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성경읽기선교회 관악5부

번호 제목 닉네임 조회 등록일
335 no image Team Spirit Training 일정표 [1]
[레벨:20]인금철
54 2011-08-15
334 Team spirit 1일 정리보고. 파일 [7]
[레벨:16]한승대
67 2011-08-24
정리보고 1일, 제주도를 같이 가다. (개인적인감상입니다 오해가 있을수 있읍니다.) 11명이 사람들이 봉고를 타고 목포를 가게 되었읍니다. 센타에서 출발기도를 한 것은 4시 30분 무렵이었읍니다. 제주도에서의 프로그램들을 생각해볼때에 지금 자놓지 않으면 안될것 같아 잠을 자고자 하였읍니다. 그러나 제 바로 옆에 계시던 영길목자님의 순수함은 절를 잠 못 이루게 하였읍니다. 제 뒤에 있던 세웅형은 호기심 가득찬 눈으로 깨어 계셨읍니다. 우리는 늦게 출발하였기 때문에 늦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나 봅니다. 영길목자님은 이런 우리를 대표하여 더 빨리 가라고 금철목자님께 말씀해 주셨고, 금철목자님은 넉넉하게 목포항에 도착하게 해 주셨읍니다. 목포항에서 우리는 먹을래 싸갈래 김밥을 맛있게도 먹어치웠읍니다. 저는 태용형의 칫솔을 빌려 이를 닦았읍니다. 홍렬형은 "바다다~"하며 소년같은 미소를 지으며 호화여객선 스타크루즈호에 그 첫발을 내딛으셨읍니다. 저는 타이타닉호의 축소판 같은 스타크루즈호에 감탄사를 연발하였읍니다. 우리네는 이십명 정도가 같이쓰는 3등석 객실에 둥글게 둘러앉아 하나됨에 관한 말씀을 공부하였읍니다. 말씀은 빌립보서 2장 1절에서 11절 말씀이었읍니다. 저는 말씀 공부중에 얼굴을 무릎에 파묻고 있는 세웅형의 다리털을 잡아당기며 말씀에 집중하도록 깨웠지만, 곧 배멀미로 인해 세웅형과 똑같은 행위를 하였읍니다. 세웅형은 그때 깨어 웃으며 제 다리털을 잡아당기어 저는 면목이 없었읍니다. 배멀미 덕분에 저는 말씀에 별롲 비중하지 모사였지만, 2장 3절 말씀을 통해 남에게 관심없는 제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읍니다. 저는 여러가지 유전병으로 남에 대하여 피상적인 열등감을 느끼고는 있었지만, 구체적으로 남의 장점은 무엇인지에 전혀 관심이 없었고 제 단점과 장점만 생각하는 사람이었읍니다. 다른 사람의 장점을 적극적으로 찾음으로 남에게 관심을 가지고, 또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받은 죄인의 정체성을 분명이 해야겠다는, 반쯤은 주제와 동떨어진 한마디를 남기고 저는 말씀공부를 끝내었읍니다. 우리네는 식당에서, 한솥도시락을 맛이 있게 먹었읍니다. 스타크루즈호에서 우리는 손가락 하나를 치켜새우며 "원스피릿!"을 많이도 외쳤던 것 같읍니다. 제주도에 내려서는 세웅형의 강추로 '신비의 도로'를 가보기도 하였고, 또한 한라산 등반의 몸풀기로 올레길코스를 따라 4시간 정도를 걷기도 하였읍니다. 올레길은 길을 안내 해주는 표지판이 없어, 올레리본이라는 파란색과 주황색으로 이루어진 끈과, 도로에 새겨진 화살표로 그 방향을 가늠합니다. 그러한데 우리는 올레길 걷기를 시작한지 30분만에 그것들을 놓치었읍니다. 사실 저는 우리가 가는 큰길이 아닌 다른 오솔길에서, 올레리본이 나부끼는 것을 보았고 후에 그 길이 옳은길로 판명되었지만 저는 그 사실을 늦게 말하여 아무도 되돌아가지 않았읍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정해진 길을 따라가기 보다는 "큰길로 가면 된다"정신으로 제일 큰 도로를 타고 걷게 되었읍니다. 땅에 화살표의 흔적은 있었지만 이길로 가지 말라는듯 검은 라카로 지워져 있었읍니다. 저는 천로역정에서 담을 뛰어 넘어오는 사람들이 생각이 났고 불안하였읍니다, 또한 모두가 아니라고 하는 길을 걷는것이 재미있기도 하였읍니다. 결국 45분 정도를 걸은 후에 옳은 길로 들어서기는 하였읍니다. 우리는 시간이 어느정도 지나자 걷는 속도대로 선발대, 후발대, 그리고 그 사이를 잇는 중간사람들 3부류로 나뉘어 걸어 갔읍니다. 올레길에서 우리는 [저는 산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겠읍니다.] 말똥산 (말똥이 100m간격으로 쌓여있었음, 말을 10마리 넘게 보았음)을 등반하고, 반쪽계란산(산모양이 계란 반쪽)을 보았읍니다. 저녁은 저와 종현목자님이 삽겹살과 된장국을 하였고, 보석과도 같은 신 선생님이 제주도 한치를 10마리 잡아서 회쳐주셨읍니다. 한치는 살아있는 상태였고, 맛은 썩은우유처럼 고소하였읍니다. 맛이 상당히 신기하고 좋았읍니다. ===== 댓글에 회 관련 이야기가 나와서 맛을 보여드릴 수는 없지만 모습은 보여드리는 것이 좋을 것 같아...==== - 관리자..
333 [공지] 투표 공지 파일 [6]
[레벨:20]서진우
67 2011-08-26
332 no image 졸업소감-왕faith [9]
[레벨:11]왕faith
121 2011-08-30
졸업소감 요절: 요한복음 2:7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시즉 아귀까지 채우니 기도: 하나님 아버지 졸업을 이루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지난 5년간의 박사과정을 통하여 죄인의 여러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고 믿음으로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 시간 모든 은혜와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시간이 되기를 간절하게 기도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요한복음 2장에는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시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혼인 잔치 집에 포도주가 떨어진 것을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발견하였습니다. 당시 자급자족하던 시대라 포도주를 구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이 문제를 예수님께 들고 나아갔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에게 포도주가 없다는 것을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으로부터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 하였나이다” 하시며 예수님의 거절의 말을 들어야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거절 앞에서도 마리아는 믿음으로 하인들을 준비시켰습니다. 마리아는 하인들에게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하였습니다. 마침 그곳에 돌 항아리 여섯이 놓여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인들에게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하셨는데 하인들이 순종해서 아귀까지 채웠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제는 그 물을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하셨을 때에도 하인들은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연회장은 이 포도주가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몰랐지만 하인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물을 떠다 주었는데 물이 포도주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논문을 감당하는 과정을 통해서 하인들의 순종의 자세를 배우게 하시고 예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놀라운 은혜를 주셨습니다. 이를 깊이 감사합니다. 2004년 2월에 석사과정을 마치고 나서 저에게 시청에 있는어학원에 직장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거리가 멀고 보수가 적고 발전가능성이 없어 보였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지만 사무실 전반적인 업무도 함께 하여야 하였습니다. 차 심부름도 하고 지하철역 앞에서 전단지도 돌려야 하였습니다. 퇴근하고 집에 오면 밤이 깊은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저를 그곳에서 인내하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훈련을 주셨습니다. 이 곳에서 2년 6개월 근무하는 기간 동안 하나님께서는 오전시간 동안 사모님들과 자매목자님들을 동역하면서 피싱을 배웠습니다. 서울대 학생의 신분이 아니라서 겸손하게 예수님을 의지하였습니다. 그리고 피싱 하면서 서울대를 불쌍히 여겨 하나님께 순수하고 간절하게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열심히 피싱 했지만 2005년 가을 학기 바이블 아카데미에 한명의 양도 초대하지 못하였습니다. 2006년 1:1목자님은 박사과정에 도전해 보도록 했고 부모님에게 물질 지원이 가능한지 물어 보도록 하였습니다. 저는 석사논문을 쓰면서 몸과 마음이 지쳐서 박사과정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좋은 회사에 취직하여 돈도 벌고 ... 소시민의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2년6개월의 기간의 믿음의 투쟁을 기뻐하시고 2006년 9월에 서울대 사범대 교육학과 합격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합격이 발표되던 날 목자님과 함께 감격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공부하고자 눈물로 감사의 기도를 간절하게 드렸습니다. 학과 행정실에서 학생증을 받아 이제 서울대 학생의 신분으로 당당하게 피싱을 나갈 수 있었습니다. 참으로 기쁘고 감사하여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대학원 개강 전 지리산 팀 스피릿 훈련을 통해 저를 무장시켜 주셨습니다. 하루 사이에 1900미터 넘는 천왕봉에 다녀온 것은 평소에 운동을 많이 하지 않았던 저에게 쉽지 않은 코스였습니다. 하지만 땀을 흘리고 끝까지 인내했을 때 정상까지 오르는 승리를 맛보게 하셨습니다. 공부하는 과정 중에 하나님을 의지해서 계속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 불신과 싸워야 하였습니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공부해야 했으므로 부족한 잠을 지하철 안에서 보충해야 하는 고된 나날이 계속 되었습니다. 하지만 말씀을 깊이 의지하고 투쟁했을때 하나님께서는 학업의 승리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올A를 두학기동안 받게 하셔서 장학금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피싱를 해도 한명도 초청하지 못했었는데 대학원 공부하는 내내 양들을 계속 부쳐 주시고 1:1말씀으로 섬기게 하셨습니다. 장등, 호금령, 오금영, 탕앤나, 유아정, 윤총총, 마원중, 김습, 왕유리, 소암. 학기당 평균 3명의 양을 섬기게 하셨습니다. 이 귀한 영혼들을 말씀으로 섬기면서 예수님의 내면성을 배우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2007년 브루나이 선교지 심방과 2008년 미국 퍼듀 국제수양회 참석과 일본 쎈다이 심방을 다녀오게 하시므로 저의 영적 시야를 넓혀 주셨습니다. 2009년에 저의 지도교수가 바뀌면서 논문 주제도 바뀌게 되어 정식적으로 논문을 작업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전공에 있는 한국 학생도 학위논문을 어려워하고 시작도 못한 분들이 많아 심리적인 부담감이 커서 어떤 날은 하루 종일 책상 앞에 앉아있어도 한 페이지도 넘어가지 못하였습니다. 저는 자신에 대하여 절망하고 괴로워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학문적인 안목이 예리하고 추진력이 있는 김진화 목자님을 통해 논문 앞에서 두려워하고 어려워하는 저를 많이 채찍질해주고 앞으로 밀어주셨습니다. 진화 목자님의 관심과 도움을 받아 저는 힘을 얻어 어려워도 조금 씩 조금 씩 앞으로 나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어린 은미를 안고 저를 도와주신 진화 목자님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생생합니다. 목자님의 열정과 사랑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랑하는 자녀를 훈련하십니다. 2009년 여름에 논문자료 수집을 위해 상하이에 갔는데 36도의 더운 날씨에 고생도 하고 여권을 잃어 버렸습니다. 선약을 받지 않아 상하이 시청에 들어 갈 수 없어 이틀간 배회하다가 길거리에 주저 않으려고 했을 때 담당자로부터 만나주겠다는 전화가 왔습니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연약하고 믿음이 없는 제가 도전하는 것을 원하시고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것을 배우기를 원하셨습니다. 