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성경읽기선교회 관악5부

번호 제목 닉네임 조회 등록일
415 no image 영화 추천 [1]
[레벨:20]인금철
113 2017-09-02
414 no image 나를 미치게 하는 "훈련" [1]
[레벨:20]인금철
89 2017-12-29
2018 평창 동계올림픽을 앞둔 각국 선수들은 지금도 목표를 위해 고통을 감내하고 있다. 어떤 훈련들이 선수들에게 가장 고통스러울까. 미국 올림픽위원회가 운영하는 미국 대표팀 블로그는 26일(현지시간) 각 종목 선수들에게 ‘나를 미치게했던 훈련들’을 물어 정리했다. 여자 알파인스키 최고 스타 미카엘라 시프린은 트레드밀(러닝머신) 위에서의 45초 전력질주가 가장 힘든 운동이라고 했다. 시프린은 한 세트에 8번씩, 하루에 3~4세트를 뛴다고 했다. 그는 “20초쯤 지나면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며 “전력질주를 마친 뒤에는 그날 내내 쉰다”고 말했다. 네번째 올림픽 출전을 앞둔 남자 바이애슬론의 로웰 베일리는 ‘롤러스키 10㎞구간 2회 연속 질주’라고 했다. 베일리는 쉬는 시간 10분이 가장 고통스럽다고 했다. 그는 “10㎞를 달리며 이미 고통을 맛봤는데, 그 고통을 다시 겪을 것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여성 크로스컨트리 선수 제시 디긴스는 “100㎞ 구간을 6시간 동안 롤러스키로 달린 것”과 “해발 900m가 넘는 애팔래치아 산맥 트래킹코스를 6시간 동안 달린 것”을 꼽았다. 2014 소치올림픽 피겨 팀 이벤트 동메달리스트 제이슨 브라운은 다리 부상을 입은 지난해 12월 대형 풀장에서의 전력질주를 떠올렸다. 5주 동안 물이 흐르는 반대방향으로 전력질주를 했다고 한다. 브라운은 “거의 익사할뻔한 악몽같은 순간이었다”면서도 “훈련 이후 심장 기능이 좋아져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브라운은 이 훈련 직후 아이스링크에서는 단 1주일 훈련했는데도 올 초 미국 선수권 대회에서 2위를 기록했다. 2002년 솔트레이크 올림픽부터 스노보드 여자 하프파이프 부문에서 금메달 1개, 동메달 2개를 딴 켈리 클락은 하루에 두 번 전력을 다해 계단을 뛰어 오르내린 훈련이 가장 힘들다고 했다. 20분이란 시간 제한을 두고 몇 개 계단을 뛰는지를 재며 매번 기록 경신을 목표로 둔다고 했다. 2014년 소치 올림픽 봅슬레이 여자 2인승 동메달리스트인 아자 에반스는 미프로풋볼(NFL) 선수인 오빠 프레드를 둔 덕에 풋볼선수가 받는 ‘프롤러 푸시’ 훈련을 받았다. ‘프롤러’라고 불리는 철판 위에 약 20㎏ 나가는 바벨 14개를 얹고 그대로 미는 훈련이다. 에반스는 “선수들이 내가 여자라고 봐주지 않았다. 쉬지도 않았다”면서도 “이 훈련 덕에 나는 정말 강해졌다”고 했다. 원문보기: http://sports.khan.co.kr/sports/sk_index.html?art_id=201712271709003&sec_id=530601#csidx2b197b1681915b19a7ddaa3d4b203bf ---------------------------------------------------------------------------------------------------------------------------------------------------------------- 2017년에 어려운 일들이 있을 때 때론 '죽겠네', 때론 '미치겠네...' 하는 말을 자기도 모르게 되뇌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의 훈련이었나 봅니다. 2018년엔 조금 더 견뎌봐야겠습니다.
413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레벨:20]인금철
60 2018-02-20
아름다운 복음 진리를 지키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를 묵상하다가 문득 예전에 신문에서 보았던 기사가 생각났습니다. 복음 진리를 지키는데 따르는 고난과 유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름다운 인류유산을 지키기 위해서도 이와 같은 고난을 감당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복음이 이보다 비할 수 없이 아름답다는 것을 안다면 어찌 이보다 더 큰 고난을 감당할 수 없을까? 잔혹한 IS도 '老학자의 신념'은 꺾을 수 없었다예루살렘=노석조 특파원 | 2015/08/21 03:00 가-가+ '시리아 고대 유적 팔미라의 보물 위치를 대라'는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의 압박과 고문에도 끝까지 입을 열지 않은 시리아 고고학자 칼리드 알아사아드(83) 박사가 18일 결국 살해됐다고 시리아 관영 SANA통신이 보도했다. 고대 로마와 페르시아 제국의 양식이 혼합된 거대 도시 유적지인 팔미라는 1980년 유네스코의 세계유산으로 지정돼 '사막의 진주' '중동의 베네치아'라고 불리며 세계인의 큰 사랑을 받아왔다.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단체 IS에 살해당한 시리아의 고고학자 칼리드 알아사아드 박사가 2002년 9월 시리아 팔미라 유적지에서 찍은 사진. 제사장 모습이 새겨진 석관(石棺)을 어루만지며 환하게 웃고 있다. 평생을 팔미라 유적 발굴과 보존에 헌신한 알아사아드 박사는 IS로부터 팔미라 유적을 지키려다 끝내 살해당했다. /Getty Images 멀티비츠 평생을 팔미라 유적 발굴과 보존을 위해 헌신한 알아사아드 박사는 지난 6월 IS에 납치됐다. 그는 서른셋이던 1963년 팔미라 유적 담당자로 임명돼 2003년 팔미라 박물관장으로 은퇴할 때까지 현직에서만 40년 동안 팔미라에 인생을 걸었다. 수도 다마스쿠스로 역사학 공부를 하러 갔을 때를 빼고는 팔미라 곁을 떠나 살아본 적도 없었다. 별명도 '미스터 팔미라'였다. 은퇴 후에도 고향인 팔미라에 살며 연구를 계속하던 그는 지난 5월 IS가 곧 들이닥친다는 주민들 경고에도 "잘못한 게 없으니 괜찮을 것이다" "내가 팔미라를 지켜야 한다"면서 피란을 거부했다. 같이 가자고 매달리는 자녀들한테도 "늙은 나를 저들이 어쩌겠느냐"고 안심시키며 혼자 남았다. 실제로 IS는 점령 직후 그를 잡아갔으나 조사한 뒤 금세 풀어줬다. 하지만 한 달 뒤 IS는 테러자금 마련을 위해 암시장에 내다 팔 유적물이 필요하자 알아사아드 박사를 다시 잡아갔다. 박사의 조카는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삼촌은 만약에 대비해 사람들을 시켜 팔미라 박물관의 주요 보물을 어딘가에 몰래 숨겨두도록 했는데, IS가 이를 알아채고 그 위치를 캐물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박사는 수주간의 갖은 고문과 참수 협박에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를 아는 이웃 주민들은 "알아사아드 박사는 자신의 딸 이름도 팔미라의 고대 여왕 이름을 따 제노비아(Zenobia)라 지었다"면서 "그는 딸 같은 팔미라를 자기 목숨보다 더 아꼈다"고 전했다. 시리아인권관측소(SOHR)에 따르면, IS는 18일 팔미라 박물관 인근 광장에 알아사아드 박사를 끌고 나와 군중 앞에서 참수했다. 증언에 따르면 그는 죽는 순간까지도 안경을 끼고 정정한 모습을 유지하려고 했다고 SOHR은 전했다. IS는 이후 박사의 시신 앞에 하얀 판을 세우고 그 안에 붉은 색으로 '이란과 시리아 정부의 협력자' '팔미라 우상물의 관리자' '배교자' 등의 글귀를 적었다. 유물 암거래로 돈 벌려는 것이 주목적이었지만 실패하자 이 같은 '명분'을 만들어 박사를 정당하게 죽인 것처럼 꾸미려 한 것이다. 이리나 보코바 유네스코 사무총장은 19일 성명을 통해 "고인의 업적은 극단주의자들을 넘어 영원히 살아남을 것"이라면서 "IS는 위대한 인물을 살해했지만 역사를 침묵하게는 못할 것"이라고 밝혔다.
412 no image 생체시계 교란에 대해
[레벨:20]인금철
47 2018-05-31
뉴스위크에서 본 기사입니다. ------------------------------- 우리 몸에서 하루 중 생레 리듬을 조절하는 생체시계가 맞지 않으면 우울증과 양극성 장애(조울증) 등 정신장애가 생길 위험이 커진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영국 연구팀은 하루 중 잠들고 깨는 활동주기를 나타내는 생체리듬을 연구함으로써 그런 결론에 이르렀다. 글래스고대학에서 정신건강과 웰빙을 연구하는 로라 라이올은 이 논문의 주 저자로서 "이 문제와 관련된 연구로선 지금까지 최대 규모였다."고 말했다. "연구 결과 하루 중 활동주기의 교란과 기분장애 사이의 연관성이 확실히 나타났다. 이전의 여러 연구도 생체리듬의 교란과 정신건강 사이의 연관성을 확인했지만 샘플 규모가 비교적 작았다." 글래스고 대학의 과학자들은 2006~2010년 영국에서 수집된 37~73세 9만 명 이상의 데이터를 바탕으로 연구를 진행했다. 연구팀은 참가자의 하루 중 활동과 관련한 생체시계가 맞게 돌아가는지 알아보기 위해 2013~2015년 일주일 동안 참가자에게 활동 추적기를 손목에 착용케 해 몸의 움직임을 추적했다. 측정은 휴식과 활동량을 비교하는 '상대 진폭' 분석을 통해 이뤄졌다. 연구팀은 하루 중 일반적으로 가장 바쁜 10시간 동안 참가자가 얼마나 활동했는지 확인한 다음 그 수준을 정상적인 주기에서 가장 활동이 적어야 할 5시간과 비교했다. 그 결과 활동 수준 차이가 작을수록 '상대진폭'이 낮아진다. 깨어 있는 동안 충분히 활동하지 않거나 일반적으로 몸이 휴식해야 할 시간에 활동을 많이 하는 사람이 그런 경우에 속한다. 생체시계가 맞게 돌아가지 않는다는 뜻이다. '상대 진폭'이 낮은 사람은 정신장애의 위험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나이와 성별, 흡연 여부, 학력, 어린 시절의 정신적 외상 등 다른 위험 요인을 감안해도 마찬가지였다. 의학 학술지 랜싯에 발표된 이 논문에 따르면 그런 사람은 다른사람보다 우울증에 걸릴 확률이 6%, 양극성 장애에 걸릴 확률이 11% 높았다. 또 그런 사람은 불행과 외로움, 건강에 대한 불만을 느낄 가능성이 더 컸고 반응 시간도 더 느렸다. 논문의 선임 저자인 대니얼 스미스 정시과 교수는 "그런 사람은 밤에 스마트폰을 많이 사용하거나, 한밤중에 일어나 차를 끓여 마시는 등 수면 위생이 상당히 나쁜 경우에 속한다"고 설명했다. 또 그는 밤 10시 이후엔 생체 리듬을 방해하는 활동을 피하는게 좋지만, 낮 동안의 활동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낮 동안 활동이 많고 밤에 숙면하는 사람이 아주 건강하다. 그런 사람은 '상대 진폭'이 아주 높다." 생체리듬이 교란되는 이유가 유전자나 환경과 관련 있는지, 또 그런 이유가 우울증과 양극성 장애 위험을 높이는지 확인하기 위해선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하다고 스미스 교수는 말했다. 생체시계는 뇌의 중심부에 위치한 시교차상핵이 태양에서 나오는 광선을 이용, 시각을 판단하고 그 정보를 온 몸에 산재해 있는 말초시계에 전달하는 방식으로 수면 패턴과 체온, 면역체계, 호르몬 분비 등을 조절한다. 그러나 인공조명이나 야근, 노화, 질병, 또는 시차가 다른 곳으로의 여행 등이 생체시계를 혼란에 빠드리며서 갖가지 부작용을 불러올 수 있다. ------------------------------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요9:4)
411 no image 홍갈렙 선교사님 주일 예배(6.10) 선교보고
[레벨:20]인금철
92 2018-06-10
자기를 부인하고 요절 마가복음 8: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안녕하십니까? 저는 독일 Heidelberg에서 온 홍갈렙 선교사입니다. 72년 예수님을 영접하고 78년 당시 서독의 정사라 선교사와 가정을 이루고 79년 독일에 파송되었습니다. 1. 자기를 부인하고 저는 1982월 8월 개척지 Heidelberg에 도착해 첫 예배를 드렸습니다. 주일이 되면 말씀과 음식을 준비해놓고 학생들을 기다렸습니다. 초청 받은 학생들이 간혹 성경공부하러 왔습니다. 하지만 창세기공부는 1강에서부터 장애에 부딪쳤습니다. 대개의 학생들이 Big bang에서부터 시간과 공간이 시작되었고, 물질에서 생명이 시작되었고, 그리고 원시적인 생명체에서 사람이 진화되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물론 이러한 주장은 새로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들이 'Big bang과 진화는 과학적인 사실이다'라고 믿고 있는 그 확고함,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하고 있는 그들의 풍부한 과학적인 지식으로 인해 놀랐습니다. 그 벽 앞에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맞선 저의 믿음이 유치하게 느껴졌습니다. 선교생활이 계속되었습니다. Message를 독일어로 준비하다 보니 간혹 밤을 세워야 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제 Message를 듣는 사람은 주로 동역자 혼자였습니다. Sarah선교사가 그나마 피곤하여 졸게 되면 제 Message를 듣는 사람은 그야말로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렇게 1년이 지나고 2년이 되어갔습니다. 몇몇 양들이 1:1을 하고 있었지만 똑똑하고 강한 그들이 제자가 된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힘들었습니다. 또 학생들을 초대하며 그들에게 받는 계속되는 거절로 제 심령은 날로 위축되었습니다. 가정을 부양해야 했는데 저의 장래도 막막해 보였습니다. 이렇게 1985년 여름이 되었을 때 제 삶이 한계에 부딪혀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곧 자신의 성실과 능력으로는 더 이상 극복할 수 없는 막다른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외부에서 오는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Message를 준비하는 중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했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막 8:34) 저는 이 말씀 앞에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너무 당연하지. 내가 지금 바로 이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이 고생을 하는 거 아냐!'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35) '생명을 구원코자 하면 잃고, 잃으면 얻는다니 ... 이는 얼마나 놀라운 패러독스인가! 그러나 비록 합리적으로 이해가 안 될지라도 내가 어떻게 이 말씀의 권위를 거역할 수 있으며, 또한 그 진실성을 의심할 수 있단 말인가?' 실로 예수님의 이 말씀은 저의 모든 실존적 상황과 생각, 그리고 경험을 초월한, 그야말로 역사와 시간의 저편에서 오는 것으로 확신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저의 현재의 삶과 장래의 삶, 그리고 영생까지도 규정짓는, 그래서 도저히 거역할 수 없는 삶의 원칙임에 틀림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 어느 누구도 타고난 본능으로는 자기를 스스로 상실하는 삶을 살지 않았고, 또 그렇게 살 수도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때문에 당연히 아무도 이렇게 가르칠 수 없었습니다. 오직 인간의 삶의 처음과 끝을 한눈에 보시며 또한 그 본질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만이 이렇게 말씀할 수 있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날 마치 제 옆에 서서 제게 그 큰 손을 내미시면서, "얘, Kaleb아, 나와 복음을 위해 네 생명을 내 놔야지."하고 말씀하시는 듯 했습니다. '내 생명을 요구하시다니 ...' 어느 누구도 제 생명을 요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 생명의 주인이 되시기 때문에 제 생명을 그렇게 요구하시는 것이 또한 명백했습니다. 저는 과연 자신이 지금까지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가 되돌아보았습니다. 스스로 주와 복음을 위해 헌신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른 바 그 “헌신”을 통해 무엇인가를 얻고자 했지 결코 나 자신을 잃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아침에 눈만 뜨면 '오늘 어떻게 양을 얻고 그래서 제자를 키울까?" 생각하였습니다. 선교사역을 통해 저는 자아의 성취와 완성 그리고 결국 자신의 천하를 얻고자 했던 것이었습니다. 저는 계산하며 헌신했고, 헌신하고는 손해의식에 시달렸습니다. 이 날 밤 그 “자기”는 이렇게 스스로의 정체성을 자아실현을 통해 완성코자 하는 이기적인 생존의지로 드러났습니다. 이 “자기”의 강력한 죄성과 이를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무력함으로 인한 절망이 저의 심령을 채웠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다는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계속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막 8:36) 제 목숨이 바로 제가 얻고자 했던 천하보다 더 귀한 것임을 예수님은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제 생명을 내놓으라고 말씀하실 때 실로 제게 참 생명, 곧 영생을 주시기 원하셨습니다. 저는 이날 절망 가운데서 제게 이렇게 영생을 약속하시며 영생의 길을 가도록 권면하시는 예수님의 복음을 새로이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눈을 떴을 때 제 심령에 말할 수 없는 평안과 기쁨이 넘쳤습니다. 그날 아침도 여느 때처럼 아이들을 유치원에 데려다 주고 Campus로 나갔습니다. 제 심령엔 더 이상 두려움과 피해의식이 없었습니다. 저는 스스로에게 물을 수 있었습니다. ‘자 오늘은 가서 시간을 잃어버리고 자기를 잃어버리자! 또 무엇을 잃어버릴까?’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씀을 듣게 된 이 사건은 자신의 생각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저는 먼저 가정을 돌아보았습니다. 저는 그때까지 제 중심적으로 동역자를 생각해왔습니다.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했을 때 '나는 자격 있는 가정 교회의 머리다.‘라고 자처해왔습니다. 그 당시 Sarah 선교사는 간호사로 근무하면서 아이들을 키우고 가사를 돌보며 예배와 합심 기도, 심방 등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도대체 무엇을 했습니까? 제가 제 관점을 떠나 Sarah 선교사 편에서 제 자신을 바라보았을 때 저는 그의 동역자로서 낙제감이었습니다. 그런데도 Sarah 선교사는 저로 인한 모든 수고를 감당하고 하나님 역사를 섬겨왔던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관점을 바꾸어 생각했을 때 '아, 정말 Sarah 선교사를 마음을 다해 사랑하자!'하는 심정이 솟아났습니다. 그래서 동역자에게 말했습니다. "Sarah, 내가 만일 죽어 다시 태어난다면 그리고 또 결혼하게 된다면 나는 꼭 당신과 결혼할거야." 말 수가 적은 제 동역자는 당시 아무 말 없이 듣고만 있었습니다. 그러더니 얼마 후 ”나도 그렇게 하겠어요." 하고 고백하였습니다. 이후 하나님께서 제 가정을 더욱 축복하사 두 자녀를 더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Heidelberg 대학의 약화학 실험실의 좋은 직장에서도 근무하였습니다. 약 10년 가까이 근무한 후에는 Full Time으로 사역을 섬겼습니다. 4년 전 계승을 하고 이제는 1:1 성경선생으로 사역하고 있습니다. 2. Heidelberg의 역사보고 독일 학생들은 대부분이 진실하고 인간적인 기초도 견실하여 훌륭한 지도자 감들입니다. 그러한 독일지성인의 성경선생으로 부름 받은 것은 무척 감사하고 영광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이 사명이야 말로 전 생애를 바쳐 감당할만한 가치가 있어 보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난공불락의 성 같았습니다. 실제로도 몇 년이 지나도록 한 사람의 제자도 키울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수 년 동안 선교생활의 큰 아픔이 되었습니다. 때문에 열매만 맺게 된다면 선교생활의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소원하던 대로 제자를 세워갈 수 있었지만 그 과정도 나름대로의 어려움이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1986년 Reiner형제를 만나 말씀공부에 초대하였습니다. 마가복음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는 배우고자 하는 열망에 불타 제 입에서 나오는 마지막 한마디까지 놓치지 않고 받아 적어가며 열심히 말씀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까지 모든 양들이 남지 않고 가 버렸기 때문에 그 또한 남는 자가 되리라고는 생각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계속 왔고, 그래서 성경 공부가 계속되었고, 그리고 그것은 매번 네 시간씩이나 걸렸습니다. 저는 두 시간을 공부하고 나면 체력이 딸려 '잠깐만 쉬자."고 제안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5분 정도 맨손 체조를 하고 다시 후반전에 도전하곤 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그와의 오랜 성경공부와 동역의 시작이었습니다. 공부를 시작한지 얼마 안 됐을 때 그와 제 가정의 여러 해 동안 계속되는 공동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식사시간이 되었습니다. 분명히 시간을 알려 주었는데 그는 방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칭얼거리는 아이들을 달래며 그를 기다렸습니다. 더운 음식이 식어 갔습니다. 드디어 그가 왔고 미안하다고 예의 바르게 사과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식사시간에도 우리 모두를 기다리게 했습니다. 더운 음식이 또 식었습니다. 기도 모임도 늦었습니다. 시계를 선물해 주었습니다. 그래도 늦었습니다. 물론 번번히 예의 바르게 그리고 정중히 사과했습니다. 그리고 또 늦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의 내면에서 여러 문제들도 노출되었습니다. 그와 같이 의식주를 나누고 성경 공부하며 계속 드러나는 약점을 감당했습니다. 그외에도 저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의 내면에 깊이 잠재되어 있는 문제까지 도전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호소, 권면, 책망, 훈련 등 모든 것을 동원해야 하는, 길고 치열한 씨름이었습니다. 더욱 심각한 위기가 대두되었습니다. 이번에는 제 편에서였습니다. 몇 년이 지나자 열심히 가르치고 큰 감동으로 배우던 그 풍성하던 성경공부는 이미 서로 잘 알고 있는 내용을 묻고 답하는 상투적인 공부로 변질되었습니다. 그는 우등생답게 이해력이 탁월했습니다. 그와 성경공부를 하고자 마주 앉으면 그의 표정은 “당신이 가르치는 내용은 이제 전혀 새롭지 않아. 이미 다 알고 있어.”라고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성경공부는 마치 여러 날 된, 맛이 가고 식어버린 밥상을 제공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한 성경공부를 끝내고 나면 “너는 자격 없는 성경선생이야.”하는 고소가 제 마음을 파고들었습니다. 나름대로 준비하였으나 식상한 음식으로 채워진 밥상 같은 성경공부는 쉽게 개선되지 않았습니다. 이 한 사람을 가르치는 데 진이 빠지고, 그리고 그 사람의 내면의 문제도 해결이 안 되는 데, 게다가 내 한계까지 노출되니 이러한 목자생활을 도무지 어떻게 계속 할 수 있단 말인가! 도저히 변화될 것 같지 않은 그의 에고, 저의 상투적인 성경공부, 이 절망의 이중주는 저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었습니다. 그러던 끝에 저는 그 때 그 때의 성경 본문을 들고 하나님께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점차로 저 개인의 기도는 하나님과 마치 1:1 성경공부를 하는 시간같이 되었습니다. 기도 중 배우고 깨달은 것을 쪽지를 꺼내어 적기 시작했습니다. 적는 분량이 점차로 많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 후부터 기도시간에 아예 수첩과 필기도구를 준비하여 나가게 되었습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차츰 본문의 의미들이 제 심령에 전달되었습니다. 그것은 제 생각의 한계를 초월하는, 지식 이상의 것이었고, 제 심령을 뜨겁게 하였습니다. 그러면 저는 뜨거운 가슴으로 성경공부를 인도할 수 있었습니다. 33년 전부터 오늘날까지 이렇게 여러 모양으로 그와의 성경공부가 계속되었습니다. 저는 과거 Reiner목자 한 사람을 위한 제 삶이 의미 없이 소모되는 듯했습니다. 그의 습관과 내면문제들이 속 시원하게 해결되지 않는다고 생각되어 더욱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33년 전의 그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어떤 책임을 지우기엔 불안해 보였던 한 청년이었는데 이제는 마치 오랜 시간 섬세하게 조각된 보석 같은 인내심, 온유함, 포용력, 충성심 등의 빛을 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생물학 박사인 Brigitte 목자와 가정을 이루고 세 아들을 키우는 훌륭한 가장이 되었습니다. 그는 직장에서도 유능함을 인정받아 Manager로 승진하였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그를 Heidelberg UBF의 믿음의 조상으로 사용하셨습니다. 그는 실제적인 축복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그가 목자로 세움 받을 당시 두 여학생도 1:1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서로 이름도 같고, 또한 같은 법학을 전공하고 있던 Birgit Pierce, Birgit Steller 두 자매였습니다. 거칠 것 없이 자존심이 세고 똑똑한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될 것이라고는 도저히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Reiner가 변화되어 목자가 되자 놀랍게도 이 두 자매도 그를 따라 목자의 부르심을 영접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중 Birgit Pierce목자는 Chicago에 선교사로 파송되었습니다. Reiner목자 자신은 의대생이었던 Markus Abel과 성경공부를 시작하였습니다. Markus도 이제 목자가 되고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의사로 근무하며 Maria선교사와 가정교회를 이루었습니다. 또 이 Markus목자가 Martin Ziegler이라는 신입생을 피싱하여 그가 변화되고 지금은 그 또한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고 지극히 충성스러운 목자로 동역하고 있습니다. Reiner목자는 말하자면 영적인 손자까지 본 셈입니다. 그리고 주일 말씀을 섬겨 은혜를 끼치고 있습니다. 그의 가정교회는 이로 자족해 하지 않았습니다. 여러 양들을 1:1로 꾸준히 섬기면서 Toni와 Simona 두 사람을 목자로 세웠습니다. 또한, 계속 성장해가는 그들의 요회를 뒤에서 충성스럽게 섬기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Reiner목자는 금년 독일의 지부장으로 부름 받고 독일 전체 역사를 섬기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에 힘입어 현재 Heidelberg UBF에서는 10여 가정의 선교사 가정을 포함하여 50명 정도의 주일집회를 이루고 있습니다. 제게 “자기 부인”의 복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또한 지난 33여 년간 저를 Reiner목자의 성경선생으로 쓰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한마디: 자기를 부인하고 또 한마디: 33년간 Reiner의 성경선생으로
410 no image UBF 개척사(김모세) 파일 [1]
[레벨:20]인금철
914 2008-04-07
UBF의 초기 개척의 산증인이신 김모세 목자님이 며칠 전 소천하셨습니다. 70이 넘으셨음에도 스탭 미팅 후에 저희 젊은 목자님들과 어울려 족구하실 때, 때론 넘어지기도 하시고 강스파이크를 온 몸으로 막아내시던 열정적인 모습을 기억합니다. 쓰러지시기 전 날 차로 목자님을 모셔드린 것이 제가 본 목자님의 마지막 모습입니다. 언제나 말이 별로 없으셨지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따뜻함과 인자함으로 섬겨주시던 모습이 선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한 길을 달려오신 그 인생을 생각할 때 참으로 감동이 되면서도 마음이 너무나 아픕니다. 귀한 종의 믿음의 증언을 기억하고자 최근 독일 학생 수양회에 가셔서 발표하셨던 UBF 개척사 강의안을 올립니다. 동역자님들과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 UBF 개척사 강의 초기 UBF 조상들의 복음 신앙과 선교 정신 디모데후서 2:3,4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군사로 다니는 자는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15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 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사도행전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 안녕하십니까? 저는 한국에서 온 김모세 목자입니다. 피터 장 선교사님으로부터 개척기 역사에 대해서 전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준비를 했으나 시간이 충분하지 못해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이 점 이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 시간 우리는 개척기 UBF 조상들의 복음 신앙과 선교 정신 그리고 그들의 삶과 비전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배우고 각성하여 우리 중에 이루어 오신 하나님의 축복된 역사를 감당하고 잘 계승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시대적 사명을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 시대적 배경 하나님께서는 방황하는 한국 캠퍼스 지성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이사무엘 선교사님과 배사라 선교사님을 세우셔서 캠퍼스 복음역사를 시작하였습니다. 1961년 9월 1일 광주시 대인동 176-1번지에서 전남대와 조선대를 중심으로 UBF 학생복음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제 UBF 운동이 일어나게 된 시대적 배경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36년 동안 식민 통치를 받아오다 1945년 연합군의 승리로 일본이 패망함에 따라 해방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해방은 되었지만 한국인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국토는 양분되었습니다. 북쪽은 소련의 영향을 받은 공산 정권이 들어서고 남한은 민주정부가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북한은 남한을 공산화하기 위해 일찍부터 전쟁을 준비하여 소련으로부터 지원받은 탱크들을 앞세우고 1950년 6월25일 남한을 총공격해왔습니다. 남한은 반격 한 번 제대로 못해보고 영토의 거의 전부를 점령당했습니다. 그러나 미국 등 16개국 군대로 구성된 UN군이 남한 군을 지워하여 공산군을 몰아내고 영토를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3년 후 비무장지대를 주심으로 휴전 협정이 체결됨으로 전쟁이 끝났습니다. 그러나 150마일 휴전선 양쪽에는 세계 어느 곳 보다도 긴장감이 높은 가운데 양방 군대가 대치상태에 있으며 총성없는 전쟁이 계속되고 동족상잔의 비극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독일은 동서독이 나뉘어 있었지만 전쟁이 있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3년 동안 계속된 전쟁으로 국토는 폐허가 되고 250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으며 1천만 명 이상의 이산가족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일부 공산군은 남한에 남아 게릴라화하여 오랫동안 남한 주민들을 괴롭혔습니다. 산간지대는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이었습니다. 어렸을 때 저는 제 마을에서 여러 번 공산게릴라와 경찰들 사이에 전투가 벌어져 탄환이 벽을 뚫고 들어오고 박격포탄이 마당에서 터지며 마을 거리에는 여기 저기 시체들이 널려 있는 모습을 보는 일이 많았습니다. 북한은 현재도 남한에 비해 경제사정이 열악하고, 많은 사람이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남한으로부터 많은 원조를 받으면서도 아직도 핵무기를 만들고, 생화학 무기들을 갖추고, 남한을 공산화할 기회만을 노리고 있습니다. 전쟁 후 남한은 위정자들이 부정선거로 정권을 잡고 장기집권을 하며 독제정치를 하여 1958년 4월19일 학생들의 의거에 의해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는 데모 만능 시대가 되어 거리는 데모하는 군중들로 메워지고 들어선 정부는 무능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1961년 군부 구데타로 더 혹독한 독제정치가 실시되어 악순환이 계속되었습니다. 이런 가운데서 대학생들은 갈 바를 모르고 방황하게 되었고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 있는 대학생들에 대한 상한 목자의 심정 때문에 UBF역사가 태동하게 된 것입니다. 이 때에 지금은 고인이 되신 이사무엘 선교사님과 당시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였던 배사라 선교사님이 동역하여 대학생 복음 운동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2. 불타는 목자의 심정 복음운동이 시작되어 학생들이 하나 둘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이사무엘 선교사님과 배사라 선교사님 마음 가운데는 절망하는 대학생들에 대한 목자의 심정이 불타올랐습니다. 이사무엘 선교사님은 절망하고 의기소침해 있는 지성인들에게 “어떤 희망을 줄 것인가? 어떻게 하면 미래의 주인공이 될 대학생들의 영혼에 생기를 불어넣을 수 있으며, 미래의 창조적 개척자들이 되도록 도울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을 위해 기도하며 성경말씀으로 도왔습니다. 그 후로 이사무엘 선교사님은 항상 오토바이를 타고 뒤에 전남대와 조선대를 심방하시며 친형제처럼 사랑하고 섬겼습니다. 오토바이 뒤에는 항상 자신보다 큰 형제나 자매가 함께 타고 있었습니다. 저도 이사무엘 선교사님의 오토바이를 가끔 타는 일이 있었는데 한 번은 제가 시골집에 가 있었는데 광주에서 20Km나 되는 그 곳까지 오토바이로 심방을 오셨습니다. 그리고 저를 뒤에 태우고 광주로 오는데 나무꾼과 부딛쳐서 제가 3m 아래 논바닥으로 떨어진 일이 있었습니다. 대학생들은 이사무엘 선교사님의 섬기는 모습을 보면서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 사무엘 선교사님은 고학을 하면서 전북대 철학과와 서울 장로회 신학교를 졸업한 후 박사과정을 하고자 하는 소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학생들을 위해서 그 꿈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대학생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섬세한 사랑으로 도왔습니다. 이런 그의 사랑과 가르침으로 많은 하나님의 종들이 탄생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UBF 역사를 말하면서 배사라 선교사님의 헌신과 사랑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는 아름다운 미시시피 강변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의 부모님은 큰 농장을 소유한 부자였고 유명한 분들이었습니다. 편지에 주소를 “37 Benoit Mississippi USA” 라고만 쓰면 전해졌습니다. 그 농장은 비행기로 씨앗을 뿌리고 농약을 살포했고 흑인 47 가구가 그 집에서 일하며 살았다고 했습니다. 그는 부잣집 외동딸로서 얼마든지 영화를 누리며 공주처럼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6.25 전쟁이 끝난 2년 후 폐허가 된 한국에 선교사로 오셨습니다. 그때 아직 25세를 넘지 않은 아주 꽃다운 미녀였습니다. 그는 한국대학생들을 위한 한 알의 썩는 밀알이 되셨습니다. 대부분의 미국 선교사들은 광주시 양림동 녹음동산 위에 하얀 집을 짓고 한국사람들을 고용하여 부리며 미국식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그는 단칸 셋방에서 연탄을 때고 김치와 된장국을 먹으면서 학생들과 함께 살며 섬겼습니다. 이 때문에 다른 미국 선교사님들로부터 왕따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배사라 선교사님은 콧대 높고 교만한 미국 사람이지만 자존심을 버리고 이사무엘 선교사님의 영적인 동역자요 비서로서 일했습니다. 그 분도 인간이기 때문에 스위트 홈의 꿈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불쌍한 한국 학생들의 영적 어머니요 목자가 되기 위해 결혼의 꿈도 버리셨습니다. 저희들은 처음에 그렇게 훌륭한 인간조건을 가진 분이 왜 결혼을 하지 않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은 결혼을 하지 않고 사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이해가 되지만 그 때 한국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한 번은 소기도회에서 결혼을 권고하는 결의를 한 일도 있었는데 그래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러한 그의 한국 대학생들에 대한 아름다운 사랑과 주님께 대한 헌신은 학생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특히 많은 자매님들이 자신의 꿈과 이상을 부인하고 헌신적인 목자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는 한국말로 그룹공부를 많이 섬기셨고 요한복음 영어 성경공부로 새벽과 오후에 섬기셨습니다. 영어 성경공부를 통해서 양들이 많이 퓌슁되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조상들의 목자의 심정을 믿음의 유산으로 계승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목자의 심정은 하나님의 마음이요, 우리 주님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다시 이 목자 심정을 회복하고 계승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3. 영적 지도자 양성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많은 문제들이 있었는데 이사무엘 선교사님은 이 모든 문제 가운데서 가장 큰 문제는 참다운 영적인 지도자가 없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참다운 영적인 지도자가 일어날 때에야 이 나라와 이 시대에 소망이 있다고 보셨습니다. 그는 참다운 지도자의 모델을 예수님에게서 찾았고, 사도 바울에게서 찾았습니다. 사도 바울의 신앙과 열정, 사명감과 개척 정신은 초대 교회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UBF조상들은 이러한 바울을 지도자 상으로 하여 배우고자 했으므로 자연히 우리 모임은 초대교회를 본받게 되었습니다. UBF가 지향하는 이러한 지도자 상은 UBF 선서문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군이다.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이 된다. 하나.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군이다. 하나님의 영광과 조국을 위해 자진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한다. 여기서 일꾼이 된다」는 후에 「기독교 인생관을 확립한다」로 또「하나님의 영광과 조국」은「성서 한국과 세계 선교」로 바뀌었고「우리」는「나」로 바뀌었습니다. 이 선서는 디모데후서 2:3절과 15절 말씀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UBF가 지향하는 지도자 상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같이 UBF가 지향하는 목적은 첫째, 대학 지성인들이 성경공부를 통해 기독교적인 인생관을 확립하고 더 나아가 하나님 앞에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 즉 지도자를 양성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영광과 조국을 위해 자진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할 수 있는 사명 인을 양성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목적으로 성경을 공부했기 때문에 성경 공부도 자연히 이론적이고 지식적인 공부가 아니라 말씀을 영접하고 순종하는 실천 신앙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이사무엘 선교사님은 학생들로 하여금 비범한 지도자들이 되도록 도우셨습니다. 1966년 1월 5일 기도회 때 전한 메시지에 보면 “크리스천의 역할은 시대를 위해 녹고 타는 데 있다. 우리가 무엇을 얻기 위해서 크리스천이 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주기 위해서 국가를 위해서 주님이 주신 지상 명령을 따르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UBF는 방황하는 시대 속에서 그들의 목적을 설정해 주고 나아가야 할 방향을 바로잡아 주어야 한다.” 특히 당시 대학생들은 미국을 무조건 동경하고 물질주의, 이기주의에 물들어 가고 있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국가적 부강을 추구하고 애국심을 강조하는 민족주의적인 경향이 없지 않았습니다. 