로만 들었는데, 이번에 시를 통해 얽힌 아픔과 은혜를 풀어낸 것을 통해 은혜를 받고 올립니다. ------------------------------------------- 22살 청년이 마지막 숨을 가쁘게 몰아 쉬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힘없이 떨구며 마지막을 고하였습니다. 지난 15일간 죽음과 사투를 벌였지만 그는 결국 살아 돌아 오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삼일 후 그는 눈 꽃처럼 하얀 재가 되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어르신의 아들을 죽인 택시기사랍니다. 죽을 죄를 졌습니다, 어르신' 며칠 후 한 남자가 서울서 먼 경사도 시골까지 찾아와 그 아들 잃은 아비에게 털석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하고 있습니다. '휴~우'하는 땅이 꺼질 듯한 한숨, 먼 산만 바라보며 그 아비는 아무 말이 없습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가해자의 방문에 심경이 정리가 되질 않는 모양입니다. '니도 아~들(아이들) 있나?' 긴 침묵을 깨고 그 아비가 사내에게 묻습니다. '예, 세 살 딸하고, 한 살난 아들 놈이 있습니다, 어르신' '그래, 니 부러(일부러) 그랬겠나. 죽은 놈은 죽은 기고 고 핏덩이들은 살아야 않컷나.' 잠시 후, 그 아비는 '처벌불원'(處罰不願)이라고 쓴 탄원서 썼습니다. '고만 일어나거라, 됐다. 니가 그러고 있으면 고 핏덩이들은 누가 먹여 살리노'하며 연신 눈물로 용서를 구하는 사내의 등에 탄원서를 들려 주며 그의 등을 떠밀어 보냈습니다. 저 만치서 연신 허리구부려 인사하는 사내를 향하여 어여 가라고 손짓하며 그 아빚는 걱정스레 중얼거립니다. '아이고, 니도 눈에 밝혀 갖고(사고 장면이 눈에 아른거려서) 운전하기 쉽지 않을텐데, 빨리 잊어뿌고, 잘 살아. 고 어린 것들이 무슨 죄가 있노' ~~~~~~~~~~~~~~~~~~~~~~~~~~~ 묘지 앞에 올 해도 한다발의 꽃이 놓여 있습니다. 누군가 10년이 넘게 한 해도 빠짐없이 현충일 날 우리 가족 앞서 형에게 헌화를 하고 간 것입니다. 올 해도 그 꽃다발이 놓여 있을런지 알 길이 없습니다. 20여년 전 미국으로 선교사로 온 후 한 번도 형의 묘지를 가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꽃이 있고 없고 저에게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늘도 운전을 하며 택시가 끼어들어도, 새치기를 하여도 화가 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제 마음 속으로 기도합니다. '어서 어서 손님들 많이 많이 실어 나르시고 열심히 핏덩이들 먹여 살리시구려.' 그 택시기사님이 시카고에서 운전할리가 없는데도... 이제 세월이 흘러 그 기사님의 아이들이 결혼하여 고사리같은 손들의 부모가 되었을 나이입니다. 삶은 그렇게 이어져야 하는 것이지요. 서로 용서하면서...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공부하던 중에 떠오른 그림 - 용서, 왕요셉~~)
684 Blessing 학생 소감 모임~ 파일 [3]
[레벨:20]인금철
69 2011-10-01
683 no image Team Spirit Training 일정표 [1]
[레벨:20]인금철
54 2011-08-15
682 no image 스티브 잡스 스탠포드 대학 졸업 연설 [6]
[레벨:20]인금철
95 2011-10-09
스티브 잡스는 자신의 사생활을 좀처럼 얘기하지 않는 사람으로 유명한데, 스탠포드 대학 졸업 연설에서 거의 처음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공개했다고 합니다. 인생에 대해, 특히 최고의 자리에 오른 한 사람의 고백을 통해 삶과 죽음을 좀 더 생각하게 됩니다. 구원 얻은 나의 하루 하루를 어떻게 살아야 할까? 우리의 삶을 통하여 IT 혁명을 통한 편리함 대신 하나님 나라 혁명을 통한 구원과 영생을 소망해 봅니다. --------------------------------------------------------------------------------------------------------------------------------------- <스티브잡스 2005 스탠포드 졸업식 연설> I am honored to be with you today at your commencement from one of the finest universities in the world. 먼저 세계 최고의 명문으로 꼽히는 이곳에서 여러분들의 졸업식에 참석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I never graduated from college. Truth be told, this is the closest I've ever gotten to a college graduation. 저는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습니다. 태어나서 대학교 졸업식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것은 처음이네요. Today I want to tell you three stories from my life. That's it. No big deal. Just three stories. 오늘, 저는 여러분께 제가 살아오면서 겪었던 세 가지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별로 대단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딱 세가지만요 The first story is about connecting the dots. 먼저, 인생의 전환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I dropped out of Reed College after the first 6 months, but then stayed around as a drop-in for another 18 months or so before I really quit. 전 리드 칼리지에 입학한지 6개월 만에 자퇴했습니다. 그래도 일 년 반 정도는 도강을 듣다, 정말로 그만뒀습니다. So why did I drop out? 왜 자퇴했을까요? It started before I was born. My biological mother was a young, unwed college graduate student, and she decided to put me up for adoption. 그 것은 제가 태어나기 전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제 생모는 대학원생인 젊은 미혼모였습니다. 그래서 저를 입양보내기로 결심했던 거지요. She felt very strongly that I should be adopted by college graduates, so everything was all set for me! 그녀는 제 미래를 생각해, 대학 정도는 졸업한 교양있는 사람이 양부모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to be adopted at birth by a lawyer and his wife. 그래서 저는 태어나자마자 변호사 가정에 입양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Except that when I popped out they decided at the last minute that they really wanted a girl. 그들은 여자 아이를 원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So my parents, who were on a waiting list, got a call in the middle of the night asking: 그들 대신 대기자 명단에 있던 양부모님들은 한 밤 중에 걸려온 전화를 받고 : "We have an unexpected baby boy; do you want him?" "어떡하죠? 예정에 없던 사내아이가 태어났는데, 그래도 입양하실 건가요?" They said: "Of course." "물론이죠." My biological mother later found out that my mother had never graduated from college and that my father had never graduated from high school. 그런데 알고 보니 양어머니는 대졸자도 아니었고, 양아버지는 고등학교도 졸업 못한 사람이어서 She refused to sign the final adoption papers. 친어머니는 입양동의서 쓰기를 거부했습니다. She only relented a few months later when my parents promised that I would someday go to college. 친어머니는 양부모님들이 저를 꼭 대학까지 보내주겠다고 약속한 후 몇개월이 지나서야 화가 풀렸습니다. And 17 years later I did go to college. 17년 후, 저는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But I naively chose a college that was almost as expensive as Stanford, 그러나 저는 멍청하게도 바로 이 곳, 스탠포드의 학비와 맞먹는 값비싼 학교를 선택했습니다.^^ and all of my working-class parents' savings were being spent on my college tuition. 평범한 노동자였던 부모님이 힘들게 모아뒀던 돈이 모두 제 학비로 들어갔습니다. After six months, I couldn't see the value in it. 결국 6개월 후, 저는 대학 공부가 그만한 가치가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I had no idea what I wanted to do with my life and no idea how college was going to help me figure it out. 내가 진정으로 인생에서 원하는 게 무엇인지, 그리고 대학교육이 그 것에 얼마나 어떻게 도움이 될지 판단할 수 없었습니다. And here I was spending all of the money my parents had saved their entire life. 