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성경읽기선교회 관악5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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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5 질병과 고통의 은혜
[레벨:20]정아브라함
32 2016-11-24
나! 참 오래 살 것 같다. 만나는 사람마다 놀란다. "권 신부, 아직도 살아있어?" 하고 놀라 묻는 것만 같다. 무슨 소문들이 얼마나 퍼졌기에…. 그도 그럴 것이 5년 전 대장을 잘라내고 그 후유증으로 장이 협착돼 사경을 헤맸다. 겨우 좀 살 만하다 했더니 이번엔 후두암. 33번의 방사선치료가 끝날 즈음 이젠 나아지나 했는데 이번에는 암이 기관지로 옮아갔다. 목숨이 오가는데 혼자 온 나를 보고 "아니, 혼자 왔어요?" 하고 의사가 화를 낸다. 33번의 방사선치료로 목 연골이 약해져 더 이상 방사선치료는 불가능하니 다량의 항암제를 투여하고 그 기관 주위를 냉동시켜보자고 한다. 내가 무엇을 아는가. 그러자고 동의서에 서명했다. 그때 그 심정은 말이나 글로 표현할 수가 없다. 링거로 다량의 물을 투여했다. 이제 아침이 되면 준비된 주사 구멍으로 항암제가 투여될 것이다. 그러면 이 땅에서의 나의 삶은 끝이다. 그 후 나의 모습이 어떻게 변해갈 것이며 내 일상이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오랜 병원 생활 덕택에 익히 잘 아는 터다. 아, 이 밤이 마지막이다. 인간이라는 종(種)으로 태어나 인간적인 즐거움을 누리며 사는 삶은 이 밤이 마지막이다. 아무도 걷지 않는 후미진 병원 뒤뜰을 홀로 걸었다. 내 생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며, 아니 십중팔구 그럴 것이라 생각하며 기도했다. 차분히 조용히 묵주 알을 굴렸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하나도, 정말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서럽지도 원망스럽지도 무섭지도 않았다. 오히려 새로운 기쁨이 샘솟고 죽음까지도 그냥 스쳐지나가는 한 사건으로 다가올 뿐 전혀 생소하지 않았다. 묵주 5단을 마칠 무렵 나는 노래하고 있었다. "찬미하라. 찬양하라. 기뻐 노래하며 춤추라." 그 밤! 마냥 행복한 밤이었다. "그래 암! 너로 인해 난 많이 아프리라. 그러나 너로 인해 나의 이 행복마저 빼앗기진 않으리라. 암아! 이 몹쓸 놈의 암아! 사실 너는 나에게 아무것도 아니야. 네가 나에게 무엇을 할 수 있나? 이 작은 심장의 박동을 멈추게 하는 것 말고 무엇을 할 수 있니? 그래 어쩔 수 있나. 같이 살아야지. 이 몸뚱이 살아있는 그날까지는 같이 사는 수밖에. 오라 어서 와."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20여 년 전 꼭 이맘때 익산의 한 나환우 정착촌에서 살 때다. 성탄 전 4주 대림 피정이 끝나는 날 미사 강론을 시작하며 나는 물었다. "여러분 중에 혹 자신의 병을 하느님이 주신 은총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분 계십니까?" 그 순간, 나는 그때 성당의 분위기를 평생 잊을 수 없다. 얼마나 싸늘하고 적막하고 엄숙했던지. 잠깐의 그 적막이 나에게는 얼마나 길었던지. 찬물을 끼얹은 듯한 적막함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해하고 있는데 한 할머니가 지그시 눈을 감은 채―사실 그녀는 시력을 잃었다―혼잣말처럼, 그러나 차분히 고백했다. "네, 이 몹쓸 병은 나에게 큰 은총이지요." 그러자 "맞아요. 은총이죠" "은총이죠" 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그날 나는 그 미사를 어떻게 마쳤는지 모른다. 솟아오르는 눈물을 참아가며 간신히 그 미사를 마쳤다. 성당을 나오는데 한 자매가 수줍은 듯 다가와 속삭였다. "신부님, 이 몹쓸 병은 저에게 큰 은총이죠. 이 몹쓸 병이 아니었으면 나, 이 좋으신 하느님을 어떻게 알았겠어요. 정말 은총이죠. 은총이에요." 핏기 없는 피부에 그냥 그려놓은 눈썹이 무척 고왔다. 그 고운 얼굴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늦가을 파아란 하늘, 벌거벗은 감나무에 매달린 빠알간 홍시, 너무도 아름답다. 그 많던 감잎이 그냥 바닥에 다 누웠다. 자기 할 일을 다 마친 것이다. 잎사귀가 다 죽었다고? 아니다. 한 잎 예외 없이 저 빨간 홍시 속에 다 농축돼 살아있다. 하여 때가 되면 다시 산다. 황금빛 들녘이 빈 들이 되었다. 나락이 다 죽었다고? 천만에 한 톨 볍씨 되어 살아 숨 쉬고 있다. 때가 되면 다시 산다. 때가 되어 그 모습이 바뀔 뿐,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나이가 들고 병이 들었으니 나도 곧 죽는다고? 아니다. 암도 나병도 심지어 죽음도 앗아갈 수 없는 생명―새로운 생명―이 내 안에 이토록 힘차게 자라고 있는데 죽어 사라지다니, 틀린 얘기다. 아직 몰라서 하는 소리다. 가난, 실패, 암, 나병 등 우리 인간을 절망하게 하는 이 지독한 악마들. 그런데 이 악마들마저도 끌어안고 입 맞추면 곧 아름답고 은혜로운 천사가 되어 이 죄 많 <iframe noResize height="250" marginheight="0" src="http://cad.chosun.com/RealMedia/ads/adstream_sx.ads/www.chosun.com/news@x74" frameborder="0" width="250" marginwidth="0" scrolling="no"></iframe>은 나를 새로운 세계―새로운 생명―로 인도한다. 바스락바스락 낙엽 밟는 소리, 참 정겹다.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얼마나 좋은가. 얼마나 행복한가. 낡은 나 허물 벗어 새로운 나 되니, 드디어 보이는 이 새로운 세계, 그 진리 안에 머무름. 이것 말고 어디에 행복이 있다고, 지위·신분·재산 그런 것들이 도대체 무엇이라고 저 난리들인지.
214 no image 엔테베 작전
[레벨:20]정아브라함
39 2016-12-06
목차 에어프랑스기 피랍되다 아프리카로 향한 피랍기 군사작전의 가능성 엔테베는 중립 지역이 아닌 적지 적의 심리를 이용한 기습작전의 입안 완성되지 못한 작계, 그리고 협상 시한 구출부대의 규모를 논하다 작전의 세부 공격제대의 임무 지원ㆍ항공제대의 임무 속도전을 수행하라 아프리카 대륙으로 출발하다 야간의 착륙 밤의 정적을 가른 총성 구청사로 돌입하다 구청사의 혈전 대혼란의 현장 우간다군을 제압하라 발빠른 퇴출 구출부대의 퇴출까지 90분 에어프랑스기 피랍되다 1976년 6월 27일 12시 30분경 이스라엘의 로드(Lod) 공항을 떠나 파리로 향하던 에어프랑스 소속 A300 에어버스 여객기 AF-139편이 중간 기착지인 아테네에 내렸다. 아테네 공항의 보안은 허술한 편이어서 금속탐지기에 모니터링 요원도 배치되어 있지 않았다. 그리고 아테네에서 56명의 승객을 태운 AF-137편은 이륙 3분 만에 피랍되었다. 승객들 가운데 테러범들이 섞여 있었던 것이다. 에어프랑스 소속 AF-139편은 중간 기착지인 아테네에서 이륙하자마자 테러범에게 납치되었다. 보안이 허술한 아테네 공항은 테러범이 항공기에 잠입하는 데 안성맞춤인 장소였다. 이 여객기에는 254명의 승객이 탑승하고 있었는데, 그중 3분의 1이 이스라엘 국민이었다. 여객기를 납치한 테러범은 모두 4명으로, 2명은 혁명분파 소속의 독일 테러범이었고 2명은 팔레스타인 인민해방전선(PFLP) 소속의 아랍 테러범이었다. 특히 독일인은 남녀 커플로, 남자는 윌프리드 보세(Wilfried Böse)라는 유명한 청부 테러범이었다. 여객기를 납치한 4명의 테러범. (좌측 상단으로부터 시계방향으로) 자엘 나지 알 아잠(Jael Naji Al Azam), 파예즈 압둘라힘 자베르(Fayez Abdur-Rahim Jaber), 브리기테 쿨만(Brigitte Kuhlmann, 여자 테러범), 윌프리드 보세(Wilfried Böse). 이스라엘 정부는 여객기 피랍을 예상하고 최고 정예부대인 사이렛 매트칼(Sayeret Matkal)에 출동대기를 명령했다. 사이렛 매트칼은 부대 명칭 그대로 말하자면 합동참모본부 직할 ‘정찰부대’이지만 실제로는 대테러부대다. 테러범들은 종종 이스라엘로 여객기를 몰고 와서 정치적인 요구를 하는 습성이 있었다. 1972년 아랍 테러범들은 벨기에의 사베나(Sabena) 항공 여객기를 납치하여 로드 공항으로 몰고 와서는 국제 언론 앞에서 요구사항을 열거한 바 있다. 똑같은 상황을 예상한 이스라엘은 사이렛 매트칼을 로드 공항에 대기시키고 인질구출작전을 계획했다. 그러나 피랍기는 이스라엘로 향하지 않고 기수를 남쪽으로 돌려 리비아의 벵가지(Benghazi)에 기착했다. 사이렛 매트칼은 다시 기지로 돌아가 추후 명령을 기다렸다. 벵가지에서 7시간 반을 대기하던 피랍기는 재급유를 받고 이륙하여 동쪽으로 향했다. 부대는 다시 출동대기 상태에 들어갔으며 피랍기가 로드 공항에 내리는 즉시 구출작전을 실행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자정이 되자 놀랍게도 피랍기가 아프리카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 3시 피랍기는 우간다의 엔테베(Entebbe) 공항에 내렸다. 여기서 팔레스타인 인민해방전선 테러범 3명이 납치범들에 합류했다. 아프리카로 향한 피랍기 아테네를 이륙한 피랍기는 리비아의 벵가지를 거쳐 우간다의 엔테베 공항에 착륙했다. 화살표 실선은 피랍기의 이동 경로이고 점선은 이스라엘 구출부대의 비행계획도다. 승객들은 피랍된 에어버스 여객기가 엔테베 공항에 착륙하고도 무려 9시간이나 더 기내에 억류되었다. 그리고 6월 28일 월요일 정오가 되자 테러범들은 승객들을 공항 구청사의 승객 로비에 감금했다. 그날 늦은 오후 우간다의 대통령인 이디 아민(Idi Amin)은 승객들에게 자신이 직접 테러범들과 인질협상을 하고 있으며, 우간다 병사들이 승객의 안전을 보호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아민은 이스라엘 정부가 테러범과 협상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말했다. 다음날인 29일 15시 30분경 ‘페루인’이라고 불리는 팔레스타인계 아랍인의 지휘하에 움직이는 테러범들은 자신들의 요구를 발표했다. 서독, 프랑스, 스위스, 케냐, 그리고 이스라엘에 투옥된 테러범 53명의 석방을 요구했던 것이다. 만약 이들이 석방되지 않는다면 이스라엘 시각으로 7월 1일 14시에 피랍 승객들을 살해하겠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이런 발표가 있자 당시 이스라엘 수상이던 이츠하크 라빈(Yitzhak Rabin)은 각료들을 모아 대안을 검토했다. 이스라엘 국방군 합참의장인 모타 구르(Motta Gur) 장군은 라빈 수상과의 회의에 앞서 군사적 작전을 검토할 것을 자신의 참모들에게 지시했다. 그런데 구르의 참모는 아니지만 이스라엘 공군 유일의 C-130 비행대대장이던 요슈아 샤니(Joshua Shani) 중령은 엔테베에 피랍기가 있다는 사실을 안 순간부터 이미 대략적인 비행계획을 짜고 있었다. 병력과 장비를 싣고 엔테베까지 갈 수 있는 기체는 C-130이 유일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공군참모총장이 작전에 관해 물었을 때 모든 문제에 대해 유창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 군사작전의 가능성 한편 구르 장군은 라빈 수상에게 군사작전의 가능성을 보고했지만 당시로서는 대수롭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당시로서는 이디 아민이 피랍사건의 중재자로 공정히 활동하는 듯 보였기 때문에 이스라엘 내각은 이 독재자와의 협상을 통해 인질을 석방시킬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또한 승객의 3분의 2가 이스라엘 국민이 아니었으며 항공기도 이스라엘 국적기가 아니라 프랑스 국적기였기 때문에 프랑스 정부가 협상의 주도권을 갖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에서 우간다는 무려 4,000킬로미터 가까이 떨어져 있었다. 애당초 이런 거리를 극복하고 인질구출작전을 실행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었다. 한편 같은 날 저녁 합참부의장인 예쿠텔 아담(Yekutiel Adam) 장군은 사이렛 매트칼의 이전 부대장이었던 에후드 바라크(Ehud Barak) 대령을 호출했다. 그는 바라크에게 군사작전의 가능성을 특공대원들과 공수부대원들과 함께 ‘비공식적으로’ 토의할 것을 명했다. 이에 따라 바라크는 밤새 특수부대원들과 토의를 마치고 다음날 아침 최초의 인질구출방안을 제시했다. 이 계획에 따르면 특수부대가 고무보트를 가지고 엔테베 공항 인근의 빅토리아 호수로 강하하여 강을 건너서 공항으로 잠입한 뒤, 인질을 구출하고 우간다군에게 투항한다는 것이었다. 이 계획에는 여러 가지 문제점이 있었는데, 이스라엘은 이전까지 한 번도 고무보트로 하드덕(Hard Duck)을 해본 적이 없다는 것이 그중 가장 작은 문제일 정도로 계획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로서는 이 계획이 가장 최선의 대안이라고 생각되었다. 엔테베는 중립 지역이 아닌 적지 작전에 필수 요소는 정보다. 그런데 이스라엘에게는 정보가 너무 적었다. 이스라엘과 우간다는 원래 우호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이스라엘이 첨단 제트기의 제공을 거부하자 이디 아민은 1972년에 이스라엘과 단교를 선언했다. 정식 외교 채널조차 없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정보를 수집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우간다의 무관으로 파견된 바 있던 이스라엘군의 바루크 바레프(Baruch Bar-Lev) 준장이 이디 아민과 직접 통화를 하기도 했다. 이런 과정에서 바루크 바레프 준장은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아민이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지 않고 오히려 팔레스타인 테러범들에게 동조하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받은 것이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사태가 이스라엘에 유리하게 해결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게다가 인질을 구출하여 우간다군에게 투항한다는 계획 또한 무용지물이 되어버릴 터였다. 그럼에도 강하작전 준비는 계속되었다. C-130 대대장인 샤니 중령은 고무보트 강하 시험을 실시했다. 처음 시험은 실패하여 고무보트가 터졌지만, 이후 문제를 해결하고 하드덕에 성공할 수 있었다. 한편 엔테베에서는 유대인이 아닌 승객 47명이 석방되었다. 이들이 프랑스 대사관을 거쳐 파리로 돌아가자 정보당국은 피랍 상황에 관한 수많은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다. 특히 이디 아민이 테러범에게 협력하고 있을 것이라는 이스라엘의 우려는 석방 인질들의 증언을 통해 사실로 확인되었다. 이에 따라 강하작전의 가능성을 확인한 목요일 저녁, 전혀 다른 구출작전을 새롭게 입안해야만 했다. 적진에 침투하여 인질을 구해오는 어려운 작전이었다. 우간다의 독재자 이디 아민은 인질협상의 중재자를 자처했지만, 실은 팔레스타인 테러범을 지원하고 있었다. 사진은 이디 아민(좌)과 야세르 아라파트[Yasser Arafat, (우)]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의장의 다정한 모습이다. 적의 심리를 이용한 기습작전의 입안 특수전의 핵심 요소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사람들은 보통 ‘기습’이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이것은 정확한 정답이 아니다. ‘기습’이란 적이 대비되어 있지 않을 때 공격하는 것이다. 그러나 특수전에서 적은 대개 기습을 예상하고 대기하고 있다. 특수부대가 타격할 주요 목표에는 언제나 우수한 경계 병력이 있고, 인질구출작전에는 특수부대의 기습을 예상하고 기다리고 있는 테러범이 있다. 특수부대에게 ‘적이 대비되어 있지 않을 때 공격’하는 사치는 허락되지 않는 것이 대부분의 경우다. 특수부대는 상대적 전력 우위에 승부를 거는 부대다. 실제적으로 병력이 적더라도 ‘기습, 속도, 그리고 뚜렷한 목표의식’을 가지고 적을 ‘기만’하고 ‘압도’하여 상대적 전력 우위를 통해 임무를 완수한다. 즉 특수전의 핵심 요소는 ‘상대적 전력 우위’에 있다. 그리고 이스라엘군은 엉뚱한 곳에서 이런 ‘상대적 전력 우위’를 찾았다. 새로운 구출작전을 입안하는 가운데 다소 ‘엉뚱한’ 의견이 제시되었다. C-130 수송기를 곧바로 엔테베 공항에 착륙시키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훌륭한 의견이었다. 당시 이스라엘군이 우간다까지 직접 날아가서 작전을 수행하는 무모한 짓을 할 거라고는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오히려 엔테베 공항에 직접 착륙하는 것은 최고의 기습효과를 가져올 것이 틀림없었다. 적의 심리를 활용한 기만이자 기습이었다. 가장 큰 문제는 어떻게 야간에 조명 없이 C-130을 착륙시킬 수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이스라엘 공군은 이전에 한 번도 블랙아웃 랜딩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실행 가능성에 의문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프로토타입 야시경을 보유했던 이스라엘 공군은 시나이(Sinai) 사막에서 야간 착륙 시험을 성공하면서 구출작전이 가능함을 입증했다. 이스라엘군은 인질을 구출하기 위해 사상 최대의 구출작전을 계획한다. 그리고 이스라엘 공군에서 이를 이룰 수 있는 유일한 항공기는 C-130뿐이었다. 완성되지 못한 작계, 그리고 협상 시한 이 작전계획은 매우 단순한 것으로, C-130 4대를 엔테베 공항에 착륙시키는 것이었다. 엔테베 공항은 최근에 개수가 이루어져 구청사와 신청사로 나뉘어 있었는데 인질들이 있는 곳은 구청사 쪽이었다. C-130 1번기가 구청사에 착륙하면, 사이렛 매트칼이 인질 구출작전을 수행한다. 1번기에 사이렛 매트칼과 함께 동승한 공수부대원은 신청사를 점거한다. 2번기에는 탑승하는 장갑차와 특수부대 및 공수부대는 사이렛 매트칼을 증원하여 화력지원 임무를 맡는다. 3ㆍ4번기에 탑승한 예비 병력에게는 구출한 인질들을 안전하게 탑승시키는 임무가 부여되었다. 구출작전의 총지휘관인 댄 숌론(Dan Shomron) 준장은 구출작전 자체에 대해서는 대체로 만족했으나, 전력 구성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했다. 구출부대는 테러범뿐만 아니라 우간다군과도 교전을 벌여야 했기 때문에 전력이 턱없이 부족했던 것이다. 이렇게 작전계획이 아직 구체화되지 못한 사이에 협상 시한이 다가왔다. 구르 합참의장이 라빈 수상에게 아직 군사작전을 실행할 수 없는 상태라고 보고하자 이스라엘 정부는 긴급회의를 열고 테러범의 요구 조건을 들어주기로 결정했다. 여태까지 알려진 것과는 달리, 라빈 정부는 단지 시간을 벌기 위해 협상을 벌인 것이 아니라 실제로 테러범을 풀어줄 용의까지 있었다. 이때까지 무려 206명의 인질이 붙잡혀 있었으며, 그중 절반 이상이 이스라엘 국민이 아니었기 때문에 외교적 부담이 큰 탓도 있었다. 한편 이런 이스라엘의 결정을 받아들인 테러범들은 인질 처형 시기를 7월 4일 일요일로 연장해주었다. 또한 테레범은 100명의 인질을 추가로 풀어주었다. 이제 엔테베 공항에는 이스라엘 국민이거나 이스라엘 국적이 아닌 유대인들, 그리고 에어프랑스 승무원 12명까지 포함해 총 106명의 인질이 남게 되었다. 이로써 유대인을 공격하겠다는 테러범의 의도는 명백해졌다. 이는 오히려 여론에 홀로코스트의 악몽을 상기시키면서 이스라엘 정부에게 항전 의지를 심어주어 군사작전을 결심하도록 재촉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스라엘 합참의장인 구르 장군(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은 인질을 구출하기 위한 군사작전에 회의적 이었다. 피랍된 지 3일이 지나도록 뚜렷한 정보를 수집하지 못했지만, 구출부대장 숌 론 장군(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은 제한된 정보로 최선의 작전을 구상했다. 구출부대의 규모를 논하다 한편 당시 국방장관이던 시몬 페레스(Shimon Peres)는 참모들을 불러 의견을 물으며 구출작전의 가능성을 심도 깊게 논의했다. 구르 합참의장은 여전히 단 이틀간의 준비로는 이런 대규모 구출작전이 불가능하다고 여겼다. 작전은 사상자 발생 가능성이 높았고, 이스라엘군으로서는 마알랏(Ma’a lot) 초등학교 참사(1974년 5월 15일,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테러범 3명이 마알랏의 한 초등학교에 난입하여 105명의 학생과 교사를 인질로 잡은 사건. 진압작전에서 25명의 학생이 사망하고 56명이 부상을 입었음.) 이후에 더 이상 군사작전으로 인한 재앙을 감당할 처지가 아니었다. 또한 주요 목표 지점인 엔테베 공항 구청사에 대한 정보가 너무 피상적인 점도 문제였다. 열띤 토의 끝에 페레스 장관은 곧바로 세부 작전의 입안과 훈련 실시를 지시했고, 숌론 장군을 작전지휘관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참모들은 작전은 언제라도 취소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명확한 방향이 보이지 않던 구출작전은 사이렛 매트칼의 부대장 요니 네타냐후 중령이 작전의 세부를 수립하면서 방향을 잡았다. 요니는 단 이틀 만에 구출작전의 모든 상황을 세세히 재현하면서 구출작전이 실현 가능함을 참모부에게 설득했다. 회의가 끝난 직후 숌론 장군은 사이렛 매트칼 부대장 요나단 ‘요니’ 네타냐후(Jonathan ‘Yoni’ Netanyahu)를 호출했다. 숌론이 제시한 작전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사이렛 매트칼이 구청사와 인근 지역을 점령하는 동안 공수부대와 골라니(Golani) 부대가 신청사와 관제탑을 제압하고 인질구출부대의 증원 및 호위 병력으로 대기한다는 것이었다. 숌론은 대규모 병력으로 전력 우위를 유지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요니의 입장은 달랐다. 더욱 작고 기동성 있는 부대의 규모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숌론의 작계는 너무 광대해서 실행에 옮기는 데 제한 사항이 많으므로, 병력의 규모를 줄여 더욱 유연성 있는 작전을 실행하면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이 요니의 주장이었다. 결국 숌론은 부대 구조에 대해 최종 결정을 내리지 않기로 했다. 대신 요니가 작전의 세부를 구상하도록 전체적인 기본 방안만을 제시해주었다. 요니는 밤새 작전의 세부를 검토했다. 작전의 세부 결국 다음날인 7월 2일 금요일 오전 7시를 기해 숌론은 최종 작전 명령을 하달했다. 이스라엘의 정보기관인 모사드(Mossad)가 석방된 인질들을 조사하면서 인질의 정확한 위치, 우간다군의 배치 현황 등에 대한 구체적 정보를 수집 중이었지만, 이는 그때까지 사이렛 매트칼에게 전달되지 않고 있었다. 이에 따라 작전계획은 최악의 상황을 가정한 상태로 입안되었다. 요니가 입안한 부대 편성과 임무는 다음과 같다. 구분 구성부대 및 지휘관 임무 지휘제대 지휘통신부 (지휘 : 댄 숌론 준장) 1. 작전 전반에 대한 지휘통제 2. 통신 총괄 공격제대 사이렛 매트칼 (지휘 : 요니 네타냐후 중령) 1. 구청사 내의 인질구출작전 실시 2. 구출 인질을 C-130까지 호송 지원제대 사이렛 찬하님/사이렛 골라니 (지휘 : 숄 모파즈) 1. 적 증원 병력이 공격제대를 방해하지 못하도록 차단 2. C-130을 보호하며 지상급유 지원 3. 주기된 우간다군 미그기를 파괴하여 차후 추적을 방지 4. 구출된 인질들이 C-130에 탑승할 때까지 안전하게 보호 항공제대 C-130 비행대대 (지휘 : 요수아 샤니 중령) 1. 구출부대를 엔테베 공항까지 은밀히 수송, 야간 착륙 2. 지상에서 재급유 실시 후 인질 및 병력을 싣고 퇴출 공격제대의 임무 우선 C-130 1번기가 모든 조명을 끈 채로 어두운 활주로에 착륙한다. 이를 위해서 C-130 비행대의 대대장 샤니 중령이 직접 1번기의 조종간을 잡을 예정이었다. 한편 착륙한 1번기가 활주로 북쪽으로 이동하는 동안 특수부대 1개 조가 수송기에서 뛰어내려 후속 기체를 위해 지상유도등을 설치한다. 1번기에서 내린 구조대는 우간다군으로 위장하고 구청사로 접근한다. 원래는 사이렛 매트칼이 이디 아민 일행으로 위장하고 구청사로 접근하려고 했었다. 때마침 이디 아민이 아프리카 통일기구(OAU)에서 회담을 마치고 우간다로 돌아올 예정이었기 때문에 이것은 실로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민이 예정보다 일찍 귀국하는 바람에 이 계획은 중지되었고, 대신 우간다군 고위 장성의 방문처럼 위장하기로 했다. 원래 사이렛 매트칼은 이디 아민 일행으로 위장하고 구청사로 접근하려고 했었다. 마침 이디 아민은 아프리카 통일기구에서 회담을 마치고 우간다로 돌아올 예정이었기 때문에 이것은 실로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민이 예정보다 일찍 귀국하는 바람에 이 계획은 중지되었고, 대신 우간다군 고위장성의 방문처럼 위장하기로 했다. 사진은 위장을 위해 사용된 벤츠 승용차를 C-130 수송기에 싣는 모습이다. 이에 따라 35명의 사이렛 매트칼 대원들은 모두 우간다 군복을 입기로 했다. 그러나 대원들은 우간다인처럼 보이기 위해 검은색 위장크림을 칠하지는 않기로 했다. 