제가 처음 나왔을 때 저도 이런 애국적 성향이 짙은 이사무엘 선교사님의 사상 강좌에 많은 매력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UBF는 결코 편협한 민족주의 운동이나 경제적인 운동으로 흐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조국』은 얼마가지 않아 『성서한국과 세계선교』로 바뀌었습니다. 우리나라가 축복받는 길은 『성서한국』 즉 하나님을 경외하고 성경을 사랑하는 백성이 되는 것임을 강조했습니다. UBF 운동의 첫째 목표는 이 나라 백성이 성경을 사랑하는 백성이 되게 하는 데 있었습니다. 사상 운동이 아닌 순수한 복음 운동으로 방향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그치지 않고 『조국』은 『세계선교』로 바뀌므로 Nationalism 에서 벗어나 『세계선교』라는 Universalism 으로 그 성격과 방향이 바뀌게 되었고 오늘날 UBF의 목표인 『성서 한국 세계 선교』라는 본궤도에 진입하게 되었습니다. 이와 더불어 성경 공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에 기초한 영적 각성운동으로 그 성격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 사무엘 선교사님은 학생들에게 지도자로서 자아 인식을 시키고 영적인 지도자로서 자부심과 비전을 갖도록 도왔습니다. 이사무엘 선교사님은 그들이 내적인 깊이와 사상성을 가진 지도자들이 되기 위해 신앙의 용기를 갖도록 격려했습니다. 그래서 적당주의, 열등의식, 권위주의, 이기주의, 한국의 고질병인 시기심 등 병적인 내면 문제를 치료하기 위해 각 사람의 심령에 도전하였습니다. UBF리더들이 좁은 생각과 자아에서 벗어나 국제무대에 나아가 쓰임 받는 사람들이 되도록 하기 위해 성경 공부와 독서에 힘쓰도록 했습니다. 당시 소 위원 자격에는 학교 성적이 평균 B학점 이상이라야 했습니다. 더 나아가 모두 장학생이 되도록 독려했습니다. 특히 영어 공부는 필수였습니다. 당시 한국 사회는 가난하고 정치적 민주화는 요원하여 젊은이들이 비전이 없었습니다. 이런 시대적 상황 가운데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겨우 취직해서 자기 하나 잘 먹고 잘 사는 소시민이 되는 것이 꿈이었고 국가나 민족을 생각한다는 것은 요원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세계를 생각한다는 것은 더욱 요원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사무엘 선교사님은 UBF리더들이 넓게 생각하며, 또 조그마한 가능성만 보이면 믿음으로 도전하여 새 역사를 창조하는 지도자들로 키우고자 했습니다. 이를 위해 학생들이 시대에 대한 문제의식과 역사의식을 갖도록 하였고, 시대에 대한 목자의 심정과 사명감을 가진 지도자들로 성장하도록 도왔습니다. 이런 훈련은 시대에 대한 문제의식과 역사의식을 갖도록 하였고 시대적인 사명감을 가진 지도자들로 자라게 하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이사무엘 선교사님은 한 사람의 내면무제를 간파하시고 적절한 훈련을 줌으로 영적 지도자로 자라게 도우셨습니다. UBF운동은 디모데 후서 2:15절을 요절로 잡고 하나님께서 쓰시는 영적인 지도자를 양성하여 한국과 세계역사 흐름을 바꾸고자하는 복음운동이었습니다. 그 결과 지금보다 훨씬 더 먹고살기 힘들었는데도 진리를 향한 열정과 진심이 뜨거웠습니다. 시대에 대한 문제의식과 목자의 심정이 강렬했습니다. UBF 역사에 대한 주인의식을 가지고 열정적으로 헌신했습니다. 이는 마치 예수님께서 갈릴리 촌부들을 제자로 부르시고 영적인 지도자들로 키워 1세기 양들을 먹이고 세계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게 한 것과 같았습니다. 오늘날 UBF가 제자양성을 통해 본국 캠퍼스를 개척하고 세계선교를 이루게 된 원동력이 바로 초기 역사의 영적 지도자 양성에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4. 철저한 성경중심 UBF의 처음 명칭은 [대학생 성경 연구회]였습니다. UBF는 처음부터 성경을 읽고 연구하는 열정이 뜨거웠습니다. 이사무엘 선교사님은 이렇게 강조하셨습니다. “리더가 되려면 먼저 성경을 읽고 연구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너무나도 부족하므로 하나님의 교훈과 책망을 받아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함을 받기 위해 성경을 읽어야 하겠습니다.” 이사무엘 선교사님은 성경을 읽는데도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일년에 성경책 한 권씩이 어찌나 많이 성경을 읽었던지 성경책이 부풀어서 두 권만큼이나 크게 되었습니다. 1976년 시카고로 가시면서 다른 책들은 모두 한국에 남기고 가셨는데 10권이 넘는 부프른 성경책들은 가보라고 가지고 가셨습니다. 우리 모임이 시작된 것도 성경으로 절망 중에 있는 대학생들을 소생시키고자 하는 뜻에서 였습니다. 처음에는 질서 없이 무조건 모여서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것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우리 모임이 생명력이 충만한 것은 바로 이 깊이 있고 또 실생활에 적용하는 실제적인 성경공부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이 발전하여 나중에 [성경 기초 공부 문제집]이 나오게 되었고 또 자신이 받은 은혜를 서로 나누는 소감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당시 전남대와 조선대를 중심한 캠퍼스 개척과 성장은 이 Group Bible Study를 통해 이루어졌고, 66년도에는 팀수가 100개가 넘게 되었으니 역사가 얼마나 활발했는가 알 수 있습니다. 그 당시 센타에서의 말씀공부는 다양하였습니다. 요즈음은 양들이 요회나 주일 집회 때만 공식적으로 참석하고 주중에 한번 1:1공부를 하면 되지만 그 때는 날마다 센타에서 성경공부와 기도모임이 있었습니다. 이 때는 성숙한 리더들 중에서 말씀공부를 인도하였고 어떤 때는 요즈음 성경학교 식으로 이사무엘 선교사님의 요한 복음 강의라든지 서신서 등 특별강의가 있었습니다. 이상에서 살펴본 대로 우리는 참으로 다양한 방법으로 열심히 성경을 공부했습니다. 교회에서도 UBF하면 말씀이 있는 곳으로 인정하고 성경공부를 위해 사람들을 보낸 일도 있었습니다. 사실 저희 초기 목자들은 정식 신학교육도 받지 않고 Staff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다양한 말씀공부와 훈련으로 우리 모임은 말씀이 깊고 풍성하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런 훈련을 통해 목자들은 말씀의 종들이 되었습니다. 후에는 일용할 양식과 강의안들도 쏟아져 나오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학생시절부터 말씀을 연구하고 말씀대로 살고자 투쟁하는 가운데 절망과 의존심에 찌들었던 학생들이 변하여 목자가 되고 선교사가 되고 영적인 지도자들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세계선교로 방향을 잡게 된 것도 이 성경 공부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복음서 공부를 마칠 때마다 마지막장에는 항상 너희는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예수님의 세계 선교 명령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공부하고 순종하고자 했으므로 이 명령에도 순종하지 않을 수 없었고, 결국 세계 선교가 우리 모임의 목표가 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로 말씀의 은혜를 알게 하시고 또 순종하도록 도우사 이제 세계에 대하여 제사장 백성으로 귀하게 쓰시는 이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5. 간절한 기도 역사상 모든 학생복음운동은 소수의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그 시대를 위해 기도하는 모임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영국의 IVF도 건초더미에 모여 몇 사람이 기도함으로 시작되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소수의 영적 지도자를 양성할 목적으로 만든 소기도회에서 하는 중요한 일은 거의 대부분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소회는 1961년 여섯 명의 소위원들로 시작되었습니다. 이들은 점점 늘어나서 많을 때는 30 명이 넘어가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각 단과 대학별로 기도 모임을 만들고 모임 때마다 기도 제목을 나누고 함께 기도하였습니다. 소회를 비롯해서 모든 모임이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끝났습니다. 당시에는 12시부터 새벽 4시까지 통행금지가 있었는데 소회 모임을 갖고 기도하다 보면 12시를 넘길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면 통행금지가 해제되는 새벽 4시가 되기까지 빙 둘러앉아서 합심기도를 했습니다. 그 때는 둘씩 기도하는 일도 없었습니다. 몇 명이 되었든지 빙 둘러 앉아 모두 하는 것이었습니다. 수가 많아짐에 따라 기도 시간이 길어져서 어떤 때는 기도를 마치면 2 시간이 넘어가는 때도 있었습니다. 이때 기도하다가 코를 골며 자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기 차례가 되면 어김없이 깨어서 언제 코를 골았느냐는 듯이 부르짖으며 기도했습니다. 어떤 때는 캠퍼스에 퓌싱을 나가고 양들을 심방하고자 하는 데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기도하지 말고 나갑시다.” 라고 말하면 배사라 선교사님은 “바쁠 수록 더 기도해야 합니다.” 하고 붙잡는 것이었습니다. 기도하다가 심방을 못한 때도 많았고 퓌슁을 못한 때도 많았지만 그래도 역사는 왕성하게 일어났습니다. 역사는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 때는 이레 저레 기도를 많이 해서 눈을 감고 사는 때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1971년 여름수양회 때 이사무엘 선교사님은 10년 후인 1981년에는 나이아가라에서 200명이 모여 국제 수양회를 갖자고 기도제목을 제시하셨습니다. 이 때는 겨우 미국에 3 명의 선교사가 파송된 때였습니다. 너무 기도제목이 황당한 것 같았습니다. 될 것 같지 않아서 반신반의한 믿음으로 10년 동안 줄기차게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기도도 응답해주셨습니다. 제가 1981년 나이아가라 수양회에 참석한 일이 있었는데 220 명이 참석하여 수양회를 했습니다. 그 때 처음으로 독일에서 있었던 수양회도 참석했습니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대학생들이었기에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기도 밖에 없었습니다. 그야 말고 맨주먹으로 일해야 했으므로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할 뿐이었습니다. 사실 기도처럼 힘든 노동도 없습니다. 신앙생활 가운데서 가장 고된 것이 기도입니다. 우리는 양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물론 개척 지구를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당시 우리의 선교목표였던 동남아와 그리고 세계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김한옥 선교사를 제주에 파송하고 난 후에는 매일 부르짖으며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서울을 개척할 때에는 기도지원과 동시에 많은 편지로 지원했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기도했을 때 개척하기 시작한 지 불과 5년만에 제주, 전주, 대전, 대구 등 지방 4개 지구를 개척하게 되었습니다. 저희들의 세계선교 기도는 동남아를 위해서 기도하는 데서 시작하였습니다. 동남아 선교는 이뤄지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대신 독일, 미국에 선교의 문을 열어주셨습니다. 6. 한 사람을 세우는 역사 UBF역사는 처음부터 무리 중심의 역사가 아니라 한 사람을 인격적으로 돕고 세우는 역사였습니다. 소회 때에도 한사람이 결석하면 소회를 중단하고 그를 심방하여 데려와서 소회를 시작하였습니다. 또 소회는 만장일치제였습니다. 예를 들어 신임 소위원을 추천할 때에도 한사람만 반대해도 부결되었습니다. 또 캠퍼스를 위해서 기도하면서도 우리는 늘 한 사람의 조상을 세워 주시도록 기도했습니다. 당시 가장 큰 기도 제목도 한 사람의 주인을 허락해 주시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전남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전창선(전요한 목자)형제를 조선대학교에서 김관옥(본인)형제를 세워 주셨습니다. 전창선 형제는 UBF가 시작된 이래로 한 번도 결석한 일이 없었습니다. 뿐 아니라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양들을 깨워 보통 4, 5 명씩 데리고 나왔습니다. 전요한 목자님은 함께 의과대학을 다니던 정규해 형제(현재 시카고 선교사)를 한 집에서 데리고 살면서 도왔습니다. 이러한 그의 사랑으로 인해 당시 전남 의대 정원이 80명이었는데 60명의 학생이 센타에 나와 말씀공부 했습니다. 그는 또 항상 섬기는 자세로 살았습니다. 그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신발정리, 의자 정리 등 마치 수위처럼 일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 한 사람을 세우기 위해서 25년 동안이나 그를 키우셨습니다. 전요한 선교사는 언젠가 이렇게 말한 일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이 모임을 떠나고 이사무엘 선교사님과 배사라 선교사님이 이 모임을 떠나더라도 나는 최후까지 남은 자가 될 것입니다.” 그는 이사무엘 선교사님이 1976년 세계선교를 위해 미국으로 가셨을 때 내과의사직을 버리고 한국 대표 직분을 맡게 되었습니다. 30년 까까히 한국역사를 섬기고 지금은 배사라 선교사님에 이어 시카고에서 세계 대표직분을 감당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3년 동안 많은 무리보다도 12제자들을 집중적으로 키우셨습니다. 오늘날도 새롭게 개척되는 지구에서는 항상 아브라함 한 사람을 세워주시도록 기도합니다. 또는 마리아 한 사람을 세워주시도록 기도합니다. 이 때 아브라함이 되지 못한 사람은 섭섭한 생각을 갖기 쉽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조상을 세우는 일은 아주 중요합니다. 무리는 어려운 일이 닥치면 바람에 날리는 겨와 같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광주에서 UBF가 개척되어 수백 명이 센타에 나왔고 성탄 예배 때는 800 명이 참석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까지 남아 있는 사람은 7명 이내입니다. 이 점에서 1대1 역사는 아주 중요합니다. 한 사람의 지도자를 키우는 것이 바로 그 시대를 살리는 길이요, 세계를 살리는 길입니다. 1대1사상은 우리가 늘 간직하고 실천해야 할 중요한 사상입니다. 저는 광주에서 20 Km 쯤 떨어진 아주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부모님들이 신자들이셨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교회는 나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또한 집안 형편이 가난해서 정상적으로 진학하지 못하고 대학은 4년이나 지각하여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정상적으로 진학하지 못해 마음이 몹시 슬펐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거기에는 하나님이 뜻이 계셨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가 정상적으로 진학했다면 저는 1961년 봄에 대학을 졸업하고 떠났을 것이므로 UBF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저를 UBF역사에 쓰시고자 4년 늦게 대학에 갈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1학년 때부터 개척역사에 쓰임 받게 된 것입니다. 제가 진학해서 2학기가 시작될 때 UBF역사가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UBF를 통해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고 인생의 의미를 찾게 되었고 제가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할 것인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에는 산으로 둘러싸 인 가난한 농촌에서 살았기 때문에 우물안 개구리와 같이 큰 꿈을 가질 수 업섰습니다. 새마을 지도자가 되고자가 되어 잘 사는 농촌을 만들고자 하는 소박한 꿈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덴마크의 달가스나 그룬드비히 같은 사람을 연구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대학에 와서 UBF를 통해서 학생 복음 운동과 세계선교를 위해서 살기로 바뀌어졌습니다. 우물 안 개구리가 세계선교 비전의 사람이 되었으니 얼만 큰 축복입니까? 저는 조선대 개척을 위해서 열심히 뛰었습니다. 학생시절에는 열심히 뛰다가 몸살이 나서 눕는 때도 많았습니다. 제가 4학년이 되었을 때는 조선대에 17개의 성경공부그룹이 생기게 되었고 1주일이면 리더모임 등을 포함해서 22개의 모임을 참석하고 있었습니다. 학생 때 군대에 갔다면 16개월만 복무하면 되었지만 개처역사를 섬기기 위해 대학을 졸업하고 입대하여 30개월을 복무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는 바로 스탭 목자가 되었고 군대에 복무하는 기간을 제외하고는 지난 48년 동안 UBF를 떠나본 일이 없었습니다. 그 동안 서울에 있는 중앙대 개척역사에 쓰임받고 지금은 한국 UBF 본부에서 사무총장 일을 섬기고 있습니다. 쓸모없는 인생을 살다가 갈 자를 하나님의 귀한 역사에 쓰임받게 하신 것을 인하여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7. 주인 정신 초기 UBF는 주인 정신을 심고자 애썼습니다. 처음 센타에 나오면 자기를 소개할 때 오른 손을 들고 󰡒내가 주인이다!󰡓하고 선서를 먼저 하였습니다. 그리고 여러 면에서 주인의식을 심었습니다. 모임에 나오는 사람들을 분석해보면 주인의식을 가지고 참석하는 사람과 손님의 자세로 참석하는 사람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주인의식을 가진 사람은 항상 모임이 시작되기 전에 와서 청소도 하고 의자도 놓고 환경을 이룹니다. 또 앞자리에 앉습니다. 그러나 손님의 자세로 참석하는 사람은 항상 모임이 시작된 후에 와서 뒷자리에 앉았다가 모임이 끝나기가 바쁘게 사라집니다. 그런 사람은 모임 가운데서 어떤 역사가 일어나고 있는지 잘 알 수 없습니다. 주인의식이 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잘 알 수 있고, 진정한 기쁨도, 아픔도 맛볼 수 있습니다. 믿음도 성장합니다. 하나님은 주인의식이 있는 사람들을 쓰셔서 그의 역사를 이끌어 가십니다. 우리가 한 모임에 대해서 주인의식을 가질 때 그 모임의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UBF는 세계에 대해 주인의식을 가졌고 상한 목자의 심정을 가졌기 때문에 오늘날 90개국에 1,600 명이상의 선교사를 파송하게 된 것입니다. 이 사무엘 선교사님은 자주 사도 바울의 주인의식을 배우도록 가르쳤습니다. 사도 바울은 비록 약소국의 청년이지만 강대국 로마에 대한 주인의식과 책임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사무엘 선교사님은 우리가 비록 현재는 힘이 없고 우리 사회가 여러모로 힘든 환경에 있지만 이 시대 강대국 로마를 향한 지도자로서의 자부심과 영적인 권위와 자격을 갖추는 데 힘써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소회모임은 주인의식을 심는 좋은 훈련장이었습니다. 당시 모든 결정은 소회에서 이루어졌는데 소회에서는 열띤 토의를 해서 결정하고 결정된 사항은 모두가 주인의식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동참하였습니다. 우리는 캠퍼스에 대한 주인의식을 가지고 기도했고 캠퍼스 복음화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또한 나라에 대한 주인의식을 심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힘없는 민족이었으므로 우리 민족에 대한 자부심을 갖기가 어려웠고 더구나 내가 이 민족의 주인이며 이 민족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을 갖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이 사무엘 선교사님은 우리 민족에 대한 주인의식을 심기 위해 끊임없이 성경을 통해서 한국 민족의 영적인 문제를 지적하고, 우리 속에 있는 한국 민족의 문제를 극복하도록 훈련했습니다. 또한 동남아에 대한 주인의식을 심었습니다. 우리는 처음에는 세계선교는 감히 생각할 수도 없어서 동남아 선교를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우리는 동남아의 주인이다.󰡓라는 구호를 외치며 주인의식을 가지고 기도했습니다. 이 믿음이 점차 커져서 이제는 세계에 대해 주인의식을 가지고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세계에 대해 주인의식을 가지고 기도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세계를 우리 손에 맡기셨고 UBF를 통한 세계선교 역사를 이루어가고 계십니다. 이 시대는 날이 갈수록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이 되어갑니다. 우리가 더욱 이 시대에 대해서 주인의식을 가지고 Campus개척과 세계선교를 위해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기도를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8. 주는 정신 예수님은 날 저문 빈들에서 많은 무리들을 부담스러워 하고 있는 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아무리 어려운 형편에 처해 있을지라도 그들이 양떼들에 대한 주인의식을 갖고 먹을 것을 주는 자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주는 삶’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두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행20:25) 당시 우리나라는 받는 것에 익숙해 있었습니다.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들로부터 많은 원조를 받으면서 우리는 얻어먹을 수밖에 없는 백성이라는 생각이 박히게 되었습니다. 이런 시대에서 우리 민족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 UBF는 『주는 정신, 주는 생활』을 하고자 몸부림을 쳤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도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주님의 말씀을 영접하고 주는 생활을 실천하여 자비량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을 포함한, 한국교회는 받는 정신이 충만해 있었습니다. 복음도 받고, 선교사도 받고, 구호물자도 받고, 사랑도 받고, 위로도 받고, 받고자하는 거지 근성에 찌들려 있었습니다. 이사무엘 선교사님은 “우리도 문둥이 같이 오그라진 손을 펴서 주는 자가 됩시다.” 하고 구호를 외치며 주는 운동을 벌였습니다. 다과를 먹을 때도 옆 사람에게 과자를 주며 “주는 자가 됩시다.” “주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하며 구호를 외쳤습니다. 사무엘 선교사님은 학생들에게 어찌하든지 주는 삶을 살며 주는 정신을 심고자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물질 자립을 위해, 선교헌금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특히 거지근성과 의존심을 철저히 뽑고자 주는 생활을 훈련했고, 이를 위해 선교사업에 힘썼습니다. 주는 생활을 위해서는 세계선교를 위해 헌금하는 것을 가르쳐야 했습니다. 처음에는 가난한 학생들이 헌금을 하지 않는 것은 당연시되었습니다. 그래서 입을 열어 헌금하자는 말이 나오지 않았지만 우리가 세계를 먹이는 주인들이 되기 위해서는 주는 정신을 가르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주도에 선교사를 파송하면서 헌금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한 사람 두 사람 동참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어떤 사람은 차를 타지 않고 걸어서 학교를 다니고 차비를 아껴서 헌금을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헌금을 위해서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피를 팔아서 헌금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진심을 드리고 헌신적으로 주는 생활을 실천하고자 노력했을 때 나중에는 제주도를 개척할 뿐 아니라 전주 대구 대전 등을 개척해나갈 수 있었습니다. 대전을 개척할 때의 일이었습니다. 이사무엘 선교사님은 어느 날 광주센터의 문짝을 모두 뜯어 용달차에 실어 대전으로 보냈습니다. 이를 본 한 형제는 형제들과 아무런 의논도 없이 문짝을 뜯어 보낸다며 화를 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는 생활의 좋은 귀감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각 지구에서 자립역사를 이루며 힘차게 세계 선교를 감당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주는 정신과 믿음이 그 기초가 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구제사업을 통해서도 주는 정신을 실천했습니다. 성탄 때마다 양로원과 고아원을 찾아 구제하였고, 또 당시에는 걸인들이 많았는데 음식을 만들어 이들을 초청하여 잔치를 벌이기도 하였습니다. 이 구제사업은 점차 커져서 나중에는 방글라데시, 에티오피아, 멕시코, 소말리아, 북한 등을 위해 헌금하고 모금도 하였습니다. 원조 받던 미국에 선교사를 파송하고 센터를 얻기 위해 헌금하여 보냈습니다. 형제들은 미국을 돕는 것에 기쁨으로 동참했습니다. 그것은 우리 민족이 이제까지 미국의 원조를 의지하던 데서 주는 역사, 아낌없이 헌신하는 역사, 그리고 우리나라를 넘어 세계를 위해 주는 역사로 바뀌는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오병이어, 시간과 진심과 물질의 오병이어, 선교사 파송의 오병이어를 받으시고 넘치게 축복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하여 90개국에 선교사를 파송하심으로 세계에 대하여 제사장 나라로 쓰시고 계십니다. 또 외국의 원조를 받기만 하던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도 부강해져서 다른 나라를 원조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9. 군인정신 UBF 정신에서 군인 정신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이 군인정신은 UBF의 내면에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소위원 선서문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군이다.” 하는 내용이 두 번이나 반복됩니다. 즉 UBF man은 하나님의 영광과 성서한국과 세계 선교를 위해 싸우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군이라는 것입니다. 이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싸움이 아니라 사단과의 싸움이요, 죄와 싸우는 영적인 싸움입니다. 이 싸움의 궁극적인 목표는 이 땅에 복음 전파를 통한 하나님 나라 건설에 있다고 할 것입니다. 이 사무엘 선교사님은 끊임없이 군인 정신을 강조하였습니다. “군인이 된 자는 자기 일에 메이지 않고 여러 가지를 절제해야 하듯이 우리들은 영적인 군사로 모집한 예수 그리스도를 총사령관으로 모시고 충성해야 합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능력을 덧입고 양들의 강퍅한 심령에 예수님의 사랑을 심어야 합니다. 또한 이민족이 참된 자유를 소유하는 민족이 되기 위해 군사로서의 임무를 다해야 합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모임은 초창기부터 주님의 십자군으로서 분명한 자부심이 있었고 그리스도의 좋은 십자군이 되고자 부단한 훈련을 받았습니다. 제가 군대에 가서 많은 훈련을 받았는데 UBF 훈련은 군대 훈련보다 좀 더 센 것 같았습니다. UBF에는 ‘훈련’, ‘투쟁’, ‘정복’이라는 전투적인 용어들이 많습니다. ‘양식 훈련’, ‘메시지 훈련’, ‘소감훈련’, ‘장막 훈련’, ‘말씀 투쟁’, ‘기도 투쟁’, ‘소감 투쟁’, ‘1대1 전투’라는 등 많은 영적인 훈련을 받았습니다. 또한 개척 역사를 감당할 때는 캠퍼스 정복, 동남아 정복을 기도 제목으로 내세우며 끊임없이 기도의 싸움을 싸웠습니다. 이 사무엘 선교사님은 자신을 장차 장군들이 될 사관생도를 훈련하는 육군 상사로 자처하시고 목자들을 끊임없이 훈련하셨습니다. 이 같은 초기의 강한 영적 훈련을 통해 지금의 UBF Staff들과 선교사들이 탄생되었습니다. 이사무엘 선교사님은 시카고에 가서는 야전군 사령관처럼 군복을 입고 군화를 신고 베레모를 쓰고 찦차를 타고 세계선교를 섬기기도 하셨습니다. 이 군인 정신을 잘 계승하여, 훈련을 사랑하고 파이팅 스피릿이 충만해야 하겠습니다. 이사무엘 선교사님은 훌륭한 훈련관이기도 하셨습니다. 그는 시카고에 있으면서도 한국에 있는 저의 문제를 제가 아는 것보다 더 잘 알고 훈련제목을 주시기도 했습니다. 저는 한국의 목자들 가운데 훈련을 많이 받기로 유명한데 때로는 제가 무슨 이유로 훈련을 받는 지도 모르고 훈련을 받고 있는 때도 있었습니다. 훈련이 없이 있는 그대로는 하나님께서 쓰실만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베드로도 많은 훈련을 통해서 예수님의 수제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저는 굴러다니는 바윗돌 과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광주 개척시절에는 『바위』라는 별명으로 불려지기도 했습니다. 제가 『모세』라는 이름을 얻기까지는 많은 훈련의 결과로 얻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한국에 있는 목자들 가운데는 모세라는 이름을 가진 자들이 많습니다. 훈련도 없이 함부로 모세라는 이름을 쓰고 있어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10. 공동체 정신과 소회 공동체 정신도 UBF의 특징 중의 하나입니다. 공동체 정신으로 인해 우리는 아름다운 동역을 이룰 수 있었으며 마음과 힘을 합하여 개척 역사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이 사무엘 선교사님은 하나되지 못하는 우리 민족의 고질병을 깊이 인식하고 하나되기 위해서 많은 힘을 기울였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동역과 합심으로 이루어지는 역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제자들에게 다른 어떤 말씀보다도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제자들이 이 말씀에 순종하여 합심하여 전혀 기도에 힘썼을 때 사도행의 놀라운 역사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이 사무엘 선교사님은 1966년 2월 5일 성경공부 시간에 공동체 정신에 대해서 이같이 말했습니다. “우리 한국사람들은 공동체 의식이 희박한 민족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마음을 합할 때 무거운 십자가도 가벼워 질 수 있습니다. 같이 울고, 같이 기도하고, 같이 일하는 곳에 참된 기쁨이 있습니다. 그러나 공동체가 파괴될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수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공동체를 파괴하는 것은 무서운 죄악입니다.” 우리는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 많은 애를 썼고 디트리히 본회퍼가 쓴 『신도의 공동 생활(Life Together)』은 소위원들의 필독서가 되었습니다. 같이 음식을 먹고 함께 운동도 했습니다. 주말이면 양림동 녹음 동산에서 야구, 배구 등 운동과 놀이를 하면서 함께 교재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요즈음은 족구로 체력을 단련하고 교제를 나눕니다. 시골에 갔다가 오는 사람들은 엿 등의 먹을 것을 가지고 와서 소회 때 함께 나눠 먹기도 했습니다. 특히 소위원들은 흉금을 털어놓고 깊이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슬리핑 펠로쉽도 많이 나누었습니다. 처음 소기도회는 전남대학에서 전창선, 김한옥, 김춘순, 정수일, 이철우, 그리고 조선대학에서는 김관옥(본인) 6 명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소기도회의 중요한 임무는 UBF의 당면 문제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고 또한 중요한 문제들을 의논하고 결정하는 일이었습니다. 소기도회의 결정은 만장일치제였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만 참석하지 않아도 회의는 열릴 수 없고 또한 어떤 의안에 대해서 한 사람만 반대해도 의결될 수 없었습니다. 언젠가 한 번은 고향에 간 한 사람이 눈이 많이 와서 교통이 두절되어 시작시간에 오지 못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개회를 하지 못하고 기도를 하고 있는데 50 Cm 이상의 눈길을 20 Km 이상을 걸어서 도착해 회의를 시작한 일이 있었습니다. 회의가 열리면 열띤 토론이 계속되었고 규칙이 아주 엄격했습니다. 나중에는 소기도회도 30 명 이상으로 늘어나게 되었는데 소기도회원이 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또 소기도 회원의 긍지도 아주 대단했습니다. 여러 차례 부결되는 아픔을 겪어야 될 수 있었습니다. 소기도회에는 회장과 부회장이 있었는데 회장은 회의를 사회할 뿐만 아니라 매일 쎈타에 나와서 양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기도해주고 때로는 심방을 하고 주인의식을 갖고 섬겨야 하기 때문에 아주 고닲은 일이어서 한 달 이상을 섬기기가 어려워 임기가 1 월이었습니다. 11. 개척정신 UBF는 처음부터 개척정신에 불탔습니다. 광주에서 캠퍼스 복음 역사가 시작된지 삼년 만에 전남대학교와 조선대학교 각 단과 대학과 교육대학이 모두 개척되었습니다. 1963년부터는 동남아를 개척하기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1964년 봄에는 전남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한 김한옥 자매를 동남아의 첯 관문인 제주도에 선교사로 파송하였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이는 역사적이며 큰 의미를 가진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많은 교계 지도자들을 초청해서 성대하게 파송예배를 드리고 배로도 갈 수 있는 가까운 곳이지마나 모든 형제 자매들이 공항에 나가 환송을 하며 비행기로 파송했습니다. 또 몇 달 후에는 전남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한 정수일 형제를 대구 개척을 위해 파송했습니다. 그런대 우리가 한국의 다른 도시들을 개척하고자 할 때 예상치 못했던 장애가 발생했습니다. 배사라 선교사님이 광주에서 학생복음운동을 시작하자 다른 도시들에서도 다른 선교사들이 학생복음운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흉내만 낼 뿐 적극적으로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다른 도시 대학들을 개척하려하자 영역침입이라고 하여 한국교회 목사들을 동원하여 가로막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개척역사가 한국 전국으로 확대되는 데에는 상당히 진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장애도 파죽지세로 뻗어가는 개척역사를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드디어 1966년에는 이사무엘 선교사님을 한국의 수도인 서울에 파송하여 서울을 개척을 시작하게 되었고, 역사의 중심이 광주에서 서울로 옮겨지고 전국개척의 교두보를 구축하게 되었습니다. 서울에 와서 한국의 일류대학인 서울대 개척에 도전하고자 서울대 가까이에 센터를 마련했습니다. 그곳에는 이미 여러 다른 학생운동 단체들이 서울대를 개척하고 좋은 건물들을 마련하고 해외 유학을 다녀온 쟁쟁한 일꾼들을 배치하여 개척을 시도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상당히 높은 지위에 있던 이사무엘 선교사님의 친구 한 분이 “서울대 개척은 불가능 하니 그만두는 것이 좋을 것이라”며 말렸습니다. 우리보다 훨씬 좋은 조건을 가진 사람들이 해 보려 했지만 모두 파리만 날리고 있다고 했습니다. 직장을 구해주겠다고도 했습니다. 그런대 하나님을 믿고 기도로 도전했을 때 서울대 개척은 아주 활발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센타는 양떼들로 메워졌고 많은 목자들이 배출되었고, 선교사들이 배출되어 세계선교에 귀하게 쓰임받게 되었습니다. 서울대 개척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던 분은 후에 우리 모임에 강사로 초청되었는데 서울대에 일어난 역사를 보고 한마디로 UBF 역사는 기적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불타는 자립정신과 개척정신을 귀하게 쓰시는 분이십니다.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하심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그 때 믿음이 부족해서 세계선교는 엄두가 나지 않아 동남아 선교를 위해서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동남아 선교는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이를 꼬투리로 독일에 문을 여시고 간호원 선교사를 파송하게 되었고, 미국에 간호사 의사 선교사들을 파송하게 됨으로 세계선교 역사를 이루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조상들의 불타는 개척 정신을 크게 축복하셨습니다. 12. UBF역사의 교회사적 의미 첫째로 하나님은 UBF를 통해서 한국을 제사장 나라로 쓰고 계십니다. 1961년 가난한 한국, 그 가운데서도 한국의 갈릴리 전라도 광주에서 시작한 이 역사가 지난 40년 동안 90개국에 1,700여명의 선교사를 파송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역사는 어느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신 역사입니다. 동시에 이 역사는 한국 기독교 역사의 한 획을 긋는 실로 기적적인 역사였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UBF를 들어 쓰셔서 한국을 제사장 나라로 쓰고 계심을 입증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임한 하나님의 놀라운 특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날까지 줄기차게 세계선교를 감당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나라도 크게 축복하셨습니다. 50년 전 만해도 한국은 세계에서 선교 제 1 대상국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미국 다음으로 선교사를 많이 파송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한국교회가 옛날에는 UBF를 별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요즈음은 많은 것을 배우자하고 특히 자비량 선교에 대해서 많은 정보를 제공해주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난 40년 동안 UBF 역사만 축복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도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크게 축복하셔서 국제 사회에서 국가 위상이 크게 증진되어 선진국 대열에 진입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주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에 순종하여 주는 역사를 이루고, 세계 선교를 통해 주님을 기쁘시게 할 때 하나님은 이 나라를 넘치게 축복하셨습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 UBF 조상들의 믿음과 선교정신을 얼마나 귀하게 쓰셨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결론: 이상에서 우리는 UBF 개척기 조상들의 복음 신앙과 선교 정신을 살펴보았습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신앙생활에 그리고 세계선교역사를 감당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기도합니다. 기도: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부족한 저를 이곳에 보내시고 촉기 개척기 믿음의 조상들의 개척역사를 증거케 하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부족한 것이 너무 많은 것을 깨닫습니다. 제가 이곳 형제 자매들의 문제를 잘 모르기 때문에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 알 수없습니다. 불필요한 것들은 다 제해주시고 필요한 것들만 간직하게 도우시고 이 강의가 이들의 믿음에 큰 도움이 되게 하시고 이들이 전 독일 캠퍼스와 유럽 캠퍼스와 세계캠퍼스 개척역사를 이뤄주시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렸습니다.