게다가 양부모님들이 평생토록 모은 재산이 전부 제 학비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So I decided to drop out and trust that it would all work out OK. 그래서 모든 것이 다 잘 될 거라 믿고 자퇴를 결심했습니다. It was pretty scary at the time, but looking back it was one of the best decisions I ever made. 지금 뒤돌아보면 참으로 힘든 순간이었지만, 제 인생 최고의 결정 중 하나였던 것 같습니다. The minute I dropped out I could stop taking the required classes that didn't interest me, 자퇴를 하니 평소에 흥미 없던 필수과목 대신 and begin dropping in on the ones that looked interesting. 관심 있는 강의만 들을 수 있었습니다. It wasn't all romantic. I didn't have a dorm room, so I slept on the floor in friends' rooms, 그렇다고 꼭 낭만적인 것만도 아니었습니다. 전 기숙사에 머물 수 없었기 때문에 친구 집 마룻바닥에 자기도 했고 I returned coke bottles for the 5¢ deposits to buy food with, 한 병당 5센트씩 하는 코카콜라 빈병을 팔아서 먹을 것을 사기도 했습니다. and I would walk the 7 miles across town every Sunday night to get one good meal a week at the Hare Krishna temple. 또 매주 일요일, 맛있는 음식을 먹기 위해 7마일이나 걸어서 헤어 크리슈나 사원의 예배에 참석하기도 했습니다. I loved it. And much of what I stumbled into by following my curiosity and intuition turned out to be priceless later on. 맛있더군요.^^ 당시 순전히 호기와 직감만을 믿고 저지른 일들이 후에 정말 값진 경험이 됐습니다. Let me give you one example: 예를 든다면 Reed College at that time offered perhaps the best calligraphy instruction in the country. 그 당시 리드 칼리지는 아마 미국 최고의 서체 교육을 제공했던 것 같습니다. Throughout the campus every poster, every label on every drawer, was beautifully hand calligraphed. 학교 곳곳에 붙어있는 포스터, 서랍에 붙어있는 상표들은 너무 아름다웠고요. Because I had dropped out and didn't have to take the normal classes, 어차피 자퇴한 상황이라, 정규 과목을 들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I decided to take a calligraphy class to learn how to do this. 서체에 대해서 배워보기로 마음먹고 서체 수업을 들었습니다. I learned about serif and san serif typefaces, about varying the amount of space between different letter combinations, about what makes great typography great. 그 때 저는 세리프와 산 세리프체를 배웠는데, 서로 다른 문자끼리 결합될 때 다양한 형태의 자간으로 만들어지는 굉장히 멋진 글씨체였습니다. It was beautiful, historical, artistically subtle in a way that science can't capture, and I found it fascinating. '과학적'인 방식으로는 따라 하기 힘든 아름답고, 유서 깊고, 예술적인 것이었고, 전 그 것에 흠뻑 빠졌습니다. None of this had even a hope of any practical application in my life. 사실, 이 때만해도 이런 것이 제 인생에 어떤 도움이 될지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But ten years later, when we were designing the first Macintosh computer, it all came back to me. 그러나 10년 후 우리가 매킨토시를 처음 구상할 때, 그 것들은 고스란히 빛을 발했습니다. And we designed it all into the Mac. It was the first computer with beautiful typography. 우리가 설계한 매킨토시에 그 기능을 모두 집어넣었으니까요. 아마 아름다운 서체를 가진 최초의 컴퓨터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If I had never dropped in on that single course in college, 만약 제가 그 서체 수업을 듣지 않았다면 the Mac would have never had multiple typefaces or proportionally spaced fonts. 매킨토시의 복수서체 기능이나 자동 자간 맞춤 기능은 없었을 것이고 And since Windows just copied the Mac, its likely that no personal computer would have them. 맥을 따라한 윈도우도 그런 기능이 없었을 것이고, 결국 개인용 컴퓨터에는 이런 기능이 탑재될 수 없었을 겁니다. If I had never dropped out, I would have never dropped in on this calligraphy class, 만약 학교를 자퇴하지 않았다면, 서체 수업을 듣지 못했을 것이고 and personal computers might not have the wonderful typography that they do. 결국 개인용 컴퓨터가 오늘날처럼 뛰어난 인쇄술을 가질 수도 없었을 겁니다. Of course it was impossible to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when I was in college. 물론 제가 대학에 있을 때는 그 순간들이 내 인생의 전환점이라는 것을 알아챌 수 없었습니다. But it was very, very clear looking backwards ten years later. 그러나 1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모든 것이 분명하게 보입니다. Again, you can't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you can only connect them looking backwards. 달리 말하자면, 지금 여러분은 미래를 알 수 없습니다. : 다만 현재와 과거의 사건들만을 연관시켜 볼 수 있을 뿐이죠. So you have to trust that the dots will somehow connect in your future.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현재의 순간들이 미래에 어떤 식으로든지 연결된다는 걸 알아야만 합니다. You have to trust in something - your gut, destiny, life, karma, whatever. 여러분들은 자신의 배짱, 운명, 인생, 카르마(업?) 등 무엇이든지 간에 '그 무엇'에 믿음을 가져야만 합니다. This approach has never let me down, and it has made all the difference in my life. 이런 믿음이 저를 실망시킨 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제 인생의 고비 때마다 힘이 되워줬습니다. My second story is about love and loss. 두 번째는 사랑과 상실입니다. I was lucky I found what I loved to do early in life. 저는 운 좋게도 인생에서 정말 하고 싶은 일을 일찍 발견했습니다. Woz and I started Apple in my parents garage when I was 20. 제가 20살 때, 부모님의 차고에서 스티브 워즈니악과 함께 애플의 역사가 시작됐습니다. We worked hard, and in 10 years Apple had grown from just the two of us in a garage into a $2 billion company with over 4000 employees. 차고에서 2명으로 시작한 애플은 10년 후에 4000명의 종업원을 거느린 2백억 달러짜리 기업이 되었습니다. We had just released our finest creation - the Macintosh - a year earlier, and I had just turned 30. And then I got fired. 제 나이 29살, 우리는 최고의 작품인 매킨토시를 출시했습니다. 그러나 이듬해 저는 해고당했습니다. How can you get fired from a company you started? 내가 세운 회사에서 내가 해고 당하다니! Well, as Apple grew we hired someone who I thought was very talented to run the company with me, 당시, 애플이 점점 성장하면서, 저는 저와 잘 맞는 유능한 경영자를 데려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and for the first year or so things went well. 처음 1년은 그런대로 잘 돌아갔습니다. But then our visions of the future began to diverge and eventually we had a falling out. 그런데 언젠가부터 우리의 비전은 서로 어긋나기 시작했고, 결국 우리 둘의 사이도 어긋나기 시작했습니다. When we did, our Board of Directors sided with him. So at 30 I was out. And very publicly out. 이 때, 우리 회사의 경영진들은 존 스컬리의 편을 들었고, 저는 30살에 쫓겨나야만 했습니다. 그 것도 아주 공공연하게. What had been the focus of my entire adult life was gone, and it was devastating. 