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성경읽기선교회 관악5부

번호 제목 닉네임 조회 등록일
435 no image LA 최수산나 선교사님 일시 입국하십니다.
[레벨:20]인금철
42 2012-09-11
434 no image 추석 가정 예배 자료 파일 [1]
[레벨:20]인금철
55 2012-09-27
433 no image 가을을 보내며... [1]
[레벨:20]인금철
49 2012-10-30
432 no image 가을 수양회 시간표 파일
[레벨:20]인금철
33 2012-11-09
431 no image 2012년을 보내며... [2]
[레벨:20]인금철
34 2012-12-29
430 no image Anyway [4]
[레벨:20]인금철
109 2013-09-03
429 no image 가을의 기도
[레벨:20]인금철
43 2014-10-15
428 다시금 돌아보고, 다시금 내다보며...
[레벨:20]인금철
80 2015-02-09
오늘(2.9) 신문에 난 기사인데, 많이 생각하게 하네요. 지난 번 오베드로 선교사님 보고에 20세기 초반 한국에 선교사로 왔던 미국의 많은 독신 자매 선교사님들이 생각났습니다. 기사의 주인공이 크리스챤인지, 선교사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그런 스피릿이 미국 젊은이들에게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이 신선한 도전이고 충격이 됩니다. 미국의 강대한 힘은 이런 정신에서 나오지 않을까 생각이 되네요. 우리에게 하나님은 2041년까지 10만 선교사 파송의 비전을 주셨는데, 성령께서 청년 학생 형제,자매님들의 심령에 만민구원의 환상을 부어 주시고, 세계로 나가게 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저도 새롭게 각성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 그녀의 죽음은 사실일까, 속임수일까. 지난 6일 극단주의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가 “미국인 민간인 인질 카일라 뮬러(26·사진)가 요르단이 폭격해 무너진 건물에 깔려 숨졌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요르단 내무장관 나세르 주데흐는 트위터에 “테러리스트들이 수십년 동안 써먹어 온 낡아빠지고 역겨운 속임수에 불과하다”고 밝혔다. 요르단의 공격으로 애꿎은 희생자만 발생했다고 몰고가려는 선전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미국 국가안전보장회의(NSC)도 “IS의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어떤 증거도 없다”고 밝혔다 뮬러는 대학 졸업 후 인도,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등 분쟁지역에서 구호활동가로 일했다. 시리아에서는 폭격으로 학교가 파괴된 아이들과 함께 예술작품을 만들며 치유에 힘썼고, 흩어진 가족들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왔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뮬러는 평소 ‘내가 살아 있는 한 이러한 고통을 정상적이거나 받아들일 만한 일로 만들지 않겠다’고 말했다”며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돕는 것이 그의 일관된 삶이었다”고 보도했다. 뮬러는 시리아 북부 알레포 지역으로 떠났다가 2013년 8월4일 IS에 납치됐다. 영국 일간 인디펜던트는 7일 “IS는 이미 지난해 7월 뮬러의 부모에게 미국에 수감돼 있는 테러 용의자 아피아 시디퀴가 석방되지 않으면 뮬러를 살해할 것이라고 통보했다”고 보도했다. 뮬러는 시리아 북부 알레포 지역으로 떠났다가 2013년 8월4일 IS에 납치됐다. 영국 일간 인디펜던트는 7일 “IS는 이미 지난해 7월 뮬러의 부모에게 미국에 수감돼 있는 테러 용의자 아피아 시디퀴가 석방되지 않으면 뮬러를 살해할 것이라고 통보했다”고 보도했다.
427 no image 언더우드의 기도 [2]
[레벨:20]인금철
64 2015-04-02
봄 학기 부지런히 양들의 심령에 말씀의 씨를 뿌리시는 목자님들을 보면서, 언더우드 선교사님의 부활절 예배 기도문을 올려 봅니다. The heart of Chosun that I cannot comprehend Lord, nothing is visible at this moment. Lord, you have planted us on this barren and poor land, where not even a single tree can grow tall enough. It is such a miracle that we could come to this land across the wide wide Pacific Ocean. Nothing is visible, though, in this land on which we seem to have been dropped off by your hand. Only stubbornly stained darkness can be seen. Only Korean people chained with poverty and superstition can be seen. They don't even know why they are chained, what suffering is. They just distrust us and express anger to us as we tell them how to take away their suffering, which is not suffering to them. The thoughts of Korean men are not visible. The mind of this government is not visible. We are afraid that we may not have any more opportunity to see the women commuting on kamas(-a cart covered and carried by men). And we do not see what to do. Yet, Lord! We will obey. We believe that you begin your work as we humbly obey, And that the day will come when our spiritual eyes will see your work according to your Words, "Faith is being sure of what we hope for and certain of what we do not see..." We believe that we will see the future of the faith of Korea. Although we are as if standing on a desert with bare hands, although we are condemned to be Western devils, We believe that the day will come when they will rejoice with tears realizing that they are one with our spirit in Christ, and that we all have one Kingdom and one Father in Heaven. Although there is no church to worship you, no school to study, although this land is filled with doubt of suspicion, contempt, and disdain,we believe that in the near future this land will become a land of blessing
426 no image 좋은 찬송시 하나 [2]
[레벨:20]인금철
57 2015-06-03
최근 욥기 말씀을 보면서 '고난'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논리(logic)로는, 고난이 죄의 결과요 고통으로밖에 여겨지지 않지만, 하나님께는 그의 뜻을 이루는 위대한 지혜요 능력임을 조금이나마 알게 됩니다. 고난을 통해 아름다운 찬양을 쓴 카롤리나 빌렐미나 산델베리(karolina wilhelmina sandell berg)의 찬양시를 올립니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찬양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스웨덴 프뢰데뤼드의 루터 교회 목사였습니다. 26살 때, 그녀는 아버지와 함께 예테보리로 유람선 여행을 떠났다가 여행 도중에 아버지가 배 밖으로 떨어져 눈 앞에서 익사하는 참변을 당합니다. 이 비극은 리나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으나, 그녀의 찬송가 작사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죠. 그녀가 작사한 찬송가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곡이 바로 이 '날마다, 숨 쉬는 순간마다'(Day by day)라는 곡이랍니다. 1 Day by day and with each passing moment, Strength I find to meet my trials here; Trusting in my Father's wise bestowment, I've no cause for worry or for fear. He whose heart is kind beyond all measure Gives unto each day what He deems best-- Lovingly, its part of pain and pleasure, Mingling toil with peace and rest. 2 Ev'ry day the Lord Himself is near me With a special mercy for each hour; All my cares He fain would bear, and cheer me, He whose name is Counselor and Pow'r. The protection of His child and treasure Is a charge that on Himself He laid; "As thy days, thy strength shall be in measure," This the pledge to me He made. 3 Help me then in eve'ry tribulation So to trust Thy promises, O Lord, That I lose not faith's sweet consolation Offered me within Thy holy Word. Help me, Lord, when toil and trouble meeting, E'er to take, as from a father's hand, One by one, the days, the moments fleeting, Till I reach the promised land. 날마다, 흘러가는 순간마다 이 땅의 고난을 이길 힘을 발견하네 아버지의 지혜로운 섭리를 믿으니 걱정하거나 두려워 할 이유가 없네. 측량할 수 없이 자비로우신 그 분이 날마다 보시기에 가장 좋은 것을 주시네 자비롭게 고통과 기쁨의 일부를, 수고를 평화와 안식과 더불어 주시네
425 no image 이 시대를 어떻게 볼 것인가?