2010년 6월 논문의 초고가 완성되었지만 지도교수님께서는 완성도를 높여야 하므로 심사에 들어 갈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논문을 그냥 통과 시켜주시지 않고 더 높은 수준의 훈련을 통해 제가 성장하도록 도와주셨습니다. 가을에 지도교수님과 학술지 논문을 같이 작업하면서 학술적인 논문이 무엇인지를 배우고 교수님의 요구사항과 교수님의 리듬을 따라가는 연습과 훈련이 계속 되었습니다. 2010년 11월 한,중,일 국제포럼의 통역 및 논문발표를 통해서 전공자로서의 자부심을 얻게 되었습니다. 2011년 4월부터 8월 초 논문이 완성되기까지 마치 크고 작은 터널을 지나가는 과정과 같았습니다. 고민하는 문제가 해결되면 햇빛을 좀 보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좀 더 깊이 생각하면 또 문제점이 발견되어 캄캄한 터널 안으로 다시 들어갔습니다. 저의 몸과 정신은 마치 빨래를 지어 짜듯이 계속 짜내야 하였습니다. 저에게는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능력이 없습니다. 저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예수님을 붙들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논문이라는 항아리에 한 줄 한 줄 써서 채우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과정을 감당할 수 있는 내적인 힘, 즉 믿음과 건강과 체력과 집중력을 주셨습니다. 제가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필요한 도움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영적으로는 에스더 사모님의 헌신적인 기도와 격려를 받았습니다. 사모님은 자기 아이들의 이야기를 안 들어 줘도 저의 고민은 꼭 들어 주셨습니다. 또한 부모님으로부터 풍성한 물질적인 지원을 받았습니다. 논문 완성 단계에서는 전공 선생님들의 도움과 지도교수님의 지도와 도움을 받아 부족한 저를 하나님께서는 한 단계 한 단계 이끌어 주셨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때 그 때 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훈련을 감당하는 것이었습니다. 한 가지 한 가지 훈련은 하나님의 선한 의도가 있습니다. 저는 연약하고 부족하며 믿음이 작았습니다. 그러나 훈련을 통해서 저를 조금씩 강건하게 하셨습니다. 공부의 어려운 과정을 통해서 저와 하나님 사이에 많은 스토리를 허락해 주시고 사랑과 신뢰의 관계성을 깊이 맺게 하셨습니다. 이 논문을 시작하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고 논문을 완성하게 하신 분도 하나님 이십니다. 2심 심사결과를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을 때 결과를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논문을 완성해 연회장인 심사위원들에게 논문을 갖다 줬을 때 통과되었습니다. 이 모든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게 하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 학위를 받게 하시는 하나님의 선한 계획이 있습니다. 제가 계속 영적인 깊은 투쟁을 감당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부족 하지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계속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캠퍼스에서 형제자매님들의 생명 구원역사에 계속 저를 사용해 주시도록 기도합니다.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신 차이나요회 박충성 목자님과 화요회 목자님들과 센타 목자님들 사모님들 그리고 형제자매목자님들의 사랑과 기도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팀 목자님 이셨던 은주사모님 정훈사모님 현정사모님 선덕사모님들의 사랑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함께 장막생활을 하였던 진화 사모님 미아사모님 사랑사모님 기쁨사모님 미션사모님 미선사모님 세영 사모님 그리고 명옥목자님, 지연목자님, 혜란목자님 여진목자님 감사목자님 인애목자님들의 사랑과 기도에 깊이 감사합니다. 저에게 물질적인 지원과 사랑의 수고를 해주신 부모님과 말씀으로 섬겨 주시고 기도해 주신 정아브라함 목자님 인금철 목자님께도 깊이 감사드립니다. 이 모든 은혜와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 드립니다. 한마디 :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신 예수님
331 no image Team Spirit 2일 정리보고. [7]
[레벨:20]안홍렬
49 2011-08-30
새벽 4시 40분 식사당번조가 기상하여 팀스피릿 훈련 이튿날을 시작하였습니다. 영길 목자님 조는 아침을 준비하고 태용 목자님 조는 점심 주먹밥을 준비했습니다. 아침 메뉴는 부대찌개와 캐찹스팸맛살볶음이었습니다. 요한 목자님은 젊은 사람이 좋아하는 요리로 캐찹스팸맛살볶음을 메뉴로 골랐다고 하였는데 진우 목자님은 젊은 사람이 아니라 요한 목자님이 좋아하는 요리였다고 평하였습니다. 주먹밥은 태용 목자님의 레시피로 준비되었습니다. 밥과 참치, 참기름, 깨, 소금, 그리고 비장의 허브 솔트의 비공개 비율로 주먹밥이 버무려지고 11인분으로 나뉘었습니다. 아침을 서둘러 먹은 팀스피릿 훈련 팀은 주먹밥, 오이 두 개, 초콜릿, 물 한 병을 각각 몫으로 받고 한라산 관음사 야영장으로 출발하였습니다. 한라산 관음사 야영장에 도착하니 7시가 되었습니다. 등산에 앞서 기도와 간단히 준비운동을 하고 한라산 등반을 시작했습니다. 선두에는 신 선생님이 스셨고 그 뒤로 저와 세웅 형제님이 섰습니다. (뒷줄 순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올라간 지 얼마 되지 않아 갑자기 양손에 등산지팡이를 든 세웅 형제님이 저와 신 선생님을 앞질러 성큼성큼 올라가기 시작했습니다. 세웅 형제님은 그 뒤로 세 시간 뒤에 삼각봉 대피소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삼각봉 대피소까지는 산세가 험하지 않고 등산로 시설이 잘 되어있어 크게 힘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등산 코스에 계속 나무가 울창해서 경치 구경은 힘들었습니다. 신 선생님은 한라산에는 물이 땅으로 스며들어 계곡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정말로 가끔 물이 고여 있는 곳은 있었지만 정상 가까이 오르기 전까지 물 흐르는 곳이 없었습니다. 고요한 산행이 되고 경치도 보이지 않아 심심한 등반이 되었습니다. 10시가 되어 삼각봉 대피소에 도착했습니다. 삼각봉 대피소에는 한 시간 전에 세웅 형제님이 먼저 올라와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삼각봉 대피소 오르니 비로소 탁 트인 경치가 나타나고 발아래로 구름바다가 펼쳐져 있었습니다. 날이 맑았다면 제주시 풍경이 보이지 않았을까 아쉬운 마음도 들었지만 발아래 구름바다와 정상을 빠르게 훑고 지나가는 구름 연기를 보면서 어서 정상에 오르고 싶다는 생각으로 기대감이 충만해졌습니다. 모두 같은 마음이 되었는지 함께 사진을 찍고 지친 걸음에 힘을 보태어 정상으로 출발했습니다. 정상가는 길은 쉽지 않았습니다. 삼각봉 대피소 이후로 경사가 가팔라져서 계단 길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틈틈이 드러나는 경치는 힘든 줄 모르게 했습니다. 마지막 200m를 앞두고는 모두 힘에 붙여서 몇 분 못가서 쉬기를 반복했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설렘은 더욱 강해져갔습니다. 정상 근처에 오르자 바람은 시원함을 넘어서 차가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찬바람을 그대로 맞은 피부는 서늘해졌습니다. 준비해온 긴팔을 꺼내 입고 긴팔이 없는 사람들은 우의를 꺼내 입었습니다. 12시가 되어 5시간의 등산 끝에 정상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구름이 백록담을 완전히 뒤덮지 않아서 바람이 구름을 몰아내면 백록담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인터넷에서 맑을 때 백록담 사진을 찾아보니 과 비교하니 아쉬움이 큽니다) 한라산 정상의 바람은 매우 빨라서 백록담을 보여주었다가도 순식간에 감추고 드러내 보이기를 반복했습니다. 등산하기 전에 백록담 물을 마셔보고자 하는 소원을 얘기했었는데 전에 가보았던 목자님들은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때 잘 수긍되지 않았지만 직접 보니 그것이 왜 불가능한지 알 수 있었습니다. 분화구 위에 울타리가 쳐져 있었고 한참을 내려가야 백록담 물에 갈 수 있었습니다. ‘내려가지 마시오!’라는 표지판은 없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울타리에서 백록담을 바라보고 있는데 울타리를 넘는 행동을 하는 것은 보통사람에게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분화구 경사가 가팔라서 한번 잘못 디디면 추락할 성 싶었고 내려갔다가는 올라올 방도가 보이지 않는 구조였습니다. 그래도 평생 처음으로 백록담 까지 왔는데 그 물에 손 한번 못 담가 본 것은 지금까지도 많은 아쉬움이 남습니다. 정상에서 챙겨온 주먹밥을 먹었습니다. 또 준비해온 온수를 부어 컵라면을 같이 먹었습니다. 하나도 남김없이 먹어치웠습니다. 12시 50분에 하산을 시작했습니다. 등산한 관음사 코스가 아니라 성판악 코스를 하산 길로 잡았습니다. 금철 목자님은 관음사에서 차를 가져오기 위해 먼저 하산하겠다고 하시고는 나는 듯 달려갔습니다. 요한 목자님도 같이 가자고 하시면서 금철 목자님을 쫓아갔습니다. 저 또한 따라가고자 달렸지만 5분도 못가서 불가능을 깨닫고 제 페이스대로 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금철 목자님을 제외하고 진달래밭 휴게소에서 모두 만났습니다. 잠깐 쉬고 다시 하산을 시작했습니다. 하산은 천천히 가는 것이 힘들다고 해서 각자 속도에 맞추어 내려갔습니다. 선두는 요한 목자님과 저와 세웅 형제님이 섰습니다. 요한 목자님은 금철 목자님을 절대 따라갈 수 없었노라며 금철 목자님이 마치 무장공비처럼 산을 내려갔다고 진술했습니다. 이번에도 세웅 형제님은 저와 요한 목자님을 제치고 달려 나갔습니다. 그런데 반쯤 내려와 요한 목자님과 저에게 따라잡혔습니다. 세웅 형제님은 내려올 때마다 돌들이 발바닥을 찌른 다며 아파서 못 뛰겠다고 돌길이 나올 때마다 하소연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무 계단으로 포장된 길이 나오면 다시 속력을 내어 나는 듯이 뛰어갔습니다. 그러나 저와 세웅 형제님은 점차 요한 목자님 뒤로 쳐졌습니다. 긴 다리에서 나오는 큰 보폭과 웬만한 돌은 조약돌처럼 딛고 가는 거침없는 걸음은 따라 갈 수가 없었습니다. 저와 세웅 형제님은 진달래 밭 휴게소 이후로 한 번도 쉬지 않았지만 한번 요한 목자님에게 뒤쳐진 후로 마지막까지 요한 목자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하산하니 3시 10분이었습니다. 금철 목자님께 전화해보니 관음사에 도착해서 차를 끌고 오시는 중이라고 하셨습니다. 금철 목자님을 왜 철인이라고 불렀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그 뒤로 차례차례 하산을 마쳐 4시 전까지 모두 하산하였습니다. 마침 금철 목자님도 차를 끌고 와서 우리는 곧장 김녕 해수욕장으로 향했습니다. 김녕 해수욕장은 조촐한 크기의 해수욕장이었습니다. 그러나 흰 모래 해변과 청녹빛 물이 아름다운 해수욕장이었습니다. 신 선생님을 빼고 모두 물로 뛰어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물장난과 업어치기로 서로 물을 먹여주다가 팀을 나눠서 게임을 했습니다. 기마전과 수영 릴레이 게임을 하였는데 영길 목자님 팀이 승리했습니다. 물놀이가 끝나고 모두 흠뻑 젖어 숙소로 돌아왔습니다. 해변에 샤워장이 있긴 했지만 인당 2천원을 받아서 숙소에서 씻기로 하고 자동차 시트가 안 젖도록 커다란 쓰레기봉투를 깔고 앉아 돌아왔습니다. 모두 저녁을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는데 신 선생님께서 매운탕을 끓여주시겠다고 제안하셨습니다. 모두 감사한 마음으로 제안을 승낙하고 콘도 사우나로 갔습니다. 종현 목자님은 숙소에서 씻고 신 선생님 서빙을 도와주었습니다. 갈치구이, 해물알탕, 김치고등어찌게로 자그마치 세 개나 되는 메인 메뉴가 신문지 깔린 식탁에 차려졌습니다. 그밖에 사모님들이 출발할 때 싸주신 오이무침과 깻잎으로 상은 가득 찼습니다. 모두 등산하고 온 터라 맛있는 저녁을 정신없이 먹었습니다. 하산할 때는 따로 내려오기도 하고 해수욕장에서는 두 팀으로 나뉘어 경기를 하기도 했지만 먹을 때만은 진정 한 스피릿이 되었습니다. 옹기종기 모여서 저녁을 먹으니 스피릿뿐만 아니라 몸도 하나가 된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모두 굉장한 식욕을 보여주었지만 승대 형제님이 그 중 제일이었습니다. 