어차피 야간에 기습하는 작전이므로 우간다군 경계병에게 발각될 위험이 적었고, 얼굴에 검은색 위장크림을 칠할 경우 오히려 내부소탕 시 적군과 아군을 구분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한편 차량으로는 벤츠 승용차 1대, 랜드로버 군용 지프 2대를 선택했다. 랜드로버는 우간다군이 흔히 사용하는 병력수송차량이고, 벤츠는 우간다 장성이 관용차량으로 많이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 구청사에 도착한 부대는 3개 조로 나뉘어 작전 1팀이 3개 출입문을 동시에 파쇄하여 1층으로 진입한 뒤 테러범을 제압하고 인질을 구출한다. 이와 함께 작전 2팀이 구청사 2층으로 올라가 주둔하고 우간다군을 제압한다. 한편 지휘통제반은 청사 외부에서 대기하면서 랜드로버에 탑재된 50구경 기관총으로 위협지대(구청사 위층 및 관제탑)를 제압한다. 요니는 관제탑을 공격 목표에서 제외했다. 관제탑을 공격하려면 인원이 더 필요한 데다가 공격 과정에서 희생자가 나올 확률 또한 높았기 때문이다. 특수전에서는 목표가 집중될수록 소요 인원과 작전 시간이 줄어들고, 그렇게 되면 그만큼 상대적으로 전력 우위를 유지할 수 있게 된다. 작전 명령은 최종 협상 시한 이틀 전에 하달되었다. 따라서 부대원들이 작전을 연습할 수 있는 시간은 불과 하루도 못 되었다. 지원ㆍ항공제대의 임무 인질구출부대에 있어 가장 큰 위협은 바로 구청사 200미터 부근에 위치한 우간다군의 기지였다. 여기에는 무려 1,000명의 병력과 함께 미그(MIG) 전투기가 배치되어 있었다. 이들을 차단하는 임무는 사이렛 매트칼이 아닌 사이렛 찬하님(Sayeret Zanchanim, 공수특전부대)과 사이렛 골라니(Sayeret Golani, ‘골라니’ 보병여단 소속의 정찰대)로 구성된 합동기동부대에게 맡겨졌다. 다수의 적에 대항하기 위해 지원제대에는 M113 장갑차 4대가 포함되었다. 사이렛 매트칼이 인질을 구출하는 동안 사이렛 찬하님은 구청사 인근에 차단선을 구축하여 우간다군의 증원을 막는다. 또한 일부가 우간다 공군의 미그기에 폭탄을 설치하여 적 전투기의 C-130 요격을 사전에 방지한다. 한편 사이렛 골라니는 C-130 근처에 남아 항공기를 보호하고 인질과 구출대의 퇴로를 확보한다. 항공제대는 사실상 가장 어려운 임무를 맡았다. 4,000킬로미터 거리를 급유 없이 침투비행하고, 야간에 조명도 없이 아군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는 적진 한가운데에 착륙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노련한 지휘관과 조종사들은 그 짧은 시간에도 훈련을 반복하면서 단기간 내에 야간비행기술을 놀랄 만큼 향상시켰다. 이렇게 작전을 준비하는 동안 최종 협상 시한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 작전의 실행까지는 채 이틀도 남지 않았다. 속도전을 수행하라 토요일 아침이 되자 대원들은 지정된 시간보다 앞서 부대에 집결했다. 최종 검열을 위해 인질구출계획의 수정과 장비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출동 직전까지도 새로운 정보들이 속속 들어왔기 때문이다. 장비 점검이 끝나자 공격부대인 사이렛 매트칼의 지휘관인 요나단 ‘요니’ 네타냐후 중령은, 이 작전의 최대 목표는 인질 구출이지 적의 근거지에 대한 공격이 아니라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시간이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였다. 30분에서 1시간 안에 인질 구출부터 퇴출까지 완수해야만 했다. 이를 위해서는 인질 구출에 직접적인 방해 요소로 작용하는 목표물 이외에는 가급적이면 교전을 피해야 한다. 그리고 인질 구출에 성공하고 나면, 그때는 부수적인 목표물과도 교전한다. 이런 기본적인 방침을 세우고 우발사태 발생 시 행동 요령들을 토의하면서 사이렛 매트칼의 전술 토의는 분위기가 무르익어갔다. 11시 30분경 사이렛 매트칼과 공군 수송비행대대를 포함한 구출부대는 합참의 장성들 앞에서 작전계획을 보고했다. 구출부대는 13시 20분 로드 공항에서 출발하여 시나이 반도의 샤름 알셰이크(Sharm al-Sheikh) 항공기지로 향했다. 수송기와 지상 구출부대와의 합동훈련은 아직 실시된 바가 없었고 지휘계통도 조종되고 있었으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스라엘 정부는 아직 구출작전의 실시 여부를 결정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예비기를 포함한 5대의 C-130 수송기는 러시아 정보수집선과 이집트 레이더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저공비행으로 사막 위를 날았다. 무더운 사막 위를 저공비행하던 수송기는 심한 난기류까지 만나서 샤름 알셰이크 항공기지에 착륙했을 때에는 모든 대원들이 심한 멀미에 시달렸다. 심지어는 사이렛 매트칼 대원 중 1명은 심한 구토증세로 구출작전에서 제외되기까지 했다. 아프리카 대륙으로 출발하다 15시 30분, 숌론 장군은 구출부대의 출동을 명령했다. 더 이상 출발을 미루었다가는 자정의 공격 시간을 맞추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라빈 수상이 아직 구출 명령을 내리지는 않았지만, 임무가 취소된다면 부대를 소환하면 그만이었다. 1번기에는 숌론 장군과 지휘부, 요니와 사이렛 매트칼 대원 29명, 사이렛 찬하님 대원 52명, 벤츠 승용차, 랜드로버 2대가 실려 있었다. 2번기에는 지휘부 추가 인원, 사이렛 찬하님 17명, 그리고 장갑차 2대와 숌론의 지휘용 지프 1대, 3번기에는 사이렛 골라니 30명과 장갑차 2대, 그리고 지프 1대, 4번기에는 사이렛 골라니 20명, 의료반 20명, 지상재급유 요원 10명, 그리고 급유펌프가 실려 있었다. 이렇게 잔뜩 병력과 장비를 실은 C-130은 이륙 시부터 제한중량을 초과한 상태였다. 비행은 약 7시간 반이 걸리는 여정이었다. 샤름 알셰이크를 이륙한 C-130 편대는 고도 50피트로 초저공비행을 하면서 이집트와 사우디아라비아의 레이더 감시망을 피해 홍해를 건너 에티오피아에 도달했다. 일단 에티오피아 영공에 접어들자 C-130은 다시 고도를 2만 피트로 올리고 정상적인 비행을 했다. 당시 에티오피아에는 대공수색 레이더가 없었기 때문에 구출부대가 발각될 염려가 없었기 때문이다. 에티오피아에서 남남서로 비행을 계속하던 편대는 케냐의 북쪽을 거쳐 우간다로 향했다. 그리고 22시 30분경 드디어 우간다의 빅토리아 호수 인근에 도착했다. 이제 몇 분만 더 가면 엔테베였다. C-130이 엔테베 공항 관제탑과 착륙 중인 브리티시 항공 여객기의 교신 내용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웠다. 한편 작전의 총괄지휘를 위한 공중사령부도 출동했다. 예쿠텔 아담 합참부의장과 벤야민 펠레드(Benjamin Peled) 공군참모총장은 보잉 707 지휘통제기에 탑승하여 구출부대의 총괄적인 지휘와 이스라엘 본국과의 연락 임무를 맡았다. 야간의 착륙 계획에 따라 나머지 C-130 수송기 3대는 편대에서 이탈하여 상공에 대기하고, 1번기가 엔테베 공항으로 접근을 시작했다. 숌론 장군과 요니 중령도 조종석에 모여 지상을 향해 C-130이 내려가는 순간을 지켜보았다. C-130은 모든 조명을 끈 채 레이더만으로 고도를 측정하면서 지상으로 향했다. 원래는 야시경을 사용하기로 했었지만 장비의 신뢰성에 의문이 제기되어 레이더 착륙을 감행했다. 베테랑 조종사 샤니 중령의 완벽한 조종하에 기체는 1976년 7월 3일 23시(엔테베 현지 시각으로는 자정)에 엔테베 공항에 착륙했다. 1번기가 23시(현지 시각 자정)를 기하여 착륙을 개시하면서 구출작전이 시작되었다. 기체가 착륙하자 기내는 작전 준비로 바빠졌다. 사이렛 매트칼은 벤츠와 랜드로버의 시동을 켜고 출발할 준비를 했다. 한편 사이렛 찬하님 대원 10명은 착륙한 뒤 정지하기 위해 감속하는 C-130의 사이드 도어로 뛰어내려 활주로에 비상등을 설치했다. 활주로의 끝에 도착한 C-130은 기수를 돌려서 구청사 방향으로 천천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C-130의 후방 램프가 열리면서 3대의 차량이 쏟아져 나왔다. 우간다군으로 위장한 사이렛 매트칼 대원들이 드디어 구출작전을 시작한 것이다. 밤의 정적을 가른 총성 29명의 사이렛 매트칼 대원들은 모두 우간다 군복을 입고 있었다. 이들은 벤츠 승용차 1대와 랜드로버 군용 지프 2대에 탑승했다. 라이트를 켠 3대의 차량은 약 70킬로미터 속력으로 달렸다. 라이트를 끄자는 주장도 있었지만 오히려 끄고 달릴 경우 우간다 경비 병력에게 의심을 살 위험이 있었고, 또 어두운 밤에 헤드라이트를 켜면 강렬한 빛 때문에 눈이 부셔 경비병들이 차량 안의 이스라엘 특수부대원들을 알아보기 힘들 게 분명했다. 약 1분을 달리자 차량 행렬은 구청사로 향하는 차량 전용 도로에 접어들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길 양쪽에서 우간다군 경비병 2명이 나타났다. 오른쪽 경비병이 벤츠를 향해 정차 명령을 내렸다. 벤츠가 계속 달리자 경비병은 소총을 장전하고 차량을 세우라는 수신호를 보냈다. 경비병이 사정권 내에 들어오자 요니는 벤츠의 속도를 줄이고 마치 신분을 증명이라도 할 듯 창문을 내렸다. 뒷좌석에 앉은 요니와 다른 대원은 소음기를 단 베레타(Beretta) M1951 권총을 경비병들에게 발사했다. 그러나 경비병은 쓰러지듯 총알을 피하며 다시 일어섰다. 아무리 숙련된 대테러부대원이라 해도 이동하는 차량에서 좁은 승용차 창문 사이로 움직이는 표적을 맞히는 것은 쉽지 않다. 길가 오른쪽에 있던 경비병은 일어서서 벤츠 앞에 소총을 발사했고, 왼쪽 경비병은 구청사 쪽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후방의 두 번째 랜드로버에 탑승한 대원들이 사격에 가세해 경비병들을 모두 사살했다. 그러나 밤의 정적을 가르는 총성으로 인해 이제 기습의 효과는 기대하기 어려웠다. 요니는 대원들에게 전속력으로 달릴 것을 지시했다. 청사까지는 겨우 200미터도 남지 않았다. 우간다군으로 위장한 사이렛 매트칼의 기만전술은 제대로 먹혀들었다. 비록 최초의 교전으로 기습의 효과를 잃기는 했지만, 테러범들은 어둠 속에서 구출부대를 우간다군으로 착각했다. 사진은 우간다 군복과 AK로 무장한 사이렛 매트칼 대원의 모습이다. 구청사로 돌입하다 구청사 쪽으로 다가가면서 요니의 눈앞에는 테러범들과 우간다 병사들이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 누구도 사이렛 매트칼의 차량 행렬에 총격을 가하지 않았다. 구청사의 중앙홀 입구에 차량을 세운다는 원래의 계획과는 달리, 요니는 벤츠와 랜드로버를 구청사 관제탑 아래쪽에 신속히 세웠다. 인질구출부대가 접근하고 있다는 것을 테러범과 우간다군이 눈치 채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요니는 정차와 동시에 대원들에게 건물 소탕을 명령했다. 사이렛 매트칼의 부지휘관인 무키 베처(Muki Betzer) 소령은 자신의 공격제대를 이끌고 구청사 건물로 돌진하면서 건물 밖의 우간다 병사들에게 총격을 가했다. 그러자 테러범들은 달아나면서 외쳤다. “우간다 놈들이 미쳤어! 우리에게 총질하고 있어!” 사이렛 매트칼의 위장작전이 효과가 있음이 입증되는 순간이었다. 사이렛 매트칼은 일단 구청사에 도착한 이후 3개 제대로 나뉘었다. 그리고 대원들은 작전계획에 따라 구청사의 진입구에 집결했다. 그런데 웬일인지 대원들이 진입을 주저하는 듯 보였다. 요니는 전진하라고 수차례 소리쳤지만 무키는 계속 대기하고 있었다. 시간이 핵심인 구출작전에서 조금이라도 주저하면 그것은 인질의 사망으로 연결된다. 요니는 무키 앞으로 달려 나와 돌격을 지시했다. 실제로 지연된 시간은 15초 정도였지만, 요니에게는 1초가 아까웠던 것이다. 그 순간 도열한 대원들의 뒤에서 총성이 들렸다. 관제탑 뒤의 나무 박스 사이에서 우간다 경비병이 대원들을 향해 총격을 시작한 것이다. 대원들은 곧바로 응사하여 불청객을 제압했다. 그러나 순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방금 전의 총격에 요니가 쓰러졌던 것이다. “요니 중령이 쓰러졌다!” 대원 하나가 외쳤지만 대원들은 멈출 수가 없었다. 요니는 이미 작전의 준비 단계에서 대원들에게 확고히 지시했다. 자신을 포함하여 누가 쓰러지더라도 개의치 말고 작전을 수행하라는 것이었다. 대원들은 요니를 신경 쓸 여유도 없이 그의 지시대로 3개 제대로 나뉘어 작전을 진행했다. 사이렛 매트칼은 공격제대 2개 및 지휘통제반, 이 3개조로 나뉘어 구청사를 공격했다. 다행히도 엔테베 공항 구청사는 단교 이전에 이스라엘 시공사가 건설한 건물이었기 때문에, 사이렛 매트칼은 구청사의 청사진과 사진 및 동영상 등을 확보해놓고 있었다. 구청사의 혈전 요니의 돌격 명령에 제일 먼저 달려 들어간 것은 아미르 오퍼(Amir Ofer)라는 22살의 젊은 대원이었다. 아미르가 중앙홀의 입구를 향해 돌진하는 모습이 보이자 테러범 1명이 유리창을 뚫고 AK-47 소총을 난사했다. 아미르는 첫 번째 출입문 대신 두 번째 출입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실내 한가운데 인질들이 엎드려 있었다. 또다시 총알이 아미르 쪽으로 날아왔다. 아미르는 누운 자세로 자신을 노리는 테러범을 향해 기관단총을 발사하여 사살했다. 그리고 CQB(근접전투기술)의 기본에 따라 오른쪽 벽을 계속 따라가면서 테러범을 찾았다. 한편 아미르의 뒤를 따라 두 번째로 진입한 암논 펠레드(Amnon Peled)가 그의 왼쪽을 돌면서 실내를 수색했다. 그때 엎드려 있던 인질들 사이에서 2명의 남녀가 AK 소총을 들고 아미르를 겨누면서 일어나는 모습이 보였다. 원래 이들은 창밖에서 이동하고 있는 구출부대원들을 조준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달려 들어온 아미르에 놀라 반사적으로 조준 방향을 바꾼 것이었다. 펠레드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반사적으로 테러범 2명을 탄창 하나로 해치웠다. 바로 이때 무키 소령과 아모스 고렌(Amos Goren)이라는 대원이 동시에 중앙홀로 들어왔다. 기둥 뒤에 숨어 있던 테러범 한 명이 아모스를 겨누고 AK 소총을 발사했다. 이와 동시에 아모스도 그 테러범을 발견하고는 사격을 시작했다. 둘은 거의 동시에 총을 발사했지만,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아모스의 탄환이 테러범의 총을 뚫고 들어가 공이를 멈추고 테러범을 사살한 것이었다. 불과 0.1초도 안 되는 간발의 차이로 아모스의 발사가 빨랐던 것이다. 대혼란의 현장 C-130이 착륙한 지 3분 만에 테러범 7명 중 4명을 사살하고 인질을 확보했다. 그러나 아직 인질의 안전이 확보된 상태는 아니었다. 우간다군을 완벽하게 제압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아직 남아 있는 테러범들이 공격해올 가능성도 높았다. 인질을 확보하고 중앙홀을 점령한 작전1제대의 대원들은 긴장했다. 제일 먼저 진입한 아미르는 갖고 있던 확성기로 영어와 헤브루어로 인질들에게 움직이지 말라고 외쳤다. 그러나 혼란에 빠진 인질들은 간단한 지시조차 이해하지 못했다. 인질들 가운데 1명이 갑자기 일어났다. 대원들이 긴장하고 총을 겨누었지만 어린 소녀임을 알고 총구를 거두었다. 그러나 그다음 인질은 그렇게 운이 좋지 못했다. 대원들의 지시를 듣지 못하고 일어난 19세 청년이 테러범으로 오인되어 사살되고 말았던 것이다. 한편 인질 가운데 또 다른 2명이 사살된 채 발견되었는데, 테러범과 대원들 간의 총격이 오가는 과정에서 도비탄에 의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렇게 인질을 확보하고 있는 사이에 작전1제대의 나머지 팀은 VIP 라운지 점령을 시작했다. 그러나 대원들은 VIP 라운지 정문이 잠겨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대원 중 한 명이 안쪽으로 수류탄을 던졌지만 수류탄은 도로 밖으로 튀어나와 대원들 옆에서 터졌다. 그러나 기적적으로 대원 1명만이 파편에 경상을 입었을 뿐이었다. 곧바로 다른 진입구를 찾은 팀이 VIP 라운지로 돌입하자 2명이 손을 올리고 대원들에게 다가왔다. 대원들은 그들에게 멈추라고 외쳤지만 그들은 계속 다가왔다. 대원들은 이들이 인질인지 테러범인지 잠시 고민하는 사이, 다가오는 자들의 허리춤에서 수류탄 주머니를 보았다. 대원들은 주저 없이 소총을 발사했다. 이와 동시에 테러범의 손에 꽉 쥐어져 있던 수류탄이 떨어지면서 폭발했다. 그러나 또다시 기적적으로 중상자는 없었다. 팀원들은 VIP 라운지 인근을 계속 수색하다가 한쪽 방에서 죽어 있는 테러범을 발견했다. 대원들이 방금 가한 치열한 총격 과정에서 도비탄에 맞아 숨진 것이 분명했다. 구출부대는 작전 개시 3분 만에 테러범을 모두 사살하고 인질을 확보했으며, 15분 만에 구청사를 장악했다. 1분 1초를 아끼고 목표를 인질 구출에 집중한 요니의 판단이 적중한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성공적인 작전을 입안하고 지휘한 요니는 이 작전의 유일한 사망자가 되었다. 우간다군을 제압하라 작전1제대가 인질을 구출하는 사이 2제대는 구청사의 2층을 공격했다. 2층은 원래 식당이 있던 자리로 인질사건이 발생한 이후 우간다군 경비 병력의 숙소로 사용되고 있었다. 대원들은 계단을 올라가면서 눈에 보이는 병사들을 하나둘씩 사살했다. 그러나 막상 2층에 올라갔을 때 남아 있는 것은 담요와 침낭뿐이었다. 총격이 시작되자 우간다군은 현장에서 도망간 것이 분명했다. 한편 구청사 밖에서는 지휘통제반이 관제탑의 우간다군과 치열하게 총격을 주고받았다. 지휘통제반은 랜드로버에 탑재된 50구경 기관총을 관제탑에 발사했지만 적의 사격은 좀처럼 잦아들지 않았다. 청사를 점령한 대원들도 교전에 참가했지만 적의 사격을 효과적으로 제압할 수는 없었다. 다소 총격이 잦아들자 군의관이 쓰러진 요니에게 다가가 그의 상태를 살폈다. AK 소총탄이 요니의 쇄골 아래를 뚫고 들어갔다. 부상이 심해서 요니를 살릴 수 없음을 안 군의관은 베처에게 상황을 알렸다. 부지휘관인 베처는 자신이 작전지휘권을 인계받았음을 전 대원에게 알렸다. 이제 문제는 관제탑을 포함한 청사 주변을 제압하는 것이었다. 한편 작전이 시작된 지 6분이 지나 2번기가 착륙했다. 1번기가 차량을 전개한 장소에 대기 중이던 숌론 장군은 2번기로부터 자신의 지휘 지프를 수령하고 장갑차 2대를 이끌고 구청사에 도착했다. 관제탑에 있던 우간다군이 간헐적으로 사격을 가해오자 숌론은 장갑차에 교전을 명령했다. 장갑차에서 기관총과 RPG를 발사하자 관제탑은 이내 조용해졌다. 교전 와중에 3번기도 도착했다. 나머지 장갑차 2대가 3번기로부터 발진하여 구청사 뒤편에 전개했다. 엔테베 도심으로부터 이어지는 도로에서 나타날지도 모르는 우간다 증원 병력을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그사이 최초에 전개했던 장갑차 2대 중 1대가 인근의 우간다 공군기 쪽으로 향했다. 장갑차는 주기되어 있던 우간다군 미그-17기들을 산산조각 냈다. 이스라엘군이 우간다군의 미그기를 공격한 것은 이스라엘군의 안전한 퇴출을 위해 사전에 위협을 제거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이디 아민에 대한 이스라엘 정부의 복수라는 성격이 더 짙었다. 이로써 작전 개시 15분 만에 인질의 구출과 우간다군 제압이라는 어려운 임무가 완수되었다. 그러나 작전이 완전히 성공했다고 말하기에는 일렀다. 모든 인질과 부대원이 엔테베에서 안전히 퇴출하기 전까지는 작전이 성공했다고 말할 수 없었다. 실제로 특수전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이 바로 퇴출이기 때문이었다. 발빠른 퇴출 몇 분 후에 재급유팀과 의료진을 실은 4번기가 도착했다. 의료진이 요니를 포함한 부상자들을 치료하는 가운데 재급유팀도 재빨리 작업에 들어갔다. 한편 구청사를 확보한 구출부대는 인질을 청사 앞쪽에 모아 랜드로버와 트럭으로 수송기까지 후송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인질의 호송에 여념이 없는 사이 엔테베로부터 이어진 도로에 우간다군을 태운 수송트럭 2대가 나타났다. 그러나 이스라엘군이 준비한 장갑차는 손쉬운 표적을 쓸어버렸다. 어둠과 혼란 속에서 인질들은 구출부대원의 지시를 잘 따르지 않았다. 대원들이 여러 차례 소지품을 버리고 차량에 탑승하라고 주의를 주었지만, 인질들 중 몇몇은 소지품을 챙기기 위해 호송 대열을 이탈하여 구청사로 돌아가기도 했다. 또 공포 속에서 히스테리에 빠진 인질 몇몇은 대원들의 지시를 알아듣지 못하는 상태였기 때문에 대원들이 강제로 수송기로 끌고 가야만 했다. 게다가 어둠과 혼란 속에서 대원들은 인질의 수조차 점검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퇴출 과정에서 가장 큰 문제는 인질이 아니라 재급유였다. 사이렛 매트칼이 구청사를 점령하는 사이 사이렛 찬하님은 교전 없이 신청사를 점령하고 연료탱크를 확보해놓았다. 그리고 사이렛 매트칼과 사이렛 골라니가 구청사를 확보하고 인질을 소개하는 동안 재급유팀은 사이렛 찬하님과 합류하여 신속하게 재급유를 시작했다. 수송기 4대에 전부 재급유하기 위해서는 무려 40분 이상이 추가로 필요했다. 그러나 구출부대에게는 이런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이때 707 공중지휘통제기로부터 긴급전문이 들어왔다. 케냐 정부가 이스라엘군의 재급유를 허락한다는 것이었다. 엔테베에서 나이로비까지라면 약 1시간 거리로 현재의 연료로도 문제가 없었다. 구출부대는 재급유를 중단했고, 인질을 태운 수송기 1대가 먼저 엔테베 공항을 이륙했다. 시계는 23시 52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구출부대의 퇴출까지 90분 이렇게 인질을 소개하고도 구출부대의 상당수는 엔테베에 남았다. 인질 호송 수송기로부터 구출자가 모두 105명이라는 보고를 받자, 공중지휘통제기는 지상의 숌론 장군에게 남은 인질이 있는지 확인하도록 지시했다. 정보에 따르면 인질 수는 106명이어야만 했다. 그러나 실제로 구출된 인질은 이스라엘인 93명과 에어프랑스 승무원 12명을 합해 총 105명이었다. 구출되지 못한 인질 1명은 치료를 위해 구청사에서 병원으로 옮겨졌던 73세의 도라 블로크(Dora Bloch)였다. 그녀는 다음날 이디 아민의 수하들에 의해 처형되었다. 숌론은 잔류 인질이 없는지 청사 주변을 수색했다. 피랍기 내부에 인질이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 주기된 에어버스기까지 수색했다. 철저한 수색 끝에 구출부대는 더 이상 남아 있는 인질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한편 구출부대는 공항 청사 주변의 주차장에 시간지연식 폭약을 설치하여 우간다군의 추적 의지를 꺾고자 했다. 7월 4일 0시 30분 3대의 C-130이 엔테베를 이륙하면서 모든 작전은 종료되었다. C-130이 최초로 착륙한 지 90분 만에 인질을 구출하고 모든 대원을 회수한 것이다. 무려 4,000킬로미터의 거리를 극복하고 적지에서 인질을 구한 엔테베 인질구출작전은 모세의 출애굽기를 특수전 영역에서 재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신이 만든 기적이라기보다는 강한 전투력과 뛰어난 리더십, 그리고 뜨거운 동포애가 만들어낸 피와 땀의 결과였다.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을 인도한 모세처럼 이스라엘 특수부대는 20세기 최대의 인질구출작전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작전 결과, 테러범 7명과 우간다군 45명이 사살되었고, 인질 4명이 사망하고 10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구출부대원 1명이 사망하고 5명이 부상을 입었다. 사상 최대의 인질구출작전에서 사망한 단 한 사람은 다름 아닌 구출부대의 지휘관 요니 네타냐후였다. 촉망받던 장교인 요니 중령은 지휘관이 최전선에서 이끄는 강한 군대 이스라엘 국방군의 전통을 장렬하게 온몸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과연 이스라엘 정부와 국방군이 이런 위험한 작전을 감행했어야만 했는가에 대해서는 판단을 내리기 어렵다. 당시 이스라엘군은 욤 키푸르(Yom Kippur) 전쟁의 실망스런 성과로 인해 사기가 떨어져 있었다. 특히 대테러작전에서는 1974년 마알랏 초등학교의 인질구출작전에서 23명의 초등학생이 사망하고, 1975년의 텔아비브 사보이 호텔에서는 인질 8명과 대원 3명을 잃는 등 눈에 띄는 실패를 거듭해왔었다. 작전 실패라는 최악의 상황을 생각한다면, 이스라엘군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도박에 뛰어든 셈이었다. 그러나 훌륭한 리더십과 창조력, 강인한 전투력, 그리고 강한 애국심으로 무장한 젊은 이스라엘 특수부대는 사상 최악의 재앙이 될 수도 있는 사상 최대의 인질구출작전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감하게 수행해 성공해냈다. 무엇보다도 뛰어난 전문 특수전력에 대한 지도부의 신뢰가 없었다면 작전은 실행조차 되지 못했을 것이다. 최고의 부대를 만드는 것은 단순히 예산이나 인력만의 문제가 아니라, 지도부가 일선부대를 얼마나 굳게 신뢰하는가의 문제라는 점을 엔테베의 인질구출작전은 우리에게 시사하고 있다. 이스라엘 최고의 특수부대 사이렛 매트칼 이스라엘은 특수전 전력을 가장 효율적이고 성공적으로 운용하고 있는 국가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특수부대의 수와 병력이 다양하며, 실전 경험 또한 풍부하다. 특히 이스라엘의 특수부대가 다양한 것은 각 임무나 지역에 따라 그에 맞는 특수전 부대를 양성해왔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특수부대에는 사이렛이라는 이름이 붙는데, 이는 헤브루어로 ‘정찰대’라는 뜻이다. 이런 다양한 특수부대들 가운데 가장 정점에 있는 것이 육군의 사이렛 매트칼이다. 육군 제269사이렛 매트칼은 직역하자면, ‘제269합참직할정찰대’가 된다. 사이렛 매트칼은 영국의 SAS를 본떠 1958년 창설된 특수부대로, 전략정찰, 직접타격, 대테러 등의 임무를 수행하는 이스라엘 최고의 특수부대다. 사이렛 매트칼이 가장 많이 수행하는 임무는 전략정보의 수집으로, 조직 편성상으로도 사이렛 매트칼은 군 정보부의 통제를 받도록 되어 있다. 사이렛 매트칼은 이스라엘 최초의 헬기비행대대가 창설된 지 1년 후에 창설되었고, 이후 두 부대 사이에는 긴밀한 공조가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사이렛 매트칼은 이스라엘군의 어느 부대보다도 아랍 적국의 영토로 깊숙이 침투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었다. 사이렛 매트칼은 초기에는 존재 자체가 극비사항이었기 때문에 대원 선발도 비밀리에 실시되었다. 대원은 지휘관이나 모병관이 개인적으로 믿는 정예군인만을 선발했다. 즉 지원한다고 받아 주는 것이 아니라 부대가 직접 고르는 방식으로 대원을 선발했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1980년대부터 지원자를 받기 시작했는데, 고된 훈련 과정을 거쳐 정예 중의 정예만을 선발하고 있다. 선발된 이후에도 20개월 동안 더 훈련해야 부대원으로서 활동할 수 있다. 사이렛 매트칼로의 배속은 이스라엘 사회에서 일종의 특권으로 여겨지고있다. 특히 에후드 바라크, 벤야민 네타냐후(엔테베 작전 시 지휘관 요나단 네타냐후의 동생) 수상이 사이렛 매트칼 출신이고, 이외에도 국방장관, 합참의장, 모사드 국장 등을 배출해내어 부대의 자부심은 매우 높다. 불타오르는 사이렛 매트칼의 부대휘장 아래 모인 대원들의 모습. 사이렛 매트칼은 최고 정예 부대일 뿐만 아니라 수많은 수상과 장관, 참모총장을 배출한 부대로도 유명하다. 그림자 전사 세계의 특수부대 연관목차 (15/24) 그림자 전사 세계의 특수부대 서문 특수부대란 무엇인가? 특수부대의 역사 이 책의 구성 감사의 말씀 [네이버 지식백과] 이스라엘 특수부대 사이렛 매트칼의 엔테베 작전 - 20세기 최대의 인질구출작전 (그림자 전사, 세계의 특수부대(그들의 성공과 실패의 역사), 2009. 5. 11., 플래닛미디어)