[레벨:20]인금철
44 2015-07-07
기독교 뉴스"하나님은 헌법 아니라 성경으로 심판하신다"0 yyd62 이웃추가 | 2015.07.01. 17:31 앱으로 보기 본문 기타 기능 오바마가 기도 부탁했던 유명 흑인 목회자의 '일갈'T.D. 제이크스 목사 (포토 : (사진 : 방송화면 캡처)) [미주 기독일보] 텍사스주 댈러스에 있는 메가처치 '포터스하우스(The Potter's House)'의 설립자요 담임목사인 T.D. 제이크스(T.D. Jakes) 목사는 지난 28일 주일예배를 통해 연방대법원에 의한 동성결혼 합법화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제이크스 목사는 "판결이 나온 이후 그의 입장을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연락이 쇄도했다"면서 "나는 이 문제에 대해 많은 사람들처럼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세상은 이렇게 점점 더 세상이 되어가고, 교회는 점점 더 교회가 되어가는 것"이라면서 "연방대법원은 성경에 대해 토론하는 곳이 아니라 모든 미국인들에게 맞는 법률과 헌법적 권리에 기초해 법률적인 결정을 하는 세속적 기관"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그들은 동성애 정책에 반대하는 로마서 1장이나 고린도전서를 보지 않았거나 거기에 비중을 두지 않았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다"면서 "미국에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있지만, 미국은 신정주의가 아닌 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통치된다"고 덧붙였다. 제이크스 목사는 "그러나 우리의 종교 자유는 존중되고 보호되어야 한다"며 "우리가 세상의 시류에 휩쓸리거나 세상이 가는대로 가도록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기독교가 앞으로 미국에서 지배적인 종교가 될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면서 "하지만 나는 그렇게 되기를 원하고, 그것은 우리에게 달렸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기독교인들은 증인이 되고 영혼을 구원하기를 멈췄으며, 우리가 믿는 것을 믿지 않는 사람들로부터 고립되고 있다"고 우려했다. 제이크스 목사는 "이것은 예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을 역행하는 것"이라면서 "예수께서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셨다"고 강조했다. 이어 "교회가 변화되어야 한다. 모든 형태의 사람들에게 다가가 복음을 전하고 우리의 믿음을 나누어야 한다"며 "쇼핑몰에서, 슈퍼에서, 미용실에서 나누어야 한다. 이제는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할 때가 왔다"고 강조했다. 그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영혼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자"라면서 "당신의 집에서부터 이를 시작하라"고 강조했다. 제이크스 목사는 특히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 안에 있다. 그들을 엄중한 하나님의 심판에 맡기자"며 심판은 하나님께 맡기고 그리스도인은 복음을 전하고 영혼을 구원해야 할 사명에 충실하자고 강조했다. 제이크스 목사는 "연방대법원은 헌법에 기초해 판결을 내렸고, 특정 이슈에 대해 헌법적으로 토론한다"면서 "하지만 여러분에게 엄중하게 경고하고 싶은데, 하나님은 여러분을 헌법으로 심판하지 않으시고 당신의 말씀(성경)으로 심판하신다. 따라서 연방대법원이 열심히 헌법을 들여다보는 동안 당신은 성경을 열심히 봐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이어 손으로 성경을 들어 올리면서 "하나님의 말씀은 오래됐지만, 이 축복된 말씀은 여전히 좋고, 여전히 옳다"고 강조했다. 앞서 제이크스 목사는 오프라 윈프리와의 인터뷰에서 동성애가 죄라고 밝힌 바 있다. 그는 "동성간 성관계는 성경에서 정죄하고 있으며, 따라서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에 따라 말할 수 없고, 성경이 말하는 것에 따라 말해야 한다"고 말했었다. 제이크스 목사는 지난 1996년 약 50가족들과 포터스 하우스를 개척했는데, 이 교회는 현재는 3만명 규모의 메가처치로 성장했다. 포터스 하우스는 미국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한 대형교회 중 하나다. 그는 또 타임지가 선정한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복음주의자 25명 중 한 명에 선정되기도 했으며, 타임지와 CNN은 그를 미국 최고의 설교자로 꼽았다. 또 베스트셀러 작가에 영화 제작자이기도 하다. 특히 이번에 동성결혼 합법화를 사실상 주도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릭 워렌 새들백교회 목사와 함께 행동하는 기독교인이라고 칭한 것은 물론 대선 기간 중 자신의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기도요청을 하기도 했을 정도로 존경하고 있다.
424 no image 좋은 찬양 하나 [1]
[레벨:20]인금철
50 2015-08-21
423 no image 은혜로운 소감 한 편...
[레벨:20]인금철
57 2015-09-22
사도 요한이 노년에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고백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 모임에 계신 시니어 목자님들이 얼마나 생생한 승리의 본이 되시는지 존경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과거 서울대를 개척하셨고, 지금은 종로 2부에서 서울의대를 섬기시는 이병두 목자님이 2010년 일용할 양식부 부장, 실무자 대회에서 발표하신 소감 한 편 올립니다. 종로에서 공부하다가 '현재 시상이 주는 영원성'이라는 말씀을 하시길래 궁금했는데, 이 소감에 나오길래 올려 봅니다. (목자님의 동의 없이 게시판에 있는 것을 올립니다.) ------------------------------------------------------------------------------------------------------------------------------------------------- 1월 30일 일용할양식부 부장,실무자대회 이병두 목자님의 간증소감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시편 1:1,2 “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한글개역) 저는 올해의 요절을 시편 1편 말씀에서 붙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전국 일용할 양식부 부장 실무자 대회의 말씀이 시편 1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데서 멀리 있는 죄인인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자 하는 기도제목 가운데 시편 말씀을 붙들게 되었습니다. 제가 주님의 말씀, 즉 성경에 접하게 된 것은 어린 시절 교회 주일학교 2학년 때부터 였습니다. 저의 조모께서 새벽마다 제가 자는 머리 맡에서 성경을 펴놓고 읽고 기도하시던 모습이 늘 떠오릅니다. 동편에서 해가 떠오르는 가운데 저의 할머니는 성경을 읽으시고 찬송을 부르시며 기도하시는 모습은 저의 마음에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평강을 맛보게 한 시간들이었습니다. 