409 no image 스티브 세인트 선교사에 대한 기사
[레벨:20]인금철
49 2010-03-19
UBF에서 초청해서 토요일에 life-testimony를 듣게 될 스티브 세인트 선교사에 대하여 국민일보에 게재된 기사를 올립니다. ---------------------------------------------- 외부 세계는 그들을 아우카족이라 불렀다. ‘아우카’란 야만인이란 뜻으로 원래 부족 이름은 ‘와오다니’(Waodani)였다. 와오다니에는 백인 소년이 살고 있었다. 그에겐 친절한 아저씨가 언제나 동행했는데 소년에게 창던지기, 3m나 되는 화살총(blowgun) 쏘기, 창으로 물고기 잡는 법 등을 가르쳐 주었다. 소년이 다른 부족민을 만났을 때 아저씨는 그들에게 “소년도 우리 같은 사람들”이라고 소개했다. 미심쩍은 반응이 돌아오자 소년은 나무 위의 새를 창으로 잡았고 화살총도 보여줬다. 그제야 사람들은 경계를 풀었다. 아저씨는 놀랍게도 소년이 5세 때 아빠와 아빠 동료를 죽인 장본인이었다. 하지만 엄마와 다른 가족은 그를 용서했고 얼마 후 복음을 받아들여 가족과 화해했다. 소년은 그렇게 아저씨와 ‘화해의 동행자’가 됐다. 영화 ‘아바타’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이 광경은 남미 에콰도르에서 태어나 평생을 와오다니 부족과 함께 살아온 스티브 세인트(Steve Saint) 선교사(60)의 실제 이야기다. 그는 1956년 와오다니족에게 죽임을 당한 휘튼대 출신 5인 순교자의 한 명인 네이트 세인트(Nate Saint) 선교사의 아들이다. 베스트셀러이자 영화 ‘창끝’(End of the spear)을 썼던 세인트 선교사가 지난 13일 방한했다. 이날 세인트 선교사는 그동안 자신에 대해 알려진 사실 가운데 한 가지 오류가 있다며 말문을 열었다. “사람들은 당연히 제가 원주민들에게 세례를 주었다고 가정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와오다니 사람들이 제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순교한 선교사의 아들이 아버지를 죽인 사람에게 세례를 받은 것이다. 적어도 우리가 아는 선교의 ‘그림’대로라면 원주민들이 세례를 받아야 했다. 하지만 그런 그림은 없었다. 사연은 이랬다. 선친의 뒤를 이어 어머니와 고모가 선교에 나섰고 고모 레이첼 선교사는 와오다니인들을 말씀으로 양육했다. 세인트 선교사는 와오다니 교회 지도자에게 청소년 시절 세례를 받았다. 세인트 선교사는 이 같은 오해를 바로잡고 진정한 선교를 말하고 싶어 한국에 왔다고 했다. 선친 네이트 세인트 선교사는 44년 설립된 항공선교회(MAF·Mission Aviation Fellowship) 소속 선교사로 항공 선교 역사상 가장 뛰어난 정비기술자이자 비행사로 알려져 있다. 당시 정글 비행은 위험이 많아 고도의 조종 기술과 장치가 없이는 사고가 빈번했다. 세인트 선교사는 탁월한 기술을 이용해 정글 비행과 착륙에 알맞은 보조연료장치를 개발했고 정글 속에 사는 원주민들에게 물품을 전달하기 위한 장치인 나선형 운반기구도 창안했다. 5년 전 암 투병 끝에 82세의 나이로 별세한 어머니 매리 패리스 여사는 선교사가 꿈이었던 간호사 지망생이었다. 결혼하기 전 교회 집회에서 평생을 선교사로 살 것을 다짐했다. 세인트 선교사가 갖고 있는 선친에 대한 기억은 아련하지만 지금껏 잊지 못하는 장면이 있다. 비행기를 분신처럼 여기던 아버지의 모습이다. 아버지는 비행기에 페인트를 칠하고 정글에 착륙하는 다른 비행기의 안전을 걱정했다. 아버지는 영웅이었다. 아버지에게 비행술을 배워 언젠간 자신도 멋진 파일럿이 되고 싶었다. 그랬던 아버지가 더 이상 돌아오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의 꿈은 무너져 내렸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아버지의 피 값으로 와오다니 사람들에게 복음이 들어가고 화해를 이룬 것을 생각하면 아버지는 진정한 영웅이었다. 부모에 대한 무한한 존경을 머금으며 한동안 생각에 잠겼던 세인트 선교사는 “가족 이야기는 성경의 스토리”라며 “하나님 자신이 화해자가 되어 인간에게 오셨고 그의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인간이 가족이 된 바로 그 이야기”라고 말했다. 와오다니의 일원으로 살았던 그는 수혜자 입장에서 선교를 경험했다. 거기서 얻은 교훈은 이것이었다. 선교는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시키는 것을 하는 것이다. 와오다니 신앙 공동체에 변화가 있었다. 20년 전 와오다니 교회는 힘을 잃고 있었다. 미국교회의 지나친 관심 탓에 원주민 교회가 자생 능력을 상실하고 있었다. 북미의 많은 교회들이 선교라는 이름으로 장비와 재정, 기술을 투입했지만 원주민 교회에겐 독(毒)이었다. 하나님 대신 선교사에게 의존해 자립을 방해했다. 다른 부족을 향한 복음전파 활동도 위축시켰다. “선교사의 특징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주께로 인도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영적 자녀들을 주께로 인도했는가에 있습니다. 선교에서의 폐단(indictment)은 영적 자녀들이 그들의 영적 자녀를 낳지 못할 때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한국교회를 향한 애정을 솔직하게 표현했다. “세계에서 가장 열정적으로 선교사를 파송한다는 점에서 고무적입니다. 그러나 미국교회와 닮아 우려가 됩니다. 미국교회는 선교지에 ‘새우를 주는 대신 양념을 뿌린 새우빵’을 주었습니다. 당부하기는 한국교회가 이 같은 방식을 따르지않기를 바랍니다. 문화가 아니라 순전한 복음을 전하십시오.” 95년 아이텍(I-TEC)이란 비영리단체를 만든 그는 원주민 교회의 자립을 돕고 있다. 아이텍은 영적 자녀가 부재한 현실을 안타깝게 생각한 와오다니 크리스천의 아이디어에서 나왔다. 최근 ‘그의 길을 따라서’(쿰란출판사)를 펴내기도 한 세인트 선교사는 18일 오후 2시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 대강당을 시작으로 19일 여의도순복음교회, 20일 대학생성경읽기선교회, 21일 분당한신교회, 부천삼광교회, 군포제일교회 등에서 간증 집회에 나선다.
408 no image House church 특강 파일
[레벨:20]인금철
108 2010-11-09
407 no image 이여호수아 목자님 은퇴소감 파일 [2]
[레벨:20]인금철
108 2010-12-17
이번에 대전 쎈타의 이여호수아 목자님이 45년간의 목자 생활을 마치고 은퇴식을 하셨습니다. 초기 UBF의 살아 있는 역사라 생각되어, 목자님의 소감을 받아서 올려 봅니다. 우리에게 역사의식과 spirit을 배울 수 있는 좋은 글이라고 생각됩니다. ---------------------------------------------------------------------------------------------------------------------------------------------------------- 2010년 12월 12일 나의 은퇴 소감 내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 요절 : 고린도 전서 15:10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 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사도바울은 자신이 구원받고 주님의 사도가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이 큰 은혜를 헛되이 하지 않고자 주와 복음을 위해서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그것도 그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저도 시골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알지 못하고 영적 무지와 죄 가운데 방황하던 자였습니다. 이런 제가 구원함을 받고 목자가 된 것은 일방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감당하지 못하고 주님께 허물과 죄밖에 드린 것이 없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 죄인을 용서하시고 은혜를 베푸셔서 이날까지 하나님 역사에 쓰신 은혜를 감사합니다. 이제 저는 지난 45년의 UBF 스텦 목자 직에서 은퇴하는 이 자리에 섰습니다. 이 시간 주님께서 저의 지난 목자생활에 함께하셔서 쓰시고 배푸신 은혜를 돌아보고 다만 주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 부르심 저는 1939년 8월15일 제주에서 3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서 여섯 살 때에 전남 해남으로 이사하여 한 가난한 농부요, 유교 사상에 투절하신 부친의 영향을 받고 자라났습니다. 저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해남 중학교에 합격은 했지만 부모가 보내주지 않아서 시골에서 1년을 머슴들을 따라 산으로 나무하러 다니고 농사일을 돌봐야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결코 중학교 진학에 대한 꿈은 잃지 않았습니다. 이듬해 저는 광주로 올라와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61학번으로 전남공대 전기공학과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대학생이 입대하면 1년6개월을 복무하는 학보란 제도가 있었는데 저는 1학년을 마치고 입대하여 '63년9월에 제대 하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군 생활 동안 인생의 분명한 가치관과 목적과 방향이 없이 허무 가운데 몹시 방황하였습니다. 저의 선임자는 고민하는 나에게 자신의 간증을 통해서 불교를 믿으라고 권했습니다. 마음은 있었지만 현실적으로 절에 가서 도를 닦을 수는 없었습니다. 제가 제대 후 시골에 머물고 있던 어느 날 한 후배로부터 전도를 받고 그로부터 기독교 교본이라는 작은 책자를 받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책을 읽고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 하시고 무소부재하신 분이시고 우리가 기도하면 들어주시고 마음에 평안을 주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오후가 되면 습관적으로 뒷산에 올라가 검도 운동을 하고 생각에 잠기곤 했는데 만약에 하나님이 계신다면 이곳에도 계실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밑져 봤자 본전 식으로 한번 믿어보자고 결단했습니다. 그래서 주위에 보는 사람도 없으므로 혼자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계시면 제게 믿음을 주셔서 마음에 평강을 주시고, 남은 대학생활을 승리하여 장래에 출세하게 해주시라"고 유치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렇게 날마다 하루도 빶지 않고 기도 한지 두 달이 지나서 가을이 지나고 광주에 올라온 다음 날 '63년 11월30일 시립 도서관에 갔다가 거기서 전창선(전요한 목자) 도서관 친구를 만나게 되었고 피싱을 당했습니다. 저는 즉시 그를 따라 5분 거리의 센타로 가서 그의 소개로 이창우 선생(이사무엘 선교사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전요한 목자님의 소개를 받으신 이사무엘 선교사님은 저를 한참 보시더니 호주머니에서 성탄 티켙 한 장을 꺼내 제게 주시면서 "딱 한 장 남았는데 사흘 후에 있을 성탄 예배에 오라"고 초청해 주셨습니다. 저는 당장 그 다음 날 새벽부터 배사라 선교사님이 인도하시는 영어 성경공부에 참석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들어도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음 날 제가 기도할 차례가 왔을 때 더듬거리며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저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입이 있어도 말 못하는 자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계셔서, 이러한 저를 깨닫게 해주시고 믿게 해주시면 나 같은 자들에게 하나님을 전하겠습니다."고 기도했습니다. 저는 64년 2학년으로 복학 한 후 아직 하나님이 확실히 살아계신다는 확신도 없는 상태에서 공대 그룹 성경공부를 인도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라 수업시간에 속으로 만약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면 저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저에게 믿음을 주시고 말씀공부 인도를 도와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말씀공부에 은혜를 주셔서 성령 충만한 가운데 그룹공부를 인도하게 되었고 참석한 자들이 말씀에 은혜를 받고 변화되는 것을 보면서 점차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하고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2학년 때 켐퍼스를 개척하여 4학년 때는 2,30명대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 때 양 중에 뉴욕에 김바울 선교사, 남산에 이다니엘 목자, 찰스최 선교사, 뉴욕 콜롬비아 대를 개척하는 신사무엘 선교사, 광주1부 신아브라함 목자 등이 남은 자들이 되었습니다. 제가 4학년이던 '66년 6월5일 갑자기 서울에서 이사무엘 목자님과 베사라 선교사님이 내려오시더니 주말 수양회를 소집하셨습니다. 무등산 제일 기도원에서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사6:8)란 주제로 가진 주말 수양회 목적은 이사무엘 목자님 후임 목자를 세워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 저는 4학년 졸업반으로서 열심히 취직 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스텦 목자가 되기에는 자질이 부족한 자신을 잘 알았기에 스텦 지원에 응하지 않아도 내 양심에 아무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베사라 선교사님 메시지에 갑자기 "하나님은 우리의 목숨을 바칠 자를 원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두 번이나 사고로 죽을 번 한 적이 있었는데 구원받은 것과 이제는 영생을 선물로 받은 빚진 자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말씀이 끝나자 동역자들은 모두 나를 붙들고 기도원 뒷산으로 가서 저더러 목자가 되라고 권했습니다. 의대 졸업반인 정규해(정요셉선교사) 형제도 "남균아! 너랑 나랑 목자가 되자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목자가 되기로 결심을 하고 그날 밤에 정규해 형제와 함께 이사무엘 목자님을 찾아갔습니다. 우리 둘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저희 두 사람이 목자가 되겠습니다."하고 고했습니다. 이 때 목자님은 한참을 바라보시더니 "규해 너는 의사가 되고, 남균이는 스텦이 되라"고 방향을 주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저는 1966년6월5일 Staff 목자로 부르심을 입었고 졸업 후 계속해서 광주 역사를 섬기게 되었습니다. 저는 나같이 부족한 자를 목자로 세워주셨다는 부르심에 대한 은혜와 책임감과 열심히 있었습니다. 저는 새벽 4시부터 일어나 냉수마찰을 하고 기도하고 열심히 켐퍼스를 뛰어다니며 양들을 돕고 섬겼습니다. 그러다가 영적으로 빳떼리가 떨어지면 서울에 가서 재충전 받고 와서 또 다시 열심히 섬겼습니다. 그러나 스텦 목자는 열심만 하면 되는 학생 목자와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아직 믿음이 어린데다가, 말씀의 종이요 영적 지도자의 자질을 갖추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많은 영적인 훈련을 받아야했습니다. 2. 초기 훈련 받던 목자 시절 (67-76년6월) 저는 졸업 후 광주와 전주, 그리고 다시 광주로, 또 다시 서울을 거처 제주개척 역사를 섬기는 등 10년 동안은 그야말로 나그네 목자 생활로 연단의 기간이었습니다. 졸업 후 목자생활 첫해 67년도는 개척 조 상들의 헌신으로 큰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68년도에는 선교부와의 마찰과 대인동 센타 아래층 대인교회와의 마찰로 큰 사단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당시 UBF는 남 장로회 선교부 소속 학생 운동 단체로, 이사무엘 목자님이 서울로 가시자 전도사 한분을 책임자로 파송하는 정치적인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또 한 문제는 아래층 교회와의 건물 소유권 물질 문제였습니다. 하나님은 3개월 동안의 선교부와 교회와의 많은 진통 끝에 우리의 기도를 받으시고 UBF가 선교부의 울타리를 벗어나 자립적인 학생 복음운동 단체로 정착하게 하셨습니다. 센타 건물 문제는 우리가 많이 양보를 하고 금남로에 센타를 얻어 옮기므로 해결되었습니다. 이로써 UBF는 독립적인 학생 복음운동 단체로서 정체성을 가지고 새 출발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문제가 해결 된 후 '68,10월- 70,10월까지 2년 동안 전주 역사를 섬기게 되었습니다. 전주 역사는 제가 갔을 때 주일예배 80명에서 제가 떠날 때는 135명이 참석한 가운데 수양회를 가질 정도로 크게 성장하였습니다. 이 기간 동안 특히 전주 간호학교에 20명대의 큰 성령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이 때 자란 자매님들 중에 이정순 (홍보나 목자 사모)사모를 비롯해서 L.A Humbl yoo, 쾨른 육사라, 시카고 Rebeka Chung, Deborah Kim 선교사들을 비롯해서 6명의 자매 선교사와 뉴욕에 Uni Lee, Washington에 Moses Chang 형제 선교사들이 나왔습니다. 저는 '70년 10월에 다시 광주 목자로 이동 했고 '71년 2월에는 이연옥 사모와 믿음의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결혼한다고 서울에 왔다갔다하면서 역사를 제때에 돌보지 못한 사이 35명대였던 교대 양들 가운데 많이 힘들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다가 72년도 봄 스텦 수양회 때 힘든 역사를 섬기느라 누가복음 숙제를 제대로 해가지 못 한 것으로 훈련에 걸렸습니다. 저는 하루아침에 목자 직이 잘려서 Support 한 푼 받지 못한 채 6개월을 보내야했습니다. 저는 이슬비가 내리는 어느 날 오후 절망 중에 기도원을 향해 무등산 중턱을 오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도중에 눈을 들어보니 산 중턱에 선명한 무지개가 서있는 것이었습니다. 무지개를 보는 순간 노아 홍수 때 언약의 무지개가 생각나서, 저는 "아! 사람들은 나를 버렸지만 하나님은 버리시지 않으셨구나!" 생각하고 소망 중에 위로와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저는 6개월 후에 다시 복직이 되었고 1973년 3월4일 다시 제주 개척에 파송이 되었습니다. 저는 제주에서 시니어 사건이 나서 76.7월에 광주로 가기까지 3년 4개월 동안 동역 자 한 사람 없이 맨 땅을 개척하는 가운데 나의 성실과 의지를 깨시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믿음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가운데서도 안나에 이어 년년 생으로 옥균이와 에스라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런데 가장으로서 가장 힘든 훈련은 생활비 부족으로 인한 궁핍한 생활 훈련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를 통해서 저는 오히려 장차 상 주실 하나님을 바라보고 자유 함을 갖게 되었습니다. 제주 역사는 제주 교대에 송연옥 자매 한 사람을 변화 시켜 주셨습니다. 그녀는 키가 작아서 남들이 다하는 연애한 번 못 해본 운명적인 슬픔으로 인해 말이 없고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고 학교에서도 말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자매가 창세기 말씀 '심히 기뻐하신 하나님'을 영접하고 180도 변했습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전도를 하였습니다. 그녀의 작은 아버지는 주지 스님으로 골수 불교 집안이어서 부모의 핍박을 받아 두 달 동안이나 두 번씩 집을 나와서 숨어서 살아야했습니다. 그런 중에도 믿음의 중심을 지켰습니다. 그녀의 변화를 통해서 교대의 많은 양들을 보내주셔서 13명대 역사를 이루어 주셨습니다. 송연옥 자매는 제가 제주를 떠나 온 후에는 학생 총무로서 제주 센타 남은 자의 역사를 감당하다가 후에 김누가 목자와 결혼하여 김루디아 사모가 되었고, 제가 못 다한 제주대 제자양성의 큰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저는 '76년 4월 전국 스텦목자 모임이 끝나고 서울에 홀로 남아서 머리깎고 스타킹을 신고 다니는 힘든 훈련을 받게 되었습니다. 저는 고민 중에 성경을 읽던 중에 주님께서는 제게 베드로전서 5:5,6절 말씀을 주셨습니다.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저는 이 말씀을 붙들고 겸손히 목자님 방향에 순종하여 훈련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때 시니어 사건이 발생하였고 저는 훈련을 받다말고 제주에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그 후 2개월이 되었을 때 이사무엘 목자님으로부터 광주 목자로 가라는 방향을 받게 되었습니다. 3. 광주 목자로 쓰임을 받았습니다. (1976,7월- 2001년5월9일 까지, 24년) 제가 제주에서 광주에 가면서 먼저 서울에 들려 이사무엘 목자님께 인사를 하였습니다. 목자님은 저를 위해 기도해주시고 친히 저를 택시에 태워 서울 기차역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옥균 목자를 광주 목자로 세우셨구만!" 하셨습니다. 저는 광주의 어려운 역사를 감당할만한 아무런 영적인 힘이나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부족한 나를 광주 목자로 세우셨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제가 광주에 갔을 때 '76년의 시니어 사건의 여파로 광주 역사는 많은 양들이 흩어지고 주일 예배가 30명 정도 나왔습니다. 그러나 박종복(박엘리야 워싱톤), 이용근(이다니엘 쉬펜스버그) 충성스러운 두 목자들과 1년 동안 동역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광주 역사를 빠르게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던 중 '80년 5월초에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연약한 한 자매 목자가 사탄 마귀에게 사로 잡혔습니다. 발작이 심하여 학교도 휴학을 하고 사경을 해매이게 되었습니다. 제가 몇 목자들과 이 딸의 구원을 위해 금식하며 부르짖어 기도할 때 주님께서 기도한지 6일 만에 귀신을 완전히 쫓아내 주셨습니다. 그 후 5월에 있었던 무등산 주말 수양회 때는 큰 성령의 역사가 있어서 모두가 회개하고 울부짖는 기도소리가 온 무등산 계곡에 메아리쳤습니다. 그 해 144명이 참석한 여름 수양회 때는 큰 회개와 성령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 후에 양들이 많아져서 좁은 금남로 센타에서 산수동 넓은 센타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첫째, 건축역사 '83년도에는 시온성 세계선교 센타 건축 역사를 이루어 주셨습니다. 역사가 커가면서 금남로 센타가 비좁은데다가 해마다 오르는 센타 전세금을 위해 헌금해야했습니다. 이로 인해 79년부터 "광주 개척 20주년 기념 센타"를 건축역사를 이루고자 방향을 잡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3년이 지나도록 점점 건축 역사는 부진해갔습니다. 목자들은 결국 믿음이 없음을 깨닫고 학개서 말씀으로 이기적이 된 모습들을 회개하고 믿음으로 건축역사를 이루고자 결단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키사 총 공사비 1억8천만원의 넘치는 헌금 역사를 이루어 주셨습니다. 건축 기간 동안 뒷 집의 방해로 1개월이나 공사가 중단되기도 하였고, 시공 회사가 부도가 나는 등 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어려움 중에 기도하게 하시고 물질과 함께 기도로 건축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2년 동안 밤낮으로 드리는 기도를 받으시고 지하 1층 지상 2층에 200평의 아름다운 센타 완공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86년부터 많은 양들이 몰려와서 말씀 공부 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 센타를 건축하면서 저희 동역자들은 우리 평생에 한번 힘을 다해 하나님의 집을 건축 하자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10년 만에 더 크고 아름다운 조대 백악 센타 건축역사를 이루어 주셨습니다. 90년대가 되면서 조대 주일예배가 성장하여 200명대를 이루면서 미인정 3개 층 센타가 비좁게 되었습니다. 서로 기도실에 들어가려고 줄을 서서 기다리는 현상까지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이에 조대 센타 건축역사를 이루기로 결단하게 되었습니다. 공사도중 뒷집의 방해로 3개월 동안 공사가 중단되기도 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금식하며 눈물로 기도 할 때 사단의 궤계를 물리쳐 주시고 해결해 주셔서 200평 대지에 지하 1층 지상 3층으로 총 350평의 아름다운 조대 백악 센타 건축을 완공하게 되었습니다. 감사한 것은 총 건축비 9억6000만원을 전대와 조대 동역자와 형제자매들이 합심하여 자원하고 기쁜 마음으로 감당하여 아름다운 건축 역사를 단번에 이룬 것입니다. 이러한 합심의 역사는 하나님 앞에 아름답고 귀한 역사의 선례로서 광주 역사의 아름다운 전통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이룬 중흥동 전대 센타와 조대 백악센타 건축역사는 광주 역사 성장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둘째, 선교사 파송역사 : 광주는 80년대까지도 60명의 선교사 파송역사를 이루어 주셨지만 90년대 하나님께서는 더 활발한 선교사 파송역사를 이루어 주셨습니다. 지구촌 한 가족이라는 세계화 바람을 타고 많은 90여명의 선교사들이 파송되었습니다. 이 중에는 선교지에서 돌아온 사람도 있고 지금까지 선교지에서 충성하는 선교사님들도 계십니다. 셋째, 1990년대 부흥의 역사 1980년대 광주 켐퍼스 복음 역사는 조대 켐퍼스 가운데서 강렬한 이데올로기 사상 속에서 꽃피운 역사였다면, 1990년대 광주 켐퍼스 복음 역사는 전대 켐퍼스 가운데 만개하는 부흥기를 맞이하였습니다. 1980년대의 전대 캠퍼스 제자양성은 한 양에게 복음을 전하여 건져 올리는 낚시질 역사였다면 1900년대 역사는 그물을 내려 신입생들을 끌어 올리는 그물질 역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입생 윈터스쿨 역사였습니다. 1991년 겨울부터 목자들은 신입생 피싱 역사를 위하여 40일 작성 기도모임을 이루었습니다. 눈보라를 맞으면 새벽부터 오후까지 원서접수 기간 동안 전남대학교 체육관 원서접수장에서 네비게이토와 서로 경쟁하며 피싱 역사를 하였습니다. 대학입시시험 이후 할 일 없이 노는 예비신입생들을 위해서 컴퓨터, 영어, 기타반 등을 만들어 윈터스쿨을 개설하였습니다. 목자들은 밤늦게까지 편지와 전화로 신입생들을 초청하였습니다. 200명이상의 신입생들이 윈터스쿨을 신청하여 컴퓨터와 영어 등을 배우기 위해서 센터로 몰려왔습니다. 센터가 마치 학원처럼 신입생들로 북적거렸습니다. 이들은 MT 수양회를 통해서 말씀 관계성으로 이어졌고 계속해서 Part별 제자 양성 역사로 이어졌습니다. 한 개 Part는 3-4개 요회가 연합하여 이룬 큰 모임이었습니다. 이런 파트가 전대 가운데 5개가 있었고 각 파트에는 5명 (박마가, 이다윗, 김갈렙, 최베드로, 이디모데)의 파트장 인턴 목자들이 굳게 서 있었습니다. 이중 새부대 파트는 90명대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파트모임에는 항상 양들로 가득하였고, 파트모임 때면 10여명 이상의 양들이 소감을 써서 발표하는 바람에 목자들은 밤늦게까지 양들의 소감을 들어야 했습니다. 이와 같은 제자양성 역사로 매년 가을학기 추수 감사예배 때는 30-40명 이상의 양들을 목동 목자로 세우는 놀라운 제자양성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로 인해서 1999년에는 전대주일 예배역사가 분가해 나간 4부를 제외한 1,6부만 해도 290명대로 흥왕한 제자양성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1990년대 후반기 전대와 조대 전체 역사는 주일예배가 700명대에 이루었고, 전체 여름 수양회는 800명대, 광주 지구 연합 성탄예배는 1천명이 참석하는 역사를 이루어 주셨습니다. 이와 같은 성장과 부흥의 흥왕한 복음역사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의 역사였습니다. 이런 역사의 이면에는 전대와 조대 시니어 목자님들과 사모님들 그리고 2,30여명의 충성스러운 F/T 목자들의 기도와 헌신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2001년 5월 9일 전대 1,6부 역사는 김느헤미야 목자에게, 조대 2부 역사를 박요한 목자에게 위임하였고 3부는 계속하여 박다윗 목자가 7부는 송누가 목자가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광주에서 물러난 저는 다시 대전 개척 역사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5. 대전 개척역사를 섬겼습니다. (2002년 3월17-2010년 12월12일) 2001년은 CMI가 UBF로부터 갈라져 나간 시련의 시기였습니다. 고 이 사무엘 선교사님께서는 2002년 1월 1일에 제가 전화를 했을 때 선교사님은 저에게 대전 개척과 함께 대전 10개 Chapter 개척의 방향을 주시고 일주일 후에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저는 이 방향에 따라 2002년 3월 17일 대전개척 첫 예배를 드리고 제 2의 목자생활을 출발하게 되었습니다. Home Center 위치는 학생들이 몰려다니고 24시간 영업하는 궁동 유흥가 2층 옥상 주택이었습니다. 주위 환경은 늘 소란하고 혼잡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예비하신 동역 자와 양들을 보내주셨습니다. 첫 예배 때는 동교 센타 윤폴, 조앤 목자 가정과 카이스트 정종현 형제를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전문창, 김은형(동교센타) 목자들과 한양센타 손요셉, 폴린 목자가정을, 10월에는 공주에서 백다윗- 메리, 신사무엘- 루디아 두 목자 가정을 보내주셨습니다. 이들은 모두가 대전 역사의 조상이요 기둥 같은 개척 동역 자들이 되었습니다. 윤폴 목자는 조앤 사모와 함께 군에서 돕던 대덕대 조두민 형제를 심방하여 Group 성경 공부를 하였는데 박상렬, 최길윤, 전경수 형제들을 보내주셨습니다. 이들은 신실하게 주일예배에도 참석하는 가운데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음이 성장했습니다. 저는 매주 카이스트 캠퍼스에서 정종현 형제와 1대1 말씀공부를 하였는데 그는 같은 과 이순철 형제를 인도하였습니다. 순철형제는 주일예배에 참석하여 요한복음 6:27절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는 말씀을 영접하고 카이스트 역사에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개척한지 9개월 만에 22명대 주일예배역사를 이루어 주셨습니다. 주위 환경은 소란했지만 주님께서 함께하시므로 기쁨과 은혜가 충만한 아름다운 말구유 역사를 이루어 주셨습니다. 그해 년 말이 되면서 예배 보는 Home Center 방이 비좁게 되었습니다. 이를 아신 전요한 목자님은 센타를 옮기도록 방향을 주셨습니다. 전세금은 자체 헌금과 시카고와 광주와 종로 등 본국 20개 센타에서 기도와 함 께 헌금에 동참하여 넘치게 채워 주셔서 지금의 센타를 얻게 되었습니다. 첫째, 충남대와 켐퍼스 역사 충남대 역사는 양들이 어느 정도 자라다가 떠나기를 반복하였습니다. 이런 중에서도 사모들은 주중에 목자들은 토요일 오후에 모여 피싱을 하였습니다. 신사무엘, 루디아 목자 부부는 퇴근 후 공주에서 유성까지 주 3회 이상 센타에 와서 Fishing 과 1:1 역사를 섬기고 저녁 10시가 되서야 돌아갔습니다. 올 때는 피곤해서 왔다가 갈 때는 스피릿이 충만하여 돌아갔습니다. 리디아 사모님은 김승겸, 최민정, 고주희, 윤정석, 박진호, 장윤호 등 여러 형제자매들을 섬겼습니다. 뿐만 아니라 김웨슬레, 정모세, 손요셉 목자님들과 백메리 사모님들이 양들을 섬기고 있습니다. 이들의 섬김으로 인해 현재 안성원, 강인호, 노해선, 차영준, 진준원, 로드리고 형제들과 설도, 손보라, 손사라 자매 양들이 자라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전안드레- 한나, 정순종- 사라 목자 가정을 이루어 주셔서 하나님 역사에 신실하게 쓰임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남은 자 아홉가정과 최갈렙 스텦 목자 가정을 굳게 세워주셔서 자립 역사의 기초를 이루어 주신 은혜를 감사드립니다. 둘째, 계승역사 제가 대전 후계 목자를 위해서 기도한대로 하나님께서 성동 센타에서 훈련을 받고 성장한 신실한 최갈렙, 최리브가 목자 가정을 2008년부터 보내주시고 동역하게 하셨습니다. 최갈렙 목자님은 충성스럽고 신실하고 메시지를 잘 전합니다. 이제 다만 제자 양성 역사를 위해 믿음으로 성령 충만함을 덧입고 1:1 제자양성 역사에 박차를 가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제가 은퇴 후에도 기도의 줄을 놓지 않고 대전 센타 1:1 제자양성 역사를 위해 중보기도의 사명을 다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동안 광주 센타와 성동센타 동역자들이 대전 역사를 위해 기도지원과 함께 물질 지원을 해주신 은혜를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죄인을 일방적인 은혜로 구원하시고 스텦 목자로 부르셔서 지난 약 45년간 광주와 전주, 제주, 대전 개척 역사에 쓰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 찬양드립니다. 영적으로 인간적으로 목자로서 부족한 저를 목자로 세워 훈련하여주신 고 이사무엘 선교사님, 저를 위해 기도하여 주신 Mother Barry 선교사님, 전요한 목자님, Grace Lee 선교사님 그리고 지난 24년 동안 저의 허물과 약점을 감당해주시고 기쁨의 때나 시련의 때에도 고락을 함께 하며 아름다운 동역의 역사를 이루어 주신 사랑하는 광주 학사 목자님들과 사모님들 그리고 대전의 목자님, 사모님들의 사랑과 동역의 역사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또한 이렇게 바쁘고 피곤한 주일에 멀리 서울과 광주에서 울산, 진주, 청주, 천안에서 우성 까지 오셔서 저의 은퇴식에 참석하셔서 축하해 주시고, 기도하여주신 사랑과 은혜를 감사드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립니다. 저의 남은 인생도 계속해서 대전과 광주 세계 선교를 위해서 중보기도를 꾸준히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406 no image [텍스트] 안요셉 선교사님 특강 파일 [1]
[레벨:20]인금철
81 2011-06-29