213 no image 성공과 실패의 갈림길
[레벨:20]정아브라함
45 2016-12-17
[DBR 경영의 지혜]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결정적 요인은 ‘그릿’장재웅기자 입력 2016-12-16 03:00:00 수정 2016-12-16 03:00:00  1940년 미국 하버드대 연구팀은 대학 2학년생 130명에게 5분간 러닝머신에서 뛰어보라고 요청했다. 표준 체력보다 훨씬 높은 강도로 러닝머신을 세팅해놓은 탓에 5분을 버텨낸 학생은 손에 꼽힐 정도였다. 연구팀은 이 130명의 학생들을 대학 졸업 후 매 2년마다 연락해 근황을 물어보며 추적 연구를 진행했다. 그리고 이 학생들이 60대가 된 시점에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이들이 수십 년간 겪은 직업적 성취도와 사회적 만족도, 심리적 적응 수준은 스무 살 때 러닝머신에서 버텨낸 시간에 비례한다는 점이었다.  성공을 결정짓는 요소로 보통 지능, 성격, 경제적 수준 등을 말한다. 그러나 신간 ‘그릿’(Grit·비즈니스북스·2016년)의 저자인 앤절라 더크워스 펜실베이니아대 심리학 교수는 다른 어떤 조건보다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가장 중요한 요인을 ‘그릿’이라고 정의한다. 그릿은 ‘열정이 있는 끈기’, 즉 ‘실패에 좌절하지 않고 자신이 성취하고자 하는 목표를 향해 꾸준히 정진할 수 있는 능력’을 뜻한다.  더크워스 교수는 고교 수학교사로 근무할 당시 머리가 좋은 학생 중 일부가 예상외로 그저 그런 성적을 거두고, 오히려 사회 통념상 머리가 좋지 않다고 판단되는 학생 중 상당수가 높은 성적을 보이는 점에 의문을 품었다. 또 고교 때 형편없는 수학 점수를 받았던 학생이 로켓을 만드는 세계적 공학자로 성공하는 모습을 보면서 ‘성공에는 재능이나 성적보다 더 중요한 무언가가 작용한다’는 확신을 가졌다. 그리고 그 ‘무언가’를 알아내기 위해 심리 연구를 시작했다.  저자는 힘들기로 악명 높은 미 육군사관학교 신입생 훈련 시 누가 중도에 탈락하고 누가 끝까지 훈련을 받는지, 문제아들만 있는 학교에 배정된 초임 교사 중 누가 그만두지 않고 아이들을 가르치는지, 거절이 일상인 영업직에서 어떤 영업사원이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좋은 판매 실적을 내는지를 연구했다. 그리고 그 모든 성공의 한가운데에 ‘그릿’이 있음을 밝혀냈다. 더크워스 교수는 책을 통해 “성공한 사람들이 가진 특별한 점은 결국 열정과 결합된 끈기였다”고 강조했다. 장재웅 기자 jwoong04@donga.com
212 김형석 교수와의 대화
[레벨:20]정아브라함
47 2016-12-29
기자가 전화를 했을 때 그는 강연차 마산에 가 있었다. 주말 오후에나 좀 시간이 난다고 했다. 100세 가까이 살고 있으면서도 일주일에 1번 이상 대중 강연을 하며 지내는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올해 우리 나이로 97세. 기자를 만나 두 시간 넘게 대화를 나누면서도 자세가 전혀 흐트러지지 않았고, 목소리에 힘이 빠지지도 않았다. 노익장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다. 『100년을 살아보니』 저자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인터뷰 어려서부터 몸이 약해 평생 조심스럽게 살아…20살 못넘길 것 같다는 얘기 듣기도 신체적으로 건강한 사람이 아니라 무리하지 않는 사람이 오래 사는 것 같아요 오래 살아보니 더불어 살았던 때가 행복… 사랑이 있는 고생은 의미있게 남더라 나이 들었다고 후회할 것도, 인생 다 갔다고 안타까워할 것도 없다 아직 누군가를 위해서, 사회를 위해서 일할 수 60∼70년대 김태길 전 서울대 교수, 안병욱 전 숭실대 교수와 함께 ‘철학자 겸 수필가’ 트로이카 시대를 펼쳤던 그의 이름이 요즘 다시 회자되고 있다. 올 여름 펴낸 수필집 『100년을 살아보니』를 통해서다. 혼탁한 세태 속에 그 연령에도 꼿꼿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잔잔한 감동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조심조심, 미리미리. 이 두 키워드가 그의 인생과 건강을 관통한다. 어려서부터 몸이 약했다. ‘20살 넘게나 살 수 있을까’ 하는 주변의 걱정 속에서 자란 그다. “늘 조심스럽게 살아왔다”는 말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다. 요즘도 그는 강연 준비를 2주일 전에 다 끝내놓는다. 무슨 일이든 미리미리 해놓는 습관이 몸에 배었다. 그래야 스트레스를 안 받는다. 그렇게 살며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보지 못한 길을 가고 있는 그의 특별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사진 크게보기 올해 우리 나이로 97세의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60~70년대 `철학적 수필가`의 명성을 다시 확인시켰다. 『100세를 살아보니』라는 책을 통해서다. 오래 살아보니 더불어 살았던 때가 행복했던 것 같다고 말한다. "사랑이 있는 고생은 의미있게 남는다"고 했다. 조문규 기자 질의 :1920년생 평안남도 대동 출생인데 고향은 어떤 곳인가요. 응답 :“대동강 서남쪽 만경대 가까운 곳입니다. 오래전부터 노송이 많이 있고 그 아래 예배당이 있고 그래서 마을 이름이 송산리라 했어요. 소나무산이 있는 마을. 교회에서 신망학교를 세웠는데 거기서 초등학교를 다녔습니다. 시골이었지만 자그마한 문화촌이었습니다.” 질의 :만경대는 김일성 생가로 알려져 있는데…. 응답 :“내가 초등학교 5~6학년을 다닌 학교가 김일성도 다녔던 창덕소학교였습니다. 그런데 사실 만경대가 김일성 생가는 아니에요. 김일성 어머니가 거기서 3∼4㎞ 떨어진 칠골이라는 마을 분인데 만경대에 시집을 와서 김일성을 첫 아들로 낳게 되요. 옛날엔 애를 낳을 땐 처가에 가서 낳았잖아요. 그래서 만경대는 김일성 아버지 집이지 김일성이 거기서 낳지는 않았어요. 김일성 외가는 완전히 기독교 집안입니다. 김일성 외삼촌이 강랑욱 목사라고 유명했던 분입니다. 김일성도 15살 때까지는 교회도 다니고 기독교 분위기에서 자랐죠.” 질의 :김일성 일가와 얽힌 얘기가 있을 것 같은데요. 응답 :“큰외삼촌이 김일성과 같은 해 태어나 같은 마을에 살았습니다. 김일성 어머니가 우리 외가와 같은 강씨였어요. 김일성 어머니가 젖이 적어 우리 외할머니가 대신 먹여주기도 했답니다.” 질의 :그래요? 응답 :“그런데 그 큰외삼촌과 둘째 외삼촌 두 명이 공산당에 피살됐어요. 그리고 내 친사촌 동생이 반공운동 하다가 잡혀 들어간 일이 있는데 그때 우리 외할머니가 찾아가서 ‘내가 김일성을 석 달이나 젖 먹여 키웠는데 이래도 되는가’ 라고 말해서 풀려나기도 했답니다. 해방 직후 혼란스러울 때 얘깁니다.” 질의 :그런 비화도 다 있었군요. 응답 :“해방되고 9월쯤 김성주가, 김일성 본명이 김성주에요, 돌아왔다고 환영한다고 만경대에 간 일이 있어요. 내가 25살. 김일성은 32세였죠. 사람들이 김일성보고 우리나라가 어떻게 되나 물었더니, 친일파 숙청, 사유지 국유화 등 대여섯 가지를 얘기하더라고요. 그때 저건 자기 생각은 아니고 조직에서 나오는 얘기를 교과서 외우듯 하는구나, 하고 생각했었죠. 그리고 얼마 있다가 김성주가 김일성으로 바뀌어서 집권하게 되죠.” 사진 크게보기 질의 :1939년 평양 제3중학교를 졸업하신 걸로 되어 있는데 어떤 학교였나요. 응답 :“창덕소학교 졸업 후 처음에 숭실중학교를 갔습니다. 유명한 기독교 학교였죠. 내가 3학년 때 폐교가 됩니다. 신사참배를 안했다고 일제가 학교 문을 닫아버린 겁니다. 그 학생들을 흡수한 게 일본학교인 제3중학교였어요.” 질의 :숭실중학교는 윤동주 시인도 다녔었죠. 응답 :“윤동주는 숭실중학교 3학년을 같이 다니다 만주 용정으로 갔습니다. 같은 반에서 공부했는데 나이는 윤동주가 3년 위였습니다. 좀 늦게 공부했죠.” 질의 :숭실중학교 시절 윤동주는 어땠나요. 응답 :“두 가지를 기억합니다. 그때도 시를 썼는데 좋은 시인이 될 거라고 봤습니다. 또 성격이 착하고 양순하기 때문에 항일운동을 적극적으로 하진 않았더라도 마음은 항상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런(적극적인)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다 억울하게 당했다고 봅니다. 당시 일본에 한국 학생들이 많았고 그들이 모여 학생회를 만들었는데, 회장이나 간부는 일본 경찰이 늘 감시했습니다. 윤동주는 그런 친구들과 어울리다 이름이 올라 있어서 예비검속에 걸린 것이죠. 아주 성격이 깨끗하고 착했죠. 집안이 전부 기독교 집안이고, 신앙생활을 하니까 그 같은 시가 나왔다고 봅니다.” 질의 :이어 일본 조치(上智)대 철학과를 졸업하셨는데 주로 어떤 철학을 공부했습니까. 응답 :“일본 조치대 예과 1년, 학부 3년 마치고 1945년 졸업했어요. 철학 일반을 쭉 공부하고, 그 다음에 연세대에 와서 강의를 맡아 하면서 계속 공부했죠. 이론철학(논리학)과 실천철학(윤리학) 가운데 나는 윤리학과 역사철학을 전공했다고 할 수 있어요.” 해방이 되면서 고향으로 돌아온 후 그는 2년간 평양에 머물다 월남한다. 이어 중앙중학 교사를 7년간 지냈다 1954년(34세)부터 연세대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30여 년간 후학을 양성하다 1985년 정년퇴임했다. 퇴임 이후에도 저술과 강연으로 현역 시절 못지않은 활동을 계속해왔다. 사진 크게보기 질의 :일본 조치대 졸업 후 고향으로 돌아와 한 일은 뭔가요. 응답 :“평양에서 해방을 맞이하고 2년 있다가 월남했습니다. 평양에 있는 2년 동안 중학교를 하나 만들어서 교장을 하며 농촌교육에 종사했죠. 일본에서 같이 있던 친구들을 교사로 오라고 해서 학교를 운영했습니다. 그 학교 이사장이 잡혀갔는데 나보고 어서 월남하라고 해서 월남하게 됐습니다.” 질의 :당시 평양에는 조만식 선생도 있었지요. 응답 :“조만식 선생도 숭실중학교 출신입니다. 김일성이 정권을 잡았어도 당시 평양을 포함해 북한 사람들은 조만식 선생을 더 존경하고 따랐습니다. 그러자 김일성이 평양의 고려호텔에 조만식 선생을 가둬놓았습니다. 사모님을 제외한 누구도 면회를 못했어요.” 질의 :책 얘기를 좀 해보겠습니다. 평생 몇 권의 책을 펴냈나요. 응답 :“좀 많을 거에요. 한 40권 되지 않을까요.” 질의 :1959년 동양출판사에서 간행한 수필집 『고독이라는 병』이 첫 책이죠. 전후 최고의 베스트셀러였다는 평가를 받는데…. 응답 :“61년 펴낸 『영원과 사랑의 대화』 와 함께 두 책이 다 베스트셀러였죠. 첫 책인 『고독이라는 병』은 문학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책입니다. 우리나라에 수필문학이 정립이 안 된 상태였는데 서울대 피천득 교수가 수필집 『인연』을 내면서 수필문학이 개척이 됐죠. 이어 저의 『고독이라는 병』이 나오면서 수필문학이 자리를 잡아가게 돼요. 그 다음부터 수필문학이 일반화됐다고 할 수 있어요.” 질의 :『영혼과 사랑의 대화』는 어땠나요. 응답 :“원고를 삼중당에 넘기고 1년간 미국에 가 있는데 1년 후 돌아와 보니 『영혼과 사랑의 대화』로 제가 유명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해 출판연감을 보니 그때까지 비소설이 소설보다 많이 나간 적이 없었는데 『영혼과 사랑의 대화』로 기록을 세웠습니다. 박계주 소설 『순애보』가 6만부 나간 기록이 있는데, 『영혼과 사랑의 대화』는 1년에 그보다 몇 배 더 나갔습니다. 비소설이 소설보다 더 많이 나가긴 처음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있는 책이 되었습니다. 애들 6명 학교 보내고 있었는데 수입에도 도움이 됐습니다.” 질의 :인기의 비결이 뭐였다고 보나요. 응답 :“제가 중앙학교 학생들에게 정이 많이 들어 있었다가 연세대에 왔을 때였습니다. 그런 경험을 살려 『영혼과 사랑의 대화』에서 고교 상급자가 후배에게 상담해주는 식으로 글을 썼는데 그것이 요즘 말로 히트를 쳤다고 그럴까요. 당시 대학생 중에 안 읽은 학생이 없었다고 할 정도입니다.” 질의 :가장 많이 호평을 받은 책은. 응답 :“『영혼과 사랑의 대화』죠. 또 하나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많이 나간 책은 『철학입문』입니다. 삼중당이 ‘인문학 입문 시리즈’를 기획하며 나에게 철학분야를 쉽게 써달라고 해서 썼는데 무척 많이 나갔습니다. 서울대 교수들이 시험 답안 채점하다가 비슷한 답안이 많아 물어보니 김형석 교수의 『철학입문』 보고 썼다고 하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15판 정도 나갔습니다.” 질의 :본인이 가장 애착이 가는 책은. 응답 :“역시 『영혼과 사랑의 대화』와 『고독이라는 병』 이죠. 아무래도 독자 호응이 많았으니까. 제가 펴낸 책이 세 가지로 나뉩니다. 첫째 철학분야에선 『철학의 세계』 『종교의 철학적 이해』 『역사철학』 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수필분야가 있고, 세 번째 기독교분야에선 『예수』 『어떻게 믿을 것인가』 두 책이 베스트셀러였습니다. 세 분야에서 제일 많이 나간 것은 역시 수필이고, 그 다음이 기독교입니다. 철학은 전공자들이 주로 보고.” 질의 :철학자와 수필가 어느 쪽이 더 본인에게 맞는 호칭일까요. 응답 :“본업은 철학인데 밖에 나가면 수필가가 되고 말았어요. 고등학생들도 김형석 교수하면 수필가라고 하죠. 얼마 전 여고 3학년에 강의하러 갔는데 수필가로 소개했습니다.” 1920년 태어난 동갑내기 철학자이자 수필가인 김태길(2009년 타계) 전 서울대 교수, 안병욱(2013년 타계) 전 숭실대 교수의 얘기를 빼놓을 수 없다. 60~70년대 철학자이자 수필가 트로이카 시대를 열었다. 이 세 명의 1세대 철학자들은 수필을 통해 당시 젊은이들의 윤리-실존적 상처를 어루만지고 위로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사진 크게보기 질의 :김태길, 안병욱, 김형석 세 분의 공통점이 많습니다. 모두 장수한 점도 그렇고…. 응답 :“돌이켜보니 60~70년대 젊은이들이 어려웠고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 젊은이들에게 관심과 희망을 준 이들이 시인이나 종교인이 아니라 우리 셋이엇던 것 같아요. 제일 영향을 많이 주었던 것 같습니다. 6년 전인가 충청북도 영동에 강연을 가서 끝나고 앉아 있는데 지방 유지가 와서 그래요. ‘우리 60~70년대 정말 어렵게 살았습니다. 정신적으로도 어려웠는데 안병욱 선생과 김형석 선생이 방송도 많이 하고 책도 많이 내서 그걸 보면서 희망을 갖고 살았다’고 하더군요. 기독교인이었던 듯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내주신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때 안병욱 선생님이 입원중이라 전해드리진 못했습니다.” 질의 :세분이 친하게 지내셨죠, 누가 더 인기가 많았나요. 응답 :“학문적인 면은 김태길 선생이 앞서고, 사회활동은 안병욱 선생이 앞서고, 나는 그 중간쯤 될 거에요. 한번은 안병욱 선생이 내게 전화를 해서 ‘셋이 일만 했지 이제 80이 넘었는데 1년에 4번 만나서 차도 마시고 우리 셋이 좋은 시간 가지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김태길 선생에게 전화해서 얘기했더니 ‘그거 하나만 생각하고 또 다른 생각은 안하는 것 같다’고 하더군요. 이제 한 사람씩 떠나갈 텐데 남은 사람은 힘들어서 어떻게 사나. 이렇게 떨어져서 일하다가 한 사람이 가면 이제 갔구나 하고 생각하지….’ 그렇게 서로 존중하면서 친했습니다. 그 후 얼마 있다가 김태길 선생 먼저 가고 나서 안병욱 선생이 ‘이제 김형석 교수 혼자 남게 될 거 같다’고 했는데 정말 그렇게 됐어요.” 질의 :많이 힘드셨겠네요. 응답 :“김태길, 안병욱 선생에 이어 제 어머니와 집사람 마저 떠나니까 집이 텅 빈 것 같았습니다. 1년은 참 힘들었어요. 김태길 선생은 충청도 교향으로 가고. 안병욱 선생과 나는 이북이니 강원도 양구를 택했어요. 양구 박수근 미술관 옆에 ‘철학의 집’을 지었는데 안병욱 선생과 나의 기념관입니다. 다 지었는데 좀 더 크게 지을 예정이다. 안병욱 선생 장례식을 거기서 했습니다. 나도 거기 가서 할 겁니다. 한 달에 한번은 양구에 갑니다. 가서 강연도 하고 얘기도 하고 인문학 강좌도 만들어, 서울 제자 교수들이 가서 도와도 줍니다. 다들 좋게 느껴요. 시인 소설가 미술가는 기념관을 만드는데 철학자는 없잖아요. 잘됐다고 생각해요. 어린 시절 사진도 거기 다 있습니다.” 질의 :존경하는 스승이 누구인가요. 응답 :“첫째는 도산 안창호 선생입니다. 마지막 강연을 들었습니다. 감옥 있다 건강이 안 좋아 가출옥 했을 때 고향에서 강연을 한 번하고 교회에서 설교도 하다 몇 달 후 돌아가셨습니다. 마음의 한 스승입니다. 또 한 분은 중앙학교에 7년간 재직할 때 만난 인촌 김성수 선생입니다. 인품이 좋은 분이셨습니다. 많이 배웠어요. 그리고 김태길 안병욱 선생과 친하게 지내며 스승 못지않게 존경하며 지냈습니다. 세 명 모두 정년퇴직 하고도 계속 사회적으로 일했습니다. 셋이 만나면 사회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우리 시대 젊은이들에게 가치관을 줘야하는데….” 질의 :세 분이 활동하던 시대를 ‘수필 철학’ 시대라고 불러도 될까요. 응답 :“세 명의 공통점입니다. 철학적 문제를 수필 수상의 형식을 밟아서 전해줬습니다. 상아탑적인 철학에선 철학자들이 대중을 자꾸 자기들에게 오라고 하는데 우리는 가서 데리고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게 우리 역할이었습니다. 철학에서 인문학으로 확장해 나갔죠. 책도 많이 썼지만 독자도 많았습니다. 그것을 통해 고전이 많이 읽혔다고 본다.” 질의 :60~70년대 젊은이들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위로했다는 평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응답 :“그렇게 보는 게 편할 것 같아요. 이 시대에 어떤 가치관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라도 그런 역할을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 거죠. 셋 다 실존주의 시대를 살았습니다. 구라파에 실존주의가 유행했던 시대였죠. 그 실존주의를 한국적인 우리 문제로 풀어내려고 했습니다.” 사진 크게보기 질의 :실존주의란 무엇인가요. 응답 :“인간이란 무엇인가.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런 문제를 철학적으로 답해 보는 거죠. 과거엔 철학의 대상이 존재였습니다. 자연이 되기도 하고 종교가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실존주의는 인간 자체를 연구하는 거고, 인간의 문제를 자아에서, 즉 나 자신이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다 보니 인간의 절망, 죽음 같은 문제들이 떠올라오게 되죠. 제1차세계대전부터 2차대전 직후까지 실존주의가 세계적인 과제가 됐습니다. 한국에선 6ㆍ25전쟁 이후 실존주의를 받아들였습니다.” 질의 :실존주의는 지금도 필요한 철학인가요. 응답 :“실존주의는 개인 문제인데 지금은 사회과학적 과제가 더 커졌습니다. 사회철학적인 시대라고 할까요. 사회가 자꾸 변하는 거죠. 실존주의를 일으킨 사람은 니체, 키에르케고르 같은 철학자입니다. 그들은 사회문제보다 개인의 문제를 다뤘다고 봐요. 2차대전 이후엔 마르크스주의, 사회주의, 실용주의 등이 나오면서 개인보다 사회의 문제가 부각됐습니다. 우리 셋도 실존주의에서 출발해서 그걸 바탕으로 한국적 사회문제로 확장해 나갔습니다.” 질의 :한국적 사회문제란 무엇입니까. 응답 :“정신적 황폐 속에서 인간과 인생의 가치, 역사의 방향 이런 걸 모색하던 때였습니다. 한국적 가치관의 탐구라고 할까요. 우리 민족의 공통된 가치관을 찾아보려는 거죠. 우리 전 시대에 잠깐 나왔던 실학사상 같은 것이 우리 시대에도 나와야 한다고 봅니다.” 질의 :어떤 사회가 ‘좋은 사회’라고 보십니까. 응답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일본 같은 나라가 세계를 이끌어 가는데 그 나라들의 특색 가운데 하나는 국민의 70~80%가 독서를 많이 한다는 겁니다. 그걸 못하는 나라는 정신적인 영도력을 못 가집니다. 남미를 여행해보면 책 읽는 사회가 아니죠. 아시아에서 독서 하는 나라는 일본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조금 좇아가는데 아직 멀었습니다. 문화에 참여하는 국민이 많아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한국은 큰 나라가 아니기 때문에 정치보다 문화로 가야한다는 생각을 해왔습니다. 어제 마산에서 강의하면서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교육은 콩나물에 물주기와 같습니다. 물을 안 주면 말라버립니다. 대학으로 끝난다고 하면 그걸로 마르는 거고, 50대에 끝난다면 거기서 말라버립니다. 콩나물 물주기는 죽을 때까지 계속되어야 합니다.” 질의 :올해 새로 펴낸 수필집 『100년을 살아보니』를 보면, 인생에서 보람 있는 나이를 60~75세로 해놓았습니다. 응답 :“왜 60세냐, 60이 되니까 내가 나를 믿게 되더라고요. 후배들 보기에도 떳떳하고, 명예만 좇지도 않고. 그리고 75세까지는 계속 성장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콩나물에 물 안주면 거기서 끝나버립니다. 계속 책 읽고 생각을 하면 85~86세까지는 연장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때까지 사회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내가 이 나이까지 강연을 하는 이유는 내 수준보다 사회 수준이 낮으니까 그런 것 아닐까요. 김태길, 안병욱 선생과 내가 세 명 모두 다 60년대 초반에 미국에 있었습니다. 당시 미국 교수들과 백인들이 제일 많이 한 얘기가 바로 “인생은 60부터”라는 말이었습니다. 당시 한국에선 60이면 인생이 끝나는 줄 알았는데 그때 우리 세 명 모두 공통의 자극을 받았습니다.” 질의 :최근 박근혜 대통령 탄핵 정국을 어떻게 보시는지. 응답 :“법적으로는 잘못이 없다고 해도 질서를 무너뜨렸습니다. 인촌 김성수 선생한테 인간관계에 대해 많이 배웠습니다. 직장과 사회생활 할 때 절대로 아첨하는 사람은 가까이 두지 말고 나도 아첨하는 사람이 되면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금 어려운 것도 그 때문이라고 봅니다. 아무리 개인이 유능해도 옆에 유능한 사람을 두지 않으면 성공 못합니다. 편가르기 하는 사람은 절대 데리고 있지 말아야 합니다. 편견을 가진 사람은 집단 이기주의가 됩니다. 지금 정치가 편가르기 아니에요.” 질의 :법보다 질서가 더 중요한가요. 응답 :“김영삼 정부 때부터는 힘이 아니라 법이 지배하는 사회가 됐잖아요. 그건 중간 사회이고 선진사회는 질서가 중요해요. 법보다 양심, 도덕과 윤리가 중요해요. 국민들은 그 질서를 믿고 살았는데 큰 일 났다고 생각하여 촛불집회에 나오는 거죠. 지도자가 법의 제제를 받는 걸 원하지 않지만 그걸 안하면 질서사회로 올라가질 못해요. 박근혜 대통령에 바라는 게 있다면 이겁니다. 잘못한 것은 더 많이 얘기하라, 어떻게 피해갈까를 생각 말고. 정치는 친구가 있어야 하는 것. 혼자서는 정치를 못해요. 뭔가 출발부터 지금 와서 보니까 잘못 들어선 것 같아요. 아첨하는 사람, 편가르는 사람을 멀리하는 것은 인간관계 기본인데 그걸 몰랐던 거 같아요.” 질의 :선생님 수필의 오래된 주제는 ‘영원’이라는 평가를 받는데 ‘영원’은 어떤 의미인가요. 응답 :“종교와 실존철학(윤리, 역사)에서 모든 과제가 우리는 시간 속에서 사는데 그 결과가 영원과 일치하면 역사에 남고 시간으로 끝나면 역사에서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영원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미래를 창조할 수 있는 원동력입니다. 철학은 영원에 대한 애모심입니다. 