저의 모친은 결핵성 늑막염으로 죽어가다가 할머니의 중보기도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게 되었고, 결핵도 나음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모친은 불신과 하나님을 멀리하던 죄악을 회개하고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저의 모친은 성경읽기와 공부를 일생토록 사랑하였습니다. 모친의 소천후 남은 짐을 정리하면서 그녀가 읽은 성경들을 살펴보았습니다. 도처에 메모와 빨간 줄이 그어져 있었습니다. 성경공부를 좋아하고 사랑하셨던 분이었음을 확인하고 더욱 깊이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중학교 시절 모친의 권면에 마지 못하여 영한 신약성경을 읽고자 하였지만 참으로 진도가 나가지 않았습니다. 저는 진리를 사랑하지 못한 죄인입니다. 이런 죄인이 갈 길은 시편 1편 1절의 말씀과 같이 죄인의 길이었습니다. 친구들과 경쟁하며 투기하며 이기고자 하는 것에만 관심이 많았습니다. 사랑이라든지, 진리라든지, 휴매니티같은 것에는 별 관심이 가질 않았습니다. 그저 일인자가 되는 데에만 관심이 갔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일인자가 되는 것도 불가능함을 아는 데에는 얼마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결국 저는 삶의 목표를 상실하고 그저 상위권에서 특권의식을 누리는 것으로 만족을 삼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저를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게 만들었습니다. 초중고교 시절 내내 저는 이런 죄인의 삶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곤고한 삶에서 벗어나고자 하였지만 길을 알지 못하였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기에 보이는 것은 오로지 세상과 사람들뿐이었습니다. 삶의 곤고함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언제나 재미있는 것을 찾아다녔습니다. 하루 종일 노는 것과 만화가게, 그리고 텔레비전 그리고 누이의 몸을 더듬는 죄악들로 어린 시절이 더럽혀지고 말았습니다. 삶의 무목적과 장래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죄책감들로 저는 고통해야 했습니다. 이 상태는 고3시절 극에 달하여 저는 하나님께 절규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저 고통 중에서 구원을 찾아 부르짖었을 따름입니다. 그러나 이런 절규도 멸시하지 않으시고 주님은 기적적인 방법으로 제게 찾아와 주셨습니다. 그것은 성경 말씀이었습니다. 전도지 속에 기록되어 있는 요한복음 3장 16절의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저는 이 말씀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말씀의 뜻을 잘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예수님을 믿으면 멸망하지 않을 수 있다는 희망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멸망의 낭떠러지 앞에서 이 말씀을 붙잡고 주 하나님께 서원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주 하나님의 긍휼로 1968년 서울의대 의예과에 입학을 하였습니다. 그 당시 저의 서원은 서울의대에 들어가면 교회에 나아가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저의 서원을 기억하여 주시고, 1968년 4월 개나리꽃들이 만발한 어느날 친구들의 소개로 UBF 종로센터로 오게 되었습니다. 친구들은 그곳에서 영어성경공부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도 가겠다고 하여 따라 왔습니다. 저는 곧 이 사무엘 선교사님을 뵐 수 있었고, 이 분의 짧은 메시지를 듣고 그 다음날부터 아침 8시에 배사라 선교사님의 영어 요한복음 공부와 주일예배 그리고 캠퍼스 그룹 성경공부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성경 말씀은 좋았지만 사고하며 깊이 묵상하는 훈련이 없어서 저는 진리에 가까이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무엘 선교사님은 제게 요한복음 12장 24절을 주시고, 이 말씀에 기초하여 일생토록 한 명제를 묵상하도록 도우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한 12:24) 그 명제는 지금도 생생한데 ‘ 현재 시상이 주는 영원성’이라는 주제입니다. 저는 지난 42년 동안 이 한가지 명제를 묵상하고 또 생각하고 기도하는 훈련을 해왔습니다. 여전히 부족하지만, 영원성을 사모하게 되었고, 영원한 가치를 귀중히 여기게 되었으며, 당대에 무엇을 이루고자 하던 데에서 변하여 후배들과 후손들을 통해서 이루어질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구원의 완성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아멘! 1968년 봄에 처음으로 이 사무엘 선교사님께서 영국 Scripture Union의 도움을 받으시어 일용할 양식 책자를 집필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책자의 도움을 받아 이른 아침마다 성경을 읽고 관찰하고 묵상하고 기도하며 공책에 소감을 쓰기 시작하였습니다. 우리는 아침마다 몇장씩 써 내려갔습니다. 이 소감들은 캠퍼스 별로 매요일마다 센타에 모여서 모임에서 발표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오늘날 요회와 소감발표 모임의 시작점이었습니다. 제가 속한 서울의대는 월요일에 모였는데 월요회가 되었고(초대 요회 목자-김현배), 화요회(고려의대; 초대 요회목자-남윤숙), 수요회(서울 문리대, 법대; 초대 요회목자-이 진희), 목요회(서울미대, 약대, 음대; 초대 요회목자-김길수)가 이루어졌습니다. 이 요회모임들이 오늘날 요회역사의 효시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요회모임에서 형제자매님들의 일용할 양식 발표를 듣고 그들의 영적인 상태를 파악하고 그분의 영혼을 위해서 전원이 기도지원을 해주었습니다. 그 당시 요회는 다른 멤버들에게 오픈되어 있었습니다. 이 사무엘 선교사님은 우리를 위해서 요회때마다 풍금으로 찬송가를 반주하셨고, 배사라 선교사님께서는 한번도 빠지지 않으시고 뒤에 앉으시어 들어주시고 기도하여 주셨습니다. 그 결과 저희는 성경 말씀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세상의 그 어떤 책보다도 재미있고, 감동적이었습니다. 우리는 환상과 비젼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저도 이 가운데서 깊이 있는 일용할 양식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 시절을 회상해 볼 때, 그 때만큼 성경의 세계에, 성경묵상에 깊이 빠져든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야말로 성경삼매경이었습니다. 이 사무엘 선교사님도 성경삼매경속에서 사셨고, 배사라 선교사님도, 그리고 우리 모두도 그렇게 살았습니다. 이 사무엘 선교사님은 매주일 죄인들의 심령에 떨리고 찔리는 권세있는 메시지를 전하셨습니다. 우리는 주일예배 후에 센터바닥에 엎드려 시대와 자신의 죄악을 회개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어떤 형제는 다 낡아 누래진 런닝셔츠를 좍좍 찢으며 부르짖어 기도하기도 하였습니다. 