저는 인생의 촛점을 잃어버렸고, 뭐라 말할 수 없는 참담한 심정이었습니다. I really didn't know what to do for a few months. 전 정말 말 그대로, 몇 개월 동안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답니다. I felt that I had let the previous generation of entrepreneurs down - that I had dropped the baton as it was being passed to me. 마치 달리기 계주에서 바톤을 놓친 선수처럼, 선배 벤처기업인들에게 송구스런 마음이 들었고 I met with David Packard and Bob Noyce and tried to apologize for screwing up so badly. 데이비드 패커드(HP의 공동 창업자)와 밥 노이스(인텔 공동 창업자)를 만나 이렇게 실패한 것에 대해 사과하려했습니다. I was a very public failure, and I even thought about running away from the valley. 저는 완전히 '공공의 실패작'으로 전락했고, 실리콘 밸리에서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But something slowly began to dawn on me ? 그러나 제 맘 속에는 뭔가가 천천히 다시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I still loved what I did. The turn of events at Apple had not changed that one bit. 전 여전히 제가 했던 일을 사랑했고, 애플에서 겪었던 일들조차도 그런 마음들을 꺾지 못했습니다. I had been rejected, but I was still in love. And so I decided to start over. 전 해고당했지만, 여전히 일에 대한 사랑은 식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전 다시 시작하기로 결심했습니다. I didn't see it then, but it turned out that getting fired from Apple was the best thing that could have ever happened to me. 당시에는 몰랐지만, 애플에서 해고당한 것은 제 인생 최고의 사건임을 깨닫게 됐습니다. The heaviness of being successful was replaced by the lightness of being a beginner again, less sure about everything. 그 사건으로 인해 저는 성공이란 중압감에서 벗어나서 초심자의 마음으로 돌아가 It freed me to enter one of the most creative periods of my life. 자유를 만끽하며, 내 인생의 최고의 창의력을 발휘하는 시기로 갈 수 있게 됐습니다. During the next five years, I started a company named NeXT, another company named Pixar,and fell in love with an amazing woman who would become my wife. 이후 5년동안 저는 '넥스트', '픽사', 그리고 지금 제 아내가 되어준 그녀와 사랑에 빠져버렸습니다. Pixar went on to create the worlds first computer animated feature film, Toy Story, and is now the most successful animation studio in the world. 픽사는 세계 최초의 3D 애니메이션 토이 스토리를 시작으로, 지금은 가장 성공한 애니메이션 제작사가 되었습니다. In a remarkable turn of events, Apple bought NeXT, I retuned to Apple, and the technology we developed at NeXT is at the heart of Apple's current renaissance. 세기의 사건으로 평가되는 애플의 넥스트 인수와 저의 애플로 복귀 후, 넥스트 시절 개발했던 기술들은 현재 애플의 르네상스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And Laurene and I have a wonderful family together. 또한 로렌과 저는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습니다. I'm pretty sure none of this would have happened if I hadn't been fired from Apple. 애플에서 해고당하지 않았다면, 이런 엄청난 일들을 겪을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It was awful tasting medicine, but I guess the patient needed it. 정말 독하고 쓰디 쓴 약이었지만, 이게 필요한 환자도 있는가봅니다. Sometimes life hits you in the head with a brick. Don't lose faith. 때로 세상이 당신을 속일지라도, 결코 믿음을 잃지 마십시오. I'm convinced that the only thing that kept me going was that I loved what I did. 전 반드시 인생에서 해야할만 일이 있었기에, 반드시 이겨낸다고 확신했습니다. You've got to find what you love. And that is as true for your work as it is for your lovers. 당신이 사랑하는 일을 찾아보세요. 사랑하는 사람이 내게 먼저 다가오지 않듯, 일도 그런 것이죠. Your work is going to fill a large part of your life, '노동'은 인생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and the only way to be truly satisfied is to do what you believe is great work. 그런 거대한 시간 속에서 진정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은 스스로가 위대한 일을 한다고 자부하는 것입니다. And the only way to do great work is to love what you do. 자신의 일을 위대하다고 자부할 수 있을 때는, 사랑하는 일을 하고있는 그 순간 뿐입니다. If you haven't found it yet, keep looking. Don't settle. As with all matters of the heart, you'll know when you find it. 지금도 찾지 못했거나, 잘 모르겠다해도 주저앉지 말고 포기하지 마세요. 전심을 다하면 반드시 찾을 수 있습니다. And, like any great relationship, it just gets better and better as the years roll on. 일단 한 번 찾아낸다면, 서로 사랑하는 연인들처럼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욱 더 깊어질 것입니다. So keep looking until you find it. Don't settle. 그러니 그 것들을 찾아낼 때까지 포기하지 마세요. 현실에 주저앉지 마세요 My third story is about death. 세번째는 죽음에 관한 것입니다. When I was 17, I read a quote that went something like: 17살 때, 이런 문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If you live each day as if it was your last, someday you'll most certainly be right." 하루 하루를 인생의 마지막 날처럼 산다면, 언젠가는 바른 길에 서 있을 것이다 It made an impression on me, and since then, for the past 33 years! , 이 글에 감명받은 저는 그 후 50살이 되도록 I have looked in the mirror every morning and asked myself: 거울을 보면서 자신에게 묻곤 했습니다. "If today were the last day of my life, would I want to do what I am about to do today?"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지금 하려고 하는 일을 할 것인가? And whenever the answer has been "No" for too many days in a row, I know I need to change something. 아니오!라는 답이 계속 나온다면, 다른 것을 해야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Remembering that I'll be dead soon is the most important tool I've ever encountered to help me make the big choices in life.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명심하는 것이 저에게는 가장 중요한 도구가 됩니다. Because almost everything ? 왜냐구요? all external expectations, all pride, all fear of embarrassment or failure - 외부의 기대, 각종 자부심과 자만심. 수치스러움와 실패에 대한 두려움들은 these things just fall away in the face of death, leaving only what is truly important. '죽음' 앞에서는 모두 밑으로 가라앉고, 오직 진실만이 남기 때문입니다. Remembering that you are going to die is the best way I know to avoid the trap of thinking you have something to lose.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무엇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최고의 길입니다. You are already naked. There is no reason not to follow your heart. 