지성적이고 고독한 사람은 영원을 찾아갑니다. 깊은 고독에 빠져보지 않으면 영원을 창조 못 합니다. 역사를 창조하는 사람은 고독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질의 :‘영원’은 좀 추상적인 얘기로 들립니다. 이번에 펴낸 『100년을 살아보니』는 제목부터 아주 구체적이어서 더 끌리는 것 같습니다. 이 책은 어떻게 쓰게 됐나요. 응답 :“앞으로 글을 얼마나 쓸까 싶어서 2015년 2016년에 많이 썼습니다. 출판사에서 100년 가까이 살 경우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할만한 것을 써봐달라고 해서 쓰게 됐어요. 책 제목은 출판사에서 그 제목을 가져와서 달게 됐습니다.” 사진 크게보기 질의 :100년 가까이 살아보니 느낌이 어떠신지요. 응답 :“오래 살아보니 더불어 살았던 때가 행복했던 것 같습니다. 내가 남겨준 것이 쌓여서 역사가 되고 하는 것 같아요. 다른 사람의 짐을 내가 대신 져준 기억이 행복하게 오래 남습니다. 젊은이의 고민을 대신해 주고, 기독교의 고민, 정치가의 고민을 내가 대신 생각해보았을 때 같은 경우죠. 사랑이 있는 고생은 의미있게 남는다고 할까요. 그러니까 나이 들었다고 후회할 것도 없고, 인생은 다 갔다고 안타까워할 것도 없습니다. 아직 누군가를 위해서, 사회를 위해서 일할 수 있는 사람은 창조적일 수 있습니다.” 질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 같은 것은 없나요. 응답 :“나는 인생을 아름답다고 봐요. 인간은 선하고 아름답게 살아가는 동안은 누구나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양구에 가면 내 글이 하나 있습니다. 자다가 우연히 일어나서 메모를 했습니다. ‘나에게는 두 별이 있었다. 진리를 위한 그리움과 겨레를 위하는 마음이었다. 무거운 짐이었으나 사랑이 있었기에 행복했다’. 그 메모를 지금도 보면 결국 내 인생이 학자로서 진리를 찾은 것과 불행한 동포들 사이에 살면서 겨레를 위해 마음을 가졌던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둘 다 무거웠지만 사랑이 있었기에 행복했습니다. 자다가 깨서 메모를 남겼는데 내 친구들이 이 글을 보고 그럴 거라고 하더군요.” 질의 :후회되거나 아쉬웠던 일은. 응답 :“후회되는 것도 많지만 오래 생각 안 해요. 잘못되고 후회되는 것에 매달리는 것보다 잊어버리고 앞으로 가자는 생각이죠. 만회할 수 있는 게 뭔지를 생각하는 편입니다.” 질의 :평생을 기독교와 함께했는데 요즘 한국 교회를 어떻게 보시나요. 응답 :“내가 기독교인인데다 연세대에 있어서 잘 압니다. 대교회주의는 안됩니다. 교회를 위한 교회는 안 된다는 얘깁니다. 그런걸 교회주의라고도 합니다. 그리스도 정신으로 사회와 역사에 희망을 주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교회가 커지면 교회주의에 빠지고 교회가 목적이 됩니다. 그건 아닙니다. 옥스퍼드, 케임브리지, 하버드, 예일 등 세계의 명문 대학은 모두 신학교로 시작했지만 그런 학교들을 지금 기독교 대학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종교가 인문학 방법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타락합니다. 세계사를 봐도 그렇습니다. 교회를 살린 나라는 후진국가이고, 기독교 정신을 살린 나라는 선진국가입니다. 구라파에 기독교가 없어지지 않습니까. 그렇게 되기 전에 교회가 희망을 줘야 합니다. 영원은 영원불변이 아니라 영원히 창조적이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예수님의 뜻은 창조적이고 희망적입니다, 철학자들은 다 그렇게 보는데 교회 목사들이 교리화하면서 형식만 남았습니다.” 사진 크게보기 질의 :건강의 비결은. 응답 :“지금 내가 100살이 다 되어 가는데 건강의 원동력은 경험 안 해본 사람은 잘 모릅니다. 오래 사신 분들의 공통점이 있어요. 욕심이 적은 사람, 일을 잘하는 사람. 욕심 많은 사람은 스트레스를 많이 받습니다. 욕심이 많은 사람은 행복하지 못합니다. 일을 사랑하는 사람은 건강합니다. 80 넘어서도 일하는 사람은 다 건강합니다. 그런데 이런 얘기를 해줘도 잘 모릅니다. 그래서 건강 비결 자꾸 물어보는데 대개 나도 모른다고 합니다. 찾아내라고 합니다.” 질의 :크게 아팠던 적은 없었나요. 응답 :“어려서 건강이 나빠서 항상 조심해야 했어요. 14살에 건강이 너무 나빠서, 무슨 병인지 잘 모르겠는데 간질병으로 부모님이 생각했는가 봐요. 달리기하다 쓰러지고 그래서, 부모님과 의사는 얘는 희망이 없다고 그랬어요. 나도 느끼고요. 건강 때문에 중학교 못갈 줄 알았어요. 어머니는 제가 20살까지만 사는 것 봤으면 좋겠다고 하셨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건강에 무리는 절대 안 해요. 강연을 많이 다녀도 2주일 전에 강연할 준비를 미리 다 해놓죠. 급박하면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내일 모레 강연이 있다고 하면 충분히 잠도 자고요, 나는 일하기 위해 사는 거 같아요, 그런데 행복해요. 그리고 무리를 안 하고요. 오래 사는 사람은 절대 무리를 안 해요. 신체적으로 건강한 사람이 오래 사는 게 아니고 무리하지 않는 사람이 오래 사는 거 같아요. 제가 아는 130세까지 산 목사님이 계셨는데 절대 무리를 안 해요. 100세까지도 정신이 깨끗했어요.” 질의 :운동은 얼마나 하시는지. 응답 :“50이 넘으면 운동하는 게 좋아요. 운동을 위한 운동은 하지 말고요. 독일 갔더니 국민운동이 수영과 자전거더군요. 어딜 가든 자전거길이 있고 공공시설엔 수영장 있어요. 옳다고 봐요. 80 넘으면 제일 먼저 오는 게 다리 힘이 빠져요. 지금 내 나이에 걸어다니는 사람 별로 없거든요. 그건 자전거 타는 게 좋아요. 나는 중학교 4학년을 자전거 타고다녔어요. 옛날이지만 도움이 되는 거 같아요. 지금은 수영을 하고 있어요. 나는 약은 가능한 잘 안 먹어요. 나이 들면 소식할 수밖에 없어요. 나처럼 일 많이 하는 사람은 많이 먹어야 해요. 육식을 해도 다 소화시켜요. 100살 넘으면 먹고 싶어도 못 먹어요.” 질의 :다시 태어난다면 꼭 해보고 싶은 일은. 응답 :“다시 태어나도 지금 하는 일 하겠습니다. 교육과 학문. 우리나라에 가장 필요한 일이라고 봐요.” 그는 지금도 200자 원고지에 만년필로 글을 쓴다. 매일 장문의 일기를 쓰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일과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고, 매주 세 번 수영을 한다. 배영대 문화선임기자 balance@joongang.co.kr
211 초대교회 역사 [1]
[레벨:20]정아브라함
40 2017-02-17
신문에 그리스정교회 신부가 대담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우리에게 유익한 몇가지가 있어 참고로 올립니다. 게재 일자 : 2017년 02월 17일(金) “교회가 진보·보수로 성향 나누는 건 우스운 얘기” ▲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의 회장을 맡고 있는 암브로시오스 대주교는 “한국의 교회가 여러 단체로 나뉘어 있지만 이는 교회의 역사에서 없었다. 사도들이 보수다, 진보다 라고 자기 성향을 나타낸 적이 있느냐?”라고 되물었다. 한국정교회 대교구 성니콜라스 성당으로 들어서고 있는 대주교. 김호웅 기자 diverkim@ - 한국정교회 대교구장조성암 암브로시오스 교회는 정치적·세속적 아닌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모임 계속 갈라지는 모습 보이고 외형적 대형화만 추구한다면 신자 없는 텅 빈 교회 될 수도 올해는 종교개혁 500주년 해 타인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보다 자신이 먼저 회개하고 반성해야 그리스도교 위기 벗을 수 있어 인터뷰 = 엄주엽 선임기자(문화부) 1970∼1980년대 초만 해도 서울 마포에서 서대문 쪽으로 향하다 아현 고개에 못미처 오른편 구릉에 이국적인 둥근 돔(dome)의 성당이 우뚝 솟아 눈길을 끌었다. 지금은 빌딩과 아파트 숲에 가려 잘 보이지 않지만, 이곳이 1968년에 지어진 비잔틴 양식의 한국정교회 대교구 성니콜라스 성당이다. 당시에 ‘웅장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는데, 워낙 커진 한국의 교회와 성당 건물에 익숙해져 이제 이곳은 ‘아담한 예배당’이란 표현이 어울린다. 세계적으로 정교회(正敎會·Orthodoxy Churches)는 가톨릭, 프로테스탄트(개신교)와 함께 3대 그리스도교로 어깨를 나란히 한다. 20세기 시작과 함께 한반도에 들어왔지만 역사적 굴곡 속에서 교세를 키우진 못했다. 한국정교회 대교구장 암브로시오스 아리스토텔리스 조그라포스(한국명 조성암·趙聖巖) 대주교는 정교회의 중심 뿌리인 그리스 출신으로, 한국에 온 지는 햇수로 19년째다. 지난해 11월 개신교 중심의 국내 진보적 단체인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의 회장을 맡았다. 정교회 대주교가 세계교회협의회(WCC) 산하 NCC(나라별 단위협의회) 수장을 맡기는 세계적으로도 처음이라 화제가 됐다. 지난 2일 찾은 암브로시오스 대주교의 집무실은 응접 소파도 놓지 못할 정도로 작았다. 낡은 책상에는 컴퓨터가 놓여있고, 벽에 걸린 정교회의 성화(聖畵)인 이콘(icon)이 없다면 대주교의 방이라고 느끼지 못할 만큼 검박했다. 탁자도 없이 의자에 마주 앉아 인터뷰를 했다. 깊고 맑은 눈, 긴 회색 수염 사이의 부드러운 목소리, 진지하며 따뜻한 분위기의 인물이었다. NCCK 회장이라는 선입견 탓에, 다소 파격적일 것이란 기대는 맞지 않았다. 역시 ‘오소독스’ 교회의 대주교였다. 가벼운 질문부터 했다. ―대주교께서 수염을 기른 것은 정교회의 전통입니까? “정교회 성직자들이 대개 수염을 기르니 그렇게 생각할 만합니다. 고대부터 그리스 등의 지중해 연안 남자들은 수염을 기르지 않으면 이상했습니다. 예수님과 사도들도 수염을 다 길렀습니다. 수염은 정교회의 교리나 전통이 아니고, 기르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그저 그 지역의 외형적인 전통일 뿐입니다.” 하긴, 성화 속의 예수도 항상 수염을 기른 모습이다. 초대 교회 전통을 잇는 정교회 성격과 무관하진 않을 듯하다. ―성 니콜라스 성당의 이콘이 아름답습니다. 가톨릭 성당과도 다른 분위기입니다. 정교회에서 이콘이 종교적 의미가 있겠지요? “이콘은 로마 박해시대의 카타콤바(catacomb·초대 교회 때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피해 피난처로 사용된 지하묘지)에도 그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예술적으로 높은 경지지만, 장식을 위한 것이 아니고 그 주된 목적은 가르침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성서는 글로써 가르침을 전하지만, 성화는 그 구성과 회화로써 가르침을 전합니다. 성화를 숭배하진 않습니다. 우리가 부모나 선조의 기일이나 장례식 예배에서 사진을 보고 절을 하거나 입을 맞추듯, 성화를 보면서 존경을 표하는 것, 공경하는 것입니다. 4세기 신학자이자 성인인 성 대 바실리오스는 ‘공경은 화폭이 아니라 그 실체로 가는 것’이라고 말했지요.” 그리스도교는 7∼8세기 성화에 대한 ‘우상’ 논쟁이 치열했다. 787년 제7차 세계공의회(公議會·그리스도교 지도자와 신학자들이 모여 교회의 신조와 원칙에 관한 문제를 결정하는 회의)가 삼위일체의 하나님만이 ‘예배’의 대상이고, 성인들을 ‘공경’하기 위해 성화를 사용할 수 있다고 정리를 했다. 대주교는 대학원에서 예술사를 전공했을 만큼 성화에 대한 조예가 깊다. ‘성화와 불화의 유사성’이란 논문을 내기도 했다. “이집트 시나이에 있는 성카테리나 수도원에서 2년간 도서관장을 지냈습니다. 그곳은 바티칸 다음으로 성서 필사본이 많고, 세계에서 가장 큰 성화갤러리가 있습니다. 연구를 위해 전 세계에서 온 저명한 학자들을 만나면서 예술사를 공부하게 됐습니다. 이후 한국에 와서 성화와 불교의 탱화와 닮은 점을 보게 됐지요. 비잔틴(동로마제국) 예술이 문화적 차이가 큰 불교 예술과 닮은 점에 항상 의문이 있었어요. 알렉산더 대왕 때 인도까지 진출하며 비잔틴 예술이 불상 등에 영향을 미쳤고, 나중에 실크로드를 통해 불교문화와 교류했습니다. 글이나 말로는 표현하지 못하는 것도 예술과 그림으로는 느낌을 전달할 수 있습니다. 성화와 불화의 유사성은 그렇게 생겨났습니다.” ―정교회가 한국에서 널리 알려져 있진 않습니다. ‘오소독스’라는 이름이 말해주듯 ‘원형’ ‘정통’의 의미가 종교적으로 짙은 것 같습니다. “정교회, 곧 ‘오소독스’라는 용어는 초대 교회의 1000년 동안은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1000년 동안 ‘하나의 교회’였으나 1054년 커다란 분열을 맞게 됩니다. 초대 5대 관구에서 나중에 가톨릭으로 지칭되는 로마 교회와 예루살렘·안티오키아·알렉산드리아·콘스탄티노플의 4개 교회가 분리되는데, 이 4개 교회에 ‘오소독스’를 붙입니다. 올바른 교회, 교리를 지켜 내려온 교회라는 의미입니다. 동북아시아에서는 ‘오소독스’를 ‘바를 정자(正)’로 번역해서 ‘정교회(正敎會)’로 했습니다. 역사나 학문적으로 보더라도 정교회는 분열 이전 7차례 세계공의회를 통한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오고 있습니다. 로마 가톨릭은 홀로 있게 되면서 여러 변화를 겪습니다. 사례 하나만 들면, 정교회에는 미혼과 기혼 성직자가 있는데, 이것이 원래 초대교회 때 모습입니다. 사도들 중 결혼 한 분도, 안 한 분도 있었지요. 분열된 후에 가톨릭은 미혼 사제만을 가지게 됩니다. 로마 교회는 홀로 남다 보니 실수와 잘못을 하면서 16세기에 다시 한 번 커다란 분열을 맞습니다. 이른바 ‘종교개혁’으로 프로테스탄트가 다시 분열돼 나온 거지요. 가톨릭은 가장 최근에만 봐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새로운 교리를 만드는 등 많은 변화를 하며 현재의 모습이 됐습니다.” ―가톨릭이 변화를 겪기도 했지만,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구원의 보편성을 이르는 ‘익명의 그리스도인’을 인정하는 등 현대에 맞게 변화해온 건 긍정적으로 봅니다만. “예수그리스도는 변하지 않는 분입니다. 예전이나 오늘이나, 성서의 말씀이나 교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가르치는 방법은 변할 수 있습니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교리적인 가르침이 변질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 19년째 한국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암브로시오스 대주교는 “한국 젊은이들이 내면과 외면이 모두 아름다운데, 성형이나 머리 염색으로 고유한 아름다움을 해치는 게 안타깝다”고 말했다. 김호웅 기자 diverkim@ ―가톨릭은 교황부터 하이어라키, 곧 위계(位階)가 분명한데, 정교회는 다른 것 같습니다. “가톨릭과 정교회의 가장 큰 차이입니다. 사도 시대 때는 공의회(公議會)라는 민주적인 시스템을 가졌습니다. 성서 등에 어떤 문제가 있을 때 사도 혼자 결정하는 게 아니라 같이 모여 논의했고 모든 교회에 알렸습니다. 하지만 서방 교회 가톨릭은 교황 중심으로 바뀌었습니다. 여기서 바로 교황의 ‘무오류설’이라든지 다른 교리를 만들어 내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누구라도 실수할 수 있고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동방의 정교회는 나만이 그리스도의 대리자이며, 나만이 결정하고 승인하는 존재(교황)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하나였던 초대교회가 나뉘게 되는 중요한 요인이 됩니다. 사도들은 모두 평등한, 수평적 관계였습니다. 초대 교회의 중심이 된 다섯 교회는 ‘동등한 가운데’ 로마 교회의 주교가 의장 역할을 했을 뿐입니다. 지금도 정교회는 가톨릭과 일치한다면 동등한 가운데 첫째 자리로 로마 교회를 인정할 것입니다.” ―가톨릭과 개신교에 비해 정교회는 ‘예수의 부활’을 중시합니다. 그 의미는 무엇입니까. “정교회를 사람들이 ‘부활의 교회’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부활절을 가장 큰 축일(祝日)로 중요시합니다. 초대교회는 부활을 가장 중시해, 부활절 전에 사순절(四旬節)을 어떻게 지내고, 어떤 예배를 지냈는지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언급했다시피, 그리스도가 부활하지 않았다면 그리스도교와 신앙도 없었습니다. 주님의 탄생은 큰 축일이지만 구원의 시작, 곧 그가 부활하지 않았다면 인류 역사에서 여러 현자와 다를 게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죽었다 부활한 유일한 분으로서 부활이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준 것입니다. 우리는 육체적으로 한번은 죽지만 영적·육적으로 부활함으로써 영원한 삶을 살게 됩니다. 한국은 그리스도인이 많지만, 성탄절은 누구나 기리면서도 부활절은 조용하게 지내는 것을 봅니다. 한국의 자살률이 다른 나라보다 높습니다. 영원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가르침을 전달하고 인식할 수 있다면 좋은 해결책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흔히 한국정교회에 대해 ‘그리스정교회냐, 러시아정교회냐’는 질문을 한다. 세계적으로 3억 명 정도의 정교회 신도가 있는데, 그리스와 러시아정교회가 양대산맥이라고 할 수 있다. 정교회는 대관구나 대교구가 없어도 그 지역의 명칭을 붙여 한국정교회, 미국정교회 등으로 불러 자치적 성격을 강조한다. ―한국정교회는 역사적으로 한반도의 정치적 격동과 함께했습니다. 한국정교회의 역사를 한번 짚어주십시오. “1900년 2월 17일 러시아 모스크바 대주교청에서 파견한 선교사들에 의해 처음 성찬예배가 이뤄지며 한국에서 정교회의 역사가 시작되지만 1904년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하면서 일본이 러시아인과 선교사들을 추방합니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으로 러시아 자체에서 정교회가 박해를 받아 한국정교회에 대한 지원이 완전히 끊겼고, 서울 정동의 성당과 토지 등 정교회 재산도 일본정교회 소유가 돼 교회 유지 자체가 힘들었습니다. 해방 직후에는 한국이 일본과 러시아를 모두 적대시하면서 한국정교회는 ‘고아’가 돼버립니다. 한국전쟁으로 단 한 분의 한국인 김의한(알렉세이) 신부가 납북됐죠. 유엔군으로 참전한 그리스군 종군신부들의 노력으로 회생의 기회를 맞았고, 1955년부터 지금까지 세계총대교구청에 속하며 2004년 대교구가 됩니다. 현재는 한국에 2개의 수도원과 7개의 성당 그리고 소성당 몇 개가 더 있습니다.” 원래 정동에 있던 성당과 토지 등 정교회 재산은 한국전쟁 이후 미국정교회의 도움을 받아 일부 되찾게 된다. 이런 역사적 질곡에서 자유로웠다면, 한국정교회는 지금 훨씬 큰 모습이었을 것이다. ―사도 바울이 처음 전도한 그리스의 유서 깊은 에기나섬이 고향으로 알고 있습니다. “에기나섬은 그리스의 부산항이라고 할 수 있는 아테네 남쪽의 지중해 항구 피레오스에서 가까운, 아름다운 섬입니다. 그리스 사람들은 에기나섬에서 바울로부터 그리스도교가 전파됐고 신약성서도 그리스어로 처음 쓰였으며 신앙적으로도 깊게 전해진 데 대해 자부심이 큽니다. 고등학교시절까지 에기나섬에서 보냈고, 신학은 아테네대학에서 공부했습니다. 미국으로 가서 더 공부한 뒤 박사학위를 끝내고 한국에 오게 됐습니다.” ―아테네 신학대를 우등으로 졸업했고, 미국 유학 후 교회의 주요 보직을 맡기도 했는데, 본격적인 목회지로 한국을 선택한 건 좀 의외로 보입니다. “혼자 결정한 것이 아니고, 교회로부터 부름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프린스턴대에서 공부할 때 당시 한국의 소티리오스 대주교가 전화를 하셨습니다. 아무 인연도 없던 한국 정교회에 도움이 돼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한국은 물론 아시아에도 가본 적이 없어 당황스러웠지요.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교수제안이 있었고, 그리스와 미국, 캐나다에서도 목회 요청이 있었지만 1998년 한국을 선택했습니다. 몇 차례 한국을 다녀가면서, 여러 여건이 부족한 여기에서 더 할 일이 많다고 생각했던 거지요.” ‘출세가도’와 명예, 안락을 버리고 한국정교회의 반석이 되고자 한 것이다. 그의 ‘조성암’이란 한국명에서도 그런 의지가 읽힌다. “한국인으로 살려면 한국 이름이 필요하겠더군요. 조그라포스의 ‘조(趙)’, 암브로시오스의 ‘암(巖)’에서 따왔고, 가운데 ‘성(聖)’자를 넣었지요. 사도 베드로처럼 ‘거룩한 반석(聖巖)’이 되고자 하는 바람입니다.” ▲ 성니콜라스 성당의 예배 모습. ―그리스는 정교회가 국교지만, 한국은 ‘종교 백화점’이라고 할 만큼 다양한 종교가 있습니다. 처음에 낯설지 않았습니까. “한국으로 오기 전에 그리스에서만 있다 온 게 아니고, 미국과 시나이 등에서 머문 경험이 있어서 크게 이상하진 않았어요. 미국도 한국처럼 다양한 종교가 있고, 시나이도 이슬람권이어서 이웃종교에 대한 경험을 했던 거지요.” 그는 한국외국어대에서 오랫동안 그리스어를 가르치는 등 젊은이들과 교유를 했다. ―한국에 온 지 19년이 되셨습니다. 한국인, 특히 한국의 젊은이는 어떻습니까. “한국 사람들의 마음과 외모 모두를 사랑합니다. 한국인들은 내면에 느낌과 감각이 풍부하고 예의 바르고 경건합니다. 외모도 곧고 검은 머리카락, 쌍꺼풀이 없어 더 매력적인 눈 등이 아름답습니다. 한국의 전통문화와 노래는 수준이 높을 뿐 아니라 제가 아주 좋아합니다. 다만 요즘 젊은이들에 대해 우려하는 게 있습니다. 한국사람이 가진 고유의 모습, 문화에서 많이 벗어나고 있다는 겁니다. 대학에서 학기가 바뀔 때마다, 남학생이고 여학생이고 얼굴과 머리색이 바뀌어 못 알아 봅니다. 다시 인사를 해야 합니다. 미국에서 온 게 다 좋은 게 아닌 건 이미 누구나 알지 않나요?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준 아름다운 문화와 마음, 외모에 대해 감사하면서 사는 게 더 중요합니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지속해서 스트레스를 받고, 해결이 안 되면 극단적 선택을 하기도 하는데, 안타깝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감사하면서 살아야지요.” 최근 여러 관점에서 관심과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는 국내외 종교 상황으로 대화를 옮겼다. 암브로시오스 대주교는 정교회가 역사적으로 관심을 가져온 에큐메니컬(교회 일치) 운동을 길게 강조했고, 한국교회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성소수자 논란에 대해선 보수적인 느낌을 받았다. ―올해 종교개혁 500주년이 NCCK의 가장 큰 행사가 될 것입니다. NCCK 회장을 맡고 계시지만, 정교회의 역사에서 종교개혁은 좀 비켜있습니다. 정교회에서 보는 종교개혁에 대해 말씀해주십시오. “종교개혁 500년에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이 분열이 얼마나 더 지속될 것이냐는 문제의식입니다. 500주년을 행사로서만 보내면 안 되고, 자기반성을 하고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신자도 많고 재정도 탄탄하니 교회의 일치 문제를 생각할 게 없다’는 교회가 많습니다. 상처를 어떻게 치료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합니다. 분열된 교회의 모습이 일반 사람들이 교회를 부정적으로 보는 큰 이유 중 하나입니다. 2030∼2040년이 되면 한국 그리스도교 교인 수가 상당히 줄어들 것이라는 예상이 있었습니다. 그 이유 중에는 교회의 세속화와 목회자들의 문제 등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교회의 갈라진 모습이 주요한 요인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연말 통계청이 조사한 바로는 한국에서 개신교인 수가 가장 많았습니다. 하지만 한국 개신교는 교회의 대형화만 추구하고 목회자의 세습, 각종 비윤리적 행태들로 비판받고 있기도 합니다만. “이런 상황을 어느 누구도 자의적으로 판단하거나 비판할 수 없습니다. 다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크게만 짓다 보면 대형교회는 나중에 신자가 없는 텅 빈 교회로 남을 수 있습니다. 성직자부터 신자들 모두 깨달아야 할 것이 교회가 정치적인, 세속적인, 세상의 집합체가 아니고 사람의 구원을 위한 모임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영성적으로, 신앙적으로 구원을 위한 삶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NCCK의 신년메시지에서 언급했지만, 다른 사람이 바뀌어야 한다고 하기보다 자신이 먼저 반성하고 회개해야 그리스도교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지상에서 처음 그리고 마지막 하신 말씀이 ‘회개하여라’였습니다.” ―한국 교회는 식민지 - 전쟁 - 분단 등을 겪으면서 진보 - 보수로 나뉘어 여전히 갈등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진보다, 보수다 하는 건 우스운 얘기입니다. 교회는 성서의 말씀이어야 합니다. 한국의 교회 단체들이 NCCK, 한기총, 한교총 등으로 많이 나뉘었는데, 교회의 역사에서 보면 교회가 진보다, 보수다, 뭐다, 뭐다 한 적이 없습니다. 사도들이 보수다, 진보다 자기 성향을 나타낸 적이 있습니까?” ―보수 개신교 쪽에서 대선주자들에 대해 성적 소수자 문제에 대한 입장을 묻고 있습니다. 차별금지법과 성소수자에 대한 주교님 생각은 어떻습니까? “개인 의견은 될 수 없고, 교회의 가르침으로 얘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서적으로 초대교회부터 개개인은 자신의 욕구와 욕망을 끊을 수 있어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 수 있다고 했습니다. 내가 성소수자들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먼저 말초적인 것만 생각하는 것을 중단하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그것 이외에도 많은 것을 주셨다는 것을 이해하라고 할 것입니다. 세 번째로는 자신들만의 ‘게토’를 만들지 말라, 사회가 우리를 받아주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 반대라고 말할 겁니다. 네 번째로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고 있다는 겁니다. 회개하고 다시 돌아온다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받아들일 것입니다.”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가 이슬람 국적자의 입국을 금지하는 행정명령으로 시끄럽습니다. 한국에서도 일부 개신교회의 이슬람 포비아가 적지 않습니다. “이슬람을 적대시하는 모습은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평화를 찾는 게 아니라 적대감만 표출돼 다툼이 커질 뿐입니다. 나라마다 입국하는 사람에 대해 엄격하게 절차를 거치는 건 그 나라의 사정이지만, 다만 주의해야 할 것은 명찰을 붙여 무조건 되고, 안 되고는 문제가 있습니다. 유대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람들을 박해했던 과거의 경험을 반복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의 경우 1453년에 오스만 투르크 제국에 의해 비잔틴이 함락되면서 터키 즉 이슬람 지배하에 역사적으로 큰 박해와 순교자가 생겼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정교회는 한 번도 이슬람을 나쁜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인공지능(AI) 등 과학의 발전도 종교에 위기가 될 것이란 전망이 나옵니다. “사람은 처음부터 하나님 형상을 닮은 존재로서, 그 존재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것에 주의해야 합니다. 아무리 뛰어난 로봇이나 인공지능이 나와도 사람을 대신할 순 없습니다. 사람은 몸과 뇌만 가진 게 아니라 정신과 마음이 있습니다. 로봇이 대신할 수 없습니다. 대학에서 학생들한테 얘기하는 게, 기계와 과학문명을 어떻게 사용할지 고민하라는 것입니다.” (통역 도움:박인곤 요한 보제)