캠퍼스 시절은 제 생애에 있어서 가장 행복하고 풍성하였던 시절중 한 부분이었습니다. 아멘! 그 시절 이후 의사가 되고, 안암골 개척에 동참하고 결혼을 하고, 관악개척에 동참하고, 세계선교와 성서한국역사를 섬기다가 이제 다시 종로본부로 돌아와 지나간 세월을 뒤돌아 봅니다. 무엇보다도 성경을 사랑하고, 성경을 주야로 묵상하는 것이 부족했음을 고백합니다. 인생이 바쁜 것도 이유가 될 수 있습니다. 날이 갈수록 더욱 불타오르고, 더욱 간절하여지고, 더욱 깊어지기를 바라지만 참으로 쉽지 않은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이 사무엘 선교사님께서 성경을 순수하게 사랑하시고 경외하셨던 것을 배워서 알고 있습니다. Dr. Samuel Lee 선교사님은 자녀들과 손자들에게, 하도 많이 보아서 부풀고 헤진 성경책을 유산으로 주셨습니다. 목자님은 영감이 떠올라서 준비한 메시지도 교정하고 교정하고 또 교정했습니다. 저는 이사무엘 선교사님과 배사라 선교사님의 삶을 흠모하고 본받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전문의가 되자마자 처음에는 파트 타임으로 의사의 일을 하며, 풀타임으로 주님의 종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1980년 대에는 관악에서 이 바울 목자님의 말씀사랑과 부르짖는 기도의 삶을 배우며 동역하였습니다. 순수하게 말씀을 사랑하고 섬기는 아내 헬렌 목자님 옆에서 성경사랑을 배웠습니다. 서울대의 Abe Team을 비롯한 제자들과 함께 성경공부를 늦게까지 하며 주님을 섬기며 관악의 지성인들을 위해서 기도하던 시절을 깊이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저는 순수한 말씀 사랑과 경외의 길에서 여전히 멀리 있었습니다. 이 사무엘 선교사님께서 늘 강조하시는 순수한 동기가 잘 되질 않았습니다. 그것은 저의 죄악된 옛본성, 오만한 본성 때문이었습니다. 죄악된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죄인을 버리지 않으시고 이 사무엘 선교사님을 통해서 끝까지 도와 주셨습니다. 2001년 12월 크리스마스 때 목자님을 찾아 뵐 수 있었습니다. 이 사무엘 선교사님과 함께 지낸 마지막 크리스마스였습니다. 목자님은 숨이 가쁘신 중에도 저에게 간곡하게 유언적으로 ‘성경으로 돌아가자’라는 주제로 자신의 삶을 간증하시고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제게 날마다 성경으로 돌아가라고 당부하셨습니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가서 형제자매님들에게 이 유언을 잘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먼저 제가 성경으로 돌아가고자 기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우선 할수 있는 일은 성경읽기였습니다. 시간이 부족한 가운데 주로 출퇴근 길에 지하철에서 성경읽기를 시작하여 일독을 하고, 2독을 하고 3독, 4독 그렇게 해서 12독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올해는 듣는 ‘입체 오디오 성경’을 다운받아 하루종일 병원에서 현미경 판독 일을 하면서 듣고 있습니다. 성경통독은 큰 딸을 먼저 하나님의 나라로 보내고 이별의 슬픔 속에 있던 저의 심령을 치유하여 주었고, 부활과 하나님 나라의 산소망을 품게 하였고, 주님의 종으로 다시 서게 하였습니다. 이외에도 많은 영적인 유익을 주었습니다. 세상적인, 육신적인 생각을 하지 않게 해주었고 하루종일 성경세계 속에서 살게 하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수년 동안 거듭하는 가운데 통독의 한계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다독의 대상이 아니라, 깊은 묵상의 대상이며, 순종의 대상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성경 통독 또는 다독은 깊은 기도와 묵상의 기초가 있어야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결국 깊은 기도와 일용할 양식먹기와 쓰기, 주 한편의 소감쓰기, 그리고 형제자매님들과의 나누기로 돌아가야 함을 결론적으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여호와의 율법 즉 성경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것과 지속적인 성경다독, 통독을 겸하여서 감당할 때,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는 시냇가의 나무가 될 것을 바라봅니다. 이 죄인이 이제 주님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고자 시작하였기에 여러분들과 소감을 나누기에 자격이 없는 죄인인 것을 고백합니다. 그렇지만 이 한해, 그리고 주님 부르시는 날까지 이 길을 가고자 기도합니다. 성경을 즐거워하며 사랑하는 종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풍성한 좋은 열매를 맺어 주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주님의 종들과 자녀들에게 영적인 유산과 은사를 함께 나눌 수 있는 좋은 열매 맺는 나무로 성장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80세의 연세에도 지난 60년간 하시던 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시어 새벽부터 묵상하시며, 1대1 성경공부 매주 15팀을 섬기시는 Mother Barry 선교사님의 영적 후손들이 우리 가운데 뭇별과 같이 창성하기를 간구합니다. 아멘! 한마디;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 하여’
422 no image 작은 일에 충성한다는 것
[레벨:20]인금철
70 2015-12-24
421 어느 95세 어른의 수기 [2]
[레벨:20]인금철
91 2016-02-22
지난 주 스탭 미팅에서 사도행전 2장 17절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라는 말씀을 공부하던 중, 호서대학교를 개척하시는 서아브라함 목자님을 통해 작년 103세로 소천하신 호서대 설립자에 대한 얘기를 듣고 감동을 받았는데, 인터넷 검색해 보니 잘 소개되어 있네요. 같이 은혜를 나눠 봅니다. 독실한 신자인 이 분의 삶이 지난 수양회 말씀과도 잘 부합이 되는 것 같습니다. -------------------------------------------------------------------------------------------------------------------- 그가 95세 되던 해 ‘어느 95세 어른의 수기’라는 글을 하나 썼습니다. 젊은 시절 가난과 역경을 딛고 결코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았던 고 강석규 박사, 그는 65세 은퇴후, 95세가 되던 해까지 ‘남은 인생은 덤이다’라며 허송했던 30년에 대한 후회를 털어놓았습니다. 그리고 “어학 공부를 시작하련다. 105세 생일날 후회하지 않기 위해”라고 했습니다. 강 박사는 물론 자신과의 약속은 지키지 못하고 별세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남긴 수기는 우리에게 큰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어느 95세 어른의 수기> 나는 젊었을 때. 정말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 결과 나는 실력을 인정받았고.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 덕에 65세 때 당당한 은퇴를 할 수 있었죠. 