영길 목자님과 세웅 형제님은 음식사진과 오늘 찍은 사진을 카톡에 올리기에 바쁘셨습니다. 이튿날 대미를 장식한 것은 설거지를 건 사다리 타기였습니다. 모두 자기만은 피해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요한 목자님의 팬을 따라 운명의 주인공이 결정되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그 주인공들은 영길 목자님과 진우 목자님이었습니다. 진우 목자님은 마지막 남은 두 선택지에서 태용 형제님과 하나씩 골라야 하는 처지였었는데 결국 자신이 걸리자 절규하며 탄식하였습니다. 그렇게 이튿날이 마무리 되었습니다. 저는 저희 훈련이름이 팀스피릿 훈련인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왜 훈련까지 해가며 팀스피릿을 이뤄야하는 가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돌아오는 날 까지도 그런 생각이 남아있어서 온전히 훈련에 담기지 못했습니다. 첫날도 둘째 날도 걷는 것이 대부분이라 모든 팀이 하나 되어 교제하는 시간이 없었습니다. 저는 팀스피릿을 가져야 되는 이유조차 해결하지 못한 상태에서 훈련이 그다지 팀스피릿을 이루기 위한 프로그램도 아닌 것처럼 생각되어서 더 힘들어 졌습니다. 그래서 돌아오는 차 안에서도 차라리 말씀을 붙들고 그룹 스터디를 하는 것이 더 유익하지 않았겠는가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돌아온 다음날 제 마음에 변화가 생겼음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팀스피릿을 같이한 목자님과 형제님들이 매우 친밀하게 생각되었습니다. 사실 저는 팀스피릿 훈련 전까지 예수님과 저와의 관계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훈련 이후로 저의 시야가 조금 확장되었습니다. 팀스피릿 요절은 아니지만 로마서 말씀 8장 28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에서 하나님께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 저 뿐만 아니라 팀스피릿 훈련을 같이한 동료 목자님들도 있음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게 찾아오신 것처럼 예수님께서 다른 동료 목자님들도 찾아가 만나주셨음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저를 사랑하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다른 동료 목자님들도 사랑하심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예수님 안에서 한 지체라는 것이 무엇인지 조금이지만 몸으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팀스피릿 훈련이 무의미하지 않았으며 하나님께서 훈련을 사용하여 합력하여 선을 이루셨음을 조금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팀스피릿 훈련 전과 훈련 중에 서로 한 지체임을 깨닫고 한 스피릿을 이루어 주시길 간구한 기도를 하나님께서 듣고 이루셨음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하나 되는 것을 바라고 계심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성도들이 하나 되어 어떤 임무를 수행하기를 바라시는지 궁금해졌습니다. 여기까지가 둘째 날의 훈련 기록과 팀스피릿에서 제가 느낀 바입니다. 제가 느낀 바는 저도 분명히 확신하지 못해서 중구난방인 것 같습니다. 그래도 느낀바 대로 솔직하게 쓰려했습니다. 부족한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330 no image [시] 가을 [2]
[레벨:20]서진우
75 2011-09-08
329 no image 형제 장막 새 이름 [7]
[레벨:20]서진우
113 2011-09-22
328 Blessing 학생 소감 모임~ 파일 [3]
[레벨:20]인금철
69 2011-10-01
327 no image 스티브 잡스의 스텐포드 대학에서 연설문
[레벨:20]정아브라함
49 2011-10-07
<영어 전문> I am honored to be with you today at your commencement from one of the finest universities in the world. I never graduated from college. Truth be told, this is the closest I’ve ever gotten to a college graduation. Today, I want to tell you three stories from my life. That’s it. No big deal. Just three stories. The first story is about connecting the dots. I dropped out of Reed College after the first six months, but then stayed around as a drop-in for another 18 months or so before I really quit. So why did I drop out? It started before I was born. My biological mother was a young, unwed college graduate student, and she decided to put me up for adoption. She felt very strongly that I should be adopted by college graduates, so everything was all set for me to be adopted at birth by a lawyer and his wife. Except that when I popped out they decided at the last minute that they really wanted a girl. So my parents, who were on a waiting list, got a call in the middle of the night asking: “We have an unexpected baby boy; do you want him?” They said: “Of course.” My biological mother later found out that my mother had never graduated from college and that my father had never graduated from high school. She refused to sign the final adoption papers. She only relented a few months later when my parents promised that I would someday go to college. And 17 years later I did go to college. But I naively chose a college that was almost as expensive as Stanford, and all of my working-class parents’ savings were being spent on my college tuition. After six months, I couldn’t see the value in it. I had no idea what I wanted to do with my life and no idea how college was going to help me figure it out. And here I was spending all of the money my parents had saved their entire life. So I decided to drop out and trust that it would all work out OK. It was pretty scary at the time, but looking back it was one of the best decisions I ever made. The minute I dropped out I could stop taking the required classes that didn’t interest me, and begin dropping in on the ones that looked interesting. It wasn’t all romantic. I didn’t have a dorm room, so I slept on the floor in friends’ rooms, I returned coke bottles for the 5 cent deposits to buy food with, and I would walk the 7 miles across town every Sunday night to get one good meal a week at the Hare Krishna temple. I loved it. And much of what I stumbled into by following my curiosity and intuition turned out to be priceless later on. Let me give you one example: Reed College at that time offered perhaps the best calligraphy instruction in the country. Throughout the campus every poster, every label on every drawer, was beautifully hand calligraphed. Because I had dropped out and didn’t have to take the normal classes, I decided to take a calligraphy class to learn how to do this. I learned about serif and san serif typefaces, about varying the amount of space between different letter combinations, about what makes great typography great. It was beautiful, historical, artistically subtle in a way that science can’t capture, and I found it fascinating. None of this had even a hope of any practical application in my life. But ten years later, when we were designing the first Macintosh computer, it all came back to me. And we designed it all into the Mac. It was the first computer with beautiful typography. If I had never dropped in on that single course in college, the Mac would have never had multiple typefaces or proportionally spaced fonts. And since Windows just copied the Mac, it’s likely that no personal computer would have them. If I had never dropped out, I would have never dropped in on this calligraphy class, and personal computers might not have the wonderful typography that they do. Of course it was impossible to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when I was in college. But it was very, very clear looking backwards ten years later. Again, you can’t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you can only connect them looking backwards. So you have to trust that the dots will somehow connect in your future. You have to trust in something — your gut, destiny, life, karma, whatever. This approach has never let me down, and it has made all the difference in my life. My second story is about love and loss. I was lucky — I found what I loved to do early in life. Woz and I started Apple in my parents garage when I was 20. We worked hard, and in 10 years Apple had grown from just the two of us in a garage into a 2 billion dollars company with over 4,000 employees. We had just released our finest creation — the Macintosh — a year earlier, and I had just turned 30. And then I got fired. How can you get fired from a company you started? Well, as