210 no image 참고할 기사 [1]
[레벨:20]정아브라함
57 2017-03-06
조선 의술 농축된 ‘패치’ 귓속의 소음 잡는 해결사 - 각종 약물 통해 체온조절, 점액분비…400년 만에 부활한 허임침법도 한몫 --> 허임 침법 & 청음고로 스트레스 싹, 보신고와 장원고로 피로 해소 기사입력 : 2017-03-05 09:13 각종 이비인후과 질환과 알레르기 질환의 치료로 유명한 서울 강남구 갑산한의원. 이곳은 요즘 난치질환인 이명(耳鳴)을 치료하려는 환자로 북적인다. 이 한의원의 원장 이상곤 박사는 조선시대 침의 대가였던 허임의 보사(補瀉)침법과 ‘동의보감’ 등 한의학 문헌에 나타난 처방으로 이명을 치료하는데, 그 효과가 입소문을 타면서 전국 곳곳에서 환자가 찾아온다. 이곳에서 치료를 받은 사람 중에는 수십 년간 이명으로 괴로움을 당하다 겨우 탈출한 사람도 있고, 끊임없는 자살충동으로 생의 마지막에 섰다 이곳에서 치료를 받고 제2의 인생을 시작한 이도 있다. 최근 이 한의원은 한의학의 문헌적 자료를 바탕으로 다양한 패치 처방을 만들어 큰 효험을 보고 있다. 이 박사는 “문헌에서는 치료 효능을 자신 있게 표현했지만 실제 임상에서는 효능이 검증되지 않는 약물을 제외하고 선택적으로 약물을 압축했다”고 밝혔다. 스트레스성 이명에는 사향과 지룡 등의 약물이 들어간 청음고(淸音膏)가 특히 좋은 효능을 보였고, 보신고(補腎膏)와 장원고(狀元膏)도 효과가 좋았다. 보신고는 보신(補腎)에 효능이 있다고 알려진 석창포 등이 들어간 약물로, 귀에 직접 넣는 게 특징. 장원고는 배에 붙여 원기를 돋우는 배꼽 패치인데 옛날 선현들이 배꼽 뜸을 뜨던 원리에서 착안했다. 이명은 귀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면서 다른 사람의 말이 잘 안 들리는 게 일반적 증상. 하지만 두통이나 어지럼증, 수면장애를 호소하는 이도 많다. 때로는 귀가 꽉 막힌 것 같은 폐색감과 귀에 뭔가가 들어간 것 같은 이물감을 느끼기도 한다. 귀가 아픈 사람도 있고 심하면 우울증과 공황장애에 이르러 자살을 시도하는 이도 있다. 이명은 스트레스, 피로나 과로, 중이염이나 감기, 내이질환(메니에르병, 돌발성난청), 교통사고나 대수술, 음향 노출, 약물 복용, 수면 부족, 잦은 기압의 차이(비행기 탑승, 고지대 등산) 등으로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끝내 원인을 밝히지 못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하지만 통계적으로 보면 스트레스로 발병한 경우가 가장 많고 피로나 과로가 그 뒤를 잇는다. 이는 갑산한의원의 환자 통계에서도 드러나는데 최근 내원한 이명 환자 100명의 원인을 조사해봤더니 스트레스 37명, 피로나 과로 17명, 중이염이나 감기 13명으로 나타났다. 그다음은 내이질환을 앓고 난 후 8명, 큰 소리에 자주 노출된 경우 7명 순이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경우도 10명에 달했다. 심적 고통과 스트레스 생기면 ‘귀울음’ 그렇다면 스트레스가 이명을 일으키는 이유는 뭘까. 이 박사의 설명을 들어보자. “한의학에선 이명을 한자로 ‘耳鳴’이라 쓴다. ‘귀 소리’라 하지 않고 ‘귀울음’이라 표현한 것으로, 심적으로 고통스러운 상태에 있음을 의미한다. 지금으로 말하면 스트레스다. 스트레스가 생기면 교감신경계가 흥분하고 우리 몸은 긴장한다. 싸울 때 주먹을 움켜쥐듯 혈관이 좁아지면서 몸이 굳고 저리게 된다. 심장박동이 빨라지면서 흥분하거나 열 받는 상태가 된다. 한방에선 귀가 차가워야 건강하다고 본다. 뜨거운 것에 손을 데었을 때 무의식적으로 귓불을 만지는 것도 귀가 차기 때문이다. 차가워야 정상인 귀가 열 받아 더워지면 병적인 상태로 간다. 이게 바로 이명이다.” ‘동의보감’ 귀울음 조문에는 ‘스트레스를 주관하는 경락은 간담이다. 간담이 열을 받으면 기가 치밀어 오르면서 귓속에서 소리가 난다’라고 쓰여 있다. 이런 사실은 역사적으로도 증명된다. 조선시대 후궁의 자손으로 처음 왕위에 오른 선조는 지독한 이명으로 고생했다. 후궁 태생이라는 콤플렉스와 나날이 강화되는 신권 때문에 극도의 스트레스에 시달리다 결국 이명이 발병한 것이다. 이때 선조의 이명을 치료하고자 나선 이가 바로 허준이 조선 으뜸의 침의(鍼醫)라 극찬한 허임(어의 역임)이었고, 그가 선조에게 쓴 침법이자 조선 최고의 침법이 보사침법으로 알려진 천지인(天地人)침법이다. 선조가 허임에게 침을 맞은 것은 왕조실록에 자세히 기록돼 있다. 허임은 스트레스 때문에 귀로 치밀어 오른 기(氣)를 손발에 침을 놓아 손발 끝으로 분산시켰다. 기를 조화롭게 균형 잡아 귀울음을 해소한 것. 허임의 보사침법을 어렵사리 되살린 이 박사는 “보사침법에는 특징이 있는데, 일반적인 침법이 득기(得氣)를 위주로 한 번 찌르면 되는 반면, 허임의 침법은 세 번에 걸쳐 돌리고 기 방향에 따라 득기를 하면서 침의 효과를 극대화한다. 이 침법은 이면에 천지인이라는 철학적 원리를 내포한 조선 고유의 심오한 침법”이라고 전한다. 보사침법을 흔히 풍선에 비유하는데 풍선에 바람을 불어넣는 것처럼 몸에 기를 팽팽하게 채워넣는 것이 보법이고, 사법은 이와 반대로 풍선에서 공기를 빼는 것처럼 침을 놓는 것이다. 이 박사는 “이명은 귀 안의 신경세포인 유모세포가 지나치게 흥분한 것인데, 허임의 사법을 바탕으로 한 침술로 이를 진정시킨다”고 말한다. 갑산한의원에선 귀의 열을 식히고 집중된 기를 흩어주는 데 외용약물을 쓴다. 앞서 언급한 패치 처방은 이런 약물을 환자가 직접 몸에 붙이거나 삽입할 수 있도록 제작한 것. 외용약물에는 먼저 스트레스성 이명 치료제이자 ‘투관통기약(套管通氣藥)’인 ‘청음고’가 있다. 이 이름은 막힌 기를 열어줘 통하게 하는 약이라는 뜻이다. 사향과 용뇌를 대표적으로 쓰는데, 사향은 사향노루의 배꼽에 형성된 향료로 ‘마음속에 생긴 번열을 해소한다’고 알려져 있다. 여기에 달아오른 열을 식혀주는 지렁이(蚓)와 여러 약물을 아울러 귀 뒤에 붙이거나 귓속에 솜으로 감싸 넣으면 스트레스로 인한 열이 진정된다. ① 배꼽에 붙여 원기를 돋우는 장원고. ② 귀 뒤에 붙여 스트레스를 없애는 청음고. ③ 귀에 넣어 신장 기능을 강화하는 보신고. 손상된 신장 기능 살리고 피로 해소 이 박사는 실제 통계조사에서도 나타났듯, 이명을 일으키는 한 축이 정신적 고통인 스트레스라면, 육체적으로는 피로나 과로가 큰 원인이 된다고 본다. 한의학은 피로나 과로가 신장(腎)의 작용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인정한다. 실제 ‘동의보감’에는 ‘피로가 겹쳐 과로한 경우 또는 중년이 지나 중병을 앓거나 성생활이 지나친 경우에는 신수(腎水)가 고갈되고 음화(陰火)가 떠오르면서 늘 소리가 난다. 그 소리가 매미 우는 소리 같기도 하고 종이나 북치는 소리 같기도 하다’고 쓰여 있다. 한편 정통 한의학은 신장과 부신이 일치한다고 보는데, 부신의 기능이 떨어지면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고, 자주 깨며, 일어났을 때 피로하고 이명이 심해진다. 사는 게 재미 없거나 해야 할 일이 명확하게 떠오르지 않고 불안하다. 얼굴이나 다리가 잘 붓고 이마, 얼굴, 몸에 검은 점이 생기며 주위에서 혈색이 좋지 않다고 말한다. 참을성이 없고 화를 많이 내며 배고픔을 참기 힘들어진다. 알레르기나 이유 없는 알레르기 반응이 생기고 감기에 잘 걸린다. 갑산한의원은 이렇듯 손상된 부신(신장)의 기능을 살리고(補腎) 육체적 피로와 고통을 해결해 귀울음을 치료하고자 ‘동의보감’에 주목한다. ‘귀에 송진, 석창포 등의 약물을 솜으로 감싸 넣으면 신기(腎氣)가 허(虛)해 귀에서 바람 부는 소리, 물 흐르는 소리, 종·경소리 같은 소리가 나거나 갑자기 들리지 않는 것을 치료한다.’ 이 원리에 따라 만든 것이 고약을 귀 안에 넣는 ‘보신고’다. 이 박사는 “신허(腎虛)와 비슷한 말로 ‘하초가 허하다’ ‘허리 아랫부분이 시원치 않다’ 따위의 표현을 쓰는데 아랫배(배꼽)에 뜸 대신 붙이는 고약으로도 보신 효과를 볼 수 있다. 갑산한의원이 만든 ‘장원고’는 ‘하초’의 원기가 허하고 차서 배꼽 둘레가 차고 아픈 것을 치료하는 계피, 오수유를 이용해 만든 고약으로 먹는 약물과 동일한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밝혔다. 도움말, 자료제공 = 갑산한의원 (http://www.kabsan.net)
209 건강을 위한 제언
[레벨:20]정아브라함
45 2017-03-26
사람 속으로] 기를 막는 건 시기·질투 … 바른 자세가 건강 비결 실시간 트렌드 뉴스 순위 1717 J 트렌드 순위중앙일보 기사 중 조회수·추천·공유가 제일 활발한 30개의 기사를 표시합니다 [중앙일보] 입력 2017.03.25 01:00 | 종합 18면 지면보기 혈기도(穴氣道) 창시자, 81세 우혈 선생 혈기도 창시자 우혈 선생은 여든이 넘었지만 혈색이 좋다. 혈기도 수련으로 기운이 원활하게 흐르기 때문이라고 했다. 선생은 “모든 기운을 단전에 쌓이게 하는 게 가장 바른 자세”라고 했다. [사진 오종택 기자] 한 택배회사의 수도권 물류센터에서 근무하는 박철진(41) 팀장은 어깨 통증으로 고생 중이다. 한두 해 전부터 오른쪽 어깨가 욱신거리더니 올 초부터는 팔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리지 못할 정도로 증상이 심해졌다.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옷을 입을 수도 벗을 수도 없다. 답답한 건 정확한 원인을 모른다는 점이다. 의사의 진단은 오십견(五十肩). 박씨는 40대 초반인 자신에게 왜 이런 증상이 생겼는지 궁금하다. 20대 중반까지 아마 복서 활동설악산서 17년 수련 후 혈기도 창시 여든 넘어서도 아이처럼 몸 유연해 356가지 동작·호흡법 등 수련 “몸은 정신의 도구 아닌 진정한 주인” 몸과 대자연이 소통하도록 도와줘 스트레스로 인한 성인병 예방 “단전호흡하고 적게 먹는 게 중요 마음 비우고 우주 기운 받아들여야” 혈기도(穴氣道)의 창시자이자 세계연맹본부 총재인 우혈(宇穴·81) 선생은 이달 1일 발간한 저서 『몸이 나의 주인이다』(일리)에서 박씨가 겪는 것 같은 원인불명 질환들과 각종 성인병을 ‘기(氣)의 단절로 인한 현상’으로 규정했다. 현대인들이 필요 이상으로 먹고 마시고, 다양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올바른 자세와 호흡을 외면하다 보니 자연과 교류가 끊겨 생긴 부작용이라는 설명이다. 최근 서울 종로의 혈기도 세계연맹본부 도장에서 만난 우혈 선생은 “기가 막히고 기가 차다는 표현이 그냥 나온 게 아니다. 시기하고 미워하고 질투하고 남을 이기려 하는 인간의 감정들이 기를 막히게도 하고 차게도 하는 것”이라며 “병원과 한의원을 몇 년간 다녀도 차도가 없었다던 사람들이 수련을 통해 혈문(穴門)을 연 후 거짓말처럼 좋아지는 모습을 자주 봤다”고 말했다. 우혈 선생은 여든을 넘겼지만 청년처럼 혈색이 좋다. 깊은 주름이나 검버섯도 거의 없다. 눈빛은 강렬하고 목소리는 맑았다. 몸은 탄탄하면서 유연했다. 혈기도의 여러 행공 중 최고 난도로 꼽는 ‘발뒤꿈치 잡고 상체 세우기’(일명 곰 행공)를 시연할 땐 고관절이 믿을 수 없는 각도까지 돌아갔다. 혈기도 세계연맹본부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는 황남준 사범은 “마음을 비우고 우주의 기운을 자유롭게 받아들이는 ‘단성(丹成)’의 경지에 오르면 몸이 어린아이처럼 유연해져 어떤 동작이든 자연스럽게 소화할 수 있다”며 “(우혈) 선생님께선 곰 행공을 하며 몇 시간씩 주무시기도 한다”고 말했다. 우혈 선생은 20대 중반까지 ‘스포츠맨 허장수’로 살았다. 경희대 체육학과를 나와 아마추어 복싱 전국대회에서 입상할 만큼 운동신경이 뛰어났다. 태권도 등 여러 무예도 익혔다. 시원시원한 성격과 추진력을 앞세워 사업에도 성공했다. 남부러울 것 없는 날들이었다. 혈과 기의 세계에 입문한 건 29세 때인 1965년이다. 도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지, 이 세상에 정말로 신선이 있는지 궁금해 무작정 내설악 한계령으로 찾아갔다. 그곳에서 스승인 천우(天宇) 선생을 만나 17년간 수련했다. 우혈이라는 호도 스승한테 받았다. 모든 것을 버리고 산으로 향한 이유에 대해 우혈 선생은 “하는 일마다 잘됐고 늘 이겼지만 마음이 허전했다. 남과 비교하고 경쟁하는 생활이 싫었다”며 “진정한 나의 삶을 찾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스승이 등선(登仙·선인이 되어 하늘로 오름)한 이후 우혈 선생은 3년여간 전국 명산을 두루 돌며 자연과 호흡했다. 85년부터 서울에 ‘혈기도’ 간판을 단 도장을 내고 수련생을 받았다. 20년간의 구도 생활을 통해 얻은 깨달음을 세상 사람과 나누고 싶어서다. 혈기도는 ‘인간의 핵심은 정신이나 영혼이 아니라 몸’이라는 이론에 기반을 둔다. ‘육신은 껍데기일 뿐, 혼이 인간의 정수’라는 기존의 상식과 반한다. 우혈 선생은 “몸이 없으면 이 세상에서 나는 없는 존재다. 영혼도 결국 몸에 얹혀사는 것”이라며 “내 몸은 정신의 도구가 아니라 나의 진정한 주인이다. 몸이 대자연과 호흡할 수 있게 수련하고, 몸이 의도하는 대로 따라가면 마음과 정신을 다스릴 수 있다”고 말했다. 혈기도 수련은 몸과 대자연이 원활히 소통하도록 돕는다. 우혈 선생은 “우리 몸에 있는 아홉 개의 큰 구멍(穴)뿐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땀구멍들까지도 기의 통로 역할을 한다”며 “바른 자세와 호흡, 식사와 수련으로 내 몸 세포 속 탁한 기운을 내보내고 우주의 에너지를 받아들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인터뷰 당일 도장을 가득 채운 수련생들이 혈기도를 수련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사범이 “지(地)~”를 외치자 가부좌를 한 수련생들이 일제히 긴 숨을 뱉었다. 뒤이은 “천(天)~”이라는 구령에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잔잔한 미소와 함께 수련생들을 지켜보던 우혈 선생은 “호흡은 오장육부의 나쁜 기운을 몰아내고 새로운 에너지를 받아들이는 과정으로 혈기도 수련의 기본”이라고 말했다. 호흡에 이어 발목 관절과 허리를 푸는 등 스트레칭 등 예비 행공들이 이어졌다. 황남준 사범은 “예비 행공만 제대로 소화해도 온몸에서 땀이 비 오듯 쏟아진다. 땀은 혈문(穴門)이 열렸다는 신호”라며 “(우혈) 선생님께서 스승께 전수 받은 행공은 356가지나 되지만 수련생에게 가르치시는 건 수십 종 정도다. 고난도 동작을 제대로 소화할 수 있는 제자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우혈 선생은 현대인이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선 식생활에 대한 개념부터 바꿀 것을 조언했다. “도 중의 도는 식도(食道)”라고 언급한 그는 “입으로 먹는 것 그 자체를 뛰어넘어 눈·귀·코·피부·느낌으로 먹어야 할 것들이 있는데 현대인들은 그걸 놓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음식을 먹을 때 ‘하루 세 끼를 먹어야 한다’ ‘배가 불러야 한다’는 등의 고정관념부터 버려야 한다”며 “좋은 물과 공기, 기운을 섭취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 아울러 적게 먹어 입 대신 위장을 즐겁게 하면 성인병을 대부분 예방할 수 있다”고 말했다. 우혈 선생이 강조하는 또 하나의 건강 비법은 바른 자세다. “현대인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게 바른 자세를 꾸준히 유지하는 것”이라며 “바르게 서고 앉고 걷는 게 삶의 기본인데 그것조차 못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고 꼬집었다. 이어 “바른 자세가 주는 행복감을 체험하면 새로운 삶이 열린다. 나는 똑같은 자세로 24시간을 있어도 불편하지 않다”고 덧붙였다. 우혈 선생은 “누구든 마음을 비우고 몸을 단련해 우주의 기운을 받아들이면 단성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종교와 무관한 개념이라고 한다. 하늘과 땅의 에너지를 느끼고 받아들이는 행위는 육체를 가진 사람은 누구나 할 수 있고, 그 에너지의 정체는 신과의 교감 또는 대자연의 축복이며 각자가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우혈 선생에게 박철진씨를 위한 조언을 부탁했다.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드러난 현상만 보지 말고 그 이면의 원인부터 들여다봐야 한다”고 운을 뗐다. “의학적으로 문제가 없는데도 몸이 아픈 건 결과적으로 각종 스트레스 때문에 기의 밸런스가 무너진 결과”라며 “생활 속 스트레스가 크다지만 태어날 때와 죽을 때 받는 스트레스에 비할 바는 아니다. 우리 모두는 이 세상에 처음 올 때 이미 가장 큰 스트레스를 견뎌낸 사람들이다. 그 점을 깨닫고 새로운 용기를 내는 게 기의 흐름을 푸는 첫걸음”이라고 말했다. 일상 속에서 치열한 생존 전투를 치르는 현대인에게 던지는 메시지였다. 동작 ① 동작 ② 동작 ③ 동작 ④ ■[S BOX] 넓적다리·골반 불균형 잡아주는 동작, 직장인들에게 좋아 「혈기도의 수련 동작이 어려워 보이지만 막상 따라 해보면 쉽게 할 수 있는 것도 있다. 혈기도의 기본자세는 허리 세우기다. 바닥에 앉은 자세에서는 상체를 바로 세워야 한다. 그리고 가슴을 항상 쫙 펴야 한다. 서 있을 때도 마찬가지다. 허리가 앞으로 굽어져 엉거주춤 서면 안 된다. 위 사진을 보고 우혈 선생의 동작을 따라 해보자. ① 먼저 발바닥을 마주하고 앉아 양손으로 발뒤꿈치를 붙잡아 올려 다리를 옆으로 뻗어 벌린다. 요추를 앞으로 밀어 허리를 똑바로 세우고 단전의 기운을 발뒤꿈치로 보낸다. 두 번째 동작으로 넘어가자. ② 벌렸던 다리를 바닥에 내려놓는다. 일자로 벌리면 좋지만 어렵다면 할 수 있는 만큼만 벌린다. 그 상태에서 골반을 앞으로 밀고 나간다. 그리고 바닥에 손을 짚고 상체만 앞으로 내밀어 쫙 편 가슴을 바닥에 닿도록 숙인다. 이때 양발 끝에 힘이 가야 한다. 엉덩이를 뒤로 빼면 안 된다. ③ 상체를 세우고 벌렸던 다리를 모아 앞으로 쭉 뻗는다. 이때도 허리는 굽으면 안 된다. 그 상태에서 오른쪽 무릎을 잡고 서서히 몸 쪽으로 끌어올린다. 가능하면 오른손으로 오른쪽 발뒤꿈치를 잡고 더 끌어당긴다. 오른발을 바닥에 내리고 왼발도 똑같이 한다. 마지막 동작은 난이도가 꽤 높다. ④ 가부좌 상태에서 오른발을 들어 목 뒤로 넘기고 양 손바닥을 붙여 합장한다. 다른 쪽 발도 따라 해보자. 네 동작은 넓적다리와 골반의 불균형을 바로잡아주는 동작이다. 오래 앉아 일하는 직장인에게 권할 만하다 [출처: 중앙일보] [사람 속으로] 기를 막는 건 시기·질투 … 바른 자세가 건강 비결
208 no image 베네주엘라 기도제목
[레벨:20]정아브라함
28 2017-04-12
베네수엘라 민심 폭발, 포퓰리즘 독재 끝이 보인다 [베네수엘라 국민의 분노가 폭발했다. 수도 카라카스를 비롯한 주요 도시 곳곳에서 반정부 시위가 5일째 이어지며 그 양상이 더욱 격화되고 있다고 현지 일간 엘 나시오날 등이 11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신문은 “진압 과정에서 한 대학생이 총격으로 사망하고, 200명 이상 부상자가 발생했을 정도로 상황이 심각하다”며 “갓 돌도 지나지 않은 아이가 최루 가스를 흡입해 응급실에 실려 가고, 거리는 연기로 가득 찼다”고 긴박한 상황을 전했다. 야당 국회의원들은 “잔인하고 사악한 독재자의 억압”이라며 니콜라스 마두로(사진) 대통령의 폭력적 진압을 비난하고 나섰다. 시위는 최근 정부의 독재적인 조치에 대한 항의로 시작됐다. 친정부 성향의 대법원이 지난달 29일, ‘별도로 지정한 기관이나 대법원 산하 헌법위원회에 의회의 입법권을 맡기겠다’는 판결을 내리면서다. 야당이 장악한 의회를 무력화하는 이 판결은 국내외의 거센 반발 속에 3일 만에 취소됐지만, 시민들의 반발은 가라앉지 않았다. 여기에 지난 7일, 베네수엘라 감사원이 중도우파 성향의 차기 유력 대선 주자인 엔리케 카프릴레스 미란다 주지사에게 15년간 공직 선거 출마를 금지하는 일까지 발생했다. 그가 영국과 폴란드 대사관으로부터 기부를 받았다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다. 그러나 마두로 대통령의 정적인 미란다 지사를 정치적으로 봉쇄하는 이 조치가 시위 도화선에 불을 붙였다. 마두로 정권에 대한 베네수엘라 국민의 불만이 이미 목 끝까지 차오른 상태였기 때문이다. 현재 베네수엘라의 경제는 심각한 위기 상태다. 살인적인 물가 상승과 극심한 식량난에 국민의 평균 체중이 줄었을 정도다. 의약품까지 바닥나면서 의료대란까지 벌어졌다. 베네수엘라 정부가 유엔에 의약품 원조를 요청했지만 턱없이 모자란 상태다. 출산을 위해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는 임산부들이 속출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최근 몇 달간 임산부 수백 명이 출산을 위해 콜롬비아로 넘어갔다”고 보도했다. 콜롬비아 정부에 따르면 지난해 이후 출산을 위해 콜롬비아로 건너간 베네수엘라 임산부는 1000명에 육박했다. 아예 불임 수술을 받는 이들도 늘고 있다. 워싱턴포스트(WP)는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으로 물가가 급등하고 도저히 아이를 키울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젊은 여성들이 불임 수술을 받고 있다”고 보도했다. 우고 차베스 전 대통령 시절 ‘남미의 파라다이스’로 불렸던 석유 부국 베네수엘라의 쇠락은 포퓰리즘형 독재의 종말이라는 것이 외신들의 평가다. ‘남미 좌파의 아이콘’이었던 차베스는 1999년 집권한 뒤 석유 산업을 국유화하고 이 돈을 빈민 복지에 쓰면서 인기를 누렸다. DA 300 <iframe id="DASlot574" title="광고" height="250" marginheight="0" src="http://dgate.joins.com/hc.aspx?ssn=574&b=joins.com&slotsn=591" frameborder="0" width="250" name="DASlot574" marginwidth="0" scrolling="no"></iframe> 그러나 경제 체질 개선을 등한시한 가운데 국제 유가 급락 상황을 맞으면서 경제가 추락하기 시작했다. 차베스 집권 말기 정부의 무리한 경제 통제는 상황을 더 악화시켰다. 성장률 하락과 인플레이션 속에 가격과 공급 통제가 생필품 부족 사태를 촉발했다. 차베스의 후계자로 지명된 마두로 대통령이 집권한 이후에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도리어 민주주의를 후퇴시키는 강압적인 조치들이 남발되면서 위기가 심화되는 모습이다. 뉴욕타임스(NYT)는 최근 ‘포퓰리즘은 어떻게 독재가 되는가’라는 칼럼에서 “포퓰리즘은 처음엔 민주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독재로 흐를 가능성이 크다”며 베네수엘라 사태를 분석했다. 포퓰리즘 정권의 경우 대개 민생 경제 붕괴로 터져나온 시민들의 불만을 진압하기 위해 독재가 동원된다는 것이다. NYT는 “베네수엘라는 범죄가 만연하고 부패가 거의 보편적이며 사람들의 삶의 질이 붕괴한 나라가 되고 말았다”고 진단했다. 결국 국민이 희생양이 된 것이다.