그런 내가 30년 후인 95살 생일 때. 얼마나 후회의 눈물을 흘렸는지 모릅니다. 내 65년의 생애는 자랑스럽고 떳떳했지만, 이후 30년의 삶은 부끄럽고 후회되고. 비통한 삶이었습니다. 나는 퇴직 후 ‘이제 다 살았다. 남은 인생은 그냥 덤이다’ 라는 생각으로 그저 고통없이 죽기만을. 기다렸습니다. 덧없고 희망이 없는 삶.... 그런 삶을 무려 30년이나 살았습니다. 30년의 시간은 지금 내 나이 95세로 보면... 3분의 1에 해당하는 기나긴 시간입니다. 만일 내가 퇴직할 때. 앞으로 30년을 더 살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난 정말 그렇게 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 때 나 스스로가. 늙었다고, 뭔가를 시작하기엔 늦었다고. 생각했던 것이 큰 잘못이었습니다. 나는 지금 95살이지만 정신이 또렷합니다. 앞으로 10년, 20년을 더 살지 모릅니다. 이제 나는 하고 싶었던 어학공부를. 시작하려 합니다. 그 이유는 단 한 가지..... 10년 후 맞이하게 될 105번째 생일날. 95살 때 왜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았는지.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고 강석규 박사는? 고 강석규 박사의 삶은 포기하지 않는 도전의 일생이었습니다. 그는 1913년 12월 충남 논산에서 태어나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농사를 지으며 독학으로 초등교사 자격증을 취득해 충남 서산 성연보통학교 교사로 교직에 첫발을 내디뎠다. 중·고교 교사를 거쳐 34살에 서울대 전기공학과에 입학해 공부한 뒤 충남대와 명지대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1969년 호서학원을 세우고 육영사업에 투신해 서울 대성중·고교, 천원공업전문대학(현 호서대), 호서전산학교, 서울벤처정보대학원대학교를 설립했다. 그는 호서대 총장 시절 학생창업보육센터를 설립해 산학 협력과 벤처산업의 새 영역을 개척했다. 그는 <생각을 바꿔보라 희망이 보인다> 등 23권의 저서를 남겼다. -------------------------------------------------------------------------------------------------------------------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정근모 박사(그가 강석규 박사를 이어 받아 호서대 총장을 하였음)는 그를 「깨끗하고 훌륭한 분」이라며 학교를 발전시킨 원동력은 기독교 정신이라고 소개했습니다. 호서大는 교수와 교직원을 채용할 때 첫째 조건이 「기독교인이어야 한다」는 것이고, 초창기에 들어온 몇몇 교수를 제외하고는 교수와 교직원이 모두 기독교인이라고 합니다. 나머지 채용조건은 실력이 있을 것과 40세 이하여야 한다는 점. 교수 채용 때 고위층 로비가 통하지 않고, 돈을 받지 않는다고 합니다. 아산 캠퍼스 가장 깊숙한 데 자리한 학생벤처회관 외벽에 姜錫圭 명예총장의 글귀를 담은 큰 간판이 걸려 있는데, 이런 글귀가 있다네요. 「꿈이 없는 자는 오지도 말라. 끝내 해보겠다는 의욕이 없는 자는 오지 말라. 할 수 있다, 하면 된다를 믿는 자만 오라」
420 no image 바른 자세(기본자세)의 중요함을 생각하게 하는 글 [2]
[레벨:20]인금철
66 2016-08-31
저도 야구 매니아는 아닙니다만, rule과 fair play를 원칙으로 하는 스포츠에서 배우는 바가 적지 않습니다. 최근 프로야구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혹사'에 대한 한화 김성근 감독의 말인데, 혹사 여부를 떠나 바른 자세와 기본기의 중요함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영적인생활에서도 적용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 글을 올려 봅니다. ▲ 강훈련? 이치로·이승엽은 더했다 특타는 연습할 필요가 있어서 하는 것이다. 스즈키 이치로는 초등학교 때 매일 2000개를 쳤다. 그 정도 선수가 겨울에도 내내 아침부터 밤까지 야구 속에서 살고 있다. 마쓰이 히데키도 어릴적 매일 1000개를 쳤다고 한다. 우리 선수들은 쳐봤자 300개에서 500개밖에 되지 않는다. 하주석이는 지금부터 잘 만들어 놓아야 한다. 지금 코치로 있는 윤재국은 내가 쌍방울에 있을 때 다리가 빨라서 스카우트했지만 방망이를 쳐봐야 우익수를 넘기지 못했다. 매일 2시간30분씩 치더니 2주가 지나니까 백스크린을 맞히더라. 그 덕분에 윤재국은 오랫동안 야구했다. 최동수도 마찬가지이고, 어느 선수든 많은 훈련이 필요한 시기란 게 있다. 이승엽도 그렇다. 일본 지바 롯데에 있을 때 경기 전부터 500개에서 600개씩 배팅을 쳤다. 그래서 성공한 것이다. 선동렬도 일본 첫 해 실패했지만 그 이후 200~300개씩 던지며 성공한 것이다. 결국 선수 스스로 이겨내야 하는 것이다. 요즘 젊은 세대는 포기가 너무 빠르다. 조금만 하면 안 된다고 하는데 그건 아니라고 본다. 고생을 넘으면 성공이다. 못 넘으면 거기서 끝이다. 그 길은 넘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투수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좋은 볼을 갖고 있지만 제구가 왔다 갔다 한다. 잘 던지다가도 바로 다음에 갑자기 무너진다. 아직 확실한 자기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연습을 해서 만들어야 한다. 머릿속에 있으면 뭐하나, 몸이 안 따라가는데. 정근우도 어제(24일) 홈런을 쳤을 때는 베스트이지만 그 다음에 다시 무너졌다. 그것을 다시 찾는 게 특타다. 연습을 적게 해서 잘하는 게 베스트이지만 안 되면 연습을 해야 한다. 그 정도 체력이 없으면 프로에서 살아남지 못한다. 체력도 기술하고 똑같은 것이다. ▲ 부상의 이유는 나쁜 폼 때문 젊은 선수들이 자꾸 왔다 갔다 하는 건 자신의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는 사이 몸에 무리가 간다. 포크볼을 던질 때 (릴리스 포인트) 앞에서 던져줘야지, 안으로 당겨버리면 팔꿈치가 나가버린다. 투심이나 커브를 던질 때도 그렇고 선수들이 이걸 알고 하느냐 문제다. 연습량이 많아서가 아니라 방법이 나쁘니까 부상이 오는 것이다. 예전 이대진을 가르칠 때도 (투구시 양 팔 대칭 동작을) 예전 방법으로 잘못 가르쳤다. 그 이후로 두 번 다시 그렇게 가르치지 않는다. LG 이동현도 내가 있을 때에는 포크볼을 던져도 아프지 않았다. 내가 던질 때 포크볼 때문에 아픈 선수는 없다. 내가 나간 뒤 잘못된 폼으로 던지다 팔꿈치가 나갔다. 임창용도 과거 바비 발렌타인 지바 롯데 감독이 보러왔을 때 폼에 문제가 있는 것을 보고서는 스카우트하지 않았다. 투구시 앞다리가 무너져 허리가 굽으니 팔꿈치에 무리가 왔다. 결국 임창용도 팔꿈치 수술을 했다. 권혁도 좋을 때에는 공을 놓는 순간 동작이 좋지만 요즘은 그렇지 않았다. 어떻게 던지고 있었냐면 전부 (팔을 안 쪽으로 해서) 이렇게 던졌다. 김민우도 (팔이 허리 뒤까지 가서 공이 나오는) 안 좋은 폼을 갖고 있었고, 그걸 고치려고 한 것이다. 캠프를 다녀온 시점에는 폼이 아주 좋았다. 10개 던지면 9개가 (원하는 곳에) 들어갔다. 어디가 안 좋아서 열흘 정도 중간에 공을 던지지 못했는데 그 이후 밸런스가 무너졌다. 선수들은 금방 잊어 먹는다. 그걸 훈련으로 잡고 익혀야 한다. 연습을 많이 해야 하는 이유다. ▲ 우리 선수들 기본기가 없다 송광민은 공을 잡아서 송구할 때 모든 동작을 위에서 하는 습관이 있다. 올해 캠프에 오지 못해 연습이 제대로 안 돼 있었고, 봄에 와서야 그나마 고친 것이다. 송구뿐만 아니라 방망이를 칠 때도 (팔꿈치에) 무리가 가는 동작이 있다. 하주석도 캠프에서 매일 아프다고 했다. 타격할 때 허리를 제대로 안 돌리고 오른 어깨가 빨리 나가니까 통증이 온 것이다. 