Apple grew we hired someone who I thought was very talented to run the company with me, and for the first year or so things went well. But then our visions of the future began to diverge and eventually we had a falling out. When we did, our Board of Directors sided with him. So at 30 I was out. And very publicly out. What had been the focus of my entire adult life was gone, and it was devastating. I really didn’t know what to do for a few months. I felt that I had let the previous generation of entrepreneurs down - that I had dropped the baton as it was being passed to me. I met with David Packard and Bob Noyce and tried to apologize for screwing up so badly. I was a very public failure, and I even thought about running away from the valley. But something slowly began to dawn on me — I still loved what I did. The turn of events at Apple had not changed that one bit. I had been rejected, but I was still in love. And so I decided to start over. I didn’t see it then, but it turned out that getting fired from Apple was the best thing that could have ever happened to me. The heaviness of being successful was replaced by the lightness of being a beginner again, less sure about everything. It freed me to enter one of the most creative periods of my life. During the next five years, I started a company named NeXT, another company named Pixar, and fell in love with an amazing woman who would become my wife. Pixar went on to create the worlds first computer animated feature film, Toy Story, and is now the most successful animation studio in the world. In a remarkable turn of events, Apple bought NeXT, I returned to Apple, and the technology we developed at NeXT is at the heart of Apple’s current renaissance. And Laurene and I have a wonderful family together. I’m pretty sure none of this would have happened if I hadn’t been fired from Apple. It was awful tasting medicine, but I guess the patient needed it. Sometimes life hits you in the head with a brick. Don’t lose faith. I’m convinced that the only thing that kept me going was that I loved what I did. You’ve got to find what you love. And that is as true for your work as it is for your lovers. Your work is going to fill a large part of your life, and the only way to be truly satisfied is to do what you believe is great work. And the only way to do great work is to love what you do. If you haven’t found it yet, keep looking. Don’t settle. As with all matters of the heart, you’ll know when you find it. And, like any great relationship, it just gets better and better as the years roll on. So keep looking until you find it. Don’t settle. My third story is about death. When I was 17, I read a quote that went something like: “If you live each day as if it was your last, someday you’ll most certainly be right.” It made an impression on me, and since then, for the past 33 years, I have looked in the mirror every morning and asked myself: “If today were the last day of my life, would I want to do what I am about to do today?” And whenever the answer has been “No” for too many days in a row, I know I need to change something. Remembering that I’ll be dead soon is the most important tool I’ve ever encountered to help me make the big choices in life. Because almost everything — all external expectations, all pride, all fear of embarrassment or failure - these things just fall away in the face of death, leaving only what is truly important. Remembering that you are going to die is the best way I know to avoid the trap of thinking you have something to lose. You are already naked. There is no reason not to follow your heart. About a year ago I was diagnosed with cancer. I had a scan at 7:30 in the morning, and it clearly showed a tumor on my pancreas. I didn’t even know what a pancreas was. The doctors told me this was almost certainly a type of cancer that is incurable, and that I should expect to live no longer than three to six months. My doctor advised me to go home and get my affairs in order, which is doctor’s code for prepare to die. It means to try to tell your kids everything you thought you’d have the next 10 years to tell them in just a few months. It means to make sure everything is buttoned up so that it will be as easy as possible for your family. It means to say your goodbyes. I lived with that diagnosis all day. Later that evening I had a biopsy, where they stuck an endoscope down my throat, through my stomach and into my intestines, put a needle into my pancreas and got a few cells from the tumor. I was sedated, but my wife, who was there, told me that when they viewed the cells under a microscope the doctors started crying because it turned out to be a very rare form of pancreatic cancer that is curable with surgery. I had the surgery and I’m fine now. This was the closest I’ve been to facing death, and I hope it’s the closest I get for a few more decades. Having lived through it, I can now say this to you with a bit more certainty than when death was a useful but purely intellectual concept: No one wants to die. Even people who want to go to heaven don’t want to die to get there. And yet death is the destination we all share. No one has ever escaped it. And that is as it should be, because Death is very likely the single best invention of Life. It is Life’s change agent. It clears out the old to make way for the new. Right now the new is you, but someday not too long from now, you will gradually become the old and be cleared away. Sorry to be so dramatic, but it is quite true. Your time is limited, so don’t waste it living someone else’s life. Don’t be trapped by dogma — which is living with the results of other people’s thinking. Don’t let the noise of others’ opinions drown out your own inner voice. And most important, have the courage to follow your heart and intuition. They somehow already know what you truly want to become. Everything else is secondary. When I was young, there was an amazing publication called The Whole Earth Catalog, which was one of the bibles of my generation. It was created by a fellow named Stewart Brand not far from here in Menlo Park, and he brought it to life with his poetic touch. This was in the late 1960′s, before personal computers and desktop publishing, so it was all made with typewriters, scissors and Polaroid cameras. It was sort of like Google in paperback form, 35 years before Google came along: it was idealistic, and overflowing with neat tools and great notions. Stewart and his team put out several issues of The Whole Earth Catalog, and then when it had run its course, they put out a final issue. It was the mid-1970s, and I was your age. On the back cover of their final issue was a photograph of an early morning country road, the kind you might find yourself hitchhiking on if you were so adventurous. Beneath it were the words: “Stay Hungry. Stay Foolish.” It was their farewell message as they signed off. Stay Hungry. Stay Foolish. And I have always wished that for myself. And now, as you graduate to begin anew, I wish that for you. Stay Hungry. Stay Foolish.