207 데살로니카의 역사
[레벨:20]정아브라함
30 2017-04-14
그리스 문명기행 <上> 신약성서 속 사도 바울이 머물렀던 데살로니가로 익숙한 곳 그리스 제2의 도시 테살로니키 로마·비잔틴·오토만… 모두가 거쳐갔지만 소유한 적은 없었다 정복당했기 때문에 살아남았다. 수많은 영웅이 미인을 원하듯 이 도시를 탐했지만 영원히 소유하는 것은 그 누구에게도 불가능했다. 그리스 테살로니키 고지대의 비잔틴 성벽 위엔 햇볕을 쬐며 발아래 펼쳐진 시내 풍경과 에게해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늘 있다. 이 도시를 소유했다고 믿었던 제국과 정복자들은 사라졌으나, 영욕의 시간을 뛰어넘은 도시는 제국의 유산을 제 속에 진주처럼 품고 살아남아 나그네들의 귀에 옛 영광을 속삭이고 있었다. /테살로니키=이태훈 기자 그리스 동부 테살로니키, 고(高)지대 주거 지역 '아노 폴리'의 비잔틴 성벽 위에 앉아 시내 풍경과 에게해(海)를 바라보며 이 도시가 겪은 2000년 넘는 세월을 상상한다. 처음 이 도시에 이름을 붙였던 마케도니아의 정복 군대가 유럽과 소아시아를 잇는 대로 위를 행진하고, 이어서 로마제국 황제가 승리를 기념해 세운 건축물들이 솟아오르고 또 무너졌다. 동로마제국 제2 도시로 번성하던 시절 비잔틴 사람들은 등 뒤의 성벽을 방패 삼아 북쪽에서 들이치는 슬라브 침략자들을 막아냈다. 지중해를 항해하는 상인들이 바닷길을 통해 도시로 몰려들었고, 시대마다 다른 황제가 새겨진 금화를 주고받았다. 비잔틴 교회들은 이슬람 오토만제국이 도시를 점령하며 모스크로 바뀌었지만, 그리스 영토로 돌아온 뒤 다시 교회가 됐다. 서로 다른 인종과 민족이 내뱉었던 환성과 탄식들이 지중해의 날 선 햇빛 아래 봄날 아지랑이처럼 흩어진다. 신약성서 속 사도 바울이 머물렀던 '데살로니가'로 익숙한 곳, 그리스 제2의 도시 테살로니키다. 이미지 크게보기그리스 제2도시이자 무역항인 테살로니키의 해변, 대제국을 이뤘던 정복자 알렉산더 대왕은 거대한 동상이 되어 2000년의 세월 건너 에게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 테살로니키=이태훈 기자 기원전 342년 무렵 마케도니아 왕 필립 2세가 그리스 동부 테살리에서 포케이아인들과의 전쟁에서 대승을 거둔 날 궁정으로부터 공주 출생 소식이 도착했다. 왕은 기쁨에 겨워 소리쳤다. “이 아이를 ‘테살리의 승리’라고 부르게 하라!” 공주의 이름은 ‘테살리(Thessaly)’의 ‘승리’(nike), ‘테살리니케’가 되었다. 승전의 기쁨을 품은 이름이지만 그 삶은 비극이었다. 대제국을 건설한 오빠 알렉산더 대왕(기원전 356~323년)이 서른셋에 요절하자 휘하의 장군들은 영토를 차지하려 칼을 뽑고 피를 뿌렸다. 왕위를 찬탈한 카산데르 장군은 전리품처럼 공주를 아내로 삼고, 에게해 테르마이코스만(灣) 교통 요지에 세운 도시에 그녀의 이름을 붙였다. 남편 사후 그녀는 왕위 싸움에 휘말려 아들의 칼에 죽는다. 이미지 크게보기비잔틴 시대 요새 망루, 오토만 시대 감옥이었던 ‘화이트 타워’. 알렉산더 대왕의 스승이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동상이 서 있는 중심가 아리스토텔레스광장을 지나 해안 도로를 따라 걷는다. ‘화이트 타워(The White Tower)’가 손에 잡힐 듯 가깝다. 이 도시에 자신의 이름을 허락한 마케도니아 공주 역시 탑처럼 하얗고 우아하게 빛났을 것이다. 비잔틴 시대 바다로부터 오는 외적을 막는 망루였던 탑. 오토만 점령기에는 한 번 갇히면 빠져나올 수 없는 죽음의 감옥이었지만 1912년 도시가 다시 그리스의 영토가 된 뒤 시민들은 이 탑에 까맣게 더께 앉은 전쟁의 그을음과 핏자국을 닦아낸 뒤 ‘화이트 타워’라 부르기 시작했다. 멀지 않은 곳에 로마제국의 갈레리우스 황제가 세운 ‘갈레리우스 아치’가 있다. 본래 8개의 문과 중앙 상부에 거대한 돔을 가진 구조였고 동서를 오가는 여행객들은 모두 이 문 아래를 지났다. 지금은 9.7m 너비의 중앙문과 4.95m 너비의 제2문 구조물만 남아 과거의 영광을 추억한다. 그는 황제가 되기 전인 서기 298년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이긴 것을 기념해 이 거대한 개선문을 지었다. 황제의 영광을 새긴 대리석 조각이 바닷바람과 세월의 풍상을 견뎌내며 살아남았다. 로마 판테온과 흡사한 건물 ‘로툰다(Rotunda)’도 흥미롭다. 본래 갈레리우스가 본인을 기념할 무덤 사원으로 지었으나 황제는 지금의 세르비아에 묻혔고, 건물은 비잔틴 시대에 교회가 되었다가 오토만 점령기에 모스크로 쓰였다. ‘로만 포럼’ 혹은 ‘로만 아고라’로 불리는 거대한 원형극장은 1962년 버스 정류장을 옮기려 땅을 팠을 때 햇빛을 봤다. 기원전 30년부터 기원후 143년까지의 도시 관련 기록이 새겨진 명문이 함께 발굴됐는데, 신약성경 사도행전에 바울의 전도 여행 당시 이야기를 증명하는 기록이 남았다. 이미지 크게보기로마 황제 갈레리우스가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지은 ‘갈레리우스 아치’. 시내 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만나는 ‘아이아 소피아’ 교회도 수많은 비잔틴 교회 중 하나다. 8세기 처음 세워진 이 교회는 도시가 가진 15개 유네스코 세계유산 가운데 하나. 오스만 투르크인들은 제단 뒤 모자이크화에 그려진 성모(聖母)가 두려웠다. 성모의 눈이 그들을 뒤쫓는다고 생각한 제국의 정복자들은 눈동자를 파냈다. 기둥 상단의 석조 장식, 벽에 붙은 프레스코화들이 각각 낡았거나 새로워 이채롭다. 헤쳐나온 세월 동안 옛 건물 위에 계속해서 새로 짓고 세웠기 때문이다. 도시의 수호성인의 이름을 딴 ‘아이오스 디미트리오스’ 교회도 아름답기로 첫손에 꼽힌다. 2000년에 걸쳐 전쟁·지진·화재를 견뎌낸 도시 수난사가 그대로 녹아 있는 곳이며, 지금도 가장 화려하고 웅장하다. 아이오스 디미트리오스 교회 내부, 아이아 소피아 교회 돔의 성모자 모자이크화, 고고학 박물관의 구리 세공 항아리(왼쪽부터). / 테살로니키=이태훈 기자 로마의 건축물, 비잔틴 성벽과 교회, 오토만의 목욕탕과 상점을 둘러본 뒤 도달하는 이 도시 순례의 정점은 고고학 박물관이다. 유적 위에 세워진 도시, 찬란한 황금 세공품과 그리스 석상, 도자기와 투구, 묘석과 유골들이 하나도 허투루 볼 것이 없다. 점령자들은 이 도시를 가졌다고 믿었지만, 테살로니키는 그 모든 정복의 역사를 품어 자기 안에 소유하고 있다고 웅변하는 곳이다. 이미지 크게보기 제국이 번성할 때 도시는 함께 번성했다. 한 제국이 쓰러지면 도시는 또 다른 제국과 함께 번영을 이어갔다. 그리스인들은 누군가 조바심을 내고 성급해 할 때 “할라라!”라고 말한다. ‘조급히 굴지 말라’는 의미다. 테살로니키에선 천천히 걷는 편이 옳다. 느리게 살피고 깊이 상상하면 이 도시는 더 새롭게 다가올 것이다.
206 no image 두려움에 관하여 [2]
[레벨:20]정아브라함
77 2017-05-13
근심 걱정 하지 마라 » 픽사베이 제공 믿는 것 만큼 우리가 행복하고, 믿지 않는 만큼 불행함을 우리는 세상살이에서도, 신앙살이에서도 느끼셨을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눈을 새롭게 뜬다면, 우리는 부활의 삶을 온전히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요한6,47) 예수님과 우리 사이에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형성되려면, 서로 상호성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우리를 초대하시고, 우리는 진리를 갈구하는 열망으로 예수님의 초대에 응답하는 상호성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어 돌보아 주시고 우리를 당신 제자로 부르시어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 하십니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산 위의 마을에서 함께 지내게 된 이유, 계기가 다양할 것입니다. 사람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그 바탕에 있는 핵심은 우리 인간의 한계성과 삶의 갈증을 느끼며 불멸의 진리와 영원한 생명을 찾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 삶은 눈뜨면 대개가 힘겨운 일들 뿐입니다만. 오죽하면 삶은 끔찍한 삶과 비참한 삶, 둘로 나눠진다고 말했겠습니까? 날마다 숨 쉬는 순간마다 내 앞에 어려운 일 보네 주님 앞에 이 몸을 맡길 때 슬픔 없네 두려움 없네 날마다 숨 쉬는 순간마다 우리 앞에 어려움을 본다는 것은 삶이 그 만큼 끔찍하고, 비참한 것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그런 삶에서 우리가 마냥 근심과 두려움에 떨고만 있을 것인지, 아니면 믿음을 회복하고 주님 앞에 우리 자신을 맡길 것인지 선택하는 것입니다. 이 복음성가의 가사처럼 우리는 당연히 주님 앞에 우리 자신을 내어 맡겨야 합니다. 성경에 걱정하지 마라, 두려워하지 마라는 단어가 1000번 이상 나온다고 합니다. 걱정과 두려움은 우리의 신앙을 부식시킵니다. 걱정과 두려움은 하느님 나라 건설에 가장 큰 장애물입니다. 걱정과 두려워하는 마음에는 믿음이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걱정과 두려워하는 마음은 불신앙과 같습니다.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 대부분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것은 내일에 대한 걱정 때문에, 두려움 때문에 , 하느님께 자기자신을 온전히 의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탄의 무기 중에 탐욕, 험담, 교만 보다도 더 강력한 무기는 근심걱정이라고 합니다.
205 건강음식 [1]
[레벨:20]정아브라함
42 2017-06-10
먹고 바르고 청소하고… 버리는 식재료도 다시 보자! 입력 : 2017.06.09 16:30 Food 식재료 활용 채소나 과일에서 껍질·뿌리·씨앗 등 안 먹고 버리는 부분이 많다. 그런데 여기에 의외로 몸에 좋은 성분이 많이 들었다고 한다. 양파 껍질, 파 뿌리, 포도 씨처럼 흔히 버려지는 식재료 활용법을 알아봤다. 1. 영양이 풍부한 식재료 1 —— 양파 껍질 양파 껍질에는 항산화 영양소인 ‘플라보노이드’가 알맹이의 30~40배로 많이 들어 있다. 플라보노이드는 노화를 일으키고 피로물질이 쌓이게 하는 활성산소를 제거한다. 노인성치매나 파킨슨병 등 뇌질환도 예방하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어떻게 먹나? 양파 껍질을 먹으려면 육수를 낼 때 양파를 껍질째 넣으면 좋다. 열에 약하지 않기 때문에, 물에 끓여도 영양소가 파괴되지 않는다. 한 번 끓이면 껍질의 식감이 좋아져 껍질째 먹을 수 있다. 2 —— 단호박 껍질 단호박 껍질에는 알맹이에는 없는 ‘페놀산’이 들어 있다. 페놀산은 강력한 항산화 물질로, 암이나 심혈관계질환 예방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떻게 먹나? 단호박은 껍질째 쪄서 먹으면 특유의 질긴 식감이 사라진다. 껍질만 모아서 차로 끓여 마셔도 좋다. 껍질을 깎아 깨끗이 씻은 뒤 3~4일간 말려서 물과 함께 끓이면 된다. 3 —— 대파 뿌리 대파 뿌리에는 혈액순환을 돕는 ‘알리신’ 성분이 풍부하게 들어 있다. 또 폴리페놀이 잎이나 줄기보다 두 배로 많다. 한의학에서는 파뿌리를 ‘총백(蔥白)’이라고 하는데, 감기로 인한 두통이나 고열을 치료하는 약재로 쓰인다. 땀을 내 체온을 낮추고, 몸속 추운 기운을 밖으로 배출시킨다고 한다. 어떻게 먹나? 대파 뿌리와 무, 배를 물에 넣어서 차로 끓여 마시면 감기 증상을 완화하는 데 좋다. 4 —— 호박씨 호박씨에는 미네랄이 풍부하게 들어 있다. 대표적인 것이 인인데, 인은 전립선질환 예방 효과가 있다. 또 칼슘·마그네슘이 들어 있어서 뼈·신경·근육 강화에 도움이 된다. 어떻게 먹나? 호박씨는 깨끗이 씻어서 말린 뒤 껍질을 까서 먹으면 된다. 밥에 넣거나, 다져서 다른 견과류와 꿀과 함께 버무려 아이들 간식으로 먹여도 좋다. 5 —— 참외 껍질 참외에는 비타민C, 칼륨, 칼슘, 무기질 등이 골고루 들어 있다. 이뇨작용과 여름철 탈수 증상 개선에 효과적이다. 참외 껍질에는 과육보다 면역 성분과 생리활성물질이 5배로 많다. 항산화 작용이 뛰어나다. 어떻게 먹나? 참외는 껍질 깎기 전에 깨끗이 씻는 게 중요하다. 껍질을 얇게 채썰어서 비빔국수나 물회 등에 넣으면 좋다. 소금에 절였다가 물기를 뺀 후 고추장에 버무려서 열흘 정도 두면 장아찌가 된다. 6 —— 수박 흰 껍질 수박 껍질에는 이뇨 작용이 뛰어난 아미노산이 풍부하다. 혈액순환을 돕기도 한다. 날씨가 더워서 어지럽거나 답답할 때 수박 껍질을 먹으면 증상 완화에 도움이 된다. 어떻게 먹나? 가장 바깥 부분의 초록색 껍질을 벗겨낸 흰 부분을 얇게 썰어서 말린 뒤, 약한 불에 달여서 차로 마시면 좋다. 깍두기처럼 김치로 담글 수 있고, 기름에 살짝 볶아 먹어도 된다. 7 —— 표고버섯 밑동 표고버섯 밑동에는 면역력을 높이고, 장운동을 활발하게 하며, 혈당 조절을 돕는 성분이 많이 들었다. 식감이 쫄깃쫄깃해서 소고기와 비슷하다. 어떻게 먹나? 표고버섯 밑동을 삶아서 초고추장에 찍어 먹으면 좋다. 국물을 우릴 때 손으로 찢어서 멸치, 다시마와 함께 사용해도 된다. 장조림이나 장아찌로 만들어도 괜찮다. 말린 버섯인 경우 국물을 우려서 밥물로 쓰거나, 물에 살짝 불린 뒤 볶음요리에 넣어도 좋다. 자투리 부분은 한데 모아 육수로 무, 배, 당근, 마늘 등은 의외로 버리는 부분이 많다. 먹고 남은 자투리 부분은 한데 모아서 육수를 내면 좋다. 조각 난 식재료를 건져내는 게 걱정이라면 ‘육수망’을 이용하면 된다. 2. 피부에 양보하세요 1 —— 포도 씨 포도 씨에는 피부 재생에 좋은 ‘레스베라트롤’, 멜라닌 색소 형성을 억제하는 ‘폴리페놀’, 혈액순환에 도움이 되는 ‘카테킨’ 등이 들어 있다. 어떻게 쓰나? 포도 먹을 때 씨까지 잘 씹어서 먹는 게 가장 좋지만, 먹기 부담스럽다면 갈아서 팩을 한다. 얼굴에 거즈를 얹고, 그 위에 곱게 간 포도 씨를 골고루 펴 바르면 피부미백, 주름개선 등에 도움이 된다. 2 —— 귤 껍질 귤, 오렌지 같은 감귤류 과일의 껍질에는 AHA 성분이 들어 있다. 이 성분은 피부 각질 제거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떻게 쓰나? 평소 각질이 많이 일어나는 부위에 껍질을 문지르면 된다. 유자에도AHA성분이 들어 있으므로, 유자차를 마시고 난 뒤 찌꺼기로 얼굴 팩을 해도 좋다. 3 —— 시금치 데친 물 시금치를 데친 물에는 비타민A, 비타민B, 비타민C 등 각종 미네랄이 녹아 있다. 이런 성분은 항산화 효과를 내기 때문에, 피부에 흡수될 경우 미백, 주름개선 등의 효과를 볼 수 있다. 어떻게 쓰나? 시금치는 보통 흐르는 물에 깨끗이 헹군 뒤 끓는 물에 살짝 데쳐 먹는데, 시금치 데친 물을 식혀서 세안 후 헹굼 물로 활용하면 된다. 4 —— 쌀뜨물 쌀을 씻을 때 비타민B1, 비타민B2가 최대 60%까지 씻겨 나온다. 쌀의 비타민이 쌀뜨물에도 담겨 있다는 뜻이다. 단백질, 지방 같은 영양소도 많다. 어떻게 쓰나? 쌀을 두 번 정도 씻어낸 뒤 세 번째 물부터 쓰는 게 좋다. 세안할 때 헹굼물로 쓰면 미백, 수분공급 효과 등을 볼 수 있다. 5 —— 양배추 꽁다리 양배추에는 피부를 진정시키고 열을 내리는 효과가 있다. 여름철 햇빛에 그을려 빨갛게 달아 오른 피부를 진정시킬 때 양배추를 활용해보자. 어떻게 쓰나? 양배추 꽁다리를 버리지 말고 믹서에 간 뒤, 밀가루와 물을 이용해 점도를 조절한다. 얼굴에 펴 발랐다가 10~15분 뒤 미온수로 헹구면 된다. 6 —— 유통기한 지난 우유 우유 속에 든 지방 성분이 피부에 영양을 공급해준다. 비타민, 미네랄이 풍부하게 들어서 항산화 효과도 낼 수 있다. 어떻게 쓰나? 세안 후에 유통기한이 지난 차가운 우유를 얼굴에 펴 발라 마사지하듯 문지르고, 깨끗한 물로 헹구면 된다. 팩으로 활용할 수도 있다. 거즈에 차가운 우유를 조금 적셔서 얼굴에 얹었다가 10~15분 뒤에 물로 헹궈낸다. 농약이 걱정된다면? 채소나 과일 껍질 등에 잔류하는 농약이 걱정될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식품의약품안전처에 따르면 물, 소금물, 식초물, 숯을 담근 물로 씻었을 때 각각의 세척 효과는 큰 차이가 없다. 일반적으로 물에 잠시 담갔다가 흐르는 물에 30초 정도 씻으면 대부분 없어진다. 식품 세척이 가능한 세정제나 베이킹파우더를 이용해 문질러서 씻어도 효과적이다. 3. 청소할 때 쓰면 좋아요 1 —— 유통기한 지난 식빵 유통기한이 지나서 딱딱하게 굳은 식빵은 기름을 제거하는 데 활용할 수 있다. 식빵은 기름을 흡수하는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가스레인지나 오븐 등에 묻은 기름을 닦는 데 쓰면 된다. 식빵을 비닐봉지에 담은 채 입구를 살짝 열어서 냉장고에 넣으면 냄새를 줄이는 효과도 볼 수 있다. 2 —— 귤 껍질 귤 껍질은 피부 개선뿐 아니라 냄새 제거 효과도 있다. 귤 껍질을 모아서 전자레인지나 오븐에 넣고 눌러 붙지 않을 정도로만 돌리면 전자레인지와 오븐 속 퀴퀴한 냄새를 없앨 수 있다. 3 —— 밀가루 조금 남은 밀가루는 싱크대 청소 하는 데 쓰면 좋다. 싱크대에 기름때가 묻었을 때 밀가루를 뿌려서 닦으면 깨끗하게 지워진다. 물과 밀가루를 5대 1의 비율로 섞어서 끓이면 풀이 되는데, 누렇게 변한 흰 옷에 잠시 발라뒀다가 세탁하면 다시 하얗게 되돌릴 수 있다. 4 —— 김 빠진 콜라 콜라 속 시트르산 성분은 찌든 때를 없애는 효과가 있다. 먹다 남은 김 빠진 콜라가 있다면 변기에 낀 물때, 곰팡이를 없애는 데 쓰면 좋다. 콜라를 변기 구석까지 닿도록 뿌린 뒤 30분 정도 놔뒀다가 물을 내리면 된다. 냉장고 속 찌든 때를 없앨 때도 사용할 수 있다. 행주에 콜라를 적셔서 때가 긴 부위에 묻히고, 깨끗한 행주로 다시 콜라를 닦아내면 된다. 출처 : http://health.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6/07/2017060701640.html
204 프랑스 장관을 지낸 한국입양아 [2]
[레벨:20]정아브라함
74 2017-06-17
제가 크리스토프를 읽으면서 한국과 프랑스 정서가 비슷하다고 느꼈는데 이 글에서도 그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성공한 한국인 입양아? 난 뼛속까지 프랑스 사람" 입력 : 2017.06.17 03:02 | 수정 : 2017.06.17 14:10 [김수경의 스포트라이트] 프랑스 첫 동양계 장관 지낸 입양아 출신 플뢰르 펠르랭 플뢰르 펠르랭이 된 김종숙 생후 6개월에 입양… 평범한 가정에서 자라 16세에 대입자격시험 합격… 엘리트 코스 밟아 中企·문화부 장관 지내 한국 기업한테 투자 받아… 프랑스 IT스타트업 발굴 한국기업이라서가 아니라 IT 선진국이라 함께 일해 "한국 올 때마다 노래방 가죠… 소맥 빨리 마시기 시합도" 친부모 찾을 계획 없다 개도국 출신 입양아가 장관 될 수 있는 나라 프랑스 외엔 없을 것 열두 살 딸아이의 한국사랑 한국어에 관심 많은 딸… 나도 버킷리스트에 한국어 배우기 추가 프랑스의 한류 열풍 한국 영화·음악 유행에 일본어보다 한국어 인기 K팝 가사 따라 부르는 佛 10代 보고 깜짝 놀라 이미지 크게보기플뢰르 펠르랭 전 프랑스 문화부 장관은 재임 기간에 빨간 립스틱을 주로 발랐다. 화려한 색 치마 정장을 즐겨 입어 ‘세련된 정치인’으로 불렸다. 그는 이날 “립스틱을 안 가져왔다”며 가방을 뒤졌다. 몇 분간 가방을 뒤져 찾아낸 건 투명한 립글로스였다. 그는 “이걸로도 괜찮겠죠?”라고 연거푸 물었다. / 김연정 객원기자 2012년 한국은 비행기로 12시간 떨어져 있는 프랑스 중소기업디지털경제부 장관의 취임으로 들떠 있었다. 프랑스 사회당 후보인 올랑드 대통령이 선거에서 승리한 직후였다. 좌파 정권이 집권한 건 프랑스에서 17년 만의 일이었다. 독일과 더불어 유럽 내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프랑스의 정권 교체였지만 한국의 관심은 동양인 외모의 이 39세 여성 장관에게 집중됐다. 단발로 똑 자른 새까만 머리카락과 그에 대비되는 흰 얼굴, 까만 눈동자와 얇은 속쌍꺼풀이 진 눈까지, 동양계 최초로 프랑스 장관에 임명된 그는 누가 봐도 한국 여성이었다. 외모와 달리 그의 이름은 발음조차 힘든 플뢰르 펠르랭(44·Fleur Pellerin)이었다. 생후 6개월 때 한국에서 프랑스로 입양된 그는 지난 2012년 5월 중소기업디지털경제부 장관을 시작으로 2016년까지 통상관광부 장관과 문화부 장관을 지냈다. 작년 2월 장관직에서 물러난 뒤 그는 프랑스 IT산업 발전을 위해 '코렐리아캐피탈'을 세웠다. 작년 말부터 한국 기업 네이버·라인과 손잡고 유럽, 특히 프랑스의 스타트업을 발굴·투자하는 일을 하고 있다. 지난 9일 서울 장충동 신라호텔에서 그에게 한국 입양아로 유럽 선진국에서 장관직에 오른 뒤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소감을 물었다. 그의 대답은 냉정했다. "태어난 곳은 여기일지 모르지만 난 뼛속까지 프랑스인입니다. 한국인들이 나를 성공 신화의 주인공으로 봐주는 것은 고맙지만 나는 한국인이 아니에요." "친부모를 찾아볼 생각이 없느냐"는 물음에 그는 대답했다. "없습니다." 그의 대답엔 한순간의 망설임이 없었다. 한국인들로부터 수십 번 들은 질문이었는지 '친부모'란 단어를 꺼내자 문장이 끝나기도 전에 "없다(No)"는 답이 튀어나왔다. 그의 머릿속 한국은 '나를 낳아준 나라'가 아니라 '아시아에 있는 작은 나라' 정도인 것 같았다. 우리 국민을 '한국인'이라고 칭하며 이어가는 그의 말투는 약간 매정하게 들릴 정도였다. "나는 뼛속까지 프랑스인" 그녀에게 매정했던 건 태어난 나라 한국이었다. 1973년 8월 29일은 길에 버려진 그가 발견된 날이다. 태어난 지 3~4일쯤으로 추정되는 여자아이였다. 6개월쯤 지났을 무렵 그녀는 하얀 강보에 싸여 양어머니 애니 펠르랭 품에 안겼다. 김종숙이 플뢰르 펠르랭으로 다시 태어난 순간이었다. 그 이후로 그녀는 한 번도 한국에 발 디딘 적이 없었다. 2013년 3월 본지가 주최한 '제4회 아시아리더십콘퍼런스' 기조연설을 맡아 방한했던 게 처음이었다. 프랑스로 입양된 지 40년 만이었다. 이미지 크게보기하얀 포대기에 싸여 어머니 애니 펠르랭 품에 안긴 생후 6개월 된 아이 김종숙. 이날로부터 40년 뒤 프랑스 장관 신분으로 그는 한국 땅을 다시 밟았다. / KBNe France 이지용PD 태어난 나라에 돌아온 그의 첫 번째 일정은 한국에 있는 프랑스 기업인들과의 만찬이었다. 자신이 입양된 홀트아동복지회를 찾거나 자신이 발견됐던 동네에 들르는 일 같은 건 일정에 없었다. 그는 당시에도 "내가 태어난 곳을 방문하게 돼 설렌다"면서 "나를 낳아준 부모가 누군지는 관심 없다"고 선을 그었었다. 그는 이후에도 한동안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 그랬던 그가 장관직에서 물러난 뒤 지난 9월 우리나라 기업과 사업 파트너를 맺었다. 그 이후 1년에 5~6번씩 이런저런 이유로 한국을 찾고 있다. 지난 3월엔 서울 DDP에서 열린 국제건축심포지엄에 참석했다. 사진을 찍자고 다가가는 한국인들을 상대해 주기도 하고 연설 중간중간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한국이 제법 익숙해진 것 같았다.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줄로만 알았는데 여러 가지 일을 하나 봅니다. "지금은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하고 있어요. OIF(Organization International of Francophonie·프랑스어권 국제기구) 홍보대사로도 일하는데 평창올림픽 때 프랑스어가 원활하게 사용되고 프랑스어의 가치를 격상시키도록 기획하는 거죠. 다양한 곳에서 강연도 하고 있지만 사실 코렐리아캐피탈 대표직이 가장 주된 일이에요. 네이버에서 1230억원 정도를 투자받았고 이 돈으로 프랑스와 유럽에 있는 IT 스타트업 회사를 발굴하는 거죠. 괜찮은 회사로 판단되면 투자도 아낌없이 하고요. 여러 가지 일을 하지만 어떻게 보면 모두 한국과 프랑스 사이 가교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죠." ―그런데 왜 하필 한국 기업과 일하기로 했나요? "한국이기 때문이 아니라 아시아 시장에 관심 있는 유럽 IT 기업들이 한국을 선호하기 때문이에요. 빠른 인터넷과 삼성전자 등 IT 기업이 탐낼 만한 아주 발전된 시장이라는 뜻이죠." ―상대방은 당신이 한국인이라 더 편하게 생각할 것 같습니다만. "저는 전혀 상관없지만 그들은 그렇게 느낄 수 있어요. 내가 갖고 있는 동양인의 외모가 백인이나 라틴, 혹은 흑인 등 서양인 외모보다 더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한국에선 어디 출신이다, 누구의 혈육이다라는 걸 워낙 따지잖아요. 내 외모가 한국인들에게 부담 없다면 사업 파트너로서 저한테 해가 될 건 없죠." ―한국이라는 게 중요한 요소는 아니었군요. "그렇죠. 한국에 오면 사람들이 자꾸 '네가 어디서 태어났는지 궁금하지 않으냐', '엄마가 누군지 알고 싶지 않으냐'고 묻지만 나의 아버지 어머니는 내 나라 프랑스 파리에 있는, 나를 키워주신 두 분뿐이에요." 그와 그의 부모를 연결해준 홀트아동복지회는 친부모를 찾아주는 일을 할 때 철저히 입양자 본인 의사만을 고려한다. 친부모가 그를 찾고 싶다고 해도 그가 동의하지 않으면 연결해주지 않는다. 그는 친부모를 찾으려고 시도한 적도 없고 계획도 없다고 했다. 이미지 크게보기올랑드 전 프랑스 대통령 내각이 들어서면서 임명된 그는 프랑스의 첫 동양인 장관이 됐다. 그는 “프랑스가 아니었다면 동양 여성인 내가 장관에까지 오르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2014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중소기업 간담회에 참석한 올랑드 대통령(왼쪽에서 둘째)과 플뢰르 펠르랭 당시 중소기업디지털경제부 장관. / AFP 항상 최고 성적 유지한 엘리트 2013년 이후 한국을 15번쯤 방문했지만 그는 여전히 한국에 대해 마음의 문을 열지 않은 것 같았다. 