요새는 아프다는 소리를 안 한다. 김태균도 원래 허리가 안 좋았는데 나쁜 동작이 없어졌고, 더 이상 아프다고 하지 않는다. 하주석이 뜬공을 놓친 것도 결국은 기본기 문제다. 요즘 들어와 로사리오가 수비 실수를 하긴 했지만 뜬공을 잡을 때 보면 가슴 앞에서 팔꿈치 쿠션을 이용해서 잡는다. 우리 선수들은 가슴 밖에서 팔로만 잡는다. 우리나라 선수들 기본기가 없다는 것이다. 작년 권용관이 잠실에서 뜬공을 놓친 바람에 캠프 때 뜬공 처리 연습을 많이 했었지만 이어가질 못한다. 그 사이 잊어먹은 것이다. 뜬공 타구는 볼보다 뒤에 위치해서 들어가야 한다. 낙하지점 앞에서 바람이 불면 잡기가 어렵다. 머리가 똑똑한 사람들은 얼마든지 많지만 머리로 의식하기 전에 행동으로 이어져야 한다. 바깥에서는 그저 연습을 많이 시켜서 아픈 줄 아는데 그게 아니다. 투수든 타자든 바르지 못한 동작을 고쳐야 하고, 머릿속으로 의식하기 전에 몸으로 익혀야 한다. 특히 1~2년차에는 무조건 많이 해야 한다. 미국도 메이저리그에 갔을 때 비로소 연습량이 줄어들지 처음에는 많이 한다. 로사리오도 여기 와서 연습을 많이 한 덕을 봤다. 다른 선수들 같았으면 꾀를 부렸을 텐데 로사리오는 성실하게 잘 따라와 줬고, 지금 이 정도 성적을 낼 수 있는 것이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419 no image C.S 루이스에 대한 기억
[레벨:20]인금철
51 2016-09-28
아주 오래 전에 인상 깊게 읽어서 종종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던 얘기인데, 인터넷 기사로 다시 찾게 되어서 올립니다. 어려운 사람, 어려운 인간관계,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 이런 문제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해 영감을 주었던 글입니다. 한 10년 전에 하버드대학 도서관을 방문하여 기웃거리다가 선반 위에 놓인 어느 기독학생단체의 글모음을 읽은 일이 있었다. 특히 첫 페이지에 나오는 글의 제목이 눈길을 끌었는데, “왜 C. S. 루이스는 지금도 유효한가?”(Why Is C. S. Lewis Still Valid?)였다. 아쉽게도 당시 저널과 저자의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저자의 주장은 또렷하게 지금도 내 머릿속에 박혀 있다. 그 당시에도 이미 기독교 지식인들 사이에서 식을 줄 모르는 C. S. 루이스에 대한 열기는 분명했다. 인생과 신앙에 관한 현대의 다양한 문제들에 대한 의문이 들 때마다, 그들은 가장 먼저 어김없이 루이스의 책들로 달려가곤 했다. 왜 아직도 루이스인가? 디지털 매체의 도약을 예측하지도 못했고, 포스트모던이라는 새로운 문명사의 전환을 목격하지도 못한 그를 말이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기독교지식인과 신학자들, 그리고 스타급 목회자들이 끊임없는 경쟁구도 속에서 배출되고 있는데도 말이다. 그는 정규신학을 공부한 적도 없고, 목회자는 더더욱 아니었으며, 심지어 옥스퍼드와 캠브리지의 동료학자들에게는 학문적 소임에 충실하지 못하다는 의심을 받았던 인물이다. 그렇다면 루이스는 그가 속한 시대의 현안들에 대하여 민감하게 관심을 갖고 발 빠르게 대응했을까? 여러 정황을 살펴 보건대, 그것은 더 더욱 아니다. 루이스는 신문을 거의 읽지 않았으며, 당대에 유행하는 문학작품들에도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인생의 문제를 진단하고 성찰하는 그의 지적은 본질적이었다. 시대와 관계없이 그의 인간 이해는 많은 이들에게 공명을 울리고 있다. 어떻게 루이스가 지금도 한국에 이르기까지 으뜸가는 기독교 영감의 원천으로 남아 있을 수 있는가? 특히, 이 문제는 시대를 분별하여 신앙의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고 영혼을 양육해야 할 책임을 지닌 사역자들에게 더 없이 주된 관심사일 것이다. 루이스의 안목은 전도와 양육, 상담, 변증에 이르기까지 풍부한 통찰력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 루이스는 고전에 해박하고 통달했다는 점이다. 중세와 근세의 궁중문학을 전공했던 그는 고대 헬라철학자들의 저서들을 원전으로 읽었으며, 서양의 고대신화에도 해박했다. <나니아 연대기>에 등장하는 풍부한 은유와 상징들이 이를 뒷받침한다. 시대가 급속도로 변함에 따라 변화의 속도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적절한 대답을 줄 수 있을 것 같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의 회의주의자들과 구도자들에게 가장 적실한 변증을 했던 이는 첨단과는 거리를 두고 고전에 몰입했던 루이스였다. 모든 문화에는 공통적인 맹점이 있게 마련이다. 하루가 멀다하고 초고층 건물이 들어서고, 디지털 신기술이 선을 보이지만, 인간이 본질적으로 겪는 존재의 문제는 언제나 비슷하기 때문이다. 한 문화를 깊이 있게 이해하면 다른 문화를 예측하고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자신이 갖추어진다. 물론 현대의 더욱 성숙된 관점에서 루이스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디테일한 불만들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둘째로 루이스는 당대의 대중적 유행에는 둔감했지만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인격적 관계를 소중히 여겼다는 점이다. 루이스는 1963년 11월 22일 벨페스트의 자택에서 소수의 지인들에 둘러싸인 채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공교롭게도, 이 날은 미국의 젊은 에너지를 역동적으로 결집시킨 비디오 형 정치인 J. F. 케네디와 <멋진 신세계>를 통하여 인간문명을 낙관적으로 예견했던 알더스 헉슬리가 생을 마감한 날이기도 하다. 이 두 사람과 비교할 때, 루이스의 서거는 매우 조용하고 차분하게 이루어졌다. 한편으로 이는 그의 인생 스타일을 반영하고 있다. 루이스가 1차 대전 당시 옆에서 전사한 친구의 어머니 무어 여사를 평생 돌봐준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이 무어 여사는 대단히 괴팍스러운 성격이어서 루이스는 그녀에게 자신의 명성과는 어울리지 않는 하대를 받았다고 사람들은 증언한다. 게다가 알콜 중독자였던 형 워렌을 계속해서 부양해주는 일 또한 루이스를 녹초로 만들었다. 그러나 이러한 삶의 버거움 가운데서 루이스는 인간의 지극히 일상적인 슬픔과 기쁨을 경험하고 공유하는 삶을 살았다. 그러한 루이스가 평생 동안 독자들과 편지 왕래하기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음은 인간의 실상을 몸소 체험하며 이해했기 때문이 아닐까. 셋째로 가장 중요한 사실은 루이스가 절대자와의 진지한 만남을 규칙적으로 가졌다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과 홀로 나누는 시간을 즐겼으며, 그러한 깊은 차원의 영성이 인생의 문제들에 대한 루이스의 통찰을 심오하게 안정적으로 끌고 나갔다. 인생의 문제로 씨름의 강도가 더 해갈수록, 그는 일관된 영적 훈련을 고수했다. 회심 이후 그는 자신의 삶을 절대자에게 온전히 드리는 순종의 길을 걸었다. 그가 젊은 시절에 굳어진 무신론을 버리고 절대자 앞에 자신을 해체시키기까지 많은 망설임과 갈등이 있었지만, 그리스도를 인격적 구세주로 받아들인 이후부터 절대자와의 단독적인 만남을 성실하게 지켜왔다. 또한 그는 주변에 갓 그리스도인이 된 이들에게 기도하는 법을 강조해서 가르쳤고, 직접 다른 이들을 위하여 규칙적인 중보기도 생활을 하며, 많은 이들과 기도의 협력을 해왔다고 알려진다. 결국 인생의 문제들에 대한 그의 안목은 그로 하여금 전혀 다른 차원의 각도에서 문제의 본질을 볼 수 있게 하는 우위를 점하게 한 것이다.