안요셉 선교사님 초청 특강 한 알의 밀 요한복음 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24) 예수님과 여러분께 인사드립니다. “충성!” 대학시절부터 현재까지 성서한국과 세계선교에 온 인생을 바치신 목자님들을 모시고 이 시간 주님의 말씀을 같이 묵상하게 된 은혜를 주께 감사드립니다. 오늘 말씀은 당시 지성의 최첨단을 걸었던 그리스인들이 예수님께 나아왔을 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지성인들은 ‘어떻게 죽지 않고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런 지성인들에게 예수님은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라고 가르치셨습니다. 1. 한 알의 밀의 진리 다같이 24절을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이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너무나 유명한 진리입니다. 그 증거로 이집트의 파라오 무덤을 팠을 때의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약 3,500여 년 전의 것으로 여겨지는 밀알이 발굴되었습니다. 뉴욕 타임스는 그것이 아직도 한 알의 밀로 남아 있다는 것에 경이를 표했습니다. 그러나 더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것이 땅에 떨어지지 않았을 때, 한 알 그대로 남아 있었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고 또 죽었다면 많은 열매를 맺어 전 이집트인은 물론, 전 세계 인구를 몇 번이나 먹이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저희 인생은 한 알의 밀알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보내실 때 다만 한 생명만 주셨습니다. 한 알입니다. 이 한 알과도 같은 한 생명을 갖고서 절대로 손해보지 않고, 죽지 않고 자신만을 위해 쓴다면 이 한 생명은 그저 ‘한 생명’으로 그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이 한 알과도 같은 한 생명일지라도 주와 남을 위해 죽으면, 이 한 생명을 통해 또 하나의 새 생명을 배태하는 역사가 생기게 됩니다. 이는 세포분열과 같습니다. 자기가 반으로 쪼개지고 희생할 때, 두 개가 되고, 네 개가 되고, 여덟 개가 되고… 수천, 수만 개로 불어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왜 예수님께서 모두가 다 아는 이 ‘자명한 진리’를 말씀하셨습니까? 그것도 “진실로 진실로”라고 하시며 온 마음을 다해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것을 말하기는 쉬워도 실천하기는 죽기만큼 싫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식물들은 이를 잘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동물들, 특히 사람들이 이를 참으로 하기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왜 이 단순한 진리를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합니까? 이는 우리 개개인, 생명을 갖고 있는 모든 것에게 자기 보존의 본능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생명이 있는 것들은 죽으려 할 때, 이 법칙에 따라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칩니다. 여기에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것이 결코 자연스럽게, 아무나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잘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고도의 영성을 필요로 하는가를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도 이 진리를 믿고 가르치셨지만, 막상 이 진리대로 땅에 떨어져 죽어야 할 때는 몸부림치셨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3번이나 기도하셨습니다. 기도로 승리한 예수님께 사탄은 최후의 공격을 가해왔습니다. 대제사장들과 군인들과 무리들, 옆에 매달린 사형수의 절규였습니다.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자기도 구원할 지어다. 자기도 구원하지 못하는 자가 어찌 남을 구원할 수 있겠는가?! 스스로를 구하라!(Save yourself!) 그러면 믿겠노라!” 이것이 바로 사탄의 가장 강력한 무기이고, 우리의 가장 약한 약점입니다. 식물은 죽어 열매를 맺지만, 사람은 죽으면 끝장이라는 생각입니다. 내가 죽지 않고 살아 있어야 남을 돕든지 말든지 하지, 죽으면 어찌 남을 도울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탄의 논리는 진리가 아닙니다. 이 진리는 식물뿐 아니라 온 생명체들에게 진리입니다. 한 알의 밀인 우리 일생이 때가 되면 단 한 번 죽는 것과 “나는 매일 죽노라!”라고 했던 사도 바울처럼 부활을 믿고 매일 죽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한 알로 남든지, 아니면 많은 열매를 맺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가르친 뒤, 말씀대로 땅에 떨어져 죽으셨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를 살리시고 많은 열매를 맺게 하셨습니다. 2. 한 알의 밀, UBF의 역사 지난 50년 동안의 UBF역사는 바로 ‘한 알의 밀’의 역사였습니다. 이제 새 지도자들이 새로운 방향을 줄 것입니다. 그 후에는 또 다른 지도자가 나올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지도자가 새로 오든 바뀌든 상관없이 우리 각자에게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각자가 하나님 앞에서 한 알의 밀알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책임 목자든, 평신도 목자든, 사모든, 요회 목자든, 목동이든, 처음 나온 새내기든,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결단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죽지 않고 한 알의 밀로 남을 것이냐? 아니면 죽어 많은 열매를 맺으며 살 것이냐?’입니다. 그것은 한 번만 결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매번, 매일 결단하고 살아야 합니다. 3. 죽지 않으면 저는 65학번입니다. 제 인생 최고의 황금기에 모두가 선망하는 학교에 들어왔지만, 저는 제 인생에서 가장 깊은 절망에 처해 있었습니다. 어머님도 가셨고, 곧이어 아버님도 떠나시는 상황이었습니다. 시골에서 올라와 버스비가 없어 보문동에서 낙산을 넘어 대학로에 있는 학교까지 한 시간씩 걸어 다녔습니다. “오백 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다니더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 없네…” 그때 제가 좋아하며 생의 무상함을 되새기며 외우던 시 한 구절입니다. 나라는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 한일협정 반대, 군사독재 타도 등 매일 데모의 연속이었습니다. 거기에 북한은 서울에서 김일성 생일파티를 하겠다며 위협하는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저의 괴로운 마음을 달래줄 것은 세상에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바로 이때 하나님께서는 저를 성경공부에 초청해주셨습니다. 배사라 선교사의 성경공부, “와서 보라, 배사라!”, “Come and See, Sarah Barry’s English Bible Study!”로 66년도에 종로5가 효제동의 UBF회관에 오게 되었습니다. 그 후 저의 인생은 이 세상에서 가장 이기적인 자가 남을 위해 인생을 드리는 자로 조금씩 변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죄를 용서받는 기쁨, 더 나아가 성서한국과 세계선교에 쓰임 받는다는 비전에 찬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UBF 생활은 순간순간 말씀에 따르기 위해 자기를 부인하는, 즉 죽는 생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래서 캠퍼스 목자 생활을 하면서 학교를 졸업하면 UBF도 졸업하려고 했습니다. 그때 주님은 안마리아 자매와의 약혼을 통해 저를 UBF에 남아있게 하셨습니다. 3년 동안의 군 선교 후, ‘선녀와 나무꾼’ 같은 결혼이 있었습니다. 이때 장인어른은 제가 생전에 구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큰 집 한 채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런데 목자님은 믿지 않는 장인으로부터 이 집을 받으면 주님의 일에 방해가 될 수 있으니, 거절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주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면 나중에 하나님께서 더 큰 물질을 주실 것을 믿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물질에 대해 제가 갖고 있던 생각이 죽는 일이었습니다. 그 당시 이 집을 놓치면 평생 셋방살이나 할 것 같았는데, 주님의 종의 가르침과 마태복음 6장33절 말씀을 붙들고 그 집을 거절할 수 있었습니다. 그 뒤로 저는 “진실로 진실로”라고 하신 말씀대로 평생 동안 한 번도 물질 때문에 고생을 해 본 적이 없었고, 물질의 많은 열매를 축복으로 받을 수 있었습니다. 자기에 대해서 죽는 훈련은 계속되었습니다. 결혼하고 갓 낳은 아이를 두고서 혼자 선교사로 해외에 나간다는 것은 말이야 쉽지만, 또 한 번 땅에 떨어져 죽는 일이었습니다. 자식과 아내보다 주와 복음을 더 사랑할 수 있느냐는 훈련이었습니다. 약 10년 가량 혼자 선교사로 살아야 하는 죽는 아픔이 따랐습니다. 그 결과 제 내면에는 이 세상 아내와 가정보다 더 귀한 하늘나라의 소망과 기쁨, 주님과의 친밀한 관계성이 생기게 되었고, 예수님은 떨어져 산 기간보다 더 긴 세월을 결혼한 자녀들과 손자들과 살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그와 동시에 주님으로부터 초기 개척기의 선교사로서 모범을 보이기 위한 죽는 훈련을 계속 받았습니다. 그 다음은 “사랑하는 외교관 직장보다 하나님의 역사를 더 사랑하는가?”였습니다. “외무부에 사표를 낼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주어졌습니다. 그것도 저의 첫 번째 근무지였던 과테말라 선교사의 생활이 아주 의미가 있었고 좋아서, 외교관 직장은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천직이라고 생각했을 때였습니다. ‘내가 한 알의 밀로서 땅에 떨어져 죽을 수 있을까?’라고 주저하면서도 믿음으로 사표를 던지고 돌아오는 기쁨은 컸습니다. 이제 평신도 생활은 끝내고 풀타임으로 일생을 주께 드릴 수 있다는 것과 주님을 사랑하여 마음에 드는 직장도 버릴 수 있다는 것에 환희를 느꼈습니다. 그런데 이사무엘 선교사님는 잠깐 테스트를 해보려 했을 뿐이요, 진짜 그만두라는 뜻은 아니였다고 말씀하시며 사표를 취소해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저의 체면을 다 구기면서 예수님을 더 사랑할 수 있다는 마음에서 사표를 취소하고 올 수 있었습니다. 얼굴은 팔렸지만 이제 주님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뒤 멕시코와 유엔에서 근무하고 10년이 지나 1989년 스페인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저를 시카고로 부르셨습니다. 10년 전에 이미 저는 외무부에 대해 소망을 끊었었기 때문에 사표를 내는 것에는 큰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 은혜가 되고 하나님의 종으로 주께 불명예가 되지 않도록 도와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이때 주님은 아주 놀랍게도 저의 기도에 응답해주셨습니다. 제가 어느 날 사표를 써서 스페인 대한민국 대사관에 출근했을 때, 대사님은 복도에서 저를 기쁜 얼굴로 맞이하며 축하해주셨습니다. 바로 제가 공사급으로 승진했다는 전문을 받아보신 것이었습니다. 10분 뒤 제가 사표를 내던지자, 대사님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정말 많이 놀랐습니다. 그리고 그해 청와대의 공관장 회의에서 여러 주요 안건들이 논의되었지만, 사석에서는 제가 미친 것인지 진정한 하나님의 종이던지 둘 중의 하나라는 논쟁이 찬반으로 엇갈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한 알의 밀알로 땅에 떨어져 죽는 생활은 미국에 도착한 1990년 그 이후가 진짜배기였다고 생각됩니다. 이사무엘 선교사님은 그때 모든 선교사들은 미국 학생들을 위한 비료가 되어야 한다고 외치셨습니다. 저는 “아멘, 당연한 말씀이시죠.”라고 겉으로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10년이 지났습니다. 그간 25년의 선교사, 목자의 경험이 있었고, 마리아 선교사까지 둘이서 같이 주님을 섬기니까 역사가 크게 일어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애쓰고 노력하면 할수록,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습니다. 일대일 매주 12팀, 거의 매일 피싱, 일용할 양식쓰기, 이렇게 바쁜 가운데 모든 모임 참석하기까지 정말로 그간의 UBF생활에서 배운 모든 것을 동원했고, 스페인, 과테말라, 멕시코, 유엔, 종로 3부 개척의 모든 것들을 다 동원했습니다. 그래서 곧 100여명의 수양회, 성탄절 참석자들을 기록했지만, 여전히 한 명의 목자도 세우지 못한 채로 10년이 지나갔습니다. 이때 저희들은 “시카고 UBF, 즉 ‘미국’은 우리의 선교지가 아니구나. 잘못 온 것이구나.”라는 생각만 가득했습니다. “다른데서는 수년간 그토록 열심히 하지 않았는데도 열매가 많았는데, 왜 유독 미국에서 만큼은 10여년이 넘도록 온갖 투자를 다 했는데도 이렇게 빈 그물만 올리고 있는 것인가?”라는 회의감이 들었습니다. 날마다 애써도 되지 않을 때 생각나는 것은 “울려고~ 내가 왔는가~”라고 하는 유행가 가사였습니다. 미국을 탓하고, 고약한 양들을 탓하고, 싹수없는 양들을 탓하는 등 마음에 원망과 불평이 넘쳐서 하나님께 섭섭한 마음마저 들었습니다. 이때 또다시 ‘한 알의 썩는 밀알의 진리’가 다가왔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24a)” ‘왜 내가 한 알 그대로 남아있는가? 왜 열매가 없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제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실은 내가 얼마나 수고했는데?!’ 그러나 가만히 주님 앞에서 생각해보니 저의 외부에 드러나는 모든 열심의 뒤에 동기가 잘못되어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저는 시카고에서 시니어 목자요, 선교사로 어찌하든지 모임을 빨리 크게 이루어 모두에게 모범을 보이고 싶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이지만, 그보다 이사무엘 선교사님과 여러 선교사들의 인정과 존경을 받고 싶었습니다. 한마디로 자신의 영광이 하나님의 영광보다 조금 앞서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미국에 오자마자 들었던 “선교사는 비료가 되어야 한다!”라는 말을 속으로 영접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저는 제가 비료가 되기보다 미국 양들을 비료로 삼아 저의 모임, 저의 요회, 저의 이름을 높이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그간 미국 양들이 왜 그렇게 생기지 않았는지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양들은 목자보다 더 본능적으로 ‘이 목자가 삯군인가? 아닌가?’ 냄새를 맡을 줄 안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게 와서 남아있다 보면 자신이 결국 저의 비료가 되고 말 것이라는 게 확실해 보이기에, 진작부터 눈치를 채고 모두 달아났던 것입니다. 저는 마침내 제 내부 동기가 ‘한 알의 밀로 땅에 떨어져 죽지 않고 어떻게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을까?’라는 것을 발견하고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주님 앞에서 눈물로 회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제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나는 미국에 비료가 되기 위해서 왔다! 미국 학생들을 큰 나무로 키우기 위해서 저를 비료와 거름으로 사용해주옵소서!” 그리고 미국 학생들을 볼 때마다 제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와! 너는 큰 나무가 될 재목이구나! 내가 너의 비료가 될 테니 내게로 오렴!” 이런 마음으로 미국 학생들을 대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성경의 많은 부분이 새롭게 영접되기 시작했습니다. ‘하늘의 황태자이면서도 자신 스스로가 땅에 떨어져 죽어 비료가 되신 예수님, 이때 많은 열매를 맺으신 점, 예수님이 제자들의 비료가 되어 3년이나 가르치신 점...’ 그러고 보니 구약의 다윗과 요나단에서 저는 자신을 늘 다윗이라고 외치고 있었음을 발견했습니다. ‘누가 나의 요나단이 되어 나를 위해 희생해 줄 것인가?’라며 제 주위 사람들을 쳐다봤습니다. 그런데 이제 저는 속에서부터 “나는 ‘요나단’이 되어야 한다!”라고 외쳤습니다. 그랬더니 2세들도, 현지 학생리더들도, 선교 동역자들도, 제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저의 ‘다윗’으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간 UBF에서 “나는 구약의 요셉이다!”라며 우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위해 거름이 된 신약의 요셉이 얼마나 귀한 사람인지 깨달았습니다. 이렇게 요한복음 12장24절 한 구절만 제 마음 속에 진리로 받아들였을 뿐인데, 진리가 저를 자유케 하고 기쁨을 주는 것을 체험하기 시작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까? 그간 아무리 애를 써도 밀물처럼 왔다가 썰물처럼 가버리던 양떼들, 여름의 무성한 나뭇잎처럼 몰려왔다가 가을의 추풍낙엽처럼 떨어지던 양떼들에게 변화가 있기 시작한 것입니다. 달아났던 양떼들에게서 돌아와도 괜찮겠느냐는 전화와 그들의 회복의 역사가 있기 시작했습니다. 하나씩 둘씩, 또 그들을 통해 셋씩 넷씩,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았던 미국 학생들에게 역사가 조금씩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미국 선교사 생활 22년 중에서 지난 10여 년 동안은 제가 예전처럼 그렇게 열심히 안달하지 않아도 이런 식으로 양들이 모이는 역사가 조금씩 계속 되었던 것입니다. 이제 NEIU에 선교사 열 가정과 현지목자 열 가정이 생겼습니다. 주일예배가 90명대로 오르고 있고, 지난 부활절 수양회에는 121명이 모였고, 크리스마스 때는 160명 가량이 모이는 역사를 이루어주셨습니다. 이제 제가 할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봅니다. 주님과 저는 이런 대화를 나눴습니다. “주여! 지난 66년, 대학 2학년 이래로 약 45년 동안 저의 최선을 다해서 살았으니, 이제 좀 쉬어도 되지 않을까요?”, “네 나이가 몇이냐?”, “6학년 5반입니다.”, “내가 아브람을 몇 살에 불렀느냐?”, “75살 때였습니다.”, “40년 광야 훈련 뒤, 내가 모세의 나이 몇 살일 때 그를 불렀느냐?”, “80살 때였습니다.”, “그런데 네 나이는 몇 살이냐? 이제 겨우 6학년 5반, 한국나이로도 6학년 6반 밖에 못 되었지 않느냐? 이제부터 본선에 나가 뛰어야 하느니라.”, “주여, 지난 45년간 성서한국, 세계선교 본선에서 죽자고 뛰었는데요?”, “그것은 준비운동에 불과했느니라!” 목자의 삶과 선교사의 삶은 많은 열매, 즉 천국백성이 많이 되게끔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열매를 맺는 선교는 바로 한 알인 나 자신이 얼마나 땅에 떨어져 죽는가에 달려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과거는 과거로 돌리고, 이제부터 이 ‘한 알의 밀의 진리’에 따라 복음역사를 이루는 것에 더욱 매진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또 그동안 죽어 많은 열매를 맺은 여러분들, UBF의 모든 동역자분들이 지금까지는 준비운동을 좀 한 것으로 치고, 이제부터는 세계선교의 본선에 진출하여 과거보다 천국의 열매를 한 단계 더 많이 맺게 해주시옵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한마디 : 한 알의 밀 예수님
405 no image Pastor Abraham Kim 선교사님 세계대표 취임 메시지 파일
[레벨:20]인금철
62 2011-08-10
August 6, 2011 Fourth UBF General Director Inaugural Address Pastor Abraham Kim “"For you know the grace of our Lord Jesus Christ, that though he was rich, yet for your sakes he became poor, so that you through his poverty might become rich.”" (2Co 8:9) Dear friends and fellow-workers in Christ. Here I stand to submit myself to the calling to assume the duties of the fourth General Director of UBF. I am deeply grateful to God for His grace and to all UBF coworkers for your trust. I’'d like to thank Dr. John Jun for his hard work as General Director for the past five and a half years. He wholeheartedly cared for the frontline missionaries and built up relationships with Christian communities in the United States and Europe. May God be with him and M. Sunji Jun and bless the services they want to continue. As an organization, we have just celebrated the 50th anniversary. We were reminded of the spiritual heritage God bestowed on us through His servants, the Late Dr. Samuel Lee, and Mother Sarah Barry. From the beginning, God led UBF to serve world campus mission through disciple-making. We have devoted our youth, dreams, and desires to obey this commission. Eighteen hundred missionaries have gone to 92 countries, leaving comfortable lives in their homelands. Many of them have endured poverty, cultural and language barriers, persecution and hardships for pioneering self-supporting ministries. God has blessed us by raising thousands of native disciples and 2nd generation missionaries in 400 UBF chapters around the world. Praise be to God who called us to be a royal priesthood and a holy nation and who has done great work among us for the past 50 years! Before us there are 140 countries that are waiting for UBF missionaries. Even in the U.S.A and Germany, we have reached only 20% of major universities. This is the time we should newly and humbly receive the Lord’'s Great Commission—-“"Therefore go and make disciples of all nations”"(Mt 28:19-20). We must move on with the gospel of Jesus Christ. There are economic and political barriers. There are challenges of post-modern cultures. But I am convinced that our Almighty God who has led us for the past 50 years will enable us to carry out this great task if we wholeheartedly obey Him. While praying for this, the Spirit led me to the words of 2 Corinthians 8:9, “"For you know the grace of our Lord Jesus Christ, that though he was rich, yet for your sakes he became poor, so that you through his poverty might become rich.”" For the greatest task of world salvation, our Lord took the way of servantship. He gave up the honor and glory as God. He became a man in order to be our friend. He was born in a stable and lived in poverty. He was despised and rejected. He served sinners until he gave his life on the cross. He could have chosen other ways, but he chose this way because it was God’'s way. Through his poverty, he made us rich. He set us free from slavery to sin and death and restored God’'s image in us. He gave us meaning and purpose in life; He gave us eternal life and the inheritance of the kingdom of God. He has filled us with love, peace, joy and hope, making us bear the fruit of righteousness through the Holy Spirit. To the Lord and God, the King of kings and Lord of lords, be praise and honor and glory forever! Amen. The Lord has entrusted His remaining work for world salvation to His church. We know the beautiful epilogue of John’'s gospel. After predicting Apostle Peter’'s martyrdom, the Risen Christ said to him, “"Follow me”"(Jn 20:19). It was the Lord’'s calling for His church to serve the people of the world in His footsteps. If there are other easier ways for the church to fulfill God’'s world salvation purpose, the Lord would have not given this command. Peter and all the other apostles followed the Lord’'s footsteps. Numerous saints followed the Lord’'s footsteps. When Christians followed the Lord’'s footsteps, the church became the light of the world. When Christians followed other ways, the church lost life and influence. God blessed and used UBF because we have followed the Lord’'s footsteps. We are living in a world in which servantship is not honored. When we served young people giving our lives, however, the Lord filled us with His richness—- not the richness of the world that is temporal, but the richness of heaven that is eternal. And God enabled us to bear fruit that lasts forever. Now many of us have stable lives and ministries, while many missionaries are struggling to keep God’'s lamp burning in their mission fields. This is the time we should look after one another and carry out the Lord’'s Great Commission together. This is the time we should remember the grace of our Lord and newly accept his calling, “"Follow me.”" If we continue to follow the Lord in His footsteps, God will continue to use us for fulfilling His vision for world campuses, and God will bless us and our children. I ask the Lord for his mercy and help so that I may follow His footsteps daily. I’'d like to ask all of my fellow workers in UBF to join me in prayer for the following spiritual direction: First, we should restore the spirit and vision we had. We studied God’'s word, prayed for God’'s heart’'s desire, and simply obeyed and went out to preach the good news by faith. Then God enabled us to overcome obstacles and worked with us. We served world mission with a giving spirit. Korea UBF chapters sent out their leaders as missionaries, like Apostle Paul and Barnabas. When they did so, God blessed them to grow in number. For the past 35 years, Korea UBF has sent out one third of its members as missionaries, which is over three times more than the Moravians, who are known to be the most missionary-minded community in history. We change our ways in order to win the people we serve, but we must not change in serving God’'s work in God’'s way—-through faith, obedience, and giving. Let’'s pray that we may serve world mission with a giving spirit and by faith and obedience. I pray that U.S.A UBF chapters may send out one third of their members as missionaries. God is not limited. He will show great things when we serve Him with spirit of giving and vision by faith. Second, we should live the gospel. Our Lord’'s first message was “"The time has come. The kingdom of God is near. Repent and believe the good news!”" (Mk 1:15) The purpose of the gospel is to transform a sinful person into a spiritual person who loves God and loves neighbors. Our discipleship should be focused on this. How can our sinful nature be transformed? It is only through sincere repentance before the word of God. We should daily repent of our selfcenteredness that stands against God so that we are filled with God’'s holiness and love. We should help our Bible students to do the same. We can recruit people by programs, but we cannot raise disciples who practice God’'s love without a work of the Holy Spirit in them through repentance. Without this transforming work, we cannot build a Christian community which God can dwell in and use for his purpose. Apostle Paul best characterized Christianity when he said, “"If I have a faith that can move mountains, but have not love, I am nothing”" (1Co 13:2). Our ministry should be based on God’'s love for one soul. Our community should be built on love for one another. We confess that we didn’'t live the gospel as we should. I ask forgiveness from God and from those who were hurt in our ministry due to our lack of love. Seventy percent of 400 UBF chapters are run by one or two families. They need love, encouragement, and support. Let’'s pray to build a community of love in each city, nation, and continent. Then the Lord will make us a city on a hill that shines God’'s light to the world. The Late Dr. Samuel Lee’'s last words for us were to “"go back to the Bible.”" The Bible is about Christ and his gospel. I believe that God, through Dr. Lee, pointed out the right direction of UBF—-to restore the spirit of giving and vision by faith and to live the gospel through sincere repentance before the word of God. Third, we should build up native leadership. Raising native leaders is the ultimate goal of our ministry. Native leaders include the 2nd-gens of missionaries and native leaders. God has blessed the sacrifice of our missionaries and raised thousands of potential native leaders. Each chapter should promote an environment in which missionaries work together with native leaders. Each chapter should also have a plan concerning how to build up native leadership including a longrange plan of leadership transfer from missionaries to native leaders. I will work with continental coordinators to develop education programs for raising native leaders. I’'d like to thank Christian organizations and friends who have shown affection in Christ and support for our organization. I especially thank Dr. John Armstrong and Dr. Scott Moreau at Wheaton College. I also thank Rev. Samuel Ilsik Choe, president of Global Inter-Missions Network. We will continue partnership with Christian communities including the other campus mission organizations for the common purpose of expanding God’'s kingdom on earth. By God’'s grace, we were called to live the life of Jesus’' disciples. We know we have lived the most glorious and wisest life by His grace. Let’'s follow the Lord Jesus to the end. May God fill us with the Spirit of Jesus as we follow his footsteps for fulfilling His commission for world campus evangelization. I’'d like to ask all UBF coworkers to hold on to the following prayer topics: 1. Sanctification of our inner persons by the word of God 2. Raise disciples through one-to-one Bible studies 3. Raise 100,000 missionaries by 2041 and send them out to 140 countries unreached by UBF and to all major campuses of the world
404 복음에 참여한 빌립보 교회를 생각하며 파일 [2]
[레벨:20]인금철
110 2011-10-21
오늘 양식 본문(빌 1:1-11)에서 복음으로 인하여 '매임'(imprisonment), 복음을 '변명'(defense)함과 '확정함'(confirmation)을 많이 생각하게 됐습니다. 바울이 왜 그처럼 복음에 참여한 빌립보 교회에 대해 감사, 기쁨, 사모의 마음으로 가득했는지 조금은 이해가 됩니다. 교회가 상위 1%에 속하는 곳도 있고, 비난과 무시와 공격의 대상이 되는 곳이 있습니다. 1%가 되는 곳에는 너도나도 몰릴 수 있지만, 복음으로 인해 불편해지는 곳에는 참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있는 캠퍼스, 아니 대부분의 세상이 그러한 것 같습니다. 복음은 세상으로부터 늘 기소를 당합니다. 예수님부터 그랬습니다. 예수님과 사도 바울을 이어 우리도 복음의 증인이라는 이유로 매인 몸이 되고, 출두 고지서를 받고 법정으로 나갑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 복음을 변명하고 확정하기 위해 애를 씁니다. 이러한 법정 싸움은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상황은 참 불리하게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법정 싸움을 보고 한 두 사람이나마 복음이 옳다는 결론을 내리고 복음으로 돌아서는 사람들을 봅니다. 그러기에 이 지루한 싸움은 끝까지 계속되어야 합니다. 최종적으로 복음이 진리로 확정 판결이 나는 때는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그 날이겠지요... 복음으로 인해 쇠사슬에 매이고 이를 변명하기 위해 생명을 무릎쓰고 법정에 서야 하는 어려운 시대에 복음에 참여했던 빌립보 교회처럼, 복음이 기소된 이 시대에 복음을 부끄러워하거나 외면하거나 버리지 않고, 치열한 참여정신을 가지고 참여하는 동역자들을 생각할 때 깊이 감사가 됩니다. 복음을 변명하러 나오라는 고지서를 받아들고 진리를 확정하기 위해 오늘도 캠퍼스로, 직장으로 나가는 한 분 한 분을 바라보시며 감사하고 기뻐하시고 사모하시는 우리 주님을 생각합니다.