326 no image 스티브 잡스 스탠포드 대학 졸업 연설 [6]
[레벨:20]인금철
95 2011-10-09
스티브 잡스는 자신의 사생활을 좀처럼 얘기하지 않는 사람으로 유명한데, 스탠포드 대학 졸업 연설에서 거의 처음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공개했다고 합니다. 인생에 대해, 특히 최고의 자리에 오른 한 사람의 고백을 통해 삶과 죽음을 좀 더 생각하게 됩니다. 구원 얻은 나의 하루 하루를 어떻게 살아야 할까? 우리의 삶을 통하여 IT 혁명을 통한 편리함 대신 하나님 나라 혁명을 통한 구원과 영생을 소망해 봅니다. --------------------------------------------------------------------------------------------------------------------------------------- <스티브잡스 2005 스탠포드 졸업식 연설> I am honored to be with you today at your commencement from one of the finest universities in the world. 먼저 세계 최고의 명문으로 꼽히는 이곳에서 여러분들의 졸업식에 참석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I never graduated from college. Truth be told, this is the closest I've ever gotten to a college graduation. 저는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습니다. 태어나서 대학교 졸업식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것은 처음이네요. Today I want to tell you three stories from my life. That's it. No big deal. Just three stories. 오늘, 저는 여러분께 제가 살아오면서 겪었던 세 가지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별로 대단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딱 세가지만요 The first story is about connecting the dots. 먼저, 인생의 전환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I dropped out of Reed College after the first 6 months, but then stayed around as a drop-in for another 18 months or so before I really quit. 전 리드 칼리지에 입학한지 6개월 만에 자퇴했습니다. 그래도 일 년 반 정도는 도강을 듣다, 정말로 그만뒀습니다. So why did I drop out? 왜 자퇴했을까요? It started before I was born. My biological mother was a young, unwed college graduate student, and she decided to put me up for adoption. 그 것은 제가 태어나기 전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제 생모는 대학원생인 젊은 미혼모였습니다. 그래서 저를 입양보내기로 결심했던 거지요. She felt very strongly that I should be adopted by college graduates, so everything was all set for me! 그녀는 제 미래를 생각해, 대학 정도는 졸업한 교양있는 사람이 양부모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to be adopted at birth by a lawyer and his wife. 그래서 저는 태어나자마자 변호사 가정에 입양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Except that when I popped out they decided at the last minute that they really wanted a girl. 그들은 여자 아이를 원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So my parents, who were on a waiting list, got a call in the middle of the night asking: 그들 대신 대기자 명단에 있던 양부모님들은 한 밤 중에 걸려온 전화를 받고 : "We have an unexpected baby boy; do you want him?" "어떡하죠? 예정에 없던 사내아이가 태어났는데, 그래도 입양하실 건가요?" They said: "Of course." "물론이죠." My biological mother later found out that my mother had never graduated from college and that my father had never graduated from high school. 그런데 알고 보니 양어머니는 대졸자도 아니었고, 양아버지는 고등학교도 졸업 못한 사람이어서 She refused to sign the final adoption papers. 친어머니는 입양동의서 쓰기를 거부했습니다. She only relented a few months later when my parents promised that I would someday go to college. 친어머니는 양부모님들이 저를 꼭 대학까지 보내주겠다고 약속한 후 몇개월이 지나서야 화가 풀렸습니다. And 17 years later I did go to college. 17년 후, 저는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But I naively chose a college that was almost as expensive as Stanford, 그러나 저는 멍청하게도 바로 이 곳, 스탠포드의 학비와 맞먹는 값비싼 학교를 선택했습니다.^^ and all of my working-class parents' savings were being spent on my college tuition. 평범한 노동자였던 부모님이 힘들게 모아뒀던 돈이 모두 제 학비로 들어갔습니다. After six months, I couldn't see the value in it. 결국 6개월 후, 저는 대학 공부가 그만한 가치가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I had no idea what I wanted to do with my life and no idea how college was going to help me figure it out. 내가 진정으로 인생에서 원하는 게 무엇인지, 그리고 대학교육이 그 것에 얼마나 어떻게 도움이 될지 판단할 수 없었습니다. And here I was spending all of the money my parents had saved their entire life. 게다가 양부모님들이 평생토록 모은 재산이 전부 제 학비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So I decided to drop out and trust that it would all work out OK. 그래서 모든 것이 다 잘 될 거라 믿고 자퇴를 결심했습니다. It was pretty scary at the time, but looking back it was one of the best decisions I ever made. 지금 뒤돌아보면 참으로 힘든 순간이었지만, 제 인생 최고의 결정 중 하나였던 것 같습니다. The minute I dropped out I could stop taking the required classes that didn't interest me, 자퇴를 하니 평소에 흥미 없던 필수과목 대신 and begin dropping in on the ones that looked interesting. 관심 있는 강의만 들을 수 있었습니다. It wasn't all romantic. I didn't have a dorm room, so I slept on the floor in friends' rooms, 그렇다고 꼭 낭만적인 것만도 아니었습니다. 전 기숙사에 머물 수 없었기 때문에 친구 집 마룻바닥에 자기도 했고 I returned coke bottles for the 5¢ deposits to buy food with, 한 병당 5센트씩 하는 코카콜라 빈병을 팔아서 먹을 것을 사기도 했습니다. and I would walk the 7 miles across town every Sunday night to get one good meal a week at the Hare Krishna temple. 또 매주 일요일, 맛있는 음식을 먹기 위해 7마일이나 걸어서 헤어 크리슈나 사원의 예배에 참석하기도 했습니다. I loved it. And much of what I stumbled into by following my curiosity and intuition turned out to be priceless later on. 맛있더군요.^^ 당시 순전히 호기와 직감만을 믿고 저지른 일들이 후에 정말 값진 경험이 됐습니다. Let me give you one example: 예를 든다면 Reed College at that time offered perhaps the best calligraphy instruction in the country. 그 당시 리드 칼리지는 아마 미국 최고의 서체 교육을 제공했던 것 같습니다. Throughout the campus every poster, every label on every drawer, was beautifully hand calligraphed. 학교 곳곳에 붙어있는 포스터, 서랍에 붙어있는 상표들은 너무 아름다웠고요. Because I had dropped out and didn't have to take the normal classes, 어차피 자퇴한 상황이라, 정규 과목을 들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I decided to take a calligraphy class to learn how to do this. 서체에 대해서 배워보기로 마음먹고 서체 수업을 들었습니다. I learned about serif and san serif typefaces, about varying the amount of space between different letter combinations, about what makes great typography great. 그 때 저는 세리프와 산 세리프체를 배웠는데, 서로 다른 문자끼리 결합될 때 다양한 형태의 자간으로 만들어지는 굉장히 멋진 글씨체였습니다. It was beautiful, historical, artistically subtle in a way that science can't capture, and I found it fascinating. '과학적'인 방식으로는 따라 하기 힘든 아름답고, 유서 깊고, 예술적인 것이었고, 전 그 것에 흠뻑 빠졌습니다. None of this had even a hope of any practical application in my life. 사실, 이 때만해도 이런 것이 제 인생에 어떤 도움이 될지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But ten years later, when we were designing the first Macintosh computer, it all came back to me. 그러나 10년 후 우리가 매킨토시를 처음 구상할 때, 그 것들은 고스란히 빛을 발했습니다. And we designed it all into the Mac. It was the first computer with beautiful typography. 우리가 설계한 매킨토시에 그 기능을 모두 집어넣었으니까요. 아마 아름다운 서체를 가진 최초의 컴퓨터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If I had never dropped in on that single course in college, 만약 제가 그 서체 수업을 듣지 않았다면 the Mac would have never had multiple typefaces or proportionally spaced fonts. 매킨토시의 복수서체 기능이나 자동 자간 맞춤 기능은 없었을 것이고 And since Windows just copied the Mac, its likely that no personal computer would have them. 맥을 따라한 윈도우도 그런 기능이 없었을 것이고, 결국 개인용 컴퓨터에는 이런 기능이 탑재될 수 없었을 겁니다. If I had never dropped out, I would have never dropped in on this calligraphy class, 만약 학교를 자퇴하지 않았다면, 서체 수업을 듣지 못했을 것이고 and personal computers might not have the wonderful typography that they do. 결국 개인용 컴퓨터가 오늘날처럼 뛰어난 인쇄술을 가질 수도 없었을 겁니다. Of course it was impossible to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when I was in college. 물론 제가 대학에 있을 때는 그 순간들이 내 인생의 전환점이라는 것을 알아챌 수 없었습니다. But it was very, very clear looking backwards ten years later. 그러나 1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모든 것이 분명하게 보입니다. Again, you can't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you can only connect them looking backwards. 달리 말하자면, 지금 여러분은 미래를 알 수 없습니다. : 다만 현재와 과거의 사건들만을 연관시켜 볼 수 있을 뿐이죠. So you have to trust that the dots will somehow connect in your future.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현재의 순간들이 미래에 어떤 식으로든지 연결된다는 걸 알아야만 합니다. You have to trust in something - your gut, destiny, life, karma, whatever. 여러분들은 자신의 배짱, 운명, 인생, 카르마(업?) 등 무엇이든지 간에 '그 무엇'에 믿음을 가져야만 합니다. This approach has never let me down, and it has made all the difference in my life. 이런 믿음이 저를 실망시킨 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제 인생의 고비 때마다 힘이 되워줬습니다. My second story is about love and loss. 두 번째는 사랑과 상실입니다. I was lucky I found what I loved to do early in life. 저는 운 좋게도 인생에서 정말 하고 싶은 일을 일찍 발견했습니다. Woz and I started Apple in my parents garage when I was 20. 제가 20살 때, 부모님의 차고에서 스티브 워즈니악과 함께 애플의 역사가 시작됐습니다. We worked hard, and in 10 years Apple had grown from just the two of us in a garage into a $2 billion company with over 4000 employees. 차고에서 2명으로 시작한 애플은 10년 후에 4000명의 종업원을 거느린 2백억 달러짜리 기업이 되었습니다. We had just released our finest creation - the Macintosh - a year earlier, and I had just turned 30. And then I got fired. 제 나이 29살, 우리는 최고의 작품인 매킨토시를 출시했습니다. 그러나 이듬해 저는 해고당했습니다. How can you get fired from a company you started? 내가 세운 회사에서 내가 해고 당하다니! Well, as Apple grew we hired someone who I thought was very talented to run the company with me, 당시, 애플이 점점 성장하면서, 저는 저와 잘 맞는 유능한 경영자를 데려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and for the first year or so things went well. 처음 1년은 그런대로 잘 돌아갔습니다. But then our visions of the future began to diverge and eventually we had a falling out. 그런데 언젠가부터 우리의 비전은 서로 어긋나기 시작했고, 결국 우리 둘의 사이도 어긋나기 시작했습니다. When we did, our Board of Directors sided with him. So at 30 I was out. And very publicly out. 이 때, 우리 회사의 경영진들은 존 스컬리의 편을 들었고, 저는 30살에 쫓겨나야만 했습니다. 그 것도 아주 공공연하게. What had been the focus of my entire adult life was gone, and it was devastating. 저는 인생의 촛점을 잃어버렸고, 뭐라 말할 수 없는 참담한 심정이었습니다. I really didn't know what to do for a few months. 전 정말 말 그대로, 몇 개월 동안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답니다. I felt that I had let the previous generation of entrepreneurs down - that I had dropped the baton as it was being passed to me. 마치 달리기 계주에서 바톤을 놓친 선수처럼, 선배 벤처기업인들에게 송구스런 마음이 들었고 I met with David Packard and Bob Noyce and tried to apologize for screwing up so badly. 데이비드 패커드(HP의 공동 창업자)와 밥 노이스(인텔 공동 창업자)를 만나 이렇게 실패한 것에 대해 사과하려했습니다. I was a very public failure, and I even thought about running away from the valley. 저는 완전히 '공공의 실패작'으로 전락했고, 실리콘 밸리에서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But something slowly began to dawn on me ? 그러나 제 맘 속에는 뭔가가 천천히 다시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I still loved what I did. The turn of events at Apple had not changed that one bit. 