그의 웃음소리는 유쾌했지만 속내는 그렇지 못한 게 아닐까. 동양인 입양아로 낯선 프랑스에서의 삶이 힘들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궁금해졌다. ―어떤 가정에서 자랐나요? “아주 평범하고 경제적으로도 크게 여유롭지 못한 집에서 컸어요. 어린 시절을 보낸 곳도 파리 변두리에 있는 조용한 동네였고요. 아버지는 핵물리학 공부를 해서 박사학위까지 받으셨지만 어머니는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한 분이에요. 아주 가난한 집 첫째로 태어나서 16세 때부터 공장에서 돈을 벌어야 했대요. 나와 내 여동생을 키울 때는 줄곧 주부였고요.” 그의 여동생도 한국에서 입양됐다. ―특별하지 않은 가정에 입양된 아이가 스스로의 힘으로 장관이 된 거군요. “프랑스에선 가능합니다. 교육 제도가 잘돼 있기 때문이죠. 일단 고등학교까지는 무조건 무상교육이에요.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그랑제콜이라고 부르는 전문분야 학교에서 공부하려면 학비를 내야 하긴 하지만요. 그건 선택하는데 달린 거죠.” ―크면서 인종차별을 당한 적은 없습니까. “내가 느낀 바로는 없었어요. 특히 나 같은 경우는 학교에서도 성적으로는 항상 선두 그룹에 들었고 대학에 들어간 시기도 또래보다 2년쯤 빨랐기 때문에 나를 무시할 수는 없었겠죠.” 대부분의 프랑스인이 18세 때 치르는 프랑스 고교 졸업시험 바칼로레아를 그는 16세에 합격했다. 3년제 일반 대학교에 다니는 대신 그는 프랑스에서 최우수 학생들만 입학한다는 프레파 과정을 선택했다. 그랑제콜 준비 단계 학교다. 그랑제콜은 우리나라로 치면 전문대학원 과정과 비슷하다. 2년간의 프레파 과정을 수료한 그는 프랑스 상경계 그랑제콜에서 최상위권인 에섹(ESSEC) 비즈니스 스쿨에 입학했다. 21세에 에섹을 졸업한 그는 경제 정책 등을 공부하기 위해 또 다른 그랑제콜인 시앙스포(Sciences Po·파리 정치대학)에 들어갔다. 시앙스포 졸업 후 정계 진출의 꿈을 안고 ENA(국립행정학교·École nationale d’administration)에 진학한 그녀는 감사원에서 근무하면서 소수자 차별을 반대하는 NGO 등에서 활발한 활동을 했다. 2002년 사회당 대선 캠프에서 연설문 작성에 참여하면서 현실정치에 발을 들여놓았다. ―사회에 진출한 다음에도 편견은 없었나요? “있었겠죠. 동양인이기 때문은 아니었어요. 취업 시장에서 차별을 받았을 수도 있었겠지만 저는 공무원 시험을 보고 합격해 인종으로 평가받을 기회가 없었어요. 어쩌면 여성이라는 것 때문에 차별이 있었을 수는 있어요. 고위공무원 세계에선 프랑스도 조금은 남성 지배적인 분위기가 있거든요.” 그가 장관으로 임명됐을 때 프랑스 현지 언론은 “가난한 나라에서 입양된 동양 여성이라는 점이 다양성을 추구한 올랑드 내각과 맞아떨어졌다”고 썼다. 그 역시 작년 2월 문화부 장관에서 물러나면서 “개발도상국 빈민촌에서 태어나 프랑스 평범한 가정에 입양된 어린이가 문화부 장관이 될 수 있는 나라는 세계에 거의 없다”고 말했다. 12세 딸은 한국에 관심 많아 ―장관으로서의 삶이 쉽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단 하나 확신할 수 있는 건 장관이라는 자리가 지구상에서 가장 힘든 자리라는 겁니다.” 그가 혀를 내둘렀다. “보람은 있었죠. 특히 내가 주장하던 정책이 실현되면 말이죠. 하지만 그 자리에 있으면 항상 ‘기대에 못 미친다’는 이야기를 들어야 해요. 정책을 강력하게 밀고 나가면 ‘너무 성급하다’고 하고, 좀 천천히 바꾸려고 하면 ‘너무 느리다’고 비판하지요. 뭔가 바꿔보려고 하면 설득을 해야 하고 어떤 경우엔 나와 같은 정당에 속한 사람들까지 공격을 해왔습니다. 쓸데없이 힘 빼는 언쟁도 있었죠.” 그는 전남편과 사이에서 얻은 딸 베네리스(12)와 변호사이자 고위 공무원인 남편 로랑 올레옹(48), 로랑이 전처와 낳은 아들 둘과 함께 살고 있다. ―처음 장관이 됐을 때 딸이 어렸겠군요. “그때 아이가 일곱 살이었어요. 장관으로 일하는 동안은 일과 삶 사이 조화 같은 건 꿈도 못 꿨지요. 4년 반 동안 집에 거의 들어가지 못했는걸요. 바쁘긴 엄청 바쁜데 엄마로서 죄책감이 들었어요. 내가 당신보다 나은 삶을 살기를 바라는 우리 엄마조차 ‘딸과 시간을 좀 더 보내렴’ ‘베네리스에게 좀 더 신경 써라’라고 조언했으니까요. 그런데 딸아이가 다행히(웃음) 책을 좋아하고 학교 숙제도 스스로 하는 자율적인 성격이에요. 집을 비우면서 알게 됐죠. 딸아이 덕분에 오히려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커리어를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요.” ―딸이 오히려 한국에 관심이 있다고 하던데요. “특히 한국어에 관심이 아주 많아요. 아이에게 너의 4분의 1은 한국에서 왔다고 설명해 줬거든요. 아이들과 함께 한국으로 휴가를 오기도 했어요. 특히 남편의 아들들이 18세, 16세인데 되게 별종(geek)이거든요. 한국도 그런 별종 문화가 많잖아요. 아이들과 함께 설악산과 제주도에도 갔었어요. 남편과 아이들도 독특하다며 흥미 있어 했고요.” 한국 영화와 음악 파워에 놀라 ―굳이 ‘나는 한국인이 아니고 프랑스인’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우리나라(프랑스)는 정치·사회적 합의가 국민의식의 바탕이 되는 곳이에요. 내가 태어난 곳은 한국이지만 17세기 철학을 바탕으로 하는 나라에서 교육을 받았고 평생 살았기 때문에 그 인식이 깊숙한 곳에 박혀 있는 거죠. 생후 6개월 만에 입양됐는데 기억이 있을 리도 없지 않나요? 참, 신기한 점은 하나 있어요.” ―무엇인가요. “한국과 프랑스가 아주 비슷하거든요. 특히 두 나라 사람들이 삶을 즐기는 방식이 정말 닮았어요. 축하할 일이 있으면 친구들을 불러서 파티를 연다든지, 음식 먹고 술 마시고 노래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측면에서도요. 지중해적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독특한 유럽 문화가 한국에도 있더라고요.” ―술도 마시고 노래도 합니까? “한국에 들를 때마다 노래방에 가요. 엄청 재밌어요. 한국 노래는 못 하지만 소리 높여 팝송을 부르죠. 한국에서 사귄 친구들과 소맥도 즐겨 먹어요. 작년엔 소맥 빨리 마시기 대회 같은 데도 나갔었어요(웃음).” ―한국 영화나 음악에도 관심이 있습니까. “최근에 영화 ‘옥자’를 만든 감독이 누구더라? 아! 봉(준호) 감독! 그가 만든 ‘괴물’이라는 영화를 아주 감명 깊게 봤어요. 조금 폭력적이지만 감각적인 박찬욱 감독 영화도 인상 깊었고요. 박 감독은 2주 전 칸 영화제에서 만나 점심을 함께 먹었어요. 칸 영화제 심사위원이더라고요. 한국 영화는 그 예술성이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어요. K팝도 마찬가지죠. 박근혜 대통령이 파리에 왔을 때 K팝 콘서트가 열려 함께 갔는데 그때 깜짝 놀랐습니다. 프랑스 10대 소녀들이 한국어 가사를 전부 외워 따라 부르더라고요. 소리 지르고 눈물까지 흘리면서요. 최근 1~2년 사이 프랑스에서 한국어 인기가 일본어를 눌렀어요. 한국어 가사나 영화 대사를 이해하기 위해서 한국어를 배우죠. ‘한류 파워’라고 할 수 있죠.” 그는 ‘한류’라는 단어만큼은 또박또박 말했다. ―한국어를 배울 생각은 없나요? “언젠가는 배워보고 싶어요. 장관으로 일할 때는 너무 바빠서 배울 시간이 없었어요. 어릴 적엔 새 언어를 배운다는 게 굉장히 쉽고 당연한 일이었는데 지금은 나이가 들다 보니 노력을 쏟아야 하더라고요. 제 버킷 리스트에 ‘한국어 배우기’가 들어 있어요.” “한국에서 컸다면 장관이 됐을까요?” ―당신의 삶을 ‘인생 역전’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솔직히 고백하자면 내 앞에 놓인 한계를 치열하게 극복하면서 살아오지는 않았어요. 프랑스는 한국과 달리 어린아이에게 학교 성적에 대한 스트레스를 주는 나라가 아니니까요. 오히려 입양되면서 경제적으로나 정치·사회적으로 더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요. 내가 입양된 게 1970년대였는데 당시 한국은 굉장히 가난하고 정치적으로도 불안정한 나라였으니까요.” ―입양됐기에 다행이라고 생각합니까. “내 친부모는 아마 한국에서 아주 가난하고 교육도 제 <iframe width="250" height="250" src="http://cad.chosun.com/RealMedia/ads/adstream_sx.ads/www.chosun.com/news@x74" frameborder="0" marginwidth="0" marginheight="0" noresize="" scrolling="no"></iframe>대로 받지 않은 사람들이었을 확률이 높아요. 그렇지 않았다면 갓 태어난 아기를 길에 버리진 않았을 테니까요. 그런 가정환경과 한국 특유의 경쟁적이고 억압적인 문화에서 컸다면 한국에서 장관을 할 수는 없지 않았을까요?” 그가 코를 찡긋하며 웃었다. “친부모가 갓 태어난 아기를 길에 버렸다”는 그의 말이 귀에 맴돌았다. 그녀의 삶 전체가 비로소 이해되는 듯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6/16/2017061601560.html
203 개구리 이야기 [1]
[레벨:20]정아브라함
81 2017-07-04
어떥 영국 수필가가 한국 실정을 담아 쓴 글인데 재미있습니다. '아들 손자 모여 밤새 우는' 개구리는 한국적 열정의 표상 영국인은 일에서 의미 찾지만… 한국인, 의미보다 근면 앞세워 함께 밤 지새우는 팀워크 발휘… 듣는 사람 없어도 날이 밝도록 팀 알퍼 칼럼니스트 "개굴개굴 개구리 노래를 한다/ 아들 손자 며느리 다 모여서/ 밤새도록 하여도 듣는 이 없네/ 듣는 사람 없어도 날이 밝도록…." 동요 '개구리'. 한국에서 자랐거나 한국에서 아이를 키워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당연히 아는 노래다. 인생의 4분의 1이 넘는 시간을 한국에서 보냈음에도, 내가 이 노래를 처음 들은 것은 불과 몇 달 전이다. 그런데 처음 듣자마자 나는 이 노래에 홀딱 반해버렸다. 노래를 듣는 순간, 내가 그 동요 속 개구리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영국 출신 글쟁이로 한국에서 생업에 종사하는 것은 마냥 화려하고 흥미롭기만 한 것은 아니다. 물론 한국에 있는 동안 나 스스로 자부심을 가질 만한 가치 있는 일도 많이 해왔지만, 내 직장 생활의 절반은 한국의 큰 회사들을 위한 보도자료나 마케팅 자료를 영어로 작성하거나 잡지사와 라디오 방송국에서 아무도 읽지 않을 듯한 글을 쓰고 아무도 듣지 않을 법한 그런 프로그램들을 만드는 것이었다. 내가 회사에서 쓰는 글의 절반은 듣는 사람이 없는 내용이지만, 그래도 밤새도록 노래해야 한다는 것을 나는 한국에서 배웠다. 이는 결코 내 개인적인 성취욕 때문이거나 내가 직장 동료의 롤 모델이 되려 했기 때문이 아니다. 이런 작업을 할 때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내 곁에는 언제나 아들, 손자, 며느리 다 모인 듯 반드시 팀원들이 함께한다. 그들은 머리를 맞대고, 내가 열심히 개굴개굴하며 쓴 글을 실제로 존재하는지도 알 수 없는 독자가 원하는 글인지 확인하고 또 확인한다. 때때로 클라이언트 측 요구에 의해, 팀 전체가 밤새도록 작업할 때도 있다. 독자들이 글을 빨리 읽을 수 있게 서두르라는 강력한 요청 때문이다. 이 개구리 동요가 한국에서 보낸 내 직장 생활의 많은 부분에 대한 완벽한 비유이긴 하지만, 나만 그렇게 느끼는 것은 아니라고 확신한다. 실제로 내 지인의 절반 이상이 이렇게 밤새 개굴개굴 노래해야만 하는 직업을 갖고 있다. 한 친구는 온종일 보고서를 만드느라 텍스트 상자를 이리저리 옮기며 하루를 보낸다. 또 다른 친구는 아무도 확인하지 않는 회의록을 작성하느라 각종 회의에 참석해 글을 쓰며 하루를 보낸다. /이철원 기자 사실 이 노래는 한국 직장 생활의 많은 부분을 보여주는 절묘한 비유다. 한국에서는 선거철이 되면 후보자들에 대한 정보가 담긴 두툼한 인쇄물이 배달된다. 거기에는 때때로 후보들의 직장 경력이 포함돼 있다. 당선 확률이 없어 보이는 후보라도 ○○전자 차장으로 얼마 동안 일했으며 ○○대학을 나왔다고 반짝이는 종이에 컬러 인쇄로 보내온다. 나는 이 인쇄물들을 주로 쓰레기통 밑바닥에 깔아두는 데 사용한다. 하지만 나는 안다. 바쁘게 개굴개굴 대며 이 인쇄물을 만든 팀이 어디엔가 있다는 것을. 그들은 빠듯한 마감 일자를 맞추기 위해 아마도 밤샘을 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런 인쇄물이 쓰레기통으로 향하는 순간, 나는 크나큰 죄의식을 느낀다. 의미 없는 내용이지만 이 인쇄물을 읽어야 한다는 충동에 사로잡혀 나는 잠시 망설인다. 그러나 해야 할 설거지와 놓치고 싶지 않은 드라마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낸다. 그렇게 해서 인쇄물은 결국 쓰레기통으로 향한다. 지난 대선 때, 아들, 손자, 며느리로 가득한 선거운동원들은 아침 8시 30분까지도 지하철 입구에 서서 부지런히 인사하고 피켓을 흔들며 유세전을 펼쳤다. 하지만 그 시간 지하철 입구는 지각해서 허둥지둥 정신없는 직장인이나 스마트폰에 머리를 파묻고 걸어가는 청소년이 대부분이다. 이들은 대개 개구리 부대에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자기의 갈 길을 바쁘게 걸어간다. 케이블TV나 라디오 방송의 채널 서핑을 해보면, 시청률이나 청취율이 0.1%도 되지 않는, 이제껏 이름 한 번 들어본 적 없는 수많은 개구리 채널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프로듀서, 엔지니어, 작가로 구성된 팀들은 아마 많은 시간과 공을 들여 프로그램을 만들 것이다. 그러나 시청자들은 오직 '무한도전'이나 박보검이 출연하는 드라마에만 관심을 가질 뿐, 그런 프로듀서나 엔지니어, 작가 등의 노력을 완전히 헛수고로 만든다. 만약 이것을 한국 사회에 대한 장황한 비난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완전한 오해다. 내게 밤새도록 열심히 일할 수 있는 한국인의 능력은 무척 인상적이다. 영국의 많은 기업이 망하거나 다른 나라에 매각됐다. 영국인은 회사나 팀을 위해 열심히 일하기 <iframe width="250" height="250" src="http://cad.chosun.com/RealMedia/ads/adstream_sx.ads/www.chosun.com/news@x74" frameborder="0" marginwidth="0" marginheight="0" noresize="" scrolling="no"></iframe>보다 자기가 하는 일에서 자기만의 의미와 가치를 찾으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반면 한국인은 자신이 맡은 업무가 얼마나 의미 있는지 따지기보다 날이 밝도록 열심히 일한다. 너무 지나친 자기반성과 평가는 종종 긍정적인 결과 대신 무기력한 정체(停滯)를 빚을 수 있다. 반면 에너지는, 심지어 혼자 개굴개굴 우는 에너지조차도, 더 큰 에너지를 끌어낼 수 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7/03/2017070302922.html
202 앵무새 당나귀 이야기
[레벨:20]정아브라함
36 2017-07-20
내용이 재미있고 유익하여 올립니다. [새미 라샤드의 비정상의 눈] 앵무새 따라 하다 죽은 당나귀 이야기 [중앙일보] 입력 2017.07.20 02:35 | 새미 라샤드 이집트인·JTBC ‘비정상회담’ 전 출연자 당나귀와 앵무새가 비행기에 탑승했다. 앵무새가 승무원을 불렀다. 승무원이 “어떻게 도와드릴까요” 하자 앵무새는 “그냥 불러봤어요”라고 승무원을 놀리며 낄낄댔다. 재미 붙인 앵무새가 승무원을 또 불렀다. 화가 난 승무원은 “정말 필요한 일이 아니면 부르지 마세요”라고 경고했다. 경고를 무시하고 이번에는 당나귀가 승무원을 호출했다. 정말 화가 난 이 승무원은 당나귀와 앵무새를 비행기에서 추방했다. 앵무새는 아무렇지 않게 날기 시작했다. 추락하는 당나귀에게 앵무새가 물었다. “날개도 없는데 왜 나를 따라 했니?” 당나귀는 대답도 못하고 땅에 떨어졌다. 현대 사회에는 당나귀가 많다. 재미있고 예쁘고 인기 많은 사람을 그냥 모방하는 사람이 많다. 패션이나 유행이 그렇다. 사람 많은 동네에 가보면 운동팀이 단체로 나온 것처럼 옷이 엇비슷하다. 대학생들은 색상이 달라도 디자인이 같거나, 디자인은 달라도 색상이 같은 옷이나 액세서리를 많이 착용하고 다닌다. 연인들의 커플룩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지하철 같은 공공장소에서 낯선 사람의 옷차림이 나와 같다면 얼마나 어색할까. 패션이나 유행은 누가 만들어 퍼뜨리는 걸까. 주로 인기 연예인이나 운동선수들이 패션을 시작하는 것 같다. 패션·유행이 자리 잡으면, 팬이 아닌 사람들도 따라 한다. 스타에게 맞는 옷이나 행동이 내게 잘 맞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을 잘 안 하는 걸까. 이런 따라쟁이 습성은 하이힐 신다가 고생 끝에 다릿병까지 얻은 여성들에게서 볼 수 있다. 한번은 고국인 이집트의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개그맨이 있었다. “패션은 나쁜 것이니 따르면 안 된다. 패션이 왜 나쁘냐면 해마다 바뀌기 때문이다. 패션이 좋았다면 왜 다른 패션 앞에서 약해지거나 사라질까.” 억지 같기도 하지만 그럴듯하다. 패션이나 유행에 빠진 사람들이 한번 생각해볼 만한 말이다. 너도나도 따라 하다 보면 매년 내 모습이 바뀌고 내 본모습을 잃어버릴 수 있다. 마음에 드는 걸 따라 하는 건 좋지만 그러다 내 개성을 잃어버릴 수 있다. 저마다 타고난 재능과 본성이 있다. 내게 남다른 매력이 있다는 걸 잊지 말자. 내 매력을 찾아 살리다 보면 언젠가 남들이 나를 따라 하는 일도 생기지 않을까. 새미 라샤드 이집트인·JTBC ‘비정상회담’ 전 출연자 [출처: 중앙일보] [새미 라샤드의 비정상의 눈] 앵무새 따라 하다 죽은 당나귀 이야기
201 순교자 얀 후스
[레벨:20]정아브라함
42 2017-08-03
좁은문으로 들어가라 말씀과 관련하여 한 순교자의 기사를 올립니다. 종교개혁 500년-종교개혁의 현장을 가다] (상)-마르틴 루터 이전에 얀 후스가 있었다 [중앙일보] 입력 2017.08.03 09:36 인쇄기사 보관함(스크랩)글자 작게글자 크게 기자 렵은 새벽이었다.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의 기치를 올린 게 1517년. 그로부터 꼭 98년 전이다. 시대의 어둠이 가장 짙을 때였다. 독일 남부의 도시 콘스탄스에서 화형식이 열렸다. 종교개혁을 알리는 새벽닭의 죽음, 주인공은 얀 후스(1369~1415)다. 체코의 저명한 신학자이자 가톨릭 사제였다. 프라하 대학의 신학부 교수와 총장까지 지냈던 인물이다. 당대의 명망가였다. 그런 후스를 화형에 처한 이는 다름 아닌 로마 가톨릭이었다. 체코의 종교개혁가 얀 후스는 독일 남부 콘스탄스에서 화형에 처해졌다. 올해는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이다. 최근 종교개혁지 순례차 독일 콘스탄스를 찾아갔다. 거대한 호수를 낀 채 스위스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무척 아름다운 휴양도시였다. 주말이면 스위스 사람들이 물가가 싼 독일로 장을 보러 오는 바람에 교통체증이 일기도 했다. 600년 전 독일 콘스탄스에서 가톨릭교회의 공의회가 열렸다. 당시 가톨릭의 교황은 무려 3명이었다. 나는 호숫가로 갔다. 그곳에 360도 회전하는 높다란 동상이 하나 서 있었다. 가슴과 허벅지를 드러낸 반라의 여인상. 높이 9m에 무게가 18톤이다. 여인은 당대 최고의 미모로 꼽히던 콘스탄스의 창녀다. 그녀의 양손에는 두 남자가 앉아 있었다. 왼손에는 삼층관을 쓴 교황이, 오른손에는 왕관을 쓴 황제다. 둘 다 벌거숭이다. 교황은 다리를 꼬고 있고, 황제는 성기까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콘스탄스 호숫가의 동상. 당대 최고의 미녀로 꼽히던 창녀의 왼손에는 교황이, 오른손에는 황제가 앉아 있다. 둘 다 벌거벗은 상태다. 황제는 머리에 왕관을, 교황은 초월적 권위를 상징하는 삼층관을 쓰고 있다. 호숫가의 창녀 동상은 600년 전의 시대상을 폭로하고 있었다. 당시 교황은 무려 세 명이었다. 교황청도 로마와 프랑스 아비뇽, 두 곳이었다. 서로가 “내가 진짜 교황”이라고 정통성을 주장하며 치고 박고 있었다. 당시 가톨릭 교회는 면죄부(면벌부)를 판매하며 타락한 채 분열돼 있었다. 보헤미아(체코)의 종교개혁가 얀 후스. 후스는 그런 교회 권력의 심장부를 향해서 칼을 겨누었다. 타깃은 ‘교황’이었다. 후스는 “면죄부(면벌부)를 파는 교황은 가롯 유다와 같다”고 선언했다. 유다는 예수를 유대인에게 팔아넘겨 결국 숨지게 한 인물이다. 그런 유다에 교황을 빗댔다. 중세 암흑기에 자신의 목숨을 걸지 않고서는 지를 수 없는 도발이었다. 나는 호수 위에 설치된 데크길을 따라 동상 앞으로 갔다. 장관이었다. 지상 최고의 권력자가 창녀의 손에서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었다. 겉을 보면 성(聖)과 속(俗)의 만남이지만, 들추어 보면 욕(欲)과 욕(欲)의 만남에 불과했다. 후스는 ‘예수의 이름으로’ ‘교회의 이름으로’ 포장된 인간의 욕망과 권력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콘스탄스의 푸른 호수에는 예쁘고 아담한 요트들이 떠 있었다. 600년 전, 후스도 이 자리에서 저 풍경을 바라봤다. 그가 바라본 호수는 그리 아름답지만은 않았으리라. 체코 프라하의 광장에 있는 얀 후스의 동상. 후스가 죽자 체코(당시 보헤미아)에서는 오히려 후스의 지향을 따르는 후스파가 교회의 주류가 되었다. 1419~36년 양측이 대립하는 후스 전쟁이 발발했다. 당시 가톨릭 교회의 미사는 모두 라틴어로 진행됐다. 서민들은 라틴어를 몰랐다. 읽을 줄도 모르고, 쓸 줄도 몰랐다. 그저 성당에 가서 사제가 읽는 라틴어 성경을 뜻도 모른 채 들을 뿐이었다. 강론도 그랬다. 라틴어로만 진행되는 강론은 그저 알아 듣지 못하는 ‘소리’에 불과했다. 중세 때 라틴어는 귀족과 성직자, 그리고 지식인의 전유물이었다. 후스는 교황청에 반기를 들었다. 그는 반격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교회 밖으로 나가서 설교를 했다. 라틴어 대신 체코의 언어를 택했다. 사람들은 열광했다. 자신들의 모국어로 가슴에 날아와 꽂히는 성서의 메시지에 환호했다. 게다가 후스는 체코어로 성서까지 번역했다.후스는 대신학자이자 대설교가였다. 콘스탄스 공의회가 열렸던 호숫가의 대저택이다. 지금은 1층이 레스토랑으로 쓰이고 있다. 당시에는 이 저택 바로 곁까지 바닷물이 차 있었다. 콘스탄스 공의회가 열렸던 당시의 대저택. 바로 곁까지 바닷물이 차 있고, 부두가 설치돼 있었다. 콘스탄스의 호숫가에는 지금도 거대한 저택이 한 채 있었다. 600년 전, 이곳에서 콘스탄스 공의회가 열렸다. 공의회는 가톨릭 교회의 최고결정기관이다. 가톨릭에 교황이 셋이나 되고 대립이 심해지자 지기스문트(1368~1437)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공의회를 소집했다. 그는 교회의 분열을 해결하고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고자 했다. 공의회는 당시 ‘뜨거운 감자’였던 후스를 콘스탄스 종교재판에 소환했다. 주위 사람들은 말렸다. “가면 죽일 것이다” “절대 가지 마라”고 입을 모았다. 그런데 지기스문트 황제가 안전을 보장했다. 황제는 두 차례나 사신을 보내 “이땅에서 이단 정죄(定罪)가 사라지게 만들겠다”며 신변 보장을 약속했다. 후스는 콘스탄스로 갔다. 그러나 체포돼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공의회가 열렸던 건물에서 도보로 불과 5분 거리에 있는 수도원 건물. 후스는 이곳의 감옥에 갇혔다. 정면 오른쪽 귀퉁이의 조그만 뾰족탑이 후스가 갇혔던 감옥이다. 나는 후스가 갇혔던 수도원 건물로 갔다. 지금은 호텔과 레스토랑으로 쓰이고 있다. 후스가 석 달간 갇혔던 성탑처럼 생긴 감옥은 남아 있었다. 후스는 이곳에서 고초를 겪었다. 낮에는 쉼없이 걸어야 했고, 밤에는 벽에 묶여 있어야 했다. 누울 수가 없었다. 당시 후스는 지독한 치질과 두통으로 고통을 겪었다. 뾰족탑이 있는 공간이 후스가 갇혔던 수도원의 감옥이다. 지금은 이 건물이 레스토랑과 호텔로 사용되고 있다. 콘스탄스 공의회가 후스를 정조준한 핵심적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건 예수에게서 부여받은 교황의 절대 권위에 대한 전적인 부정이었다. 신약성서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너는 베드로다.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마태복음 16장 13~19절) 이 구절을 바탕으로 가톨릭 교회는 베드로를 ‘제1대 교황’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대를 잇는 교황들마다 예수가 직접 부여한 ‘반석의 권위’가 있다고 믿는다. 그 위에 교회가 서 있다고 생각한다. 프라하 광장에는 바닥에 벽돌로 십자가가 박혀 있다. 후스 당시 종교개혁을 주장하던 프로테스탄트들이 화형을 당했던 자리마다 이렇게 십자가가 하나씩 새져겨 있다. 그들 역시 후스의 가르침을 따르던 이들이었다. 후스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반석’을 베드로라고 해석하지 않았다. 대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라고 봤다. 신의 속성을 온전히 공유하는 예수의 속성. 그게 바로 ‘하느님(하나님) 나라의 속성’이다. 후스는 그런 속성이야말로 그리스도 교회를 세우는 반석이라고 믿었다. 그러한 후스의 해석은 중세 가톨릭 교회의 심장을 찔렀다.