403 UBF 유럽 선교 개척과 비전(홍갈렙선교사) 파일
[레벨:20]인금철
40 2019-06-12
수양회에서 발표하신 원고 이전에 쓰신 것으로, 좀 더 자세한 내용들이 있어 추가로 올립니다. 2019 전국 학사수양회 특강 홍갈렙 (하이델베르그, 독일) UBF 유럽 선교 개척과 비전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요 1:4) 안녕하십니까? 저는 Heidelberg에서 온 홍갈렙선교사입니다. 먼저 생명의 빛 되신 예수님의 은혜를 감사합니다. 이 생명의 은혜가 이번 전국학사 수양회에 그리고 유럽여름수양회에 넘치길 기도드립니다. 먼저 제 인생소감을 발표하겠습니다. 1. 인생소감 저는 1949년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고졸 후 국회속기사 시험을 준비하였습니다. 시험을 앞두고 군대소집영장이 나왔습니다. 시험을 먼저 치르고자 하다가 그만 군대를 기피하였습니다. 마침 당시 교육대학교에 입학하는 남학생들에게 병역을 면제해주는 법이 시행되었습니다. 저는 급한 김에 인천교육대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그러나 교사가 될 생각이 없어서 취미생활을 하며 학창시절을 보냈습니다. 졸업후 제 앞날을 생각해보았습니다. 장래를 생각하기 시작했을 때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 것인가? 내 삶의 의미가 과연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맞닥트려졌습니다. 그 질문에 대답을 얻고자하는 열망이 당시 제 삶의 가장 절박한 관건이 되었습니다. 역사상의 이름있는 철학자, 사상가, 종교인들이 사람이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 어느 누구의 가르침도 절대적인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인생은 마치 참된 목적없이 부유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본질적으로 무의미하게 보였습니다. 홀로 방안에 앉아 어둡도록 한숨을 토하며 시간을 보내기가 일수였습니다. 그때 제 동생인 지금의 David Hong선교사가 UBF종로센터에 나가고 있었습니다. 그의 소개로 1972년 3월 종로UBF에서 성경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 때까지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제게 창세기 공부를 통해 처음으로 진지하게 “과연 창조주 하나님이 존재하는가?” 하는 근본적인 문제가 제기되었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계신가?” 하는 의심과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면 내 삶의 진정한 해답을 가지고 있다”는 기대를 오가며 창세기를 마쳤습니다. 1972년 여름 누가복음 공부가 시작되었습니다. 누가복음이 당시 숭실대에서 열린 여름수양회의 주제였습니다. 제게 2장의 한 구절이 임했습니다.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당시 예수님의 생애의 그 역사성을 믿음의 기초로 찾고있던 중이었습니다. 갑자기 전기가 온몸에 감전되어 흐르듯이 확신이 전달되어 왔습니다. 순간 의심의 구름이 걷히고 저의 공허했던 내면에 알 수 없는 기쁨이 임했습니다. 갑자기 세상이 달라져 보였습니다. 종로학사회에서 성숙한 동역자들의 신앙을 배우며 그리고 주일마다 Dr. Lee의 메시지를 들으며 행복한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1978년 종로3부 전체가 연세대 개척팀이 되어 김다윗목자님이 개척을 시작한 연희센터로 파송되었습니다. 복음신앙과 연대개척의 열정에 계속 도전받는 삶이었습니다. 믿음의 가정을 이룰 때가 왔습니다. 저는 세계선교를 예수님의 지상명령으로 영접하고 기도해왔습니다. 그래서 미국이나 서독선교사와 가정을 이루어 선교사로 가지않겠냐고 소개를 받았습니다. 저는 세계선교를 위해 기도해 왔으나 세계선교에 자신 스스로를 실제적으로 드리고자 결단할 수 없었습니다. 두려움과 의심으로 소개받은 사람들을 거절하였습니다. 또 소개받았습니다. 또 영접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다”는 말은 듣기 싫었습니다. 그래서 “집에 가서 기도해보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센터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 해의 마가복음 공부는 제 심령에 새롭고 와닿았습니다. 이를 통해 제 삶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영접하였습니다. 그리고 누구를 소개받던 사람을 보지 않고 제 삶의 주권자이신 하나님께 맡기고 “yes”하기로 마음을 정했습니다. 1978년 5월 어느날 출근하여 수업을 앞두고 있는데 전화가 왔습니다. 다짜고짜로 “홍갈렙 목자님, 믿음의 결혼을 할거에요?”고 물어왔습니다. “yes” 했습니다. 그리고 수업에 들어가려는데 “그러면 지금 바로 종로센터 전박사님한테 가보세요” 하는 것이었습니다. 교장 선생님에게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겼습니다” 하고 종로센터로 갔습니다. Sarah선교사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첫 인상이 아름다웠습니다. 그래서 그녀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지만 “저렇게 인상이 좋으니 믿음도 분명히 훌륭할거야!” 하고 편리할대로 생각하고 과연 “yes”하기를 잘했다고 여겼습니다. 데이트를 하고자 당시 동물원인 창경원으로 갔습니다. 동물들은 하나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다만 어떻게 Sarah선교사에게 “나와 결혼해 주세요” 라고 말을 해야 되는지 하는 생각에 골몰해 했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잠깐 앉자고 했습니다. 같이 앉은 다음 느닷없이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Sarah선교사와 가정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줄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하고 아멘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Sarah선교사가 어떻게 기도하나, 마치 온몸이 전부 귀가 된듯이 주의를 기울여 들었습니다. Sarah선교사도 기도를 시작은 했는데 본론을 말하는 대신 독일과 한국을 오가며 세계선교가 어떻고 어떻고 성경공부가 어떻고 어떻고 등 여러가지 기도제목으로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결론이 어떻게 날지 궁금했습니다. 도무지 “언제 본문을 말하나” 초초해하며 기다렸습니다. 그러더니 드디어 마지막에 자기도 저와 가정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믿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멘”했습니다. 그리고 결혼했습니다. 전박사님은 제가 비록 독일선교를 위한 가정을 이루었지만 세계선교 vision이 없는 것을 딱하게 여기셨습니다. 제게 Heidelberg를 개척하라고 방향을 주셨습니다. 연희센터에서 인턴목자로 훈련받으며 김다윗목자님의 도움과 섬김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1979년 2월 독일로 파송되었습니다. 1980년 선교사로 온지 일년 뒤 제 삶이 위기에 처했습니다. 결핵에 걸렸습니다. 그러나 정작 제게 더 큰 시험이 되었던 것은 이상과 현실의 불일치로 야기된 자신의 신앙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였습니다. 저는 제가 가지고 있는 신앙이 과연 제 것인가 아니면 남들을 따라 그럴 것이라고 그냥 믿어 온것인가 물었습니다. 한번 회의하기 시작하자 모든 것이 의심스러워 졌습니다. “과연 하나님이 계신가? 아니면 계실 것이라고 그냥 믿어온 것인가?” 의심하였습니다. 결핵이 이런 상태에서 심각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어느날 무엇인가 목젖을 타고 오르는 자극이 와서 기침을 했습니다. 비릿한 냄새와 함께 토해낸 것은 피였습니다. 변기가 온통 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것이 매일 반복되고, 매번 한컵 정도 피를 쏟아내었습니다. 그리고 나면 온몸이 파김치처럼 되었습니다. 저는 어차피 꼭 살고싶은 의욕이 없었기에 피를 토하면서도 병원을 가지 않았습니다. 괜찮다고 고집을 피웠습니다. 억지로 떠밀려 의사한테 갔습니다. 약을 한웅큼씩 먹고 또 주사를 맞았지만 피를 토하는 것은 계속되었습니다. Sarah선교사가 의사에게 문의하였습니다. 그는 “당신 남편에게 약을 투여하고 있는데 폐에 새로운 구멍이 계속 생기고 있다. 그는 앞으로 6개월을 넘기지 못할 것 같다”고 통고했습니다. 그해 여름 Dr Lee가 집으로 심방 오셨습니다. 방으로 들어 온 그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그는 제가 심한 결핵에 걸린 것을 아시는데도 슬퍼하거나 또는 동정하는 표정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무엇이 즐거웠던지 미소를 만면에 띄우고 저를 놀리듯이 “내가 너를 보러 온 줄 아냐? 네 아기를 보러 왔어” 하셨습니다. 긴장했던 저는 그만 웃음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는 당시 갓태어난 Henoch을 안아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저를 보고는 “성경을 읽으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읽어가던 중 창세기 12장 1~3절이 제 심령에 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창12: 2) 하신 말씀에 이르자 그 말씀이 제 황폐한 심령에 임했습니다. ‘나는 얼마나 자신을 의미 없고 보잘것없는 존재로 보는가,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얼마나 굉장하고 위대한 존재로 보시는가?’ 깨달음의 전율이 제 영혼을 사로잡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병으로 죽지 않고 캠퍼스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죽게 해 주십시오!’ 마침 그때 Stuttgart대학에서 입학허가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1981년 Stuttgart에서 거하며 창세기와 로마서를 공부할 때 어느 사이에 어떻게 치료되었는지 모르게 결핵이 완치되었습니다. 장래 사역의 방향을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선교가정을 이룰 당시 전박사님이 주신 방향을 다시 영접했습니다. 1982년 Heidelberg를 일생의 선교지로 영접하고 이사하였습니다. Heidelberg는 Neckar강이 있는 호반의 도시로 알려져 있습니다. 경관이 빼어나고 오랜 역사의 사연을 안고 있는 고성이 있는 낭만의 메카입니다. Heidelberg은 68학생 운동의 본거지가 되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과격한 단체들이 결성되었고 심지어 이들은 Heidelberg에 있는 제 5 미군사령부를 폭탄차량으로 공격하였습니다. 미군 여러 명의 사상자가 생겼습니다. Heidelberg는 가장 전통적인 대학이었던 만큼 68학생운동의 피해를 많이 입었습니다. 학생들이 교수를 쫓아내고 자기들의 이념에 동조하는 사람들을 교수가 되게 하였습니다. 68학생운동의 영향아래 교육제도가 개편되었습니다. 이 때 “국민학교”가 “초등학교”로 개칭되었습니다. 인문과학의 성지였던 Heidelberg대학은 옛 명성을 회복하기까지 오랜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원래 68학생운동의 기본요구는 국가로부터 그리고 교회로부터 간섭없는 개인의 자유입니다. 개인주의는 전후 교육정책과 68학생운동으로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독일은 2차 세계대전을 경험하며 각 개인이 국가를 맹목적으로 따를때 자신의 민족과 전세계에 얼마나 큰 범죄를 저질렀는가 깨달았습니다. 그후 독일은 교육의 방향전환이 있었습니다. 국민각자는 더이상 국가의 이념에 맹목적으로 따르는 대신 각 개인이 스스로의 비판적 안목을 키우게 했습니다. 곧 국가는 자기 구성원의 인생관, 가치관을 간섭치 않고 각 개인이 성숙하도록 교육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집단안에서 안정감을 찾는 일본인과는 달리 독일에서는 각 개인이 강해졌습니다. 특히 68학생운동이후 도덕과 모든 가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배재했기에 사람들에게는 결국 그 최고의 가치와 의미가 자아실현에 집중되었습니다. 그렇게 교육받고 성장한 그들은 개인 개인의 의견이 분명하고 또 이를 분명하게 표현합니다. 고등학교만 졸업해도 그 생각이 자립적이고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개성과 인격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독일학생들은 당시 저와 15살 정도 차이가 있었지만 그들은 제가 그들보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저를 존중하거나 특별한 배려를 하지 않았습니다. Heidelberg에서 저의 개척자의 신앙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두 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학교심방을 갔습니다. 학생들을 성경공부에 초대했습니다. 초대된 학생들중 간혹 한둘이 왔습니다. 그리고 갔습니다. 때로는 오기로 한 학생이 오지 않아 예배때까지 마음졸이며 그들을 기다린 적도 자주 있었습니다. 한번은 예배준비를 마치고 양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초인종이 울렸습니다. 약속한 그 학생이 과연 왔습니다. 여자친구까지 동반했습니다. 그리고 포도주도 가져왔습니다. 제가 그를 예배에 초청했고 그리고 예배 후에는 식사도 같이 하자고 했던 터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배를 먼저 본다는 것을 아예 잊었는지 예배를 시작하려는데 얼굴색이 변했습니다. 그리고 예배를 앞두고 화를 내며 가버렸습니다. 포도주도 도로 가지고 가버렸습니다. 한번은 물리를 전공한다는 새내기가 왔습니다. 체구가 아담했고 용모도 순진해 보였습니다. 창세기 1장을 같이 읽었습니다. 제가 미처 설명하기도 전에 그의 강의가 시작되었습니다. Big bang이후 극미한 순간후에 우주가 형성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양자역학의 기초아래 Planck 상수, Riemann 상수 등 많은 낮선 개념들을 쏟아내었습니다. 안경너머로 눈을 반짝이며 끊임없이 말을 이어갔습니다. 그가 어떻게 그토록 많은것을 쏟아내는지 제가 한마디 할 기회도 없이 꼬박 그의 강의를 들어야했습니다. 그의 강의가 끝났습니다. 그날 그렇게 시간이 다 끝났습니다. 그리고 그는 더 이상 강의하러 오지 않았습니다. 초청을 계속 하였습니다. 학생들이 와서 말씀공부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래 계속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저는 지금은 시작단계니까 하고 스스로를 위로하였습니다. 본국에서 꾸준히 편지가 왔습니다. 그 편지에서 저희 가정을 위한 기도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녹음된 메시지를 매주매주 받았습니다. 때때로 학생들이 오기도 했지만 주로 Sarah선교사와 둘이서 예배를 보았습니다. 당시 병원에서 근무하며 가사를 돌보는 Sarah선교사에게 이 소망없어 보이는 상황은 짐이 되었을 것입니다. Sarah선교사가 그것을 계속 감당해 주었고 저는 또 스스로를 위로하며 열매없는 선교생활을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학교에서 만나는 외국인 유학생들은 동병상련의 입장인지 말을 걸면 마음을 열고 대화를 했습니다. 그들에 비해 독일학생들은 비록 대화에 응하더라도 그들처럼 쉽지 않았습니다. 대하는 순간 그들의 무게가 느껴졌습니다. 조리있게 의견을 말하는 그들, 한마디로 훈련된 그들은 대개가 저에 비해 키도 크고 똑똑하고 의젓해 보였습니다. 저의 생각과 사상들은 그것이 막상 독일어로 표현되면 언어의 제약을 받아 유치하게 들렸고 또 그나마 어법이 틀려서 교정받기도 했습니다. 독일어로 말을 걸면 어떤 학생은 영어로 대답했습니다. „너의 독어가 어눌하니 네가 영어를 제대로 할 줄 알면 그렇게라도 해주겠다“는 식이었습니다. 그들과 대화하며 그들의 정돈된 생각, 그들의 생각을 뒷받침하고 있는 지식 등 그들이 불과 20살 남짓한데도 성숙해 보였습니다. 저 자신의 15년전 20대의 철없었던 시절과 비교하면 더욱 그러해 보였습니다. 물론 제게도 믿고 의지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비록 높은 실력과 자질을 소유했다할지라도 그들에게는 없는 것, 곧 성경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과의 성경공부에 매달렸으나 그것이 그들의 무관심에 부딪쳐 번번히 좌초되는것 이었습니다. 성경진리에 대한 무관심보다 저를 더 어렵게 만드는 문제도 있었습니다. 대화에 응하는 그들중 신학을 공부하는 학생들도 여럿 있었습니다. 그들과 이야기하는 가운데 오직 의지하고 있는 가장 기본적 사실 곧 성경이 진리라는 것조차 공유할 수 없는 것이 들어나곤 했습니다. Heidelberg대학의 신학은 역사고등비평, 양식비평을 통해 성경본문을 해체시키고 나아가서는 성경을 하나님의 계시가 아닌 인간문화의 산물로 정의했습니다. 그들에게 성경은 더이상 하나님의 권위있는 계시가 아니었습니다. 양들 초청을 계속 하였습니다. 이 사람 저 사람에게 계속 거절당했습니다. 제 심령이 날로 위축되었습니다. 학생들의 얼굴을 보며 그들의 표정을 살피며 눈치를 보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그 한사람 한사람이 어떻게 그리 야무지고 그리고 자기생각이 그토록 강한지 그리고 그들이 형성한 하나님없는 그 세계관이 어떻게 그토록 견고한지 제게는 그야말로 극복할 수없는 장애물이었습니다. 그들이 믿음이 없는데도 각자가 가지고 있는 인생관, 세계관에 나름대로 기초가 있고 그들의 삶 또한 견고하게 보이니 „나는 선교사다. 그러니 내가 너를 도와주겠다“ 하고 그들의 삶으로 뛰어들 여지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저는 가난하고 후진국인 아시아의 한 나라에서 독일의 부와 선진문화를 향유하기 위해온 사람에 불과한 것처럼 비춰지는 듯 했습니다. 저의 존재는 좋게 말해 그들의 관용의 대상이었지 그들에게 성경 선생으로 인정받고 그래서 그들이 제게 성경의 진리를 배운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힘들었습니다. 더구나 개인의 프라이버시가 엄격한 그들이 제게 성경을 공부하고 그 방향대로 순종하여 살라는 제 권면을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Heidelberg개척에 대한 vision이 사라져 갔습니다. Israel 정탐꾼의 혐오스럽던 자조적인 말이 메아리쳤습니다.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저는 당시 4살난 첫째아이, 그리고 3살인 둘째아이를 보며 저의 장래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장래가 막막해 보였습니다. 제 신앙생활은 밑빠진 독에 물붓는 것 같았습니다. 수고를 했을지라도 손에 잡히는 것, 눈에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피해의식, 손해의식에 시달렸습니다. 제 마음에 사실상 결론을 내려져있었습니다. “독일학생 선교는 불가능하다.” 그런데 만약 새 인생을 시작한다면 다른 그 어떤 것이 제 인생에 의미와 보람이 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인생을 당연히 보람있고 의미있게 보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명예도, 학문도, 돈도 다 좋았지만 복음을 전하고 그래서 구원을 받게된 그들을 예수님의 제자로 키우는 그 이상의 더 가치있는 것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안된다고 결론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선교사의 길을 계속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숨쉬며 절망하고 포기한 상태에서 학생을 초청하며 힘도 소망도 기대도 없이 제 선교생활은 이어졌습니다. 우리는 종교개혁의 유산 곧 Sola Fide 오직 믿음, Sola Gratia 오직 은혜, Sola Scriptura 오직 말씀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특히 Sola Scriptura 곧 오직 성경만이 하나님의 계시라는 종교개혁 근본정신에 따라 성경을 가르치는 것을 사역의 기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유럽의 풍토에서 이러한 1:1 성경공부를 통해 한 개인, 개인을 인격적으로 돕는 사역은 가장 합당하게 여겨집니다. 대중을 상대로한 전도보다 한 개인, 개인을 초청하여 그들과 성경공부하는 저희들의 사역이 예수님의 지혜임을 믿습니다. 그렇지만 제 선교사역은 실패였습니다. 이 실패를 통해 저는 이 Sola Scriptura의 의미를 다시 깨달아야 했습니다. Sola Scriptura는 말씀이 흔히 모든 공의회의 결정과 교황에 권위에 우선한다는 최종권위를 확정짓는다고 이해되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본래적으로 Martin Luther에게 Sola Scriptura 성경이 곧 하나님의 계시된 진리라고 하는 것은 도그마 이상의 관건이었습니다. 말씀으로 Martin Luther 스스로가 변했고 그의 지각과 이성과 양심등 그의 온 내면이 말씀에 사로잡혀 살았기에 그것은 교리의 문제가 아닌 실제적 삶의 문제였습니다. 사실 그는 기독교를 개혁하기 그 이전에 자신의 삶을 개혁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Sola Scriptura의 문제는 제가 무엇을 표방하고 얼마나 성경을 가르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저 자신이 실제로 어떻게 말씀으로 변화받고 사느냐의 문제였습니다. 저는 “성경이 진리다. 성경말씀을 공부해야 한다” 등을 외쳐댔지만 스스로는 말씀에 사로잡혀 살지 못했습니다. 저 스스로가 말씀에 의해 변화되고 매일의 삶에서 말씀의 은혜와 능력을 실질적으로 드러냈어야 했었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Sola Scriptura의 의미였고, Heidelberg의 개척의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영성의 준비없이 시작한 저는 그곳에서 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으며 Sola Scriptura의 의미를 체험적으로 배워야 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위에서 온 도움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런 중에 마가복음 공부가 끝났습니다. 36강이 되는 분량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철하려니까 가장 가운데 위치한 8장의 메시지가 빠져 있었습니다. 그 8장 메시지는 얼마전 학생을 심방했을 때 그와 대화를 나눈후 그에게 읽어보라고 주었었습니다. 그리고 얼마후 돌려 달라고 하였을 때 그는 거북스러운 표정으로 웃었습니다. 저는 그가 제 메시지를 물론 읽지도 않았고 버렸기에 그가 기억조차 못하는 것을 직감했습니다. 그 당시는 컴퓨터없이 메시지를 쓰는 시대였습니다. 생각해보면 그가 읽기도 거북스러운 손글씨 게다가 훌륭한 독일어도 아닌 것을 그렇게 취급하는 것이 이해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주에는 8장 말씀을 다시 공부하여 보충하기로 했습니다. 그 주말에 제 삶에 있어서 가장 커다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Sola Scriptura의 의미를 더이상 도그마가 아닌 실제적 삶으로 체험케 되는 사건이었습니다. 베드로의 “주는 그리스도이니이다”하는 고백 후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저는 이 말씀 앞에서 “나는 매일 학생을 심방하고 그리고 세계선교를 섬기고 있다. 이렇게 나의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가”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하셨을 때 이 말씀이 제 숨을 멎게 했습니다. 이 말씀은 제 자신의 최종적인 동기 곧 최고의 가치로서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는 저의 생존의지를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것을 따르고 있는 제 삶이 바로 생명을 잃어버리는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나아가 그러한 제게 계속 저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살 것인가 아니면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해 살 것인가, 그리고 그 두가지 삶의 필연적인 결과로 구원과 상실 바로 그 선택 앞에 저를 세운 것이었습니다. 이날 이렇게 이 말씀은 제 심령에 덮쳐와 저의 가장 깊은 삶의 동기를 드러냄으로써 저로 하여금 제 삶의 본질을 직관케 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제가 복음역사를 위해 얼마나 많이 제 시간, 제 물질, 제 수고를 희생하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제가 무엇을 위하여 그 모든 것을 했는가 하는 근본적인 동기의 문제요, 제가 신앙인으로서 도모지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가 하는 삶의 목적의 문제요, 또한 제 인생 그 모두가 그리스도와 복음을 향해 있는가 하는 원칙의 문제였습니다. 저는 과연 자신이 지금까지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가 되돌아보았습니다. 스스로 그리스도 주와 복음을 위해 헌신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른 바 그 “헌신”을 통해 저 자신을 구원코자 했지 결코 저 자신을 잃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양을 얻고, 제자를 얻고, 선교생활의 열매, 보람을 얻고 그를 통해 결국 제 자신의 생명을 얻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선교사역을 통해 저는 이렇게 자아의 성취와 완성 그리고 그를 통해 결국 자신의 천하를 얻고자 했던 것이었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배척하고 자아 실현과 자아완성을 인생의 목표로 삼고 살고 있는 그러한 삶을 비난하였지만 바로 제가 그러한 삶을 살고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제 자신이 제 삶의 목적이었습니다. 말하자면 결국 제 모든 선교활동은 심지어 하나님도 궁극적으로 제 자신의 행복을 위한 수단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이 날 밤 '자기"는 제게 있어서 이렇게 스스로의 정체성을 자아실현을 통해 완성코자 하는 이기적인 생존의지로 드러났습니다. 이 “자기”의 강력한 죄성 그리고 이를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무력함으로 인한 절망이 저의 심령을 채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계속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예수님께서 제 목숨이 바로 제가 얻고자 했던 천하보다 더 귀한 자명한 진리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제 생명을 내놓으라고 하실 때 예수님께서는 실로 제게 참 생명, 곧 영생을 주시기 원하셨습니다. 저는 이날 절망 가운데서 제게 이렇게 영생을 약속하시며 영생의 길을 가도록 권면하시는 예수님의 뜻을 새로이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날 밤이 깊어져 사라 선교사와 아이들은 이미 잠들어 있었습니다. 그 밤 저 또한 한숨과 절망, 새 방향과 소망을 전전하며 그 자리에서 그대로 잠이 들었습니다. 새 아침이 도래했습니다. 눈을 뜬 바로 그 순간 무엇인가 달라졌다는 것을 직감했습니다. 먼저 제 마음을 짓누르던 간밤의 한숨과 절망이 흔적없이 사라진 것을 느꼈습니다. 자유함이랄까 그리고 평안 또는 기쁨등으로도 정확히 표현할수 없는 그 무엇이 제 심령에 넘쳤습니다. 제 자신은 마치 깃털같이 성령의 대기권을 떠다니고 있는것 같았습니다. 저는 여느 때처럼 아이들을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양들을 초청하러 가고자 집을 나섰습니다. 저는 스스로에게 물을 수 있었습니다. “자 오늘은 가서 시간을 잃어버리고 물질을 잃어버리자! 또 무엇을 잃어버릴까?" 그리고 여느 때처럼 학생들을 초청하였습니다. 제 심령엔 더 이상 피해의식이 없었습니다. 실패할 것에 대한 두려움도 없었습니다. 절망하고 갔던 어제의 바로 그 길을 저는 확신을 가지고 가게 된 것이었습니다. 과거 자신의 인생이 실패했다는 생각으로 주위의 모든것이 짜증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제가 자유함을 얻었을 때 제 심령에는 주위 사람들에 대한 따뜻한 관심과 사랑이 흘렀습니다. 저는 먼저 가정을 돌아보았습니다. 그 당시 Sarah선교사는 직장에서 근무하면서 아이들을 키우고 가사를 돌보며 예배와 합심기도, 심방 등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Sarah선교사는 저로 인한 모든 수고를 감당하고 실패같아 보이는 하나님역사를 섬겨왔던 것이었습니다. 제 마음에 ' Sarah선교사를 향한 감사와 사랑이 솟아났습니다. 그래서 "Sarah, 내가 만일 죽어 다시 태어난다면 그리고 또 결혼하게 된다면 나는 꼭 당신과 결혼하고 싶어"라고 말했습니다. 말수가 적은 Sarah선교사는 아무 소리 없이 듣고만 있었습니다. 그러더니 “나도 그렇게 하겠어요" 하고 고백하였습니다. 독일학생들이 다르게 제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그들이 때로는 제품 안에서 마치 새근거리며 숨쉬는 작은 새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그들의 개인주의, 그들의 인생관이 속속들이 이해되었고 때에 따라 대견스럽다고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그들의 지식과 논리 심지어 마음의 세세한 생각들도 마치 손에 잡히는 듯 했기에 이제는 복음이 그들의 삶에 어떤 도전과 답을 주는가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되어졌습니다. 1986년 직업교육을 받을 당시 Mannheim으로 가고 있는 차안에서 한 젊은이가 건너편에 앉아있었습니다. 그가 신앙서적을 들고 있었습니다. 그에게 “당신은 예수님을 믿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잠시 생각하는듯 머뭇거리더니 제 가슴을 뛰게 하는 대답을 했습니다. “찾고 있어!” 그를 성경공부에 초청하였습니다. 그의 이름은 Reiner였습니다. 그와의 마가복음 공부는 특별한 경험이었습니다. 그는 말씀을 스폰지가 물을 빨아들이듯이 듣고 그리고 받아들였습니다. 제가 설명하는 모든 것을 받아 적었습니다. 심지어 저의 기침소리까지 받아 적는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와의 성경공부는 평균 4시간씩 진행되었습니다. 그와의 성경공부가 있는 날은 장기전에 대비해야 했습니다. 2시간쯤 공부하다가 잠깐 쉬고 맨손체조를 하고 다시 후반전에 돌입하곤 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의 도전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Koeln에도 올라가 말씀교제를 하였습니다. 창세기 12장 3절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는 Heidelberg에 믿음의 조상으로 세움받았습니다. 그러는 사이 그와의 공동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저희는 당시 방 3개가 있는 집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부부 침실, 아이들 방 그리고 예배드리는 방이었습니다. 그는 독립된 방을 얻기까지 아이들과 같이 거하였습니다. 공동생활을 하며 그를 점차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결단을 주저하고 시간을 잘 지키지 않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기세계에 집착하는 경향이 심했습니다. 저는 그가 스스로 성경읽기와 기도에 집중하는 그것이 훌륭한 영적 자질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믿음의 대상이신 예수님께 집중하기보다는 자신의 개인적 확신에 이르고자 했습니다. 이렇게 그의 영성은 예수님을 닮아가기보다는 그 스스로가 보다 거룩해지고 결국 자기완성을 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을 바라보기보다 습관적으로 자기의 영적 상태를 점검하였습니다. 그는 방향을 전환하여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께 집중해야 했습니다. 이것은 긴 싸움이 되었고 많이 진전되었습니다. 그가 사회자로 예배를 섬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당시 셋째가 태어나 갓난아이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았습니다. 예배후에는 다행히 부엌이 어느 정도 넓어 예배에 참석한 사람들과 부엌에 모여 커피를 마시며 교제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응접실처럼 사용하던 부엌은 길거리에서 주워온 헌 탁자, 의자 등으로 꾸며져 독일사람들의 삶의 수준과 너무 달랐습니다. 그러나 Reiner는 이 모든 것을 다 영접하고 한국음식도 잘 먹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 하나님 역사에 대한 주인의식 그리고 어떠한 양이던지 인내로 감당하는 점이 있습니다. 그는 책임감과 보통 사람이 흉내낼 수 없는 탁월한 인내를 가지고 현재 Heidelberg의 책임 목자요 독일의 지부장이 되어 직장, 가정 그리고 독일의 전체역사와 유럽을 섬기고 있습니다. Reiner를 섬기는 가운데 제 직장의 문도 열렸습니다. Heidelberg대학 약학과연구실에서 화학기술조교로 근무하는 것이었습니다. 한국에서 88올림픽이 개최되던 해였습니다. 제가 했던 일은 새로운 약품개발을 위한 특정 유기물을 합성하는 것이었습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독일사람들의 됨됨이와 독일사회를 보다 더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겪은 독일사람들은 철저한 질서의식이 있고 자기 분야에 충실한 것으로 그것은 그들의 특징이었습니다. 저는 연구실의 축적된 방대한 연구자료를 보며 그들이 기초적인 단계부터 전문적인 분야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연구하여 집대성해 놓은 것을 보고 감탄하였습니다. 개인 개인도 전문지식과 함께 풍부한 상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러모로 독일사람들이 실력있는 세계 일등시민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었습니다. 가끔 그들은 너무 원칙에 충실하여 무자비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습니다. 저는 이러한 사회경험을 통해서 성경공부를 하고 목자로 세움받고 동역하는 우리 모임의 독일목자들은 특별히 하나님께서 택하여 세우신 천사들인 것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Reiner가 공동생활하던 그 시기에 두 여학생이 성경공부하러 왔습니다. 그것은 자매사역이 어려운 독일에서 특별한 일이었습니다. 당시는 68학생운동을 통해 촉발 된 여파가 지속되던 Feminism의 때 였습니다. 여성들이 자유도 추구했습니다. 여성들이 강해졌습니다. 그 때까지 남자들은 운전을 하여 목적지에 닿으면 여성을 위해 자동차 문을 열어 주었습니다. 그것은 오랜 전통이었습니다. 그러나 68학생운동이후 이 풍습은 사라졌습니다. 스스로 강해진 여성들에게 그런 전통은 의미가 없는 하나의 형식에 불과했습니다. 여성들은 임금의 격차를 철폐하고자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나아가 그들은 남성들이 그 때까지 향유하던 신체적, 사회적 우월성에 도전하였습니다. 심지어 어떤 여성들은 남자들처럼 차려입고 궐련을 물고 술집에서 장기를 두는 시위적인 생활을 했습니다. Feminism운동은 자연히 Sex Revolution으로 확산되어 나갔습니다. 성에 관해 그때까지 독일남성들은 스스로에게는 관용적이고 여성에게는 순결을 요구하는 이중적인 태도가 있었습니다. 여성들은 이제 성에 대해 같은 권리를 요구했습니다. 또한 여성들의 일자리가 많아지면서 여성들은 남성들에게 더이상 경제적으로 매이지 않았습니다. 낙태의 자유를 부르짖는 여성이 외쳤습니다. “나의 배는 내게 속한다.” 15세 이하 소녀들의 낙태율이 70%가 증가하였습니다. 동성애를 옹호하는 기사들도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거리에서 대대적으로 동성애자들의 Performance가 행해졌습니다. 여기저기서 Coming out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Berlin시장이 전당대회의 연설에서 Coming out하였습니다. 