전 여전히 제가 했던 일을 사랑했고, 애플에서 겪었던 일들조차도 그런 마음들을 꺾지 못했습니다. I had been rejected, but I was still in love. And so I decided to start over. 전 해고당했지만, 여전히 일에 대한 사랑은 식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전 다시 시작하기로 결심했습니다. I didn't see it then, but it turned out that getting fired from Apple was the best thing that could have ever happened to me. 당시에는 몰랐지만, 애플에서 해고당한 것은 제 인생 최고의 사건임을 깨닫게 됐습니다. The heaviness of being successful was replaced by the lightness of being a beginner again, less sure about everything. 그 사건으로 인해 저는 성공이란 중압감에서 벗어나서 초심자의 마음으로 돌아가 It freed me to enter one of the most creative periods of my life. 자유를 만끽하며, 내 인생의 최고의 창의력을 발휘하는 시기로 갈 수 있게 됐습니다. During the next five years, I started a company named NeXT, another company named Pixar,and fell in love with an amazing woman who would become my wife. 이후 5년동안 저는 '넥스트', '픽사', 그리고 지금 제 아내가 되어준 그녀와 사랑에 빠져버렸습니다. Pixar went on to create the worlds first computer animated feature film, Toy Story, and is now the most successful animation studio in the world. 픽사는 세계 최초의 3D 애니메이션 토이 스토리를 시작으로, 지금은 가장 성공한 애니메이션 제작사가 되었습니다. In a remarkable turn of events, Apple bought NeXT, I retuned to Apple, and the technology we developed at NeXT is at the heart of Apple's current renaissance. 세기의 사건으로 평가되는 애플의 넥스트 인수와 저의 애플로 복귀 후, 넥스트 시절 개발했던 기술들은 현재 애플의 르네상스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And Laurene and I have a wonderful family together. 또한 로렌과 저는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습니다. I'm pretty sure none of this would have happened if I hadn't been fired from Apple. 애플에서 해고당하지 않았다면, 이런 엄청난 일들을 겪을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It was awful tasting medicine, but I guess the patient needed it. 정말 독하고 쓰디 쓴 약이었지만, 이게 필요한 환자도 있는가봅니다. Sometimes life hits you in the head with a brick. Don't lose faith. 때로 세상이 당신을 속일지라도, 결코 믿음을 잃지 마십시오. I'm convinced that the only thing that kept me going was that I loved what I did. 전 반드시 인생에서 해야할만 일이 있었기에, 반드시 이겨낸다고 확신했습니다. You've got to find what you love. And that is as true for your work as it is for your lovers. 당신이 사랑하는 일을 찾아보세요. 사랑하는 사람이 내게 먼저 다가오지 않듯, 일도 그런 것이죠. Your work is going to fill a large part of your life, '노동'은 인생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and the only way to be truly satisfied is to do what you believe is great work. 그런 거대한 시간 속에서 진정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은 스스로가 위대한 일을 한다고 자부하는 것입니다. And the only way to do great work is to love what you do. 자신의 일을 위대하다고 자부할 수 있을 때는, 사랑하는 일을 하고있는 그 순간 뿐입니다. If you haven't found it yet, keep looking. Don't settle. As with all matters of the heart, you'll know when you find it. 지금도 찾지 못했거나, 잘 모르겠다해도 주저앉지 말고 포기하지 마세요. 전심을 다하면 반드시 찾을 수 있습니다. And, like any great relationship, it just gets better and better as the years roll on. 일단 한 번 찾아낸다면, 서로 사랑하는 연인들처럼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욱 더 깊어질 것입니다. So keep looking until you find it. Don't settle. 그러니 그 것들을 찾아낼 때까지 포기하지 마세요. 현실에 주저앉지 마세요 My third story is about death. 세번째는 죽음에 관한 것입니다. When I was 17, I read a quote that went something like: 17살 때, 이런 문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If you live each day as if it was your last, someday you'll most certainly be right." 하루 하루를 인생의 마지막 날처럼 산다면, 언젠가는 바른 길에 서 있을 것이다 It made an impression on me, and since then, for the past 33 years! , 이 글에 감명받은 저는 그 후 50살이 되도록 I have looked in the mirror every morning and asked myself: 거울을 보면서 자신에게 묻곤 했습니다. "If today were the last day of my life, would I want to do what I am about to do today?"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지금 하려고 하는 일을 할 것인가? And whenever the answer has been "No" for too many days in a row, I know I need to change something. 아니오!라는 답이 계속 나온다면, 다른 것을 해야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Remembering that I'll be dead soon is the most important tool I've ever encountered to help me make the big choices in life.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명심하는 것이 저에게는 가장 중요한 도구가 됩니다. Because almost everything ? 왜냐구요? all external expectations, all pride, all fear of embarrassment or failure - 외부의 기대, 각종 자부심과 자만심. 수치스러움와 실패에 대한 두려움들은 these things just fall away in the face of death, leaving only what is truly important. '죽음' 앞에서는 모두 밑으로 가라앉고, 오직 진실만이 남기 때문입니다. Remembering that you are going to die is the best way I know to avoid the trap of thinking you have something to lose.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무엇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최고의 길입니다. You are already naked. There is no reason not to follow your heart. 여러분들이 지금 모두 잃어버린 상태라면, 더이상 잃을 것도 없기에 본능에 충실할 수 밖에 없습니다. About a year ago I was diagnosed with cancer. 저는 1년 전쯤 암진단을 받았습니다. I had a scan at 7:30 in the morning, and it clearly showed a tumor on my pancreas. 아침 7시 반에 검사를 받았는데, 이미 췌장에 종양이 있었습니다. I didn't even know what a pancreas was. 그전까지는 췌장이란 게 뭔지도 몰랐는데요. The doctors told me this was almost certainly a type of cancer that is incurable, and that I should expect to live no longer than three to six months. 의사들은 길어야 3개월에서 6개월이라고 말했습니다. My doctor advised me to go home and get my affairs in order, which is doctor's code for prepare to die. 주치의는 집으로 돌아가 신변정리를 하라고 했습니다. 죽음을 준비하라는 뜻이었죠. It means to try to tell your kids everything you thought you'd have the next 10 years to tell them in just a few months. 그 것은 내 아이들에게 10년동안 해줄수 있는 것을 단 몇달안에 다 해치워야된단 말이었고 It means to make sure everything is buttoned up so that it will be as easy as possible for your family. 임종 시에 사람들이 받을 충격이 덜하도록 매사를 정리하란 말이었고 It means to say your goodbyes. 작별인사를 준비하라는 말이었습니다. I lived with that diagnosis all day. 전 불치병 판정을 받았습니다. Later that evening I had a biopsy, where they stuck an endoscope down my throat, through my stomach and into my intestines, put a needle into my pancreas and got a few cells from the tumor. 그 날 저녁 위장을 지나 장까지 내시경을 넣어서 암세포를 채취해 조직검사를 받았습니다. I was sedated, but my wife, who was there, told me that when they viewed the cells under a microscope 저는 마취상태였는데, 후에 아내가 말해주길, 현미경으로 세포를 분석한 결과 the doctors started crying because it turned out to be a very rare form of pancreatic cancer that is curable with surgery. 치료가 가능한 아주 희귀한 췌장암으로써, 의사들까지도 기뻐서 눈물을 글썽였다고 합니다. I had the surgery and I'm fine now. 저는 수술을 받았고, 지금은 괜찮습니다. This was the closest I've been to facing death, and I hope its the closest I get for a few more decades. 그 때만큼 제가 죽음에 가까이 가 본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또한 앞으로도 가고 싶지 않습니다^^ Having lived through it, I can now say this to you with a bit more certainty than when death was a useful but purely intellectual concept: 이런 경험을 해보니, '죽음'이 때론 유용하단 것을 머리로만 알고 있을 때보다 더 정확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No one wants to die. Even people who want to go to heaven don't want to die to get there. 아무도 죽길 원하지 않습니다. 천국에 가고싶다는 사람들조차도 당장 죽는 건 원치 않습니다. And yet death is the destination we all share. No one has ever escaped it. 우리 모두는 언젠가는 다 죽을 것입니다. 아무도 피할 수 없죠. And that is as it should be, because Death is very likely the single best invention of Life. 삶이 만든 최고의 작품이 '죽음'이니까요. It is Life's change agent. It clears out the old to make way for the new. 죽음이란 삶의 또다른 모습입니다. 죽음은 새로운 것이 헌 것을 대체할 수 있도록 만들어줍니다. Right now the new is you, but someday not too long from now, you will gradually become the old and be cleared away. 지금의 여러분들은 '새로움'이란 자리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여러분들도 새로운 세대들에게 그 자리를 물려줘야할 것입니다. Sorry to be so dramatic, but it is quite true. 너무 극단적으로 들렸다면 죄송하지만, 사실이 그렇습니다. Your time is limited, so don't waste it living someone else's life. 여러분들의 삶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낭비하지 마십시오. Don't be trapped by dogma - which is living with the results of other people's thinking. 도그마-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 얽매이지 마십시오. Don't let the noise of other's opinions drown out your own inner voice. 타인의 잡음이 여러분들 내면의 진정한 목소리를 방해하지 못하게 하세요 And most important, have the courage to follow your heart and intuition.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과 영감을 따르는 용기를 가지는 것입니다. They somehow already know what you truly want to become. Everything else is secondary. 이미 마음과 영감은 당신이 진짜로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나머지 것들은 부차적인 것이죠. When I was young, there was an amazing publication called The Whole Earth Catalog, which was one of the bibles of my generation. 제가 어릴 때, 제 나이 또래라면 다 알만한 '지구 백과'란 책이 있었습니다. It was created by a fellow named Stewart Brand not far from here in Menlo Park, and he brought it to life with his poetic touch.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먼로 파크에 사는 스튜어트 브랜드란 사람이 쓴 책인데, 자신의 모든 걸 불어넣은 책이었지요. This was in the late 1960's, before personal computers and desktop publishing, so it was all made with typewriters, scissors, and polaroid cameras. PC나 전자출판이 존재하기 전인 1960년대 후반이었기 때문에, 타자기, 가위, 폴라노이드로 그 책을 만들었습니다. It was sort of like Google in paperback form, 35 years before Google came along: 35년 전의 책으로 된 구글이라고나 할까요. it was idealistic, and overflowing with neat tools and great notions. 그 책은 위대한 의지와 아주 간단한 도구만으로 만들어진 역작이었습니다. Stewart and his team put out several issues of The Whole Earth Catalog, and then when it had run its course, they put out a final issue. 스튜어트와 친구들은 몇 번의 개정판을 내놓았고, 수명이 다할 때쯤엔 최종판을 내놓았습니다. It was the mid-1970s, and I was your age. 그 때가 70년대 중반, 제가 여러분 나이 때였죠. On the back cover of their final issue was a photograph of an early morning country road, 최종판의 뒤쪽 표지에는 이른 아침 시골길 사진이 있었는데, the kind you might find yourself hitchhiking on if you were so adventurous. 아마 모험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히치하이킹/엄지들고 차를 유혹해서 빌려타며 여행하는 것/을 하고싶다는 생각이 들정도였지요. Beneath it were the words: "Stay Hungry. Stay Foolish." 그 사진 밑에는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 배고픔과 함께, 미련함과 함께 It was their farewell message as they signed off. Stay Hungry. Stay Foolish. 배고픔과 함께, 미련함과 함께. 그 것이 그들의 마지막 작별인사였습니다. And I have always wished that for myself. And now, as you graduate to begin anew, I wish that for you. 저는 이제 새로운 시작을 앞둔 여러분들이 여러분의 분야에서 이런 방법으로 가길 원합니다. Stay Hungry. Stay Foolish. 배고픔과 함께. 미련함과 함께. Thank you all very much. 고맙습니다.