여러분들이 지금 모두 잃어버린 상태라면, 더이상 잃을 것도 없기에 본능에 충실할 수 밖에 없습니다. About a year ago I was diagnosed with cancer. 저는 1년 전쯤 암진단을 받았습니다. I had a scan at 7:30 in the morning, and it clearly showed a tumor on my pancreas. 아침 7시 반에 검사를 받았는데, 이미 췌장에 종양이 있었습니다. I didn't even know what a pancreas was. 그전까지는 췌장이란 게 뭔지도 몰랐는데요. The doctors told me this was almost certainly a type of cancer that is incurable, and that I should expect to live no longer than three to six months. 의사들은 길어야 3개월에서 6개월이라고 말했습니다. My doctor advised me to go home and get my affairs in order, which is doctor's code for prepare to die. 주치의는 집으로 돌아가 신변정리를 하라고 했습니다. 죽음을 준비하라는 뜻이었죠. It means to try to tell your kids everything you thought you'd have the next 10 years to tell them in just a few months. 그 것은 내 아이들에게 10년동안 해줄수 있는 것을 단 몇달안에 다 해치워야된단 말이었고 It means to make sure everything is buttoned up so that it will be as easy as possible for your family. 임종 시에 사람들이 받을 충격이 덜하도록 매사를 정리하란 말이었고 It means to say your goodbyes. 작별인사를 준비하라는 말이었습니다. I lived with that diagnosis all day. 전 불치병 판정을 받았습니다. Later that evening I had a biopsy, where they stuck an endoscope down my throat, through my stomach and into my intestines, put a needle into my pancreas and got a few cells from the tumor. 그 날 저녁 위장을 지나 장까지 내시경을 넣어서 암세포를 채취해 조직검사를 받았습니다. I was sedated, but my wife, who was there, told me that when they viewed the cells under a microscope 저는 마취상태였는데, 후에 아내가 말해주길, 현미경으로 세포를 분석한 결과 the doctors started crying because it turned out to be a very rare form of pancreatic cancer that is curable with surgery. 치료가 가능한 아주 희귀한 췌장암으로써, 의사들까지도 기뻐서 눈물을 글썽였다고 합니다. I had the surgery and I'm fine now. 저는 수술을 받았고, 지금은 괜찮습니다. This was the closest I've been to facing death, and I hope its the closest I get for a few more decades. 그 때만큼 제가 죽음에 가까이 가 본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또한 앞으로도 가고 싶지 않습니다^^ Having lived through it, I can now say this to you with a bit more certainty than when death was a useful but purely intellectual concept: 이런 경험을 해보니, '죽음'이 때론 유용하단 것을 머리로만 알고 있을 때보다 더 정확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No one wants to die. Even people who want to go to heaven don't want to die to get there. 아무도 죽길 원하지 않습니다. 천국에 가고싶다는 사람들조차도 당장 죽는 건 원치 않습니다. And yet death is the destination we all share. No one has ever escaped it. 우리 모두는 언젠가는 다 죽을 것입니다. 아무도 피할 수 없죠. And that is as it should be, because Death is very likely the single best invention of Life. 삶이 만든 최고의 작품이 '죽음'이니까요. It is Life's change agent. It clears out the old to make way for the new. 죽음이란 삶의 또다른 모습입니다. 죽음은 새로운 것이 헌 것을 대체할 수 있도록 만들어줍니다. Right now the new is you, but someday not too long from now, you will gradually become the old and be cleared away. 지금의 여러분들은 '새로움'이란 자리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여러분들도 새로운 세대들에게 그 자리를 물려줘야할 것입니다. Sorry to be so dramatic, but it is quite true. 너무 극단적으로 들렸다면 죄송하지만, 사실이 그렇습니다. Your time is limited, so don't waste it living someone else's life. 여러분들의 삶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낭비하지 마십시오. Don't be trapped by dogma - which is living with the results of other people's thinking. 도그마-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 얽매이지 마십시오. Don't let the noise of other's opinions drown out your own inner voice. 타인의 잡음이 여러분들 내면의 진정한 목소리를 방해하지 못하게 하세요 And most important, have the courage to follow your heart and intuition.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과 영감을 따르는 용기를 가지는 것입니다. They somehow already know what you truly want to become. Everything else is secondary. 이미 마음과 영감은 당신이 진짜로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나머지 것들은 부차적인 것이죠. When I was young, there was an amazing publication called The Whole Earth Catalog, which was one of the bibles of my generation. 제가 어릴 때, 제 나이 또래라면 다 알만한 '지구 백과'란 책이 있었습니다. It was created by a fellow named Stewart Brand not far from here in Menlo Park, and he brought it to life with his poetic touch.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먼로 파크에 사는 스튜어트 브랜드란 사람이 쓴 책인데, 자신의 모든 걸 불어넣은 책이었지요. This was in the late 1960's, before personal computers and desktop publishing, so it was all made with typewriters, scissors, and polaroid cameras. PC나 전자출판이 존재하기 전인 1960년대 후반이었기 때문에, 타자기, 가위, 폴라노이드로 그 책을 만들었습니다. It was sort of like Google in paperback form, 35 years before Google came along: 35년 전의 책으로 된 구글이라고나 할까요. it was idealistic, and overflowing with neat tools and great notions. 그 책은 위대한 의지와 아주 간단한 도구만으로 만들어진 역작이었습니다. Stewart and his team put out several issues of The Whole Earth Catalog, and then when it had run its course, they put out a final issue. 스튜어트와 친구들은 몇 번의 개정판을 내놓았고, 수명이 다할 때쯤엔 최종판을 내놓았습니다. It was the mid-1970s, and I was your age. 그 때가 70년대 중반, 제가 여러분 나이 때였죠. On the back cover of their final issue was a photograph of an early morning country road, 최종판의 뒤쪽 표지에는 이른 아침 시골길 사진이 있었는데, the kind you might find yourself hitchhiking on if you were so adventurous. 아마 모험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히치하이킹/엄지들고 차를 유혹해서 빌려타며 여행하는 것/을 하고싶다는 생각이 들정도였지요. Beneath it were the words: "Stay Hungry. Stay Foolish." 그 사진 밑에는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 배고픔과 함께, 미련함과 함께 It was their farewell message as they signed off. Stay Hungry. Stay Foolish. 배고픔과 함께, 미련함과 함께. 그 것이 그들의 마지막 작별인사였습니다. And I have always wished that for myself. And now, as you graduate to begin anew, I wish that for you. 저는 이제 새로운 시작을 앞둔 여러분들이 여러분의 분야에서 이런 방법으로 가길 원합니다. Stay Hungry. Stay Foolish. 배고픔과 함께. 미련함과 함께. Thank you all very much. 고맙습니다.