외무부 장관 Guido가 Coming out하였고 외국을 순방하며 자기 파트너를 동반하였습니다. 성직자들의 성적 탈선이 자주 보도되기 시작했습니다. Razinger 교황이 변명하였습니다. “그것은 68학생운동 때문이다.” 핑계라고 비난받았으나 한편 일리있는 이야기였습니다. 비록 가정이 유지되어도 이전과는 달랐습니다. 여성이 자기들의 보다 많은 권리를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남편을 부엌으로 내몰고 부엌일을 돕도록 요구했습니다. 남편들은 옛날 숲속을 포효하며 산돼지를 잡던 모습과는 다르게 소심해졌습니다. 통계에 의하면 실제로 독일 여성들은 해마다 신장이 커지고 옷과 신발 등의 사이즈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여성들이 점점 남성화되고 있고 그리고 남성들은 점점 여성화되고 있다고 유력한 주간지가 보도했습니다. 남자들은 여성들을 두려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태국, 필리핀 등 아시아에서 신부감을 데려왔습니다. 이러한 분위기 가운데 독일 여학생들을 제자로 세우고 그리고 독일사람들의 가정을 이루는 것이 중요한 기도제목이었습니다. Heidelberg 센터에 나오기 시작한 두 여학생은 이름도 Birgit으로 같았고 전공도 같은 법학이었습니다. Birgit Pierce는 Sarah선교사와 성경공부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녀는 키가 크고 뭇 남성들의 눈에 띄는 용모를 하고 있었습니다. 목소리도 컸습니다. 법을 전공하고 목소리도 크니 논쟁이 벌어지면 몇 마디로 상대방을 쉽게 제압했습니다. 그녀가 요한복음을 공부하였습니다. Sarah선교사는 당시 태어난 넷째 아기에게 젖을 먹이면서 또 무릎으로 아기를 구슬리면서 그에게 말씀의 뜻을 설명하였습니다. 영적인 소원이 별로 없던 그녀는 Sarah선교사가 그녀에게 마음을 쏟는 사랑에 이끌려 계속 성경공부를 하러 왔습니다. 4장을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Sarah선교사는 예수님이 어떻게 사마리아여인을 도와주셨으며 그리고 그녀가 어떻게 변화되었는가 말했습니다. 그 여인이 물동이를 내려두고 자기 동네사람들에게 달려간 구절을 같이 읽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그 사마리아 여인이 이렇게 선교사가 되었다”고 설명하였습니다. 갑자기 Birgit의 표정이 달라졌습니다. 그리고 Sarah 선교사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공격적으로 물었습니다. “당신이 나를 선교사로 만들기 위해서 이 성경공부를 하고 있는 것이냐?” Sarah선교사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너도 선교사가 될 수도 있지. 네가 그렇게 된다면 얼마나 좋겠니!”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녀가 그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잘 있어!” 하고 가버렸습니다. 그녀를 다시 심방갔습니다. 그리고 “성경공부는 하지 않더라도 예배는 나와라” 하고 권면했습니다. 그녀가 다시 예배에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여러 주 예배에 참석한 후 다시 성경공부를 하지 않겠냐고 물었습니다. 그녀는 이를 기꺼이 영접하고 다시 성경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알고보니 예상치않은 곳으로부터 그녀를 위한 도움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계속 우리와 관계를 맺고 성경공부를 할 것인지 고민하며 그의 어머니에게 전화를 했다고 했습니다. 어머니는 “그 모임에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치면 그곳을 계속 가고 아니면 가지 말라”고 방향을 주었습니다. 신앙적인 그의 어머니가 그녀에게 결정적인 도움을 준 것이었습니다. 아닌지 나름대로 고민하였습니다. 어차피 Birgit의 눈에는 동양인 선교사, 교회에서 전혀 하지않는 1:1 성경공부, 게다가 가구라고는 색이 바래고 허름하다 못해 여기저기 헤어지고 벗겨진 긴의자, 낡은 탁자와 거기에 어울리는 낣은 의자들, 교회도 아닌 가정의 조그만한 방에서 드리는 예배 등 이 모든 것은 결코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때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어머니는 “그 모임에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치면 그곳을 계속 나가서 공부하고 아니면 가지 말라”고 방향을 주었습니다. 그의 어머니가 그녀에게 결정적인 도움을 준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계속 왔습니다. 사랑과 신뢰의 관계가 깊어졌습니다. 그녀는 저희와의 교제를 즐거워하여 주일날 예배가 끝나도 커피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또 저녁때까지 머물기도 했습니다. 넉넉치 않아 때로는 감자밖에 없었을 때도 그것을 요리하면 그녀는 기뻐하며 같이 먹었습니다. 그리고 어린 셋째, 또 더 어린 넷째 아이들을 데리고 놀며 기쁜 시간을 보내곤 하였습니다. 또한 같이 심방을 가서 치대에 다니는 한 여학생을 말씀으로 가르치는 목자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원래 Birgit는 연극을 공부하고 싶어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아버지는 “너 그것으로 밥 벌어먹을 수 있어?” 하였기에 그녀는 법학을 전공으로 택했습니다. 그녀는 학과공부에 큰 흥미가 없었습니다. 그녀는 자주 연극을 보러 다니며 끝나면 친구들과 어울렸습니다. 그리고 배우의 연기가 어떻고, 줄거리가 어떻고 등 연극비평을 하고 기숙사에 늦게 돌아오기가 일쑤였습니다.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다 보니 오전 강의를 빼먹는 것이 항다반사였습니다. 졸업할 때가 가까워 왔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졸업시험을 치를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녀에게 도전하였습니다. “너 내일 새벽 기도모임에 나와!” 그녀는 거칠게 반발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날 그녀는 새벽기도에 나왔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녀는 그 후에도 매일매일 나왔습니다. 가끔 늦기도 했지만 몇 년동안 단 한번도 거르는 일이 없이 새벽기도에 나왔습니다. 그녀의 생활패턴이 바뀌어졌습니다. 처음에는 오전에 졸곤 했지만 습관이 되자 오전시간이 남게 되었습니다. 밀린 공부를 감당하기 시작했습니다. 센터에 와서 동역자들의 기도지원을 받으며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드디어 졸업시험을 앞두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거의 불가능하게 보였던 시험을 단번에 합격하였습니다. 그녀는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하는 말씀을 자신의 일생요절로 영접했습니다. 오늘까지 늘 이 말씀으로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Chicago의 Dan Pierce목자와 선교가정을 이루고 선교사가 되어 미국으로 파송되었습니다. 저희는 그녀의 어머니는 물론 그녀의 가족과 신앙적 유대감을 갖고 서로 방문하며 교제를 했습니다. 한번은 그 어머니를 연합수양회때 초청하였습니다. 그 수양회에는 마침 다른 지구에서도 몇몇 어머니들이 오셨습니다. 자연스럽게 어머니들의 Fellowship이 열렸습니다. 한 어머니가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우리 아들이 성경공부를 하고 변했어요.” 그 옆의 어머니가 그것을 듣고 더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글쎄, 우리 딸이 2주전에 목자로 세움받았다니까요.” 그 자리에 있었던 Birgit 어머니가 그것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 두 어머니가 아무 소리 하지않고 가만히 듣고만 있던 Birgit 어머니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오셨나요? 당신 자녀도 이 수양회에 참석했습니까?” Birgit 어머니가 대답했습니다. “우리 딸은 얼마 전에 미국에 선교사로 파송되었습니다.” 다른 두 어머니가 입을 다물었습니다. Birgit의 어머니는 그후에도 저희와 서로 성도의 교제를 이어갔습니다. 그러던 중 2010년 부고장이 왔습니다. 여느 부고장과 달랐습니다. 그 안에 “Steger 여사가 소천하였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오라는 고인의 부탁이 있었습니다. 상복이 아닌 밝은 옷을 입고 오십시오. 오셔서 하늘나라 입성을 축하해 주십시오”고 쓰여져 있었습니다. 저희가 갔을 때 과연 분위기가 여느 장례식과 달랐습니다. Birgit의 어머니는 소천직전까지 고통하고 진통제가 투여되는 중 남편과 또한 둘째딸을 불러 믿음을 지키도록 권면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기절하고 깨어나면 또 불러 기도해주고 축복해 주었다고 하였습니다. 위로하러 갔던 저희들은 큰 위로를 받고 믿음을 배우고 돌아왔습니다. 다른 Birgit은 Heidelberg에 남아 믿음의 어미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선천적으로 몸이 정상적이지 않았습니다. 성격은 외동딸로서 게다가 과잉보호를 받고 자라왔기 때문에 이기적이고 고집스러웠습니다. 또한 그녀는 자신의 몸의 상태에도 불구하고 결혼에 대한 꿈이 있었습니다. 몇년동안 이기심과 이룰 수없는 결혼의 꿈으로 갈등하며 내적 고난을 겪었습니다. 그녀는 차츰차츰 변하여 제 메시지를 타이핑해주는 등 마치 비서인 양 저를 섬겨주었습니다. 여전히 결혼의 소망을 끊지못하던 중 여름수양회에서 “잉태하지 못하며 출산하지 못한 너는 노래할지어다. 산고를 겪지 못한 너는 외쳐 노래할지어다. 이는 홀로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네 장막터를 넓히며 네 처소의 휘장을 아끼지 말고 널리 펴되 너의 줄을 길게 하며 너의 말뚝을 견고히 할지어다“ (사 54:1.2)는 말씀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Heidelberg의 영적인 어미가 되는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이며 또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축복이라고 확신하였습니다. 그녀는 법대를 졸업한 후 Heidelberg대학교 교직원으로 취직하였습니다. 그리고 영적인 어미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그녀의 장막의 터를 넓혔습니다. 그녀는 대학교에서 성경공부 모임을 이루고 양들을 섬겼습니다. 퇴근하면 수시로 요리를 하여 동역자들과 양들을 자기집으로 초청하였습니다. 그리고 자기집을 개방하여 당시 학생이던 Regina목자와 장막을 이루었습니다. 다른 한편 그녀의 부모는 자기 딸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애지중지 키워온 자기들의 무남독녀가 돈한푼도 받는 일없이 어떤 외국인의 비서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 수치스럽고 그것에 대해 분노하였습니다. 자기 딸을 방문하던 중 의도치않게 저와 마주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불편한 표정으로 저를 외면하였습니다. 그녀가 신앙생활에서 돌이키지 않자 그녀의 부모는 그녀에게 “유산을 받고 싶으면 그 모임에서 나오라. 아니면 우리와 관계를 끊자!”고 하였습니다. 그녀는 부모를 사랑하였지만 예수님을 더 사랑하였습니다. 그녀는 주님과 형제자매들에게 더욱 헌신하였습니다. 장막의 터를 넓혀 여러 다른 지부 수양회에도 참석하여 섬기기도 하였습니다. 2014년 그녀는 주일예배후 여느 때처럼 즐거운 교제를 나누고 집으로 갔습니다. 그 다음날 학교에서 그녀가 아무 연락도 없이 출근하지않았다고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그녀의 집을 열었습니다. 그녀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상체는 침대위에 얹은, 마치 기도하는 자세로 숨져 있었습니다. 평소 그녀는 심장에 어려움이 있었는데 의사들은 그녀가 기대수명을 초월한 것에 대해 놀라곤 하던 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녀에게 넉넉한 삶을 주시고 때가 되자 그녀를 고통없이 하늘나라로 데려가신 줄 믿습니다. 바로 그 이틀 뒤 장례식이 열렸습니다. 독일각지에서 또 프랑스를 비롯한 외국에서도 선교동역자들이 와서 그녀의 소천을 애도하였습니다. 장례식후 센터에 모여 Birgit의 사진들을 보며 그녀의 삶을 추모하였습니다. 그리고 평소 Birgit과 친분을 나누었던 분들의 간증도 들었습니다. 그녀의 부모가 그날 그 모든 순서에 같이 참석하였습니다. 처음 그들은 슬픔과 분노에 싸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 날 장례식장에 가득 찬 그리고 멀리 외국에서까지 온 추모객들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사진을 통해 자기들의 딸이 여러 곳의 수양회에 참석하고 여러 국적의 성도들과 사랑의 관계를 맺고 또한 그들과 교제를 나누며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의 그녀와 공유했던 영적 교제에 대한 간증 등도 들었습니다. 그렇게 그녀가 남긴 그 삶의 자취가 그날 그녀가 부모가 예상치 못한 인상깊은 모습으로 펼쳐진 것이었습니다. 그 부모는 자기 딸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미쳤는가 또한 스스로도 얼마나 보람있고 행복한 삶을 살았는가 보고 감동하였습니다. Birgit의 어머니는 전형적인 독일의 부인이지만 과거에는 68학생운동의 영향을 받고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Birgit을 출산한 후에도 전통적인 가정부인으로 머무는 대신 자기 나름대로의 삶을 추구하고자 여행다니는등 68학생운동 정신을 표방했었습니다. 모임이 끝난후 그 어머니가 Sarah선교사에게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Sarah선교사의 목을 껴안고 말했습니다. “내 이름은 Karin이야. 그렇게 내 이름을 불러줘. 우리 서로 말을 트자. 우리 서로 친구가 되자!” 또한 그 아버지도 제게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손을 내밀며 친교의 장을 열었습니다. 이후로 그녀의 부모는 정규적으로 매달 예배에 참석하며 저희 모두와 사랑의 교제를 나누고 있습니다. Brigitte목자는 생물학을 시작하던 새내기때 성경공부에 초대받았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미국인 치과의사이고 독일인 어머니는 선생님으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부모가 이혼했던 터였고 어머니는 엄격하였습니다. Brigitte는 독일인으로써 사회 자본주의와 복지의 혜택을 누리고 성장했지만 68학생운동의 후예였습니다. 그녀는 자유도 물론 좋지만 그보다도 평등한 사회를 꿈꾸었습니다. 당시 그녀에게 자본주의는 부익부빈익빈의 불평등을 야기시키는 자본계급을 위한 시스템이었습니다. 그녀는 생물을 전공하고 있었지만 사회주의 계통의 책을 읽고 또 그런 정치모임을 기웃거렸습니다. 그녀에게는 자본주의의 불공정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Karl Marx가 유일한 대안으로 생각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무신론적인 인생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침 그 당시 루마니아의 차우체스코 정권이 몰락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소련연방이 무너지기 2년 전이었습니다. 루마니아의 몰락은 외부의 침략이나 어떤 간섭없이 그 내부의 모순으로 비롯된 붕괴였습니다. 차우체스코 정권이 무너지면서 상상도 못할 참상이 드러났습니다. 나라 전체는 감옥과 같았고 특별한 보호가 필요해 격리된 어린이들은 지옥에 던져져 있었습니다. 그것은 겉으로는 유토피아를 선전하는 공산주의의 숨겨진 일상이었습니다. Brigitte는 이를 통해 공산주의의 일당 독재가 태생적으로 안고있는 잔혹한 폭력을 보았습니다. 그녀는 그녀의 세계가 무너지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녀에게 분명해진 것은 공산주의는 더 이상의 대안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마음을 비우고 성경공부를 계속했습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수양회에 참석하였습니다. 그녀는 바로 그 수양회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사람이 선전하고 세우는 유토피아의 허구와 그리스도의 희생과 용서위에 세우는 하나님의 나라가 극명하게 대비되었습니다. 순간 그녀의 공허했던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녀는 그 말씀으로 거듭났습니다. 그녀는 성장하여 충성스러운 성경선생이 되었습니다. 공부도 충성스럽게 감당하여 생물학 박사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오늘날까지 여러 양을 꾸준히 섬기고 있습니다. 그녀는 Reiner목자와 가정을 이루어 현재 세 아이들을 낳아 키우며 센터사역을 주인의식을 가지고 섬기고 있습니다. 이 자매 조상들 이후로 Regina, Nicole, Angelika, Simona, Simone 그리고 Tanja 자매등이 동역하고 있습니다. Reiner목자가 조상으로 세워져가던 때 기숙사를 심방하여 의대생을 만났습니다. 그의 이름은 Markus였습니다. 성경공부에 초청하였습니다. 그가 성경공부를 시작하였습니다. 그 또한 하나님이 아브라함 한사람을 개인적으로, 인격적으로 도와주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매우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는 교회에서 자랐으나 한 인간을 그렇게 인격적으로 도와주시는 하나님을 알게된 것은 새로운 깨달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신도 그러한 하나님의 인격적인 방법대로 1:1을 통해 도움을 받고 있다는 것이 또한 감명받았습니다. 그 스스로도 그의 친구를 초청하여 1:1로 도왔습니다. 그가 센터에 머물면서 그의 취미가 눈에 띄었습니다. 그것은 망가진 자전거를 고치는 것입니다. 취미치고는 좀 특별하지만 처음에는 그것이 건전하고 유용하게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학과공부에 어려움이 있어 센터에 와서 공부를 하던 중에도 자전거를 보면 도저히 참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 기어이 자전거를 고쳐야만 했습니다. 그 건전한 취미는 말하자면 전공공부에 방해거리였습니다. “너는 자전거만 보면 왜 그렇게 자제를 못하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나는 내 조그마한 수고를 통해 망가진 자전거가 온전케 되면 성취감을 느껴”라고 대답했습니다. 실질적으로 그의 장래의 꿈은 자전거포를 열어 망가진 자전거를 실컷 고치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그의 취미생활을 통해 성취감과 기쁨을 자주 누리다 보니 그의 학과공부가 계속 밀렸습니다. 그래서 동역자들은 그를 위해 망가진 자전거가 그의 눈에 띄지않도록 특별히 수고를 해야 했습니다. 제가 한번은 Markus가 자전거포를 열려한다는 이 심각한 문제를 전박사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전박사님은 이를 듣자마자 어떻게 세상에 그런 일이 있냐고 웃기 시작하여 한동안 그칠 줄 몰랐습니다. 그의 학과공부가 밀리고 결국 첫 국가시험에 낙제하였습니다. 공동생활을 하고자 그를 제 가정에 초청하였습니다. 그 때는 센터 독립했지만 제 가정은 여전히 방 세칸 짜리 집이어서 부부침실, 딸 둘이 방 하나를 차지하고 그리고 두 아들들이 나머지 한 방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제 아들 둘과 같이 한방에서 공동생활을 하였습니다. Reiner는 한번도 불평하지 않고 이것저것 잘 먹었는데 Markus는 한국음식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가족이 다 모이는 저녁식사 때 Sarah선교사는 빵을 내놓거나 아니면 그가 좋아하는 감자를 요리했습니다. 저는 같이 먹지만 먹고나면 식사를 한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기 전 부엌에 나와 라면을 끓여 먹으면 비로서 뿌듯한 마음이 들어 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운이 좋은 어느날은 저녁식사때 한국음식이 나왔습니다.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런데 Markus는 그것을 조금만 그것도 억지로 먹는 듯했습니다. 그리고 잠자기 전 그는 부엌으로 나와 빵에다 버터를 발라 소시지를 얹어먹고 그런 후에야 그도 비로서 뿌듯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지나놓고 보면 그러한 Markus가 여러해 동안 김치냄새나고 된장냄새나는 저의 가정에서 공동생활을 한 것이 참으로 기적같고 감사합니다. 그런데 사실 그의 어려움은 한국음식뿐만은 아니었습니다. Markus가 당시 초등학생이던 제 작은 딸아이와 가끔 티격태격 싸웠습니다. Markus가 그 아이를 체벌한다고 엉덩이를 때렸습니다. 제 아이가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모래를 퍼다가 그 신발에 가득 채워 성공적인 복수를 했습니다. Markus는 본래 성격이 능글거리기를 잘 하고 책망받는 것에 대해 괘념치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주일예배는 왜 꼭 나와야 되냐?” 하는 등 당연한 것을 가끔 뒤집어 저와 Sarah 선교사의 속도 뒤집어놓고는 하였습니다. Sarah선교사가 한 번은 참고 참다가 폭발하여 “그만 나가서 내 눈에 다시는 보이지 마!” 하였습니다. 그러면 그는 능글맞게 웃으며 씩씩거리는 Sarah 선교사를 달랬습니다. 그는 성경공부중에도 가끔 뒤집어 몇 시간이고 토론을 해야 했던 적도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저희들을 가장 많이 뒤집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저희들의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지금도 그는 가끔 우리의 속을 뒤집어놓고 능글능글 웃기를 잘합니다. 그가 드디어 국가시험을 모두 패스하고 의사가 되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Markus를 위해 여기저기서 며느리감들을 주선하였습니다. 그리고 “얘야! 이번주 집으로 내려와 선을 보거라!”고 연락해왔습니다. 제가 물었습니다. “너 선보러 갈거냐?” 그가 천연덕스럽게 대답했습니다. “그럼! 갈거야.” 그가 능글맞게 웃는 모습을 보며 제가 차츰 뒤집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 너 그 여자가 맘에 들면 그 여자와 결혼할거냐?” “아니! 꼭 그렇지 않아!” 제가 다그쳤습니다. “그러면 왜 선보러 가냐?” 그는 대답을 할듯말듯 제 눈을 쳐다보고 능글능글 웃었습니다. 저는 더 이상 뒤집어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했습니다. 제가 다시 물었습니다. “너 도대체 믿음의 결혼할거냐” “그럼!” 그가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능글맞게 웃으며 한마디 덧붙였습니다. “좋은 사람 있으면.” 저는 그가 한국사람과 같이 사는 것이나 한국문화를 드러내놓고 좋아하지 않는것을 알고있었지만 그 당시 독일자매들 중 합당한 신부감을 찾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가 한국의 신앙적인 여성과 결혼했으면 하는 바람가운데 기도하던 중이었습니다. 연말에 동역자들의 송년회가 열렸습니다. 어떤 가정은 나와서 찬송가를 불렀습니다. 아이들도 앞에 나와서 짧은 연극을 하였습니다. Markus가 무엇인가 발표할 듯이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능글맞게 웃으면서 앞으로 나왔습니다. 그가 노래를 불렀습니다. “달, 달, 무슨 달, 쟁반같이 둥근 달.” 제가 뒤집어질 뻔했습니다. 물론 이번에는 다른 방향으로. 그가 언제 한국 동요를 알았는지, 도무지 언제 연습했는지 놀랐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신기해하고 웃고 넘어갈 그 이상의 사건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말로하는 대신 그것을 통해 능글맞게도 “나는 한국 자매를 영접하기로 마음을 정했어” 하는 싸인을 보내는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연희센터의 아름답고 신앙이 분명한 자매목자를 소개받았습니다. 가정을 이루기 위해 Sarah선교사가 한국에까지 그를 동행했습니다. Sarah선교사가 소식을 전해왔습니다. “Markus목자가 공항에서 꽃을 들고 있는 Maria목자를 보더니 글쎄 입을 다물지를 못해!” Markus가 한국문화를 꺼려한다는 것이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결혼예식, 한국음식, 폐백 등 모든 것을 기쁨으로 영접하고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지금 그의 가정은 네 자녀를 낳아 키우고 있습니다. 또한, 그는 환자들의 신뢰를 받는 의사일뿐 아니라 센터에서 가구, 기구 등의 수리, 센터 관리하는 문제가 생길 때마다 전문가적인 식견과 실력으로 기쁘게 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망가진 자전거도 계속 고치고 있습니다. Martin목자는 Heidelberg에서 약 200km 정도 떨어진 시골에서 태어나 성장했습니다. 그곳은 Markus목자의 고향 근처이기도 합니다. 그는 부모의 사랑으로 자랐지만 부모의 간섭없이 독립적인 삶을 살기 원했습니다. 그 또한 68학생운동의 후손으로 자아실현이 그의 삶의 최고의 가치였습니다. 고등학교 졸업시험을 마치고 대학에 진학하게 되었을 때 그에게 기회가 왔습니다. 지도를 펴놓았습니다. 그에게 당시 중요했던 것은 부모의 간섭이 미치지 않는 안전거리를 확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집으로부터 적어도 200 km 정도는 떨어져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대학교를 찾아보니 바로 그 200km 경계에 Heidelberg대학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Heidelberg대학에 지원하였습니다. 등록코자 Heidelberg에 왔습니다. 인구 15만의 Heidelberg는 시골에서 온 그에게 군중속의 고독을 느낄만한 대도시였습니다. 등록하는 첫날 한 젊은이가 그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대도시에서 바로 그에게 말을 걸어준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그 젊은이가 자기와 같은 지방의 사투리로 말을 걸어왔기에 마치 고향사람을 만난듯 반가웠습니다. 그는 능글능글한 Markus목자였습니다. Martin은 즉시 마음을 열고 성경공부 초대를 영접했습니다. 그는 성격이 조용하고 성실했습니다. 그는 그렇게 조용하고 성실하게 성경공부하고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지극히 충성스러운 동역자가 되어 센터의 모든 궂은 일을 도맡아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는 경성센터 출신의 아름답고 신앙적인 Petra선교사와 가정을 이루어 두 아이를 낳고 동역하고 있습니다. 그들 중 더러는 센터건물이 따로 없었던 가정교회 때부터 예배를 같이 드렸었습니다. 당시 제 가정에는 그들 뿐아니라 다른 양들이 드나들고 또 밤 늦게도 찾아왔습니다. 식탁의 음식은 별로 풍요롭지 않았으나 그들과 아이들과 양들로 풍성했습니다. 그들은 모임이 끝나도 계속 머물고 싶어했습니다. 그들도 양들도 모임에 흐르는 사랑을 느끼고 아이들과 함께 모두가 한 가족이 되었습니다. 어울려 같이 기쁨과 웃음을 나누었습니다. 지금도 그들은 센터건물없이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던 그 때를 가끔 회상하며 나누었던 교제를 기쁨으로 추억합니다. 이들 모두가 오늘날까지 남는 자요 조상이 되어 하나님의 역사를 지키는 것을 감사합니다. Heidelberg UBF는 연희센터를 비롯해 본국 여러 지구의 기도지원과 선교사지원을 받았습니다. 그 첫 선교사는 Helen Kim선교사였고 그 이후 Peter, Grace Park, Wesley, Susanna Song, Johannes Kim, James, Esther Kim, Marek, Rebedda Lee, Thomas, Charis Jung, Josef, Rivka Yoon, Josua, Gloria Myung 등 여러 선교가정이 파송받아 와서 그릇을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그들 중 일부는 개척자로 보냄 받았습니다. 이 시간 헌신하신 선교동역자들을 생각하고 감사드립니다. 믿음의 조상들이 섰지만 제자양성이 순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한 의대 새내기가 성경공부를 시작하고 영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모임의 꽃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어느날 그의 부모가 나타나 그와 그의 모든 짐을 싣고 갔습니다. 또 사랑과 신뢰의 관계를 맺고 자라던 여러 양들이 갑자기 아무 연락없이 관계를 끊었습니다. 저는 나중 그것이 인터넷에 떠도는 UBF에 대한 비방이 그 원인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건이 생길때마다 아픔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문제에도 하나님께서 Toni와 Regina를 남겨 주시고 그들을 세우시고 사용하시는 것을 감사합니다. Toni는 아르메니아 정교의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그의 부모는 아르메니아 정교만이 유일하고 참된 기독교라고 확신하기 때문에 Toni가 우리 모임에 와서 성경공부하는 것에 대해 매우 못마땅해했습니다. 그의 부모와 가족들의 줄기찬 핍박이 있었습니다. 그의 두 형은 경찰인데 그는 제게 “UBF의 뒷조사를 하겠다. 그래서 밝혀질 모든 사실을 공표하여 UBF를 매장시키겠다”고 협박하였습니다. 모든 협박이 안 통하자 부모는 Toni가 집에 돌아오기만하면 가족들의 성경공부를 인도하게 하겠다고 하고 그의 신앙을 존중하겠다고 회유하였습니다. Toni가 집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아라메니아 정교와 Toni의 복음신앙의 차이가 갈수록 분명해지자 “당장 나가라”고 추방하였습니다. 그 당시 그는 교육대를 졸업하고 학교에서 실습을 할 때였습니다. 그는 핍박을 이겨내고 신앙의 본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결혼문제로 신앙이 더욱 성장하여 가정을 이루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는 현재 주일예배의 말씀의 종으로 쓰임받고 있습니다. Regina는 Berlin에서 Heidelberg으로 공부하러 왔습니다. 그녀가 Heidelberg에 첫날 길바닥에서 남들이 버린 UBF전도지를 줏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보고 센타에 스스로 찾아왔습니다. 성경공부를 하고 처음에는 소감을 잘 쓰다가 소감쓰는 것이 자기의 영적 성장에 도움이 안 된다고 소감을 쓰지 않겠다고 고집부렸습니다. 한번 그녀에게 개인적으로 받은 말씀이 있냐고 있으면 어떤 말씀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녀는 “왕같은 제사장”하고 자신있게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 말씀은 당시의 요절로 센터의 벽에 붙여 있었습니다. 제가 물었습니다. “어떻게 그 말씀을 받았냐?” 그녀는 “센터를 드나들 때마다 그 말씀이 늘 거기 걸려 있잖아! 그래서 들어오다가 보고 나가다가 보고 이렇게 자주 보게 되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영접하게 됐지!”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덧붙이기를 “내 이름이 Regina잖아? 그런데 그 뜻이 여왕이라는 뜻이야. 어때? 왕 같은 제사장! 나한테 딱 맞잖아!” Birgit Pierce에 이어 Regina도 그의 기이한 빛을 증거하기 위해 선교사로 파송되었습니다. 그녀는 중국연변대학교의 독일어 교수로 일하고 있습니다. 1980년대 90년대 Koeln, Bonn, Heidelberg 등의 지부에 주인들과 현지목자들이 세워졌습니다. Abraham Lee선교사가 유럽지부장으로 유럽과 독일역사를 섬겼습니다. 2001년 광풍이 불었습니다. 개혁하자고 하는 분들이 모임을 비판하고 자신들의 출신 센터의 동역자들을 모아 당을 이루었습니다. 하나였던 모임이 갑자가 갈라졌습니다. 상호간의 비난이 쌓이고 불신이 깊어갔습니다. 심지어 그 분들은 불신과 비난의 편지를 독일목자들에게까지 보내는 등 사태가 악화되었습니다. 오랫동안 사랑과 기도, 섬김으로 세워진 현지인 목자들이 하나 둘 넘어지기도 하였습니다. Heidelberg에서 그 것에 휩쓸려 선교사 세 가정, 독일목자 두 가정과 그리고 자라고 있던 여러 독일양들이 떠났습니다. 다른 한편 남아있던 사람들도 많은 상처를 받았습니다. 독일을 비롯한 유럽선교에 위기가 왔습니다. 그 때 Dr. Lee가 유럽선교를 책임을 맡아 섬겨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제 개인적인 신앙생활에 심히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제가 이를 영접했을 때 Dr. Lee, 배사라 그리고 Dr. John Jun 등 귀한 종들을 배우고 그들과 가까이 동역할 수 있는 은혜를 누렸습니다. 한번은 Dr. Lee에게 기도제목을 달라고 전화했습니다. Dr. Lee가 잠시 침묵하더니 곧 입을 열어 저를 책망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때는 제게 깍듯한 존댓말로 정중히 대해주셨고 또 어떤 때는 익살맞은 농담을 하고 같이 웃곤 했는데 그 날은 반말로 무자비한 책망을 퍼붓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겸손히 순종하고 배우고자 하는 저를 그가 왜 그토록 책망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책망이 오래 계속되었습니다. 드디어 책망이 끝났습니다. 전화기를 내려놓았을 때 저의 영안이 뜨인 것 같은 느낌이 왔습니다. 그는 제가 지나치게 의존심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겉으로는 겸손히 배우는 양해도 실제로는 스스로 책임을 지지않는 자세였습니다. 결국 그는 제게 물고기를 잡아 주는 대신 스스로 물고기를 잡도록, 자립적인 믿음으로 사역하도록 도와주신 것이었습니다. 배사라 선교사님을 배우고 같이 동역할 수 있던 기회를 감사합니다. 여유있게 웃으시며 또한 제가 보내드리는 보고서를 늘 기뻐 꼼곰히 읽어주시고 기도해주셨습니다. 한번은 배사라선교사님께 친히 유럽지부장 수양회에 오셔서 강의를 해달라고 부탁드렸습니다. 배사라선교사님이 “내가 그것을 마땅히 순종하겠다”고 겸손한 표현으로 승락하셨습니다. 그녀가 얼마 후 문제지와 강의안을 보내왔습니다. 그리고 제게 “네가 그것을 교정해 내게 다시 보내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모두의 성경 선생이신 그녀가 제게 방향을 받고 교정받아 강의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분이 한사람, 한사람을 독립된 인격은 물론이고 자기도 필요에 따라 방향을 받고 배워야 할 성경선생이라는 그러한 신뢰를 가지고 대하신 것을 새삼 알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도움으로 저는 유럽지부장들을 보다 존중하고 그들과 동역하는 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또한 배사라선교사님을 더욱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전박사님의 도움을 감사합니다. 그런데 그분에 대해서는 그 분이 현재 왕성하게 활동하시는 중이니 그분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후일로 미루겠습니다. 5년 전 저는 Washington, Chicago의 UIC, El Camino 등 미국의 부흥하는 지구 등을 돌아보며 제가 물러나 2선에서 사역할 때가 왔다고 느꼈습니다. Reiner목자가 후계자가 되었습니다. 이제 주님께서 저의 제 2기 신앙생활을 축복하시기를 기도합니다. 2. 유럽선교 유럽은 비교적 적은 땅에 7억 남짓한 인구가 50여개국을 이루고 있습니다. 유럽연합에서 독일은 영토의 크기와 인구수로 유럽의 큰 나라 중 하나이면서 동시에 정치적, 경제적으로 커다란 영향력을 미치고 있습니다. 독일은 시인과 사상가의 나라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 Bach, Haendel, Beethoven 등을 비롯한 세계적인 음악가를 배출하였습니다. 원래 독일은 당시 세계를 호령하던 로마의 문명과 접하기 전까지 역사의 무대에 야만족으로 등장했습니다. 이들은 농사보다는 주로 숲에서 산돼지를 사냥하여 먹고 살았습니다. 이들과 국경을 같이하고 있던 로마사람들에게 무식하고 용맹스런 이들은 골치거리였습니다. 전쟁을 하면 도모지 두려움을 몰랐습니다. 이들에게 어떻게 두려움을 가르칠 수 있나 고민하던 로마인들은 특별히 사자를 데려왔습니다. 