418 no image 기억나는 글 [1]
[레벨:20]인금철
46 2016-11-12
학교 다닐 때 읽고 은혜를 많이 받았던 글인데, 베드로전서 메세지를 쓰면서 기억이 나 인터넷 올라와 있는 글을 share 합니다... 포장지 속에 숨겨진 행복 (가이드포스트 99년 7월호) 올해는 여름이 더 일찍 찾아올 것만 같습니다. 여름이 되면 전 신나게 반팔을 차려 입고 교회를 활보하겠지요. 반짝이는 햇살만 봐도 가슴이 설렌답니다. 저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너무 아름답기 때문이죠. 빗소리마저 싱그럽게 느껴지는 걸 보면 참 제가 많이 달라진 것 같습니다. 그땐 정말 힘들었는데……. '하나님께서 널 만드셨어.' 그래도 어릴 땐 그 말만으로 모든게 받아들여지고 즐겁기만 했지요. 하지만 사춘기가 되면서 남과 다른 제 외모가 자꾸 절 서글프게 했던 것 같아요. 하나님께서 이렇게 안 했어도 난 하나님을 사랑했을 텐데. 왜 하필 나한테, 그것도 여자인 나한테 왜 이러셨을까? 여고 시절 눈물로 번져 있던 일기장엔 이런 말들이 가득했어요. 전 어려서 전신에 화상을 입었거든요. 부모님은 부평에서 큰 가게를 하셨습니다. 제가 네 살 때였던 그날도 가게 일로 무척 바쁘셨나 봐요. 아홉 살 밖에 안 된 언니에게 석유를 사 오라고 시켰을 정도로요. 석유통을 들고 나간 언니는 길을 건너다 마주 오는 트럭에 치였습니다. 그날 사람들은 넋이 나간 어머니를 대신해 장사 지낼 음식을 마련하고 있었나 봅니다. 안방과 연결된 푹 꺼진 구식 부엌에선 커다란 솥 가득 국이 펄펄 끓고 있었고, 당시 갓 나온 백 퍼센트 나일론 쫄쫄이 티를 입은 네 살 배기 은경이가 바로 그 국솥으로 빠졌답니다. 나를 안은 채 '제일 큰 병원으로 가 주세요', 하던 고모의 허옇게 뜬 목소리만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아홉 살 짜리 첫딸의 시신이 있는 바로 그 종합병원에 이번엔 둘째 딸인 제가 실려 가 응급실에 누워 있었지요. 이미 죽은 거나 진배없다며 받아주지 않겠다는 걸, 딸 둘을 영안실에 보낼 수는 없다며 사정사정을 해서요. 쫙 달라붙은 나일론이 살점과 함께 타 들어가 다 잘라 내고 나니 혈관과 뼈만 드러날 뿐 제 몸에 남아 있는 살점이 얼마 없었다고 합니다. 특히나 목에는 거의 살이 없었지요. 그럼에도 어린 저의 숨은 질기게도 이어졌습니다. 퇴원 후 붕대를 풀어 보고는 그만 저를 다시 들쳐업고 병원으로 달려가신 어머니, '그래도 살았잖아요.' 의사는 그렇게 말했다더군요. 그래 정말, 난 살았잖아. 그게 중요한 거야. 유치원에서 발표회를 할 때면 제 손을 잡기 싫다며 연필을 낀 채 주먹을 내밀던 친구. 전 그 아이의 손 대신 그애가 내미는 연필을 잡고 춤을 추었지만 그래도 신났습니다. 아홉 살 때 뭉쳐 있는 왼손에서 손가락을 분리하는 수술을 시작으로 스무 살이 넘어서까지 계속되었던 그 지독한 수술 그리고 수술들. 남들처럼 짧은 소매도 못 입고 긴팔 블라우스로 학교를 다녀야 했지만, 턱에서 어깨까지가 뭉쳐 있어 의식적으로 똑바로 하지 않는 한 항상 옆으로 고개가 숙여졌지만, 그럼에도 여름이면 비키니를 입고 피부 이식으로 시커먼 몸을 과감히 드러낼 만큼 중학교 때까지도 전 철이 없었어요. 아니 철이 없기도 했지만 전 제가 화상 입은 것이 결코 창피하지도 부끄럽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절 만드셨으니까요. 초등학교 4학년 때 주일학교 선생님이 제게 분명 그렇게 말씀하셨거든요. 그래 하나님께서 날 이렇게 만드신 거야. 엄마가 실수로, 아니면 우리집에 사고가 나서 다친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가 이렇게 다치는 것이 필요해서 이렇게 만드신 거야. 그때 전 하나님이 정말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뭔가 특별한 계시를 주시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나같이 이렇게 되거나 무슨 일이 생기거나 하는 거라고요. 하나님께서 저를 특별히 사랑하시기에 보통 사람들과 달리 쓰시려고 이렇게 만드셨다고 굳게 믿었던 거죠. 하지만 고등학생이 되고 나니 친구들과 자꾸 비교가 되는 걸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친구들이 제 외모 때문에 멀리하는 것 같을 때면 밤마다 일기장은 눈물로 범벅이 되었지요. 하지만 정말 슬픔은 그게 아니라는 것을 곧 알게 되었어요. 고2 여름방학, 보충 수업마저 쉬는 진짜 방학이 되어 신나게 돌아와 보니 집안이 썰렁하더군요. 어머니가 또 병원에 입원하신 거예요. 언니와 제가 그리된 후 항상 시름시름 앓으시던 어머니, 그 몸으로 돈 벌어야 한다며 그래서 은경이 수술시켜야 한다며 억척스럽게 가게 일을 하시던 어머니. 전 그날 밤 방을 치워놓으라는 전화를 받아야 했습니다. 어머니의 마지막 말씀은 저한테 미안하다고 말해 달라는 것이었답니다. 그리고 장롱 이불 사이에 모아 놓은 돈이 있으니 그것을 저한테 주라는 말씀. 그 말씀만 하시고 떠나셨다고 했습니다. 임종 예배를 드리는 목사님이 너무 너무 싫었어요. 그날 제가 그토록 기도했는데, 하나님이 우리집 간증시키려고 계획하신 기적의 과정인 줄만 알았는데. 왜 엄마가 죽어야 하는 건지……. '하나님이 계시면 어떻게 저한테 그럴 수가 있나요. 저한테!' '화상까진 받아들이겠지만 어머니마저…' 하나님이 계시다면 도저히 그럴 수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난 이제 하나님 필요없다고. 내 힘으로 살겠다며 집안 일에 동생 돌보며 가게 일까지 하면서 억척스런 고3 생활을 시작했지요. 언니의 죽음과 저의 사고를 계기로 하나님께 돌아왔던 아버지 역시 술만 드시고 교회를 멀리 하셨어요. 그러다 새 엄마가 들어오셨습니다. 보다 못한 목사님의 중매로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일 년도 안되어서요. 새 엄마가 들어오시고 맞이한 어머니의 일주기 추도 예배. 그날 전 서랍에 넣어 둔 어머니의 사진을 왠지 꺼내 놓을 수가 없었어요. 그나마 상복은 꼭 입고 싶었는데 새 어머니가 다 없애 버리셨더군요. 그게 그때는 어찌나 서럽던지. 어머니가 즐겨 부르시던 찬송을 목사님께 적어 드렸지만 우리가족 중 누구도 도저히 끝까지 부를 수가 없었지요. 새 엄마는 저희 외갓집에도 참 잘하셨어요. 외할머니께 사골도 고아 드리고 외가댁의 딸이 되어 버리셨지요. 사람들이 모두 하나님이 보내 준 새 엄마라고들 했습니다. 하지만 전 그렇지 못했어요. 횡단보도를 건너며 제 손을 꼬옥 잡던 새 어머니, 하지만 전 기어코 그 손을 빼 버렸습니다. 고생만 하신 어머니, 그 어머니가 고생해 닦아 놓은 행복을 새 어머니가 다 누리는 것만 같고, 반찬 하나를 먹어도 옛날 어머니가 해주시던 그 맛이 생각나고…… 함께 목욕도 가고 같이 잠도 자보는 등 겉으론 최선을 다하는 딸인 척했지만 제 속마음은 얼음장 같았어요. 이유 없는 미움. 그렇게 착한 새 엄마가 너무 너무 미워 견딜 수 없는 제 자신이 정말 견딜 수가 없었어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론 하나님은 없다고, 있다 해도 난 하나님 없이 살겠다고 다짐했건만 막상 주체할 수 없는 미움에 시달리다보니 하나님 외엔 하소연할 데가 없더라고요. '하나님, 원수는 사랑할 수 있지만 도저히 새 엄마를 사랑할 수가 없어요. 