681 no image 아버지의 장례식을 마치며 드리는 감사의 글 [5]
[레벨:20]인금철
79 2011-11-01
“데라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데라는 아브라함과 나홀과 하란을 낳고...데라는 나이가 이백 오세가 되어 하란에서 죽었더라”(창11:27,32)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나.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요14:1,2) 지난 4일간의 장례식을 치르며 슬픔을 소망과 기쁨으로 바꾸어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동역자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받은 바 은혜가 너무 크고 갚을 수 없는 빚을 진 것 같아 글로써나마 감사를 표하고자 합니다. 하나는, 육신의 아버지의 인생이 데라와 같은 삶이었음을 보게 하셔서 감사드립니다. 저의 아버지에게는 크게 2가지 고통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20여년 전 처음 뇌졸중으로 쓰러지시고 불편하게 사셨고, 지난 5월에 두 번째 뇌졸중으로 쓰러지신 후에는 전신이 마비되어 지난 6개월 가까이 대부분의 시간을 중환자실에서 보내었습니다. 이러한 육체적인 아픔 외에 자녀에게 바라던 인간적인 소망을 접어야 하는 아픔이 있었습니다. 장례식 기간 중 네 명의 누나들로부터 제가 목자생활 하기로 선언하였을 때, 큰 상처를 받았다고 얘기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하물며 아버지의 마음이야 어떠했을지 짐작이 갑니다. 그 때문인지 아버지는 예전에 살던 집 옆에 어느 날 세워진 작은 천막 교회에 잠시나마 나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세례도 받고 집사직분도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버지가 자녀를 통해 세상의 영광을 누리고 사람들로부터 잠간 좋은 소리 듣고 사는 대신에, 자녀를 하나님의 종으로 키우는 아픔과 수고를 감당하는 인생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당시에는 슬픔과 실망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아버지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낳고 키운 데라와 같이 믿음의 족보를 시작하는데 쓰임받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발인하기 전까지 수많은 주의 종들로부터 헌화와 기도를 받는 아버지를 보면서, 아버지가 감당한 아픔과 수고가 헛되지 않고 하나님이 영광스럽게 하셨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보며 제 자신을 비롯하여 이 땅의 부모들이 자녀를 하나님의 종으로 키우는 수고와 아픔을 감당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영광스럽고도 중요한 사명임을 보게 되었습니다. 또 하나는 저와 가족들에게 하늘 소망을 갖게 하신 것입니다. 저의 아버지는 6.25 전쟁에 참전했다가 오른팔에 총상을 입고 제대했습니다. 그러나 국가유공자 대상인 것을 모르고 아무런 혜택도 받지 못하다가, 작년 11월에야 어떤 분의 조언으로 느즈막히 국가유공자신청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6개월 정도 심사 후 7급 국가유공자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3일 후에 갑자기 뇌졸중으로 쓰러졌습니다. 아버지는 이후 대부분 중환자실에 있어야 했기 때문에 저의 집 형편으로는 사실 치료비를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국가유공자인 탓에 치료비의 대부분을 감면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크신 섭리의 손길이었습니다. 저는 이것을 생각하며 전신이 마비된 채 누워 있는 아버지를 소망 중에 섬길 수가 있었습니다. 의식이 있는지조차 확인할 수 없었지만, 귀가 살아 있음을 믿고 말씀과 기도로 섬겨드렸습니다. 사람이 고칠 수 없는 한계상황 앞에서 믿음이 없는 가족들이 겸손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아버지는 경련, 패혈증, 욕창 등의 질병과 심장, 신장, 폐 기능의 악화로 여러 번 생명의 위기를 맞곤 하였습니다. 이런 아버지를 생각할 때,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은 이 때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눅8:50) 말씀을 주시고, 아버지의 삶과 죽음보다도 죽음조차 이기신 예수님을 믿고 다만 두려워하지 말고 믿도록 제게 용기를 주셨습니다. 또 귀신 들려 경련하는 아이를 고쳐주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기도할 때 하나님은 경련을 잠잠케 하시고, 욥의 욕창을 치료하시고, 인간의 장부를 조직하신 하나님을 의지하여 기도할 때 그 전능하신 손길로 기적적으로 생명을 연장시켜 주셨습니다. 특히 혈압이 70까지 내려가 병원에서 임종준비를 하라는 말을 듣고 아버지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기도해 드리고 나왔는데, 다음 날 기적적으로 혈압이 올라가 치료를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또 심장이 정지되었으니 오라는 말을 듣고 정말 마지막이구나 생각하고 임종예배 말씀을 생각하며 병원으로 가는 중,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다는 말을 듣기도 했습니다. 이를 통해 저는 생명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시며, 쓰러지신 후 병원에서 지내온 시간이 하나님의 은혜로 연장받은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를 입관할 때, 아버지의 온 몸은 사방에 주사자국과 치료의 흔적으로 상처 투성이었습니다. 저는 이것을 보면서 우리 몸의 조직이 언젠가는 다 무너져 내린다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고후5:1)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의 몸을 깨끗이 닦고 깨끗하고 화려한 옷을 입혀 주고 얼굴엔 화장도 해 드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장례식 중간에 드린 예배 말씀 중 요한계시록 21:2절이 다가왔습니다. “또 내가 보내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우리의 육체는 이 땅에 있는 동안 걸치고 있는 옷과 같습니다. 아버지는 이 땅에서 오래 입다가 망가진 헌 옷을 벗고, 하나님의 신부가 되기 위해, 그리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입을 새 옷으로 갈아 입을 준비를 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저는 이 땅에서의 장례식이 하나님 나라에서의 결혼식 준비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영적으로 데라와 같은 인생을 사심으로 영광을 얻으셨고, 인간적으로 국가유공자라는 영예를 얻고 태극기에 관이 씌워져 이천 호국원에 안장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서의 마지막 거처까지 가장 좋은 곳으로 예비해 주셨습니다. 장례식을 마치고 마지막 예배를 드리면서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말씀을 통해, 아버지가 쓰러지기 전부터 안장하기까지 모든 것을 예비하신 하나님이 아버지를 위해 영원히 거할 집도 예비하셨다는 소망과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저의 어머니도 남편을 잃은 큰 슬픔이 있었지만, 장례식을 마치고 발걸음이 가볍다고 고백하셨습니다. 지난 6개월이 쉽지 않은 기간이었지만, 이를 통해 참된 소망으로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의 동역자들에게 감사드립니다. 학생 형제자매님들로부터 시작해서 믿음의 선배님들에 이르기까지 먼 길을 마다않고 찾아 오셔서 헌화해 주실 때, 전화와 편지와 해외로부터 이메일로까지 위로를 주실 때, 자격 없는 저와 가족들과 아버지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느껴져 매 번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비록 세상에서 많은 친구를 잃고 친척도 잃었지만, 얼마나 많은 소중한 영적인 가족을 얻게 하셨는지요? 뿐만 아니라 힘든 가운데서도 물질로 섬겨 주셔서 장례비용과 치료비용을 부족하지 않게 감당할 수 있도록 희생적으로 섬겨 주신 은혜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이것을 생각할 때, 저와 저희 가족들이 갚을 수 없는 빚을 졌음을 고백합니다. 지난 6개월간 인간적으로 볼 때 힘겨운 시간이었지만, 이러한 고난을 통해 하나님은 참으로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큰 일을 하셨습니다.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삼하7:18) 고백하던 다윗의 심정이 저의 심정임을 고백합니다. 제가 새로운 심령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섬기고자 합니다. 또한 아직 온전한 믿음이 없는 가족들이 믿음을 갖고 하나님을 섬기며 은혜를 감당하게 하시길 기도합니다. 아버지의 장례식을 마치며 다시 한 번 하나님과 그리고 믿음의 동역자님들께 저의 가족들을 대신하여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680 no image [긴급] 도움을 요청합니다!!