그리고 사자를 그들 앞에 풀어 놓았습니다. 그러나 무식한 German인들은 지구상에 사자라는 동물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몰랐습니다. 사자가 달려들려하자 그들은 “야, 저 큰 개 좀 봐라! 저 개를 때려 잡자!” 하고 사자를 때려 잡았습니다. 이것은 Gombrich의 세계사에서 인용된 내용입니다. 이렇게 당시의 독일은 음악, 문학, 철학 등 수준높은 문화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로마사람은 „German민족의 그 강함의 비밀이 도대체 무엇인가?“ 궁금해 하였습니다. 역사가 Tacitus는 German종족들을 주의깊게 연구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강한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그에 의하면 German민족은 철저히 일부일처제였습니다. 또한 상급자에게 복종했습니다. 성적으로 방종하고 난잡한 로마사람들과는 달리 German민족에게는 충성과 신의가 내면화되어 있었고 그것이 그들을 그토록 강하게 했던 것이었습니다. 독일과 유럽의 개척은 Dr. Lee의 세계선교에 대한 열망과 기도로 시작되었습니다. 1967년 Dr. Lee는 그 해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개최된 국제복음주의학생회(IFES: International Fellowship of Evangelical Students) 모임에 참석했습니다. 그는 세계선교를 위해 지극히 작지만 의미있는 실제적 일을 실했습니다. 회의가 끝난 후 목자님은 당시 독일에 있던 한 자매를 심방하고 그와 독일개척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1969년 7월, 대전 UBF의 서인경, 이화자, 설동란 세 분이 간호사로 독일에 가게 되었습니다. 서독 선교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던 Dr. Lee는 이들을 단지 선진국에 돈 벌러 가는 일꾼이 아닌 미래의 선교사로 보셨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출국을 연기시키고 짧은 기간이나마 훈련을 시키셔서 그들을 선교사로 파송 하셨습니다. 간호사 중심의 자비량 선교사역의 시작 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서독은 UBF 선교 역사상 최초의 선교지가 되었습니다. 동시에 독일 360개 캠퍼스 선교와 유럽 45개국 선교역사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72년 8월 3년 계약을 마치고 1차로 돌아온 서인경 선교사의 선교보고도 기독교회관에서 성황리에 개최되었습니다. 독일선교를 지원하는 기도가 계속 불타 올랐습니다. 일용할 양식 표지에는 그들의 사진이 실리기도 했습니다. 1970년에 들어서면서 UBF에서 훈련받은 간호사 선교사들이 파송되어 왔었습니다. 독일에 온 선교사들은 바로 주위에서 이방땅의 문화충격에 처해있는 자신들의 동료 곧 한국간호사들의 영적 결핍상태와 대치되었습니다. 독일이 그때만 해도 기독교국가라고 하였지만 그들에게 영적인 도움을 줄 수 없었습니다. 그러한 분위기에서 많은 한국 간호사들은 삶의 무의미에 고통당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들로 하여금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 라고 질문케 하였습니다. 그들은 가난한 마음으로 인생의 해답을 찾고 있었습니다. 선교사들은 그들을 성경공부를 통해 도왔습니다. 시간을 내고 심방을 가고 자주 모이고 수양회를 이루었습니다. Dr. Lee가 1974년 스위스의 Rausanne대회 후 독일을 방문하고 그 이후로도 꾸준히 와서 선교동역자들을 도왔습니다. 본국에서 그들을 위한 열정적인 기도지원이 있었습니다. 한국간호사들간에 커다란 영적부흥이 일어났습니다. 1974년 9월 16-22일, 스위스 알프스 산 중턱에 위치한 Sewis에서 여름수양회가 열렸습니다. 모두 156명이 참석했습니다. 그리고 서독과 스위스에 흩어져 있던 선교사님들과 그들이 돕던 양들이 모여 UBF 역사상 첫 국제 수양회가 되었습니다. 이 수양회에서 Dr. Lee가 전한 메시지 ‘사람들의 빛’ 은 분기점이 되었습니다. 여기엔 말씀에 근거한 탁월한 메세지, 서독 간호사들에 대한 그의 간절한 심정과 그들 처지와 내면에 대한 깊은 이해 등이 녹아있습니다. 그 메시지 일부를 인용합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말씀은 한마디로 모든 생명의 근원이 하나님 이시라는 사실을 가르쳐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선물로 주셨기 때문에 세상에 태어나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청지기입니다. 생명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잘 살아보고자 하는 의욕이 있습니다. 복된 삶을 살기 위해 물질을 구하고, 안락함을 구하고, 명예를 구합니다. 살아보려고 하는 나머지 내가 가진 생명에 대해서 책임을 지려고 합니다. 그래서 원치 않게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마음속에 모실 수 있을 때만 진정한 행복과 삶의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며 예수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빛을 받아 인생의 빛을 발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또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을 마음 가운데 모시지 않는 사람들도 깊이 회개하고, 요한복음을 통해서 삶의 길을 찾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어떤 일을 한다 해도 무덤으로 가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덤으로 가는 존재들은 아닙니다. 구원을 완성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Dr. Lee는 이 말씀에 근거하여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을 선물로 받고 이 세상에 태어난 귀한 존재들이라는 것을 가르쳤습니다. 이 메시지를 통해 그 동안 운명적으로 생각하고, 어두움 속에 있던 사람들이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빛을 발견 하였습니다. 그들은 내던져지듯 아무렇게나 살면서, 삶을 낭비해온 것을 눈물로 회개했습니다. 이들은 그러한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소감을 썼고, 생명의 빛이신 예수님을 위해 살 것을 결단했습니다. Sewis 수양회에 참석한 많은 이들이 처음으로 예수님을 만나고 감격하고 또한 그 후 위대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들 중 특히 Petra 선교사의 초청으로 Sewis수양회에 참석한 Volker Keller 형제의 변화는 기념비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서옥수 선교사의 초청으로 Sewis 수양회에 참석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태어날 때부터 허약한 건강 때문에 운명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중학교를 마치고 그가 원하는 진학을 하지 못하고 직업학교에 다녀야 했습니다. 그는 수양회 때 예수님을 자신의 생명의 주인으로 영접하고, 처음으로 자신의 운명주의적인 생각을 극복하는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그 후 창세기 말씀 공부를 하며 자신의 인생에 두신 하나님의 소망을 영접했습니다. 그는 직장에 사표를 내고 중부 독일의 Solingen으로 이사해서 하나님의 역사에 적극적으로 동참했습니다. 선교사들은 그의 변화와 성장을 보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독일 사람에게도 역사하는 것을 보았고, 독일 복음 역사에 대한 비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 후 Dr. Lee는 그를 본국으로 초청하여 서옥수 선교사와 가정을 이루도록 도와주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독일 UBF의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셨습니다. Dr. Lee는 그를 끝까지 사랑하셔서 그를 자주 Chicago에 초청하시고 수양회에 말씀의 강사로 세우시고 도와주셨습니다. 그의 도움으로 Vollker Keller 목자는 존경 받는 독일의 믿음의 조상으로 쓰임 받고 있습니다. 한 자매는 1970년 만 20세도 안 되는 어린 나이에 남독으로 파견되어 왔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을 몰랐습니다. 그녀는 다만 돈을 벌어 가난한 가족을 돕기 원했습니다. 그래서 월급을 타서 가족에게 송금하고 그리고 또 일하고 또 송금하였습니다. 그것은 애초 자신이 원했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원하던 일을 할 수 있다면 만족할 것 같던 그녀는 자신의 영혼에 채울 수 없는 빈자리가 있음을 느꼈습니다. 무의미와 허무감이 그녀의 심령을 채웠습니다. 스스로 인생의 답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근무가 끝나 기숙사에 돌아오면 눈물을 흘리곤 하였습니다. 마침 같은 병원에 한국에서 파송되어 온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그 선교사가 그녀를 성경공부에 초청하였습니다. 그녀는 성경공부를 통해 창세기의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Sewis 수양회에서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그녀는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자신의 삶을 성찰하였습니다. 어린 나이에 가난한 가정을 위해 돈 벌러 낯선 외국에 나온 것은 지극히 운명적이었습니다. 마치 자신의 삶이 어린 나이에 애굽으로 팔려온 요셉같이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요셉은 가족과 만민의 구원을 위해 자신이 미리보냄받은 것을 깨닫고 믿었습니다. 그녀 또한 운명적인 생각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가족의 구원을 위해 독일에 온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녀는 가족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불신자인 그의 어머니가 하나님을 영접하고 이윽고 온 가정이 그리스도를 영접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의 빛이 그녀의 삶과 그녀의 가족에게 생명으로 임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요한복음 3장 16절을 통해 죄인들에게 그리스도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습니다. 허무와 무의미로 가득했던 그녀의 가슴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깨달음과 벅찬 기쁨으로 넘치게 채워졌습니다. 그녀는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그 사랑에 감동되어 만나는 사람마다 “예수님을 믿으세요?” 물으며 전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또한 영적인 눈으로 독일사람들은 바라보았습니다. 처음에는 그들이 신앙이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어차피 부족함이 없는 선진국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인격적인 믿음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수양회 때 몇몇의 독일사람이 참석한 것을 보았습니다. 말씀을 듣고자 하는 그들은 한국말을 이해할수 없어 목자없이 버려진 양같았습니다. 그녀는 그들을 위해 말씀을 독일어로 통역해 주었습니다. 독일사람을 향한 목자의 심정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복음이 필요한 독일을 위해 기도하며 독일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인생의 방향을 잡았습니다. 그녀는 고용계약이 끝난 후 귀국하는 대신 독일의 간호학교에 들어가 독일에서의 장래를 준비했습니다. 당시 Dr. Lee는 Köln대학 병원에서 근무하며 외롭게 투쟁하던 그녀를 심방하고 도와 주셨습니다. 그때 Köln 시가지를 지나다가 한 완구점에서 하늘을 쳐다보고 웃고 있는 개 한 마리를 발견했습니다. Dr. Lee는 그 개를 그녀에게 선물하며 그 개의 이름을 '환상’(Vision)이라 지어주었습니다. 사도행전 2:17, “너희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라는 구절에서 따온 이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녀에게도 Sarah라는 이름을 주었습니다. 그녀는 간호학교 졸업 후 한국으로 나와 연희센터의 어느 괜찮은 형제와 선교가정을 이루었습니다. 그녀는 Köln로 본부가 옮겨지기까지 그곳에서 사역하였습니다. 그리고 82년부터 Heidelberg를 개척하였습니다. 1978년부터 드디어 형제선교사가 파송되기 시작하였습니다. 당시 독일은 68학생운동의 여파로 계속적으로 전통이 파괴되어 갔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몰락해가던 기독교의 영향이 약화되고 사회는 지속적으로 세속화되었습니다. 그 영향으로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 눈에 띄게 증가하였습니다. 파송된 형제선교사들은 주로 독일에 남아서 독일선교를 위해서 헌신하던 자매선교사들과 가정을 이룬 분들이었습니다. 그 첫 형제선교사로 Abraham Lee, 그 다음해 1979년에 Kaleb Hong, 고 Isaak Yook, Daniel Park, Peter Chang, Markus Kum 그리고 계속 이어서 Johannes Lee, Noah Yu, David Hong, Moses Hur, Peter Lee, Abraham Mose Ju, Stephanus Park 등 선교사들이 이어서 파송되어 왔습니다. 형제 선교사들이 오면서 독일대학생 선교를 위한 기도제목이 분명해졌습니다. 1979년 2월에 그의 가정은 중부 독일에서 가장 큰 도시인 Köln으로 이사했습니다. 그리고 몇몇 간호사 선교사들이 Köln대학 병원에 새로운 직장을 얻어 합류하였습니다. 노동계약이 끝난 여러 선교사들이 본국으로 돌아가 훈련받고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들에 다시 선교사로 파송 되었습니다. 독일에 남은 간호사선교사들은 다음 단계의 역사를 위한 그루터기가 되었습니다. 또한 같은 해 Volker Keller 목자 가정이 남부 독일에서 이사 왔습니다. 1974년 로잔 국제대회 참석 후 Dr. Lee는 두 달 반에 걸쳐 스위스와 독일에 흩어져 있던 20여개 지구의 선교사들과 이들이 돕는 양들을 심방하여 말씀공부를 하며 그들을 도와주셨습니다. 그는 Andeas Krahwinkel 목자가 말씀을 전하는 은사가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미국 나이아가라 국제여름수양회와 CIS 여름수양회의 말씀강사로 세우고 그를 도왔습니다. 당시 Köln에서 인턴 목자 훈련을 받고 있던 Walter Nett 목자는 Dr. Lee의 도움으로 Washington의 Winelle 목자와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Bonn UBF에서는 Joachim Dietzel, Peter Schweitzer, Stefan Elsholz, Jochen Schweitzer, Xenofon Grigoriadis, Berthold Koesters, Heidelberg UBF는 Reiner & Brigitte Schauwienold, Birgit Pierce, Birgit Stoller, Markus Abel, Martin Ziegler, Toni Demir, Köln UBF는 Andreas Oberreuter, Eberhard Gross, Rainer Wieland, Olaf Theis, Michael Pohl, Knut Rohrmoser등이 독일 목자도 세움을 받았습니다. 한편 영국에서는 Ian Kaier, Paul Ridge가 세움받고 이어서 James Wood, Darren Hildrow, Louise 목자 등도 복음 사역의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Bruno Aussant현지목자가 조상으로 세움받고 많은 고난을 거치고 이제 불어권 전역사를 책임지고 섬기는 큰 종이 되었습니다. . 3. 유럽 선교의 현재 그리고 미래 이러한 유럽사회에 하나님께서 오늘까지 복음 역사를 이루신 것을 감사합니다. 현재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선교지인 독일에서는 Reiner Schauwienold, 영국에서는 Dr. Ian Kaier, Paul Riedge 그리고 프랑스에서는 Bruno Aussant 등 현지목자가 지부장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2년 전부터 불가리아의 지부장인 Dr. James Kang 선교사가 유럽지부장, Reiner목자가 독일지부장이 되어 두분이 동역하여 유럽역사를 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300명 가까운 한국 선교사님들과 60여명의 현지 목자들과 성숙한 2세선교사들 등 이 세 그룹이 하나가 되어 유럽 선교를 감당코자 기도하고 있습니다. 유럽 각국의 지부장들은 작은 섬처럼 유럽 각지에 흩어져 있습니다. 오직 한 가정만 사역하는 나라도 일곱 나라입니다. 이분들은 홀로 이방땅에 와서 현지문화를 익히며 그들 가운데 외로운 등불처럼 존재해 온 아브라함 세대입니다. 그들이 20년, 30년 홀로 있으면서 믿음을 지킨 사실은 감동적입니다. 혹자는 많은 수고에도 대다수가 제자양성의 열매가 없다는 생각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아브라함처럼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삭을 키워주셨습니다. 지난 유럽여름수양회때는 그들의 2세들이 열정적으로 수양회를 섬겼습니다. 금년 또한 젊은 동역자들이 주인공이 되어 수양회를 섬길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습니다. 유럽의 2세들의 미래를 위해 기도합니다. 그들은 현지의 언어와 문화를 익혔고 주류 사회에 진입하고 있습니다. 이들을 통해 우리 모두에게 미래는 열려 있습니다. 이 유럽땅에 금년의 유럽여름수양회에 복음의 생명이 넘치길 기도합니다. 유럽여름수양회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요. 유럽여름수양회에 참석해 주십시요. 바울에게 임했던그 밤에 환상이 저희에게 임하길 기도합니다.
402 [이상엽의 공학이야기]올해 ‘떠오르는 기술’ 10가지 [1]
[레벨:20]인은혜
35 2019-07-27
세계경제포럼은 2012년부터 매년 수년 내에 우리 사회와 실생활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측되는 기술을 10가지 선정해 발표해 왔다. 올해는 지난 1~3일 중국 다롄에서 개최된 하계 다보스포럼에 맞추어 2019년도 ‘10대 떠오르는 기술’을 발표하였는데 세계경제포럼의 발표 자료에 근거하여 간략히 소개하고자 한다. 첫 번째로는 순환경제를 위한 바이오플라스틱이 선정되었다. 내 연구실에서도 오랜 기간 연구하여 상당한 기술을 축적한 미생물이 직접 생산하는 생분해성 고분자가 포함되었다. 또한, 지구상에 가장 풍부한 리그노셀룰로직스 분해물을 원료로 미생물 발효에 의해 단량체들을 생산하여 플라스틱을 합성하는 바이오 기반 플라스틱 기술들도 포함되었다. 전 세계적으로 플라스틱 문제가 급부상하였고, 그에 따라 예전부터 개발되던 기술들이 본격적으로 더 발전하면서 선정되게 되었다. 상대적으로 높은 생산 가격은 아직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두 번째로는 사회적 로봇이 선정되었다. 인공지능으로 나날이 똑똑해지는 로봇은 카메라와 다양한 센서들을 이용하여 사람들의 사회적 지능과 감성지능을 빠르게 배우고 있으며 상대방을 보고, 말하는 것을 듣고 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느낌을 가지고 있는지를 유추하는 알고리즘을 장착하기 시작하였다. 소프트뱅크 로보틱스사가 만든 로봇 페퍼는 초보적이기는 하지만 얼굴과 기본적인 인간의 감정을 인지하며 현재 전 세계적으로 1만5000대가 공항고객서비스, 쇼핑도우미, 호텔 체크인 등을 도와주고 있다. 블루 프로그 로보틱스사의 버디는 보다 더 많은 감정표현을 하며 비서업무와 집의 자동화와 보안업무까지 해내는 로봇으로 발전하였다. 소비자용 로봇은 2025년에는 20조원 규모의 시장을 형성할 것으로 예측되며, 고령화 사회를 맞아 사회적 로봇은 더 빠르게 발전해 나갈 것으로 예측되었다. 세 번째로는 나노구조와 나노구멍 등으로 덮은 마이크론 수준의 얇은 표면을 만들어 유리로 만든 렌즈를 대체할 수 있는 메탈렌즈가 선정되었다. 아직은 대량생산과 유리만큼 좋은 성능으로 빛을 투과하게 하는 문제들이 해결되어야 하지만, 이러한 문제가 극복되면 휴대폰의 카메라뿐 아니라 전문가용 카메라, 실험실 광학현미경 등을 아주 작게, 그리고 값싸게 만들게 되는 날이 올 것으로 예상된다. 네 번째로는 무질서한 단백질들을 신약 타깃으로 하는 기술이 뽑혔다. c-Myc, p53, K-RAS, NUPR1 등과 같이 암에 연관된 무질서한 단백질들은 구조가 계속 변화되어 신약 타깃으로 삼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최근 눈부신 생물물리학의 발전과 계산능력의 향상으로 이러한 무질서한 단백질들도 신약 타깃으로 재조명되고 있다. 앞으로 암과 치매 등의 효과적인 치료제 개발에 활용될 것으로 예상된다. 다섯 번째로는 환경오염을 줄이는 똑똑한 비료가 선정되었다. 농작물 재배 시 수율을 올리기 위하여 질소와 인비료를 듬뿍(?) 뿌린다. 하지만 대부분은 식물의 영양성분으로 흡수되지 못하고 궁극적으로 대기나 하천으로 손실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비료성분들을 작은 캡슐에 담아 토양의 온도, 산도, 습도 등에 따라 천천히 내 놓도록 하는 서방형 그리고 조절형 비료기술이 개발되었다. 앞으로 인공지능과 센서 기술들이 결합되면서 원하는 때와 장소에 이렇게 맞춤형으로 비료가 제공되는 시대가 올 것이다. 여섯 번째로는 가상 모임 협업기술이 선정되었다. 멀리 떨어진 여러 사람들이 한곳에 모이지 않고도 함께 일하는 것과 같은 시스템을 구축하는 기술이 가상현실과 증강현실을 결합하고 5G 기술을 등에 업고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이제 스카이프 미팅과 같이 멀리 떨어져 정보만 교환하던 것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실질적으로 협업을 할 수 있는 날도 기대해 본다. 일곱 번째로는 첨단 식품 추적과 포장기술이 선정되었다. 세계보건기구에 따르면 매년 6억명이 식중독에 걸리고 그중 42만명이 사망한다. 앞으로는 작은 센서를 식품 포장이나 접촉면에 넣어 음식이 상했는지, 개봉한 지 얼마나 지났는지, 주변 온도의 변화에 따라 상하는 정도를 예측하여 섭취가 가능한지 여부까지도 알려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블록체인 기술과 연계하여 생산부터 소비까지의 전 과정을 투명하게 관리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여덟 번째는 안전한 핵반응기 기술이 선정되었다. 현실적으로 기후변화에 대응하면서 충분한 에너지를 얻는 것에 원자력만큼 좋은 것이 없다. 대부분은 안전하지만 만약 사고가 나면 큰 영향을 주는 것은 걱정거리다. 현재 핵반응기는 핵연료로서 우라늄 다이옥사이드가 들어 있는 지르코늄 합금막대를 사용하는데 냉각수 시스템에 문제가 생겨 지르코늄이 과열되면 물과 반응하여 수소를 만들고 이것이 폭발할 수도 있다. 실제 2011년의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그러했다. 따라서, 전기 공급이 끊겨도 냉각에는 차질이 없도록 하는 기술과, 아예 물 대신 액체 소디움이나 용융염 등으로 물을 대체하여 수소 생산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하는 기술 등이 개발되고 있다. 아홉 번째로는 DNA 데이터 저장기술이 선정되었는데, 이 기술에 관해서는 내가 세계경제포럼 10대 기술 발표 시 해설을 해주었다. 현재 빅데이터 시대에 사는 만큼 흥미로운 주제이므로 다음번에 상세히 다뤄보고자 한다. 열 번째는 재생에너지의 대용량 저장기술이 선정되었다. 태양광, 풍력 등 신재생에너지가 점점 늘어남에 따라 에너지 저장기술도 빠르게 발전해 왔는데, 여분의 에너지를 물의 위치에너지로 바꾸었다가 사용하는 것이 현재까지 가장 널리 쓰였으나, 리튬이온 배터리를 이용한 저장도 급속히 늘고 있고, 흐름전지 기술을 이용한 에너지 저장도 활발히 연구 중이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올해 ‘10대 떠오르는 기술’에는 에너지, 헬스케어, 식량, 신소재 등 다양한 기술들이 뽑혔다. 앞으로 이 기술들이 미래에 어떻게 전개되어 나갈지 지켜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다. 우리나라도 이들을 포함한 중요한 미래기술들을 선점하기 위한 노력에 박차를 가해야겠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907242058005&code=990100#csidx243fcc6e49b35a9aa090e370241a638
401 no image 이기적 유전자 시대는 끝났다, 2022년 노블교수와 도킨수 교수 대담 [1]
[레벨:20]인은혜
68 2023-03-26
400 no image 기적을 만들어낸 세 여인!! [3]
[레벨:20]인정훈
98 2014-11-10
기적을 만들어낸 세 여인!! 보스턴의 한 보호소에 앤(Ann)이란 소녀가 있었다. 앤의 엄마는 죽었고 아빠는 알코올 중독자였다. 아빠로 인한 마음의 상처에다 보호소에 함께 온 동생마저 죽자 앤은 충격으로 미쳤고 실명까지 했다. 수시로 자살을 시도하고 괴성을 질렀다. 결국 앤은 회복 불능 판정을 받고 정신병동 지하 독방에 수용되었다. 모두 치료를 포기했을 때노(老)간호사인 로라(Laura)가 앤을 돌보겠다고 자청했다. 로라는 정신과 치료보다는 그냥 친구가 되어주었다. 그래서 날마다 과자를 들고 가서 책을 읽어주고 기도해 주었다 그렇게 한결같이 사랑을 쏟았지만 앤은 담벼락처럼 아무 말도 없었고, 앤을 위해 가져다 준 특별한 음식도 먹지 않았다. 어느 날, 로라는 앤 앞에 놓아준 초콜릿 접시에서 초콜릿이 하나 없어진 것을 발견했다. 용기를 얻고 로라는 계속 책을 읽어주고 기도해 주었다. 앤은 독방 창살을 통해 조금씩 반응을 보이며 가끔 정신이 돌아온 사람처럼 얘기했고, 그 얘기의 빈도수도 많아졌다. 마침내 2년 만에 앤은 정상인 판정을 받아 파킨스 시각장애아 학교에 입학했고, 밝은 웃음을 찾았다. 그 후, 로라가 죽는 시련도 겪었지만 앤은 로라가 남겨준 희망을 볼 수 있는 마음의 눈으로 시련을 이겨내고 학교를 최우등생으로 졸업했고 한 신문사의 도움으로 개안 수술에도 성공했다. 수술 후 어느 날, 앤은 신문기사를 봤다. "보지못하고,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아이를 돌볼 사람 구함!" 앤은 그 아이에게 자신이 받은 사랑을 돌려주기로 결심했다. 사람들은 못 가르친다고 했지만 앤은 말했다. "저는 하느님의 사랑을 확신해요." 결국 사랑으로 그 아이를 20세기 대 기적의 주인공으로 키워냈다. 그 아이가 "헬렌 켈러" 이고, 그 선생님이 앤 셜리번(Ann Sullivan)이다. 로라는 앤과 함께 있어주고 앤의 고통을 공감하면서 앤을 정상인으로 만들어냈고, 앤도 헬렌과 48년 동안 함께 있어주었다. 헬렌이 하버드 대학에 다닐 때는헬렌과 모든 수업에 함께 하면서 그녀의 손에 강의내용을 적어주었다. 빛의 천사 헬렌 켈러는 3중 불구자이면서도 절망하지도 않고 삶을 포기하지도 않았습니다. 왕성한 의욕과 꿋꿋한 의지를 가지고 새로운 삶의 길을 찾아 스스로 피눈물나는 노력을 계속했습니다. 하버드대학을 졸업하던 날, 헬렌은 브릭스 총장으로부터 졸업장을 받고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설리번 선생님도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식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헬렌의 뛰어난 천재성과 설리번 선생님의 훌륭한 교육을 일제히 찬양하였습니다. "항상 사랑과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어 준 앤 설리번 선생님이 없었으면 저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토록 의지가 강한 그녀가 『3일 동안만 볼 수 있다면』이라는 책에 이런 글을 썼습니다. “만약 내가 사흘간 볼 수 있다면 첫째 날엔..... 나를 가르쳐 준 설리번 선생님을 찾아가 그분의 얼굴을..... 바라보겠습니다. 그리고 산으로 가서 아름다운 꽃과... 풀과 빛나는 노을을 ...보고 싶습니다. 둘째 날엔..... 새벽에 일찍 일어나 먼동이 터 오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저녁에는 영롱하게 빛나는 하늘의 별을 보겠습니다. 셋째 날엔..... 아침 일찍 큰길로 나가 부지런히 출근하는 사람들의 활기찬 표정을 보고 싶습니다. 점심때는 아름다운 영화를 보고 저녁에는 화려한 네온사인과 쇼윈도의 상품들을 구경하고 저녁에는 집에 돌아와 사흘간 눈을 뜨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싶습니다.”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은 상처에 대한 적절한 분석과 충고가 아니라 그냥 함께 있어주는 것입니다. 한 마음은 충고를 주기보다 자신을 줄 때 아뭅니다. 좋은 충고보다 좋은 소식이 중요합니다. 헬렌켈러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잘 알고 있으나 그녀의 스승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삼중고를 안고 있는 헬렌켈러를 전세계가 놀라게 한 인물로 만든 사람이 바로 앤 설리반 (ANN SULLIVAN)이다. 헬렌켈러를 가르칠 수 있는 방법은 감각기관 뿐이었다. 헬렌켈러는 손가락으로 상징적인 터치를 통하여 말하는 법을 배우고 열심히 공부하여 박사도 되고 영감을 주는 위대한 인물이 되었다. 앤 설리반은 늘 되풀이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 시작하고 실패하는 것을 계속하라. 실패할 때마다 무엇인가 성취할 것이다. 네가 원하는 것을 성취하지 못할 지라도 무엇인가 가치있는 것을 얻게 되리라. 시작하고 실패하는 것을 계속하라. 절대로 포기 하지 말라. 모든 가능성을 다 시도해보았다고 생각하지말고 언제나 다시 시작하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399 no image 고 사무엘리 선교사님 추모 예배에서(2015. 10.03) [1]
[레벨:20]인정훈
64 2015-10-08
고 이사무엘 선교사님의 추모예배에서 발표한 뉴저지의 박요한 선교사님과 관악3부 조재은 사모님의 소감 올립니다. John Park NJ UBF What I learned from Dr. Samuel Lee (You will be a kingdom of priests) “Although the whole earth is mine, you will be for me A Kingdom of Priests and a holy nation.” (Ex 19:6) I was invited to Chicago UBF for 14 months from Oct.1990 to Dec.1991. It was not long enough for me to deeply understand Dr. Lee. Still I was blessed to learn from him personally. He led me to live not as a beggar, but as a servant of God. He also led me to live not for my selfish ambition, but for God as a Kingdom of Priests. Once I shared my life testimony in English with Dr. Lee. He commented two things. First, he had a severe headache while listening to my broken English. His direct advice pointed out what I needed to do most to live as a missionary in America. Second, he advised me to pray for one word of God to be planted in my heart for my salvation. I was born as a third generation Christian. From high school, I finished reading the whole Bible every year, since my father gave me my allowance based on Bible passages I read. I joined UBF as a college freshman. I knew the Bible. But I did not have one word for my salvation. During my stay in Chicago, I found one word for my salvation. It is Mark 6:37a which says, “You give them something to eat.” Through this word, I realized that I was lost in the spirit of begging for human love, achievement and recognition. But I was found in the spirit of giving. Before I came to America as a missionary, I earned $5,000 monthly at Hyundai Research Institute after Graduate School in Economics. But in Chicago I was paid $300 per month. Out of $300, $100 was offered for world mission, $100 for phone and utility bills, and $100 was cash flow for food. The lack of monthly cash flow made me feel miserable. But God’s word, “You give them something to eat” enabled me to find a creative solution to survive. I bought several boxes of ramen and began to invite people to share my food. Then, they all invited me to their houses for dinner. I could solve my food problem well with the sense of giving to others. After that, God enabled me to practice the spirit of giving for 25 years of pioneering NJ UBF by inviting many international guests and second generations to NJ. After 3 months, my wife was invited to Chicago from NJ for Christmas worship service. Dr. Lee asked me to prepare a gift for my wife. I did not know what to prepare. He advised me to give her my Bible study materials which I had studied in Chicago every week. It was a strange gift. But my wife was very happy when she received my Bible study materials which were all written in English. I learned that the word of God is the best gift not only for my wife but also for others. Dr. Lee taught me the spirit of conquering the world with the gospel of Jesus. I was born as a twin among 5 brothers and 2 sisters. I had always competed with my younger twin brother. But Dr. Lee told me that I should not compete with my own brothers, but have the spirit of conquering the world with the gospel of Jesus. One day Dr. Lee asked me to root out two trees which were planted in concrete and plant them again in another concrete street. His direction seemed stupid to me. I tried to persuade Dr. Lee to change his plan. But he was not persuaded. Rather, he encouraged me to have the spirit of conquering the world with the gospel of Jesus by practicing what he told me to do. It took me three days and two nights to finish the job. Upon finishing the job, Dr. Lee bought me a big lunch and said to me, “Eat a lot and work hard.” I was scatter-minded and tried to catch many sheep. But I learned from Dr. Lee to have one person in my heart as God chose one man. So I saw S. David Gates as God's chosen man based on Gen 12:1,2. Indeed God chose him as an ancestor of faith for NJ UBF. For 22 years, David Gates has been faithful to pray for raising