이런 절 좀 도와주세요. 제 감정을 제발 고쳐 주세요' 매일 매일 그런 넋두리를 하면서 전 다시 하나님께로 다가갔어요. 그리고 그렇게 울면서 기도할 때마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제 마음이 열리는 거예요. '새' 엄마에게 '지금' 어머니로 그리고 서서히 '어머니'로 받아들이게 되었지요. 하지만 그때까지도 전 제 가슴엔 한이 가득하다고 생각했어요. 화상 때문에 그리고 돌아가신 어머니 때문에요. 하지만 하나님이 주신 고난 속에 감춰진 게 너무나 엄청나서 그 한을 다 녹이고도 넘치더군요. 돌아가신 어머니는 항상 저에게 약사가 되라고 하셨어요. 평생 혼자서도 살 수 있는 일이라고요. 하지만 전 약대 근처에도 못 가보고 전기대 입시에 떨어졌지요. 그리곤 터덜터덜 사촌 오빠가 아르바이트하는 곳에 갔어요. 그런데 그곳에서 전 제 인생이 가야 할 곳을 알게 되었습니다. 전도사를 하는 오빠 친구분이 와 있었는데 교회에서 아이들과 지내는 얘기를 잠깐 하더군요. 순간 저를 지탱해 왔던 그 말, '하나님께서 널 만드셨어' 라고 사시던 주일학교 선생님이 생각났어요. 어려서 주님을 영접했기에 아무리 힘들었어도 제가 잘못되지 않을 수 있었다는 그 사실. 그날 바로 신학교에 원서를 넣었어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날 만드셨음을 하루하루 가슴에 새기는 순간들이 지금껏 계속되고 있습니다. 대학 2학년 때부터 시작된 전도사 생활. 외모에 열등감을 느끼던 아이들이 제 팔을 만지며 더 중요한 무언가를 생각하죠. 엄마가 없는 아이들, 아빠 없는 아이들의 상처도 어루만져 줄 수 있었어요. 제가 만약 화상이나 새 엄마를 받아들이는 어려움 없이 깎아 놓은 듯 예쁘게 자랐다면 결코 이렇게 사역할 수 없었을 거예요. 남들에게 못할 마음 속 아픔을 털어놓는 분들을 대할 때마다, 그분들의 진심 어린 사랑을 느낄 때마다, 절 이렇게 만드신 하나님께 너무너무 감사드려요. 하나님께서 제게 다시 한 번 예쁜 모습을 줄까. 예쁜 마음을 줄까 라고 하신다면 예쁜 모습보다는 지금처럼 아픔을 함께 할 수 있는 예쁜 마음을 갖고 싶다고 할 거예요. 지금 저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근데 포장지가 조금 험상궂어서 처음에는 저도 힘들었지만요. 게다가 어렸을 땐 쭈글쭈글하던 얼굴이 자라면서 피부가 늘어났어요. 그리고 계속된 수술의 결과 기적처럼 그리고 정말 하나님의 기적으로 저보고 예쁘다고 하는 분들도 계셔요. 고등학교 때 받은 수술로 20대가 되면서 목선도 생겼고 입도 제자리를 찾았어요. 얼굴마저 험상궂으면 어린이 사역이 힘들까 봐 하나님께서 저를 예쁜 얼굴로 다듬어 주시는 것 같아요. 전 돌아가신 어머니의 꿈도 이뤄 드렸답니다. 하나님께서 절 약사로 만들고 계시니까요. 신약, 구약을 파는 약사. 내복약이 아닌 사랑의 약과 위로의 약을 전하는 '상처 입은 치유자'의 길로 주님께서는 절 인도해 주시고 계십니다. 얼마 전 가스 폭발로 전신에 화상을 입고 병실에 누워 있는 중학생에게 제가 그랬죠. "넌 좋겠다. 병원에서 받아 주었으니, 난 살 수가 없다고 병원에서 받기도 거부했는데. 이렇게 멀쩡하게 잘만 살고 잇잖니." 그 말을 하는 순간, 제가 화상 입은 것의 그 떳떳함이란! 그럼요. 그 어떤 상황도 더 좋은 것을 주시는 과정이랍니다. 포장지가 어떤 것이라 하더라도 그 내용물을 볼 때까지 결코 실망하지 마세요. 하나님은 포장지와는 상관없이 가장 멋진 선물을 우리를 위해 마련해 두셨으니까요. 가장 멋진 선물을요. 희오비
417 no image 수시면접 피싱, 어떠셨나요? [1]
[레벨:20]인금철
48 2016-11-25
416 no image let it be [3]
[레벨:20]인금철
108 2016-12-12
"And Mary said, "Behold, I am the servant of the Lord; let it be to me according to your word."(Luke 1:38) 아주 오래 전에 뜻도 잘 모르고 흥얼거리던 노래 비틀즈의 'let it be'라는 곡이 있었는데요. 전에는 팝송 가사이다보니 '내버려 둬' 이런 뜻이거니 생각했었는데, 이번 말씀을 보면서 다시 찾아보니, 그런 뜻은 아니었네요. 물론 이 곡의 가사가 성경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왔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지만, 아무튼 이번 성탄 말씀을 묵상하고 본 바로는, 갈릴리 나사렛 출신 처녀 마리아가 비틀즈와 같은 대중가수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칠 정도로 만세에 복이 있는 여인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당장 고통과 아픔이 따르지만, 하나님 앞에서 순종하기로 결단한 한 마디의 말이 후세에 얼마나 영향력 있는 지헤의 말로 남게 되는가를 생각해 봅니다. Let it be When I find myself in times of trouble Mother Mary comes to me Speaking words of wisdom, let it be. And in my hour of darkness She is standing right in front of me Speaking words of wisdom,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Whisper words of wisdom, let it be. And when the broken hearted people Living in the world agree, There will be an answer, let it be. For though they may be parted there is Still a chance that they will see There will be an answer,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Yeah There will be an answer, let it be. And when the night is cloudy, There is still a light that shines on me, Shine on until tomorrow, let it be. I wake up to the sound of music Mother Mary comes to me Speaking words of wisdom,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There will be an answer,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Whisper words of wisdom, let it 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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