[레벨:20]인금철
52 2011-11-07
파라과이 이요한 선교사님께서 발덴스트룀 거대글로불린혈증(백혈병의 일종)으로 서울성모병원에서 투병 중이십니다. 정상 백혈구 수치가 혈액에 전혀 없는 상태로써 아주 위험한 감염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B형 혈액형을 가지신 동역자님들의 백혈구 성분 혈액이 필요합니다. 아래 글을 읽어보시고 자원하시는 분은 바로 인금철 목자님이나 한양UBF 전아브라함(가정의학과 전문의, abjun@hanmail.net, 010-4788-1412) 목자님에게 직접 연락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간절히 기도해 주십시오. -------------------------------------------------------------------- 백혈구 성분헌혈하실 자원자를 모집합니다. 대상자 : 만17-49세 B+ 혈액형을 가지신 분(자세한 것은 아래 참조) 헌혈하실 장소 : 서울성모병원( 구 강남성모병원) 4층 성분헌혈실 (가시는 길 아래 참조하세요)- 가셔서 17층 108호 이정연 환자분 성분헌혈하러 왔다고 하시면 됩니다. 시간 : 평일 오전8시-오후4시 토요일 오전 9시-오전11시 헌혈하시는 방법 : 총3회 서울성모병원에 방문하셔야 합니다. 첫날은 위 시간에 4층 성분헌혈실로 가셔서 혈액적합여부 검사를 하십니다. 적합 여부 결과는 하루 후에 나옵니다. (약 30분 소요) 둘째날 혈액이 적합한 분은 헌혈 하루 전날 백혈구생성촉진제 주사를 맞습니다.(약 1분 소요) 셋째날 백혈구 성분헌혈을 하십니다. (총 5시간 걸리는데 헌혈시간만 2시간 30분 소요) 성분헌혈 가능하신 분 조건 : 1. 만17세에서 만49세까지 체중 55kg 이상의 남녀 상지 정맥혈관이 좋은분 2. 혈액형이 같아야함: B+ 3. 특이체질, 알러지, 천식, 출혈 소인이나 약으로 인한 사고가 없어야함 4. 지난 1년 사이에 혈액제재를 수혈 받지 않았어야함 5. 지난 6개월 사이에 중병을 앓거나 큰 수술을 받지 않았어야함 6. 국내 말라리아 위험지역에 최근 1년 이내 1박 이상 숙박 및 2년 이내에 6개월 이상 군복무한 적이 없어야함 7. 치료를 위한 의약품(당뇨, 고혈압, 두통, 무좀, 탈모, 피부과약, 여드름과 건선치료제)를 복용한 적이 없어야함 8. 신종바이러스질환으로 인해 해외여행 후 1개월 이내인 분은 헌혈을 금지한다 9. 내시경검사(1개월), 치과치료(출혈이 없는 치료는 헌혈이 가능), 레이저치료(의료기관에서 미용목적 7일 이내)받은 분은 일정기간 헌혈이 제한된다 10. 암, 심장질환, 호흡기질환, 자가면역성질환, 장기이식, 만성피로증후군으로 진단 받은 분은 헌혈을 금지함 찾아오시는 길 : http://www.cmcseoul.or.kr/hospitalinfo/map.jsp?DEPTH=05070000
679 no image 병상에서 적는 한 젊은이의 감사제목 [14]
[레벨:20]인금철
102 2011-11-20
감사제목 뇌막의 손상부위를 찾기가 어렵고 까다로운 재수술이었음에도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서 감 사합니다. 이번 수술을 통해서 제 마음을 겸손케 하여 주시고 누워있으면서 성경을 읽으며 하나님을 깊이 만날 수 있는 여건을 주심에 감사합니다. 제 몸이 아픔으로 인해서 가족의 사랑을 깨닫게 해주시고 어머니께 처음으로 성경을 선물로 드릴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제 생각과 판단만으로 모든 일들을 하였었는데 이제는 기도를 먼저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도 록 하여주셔서 감사합니다. 라디오로 극동방송을 들으면서 좋은 말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평소에 잘 알지 못했지만 제가 아프게 되자 어머니와 동생이 건강하게 잘 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행복한 것인지 깨닫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수술과 입원때문에 병원에 계속 있었는데 다행히 국민보험에 의해서 대폭 할인을 받고 또 보험회사를 통해서 부족한 물질을 체워주셔서 감사합니다. 15일 정도를 움직이지도 못하고 누워만 있어서 어렵고 힘들었는데 이제는 직접 걸어서 움 직일 수 있고 또 화장실도 갈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수술에 따른 시신경 손상이 없이 앞을 볼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성공하거나 좋은 일이 있거나 해야만 하나님께 감사드렸었는데 이제는 살면서 당연히 여기 던 일들도 감사드리는 마음을 갖게 하여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변 분들이 기도해주신다고 말씀해주실때 감사합니다라고만 말하고 내면에서는 지나가는 인사라고만 생각했는데 저를 위해 기도해주시는 분들이 얼마나 고마운 분들이고 또 그 기도 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깨닫게 하여 주심에 감사합니다. 수술 후에 모든 호르몬 수치를 다 정상으로 돌려주셔서 약에 의지하지 않아도 되도록 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호르몬 수치의 불균형 때문에 음식 먹는 것을 항상 조심해야 했는데 이제는 먹고 싶은 음식 을 먹을 수 있게하여주셔서 감사합니다. 전에는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이 제가 모든일을 다하고 나서 그 후에 두번째로 제 힘으로 안되는 부분만을 의지하는 것이었지만 이번 수술과정과 기독교 방송을 통해서 진심으로 하 나님을 의지하는 것은 모든 일에 제일 먼저 하나님께 기도로 의지하면서 하나님께 제가 맞 출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여주셔서 감사합니다.