up 12 disciples of Jesus. No one responded to his prayer yet. Actually there was one, but that one left. Who could be faithful to one prayer topic for 22 years like this? No one can buy faithfulness with money or lip service. Faithfulness is built by obedience to God’s call. Because of David Gates’ faithfulness, God’s hope is deeply planted in the heart of his wife, Sarah. Another person, Sh. Jason Perry, complained, “Why didn't God choose me as a professor shepherd? Why did God make me suffer more than 7 years at Rutgers?” But it was God’s one-side grace to choose him and train him for more than 12 years. When he came to NJ, he was alone. But now God made him rich abundantly with a beautiful wife, 2 sons and 1 daughter. Now God made him a professor shepherd. God’s hope comes true when we pray as his chosen people. Dr. Samuel Lee gave me unlimited access to study his message. I enjoyed learning from his message with my personal application. Through his messages, I found Dr. Lee’s spirit and vision not only for my generation, but also for generations to come until Jesus comes again. Most of all, I learned from Dr. Lee to serve God with God’s vision for a kingdom of priests. Dr. Lee started UBF campus ministry in 1961. After studying the Bible, he taught young students to practice the spirit of giving as a shepherd for all nations. After coming to America as a missionary, he found the hope of God for America and all nations. It was “a kingdom of priests.” Jesus came and proclaimed from the beginning of his ministry, “The Kingdom of God is near. Repent and believe.” Through his bible teaching, Jesus taught about the kingdom of God again and again. It was God’s hope for his people to accept the kingdom of God and live as a kingdom of priests. A kingdom of priests means "a shepherd nation." When God made a covenant with Abraham, God intended to make him a blessing by making him a shepherd for all peoples of the world. God's hope is indeed great. The Israelites were ugly slave people with a beggar mentality and an easygoing attitude. But God had hope in them to be a kingdom of priests so that the knowledge of God might be proclaimed to the whole world through them. To be a chosen people is not a small matter. The people of Israel endured so many hardships and sufferings throughout the ages with the thought that they were chosen as a kingdom of priests. The Israelites could live in this world without their own land for more than 2000 years. It was possible because they had a clear spiritual identity as God’s people. They have turned out to be very special people by keeping their own identity. Even though God’s people fell into idolatry and were pushed around by stronger nations again and again, God did not fail in carrying out his hope for saving the world. God’s hope was fulfilled through Jesus Christ. Through Bible study, Dr. Lee found God's hope for our generation and the generations to come. This hope of God for a kingdom of priests through his people is not in this world, but in the kingdom of God. This hope is not confined to Israel. It is given to all peoples of the world through the blood of Jesus. Due to conflicts in UBF in 1998, I did not know my ground where I could stand in UBF. I left Korea and came to USA as a missionary at age 30, after giving up my professional job, which had given me future security and honor. But after working hard to pioneer NJ UBF, I lost my mother chapter of UBF like an orphan. S. Joseph and Rebecca Lee in Korea also lost their place. We were like abandoned orphans. But we refused to remain as orphans, begging other’s sympathy and understandings. Rather, we saw ourselves as a kingdom of priests. So Joseph and Rebecca gave their one and only son Joseph Lee Jr as a missionary at age 13. My wife and I adopted him as our first son. Even though the adoption process was very long and troublesome, raising him up as a second generation missionary was possible by God’s grace because we found the spiritual identity as a kingdom of priests for our generation and the next generations to come. I saw how Dr. Lee was mindful of raising up the next generations in many ways. He encouraged the young generation to learn music instruments and helped the Chicago UBF orchestra rehearsals. In NJ, God raised up Joseph Lee Jr to follow Dr. Lee’s example as the conductor of our 5L2F orchestra. God blessed 5L2F Orchestra to have the 7th annual orchestra concert at Rutgers. God also blessed Joseph Lee Jr. to marry a woman of faith. After 14 months training in Chicago, Dr. Lee told me that he had invested a lot of money and time for me. But I did not see my stay in Chicago as his investment for me. I was always sorrowful since I missed my wife and my two sons in NJ. I thought I was wasting my prime time in my life, doing something insignificant without studying Ph.D. in economics. But I was wrong. It was true that Dr. Lee who did not know me at all invested his time and energy so much for me. Then, he gave me one word “Put this money to work (Lk19:13). Come back in 10 years and share your testimony with fluent English like Shakespeare.” Actually, I lost the chance to return to Chicago in 10 years. In this year of 2015, NJ UBF celebrated our 25th year anniversary worship service. God has blessed us when we lived up to God's calling as a Kingdom of Priests with the spirit of giving. God has raised up 2 native shepherd house churches, 2 missionaries sending out to Bonn UBF and 2 second generation house churches, and 13 missionary house churches with 45 second generations. God also enabled us to build up a huge building with 35 two bedrooms’ apartments in front of Rutgers College. It cost 6 million dollars. My father in heaven made us very rich when we lived with the spirit of giving, and with the spiritual identity as a kingdom of priests. The building is called 120 disciple-common house for the purpose of raising up 7000 missionaries and bible teachers from NJ UBF. I am standing here, testifying to what I learned from Dr. Samuel Lee. I am not sure whether I speak fluent English or not. But I am sure that God has made me faithful to do one thing after I was sent out from Chicago. I pray that God may help my coworkers, American shepherds, and the next generations to faithfully holding to the vision of God that America and all nations may be a kingdom of priests. JEC's LT at Dr. Lee's memorial service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창세기12:1, 2) (1) 노처녀로 살 자를 복의 근원으로 불러주신 하나님저는 1948년 12월 6일 한국 서울에서 2남 4녀 중 장녀로 태어났습니다. 고2때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난생 처음 간질발작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저를 대학 1학년때 UBF 말씀공부로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대학 3학년에 올라가기 전 이 병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저는 저와 저의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신 하나님을 만나게 되어 너무나 기뻤습니다. 그러나 이 기쁨도 잠시였습니다. 아버지의 사업이 많이 어려워졌고 얼마후 아버지는 갑자기 뇌출혈로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맏딸로서 대학을 중퇴하고 돈을 벌어 동생들을 보살피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런 저의 형편이 교수들에게 알려졌고 교수회의에서 저에게 장학금을 주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나 감사해서 누가 방향을 준 것도 아닌데, 매일 아침 6시 30분이면 일어나서 기숙사 친구들과 후배들을 깨우고, 그들과 함께 일용할양식 모임을 하였습니다. 저는 이 모임을 2년 동안 인도하였습니다. 이 모임에 어떤 날은 10명이 모이기도 하였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이사무엘 선교사님은 저의 학교로 심방을 오셔서 기도해 주시고 격려해 주셨습니다. 양자 복지재단에서 일하고 있을 무렵, 하나님은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는 창세기 12:2절 말씀에 기초하여 조다윗 목자님과 믿음의 가정을 이루어주셨습니다. 실은 저는 아버지로부터 받은 사랑을 제 동생들에게 다 쏟아 부어주고 싶은 마음에서 결혼할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이때 이사무엘, 마더 배리, 안마리아 선교사님의 강력한 믿음의 기도가 없었다면 저는 평생 노처녀로 살았을 것입니다. 결혼후 저는 매주 이사무엘 선교사님의 주일메시지를 들었습니다. 그때마다 기쁨이 충만하고 등짝이 온통 후끈후끈 뜨거워지는 체험을 통하여 제 자신이 새로운 피조물로 변해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77년에 사무엘 선교사님과 가정이 ‘오직 하나님만을 믿으라’는 한 말씀을 남기고 미국 선교사들로 가셨습니다. 다음해인 1978년, 이사무엘 선교사님이 선교 보고를 하러 귀국하셨습니다. 그때 사무엘 선교사님은 히브리서 11장 24, 25절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하는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당시 Dr. Lee께서는 모세가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 살기를 거절할 때 고난을 받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망할 각오를 한 것처럼 우리도 망할 각오를 하고 복음역사를 섬겨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도 이 말씀대로 고난을 감당하되 망하기까지 두가지 점에서 첫째는 물질적으로 둘째는 자녀교육을 희생하기로 결단을 하였습니다. 당시 대학생들은 군사 정권 아래서 데모하였습니다. 피투성이 된 채 경찰에 끌려가는 것을 보면서 저는 불붙는 목자의 심정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진리의 말씀을 주어 서 살려야겠다는 결심을 확고히 했습니다. (2) 의대, 치대, 간호대 개척(연건 캠퍼스)하나님은 1984년부터 서울의, 치, 간호대가 있는 연건캠퍼스를 개척하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이때 서울대 간호대 졸업생인 현 시카고 Joanne Kim 선교사가 윤사라, 이광옥, 그리고 현 인디아나폴리스의 조이킴 선교사 등 세 명의 간호학과 후배 간호사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세 자매들은 얼마 안가 각각 윤모세 목자, 이이사야 목자, 현 인디아나폴리스의 데이비드 킴 선교사와 믿음의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그래서 저희 네 가정이 합심하여 역사를 섬겼습니다. 그런데, 연건 캠퍼스는 학생들을 만나기가 어려웠는데 왜냐하면, 학생들이 점심 식사때와 저녁 식사 때만 보이고 모두들 강의실, 실습실, 도서실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나고자 하는 학생을 점심 식사, 혹은 저녁식사 때에 못 만나면 밤 10시 도서실 문을 닫을 때에 만나며 일대일 성경공부를 섬겼습니다. 그리고 자기 생각이 강한 그들과 씨름을 하다보면 밤 12시는 물론 새벽 1시가 넘어 집에 들어갈 때가 많았습니다. 저희는 매주 토요일에는 그룹 바이블 스터디를 하고 주중의 점심때에는 양들과 함께 일용할 양식 모임을 하였습니다. 이때 저희는 의, 치, 간호대 각각 12명 성경선생을 세워주시도록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개척한 지 3년이 지나자, 의대 본과에서 2명, 치대 본과에서 5명이 남도록 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치대 개척에 데이빗, 조이킴 선교사님을 썩는 밀알로 사용해 주셨습니다. 그때 치과대학에서 조이킴 선교사님의 별명은 예수 아줌마였습니다. 그러나 자기 생각과 고집이 아주 강한 의대, 치대 본과생들을 상대로 지속적인 제자양성을 하는 일이 쉽지 않았습니다. 이때 전요한 목자님은 의, 치대생들을 돕기 위해서는 예과에 다닐 때부터 도와야 된다고 하시며, 예과생들이 있는 관악 캠퍼스로 가도록 방향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1987년부터는 종로에서 1시간 30분 거리인 관악 캠퍼스까지 가서 의, 치대 예과생들과 간호학과 학생들을 섬겼습니다. 저희는 관악에서 테이블 6개가 들어가는 써클룸을 얻었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4명의 사모님들은 날마다 이곳 써클룸에 오전 10시까지 와서 일용할양식을 발표하고 간절히 합심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일대일과 피싱을 하다가 밤 11시가 다 되어 택시를 타고 종로에 있는 집으로 돌아가곤 했습니다. 그 다음 해(1998년)에 생각지도 못했던 의, 치, 간호학과 3명의 신입생들이 소망의 싹처럼 예쁘게 자라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다음 해에도 신입생들 3명이 예쁘게 자라나기 시작했습니다. (3) 관악 3부 개척이때쯤(1989년) 하나님은 저희에게 의, 치, 간호대뿐만 아니라 수의대, 사범대, 인문대, 농대, 자연대, 공대, 음대, 가정대, 경영대, 미대 학생들도1:1하도록 인도하셨습니다. 매주 주일날은 이른 아침부터 관악 기숙사에 가서 학생들을 1시간 반 거리인 종로 센터로 데리고 와서 예배를 보게 하였습니다. 저는 예배후 그들에게 점심을 먹이고, 그후 설거지까지 하고 나면 온 몸이 녹초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관악 학생들이 말씀을 듣고 영혼의 만족을 누리며 돌아가는 것을 보면, 제 마음에는 큰 기쁨이 생겼고 그 기쁨은 피곤을 빨리 회복하게 하는 청량제와 같았습니다. 이 무렵 주일 예배 수가 60명이 넘어서게 되자 하나님은 93년에 서울대 후문 쪽에 센터를 얻어 관악 3부라는 이름으로 서울대를 개척하게 하셨습니다. 이때 모든 가정들이 종로에서 서울대 근처로 이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이듬해인 94년도에 제 동역자가 암으로 6개월 만에 소천하게 되었습니다. 이때가 관악 3부 개척이 시작된 시점이라 제가 받은 충격은 아주 컸습니다. 이때 사무엘 선교사님은 동역자가 하나님 나라에 입성한 것을 축하한다는 편지를 보내주셨습니다. 제가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지 않고 이 땅에서 동역자와 함께 오래오래 살고 싶었기 때문에 저는 하나님 나라에 간 것이 축하할 일이라는 것을 영접하지 못하였습니다. 사무엘 선교사님의 편지는 이런 저에게 저의 동역자가 하나님 나라에 가 있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해야함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남편의 아내답게 산상수훈 말씀을 제 삶의 실제적인 지침으로 굳게 붙들고 이 땅에서 천국시민으로 살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의 현실은 마치 못 건널 강처럼 심각한 물질문제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당시 삼수생, 대학 1학년생, 고등학교 2학년, 초등학교 5학년인 네 자녀들을 어떻게 먹이고 공부시켜야 할지 막막하였습니다. 더구나 저는 캠퍼스 학생들을 풍성히 먹이고 여러모로 섬기며 물질을 쏟아 붓느라 이미 집을 팔아 전셋집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이때 염려하던 저에게 성령께서는 아주 따뜻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제 귀에 분명한 말씀을 주었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한복음14장 1절) 저는 이때부터 근심할 만한 일이 생기면 때마다 이 약속의 말씀을 붙들었습니다. 이후 많은 근심 덩어리들을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하며 평안하게 사는 것을 배워나갔습니다. 1998년도부터는 전요한 목자님이 관악 3부 책임 목자로 오셔서 매주 주일예배 말씀을 섬기시며 평신도 목자들을 격려하셨습니다. 이로 인해 평신도 목자들간에 성령의 그릇이 견고해졌습니다. 이후 윤마가, 김여호수아 목자님들이 스텝 목자가 되어 역사를 섬겼습니다. 2000년도에는 모든 동역자들이 적극 헌신하여 지금의 새 센터를 건축하였습니다. 새 센터에 와서는 해마다 서울대를 졸업한 리더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any one, any time으로 믿음의 가정들을 이루었습니다. 이와 함께 선교사 파송 역사도 줄기차게 일어났습니다. 이때쯤, 시카고 선교사로 나갔던 첫째딸이 어느날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저는 너무 큰 충격을 받고 밤새 설사를 하고 근심에 빠졌습니다. 이때 사무엘 선교사님이 저에게 전화를 하셔서 저에게 딸을 잘 돌보아 주지 못하여 미안하다고 하시면서 두 배로 주님의 일을 하도록 방향을 주셨습니다. 저는 무엇보다 결혼 적령기의 처녀가 흉측한 일을 겪을까봐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때도 요한복음 14장 1절 말씀을 붙들고 사무엘 선교사님 말씀에 순종하여 두 배로 주님의 일을 하고자 투쟁하였습니다. 8개월 정도가 지나서야 큰 딸로부터 잘 지내고 있다는 연락이 와서 저는 하나님께 매우 감사했습니다. 이 기간 동안 하나님은 많은 가정 교회를 세워주셨습니다. 저는 이 사건을 통해 믿음의 가정들이 여러 아픔을 겪을 때마다 인내하며 두 배로 주님의 일을 하도록 격려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서울대 학생들 중에서 새롭게 제자로 세워지는 역사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목자들은 변함없이 캠퍼스에 올라가 양들을 피싱하고, 일대일에 도전하였습니다. 특별히 풀타임 사모님들은 줄기차게 피싱했습니다. 직장 다니는 사모님들은 퇴근 후 아기들을 동네 베이비시터들에게 맡기고 기숙사에 올라가 피싱을 하였습니다. 30여 개의 믿음의 가정들이 대부분 10의 2조를 드리면서 매주 가정을 오픈하여 양들을 풍성히 먹였습니다. 2005년 전요한 목자님이 세계대표로 임명되어 시카고 본부로 파송되었습니다. 이후 영국 선교지에서 돌아온 윤모세 선교사님이 종로와 관악3부 책임목자가 되어 역사를 계승하였습니다. 윤모세 목자님은 부지런하고 충성된 리더십을 발휘하여 모든 동역자들이 새롭게 성령의 그릇을 이루어 갔습니다. 2009년 하나님께서는 선교지에서 돌아온 변다니엘 목자님과 박에스더 사모님을 통해 서울대 학생역사를 회복해주셨습니다. 변다니엘 목자님은 교통사고로 어린 아들을 잃은 아픔이 있습니다. 신학을 공부했지만 박사과정을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십자가 복음을 굳게 믿고 학생들의 심령에 이 십자가 복음만을 심었습니다. 당시 여름수양회에 변다니엘 목자는 십자가 구원의 은혜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평신도 목자들과 사모님들을 과감하게 인생소감 강사로 세웠습니다. 이때 그는 자신의 아내부터 인생소감 강사로 세웠습니다. 그의 아내는 과거 쌍거풀 수술이 잘못된 이후로 자살을 생각하면서 석고상 같은 얼굴로 우울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말씀공부를 통해 예수님을 만나 구원을 얻었고, 서울의대 교수 목자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이러한 은혜를 진실하게 증거하였습니다. 그리고 여러 평신도 목자들도 대학생 시절 어두운 과거에서 자신을 구원하신 십자가의 은혜를 감동적으로 증거하였습니다. 그러자 학생양들은 교수님과 선배들의 진실한 인생소감에 마음문을 열고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박에스더 사모님은 자매 제자양성을 위해 지난 6년간 자매 팀목자들과 함께 매주 합심기도의 단을 쌓으며 자매들을 섬세히 도왔습니다. 또한 일대일 역사에 헌신하는 본을 보였습니다. 한번은 섬기던 양이 방학 때 고향인 제주도로 내려갔습니다. 그때 에스더 사모님은 남편이 가족여행 때 쓰려고 모아놓은 마일리지를 사용하여 매주 비행기를 타고 가서 일대일을 섬겼습니다. 변다니엘 목자님과 박에스더 사모님의 이러한 헌신과 여러 목자들의 동역으로 현재 40여 명의 학생들이 성장하고 있습니다. 과거 저는 간질병으로 고통하며 노처녀가 되어 육신의 동생들만 돌보며 처량하게 살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저를 구원하사 한국 캠퍼스 지성인들의 복의 근원으로 불러주셨습니다. 그래서 군사정권 아래서 신음하는 대학생들을 일대일 성경선생으로 세우고, 그들을 선교사로 파송하는 역사에 귀하게 사용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현재도 매주 12팀 이상의 일대일을 감당하는 성경선생으로 귀하게 사용해 주고 계십니다. 지난 31년을 돌아볼때 무엇보다 감사한 것은 사모님들과 아침마다 서울대 캠퍼스 제자양성과 세계선교를 위한 합심기도의 단을 쌓은 것입니다. 이 기도의 단을 통해 현재 의대에서 12명, 간호대에서 12명, 그리고 치대에서 7명의 성경선생이 세워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3명의 간호사 자매님들로 시작된 역사를125명이 예배를 드리며 38명의 선교사가 파송된 모임으로 축복하여 주셨습니다. 저는 자녀교육을 망할 각오로 희생했었지만 세 자녀가 행복한 믿음의 가정을 이루게 하시고 이들을 통하여 7명의 손주들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 모든 은혜를 생각할 때,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려 드립니다. 2041년까지 십만 선교사를 파송하는 역사에 계속해서 쓰임받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북한과 남한이 하나가 되어 한국이 통일 제사장 나라로 쓰임받는데 제 자신을 변함없이 드리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한마디: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신 하나님
398 no image 크리스찬 CEO의 경영방식
[레벨:20]인정훈
26 2016-06-24
구글도 배우러 오는 미국 ‘넥스트점프’ CEO 찰리 김 좋은 인재를 채용하고 해고하지 않는 회사는 기업이 꿈꾸는 모델이다. 미국 벤처업계에 그 꿈에 도전하는 회사가 있다. 전자상거래 기업 ‘넥스트점프(nextjump)’다. 넥스트점프는 제휴 기업 직원들이 참여하는 온라인 종합쇼핑몰이다. 포춘 선정 1000개 기업 중 700개를 포함해 10만 개 기업과 관계를 맺고 있다. 이 회사 창업자 겸 최고경영자(CEO)는 찰리 김(42·한국명 김용철)이다. 김 CEO의 아버지는 수퍼 옥수수를 개발해 세계의 기아 문제 해결에 기여한 공로로 노벨상 후보로 거론되는 김순권 박사다.  김 CEO는 2012년 10월 이후 ‘무해고 정책(No-fire policy)’을 시행 중이다. 실적이 나쁜 임직원을 부담 없이 내보내는 게 미국 정보기술(IT) 업계 관행이다. 어떻게 무해고 정책이 가능할까. 16일(현지시간) KOTRA가 개최한 뉴욕의 창업지원 행사장에서 김 CEO를 단독 인터뷰했다. 그가 강조한 것은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사람’이었다. [출처: 중앙일보] “첫째도 둘째도 사람 … 해고 안 합니다”  -해고는 왜 나쁜가.  “회사를 떠난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걸어다니는 광고판이다. 누군가를 해고해야 한다면 평생 매년 추수감사절 저녁을 같이 먹을 생각을 하라. 잘 헤어지라는 말이다.”  -그게 해고하지 않는 이유의 전부인가.  “해고는 가장 끔찍한 일 중 하나다. 내가 해고하는 사람은 누군가의 아버지다. 가정에선 아무리 힘들어도 자기 아이를 포기하고 남의 집에 입양시키는 일은 하지 않으려 한다. 그런데 회사는 어려움에 처하면 맨 먼저 하려는 일이 해고다. 그것이 옳은 일인가.”  넥스트점프도 2012년 이전에는 성과 최하위 10%를 해고했다. GE 방식이었다. 그러면서도 채용은 더 신중하게, 직원 역량 개발엔 더 많이 투자했다. 그랬더니 언제부터인가 ‘자를’ 대상이 없어졌다. 그런데 예상하지 못한 두 가지 효과가 나타났다.  “해고하지 않는다고 하니 각 부서의 직원 채용이 신중해졌습니다. 방문객 안내직을 뽑는데도 300명을 인터뷰하고 9개월을 끌더군요. 또 한 가지는, 직원들이 리스크를 감수하고 더 적극적으로 도전하게 됐습니다. 특히 제게 진실을 말해 주더군요. 해고의 공포 때문에 몰라도 아는 척하고, 잘못이 있어도 숨겼던 거지요. 무해고 정책 시행 이후 생산성이 3배로 뛰어올랐습니다. 직원들이 꾸미고 감추는 것 대신 일에 집중하게 됐기 때문입니다.”  넥스트점프에도 회사에 적응하지 못해 떠나는 이들이 있다. 그럴 때 회사는 새로운 직장을 찾을 때까지 머물게 하면서 급여를 준다. “직장이 있는 상태에서 일자리를 찾는 것이 더 쉽다”는 이유에서다. 김 CEO는 “사람이 비즈니스의 근원”이라고 말했다. “옳은 사람을 얻으면 제품과 수익을 다 얻게 된다”는 것이다.  넥스트점프의 채용 프로그램은 구글도 배우러 올 정도다. 지원자들의 모든 정보가 전 직원에게 공개되고, 전 직원의 투표를 통해 지원자들이 추려진다. 회사 간부들은 이들을 다시 살펴보고 토론한 뒤 만장일치로 최종 채용 결정을 한다. 이때 김 CEO는 빠진다. 결정에 영향을 주지 않기 위해서다. 그의 회사는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에서 직원들의 역량을 가장 잘 키우는 회사 세 곳에 뽑혔다. 회사엔 한 해 5000명의 엔지니어가 지원한다. 채용되는 이는 10명. 500대 1의 경쟁률이다. 직원들의 연봉은 같은 업종 기업의 평균보다 20% 더 많다.  -어떤 사람을 뽑나.  “겸손을 중시한다. 똑똑한 사람을 채용해야 하지만 겸손한지를 봐야 한다. 감사할 줄 모르고, 다 알기 때문에 배울 게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좋지 않다. 군대에선 겸손하지 않으면 죽는다고 얘기한다. 테크 회사도 마찬가지다. 겸손한 사람을 채용하는 것이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온다.”  아버지 김순권 박사에 대해 말을 꺼내자 그는 “나의 시련은 아버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고 힘을 낸다”고 말했다. 그의 회사엔 “어머니·아버지가 자랑스러워하는 회사를 만들자”는 문구가 걸려 있다.
397 no image 말씀대로 인도하시는 하나님
임성택
83 2006-10-14
"주여 구하오니 귀를 기울이사 종의 기도와 주의 이름을 경외하기를 기뻐하는 종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오늘날 종으로 형통하여 이 사람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하였나니 그 때에 내가 왕의 술관원이 되었었느니라"(느헤미야 1장 11절) 죄와 사망권세 가운데 쓸모 없는 인생을 살았을 죄인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사흘만에 살아나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죄인에게 구원의 은혜를 허락하실뿐 아니라 사법시험에 합격하는 은혜도 주심에 감사합니다. 죄인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사법시험에 합격하였습니다. 허물진 죄인을 위하여 기도와 섬김으로 감당해 주신 정아브라함 목자님, 은주사모님께 감사드립니다. 죄인을 위하여 마음 졸이시며 기도해 주신 여러 목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이번 합격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이 제 인생길을 인도하심을 분명히 체험하였습니다. 하나님은 합격자 발표 3일전에 일용할 양식말씀인 느혜미야 1장 11절 말씀통해 제가 이 시대 캠퍼스 가운데 복음으로 하나님의 도성을 중건하는 역사를 감당케 하기 위해 술관원직분과 같은 법조인의 직분을 허락하실 것을 알려 주셨습니다. 지난 2003년 제가 시험에 떨어질 때는 고린도후서 1장 4절"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라" 말씀을 일용할 양식 통해 합격자 발표당일에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제가 시험낙방의 환난속에 위로자로 연단받을 것을 방향잡을 수 있었습니다. 죄인의 인생길은 오로지 하나님이 아시고 인도하십니다. 제가 주님께서 주신 느헤미야 말씀대로 법조인의 직분을 썩어질 세상영광, 자기영광 구하는 데 사용하지 않고 복음으로 2041년까지 10만선교사를 파송하는 거룩한 성중건역사에 쓰임받는 데 드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어지는 3차시험에도 합격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다시한번 여러 목자님과 형제자매님들의 기도와 축하의 말씀에 감사드립니다.
396 no image 메리 크리스마스! 임성택입니다. [10]
임성택
106 2007-12-15
충----성, 메리 크리스마스! 임성택입니다. 오늘 어머니와 같이 외출을 나와 컴퓨터를 만질 기회가 있어 이렇게 글을 남깁니다. 제가 있는 곳은 대전에 위치한 '육군종합군수학교'입니다. 군수와 관련된 특기병들의 후반기교육을 담당하는 곳입니다. 군에 갔다오신 분은 아시겠지만 후반기 교육을 받는 곳은 이른바 '이등병들의 천국', 혹은 '병장체험학교'입니다. 이곳에서 앞으로 12월 23일까지 교육을 받고 12월 24일 자대배치받게 됩니다. 자대는 아직 모르고 다음주 목요일쯤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교육받는 내용이 숫자계산하는 것을 많이 하는 것이라 나름 골치가 아픕니다. (제가 산수를 잘 못한다는 사실은 아실만한 분은 다 아실 것입니다.) 또 교육생들을 통제하는 역할(훈련소에서의 훈육조교)을 하는 '학생장'을 하고 있어 저에게는 천국이라고 느껴질만큼 편하진 않습니다. 동기교육생들을 통제하기 위해 소리도 크게 지르기도 하고 달래보기도 하고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보면 하루가 금방갑니다. 얼차려를 받고 싫은 소리를 듣는 입장에서 졸지에 싫은 소리도 하고 통제를 하는 입장으로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은 저에게 여러가지 훈련을 시키시는 것 같습니다. 짧은 2주의 기간이지만 2년의 군생활의 축소판을 체험한다고나 할까요. 다만, 육체적으로는 힘이 들지 않습니다. 총을 만져보지 못한지 어언 1주가 지났습니다. 그냥 새벽에 일어나 소리지르며 통제하고 수업듣고 수업듣고 나서 교육생들을 통제하다보면 하루가 금방갑니다. 또 저보다 한주 일찍 들어온 교육생들의 학생장이 저를 얼마나 혼쭐나게 닦달을 하는지요(나이는 20살이지만 사회에서 운동을 하다 와서 그런지 대단합니다.). 암튼 시간을 짭잘하게 보내고 있습니다. 여러가지를 겪고 배우고 있다는 느낌에 시간낭비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오랜만에 홈페이지에 들어와 여러 글을 읽으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성탄예배준비와 신추위 준비로 바쁜 것 같습니다. 이요한 선교사님의 글을 읽고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믿는다'는게 어떤 건지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나요한목자님 승진소식도 다시 한번 확인했구요. 은혜로운 성탄예배와 흥왕한 08학번 신입생 피싱역사가 일어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저를 위해서는 부대배치를 잘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센터와 가까와 센터에 자주 갈 수 있는 곳, 무릎에 무리가 가지 않을 수 있는 곳, 전역하자마자 보게될 사법연수원 시험을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할 수 있는 곳으로 배치받을 수 있도록 기도 부탁드립니다. 죄인이 군광야에서 이땅에 성육신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체험하고 하나님의 예비하신 훈련들도 기쁨과 감사, 겸손함으로 감당할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그럼 이만 ... 오프라인으로 편지 한번 드리겠습니다. 충성! 은혜입은 임성택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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