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면 가톨릭 교회 체제의 뼈대가 무너질 판이었다. 결국 후스는 사형선고를 받았다. 1415년 7월 16일, 토요일 아침이었다. 후스는 사형장으로 끌려나왔다. 죽음을 코 앞에 두고서도 후스는 황제를 향해 종교개혁의 절박함을 역설했다. 황제는 얼굴이 붉어진 채 아무런 말로 하지 못했다고 한다. 사실 지기스문트 황제는 후스를 죽일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공의회의 주최 측은 왕이 아니라 가톨릭 교회였다. 후스를 어떻게 처리할 지도 교회의 권한이었다. 콘스탄스 공의회에서 얀 후스가 황제와 가톨릭 교회의 대표자들 앞에서 자신의 입장을 항변하고 있다. 사실 100년 후에 마르틴 루터도 후스와 똑같은 곤경에 처했다. 보름스 제국회의에 오라는 요청이었다. 주위에서는 다들 말렸다. 가면 틀림없이 죽일 것이라고 했다. 고심 끝에 루터는 제국회의에 참석했다. 황제와 추기경들 앞에서 조금도 굽히지 않고 자신의 입장을 피력했다. 그런데도 화형을 당하지 않았다. 제국회의의 주최 측이 교회가 아니라 제후들이었기 때문이다. 제후들은 굳이 루터의 목숨을 앗을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콘스탄스 공의회의 주최 측은 제후가 아니라 교회였다. 종교재판소에서 “입장을 번복하면 파문을 면하고 목숨을 구할 것”이라는 마지막 제안을 받았지만 후스는 거절했다. 그는 “내 입장을 번복하면 신 앞에서 죄가 될 것”이라며 죽음을 받아들였다. 후스의 머리카락은 면도칼로 동서남북 네 방향으로 깎였다. 머리에는 고깔 모자를 씌웠다. 거기에는 ‘Hic est heresiarcha(이 자가 이단의 두목이다)’라고 적혀 있었다. 후스를 향한 조롱이었다. 후스가 갇혔던 감옥에서 바라보이는 호수. 저 멀리 말뚝 위에 가마우지가 날아와 앉아 있다. 나는 콘스탄스 호숫가의 부두를 거닐었다. 호수 가운데 솟은 말뚝에 가마우지 한 마리가 날아와 앉았다. 후스가 갇혔던 감옥은 불과 50m 정도 떨어져 있었다. 이 땅에서 맞았던 마지막 밤. 후스는 감옥의 창을 통해 호수 위로 떠오른 달이라도 보았겠지. 그 달을 보며 후스는 기도를 올리지 않았을까. 이튿날은 토요일이었다. 주일을 하루 앞둔 날,‘회개하지 않은 이단자’ 후스는 불타야 했다. 날이 밝았다. 후스는 나무기둥에 몸이 묶였다. 주위에는 짚과 장작이 놓였다. 후스가 마지막에 남긴 유명한 말이 있다. “너희는 지금 거위 한 마리를 불태워 죽인다. 그러나 100년 후에는 태울 수도 없고, 삶을 수도 없는 백조가 나타날 것이다.” 밧줄에 묶인 후스가 화형장에 나와 있다. 왼쪽 뒤의 사람들은 화형을 집행하기 위해 나무를 쌓고 있다. ‘후스’는 체코어로 ‘거위’라는 뜻이다. 생전에 후스는 자신을 종종 거위에 빗댔다. 후스가 예견한 ‘백조’는 과연 무엇일까. 사람들은 그 백조가 100년 후에 등장하는 ‘마르틴 루터’라고 해석한다. 정확하게 말하면 아무리 태워도, 아무리 삶아도 거스를 수 없는 ‘종교개혁’이라는 거대한 시대적 흐름이다. 그 가운데 마르틴 루터가 서 있었다. 후스는 파문과 함께 죽었다. 독일의 마르틴 루터(가톨릭 사제)가 파문당하기 100년 전에 말이다. 개혁을 부르짖던 후스의 저술들은 불태워졌다. 당시에는 인쇄술도 없었다. 일일이 손으로 필사를 하던 시절이었다. 인쇄술 혁명의 덕을 톡톡히 본 루터와 달리 후스의 저술은 널리 퍼져나가지 못했다. 얀 후스는 동 트기 전 시대의 새벽을 알리며 소리 높여 울었던 인물이다. 종교개혁의 여명기에 말이다. 후스가 죽고서 105년이 흘렀다. 1520년 2월에 후스의 저술을 읽은 루터는 이렇게 말했다. DA 300 <iframe name="DASlot574" width="250" height="250" title="광고" id="DASlot574" src="http://dgate.joins.com/hc.aspx?ssn=574&b=joins.com&slotsn=591" frameborder="0" marginwidth="0" marginheight="0" scrolling="no"></iframe> “모르든 알든 우리는 모두 후스파다.” 종교개혁의 여명기, 거기에는 얀 후스가 있었다. 마르틴 루터 이전에 말이다. 콘스탄스(독일)=글ㆍ사진 백성호 기자 vangogh@joongang.co.kr [출처: 중앙일보] [종교개혁 500년-종교개혁의 현장을 가다] (상)-마르틴 루터 이전에 얀 후스가 있었다
200 no image 노인으로 사는 것 [2]
[레벨:20]정아브라함
74 2017-08-19
가끔 요양병원에 계신 어머니를 방문하면 슬픈 생각이 듭니다. 저 어머니의 모습이 바로 10 혹은 20년 후의 나와 내 동역자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노인의 삶이 어떠하여야 할까요? [내가 만난 名문장]<8>만년의 쓸쓸함은 숙명이시형 세로토닌문화원장·정신과 전문의입력 2017-08-19 03:00수정 2017-08-19 03:00 《‘인간의 만년(晩年)이란 것은 쓸쓸한 게 당연한 일이다.’ ―이쓰키 히로유키(五木寬之), ‘바람에 날리며’》 20여 년 전 읽은 일본 작가 이쓰키 히로유키의 ‘바람에 날리며’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그때는 젊어서였을까. ‘그럴 수도 있겠다’며 이 구절을 가벼이 넘겼다. 한데 최근 잦은 노인 고독사 소식을 접하면서 그 말은 불쑥불쑥 내 머리 언저리에 떠오르곤 했다. ‘그래, 나이가 들면 옛날 같을 순 없지. 나를 찾는 발길이 뜸해지고, 이미 세상을 떠난 이도 있고.’ 돌연 서럽고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한편으론 이렇게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적 같고 다행이 아닌가 싶었다. 전쟁과 가난, 우리 세대는 참으로 기구한 시절을 살아냈다. 그래서일까. 길에서 비슷한 연배를 만나면 어깨를 다독여 주고 싶다. “노형, 우리 용케도 살아남았구려.” 얼마 전 한중일 문화정신의학회에서 노인의 자살이 화제에 올랐다. 거기서 이런 말이 나왔다. 일본 노인은 누추한 몸을 가족, 친구에게 보이기 싫어하다 깨끗하게 죽는다. 반면 한국 노인은 ‘내가 저놈들을 어떻게 키웠는데, 저 불효막심한 놈’이라며 서러워하다 죽는다는 얘기다. 노인들이 이쓰키의 경구를 접했다면 좀 달라졌을까. 효(孝) 이야기가 나왔으니 따져보자. 우리 아이들은 어릴 적 이미 효도를 다 했다. 걸음마를 떼고, 바닥을 구르며 웃고, 막 옹알이를 할 때 온 가족이 모여앉아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게 바로 효인데, 무엇을 더 바라랴. 어쩌다 자식이 나이가 들어서도 잘하면 덤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더 마음 편하다. 나이가 들면서 찾아드는 쓸쓸함은 받아들여야만 하는 숙명이다. 그걸 받아들일 여유가 없다면 평소에 많이 베풀어야 한다. 더러 후배를 불러 술도 사고 친구에게 커피도 사야 한다. 너무 인색하게 굴지 마라. 거지로 살다가 부자로 죽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또 있으랴. 이 책에는 이런 구절도 나온다. ‘여든셋이 되면 가방 하나 달랑 들고 낯선 지방으로 강연을 다닐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곤 낯선 여관방에서 쓸쓸히 생을 마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누가 불러주기만 한다면.’ 나도 딱 같은 생각이다. 내 유언장에는 ‘장기기증 후 (시신을) 가까운 의대에 시급히 실습용으로 기증하라’고 되어 있다. 홀로 왔으니 가는 길도 홀로 가는 게 마땅하다. 바쁜 사람들을 불러 모아 번거롭게 하고 싶지 않다. 저자는 나보다 한 살 위다. 광복 전 교사인 아버지를 따라 서울에 온 후 지방으로 전전하다 종전 후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의 책에는 한국 이야기가 곳곳에 등장하는데 짙은 향수에 젖어 있는 게 느껴진다. 한국 정서에도 밝다. 한(恨)에 대한 그의 통찰은 나를 부끄럽게 만든다. 작가는 일본 최고의 문학상 수상자이자 인기 작가이다. 나는 그의 인생을 대하는 솔직한 태도가 좋다. 그의 책을 읽노라면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국경을 넘는 동시대 친구가 있다는 생각에 노년의 쓸쓸함을 위로받는 것 같다. 이시형 세로토닌문화원장·정신과 전문의 원문보기: http://news.donga.com/Main/3/all/20170819/85889118/1#csidx975b20ec3df8154b156908f0342dd94
199 비행기표 싸게 사는 법
[레벨:20]정아브라함
41 2017-08-30
[여행의 기술]대한항공·아시아나항공 싸게 타는 법 [중앙일보] 입력 2017.08.30 00:01 수정 2017.08.30 09:53 인쇄기사 보관함(스크랩)글자 작게글자 크게 기자최승표 기자 SNS 공유 및 댓글SNS 클릭 수145페이스북트위터카카오스토리SNS 공유 더보기구글플러스 핀터레스트URL 복사SNS 공유 더보기 닫기 해외여행을 가지만 비행기만큼은 ‘우리 것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사람, 기내식은 무조건 한식을 먹어야 하는 사람, 승무원이라면 모름지기 한국어를 쓰고 친절해야 한다는 사람. 은근히 많다. 이렇게 한국식 서비스를 고집하지 않는다 해도 한국인에게 한국 항공사가 여러모로 편한 건 사실이다. 그러나 저비용항공을 제외한 한국 국적 항공사, 즉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은 값이 비싸서 부담스럽다. 단돈 5만원이라도 저렴하게 국적 항공사를 타고 싶다면 ‘공동운항’, 이 네 글자를 기억하시라. 요즘 항공사들은 실제로 비행기를 띄우지 않는 노선 항공권도 판매한다. 제휴 항공사 좌석을 이용하는 '공동운항'을 통해서다. 비행기 편명 숫자가 네자리인 게 공동운항 편이다. 공동운항(Code share)이란 A항공사가 제휴사인 B항공사의 좌석 일부를 자사의 항공편명으로 판매하는 걸 말한다. 보통 A항공사를 판매사(Marketing Carrier), B항공사를 운항사(Operating Carrier)라 한다. 이를테면 아시아나항공은 캐나다에 취항하지 않지만 인천~밴쿠버 노선 항공권을 판다. 실제로 인천~밴쿠버 노선에 비행기를 띄우는 에어캐나다와 공동운항 제휴를 맺은 것이다. 단순 왕복 노선뿐 아니라 경유편도 가능하다. 대한항공은 프랑스 니스에 취항하지 않지만 웹사이트에서 인천~니스 항공권을 예약할 수 있다. 인천에서 대한항공이나 에어프랑스를 타고 파리로 가서 에어프랑스 국내선 항공편을 타고 니스로 가는 방식이다. 반대로 외국 제휴 항공사를 통해 대한항공·아시아나항공을 이용할 수도 있다. 편명 네자리 숫자에 비밀 있다 제휴 항공사 네트워크 이용하는 공동운항 장거리 노선 같은 비행기 50만원 저렴하기도 수하물 ·마일리지 등은 구매 항공사 기준 적용 같은 비행기를 탄 승객이지만 실제 구매 항공사는 무척 다양할 수 있다. 가령 아시아나항공 인천~방콕 노선을 보면, 타이항공·에어캐나다·에티오피아항공 등이 공동운항 항공권을 판매하고 있다. 현재 대한항공은 35개 항공사 604개 노선, 아시아나항공은 30개 항공사 277개 노선에 대해 공동운항 제휴를 맺고 있다. 최근에는 외국 항공사뿐 아니라 자회사인 저비용항공사와도 공동운항을 늘리고 있다. 공동운항이 효율성이 높기 때문이다. 판매사 입장에서는 직접 비행기를 띄우지 않고도 고객에게 다양한 항공편을 팔 수 있고, 운항사는 판매 채널을 다양화해 빈 좌석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어 이득이다. 롯데백화점이 관계사인 롯데닷컴뿐 아니라 롯데닷컴의 경쟁사이기도 한 지마켓·옥션 등을 통해 상품을 판매하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주요 공동운항 제휴사. 여행자 입장에서 공동운항은 잘만 이용하면 저렴한 여행의 일등공신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보자. 8월29일 에어프랑스 홈페이지에서 오는 9월1일 출발해 9월8일 도착하는 인천~파리 일반석 항공권을 검색했다. 왕복 노선을 모두 대한항공을 타는 공동운항 항공권(편명 AF5093·5092)이 최저 166만원이었다. 대한항공 사이트에서 검색한 같은 항공편(KE901·902), 최저가 항공권은 219만원이었다. AF5093과 KE901 항공편은 인천에서 오후 1시20분에 출발하는 똑같은 대한항공 비행기인데도 53만원이나 차이가 났다. 참고로 일반 항공편은 두자리 알파벳과 숫자 세자리로 이뤄져 있지만 공동운항편은 숫자가 네자리다. [출처: 중앙일보] [여행의 기술]대한항공·아시아나항공 싸게 타는 법
198 비행기표 싸게 사는 법 (속)
[레벨:20]정아브라함
52 2017-08-30
에어프랑스 홈페이지에서 검색한 대한항공 공동운항 항공편은 대한항공에서 검색한 것보다 50만원 이상 저렴했다. [에어프랑스 홈페이지 캡처] 한국 출발을 기준으로 했을 때 외국계 항공사는 대체로 대한항공·아시아나항공보다 저렴하다. 특히 할인 프로모션을 잘만 이용하면 파격적인 가격으로 한국 국적기를 탈 수 있다. 공동운항편도 같은 할인 운임을 적용하기 때문이다. 에어프랑스는 지난 8월23일부터 29일까지 할인 이벤트(출발일 기준 11월~2018년 3월 출발)를 벌였는데 인천~파리 노선이 최저 79만원이었다. 여기엔 물론 대한항공을 타는 공동운항편도 포함됐다. 외국 항공사가 파는 공동운항 항공권이 대체로 저렴하지만 늘 그런 건 아니다. 낮은 운임의 항공권이 모두 팔렸을 경우가 그렇다. 가령 여행 비수기인 11월, 델타항공이 대한항공 인천~로스앤젤레스 노선 좌석을 30석 할당 받았는데 한두 자리 밖에 남지 않았고, 대한항공은 자리가 많이 남았다면 대한항공에서 직접 사는 게 훨씬 저렴할 수 있다. 실제로 11월에 출발하는 대한항공의 유럽·미주 왕복 항공권은 현재 80만원대로 여느 외국 항공사보다 저렴한 편이다. 공동운항 항공권이 반드시 유리한 건 아니다. 제공되는 서비스 기준이 천차만별이어서다. 가령 위탁 수하물은 탑승 항공사가 아니라 구매 항공사 기준이 적용된다. 공동운항 항공편을 이용할 때 다른 유의점도 있다. 헷갈리는 게 은근히 많다. 먼저 구매 항공사가 아닌 탑승 항공사 기준이 적용되는 경우다. 공항에서는 구매 항공사가 아닌 실제 탑승 항공사 카운터로 가야 한다. 이걸 혼동해서 터미널이 여럿인 유럽이나 미국의 대형 공항에서 비행기를 놓치는 경우도 다반사다. 면세점에서 쇼핑을 할 때도 구매 항공사가 아닌 실제 탑승 항공사 편명을 알려줘야 한다. 공동운항편을 이용할 경우, 사진과 같은 채식 기내식을 사전 주문할 수 없다. 반대로 수하물과 마일리지는 구매 항공사 기준이 적용된다. 유나이티드항공을 통해 아시아나항공 인천~로스앤젤레스 공동운항 항공권을 구매했다면, 위탁 수하물은 32㎏(아시아나 기준)가 아닌 23㎏(유나이티드 기준)밖에 부칠 수 없다. 항공사에 따라 탑승 전 좌석 지정·기내식과 면세품 사전 주문을 받지 않는 경우도 있다. [출처: 중앙일보] [여행의 기술]대한항공·아시아나항공 싸게 타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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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0]정아브라함
30 2017-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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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0]정아브라함
25 2017-11-04
책 속으로] 행복해지고 싶은가 마음의 근육을 키워라 기자이은주 기자 ━ DEEP INSIDE │ ‘회복탄력성’을 말한 두 권의 책 페북 COO 샌드버그의 『옵션 B』 멕시코 휴양지서 갑자기 남편 사망 슬픔이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자책 최악 가정하자 살아있다는 것 감사 변광호 박사의 『E형 인간』 직장 상사만 보면 화가 치밀었는데 내 성장을 위해 그럴지도 모른다 긍정의 생각·말 단련시키면 평온 옵션 B 옵션 B 셰릴 샌드버그· 애덤 그랜트 지음 안기순 옮김, 와이즈베리 E형 인간: 성격의 재발견 변광호 지음, 불광출판사 E형 인간 스트레스 없는 일상은 없다. 완벽한 삶도 없다. 학자들은 여기에 더 심한 말을 보태기도 한다. “행복이란 것은 없고 행복한 성격이 있을 뿐”이라고. 『꾸뻬씨의 행복 여행』을 쓴 프랑스 정신과 의사 프랑수아 를로르는 몇 년 전 한국을 찾았을 때 “행복은 균형의 문제이자 인성의 문제”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행복할 수 있는’ 균형과 인성은 어디서, 어떻게 얻어야 하는 걸까. 이와 관련해 최근 ‘회복탄력성’(Resilience) 개념이 더욱 주목받고 있다. 회복탄력성이란 원래 제자리로 돌아오는 힘을 일컫는 말로, 심리학에서는 시련을 이겨내는 긍정적인 힘을 뜻한다. 최근 출간된 『옵션 B』와 『E형 인간:성격의 재발견』은 각기 큰 역경과 일상의 스트레스에 대한 대처법을 다룬 책으로, 저자들은 “회복탄력성은 근육처럼 후천적으로 노력과 연습을 통해 키울 수 있다”고 말한다. ◆삶은 완벽하지 않다=“상실도 슬픔도 실의도 철저히 개인적인 감정이다(…) 어쨌거나 이 어둠을 뚫고 지나가야 하는 것은 나 자신의 몫이었다.” 페이스북 최고운영책임자(COO)인 셰릴 샌드버그(Sheryl Sandberg·48)가 한 말이다. 그의 화려한 배경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 말이 그에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적어도 ‘그 일’이 그에게 일어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는 하버드대 경제학과와 하버드 경영대학원을 최우등으로 졸업했고, 세계은행·맥킨지를 거쳐, 27세에 미국 재무부 수석보좌관으로 일했다. 2001년부터 2008년까지 구글 부사장을 거친 뒤 2008년부터 페이스북에서 일해 왔다. ‘블룸버그 비즈니스 위크’는 그를 “미래의 미국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는 인물”이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 일’은 예고 없이 찾아왔다. 2015년 아이들을 친정 부모님께 맡기고 모처럼 남편(데이비드 골드버그)과 함께 떠난 멕시코의 휴양지에서 남편이 갑자기 사망한 것이다. 그에게 ‘바위 같은 사람’이었고, ‘평생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살아가리라 생각했던’ 사람이었다. 휴가지에서 1시간가량 낮잠을 자고 일어났을 때 남편의 의자는 비어 있었다. 그리고 후에 헬스장에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는 남편을 발견한다. 그때의 심정을 그는 이렇게 전한다. “나는 지금도 ‘헬스장이 어디죠?’라는 말을 들으면 숨이 턱 막히고 온몸이 굳어버린다. 앞으로도 그 말을 들으면 심장이 요동칠 것 같다.” 정신없이 장례식을 치렀고, 남편 없는 그의 삶이 시작됐다. 그에 따르면, 그것은 “결코 내 자의로는 선택하지 않았을 삶이고, 철저하게 무방비 상태에서 맞닥뜨린 삶”이었다. 『옵션 B』는 샌드버그와 애덤 그랜트 와튼 스쿨 심리학 교수가 함께 쓴 책이다. 샌드버그가 ‘삶의 균형이 무너지는’ 자신의 경험과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을 절절하게 털어놨다면, 그랜트 교수는 심리학 이론을 바탕으로 회복탄력성을 구축하는 법을 이야기한다. 여기서 ‘옵션 B’는 상실과 역경으로 마주하게 된 삶을 말한다. 저자들은 “살면서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실직, 사업 실패, 이혼, 질병 등으로 ‘옵션 B’를 마주하게 된다”며 “‘옵션 B’를 살아가기 위해선 마음 근육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옵션 B』의 저자 샌드버그(왼쪽)와 애덤 그랜트(오른쪽). ◆회복탄력성에 달렸다=회복탄력성은 최근 정신의학부터 심리학·교육학 등의 영역에서 주목받고 있는 개념이다. 흔히 우리가 말하는 ‘오뚝이 정신’이다. 이 개념은 긍정심리학에서 나왔다. 미 펜실베이니아대 심리학 교수인 마틴 셀리그먼은 사람들이 역경에 대처하는 방식에 대해 수십 년 동안 연구해 왔는데, 그가 ◆회복탄력성에 달렸다=회복탄력성은 최근 정신의학부터 심리학·교육학 등의 영역에서 주목받고 있는 개념이다. 흔히 우리가 말하는 ‘오뚝이 정신’이다. 이 개념은 긍정심리학에서 나왔다. 미 펜실베이니아대 심리학 교수인 마틴 셀리그먼은 사람들이 역경에 대처하는 방식에 대해 수십 년 동안 연구해 왔는데, 그가 바로 긍정심리학의 창시자다. 셀리그먼은 사람들이 부정적인 사건을 마주했을 때 ‘회복을 방해하는 3가지 생각’ 이 있다고 했다. 첫째는 ‘이게 내 잘못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자책하는 것이다. 둘째는 그 사건이 다른 데도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믿는 것이고, 셋째는 영원히 여기에서 헤어나올 수 없을 거라며 지레 좌절하는 것이다. 샌드버그는 자신 역시 “세 가지 덫에 걸렸었다”고 한다. ‘내가 남편을 좀 더 일찍 발견했더라면’ ‘건강에 더 좋은 음식을 섭취하라고 말했더라면…’ 하는 생각으로 끊임없이 자책했다. 그리고 “슬픔이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자신과 아이들이 앞으로는 영원히 순수한 기쁨을 누리지 못할 것이라고 믿었다. 주목할 것은 샌드버그가 그랜트 교수의 조언을 받아 심리적인 함정에서 빠져나오는 훈련을 지속했다는 점이다. “언제나” “결코”라는 극단적인 말을 “최근에는” “때때로”라는 말로 바꿔 쓰려 노력했고, ‘슬프고 화나는 것은 정상’이라고 생각하며 울고 싶을 땐 울었다. 그런데 기가 막히게도, 자신에게 가장 도움이 된 방법은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 보는 것이었다고 털어놓는다. 남편이 아이들을 태우고 운전하다가 심장부정맥을 일으켰을 수도 있었다는 상상을 해보는 것이다. “세상에 맙소사. 하마터면 가족 셋을 한꺼번에 잃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 순간, 아이들이 여전히 건강하게 살아 있다는 사실이 미치도록 감사했다.” 『E형 인간』의 저자 변광호 박사. ◆생각을 바꿔라=회복탄력성은 성격과 어느 정도 연관이 있는 것일까. 『E형 인간: 성격의 재발견』은 스트레스를 평생 연구해온 변광호(75) 박사가 쓴 책이다. 가톨릭대 의대 교수를 역임한 그는 일찌감치 스트레스와 성격, 건강의 상관관계를 연구해왔다. 그런 그가 “즐거운 인생을 살기 위해 꼭 필요한 성격”으로 제시하기 위해 직접 만든 개념이 바로 ‘E형’ 성격이다. E형의 ‘E’는 ‘유스트레스’ (Eustress, 좋은 스트레스라는 뜻)에서 따온 것으로, 한마디로 스트레스에 유연한 성격을 뜻한다. 부정적인 스트레스를 대할 때마다 이를 긍정 에너지로 빠르게 전환해 나쁜 영향력을 최소화하는 성격을 말한다. 예를 들어, 직장 상사만 보면 조건반사적으로 화가 치미는 사람이 있었는데, 어느 날 그는 ‘어쩌면 상사는 나의 성장을 위해 존재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마음이 편안해지더란다. 저자는 이게 바로 “그의 몸에서 긍정 호르몬인 엔도르핀이 나왔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우리는 약간의 생각 전환만으로 엔도르핀이 나오도록 호르몬 분비를 조절하며 E형 성격을 개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음속에 숨어 있는 긍정을 가리켜 “마음의 탄력”이라고 말하는 그는 “우리가 좌절하고 힘들 때 잘 꺼내 쓸 수 있도록 평소 긍정의 생각과 말들로 마음을 단련시켜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가 ‘E형 인간’에 대한 개념을 발전시킨 것은 정년퇴직하고 노인 요양병원에 근무하면서부터라고. 그곳에서 환자들을 지켜보며 왜 누구는 병과 죽음에 의연하고 담담하게 대처하며, 또 누구는 고통에 신음하며 괴로워할까 궁금했단다. 결국 죽음에 대한 공포와 고통은 똑같지만 이에 대해 대처하는 마음이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즐거움을 훈련하라=지난 7월 뉴욕타임스는 ‘중년의 회복탄력성’을 주제로 한 기사를 실었다. “부모님을 여의거나, 실직(혹은 퇴직)을 경험하는 중년이야말로 회복탄력성이 절실히 필요한 시기”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면서 회복탄력성을 키우기 위한 방법으로 낙관주의를 연습하라(그것도 안 되면 그런 사람들과 어울려라), 자책하지 마라, 다른 사람들을 도와라, 새로운 것에 도전하라고 제안했다. 샌드버그는 상실의 경험담을 책으로 내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자신이 일하는 페이스북의 장례 유급휴가를 10일에서 20일로 확대했다. 역경에 처한 사람들이 다시 일어날 수 있도록 돕기 위한 비영리 조직(OptionB.Org)을 설립했다. 변광호 박사는 ‘스트레스 회복탄력성을 지닌 새로운 E타입 성격’에 대한 논문을 내년 국제 학술대회에서 발표할 예정이다. 놀랍게도 두 책이 공유하고 있는 대목이 적잖다. 첫째, 인간의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둘째, 감사할 줄 아는 마음과 유머는 회복탄력성에 도움이 된다. [출처: 중앙일보] [책 속으로] 행복해지고 싶은가 마음의 근육을 키워라 [출처: 중앙일보] [책 속으로] 행복해지고 싶은가 마음의 근육을 키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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