678 READ.LEAD
[레벨:20]인금철
86 2011-12-17
[퍼옴] 인터넷 ‘폴레폴레 카페’ 회원들의 ‘운명을 바꾸는 독서’ 이야기 독서를 통해 삶을 바꾸는 사람들의 모임인 인터넷 카페 ‘폴레폴레’ 회원들이 서울 중구 신당동의 한 커피숍에 모였다. 앞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독서천재 홍대리’의 작가 이지 성, 문준호, 홍정수, 김윤근, 유근용, 정회일 씨. 이종승 기자 urisesang@donga.com 《 아토피 증상과 스테로이드제(劑) 부작용으로 6년간 집에서 누워만 지내던 청년이 서울 강남 한복판에 있는 억대 연봉의 영어학원장으로 변신한다. 14년간 출판사로부터 외면받았던 무명작가가 총 200만 권이 팔린 베스트셀러 작가로 인생을 바꾼다. 공고 출신 젊은이가 영어학원 강사로 변신해 명문대 출신 수강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과연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목숨을 건 독서’를 통해 인생을 바꾼 이지성(38) 정회일 씨(31)와 ‘폴레폴레’(아프리카어로 ‘천천히’라든 뜻) 카페 회원들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 ○ 프롤로그: 2000년 겨울 “엄마는 왜 나를 그 병원에 데려갔어! 모든 게 엄마 때문이야….” 아파서 집 안에서 누워만 지내던 정회일 씨는 대학도 휴학했다. 중학생 시절부터 7년간 아토피 증세에 스테로이드제를 처방받았던 게 문제였다. 처음엔 연고로 시작했다. 증세가 낫지 않자 점점 센 약, 주사로 확대됐다. 스테로이드제 장기 복용은 엄청난 부작용을 낳았다. 인체의 면역력이 약화돼 어떤 상처나 염증도 잘 낫지 않았다. 계속 복용할 경우 쇼크사할 수 있다는 말에 약을 끊었다. 2000년 그 약을 끊자 그동안 약 기운에 잠자고 있던 열기가 한꺼번에 터져나왔다. 물주전자처럼 온몸에서 뜨거운 증기가 뿜어져 나왔다. 하루에 찬물 20L를 마셔도 갈증은 계속됐다. 눈물이 말라서 앞을 볼 수 없었고, 눈썹은 다 빠져버렸다. 온몸에서 피와 진물이 흘렀고, 입과 턱이 찢어져 밥도 먹을 수 없었다. 심장은 불규칙적으로 뛰고 식구들 발소리에도 놀라 소리를 질렀다. 하루하루 괴물로 변해가는 자신을 보며 우울증에 빠져들었다. 설상가상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면서 집안은 억대의 빚에 쪼들리기 시작했다. 그는 부모님을 원망했고 세상을 향해 저주를 퍼부었다. 3년간 죽을 고비를 넘긴 정 씨는 2005년 겨울 무심결에 책을 들었다. 탤런트 김혜자 씨가 쓴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였다. 책 속에서 아프리카 어린이가 “내 꿈은 어른이 되는 것”이라고 한 말을 읽고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수많은 아이들이 열 살도 안돼 죽어가고, 지뢰를 밟아 팔다리가 잘려 있었다. 그동안 “왜 나만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는가”만을 원망해왔는데, 그들에 비하면 자신의 고통은 별것 아니었다.이듬해 그는 6년 만에 세상으로 걸어 나왔다. 그러나 막막했다. 조언을 해줄 사람을 찾아다녔다. ‘20대를 변화시키는 30일 플랜’이라는 책을 쓴 작가 이지성 씨에게 수차례 e메일을 보냈다.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 2007년 5월 우체국 서울 강남구 역삼동 ‘영나한’ 학원에서 강의하고 있는 정회일 씨. “독서를 통해 삶이 변화하고 성장했던 제 분명한 경험을 20대 청춘들에게 알려주고 싶다”고 말했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잠깐 소포를 부치고 올게. 책 보면서 기다려.” 정 씨는 작가 이지성 씨를 우체국에서 만났다. 이 씨는 막 출간된 자신의 책 ‘꿈꾸는 다락방’을 선물로 준 뒤 잠시 자리를 비우겠다며 양해를 구했다. 30분, 1시간쯤 지났을까. 정신없이 책에 빠져 읽고 있던 그는 이상한 느낌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이 씨가 지켜보며 서 있었다. “왜 왔다고 말하지 않으셨어요”라며 미안해하는 정 씨에게 “책 읽는 모습에서 가능성 있는 친구라고 느껴져 방해할 수 없었다”며 웃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겠느냐”는 정 씨의 질문에 이 씨는 “앞으로 1년 동안 365권의 책을 읽고 오면 말해주겠다”고 했다. 정 씨는 황당했다. “한 달에 책 서너 권 읽기도 힘겨운데 어떻게 매일 한 권씩 읽느냐”고 반문했다. 이 씨는 딱 잘라 말했다. “그렇게 나약한 인간이라면 찾아오지도 말라”고. 당시 정 씨는 돈을 벌기 위해 여러 아르바이트를 전전하고 있었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 1시간씩 독서를 하고, 점심시간에도 짬을 내 책을 읽었다. 지하철에서는 전동차 안에서는 물론 걸어 다니면서도 책을 읽었다. 컴퓨터 부팅을 기다리는 몇 초간의 시간에도 책을 읽었다. “빌 게이츠나 안철수 씨는 엘리베이터에서도 한 달에 몇 권씩 책을 읽는다”는 말을 듣고 그도 엘리베이터 앞에서 책을 펴들었다. 처음 3개월 동안 자서전과 수기만 100권 넘게 읽었다. 자신이 꿈꾸고 싶고, 따라하고 싶은 사람을 찾기 위해서였다. 독서의 폭은 문학, 예술, 인문고전으로 다양하게 넓어졌다. 마침내 1년간 365권의 독서에 성공했다. 가장 큰 소득은 자신감이었다. 늘 실패자로 살아왔던 그는 처음으로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하루 시간을 1초 단위로 쪼개 쓰는 ‘시간 관리법’도 자연스레 터득했다. ○ 독서 멘토 이지성 작가 정 씨의 독서 멘토(스승, 조언자)인 이지성 씨는 ‘리딩으로 리드하라’ ‘여자라면 힐러리처럼’ ‘꿈꾸는 다락방’ ‘독서천재 홍대리’ 등의 책이 총 200만 권 이상 팔린 베스트셀러 작가다. 