325 잃어버린 노트북을 찾아봅니다! 파일 [2]
[레벨:20]서정수
72 2011-10-19
324 양식말씀의 은혜 : 타이밍 벨트 파일 [3]
[레벨:20]서진우
87 2011-10-20
"여호와께서는 의로우사 악인의 줄을 끊으셨도다"(시129:4) 흡입-압축-폭발-배기... 자동차 엔진이 작동하려면 불을 붙이기 위한 산소가 공급되고 폭발하고 나온 가스가 배출되어야 합니다. 피스톤의 움직임에 맞춰 제 때에 공기 밸브를 열고 닫아주는 장치가 타이밍 밸트라고 합니다. '타이밍을 맞춰주는' 벨트이지요. 아래 그림은 타이밍 벨트의 모습입니다. 고속주행시 타이밍 벨트가 끊어지는 상황이 발생할 경우 시동이 꺼지게 되고, 엔진이 파열될 수 있으며, 차의 핸들 및 동력 구동에 문제가 생겨서 대형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고 합니다. 아무리 성능이 좋은 차라도 '이 줄이 끊어지면' 끝인 것이죠. 티코를 타는 연구실 선배는 타이밍 벨트만 끊어지지 않으면 계속 탈 수 있다는 말을 하곤 합니다. 낡았어도 이 줄이 끊어지지 않으면 자동차로서 기능 할 수 있는가 봅니다. 우리 인생도 어떤 줄을 가지고 있느냐가 중요하겠지요. 그래서 사람들도 줄을 잘 서야 한다는 말을 하나 봅니다. 그러나 시편 말씀을 볼 때 조건이 좋은 줄에 서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끊지 않는 줄에 서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최요한 선교사님이 처갓집 복음화를 위해 15년간 기도하셨다는 부분에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어떤 면에서 15년간 기도의 끈을 놓지 않으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께서 그 줄을 끊지 않으셨고 마침내 그 줄을 통해 역사하셨습니다. 반면 복음서의 어리석은 부자는 창고의 재산을 가득히 쌓아두었지만 그 날 밤 하나님께서 그의 생명 줄을 끊어버리심으로 모든 것을 헛되게 하셨습니다. 저는 지금 어떤 줄을 붙들고 있습니까. 조금 고되더라도 끊어지지 않을 줄을 달고 인생의 경주를 하기를 기도합니다.
323 복음에 참여한 빌립보 교회를 생각하며 파일 [2]
[레벨:20]인금철
110 2011-10-21
오늘 양식 본문(빌 1:1-11)에서 복음으로 인하여 '매임'(imprisonment), 복음을 '변명'(defense)함과 '확정함'(confirmation)을 많이 생각하게 됐습니다. 바울이 왜 그처럼 복음에 참여한 빌립보 교회에 대해 감사, 기쁨, 사모의 마음으로 가득했는지 조금은 이해가 됩니다. 교회가 상위 1%에 속하는 곳도 있고, 비난과 무시와 공격의 대상이 되는 곳이 있습니다. 1%가 되는 곳에는 너도나도 몰릴 수 있지만, 복음으로 인해 불편해지는 곳에는 참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있는 캠퍼스, 아니 대부분의 세상이 그러한 것 같습니다. 복음은 세상으로부터 늘 기소를 당합니다. 예수님부터 그랬습니다. 예수님과 사도 바울을 이어 우리도 복음의 증인이라는 이유로 매인 몸이 되고, 출두 고지서를 받고 법정으로 나갑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 복음을 변명하고 확정하기 위해 애를 씁니다. 이러한 법정 싸움은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상황은 참 불리하게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법정 싸움을 보고 한 두 사람이나마 복음이 옳다는 결론을 내리고 복음으로 돌아서는 사람들을 봅니다. 그러기에 이 지루한 싸움은 끝까지 계속되어야 합니다. 최종적으로 복음이 진리로 확정 판결이 나는 때는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그 날이겠지요... 복음으로 인해 쇠사슬에 매이고 이를 변명하기 위해 생명을 무릎쓰고 법정에 서야 하는 어려운 시대에 복음에 참여했던 빌립보 교회처럼, 복음이 기소된 이 시대에 복음을 부끄러워하거나 외면하거나 버리지 않고, 치열한 참여정신을 가지고 참여하는 동역자들을 생각할 때 깊이 감사가 됩니다. 복음을 변명하러 나오라는 고지서를 받아들고 진리를 확정하기 위해 오늘도 캠퍼스로, 직장으로 나가는 한 분 한 분을 바라보시며 감사하고 기뻐하시고 사모하시는 우리 주님을 생각합니다.
322 no image [펌] His Eye Is On The Sparrow by Big Mama [2]
[레벨:20]서진우
60 2011-10-24
321 no image [공지] 2011 가을수양회 안내 [3]
[레벨:20]Ruthy Kim
74 2011-10-27
320 no image 아버지의 장례식을 마치며 드리는 감사의 글 [5]
[레벨:20]인금철
79 2011-11-01
“데라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데라는 아브라함과 나홀과 하란을 낳고...데라는 나이가 이백 오세가 되어 하란에서 죽었더라”(창11:27,32)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나.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요14:1,2) 지난 4일간의 장례식을 치르며 슬픔을 소망과 기쁨으로 바꾸어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동역자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받은 바 은혜가 너무 크고 갚을 수 없는 빚을 진 것 같아 글로써나마 감사를 표하고자 합니다. 하나는, 육신의 아버지의 인생이 데라와 같은 삶이었음을 보게 하셔서 감사드립니다. 저의 아버지에게는 크게 2가지 고통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20여년 전 처음 뇌졸중으로 쓰러지시고 불편하게 사셨고, 지난 5월에 두 번째 뇌졸중으로 쓰러지신 후에는 전신이 마비되어 지난 6개월 가까이 대부분의 시간을 중환자실에서 보내었습니다. 이러한 육체적인 아픔 외에 자녀에게 바라던 인간적인 소망을 접어야 하는 아픔이 있었습니다. 장례식 기간 중 네 명의 누나들로부터 제가 목자생활 하기로 선언하였을 때, 큰 상처를 받았다고 얘기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하물며 아버지의 마음이야 어떠했을지 짐작이 갑니다. 그 때문인지 아버지는 예전에 살던 집 옆에 어느 날 세워진 작은 천막 교회에 잠시나마 나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세례도 받고 집사직분도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버지가 자녀를 통해 세상의 영광을 누리고 사람들로부터 잠간 좋은 소리 듣고 사는 대신에, 자녀를 하나님의 종으로 키우는 아픔과 수고를 감당하는 인생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당시에는 슬픔과 실망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아버지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낳고 키운 데라와 같이 믿음의 족보를 시작하는데 쓰임받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발인하기 전까지 수많은 주의 종들로부터 헌화와 기도를 받는 아버지를 보면서, 아버지가 감당한 아픔과 수고가 헛되지 않고 하나님이 영광스럽게 하셨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보며 제 자신을 비롯하여 이 땅의 부모들이 자녀를 하나님의 종으로 키우는 수고와 아픔을 감당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영광스럽고도 중요한 사명임을 보게 되었습니다. 또 하나는 저와 가족들에게 하늘 소망을 갖게 하신 것입니다. 저의 아버지는 6.25 전쟁에 참전했다가 오른팔에 총상을 입고 제대했습니다. 그러나 국가유공자 대상인 것을 모르고 아무런 혜택도 받지 못하다가, 작년 11월에야 어떤 분의 조언으로 느즈막히 국가유공자신청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6개월 정도 심사 후 7급 국가유공자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3일 후에 갑자기 뇌졸중으로 쓰러졌습니다. 아버지는 이후 대부분 중환자실에 있어야 했기 때문에 저의 집 형편으로는 사실 치료비를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국가유공자인 탓에 치료비의 대부분을 감면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크신 섭리의 손길이었습니다. 저는 이것을 생각하며 전신이 마비된 채 누워 있는 아버지를 소망 중에 섬길 수가 있었습니다. 의식이 있는지조차 확인할 수 없었지만, 귀가 살아 있음을 믿고 말씀과 기도로 섬겨드렸습니다. 사람이 고칠 수 없는 한계상황 앞에서 믿음이 없는 가족들이 겸손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아버지는 경련, 패혈증, 욕창 등의 질병과 심장, 신장, 폐 기능의 악화로 여러 번 생명의 위기를 맞곤 하였습니다. 이런 아버지를 생각할 때,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은 이 때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눅8:50) 말씀을 주시고, 아버지의 삶과 죽음보다도 죽음조차 이기신 예수님을 믿고 다만 두려워하지 말고 믿도록 제게 용기를 주셨습니다. 