그러나 정 씨를 처음 만났을 때는 이 씨도 무명작가였다. 지방대를 졸업하고 14년간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했던 그는 자신이 쓴 원고를 80곳이 넘는 출판사에 보냈지만 거절당했다. 그는 살 곳을 찾아 경기 성남시의 달동네로 이사했다. 창고 같은 거처에서 3년 6개월을 살았다. 알코올 의존증 환자였던 이웃은 매일 그의 방 창문 아래서 악을 써댔다. 집 앞 슈퍼마켓에서 동네 주민들은 밤낮으로 술판을 벌였다. 그는 자신보다 더 비참한 환경에서도 독서에 매진한 위인들을 생각하며 버텼다. “성호 이익이 ‘어머니가 잃어버린 자식을 찾듯이 책을 읽으라’고 한 말처럼 내게 독서는 간절했다”고 그는 회상했다. 그의 책이 베스트셀러로 주목을 받자 수많은 청년들과 CEO들이 독서법과 자기계발 노하우를 궁금해했다. 그러나 1년간 365권의 책읽기를 실천해 그의 정식 멘티(멘토의 지도를 받는 사람)가 된 사람은 정 씨가 처음이었다. “목표를 정해주지 않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365권을 읽는데 3650일(10년)이 걸립니다. 자신의 한계에 격렬하게 도전하다 보면, 내 속에 잠자던 잠재력을 만나고, 잠재력이 폭발할 때 책이 나를 이끌어가는 변화의 순간이 찾아옵니다.” ○ 독서의 3단계 정 씨는 이후에도 이 씨가 가르쳐 준 ‘독서의 3단계’에 맞춰 총 2000여 권의 책을 꾸준히 읽었다. 첫 단계인 ‘프로리딩’은 자신의 업무관련 책 100권을 읽음으로써 전문가로 거듭나는 것이다. 두 번째 단계인 ‘슈퍼리딩’은 자서전과 자기계발서를 읽음으로써 긍정적이고 도전적인 사고방식을 갖추는 것이다. 마지막 단계인 ‘그레이트리딩’은 수백 년간 살아남은 명작인 인문고전 독서로 세상을 바꾸는 리더로 사는 것이다. 인문고전 독서는 요즘 CEO들에게 인기다. 지난해 이 씨가 만난 한 청년은 인문고전을 읽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을 하고 싶다며 아프리카 어린이 돕기에 나서고 싶다고 말했다. 그런데 알고 봤더니 비정규직 노동자인 어머니가 준 용돈에서 30만 원을 기부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호된 꾸지람만 듣고 돌아가야 했다. 이 씨는 “자기 앞가림도 못하면서 플라톤의 ‘국가’를 읽고 세상을 변화시키겠다고 나서는 건 사회악”이라고 말했다. 이 씨는 청년이나 직장인들에게 우선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는 있는 프로리딩, 슈퍼리딩 독서를 권한다. 그는 “책 한 권에는 30∼40년의 작가의 경험이 담겨 있다”며 “자기 분야의 책 100권을 읽으면 3000년의 내공을 쌓는 셈”이라고 말했다. 정 씨도 관심분야인 영어공부를 시작했다. 독학으로 영어공부법 책만 100권 이상 읽으며 자신만의 비법을 만들어나갔다. 과외도 시작했다. 처음엔 무료로, 나중엔 시간당 1만∼2만 원씩 받았다. 이후 스터디룸을 빌려 강의를 했고, 올 초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 ‘영나한’(영어연수 나는 한국에서 한다) 학원을 열었다. 외국에 나가본 적도 정 씨의 영어공부 비법은 ‘무대에 서는 것’이었다. 남을 가르치다 보면 더 열심히 준비하기 때문이다. 그는 “한국인들이 영어를 못하는 것은 강의를 일방적으로 듣기 때문”이라며 “무대에 서야 말이 트인다”고 말했다. 또 그는 “외국인과 5분 이상 대화를 못하는 건 발음, 문법 탓이 아니라 할 얘기가 없기 때문”이라며 “독서를 통한 다양한 관심사는 외국인과 밤새워 대화할 수 있는 무기”라고 말했다. ○ 에필로그: 세상을 바꾸는 독서 멘토링 이지성 씨는 서울역 인근 빈민촌에서 청년들을 위한 독서모임을 지도하고 있다. 정회일 씨도 학원에서 독서 멘토링과 시간관리법 특강으로 인기가 높다. 인터넷에는 독서를 통해 삶을 바꾸고자 하는 ‘폴레폴레’ 카페도 생겼다. 이달 초 서울 신당동의 커피숍에서 만난 회원 중에는 유근용 씨(30)도 있었다. 그는 공고를 나와 전문대를 평균학점 1.7로 졸업했지만, 책을 읽고 영어공부를 시작한 지 2년 만에 명문대 출신 수강생들을 가르치는 강사가 됐다. 그는 “어릴 때 공부를 안 하면 평생 인정받지 못한다는 사회의 편견을 날려버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홍정수 씨(22·여)는 “책을 읽고 나니 처음엔 생각이 바뀌고, 이어 말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었다”며 “요즘은 헬스클럽에서 사이클을 타면서도 책을 읽는다”고 말했다. 대학 자퇴생인 그는 자신의 꿈을 위해 사회 각 분야의 성공한 사람 100여 명을 찾아다니며 멘토를 부탁하는 적극적인 젊은이로 변신했다. 샐러리맨에서 온라인 광고회사 CEO로 변신한 문준호 씨(45)는 “10여 년간 책을 읽고 정리해놓은 독서노트가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이지성, 정회일 씨에게 요즘의 청춘 세대들에게 해줄 말을 물었다. “‘88만원 세대’가 아파하고, 사회에 무언가를 요구하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만의 내공을 길러야 한다. 20대에 준비해야 30대 이후에 세상을 변화시킬 힘이 생긴다.”(이) “사람들이 시간이 없어 책을 못 읽는다고 합니다. 과연 시간이 없다고 술을 못 마시고 잠을 못 자는 사람이 있을까요? 술 마시고, 친구 만나고, 인터넷 서핑을 해도 인생이 안 바뀌었다면, 책을 읽어보세요.”(정)
677 no image 부활하신 예수님
[레벨:20]인금철
73 2012-01-25
676 no image [퍼옴] 물고기 IQ [5]
[레벨:20]인금철
73 2012-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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