또 귀신 들려 경련하는 아이를 고쳐주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기도할 때 하나님은 경련을 잠잠케 하시고, 욥의 욕창을 치료하시고, 인간의 장부를 조직하신 하나님을 의지하여 기도할 때 그 전능하신 손길로 기적적으로 생명을 연장시켜 주셨습니다. 특히 혈압이 70까지 내려가 병원에서 임종준비를 하라는 말을 듣고 아버지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기도해 드리고 나왔는데, 다음 날 기적적으로 혈압이 올라가 치료를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또 심장이 정지되었으니 오라는 말을 듣고 정말 마지막이구나 생각하고 임종예배 말씀을 생각하며 병원으로 가는 중,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다는 말을 듣기도 했습니다. 이를 통해 저는 생명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시며, 쓰러지신 후 병원에서 지내온 시간이 하나님의 은혜로 연장받은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를 입관할 때, 아버지의 온 몸은 사방에 주사자국과 치료의 흔적으로 상처 투성이었습니다. 저는 이것을 보면서 우리 몸의 조직이 언젠가는 다 무너져 내린다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고후5:1)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의 몸을 깨끗이 닦고 깨끗하고 화려한 옷을 입혀 주고 얼굴엔 화장도 해 드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장례식 중간에 드린 예배 말씀 중 요한계시록 21:2절이 다가왔습니다. “또 내가 보내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우리의 육체는 이 땅에 있는 동안 걸치고 있는 옷과 같습니다. 아버지는 이 땅에서 오래 입다가 망가진 헌 옷을 벗고, 하나님의 신부가 되기 위해, 그리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입을 새 옷으로 갈아 입을 준비를 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저는 이 땅에서의 장례식이 하나님 나라에서의 결혼식 준비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영적으로 데라와 같은 인생을 사심으로 영광을 얻으셨고, 인간적으로 국가유공자라는 영예를 얻고 태극기에 관이 씌워져 이천 호국원에 안장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서의 마지막 거처까지 가장 좋은 곳으로 예비해 주셨습니다. 장례식을 마치고 마지막 예배를 드리면서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말씀을 통해, 아버지가 쓰러지기 전부터 안장하기까지 모든 것을 예비하신 하나님이 아버지를 위해 영원히 거할 집도 예비하셨다는 소망과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저의 어머니도 남편을 잃은 큰 슬픔이 있었지만, 장례식을 마치고 발걸음이 가볍다고 고백하셨습니다. 지난 6개월이 쉽지 않은 기간이었지만, 이를 통해 참된 소망으로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의 동역자들에게 감사드립니다. 학생 형제자매님들로부터 시작해서 믿음의 선배님들에 이르기까지 먼 길을 마다않고 찾아 오셔서 헌화해 주실 때, 전화와 편지와 해외로부터 이메일로까지 위로를 주실 때, 자격 없는 저와 가족들과 아버지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느껴져 매 번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비록 세상에서 많은 친구를 잃고 친척도 잃었지만, 얼마나 많은 소중한 영적인 가족을 얻게 하셨는지요? 뿐만 아니라 힘든 가운데서도 물질로 섬겨 주셔서 장례비용과 치료비용을 부족하지 않게 감당할 수 있도록 희생적으로 섬겨 주신 은혜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이것을 생각할 때, 저와 저희 가족들이 갚을 수 없는 빚을 졌음을 고백합니다. 지난 6개월간 인간적으로 볼 때 힘겨운 시간이었지만, 이러한 고난을 통해 하나님은 참으로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큰 일을 하셨습니다.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삼하7:18) 고백하던 다윗의 심정이 저의 심정임을 고백합니다. 제가 새로운 심령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섬기고자 합니다. 또한 아직 온전한 믿음이 없는 가족들이 믿음을 갖고 하나님을 섬기며 은혜를 감당하게 하시길 기도합니다. 아버지의 장례식을 마치며 다시 한 번 하나님과 그리고 믿음의 동역자님들께 저의 가족들을 대신하여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319 no image 수시 피싱
[레벨:15]정종현
26 2011-11-02
 안녕하세요. 저번에 기숙사에서 보니 벌써 미대는 수시고사를 치르고 있었습니다. 곧 있으면 수능이고, 서울대 수시모집도 시작되고, 그리고 주님도 가까이 오셨습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 (눅 12:42-44) 함께 피싱에 동참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장소는 공고되는 대로 알려드리겠습니다. 인원은 지역균형 총 700명, 특기자 총 1200명, 기회균형 총 200명입니다. 특기자전형 구 분 일 정 실기고사 음악대학 예비소집 ’11. 11. 16(수) 14:00 ~ 17:00 실기고사 ’11. 11. 17(목) 체육교육과 (단체종목) 예비소집 ’11. 11. 17(목) 10:00 ~ 12:00 실기고사 ’11. 11. 17(목) 14:00 ~ 면접 및 구술고사 인문․자연계열, 체육교육과 ’11. 11. 18(금) 미술대학 ’11. 11. 16(수) ~ 11. 17(목) 음악대학 ’11. 11. 18(금) 면접 자유전공학부 ’11. 11. 19(토) 기회균형선발특별전형 구 분 일 정 실기고사 미술대학 예비소집 ’11. 10. 12(수) 14:00 ~ 17:00 실기고사 ’11. 10. 13(목) ~ 10. 16(일) 음악대학 예비소집 ’11. 11. 16(수) 14:00 ~ 17:00 실기고사 ’11. 11. 17(목) 면접 ’11. 11. 26(토) 지역균형선발전형 면접 ’11. 12. 3(토) 일정과 모집인원을 센터 입구에 있는 게시판에 붙여놨습니다. http://admission.snu.ac.kr/
318 no image [긴급] 도움을 요청합니다!!
[레벨:20]인금철
52 2011-11-07
파라과이 이요한 선교사님께서 발덴스트룀 거대글로불린혈증(백혈병의 일종)으로 서울성모병원에서 투병 중이십니다. 정상 백혈구 수치가 혈액에 전혀 없는 상태로써 아주 위험한 감염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B형 혈액형을 가지신 동역자님들의 백혈구 성분 혈액이 필요합니다. 아래 글을 읽어보시고 자원하시는 분은 바로 인금철 목자님이나 한양UBF 전아브라함(가정의학과 전문의, abjun@hanmail.net, 010-4788-1412) 목자님에게 직접 연락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간절히 기도해 주십시오. -------------------------------------------------------------------- 백혈구 성분헌혈하실 자원자를 모집합니다. 대상자 : 만17-49세 B+ 혈액형을 가지신 분(자세한 것은 아래 참조) 헌혈하실 장소 : 서울성모병원( 구 강남성모병원) 4층 성분헌혈실 (가시는 길 아래 참조하세요)- 가셔서 17층 108호 이정연 환자분 성분헌혈하러 왔다고 하시면 됩니다. 시간 : 평일 오전8시-오후4시 토요일 오전 9시-오전11시 헌혈하시는 방법 : 총3회 서울성모병원에 방문하셔야 합니다. 첫날은 위 시간에 4층 성분헌혈실로 가셔서 혈액적합여부 검사를 하십니다. 적합 여부 결과는 하루 후에 나옵니다. (약 30분 소요) 둘째날 혈액이 적합한 분은 헌혈 하루 전날 백혈구생성촉진제 주사를 맞습니다.(약 1분 소요) 셋째날 백혈구 성분헌혈을 하십니다. (총 5시간 걸리는데 헌혈시간만 2시간 30분 소요) 성분헌혈 가능하신 분 조건 : 1. 만17세에서 만49세까지 체중 55kg 이상의 남녀 상지 정맥혈관이 좋은분 2. 혈액형이 같아야함: B+ 3. 특이체질, 알러지, 천식, 출혈 소인이나 약으로 인한 사고가 없어야함 4. 지난 1년 사이에 혈액제재를 수혈 받지 않았어야함 5. 지난 6개월 사이에 중병을 앓거나 큰 수술을 받지 않았어야함 6. 국내 말라리아 위험지역에 최근 1년 이내 1박 이상 숙박 및 2년 이내에 6개월 이상 군복무한 적이 없어야함 7. 치료를 위한 의약품(당뇨, 고혈압, 두통, 무좀, 탈모, 피부과약, 여드름과 건선치료제)를 복용한 적이 없어야함 8. 신종바이러스질환으로 인해 해외여행 후 1개월 이내인 분은 헌혈을 금지한다 9. 내시경검사(1개월), 치과치료(출혈이 없는 치료는 헌혈이 가능), 레이저치료(의료기관에서 미용목적 7일 이내)받은 분은 일정기간 헌혈이 제한된다 10. 암, 심장질환, 호흡기질환, 자가면역성질환, 장기이식, 만성피로증후군으로 진단 받은 분은 헌혈을 금지함 찾아오시는 길 : http://www.cmcseoul.or.kr/hospitalinfo/map.jsp?DEPTH=05070000
317 no image 우산 찾습니다.
[레벨:15]정기쁨
31 2011-11-08
316 [사진] 그야말로 스테디... 파일 [2]
[레벨:20]서정수
63 2011-11-12
Tag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